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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날
슥 14:1-7
1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2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3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4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5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것들이 떠날 것이라
7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슥 14:1-7 / [최후의 날] 보라, 여호와께서 날을 잡아 놓으셨다. 예루살렘아, 그날이 오면 네 원수들이 네게서 탈취한 전리품들을 네가 보는 앞에서 나누어 가질 것이다. 2) 그때에는 여호와께서 세계 만민들을 모아다가 예루살렘을 치실 것이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집들은 약탈을 당하고, 여인들은 겁탈을 당하며 주민의 절반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남은 사람들마저 이 도성에서 말살되지는 않을 것이다. 3) 그 같은 순간에 주께서 몸소 나타나 세계 만민들과 싸우셔서, 이제까지 자기 백성을 위하여 싸우신 것처럼 모든 원수들을 죽이실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날에는 주님의 두 발이 예루살렘을 동쪽에서 내려다 보는 감람산 위를 밟고 서실 것이며, 그 순간에 감람산은 한가운데가 갈라져 지극히 넓은 골짜기가 동서로 뻗을 것이다. 그 산의 절반은 북쪽으로, 다른 절반은 남쪽으로 물러날 것이다. 5) 남쪽으로 물러나던 산은 서쪽 끝으로 힌놈 골짜기를 스치고 지나감으로써 힌놈 골짜기가 막힐 것이다. 그때에 너희는 마치 유다 왕 웃시야 시대에 지진을 피하던 것처럼 도망할 것이다. 바로 이때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것이다. 6) 그때에는 더위나 추위도 없고 7) 낮과 밤의 변화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언제나 밝은 낮이 계속되고, 다시는 밤이 오지 않을 것이다. 그때에는 저녁때가 되더라도 밝을 것인데 그날의 길이는 여호와께서만 아신다!
본문은 마지막 날에 있을 큰 환난에서 믿음을 지킨 성도에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완성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이 원수들에게 침략을 당하다(1-2) 스가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내기 위하여 작정하신 날을 말합니다. 여호와의 날은 심판과 구원의 양면성을 갖고 있는데 유대 민족에게 임할 환난과 구원의 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하여 그날에 이방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것이고, 가옥이 약탈당하고, 부녀가 욕을 당하며,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하고, 적들이 그들의 재물을 그들이 보는 데서 전리품으로 나누어 가질 것입니다. 이는 예루살렘이 적에게 함락당하고 재물을 빼앗기고 포로가 될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때로 하나님의 성읍이나 하나님 백성이라도 환난을 당하고 수치를 겪을 수 있습니다. 환난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날지라도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싸우시다(3-7) 예루살렘에 재난이 발생하는 그때 하나님께서 친히 나가서 이방 나라를 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동쪽 감람 산에 서실 때 산이 갈라져 절반은 남으로, 절반은 북으로 나누어지는 초자연적 현상이 발생할 것입니다. 그때 생긴 골짜기가 아셀까지 미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 왕 웃시야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때 일어났던 지진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암 1:1). 하지만 스가랴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때는 해와 달과 별도 빛을 잃고 떠날 것입니다(욜 3:15; 마 24:29). 밤과 낮의 기준이 되는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게 되므로 밤낮의 구별도 없어질 것이지만 그 때에는"어두워 갈 때 빛이 있으리라"합니다. 여기서 어두워 갈 때는 극심한 환난의 때를 말하고, 빛은 하나님의 구원을 말합니다.
적용: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까지 그대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무시하지 말고 마음에 두고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 묵상하도록 주신 말씀은 무엇인지 서로 나누어 봅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모든 어려움이 사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날이 될 때까지 우리는 고난과 역경을 견디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되어야만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대신 싸우시는 하나님, 대적하는 자들에게 임할 심판과는 다른 마지막이 우리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고난과 환난을 당할 때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최후 승리를 기대해야 합니다.
< 설 교 >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
스가랴 14:6~11 / 피영민 목사
6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7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9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10 온 땅이 아라바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11 사람이 그 가운데 거하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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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스가랴 14장은 내용이 어렵고 난해하며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말씀을 증거하고 있으며,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교회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가랴 14장 1절에 보면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슥 14:1)고 했습니다. 또한 스가랴 14장 7절을 보면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슥 14:7)고 했습니다. 구약에 예언된 여호와의 날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영어로 정관사 ‘the’를 붙여 “the day of the Lord”, 여호와의 날로 번역되는 것이 있습니다. 정관사 ‘the’가 붙게 되면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의 날 혹은 심판의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가랴 14장에서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날은 “a day of the Lord”로써 여호와의 한 날입니다. 정관사 ‘the’ 대신 부정관사 ‘a’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로 번역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심판의 날이나 재림의 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어떤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슥 14:7). 이것이 달력상으로 24시간이라고 한다면 “낮이 지나고 밤이 지날 것이다”라고 되어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니라는 말씀은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달력상으로 한 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스가랴 12~13장에 계속 등장하고 있는 “그날에는”과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그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의 날,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신약시대, 메시아시대가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라는 것은 신약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신약의 교회가 성장하고 있는 날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본문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사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스가랴서 14장 7절 후반에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고 했습니다. 이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 세상은 영적으로 어두운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백여년 동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끝으로 사백년 동안 하나님이 단 한 명의 선지자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두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때를 신구약 중간시대라고 부릅니다. 또한 이방인들도 로마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도 그들의 종교에 완전히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신비종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만들어낸 철학종교, 갖가지 신화로 이루어진 신화종교까지 이방인들은 세 가지 종교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로마 사람들이나 그리스 사람들이나 다 그들의 종교에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몇 백 년 동안 그들의 종교를 믿었지만 모두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영적으로 공백이 생긴 흑암의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방인들도 어둡고 유대인도 어두운 시대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빛도 없고 모든 광명한 자들이 떠난 시대에 예수님께서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으로 오신 시대는 신약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은 신약시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Ⅰ. 교회는 세상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누르고 최고의 종교, 진리의 종교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스가랴 14장은 신약시대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교회에 관해 세 가지 신비한 방식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는 세상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누르고 최고의 종교, 참된 진리의 종교로 우뚝 서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온 땅이 아라바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미칠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슥 14:10). 이 말씀은 예루살렘이 지리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가운데로 우뚝 솟게 되고 예루살렘 주변 땅은 평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원래 예루살렘 지리는 예루살렘 주변이 산이고 예루살렘이 낮습니다. 시온산이 산 중에서 제일 낮은 산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주변 산이 다 낮아지고 예루살렘이 가운데 우뚝 솟아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라바라는 것은 평지를 말합니다. 온 땅이 평지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까지 평지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편 림몬은 예루살렘을 제외한 나머지 땅들을 통칭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주변 땅들은 다 낮아져서 평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그 자리에서 높이 들린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서쪽에는 베냐민 문이 있고 동쪽에는 첫문 자리가 있고 성 모퉁이 문은 북서쪽에 있고 하나넬 망대는 북쪽에 있고 남쪽에는 왕의 포도주 짜는 곳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동서남북으로 올라와서 높은 산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의 지리가 변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동일한 예언을 했습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사 2:2). 여호와의 전인 시온산이 말일이 되면 우뚝 솟을 것이라고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들이 높은 산인 것처럼 뽐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자기가 높은 산인 것처럼 뽐내고 있습니다. 다 높은 산인 것처럼 자랑을 하지만 하나님이 다 낮춰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다 낮춰버리고 오직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복음 진리만이 최고의 종교, 참 진리의 종교로 우뚝 서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스가랴 14장 11절에 보면 예루살렘에는 사람들이 몰려와서 거하고 또 예루살렘에는 저주가 없고 어떤 원수의 공격에도 끄떡없는 안전한 곳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고 교회는 우뚝 솟은 진리의 센터가 되고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더 이상 저주를 받지 않게 되고 악한 사탄이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안전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시는 저주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신약의 언어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3~35). 하나님의 택함 받고 예수 믿는 우리는 저주도 없고, 송사할 자도 없고, 정죄할 자도 없으며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도 없게 됩니다. 교회는 일류역사 가운데 진리의 센터, 구원의 센터, 하나님 통치의 센터가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슥 14:9). 여호와 하나님은 홀로 하나이시며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고 구원을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적인 존재는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한 분이고 필적할만한 다른 존재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이것을 신약의 언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 4:12).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은 나쁘게 사는 것보다 좋습니다. 하지만 구원은 받지 못합니다. 죄 용서를 받고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믿는 길밖에 없습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10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진리의 센터로 인류의 역사 가운데 우뚝 설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고 이것은 지난 이천년 동안 충실하게 실현되어 왔습니다.
Ⅱ.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둘째, 스가랴가 예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복의 근원이라는 말입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슥 14:8). 생수는 축복의 상징이고 생수가 흐르는 땅은 비옥한 땅이고 열매가 풍성하고 농사가 잘 되는 축복된 땅입니다. 생수는 축복의 원천입니다. 생수의 근원이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가 축복의 근원, 생수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도 동일한 예언을 했습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말미암아 꺾여 동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우편에서 스미어 나오더라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으로 나아가며 일천 척을 척량한 후에 나로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고 나로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다시 일천 척을 척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창일하여 헤엄할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겔 42:1~5). 요엘 선지자도 성전에서 샘이 흘러나온다고 했습니다.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유다 모든 시내가 물을 흘릴 것이며 여호와의 전에서 샘이 흘러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 대리라”(욜 3:18). 스가랴는 예루살렘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했고 에스겔과 요엘은 성전이 생수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신약시대에 교회에 대한 예표적 표현인 것입니다.
이 생수는 절반은 동해로 흐르고 절반은 서해로 흐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축복을 주시되 팔레스타인 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동서사방 온 세계에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생수는 동해도 흐르고 서해도 흐를 뿐만이 아니라 여름에도 흐르고 겨울에도 끊임없이 흐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세상을 축복하시는 방식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교회는 축복의 소유자고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의 근원이고 성령의 부으심은 축복의 내용인 것입니다. 이 축복의 생수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도바울을 통해 유럽으로 건너갔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아시아로 흘러온 것이 지난 이천년 교회역사입니다. 아시아에서 생수를 받은 우리는 이 생수를 다시 전 세계로 흘려보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교회는 복의 근원입니다. 교회는 생수의 근원입니다. 이 세상에 인간이 만든 어떤 기관이 있어도 생수의 근원이 되는 기관은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은 교회로부터 흘러나오며 교회가 이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이 생수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도와 선교를 통해서 축복을 나눠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복 주신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받은 복을 가둬두고 있으면 썩지 않겠습니까? 복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동해로 서해로 흘려보내야 합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세계선교의 중심센터가 되기를 바랍니다.
Ⅲ. 하나님은 핍박과 환란 속에 있는 교회를 끝까지 보호하신다
셋째,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에서 핍박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보호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슥 14:1~2). 이는 예루살렘을 열방이 침공해서 약탈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읍 백성들을 죽이고 포로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슥 14:4).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발이 예루살렘 동편 감람산에 서니 감람산이 쫙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절반이 북쪽으로 옮겨가고 산 절반이 남쪽으로 옮겨가서 예루살렘의 남은 백성들이 감람산 갈라진 길로 아셀이라는 곳까지 피신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아셀이라는 말은 지리적인 위치가 아닙니다. 문자적으로 ‘고요함, 평안함, 안전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예루살렘을 열방이 핍박해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피할 길을 내사 안전한 곳으로 이르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열국은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교회를 공격해서 승리하는 것 같지만 도리어 하나님이 승리하시고 남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인하여 피하게 되고 살아나게 되고 도리어 승리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슥 14:16). 예루살렘을 치러왔던 백성가운데 남은 자가 도리어 개종을 해서 여호와를 경배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열국은 교회를 핍박했는데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로 죽지 않고 살아남고 도리어 치던 사람들이 개종을 해서 여호와를 경배하게 되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핍박을 당해왔습니다. 핍박당하는 소수자요 약자였습니다. 교회가 정치적으로 강자가 된 적은 없습니다. 교회가 정치적으로 강자가 된 것이 중세인데 그것은 썩고 부패한 교회이기 때문이지 참된 교회는 언제나 소수이고 약자였습니다. 약한 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 가운데 평안을 누리고 열국을 향해서 복음을 증거함으로 도리어 핍박하던 열국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승리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핍박하던 열국은 패배자가 되고 핍박당하던 교회는 도리어 승리자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역설적인 진리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하나님은 교회를 지키시고 피할 길 내시고 살게 하시며 도리어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질그릇 같이 약한 성도이지만 복음의 보배를 갖고 있으므로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보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단들과 정치적인 파워를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해치려합니다. 이것이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입니다. 짐승은 정치적인 파워를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고, 영적인 거짓말인 이단사설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는 자 입니다. 짐승들이 교회를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하나님의 발이 서시면 감람산도 갈라지고 홍해도 갈라지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스가랴 14장 전반부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교회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딤전 3:15). 하나님은 교회와 복음진리를 높은 산이 되도록 높여주셨고 교회는 진리의 중심이 될 뿐만 아니라 생수를 흘러내는 축복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하여 넘어질 것 같고 곧 망할 것 같아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승리자의 반열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모르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입니다. 교회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진리도 없고 축복도 없으며 승리자가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업신여기는 사람은 패배자가 될 뿐입니다. 현세도 패배하고 내세는 영원히 패배합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치고 약탈하는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있을 뿐입니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슥 14:12).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핍박하는 자는 결국 살도 썩고 눈도 썩고 혀도 썩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핍박하고 욕하고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스가랴 14장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생수의 근원이고 축복의 근원의 역할을 해야 하며 우리가 생수를 흘려보내는 참된 교회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아무리 답답한 일을 당하고 세상에서 소수자로 핍박을 받을지라도 결코 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축복자고 우리가 승리자입니다. 우리 강남중앙침례교회가 생수를 세계로 흘려보내는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겨울이 주는 영적 은혜를 체험하자
슥 14:5-8, 마 24:16-21 / 이성희 목사
오늘은 대강절 첫째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계절이기를 바랍니다. 교회력으로 대강절은 겨울의 시작을 알리기도 합니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성탄을 생각하게 됩니다. 겨울은 추운 계절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계절입니다. 사람은 풍족할 때보다 어려울 때에 은총을 사모합니다. 추울 때에 인간의 사고와 사려가 깊어집니다. 겨울에는 추워야 하는데 아직 춥지 않아 염려가 됩니다. 평균으로는 11월 22일에 첫 눈이 왔다는데 아직 비만 내립니다. 빨리 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직은 춥지 않은 겨울이지만 추운 겨울을 잘 준비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히브라어로 겨울은 ‘호렙’입니다. 이 말은 ‘범람하다’, ‘넘쳐 흐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겨울은 ‘헤이몬’입니다. 이 말은 ‘비오는 계절’, ‘나쁜 날씨’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똑같이 겨울이란 말은 좋지 못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겨울이란 24절기에 의하면 입동부터 입춘까지를 말합니다. 천문학적으로는 동지를 지나서 춘분까지를 겨울이라고 합니다. 기상학으로는 12월, 1월, 2월을 겨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남반구에서는 6월, 7월, 8월을 겨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겨울은 가장 추울 때를 의미합니다. 가을도 겨울인 사람이 있고, 겨울도 여름인 사람이 있습니다. 추운 계절은 개인이 느낌에 따라 다릅니다. 겨울은 움츠린 계절이며 죽은 계절입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가장 성숙해집니다. 추위가 주는 은혜가 있습니다. 겨울의 삭풍은 살을 에는 듯한 차가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찬 북풍을 많이 맞은 나무를 가지고 악기를 만들면 가장 좋은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눈물 젖은 빵이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은 오히려 유익한 계절입니다.
따뜻한 계절만 있는 나라를 보세요. 얼핏 보면 재미 있을 것 같지만 재미 없습니다. 사람이 변화가 없으면 지루하고, 게을러지고, 도전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삶의 발전을 못합니다. 추운 겨울이 있으면 정신이 바짝 들고 도전을 받고 삶의 향상이 있게 됩니다. 겨울은 준비해야 합니다. 겨울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준비하면 겨울은 풍성합니다. 준비한 사람에게 겨울은 유익합니다. 겨울을 준비하지 않으면 겨울은 죽음입니다. 개미와 배짱이의 우화에서 나타났듯이 준비해야 겨울이 즐겁습니다. 준비한 사람에게 겨울은 즐거운 계절입니다. 디모데후서 4:21에는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고 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을 바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요즘은 월동준비도 예전같지 않습니다. 이전보다 준비 내용은 적어졌습니다. 옛날에는 연탄도 준비해야 하고, 김장도 해야 하고, 배추 무우도 땅 속에 묻어야 하고, 문에 문풍지를 붙여야 하고, 창문을 비닐로 막기도 하고, 내복을 꺼내 준비하고, 두꺼운 솜이불을 준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준비가 우리의 영적 생활에도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마지막이 언제라고 생각합니까? 겨울이 주는 영적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겨울 준비도 영적으로 해야 합니다. 요즘은 김장도 잘 안하지만 김장은 안해도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겨울을 잘 준비하여 풍성한 겨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인생의 마지막이 주는 은혜와 경고를 체험해야 합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봄은 뿌리는 계절입니다. 여름은 자라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거두는 계절입니다. 겨울은 쉬는 계절입니다. 겨울은 막연히 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새 계절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동물들은 활동이 둔해지고, 지방을 많이 흡수저장하고, 동면을 취합니다. 식물은 낙엽이 떨어지고 나뭇잎의 엽록소가 사라집니다. 엽록소 대신 안토시아닌 계통의 색소가 많아지므로 붉은 색을 띠고, 크산토필 계통의 색소가 많아지므로 노란색이 됩니다. 잎이 떨어지므로 영양분이 뿌리나 줄기에 저장됩니다. 나무가 얼지 않게 물이 가지 끝까지 공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시 봄이 되면 물이 오릅니다. 성경도 겨울이 쉼의 계절인 것을 말합니다. 아가 3:11에는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라고 합니다. 솔로몬도 분위기에 약했던가 봅니다. 겨울의 긴잠을 깨어나는 솔로몬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런 인생의 마지막, 쉼의 계절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준비를 잘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인생은 쏜 살같다고 합니다. 미트로프의 ‘백미러에 보이는 물체’란 책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인생이 고속도로라면 영혼은 자동차이다. 백미러에 보이는 물체는 실제보다 멀어 보일 수 있다”. 인생은 고속도로입니다. 완행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 뒤에 있는 것들은 멀어보이지만 훨씬 우리의 생에서 가까운 것들입니다. 우리의 죽음도 인생도 가까운데 있는 우리의 실제입니다. 세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삶은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다가 퇴장하는 시시한 배우입니다. 어떤 분이 인생을 계산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삶을 마칠 때까지 정지 신호등 앞에서 기다리는데 6개월을, 광고 우편물을 열어보는데 8개월, 잃어버린 물건을 찾느라 이곳저것을 뒤적이는데 1년 반을 그리고 갖가지 이유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5년을 허비합니다. 그러고 나니 이미 황혼입니다.
창세기 5장에는 10고조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 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900세 이상 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장을 요약하면 “낳고 낳았으며 죽었더라”입니다. 900년을 살아도 이게 인생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옛날 중국의 한 현인은 우리의 삶을 다음의 세 가지 낱말로 요약했습니다. 서두름(hurry), 걱정(worry), 묻힘(bury)입니다. 사람들은 서둘러 무엇인가 이루려고 바쁘게 삽니다. 그런데 인생은 걱정 투성이입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는 다 묻히고 맙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갈라디아서 4:4에는 “때가 차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꽉찼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뿐만 아니라 ‘플레루’(pleroo)에 관해서도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것이 완전히 완성되거나 끝이 났음을 가리킵니다. 카이로스는 어떠한 과업이나 열매를 결실하기 위한 기회를 가리키는 반면에 플레루는 그것이 성취됨을 의미합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이 셋을 다 경험합니다. 그리고 플레루는 우리의 죽음입니다. 가장 중요하고 잘 준비해야 할 시간이 플레루입니다. 일전에 텔레비전 뉴스에 기가 막힌 한 얘기가 보도되었습니다. 부모의 땅을 물려받은 아들이 부모를 봉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물려받은 땅을 되돌려주게 법원이 결정하였다는 것입니다. 84세된 아버지는 ‘부모 봉양 약속을 어겼으므로 증여계약 역시 무효’라며 아들을 고소하였습니다. 65세 된 큰아들을 상대로 낸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청구소송에서 아버지의 손을 들어주고 원고승소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아버지와 중풍에 쓰러진 어머니를 자신의 집에 모시기로 하였지만 땅을 넘겨받자말자 어머니를 노인전문병원에 보내고 치료비도 제대로 내지 않은 것은 의무불이행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란 분이 65세였습니다. 자신도 손자를 봤을 만한 나이이고, 잠시 후에 자신도 아버지같은 처지가 될 텐데 어찌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지 못한 소치입니다. 이 짧은 뉴스는 우리 모두에게 큰 깨달음을 줍니다. 어느 부부 세미나에서 “만약 나에게 3일만이 주어진다면?”하고 편지를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모든 참석한 부부들이 한결같이 “여보, 미안해요. 당신에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정말 잘 하는 남편, 아내가 될께요”, “아들아, 딸아, 사랑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불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산다면 가정도, 사회도, 세계도 평화만 깃들게 될 것입니다. “남편을 대할 때는 항상 마지막이라는 태도로 섬겨라”. 미우라 아야꼬의 말입니다. 남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마지막의 태도가 우리를 경건하고, 진실하게 만듭니다.
둘째, 환난의 날이 주는 은혜와 경고를 체험해야 합니다.
지중해 연안국가들인 신약시대의 나라들은 그들의 삶과 직결된 바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중해는 그들의 삶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 지중해가 겨울에는 풍랑이 일고 얌전하지 못한 바다로 변해버립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바울이 탄 배가 미항에서 겨울을 나기가 불편하여 뵈닉스로 가려고 합니다. 이 배는 항해도중 파선을 당합니다. 하물과 배는 다 바다에 빠졌지만 겨우 생명만 건집니다. 겨울의 항해는 위태로운 일입니다. 겨울은 환난의 계절입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월동하기 위하여 준비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언덕길에는 모래함과 염화칼슘을 준비합니다. 환난이 많은 계절입니다. 요즘은 여름이 환난이 많은 계절인 것 같습니다. 게릴라성 호우가 많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8:22에는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환난은 끊이지 않습니다. 풍성한 여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겨울도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이 환난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자세가 지혜자의 자세입니다. 1812년 가을에 나폴레옹은 모스크바에서 겨울을 편안하게 지내기 위하여 12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그 곳에 진주했습니다. 첫눈이 10월 30일에 내렸는데 예년에 비해 3주나 일찍 내린 것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실망에 차 곧 퇴각을 서둘러 폴란드에 있는 여러 우호적인 도시에 겨울 진영을 설치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것은 1천 마일이 넘는 황량하고 쓸쓸한 지역을 횡단하는 행군이었습니다. 1주일 후 그 거대한 군대는 완전히 모스크바를 벗어났습니다. 그들의 적들은 경계가 허술한 곳마다 그들을 기습했습니다. 명령과 훈련은 망각되었고 계급은 무너졌으며 모든 사람들은 각자의 생존을 위하여 다투었습니다. 죽은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이 발에 밟혔고, 수백필의 말들이 식용으로 살해되었습니다. 정복의 꿈은 모두 다 사라졌습니다. 나폴레옹은 겨울의 냉정함을 뼈저리도록 느끼며 또 한 차례의 패전을 기록하였습니다. 겨울은 냉엄한 계절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3:18에는 인류의 종말과 환난이 “이 일이 겨울에 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도 부탁하십니다. 환난의 때가 겨울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최근에 리더십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옵니다. 리더십이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가운데 ‘섀클턴의 서바이벌 리더십’ 혹은 ‘인듀어런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영국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Shackleton)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문센과 스콧이 남극점을 정복한 뒤인 1914년에 탐험 대원 27명을 데리고 남극대륙 횡단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는 남극대륙 정복에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가 남극해에 진입했을 때 배는 파괴되었고, 섭씨 영하 80도의 강추위와 굶주림의 죽음과 싸워야 했습니다. 새클턴과 27명의 대원들은 2년 뒤 얼음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전원이 무사히 생환하였습니다. 그들이 무사히 귀환한 것은 무려 2000킬러미터를 헤맨 다음이었습니다. 그의 리더십이 돗보이는 것은 겨울을 이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은 죽음같은 환난이지만 그들은 똘똘 뭉쳐 승리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환난을 이기는 준비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셋째, 종말이 주는 은혜와 경고를 체험해야 합니다.
인류의 겨울인 종말이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6:3에는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시대의 표적을 분별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3절입니다.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아오리이까”. 예수님은 적 그리스도가 나타나며, 난리와 소문이 있겠고, 민족과 나라가 대적하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겠고, 불법이 성하겠고,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는 바울이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하면서 말세의 징조를 말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않고, 거룩하지 않고,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고,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고,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며,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때가 종말이라고 합니다. 이런 때가 인류의 겨울이라고 경고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와 흡사하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종말에 삽니다. 인류의 겨울입니다.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때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우리는 모두 죽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홀로 죽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우리와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개인의 종말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류의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은 우리 모두가 맞을 것이지만 결국 함께가 아니라 나홀로 맞을 것입니다. 스가랴 14:6-7에는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고 합니다. 어두워지면 빛이 더욱 빛납니다. 어두움은 은혜의 시간입니다. 인류의 종말은 오히려 은혜의 기간입니다. 이 시간을 잘 준비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결 론
히브리어의 산성이란 단어는 ‘미쓰가브’(misgab)입니다. 이 단어는 높다, 안전하다는 뜻인 ‘싸가브’(sagab)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가시면 ‘마사다’(masada)라는 유적지에 가 보실 것입니다. 높은 산성같은 곳입니다. 이 곳에서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유대인을 함락하려 했지만 유대인들은 최후까지 항거했습니다. 마침내 올라가보니 모든 유대인들이 전부 죽어 있었습니다. 이곳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는 “그 때를 기억하라”는 교훈과 함께 학생들에게는 민족적 유적지로 답사하는 곳입니다. 이 마사다도 ‘미쓰가브’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마사다는 환난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평화로운 때 계획했고, 안정된 시기에 축성하였습니다. 탈무드에는 “겨울에 땔감을 사는데 쓰지 않으면 안될 돈을 여름에 놀며 쓰지 말라”고 합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닥칠 가장 어려울 때를 준비하는 지혜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겨울을 맞으면서 찬 바람이 스칠 때마다 나의 인생의 종말을 생각하며 영적으로 준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남이 주신 말씀의 신령한 지혜를 가지고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
슥 14:1-11 / 이윤재 목사
오늘은 그동안 계속된 스가랴서의 마지막 시간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상 가장 중요한 도시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로마? 아테네? 워싱턴? 베이징? 성경은 예루살렘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가 존재하는 것은 예루살렘에 있기 때문이요, 예루살렘이 있는 것은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예루살렘을 잠간 보실까요?(사진1)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첫 번째 장소가 에루살렘 성전지역입니다. 이것을 old city, 구에루살렘이라 부릅니다. 이곳의 중심은 성전이고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인, 아랍인, 기독교인, 에르메니안인들이 함께 삽니다. 두 번째 지역이 감람산지역입니다. 예루살렘에 해발 750미터라면 감람산은 그 보다 한 100미터 높습니다. 예루살렘 동쪽에 있는 산입니다. 총 길이가 한 4킬로 됩니다. 세 번째가 신도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 삽니다. 저도 여기 살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멀리 가면 유다 광야가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치고 예수님이 시험받은 곳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멀리 가면 성경에서 “동해”라고 부르던 사해가 있고 그 넘어에 “요르단”이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자세히 설명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지리를 공부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한 것입니다. 지난 6월 첫주부터 우리는 스가랴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전 520년, 바벨론에서 돌아온 학개와 스가랴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이야기, 그것이 학개요 스가랴입니다. 그런데 스가랴는 학개와 달리 다만 벽돌로 건물짓는 것이 성전재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영적 재건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건물도 하나님이 짓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한번 복습해 볼까요?
슥3장 슥4장 슥5장 슥10장 슥11장 슥12장
여호수아의 옷 순금등대 날아가는 두루마리 봄비 두 막대기 간구하는 성령
정결 성령의 기름부음 말씀, 선교 회복 은혜와 심판 성령, 기도
여러분은 건물이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 영적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믿습니까? 우리 교회도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까? 스가랴는 이 모든 것을 말하면서 오늘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예언하고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그 일은 스가랴 시대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으며 그후에 예수님 통해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첫 번째는 감람산에서 일어날 일을 예고합니다.
감람산: 하나님이 싸우신다.
먼저 스가랴는 감람산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3절에서 5절을 보겠습니다. 슥14:3-5,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
왜 스가랴는 그의 메시지의 마지막을 감람산으로 택했을까요? 자, 감람산의 모습입니다(사진2). 감람산은 예루살렘 동편에 있는 산으로 성전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이름을 위치에 따라 “예루살렘 동편산”이라 부르기도 하고, 솔로몬이 이곳에 모압과 암몬 신을 위한 산당을 세웠다고 해서 “멸망의 산”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메시아가 오면 감람산으로 오시며 그가 오실 때 죽은 자의 부활이 감람산에서 시작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감람산에는 15만명 이상의 무덤이 있으며(사진3), 이 가운데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의 무덤도 있습니다.
자, 그런데 스가랴가 언급한 감람산은 전혀 다른 의미의 감람산입니다. 바로 전쟁터로서의 감람산입니다. 3절을 보세요. 슥14:3, “그 때에 여호아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스가랴가 말하는 ”그날에“, ”그때에“ 하는 말은 자기 시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 훗날 메시아가 오시는 때를 말합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감람산은 영적 전쟁의 현장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치열한 전쟁으로 인해 감람산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가운데는 커다란 골짜기가 생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4절입니다. 슥14:4, “그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리라”.
감람산에서 마지막 시대에 큰 싸움이 일어난다는 말이 무엇일까? 그 결과 산이 남북으로 갈라져 가운데 큰 골짜기가 생긴다는 말이 무엇일까? 이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시는 미래적 상황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싶이 감람산은 예수님이 자주 올랐던 산 아닙니까? 눅19장에 보면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앞으로 예루살렘이 될 일을 보시고 우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24-25장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에 올라 마지막으로 될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혀 죽으시기 전날은 예수님이 이곳에서 땀방울이 핏방울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눅22:44에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했습니다. “겟세마네”란 “기름을 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치 기름을 짜듯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을까요? 영적 싸움을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전 요13장에는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때 가롯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 떡을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요13: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사단이 가롯 유다 마음속에 들어갔습니다. 가롯 유다가 떡을 받자마자 그 마음속에 사탄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은 것은 유대인들이 고발하고 로마 총독이 선고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표면적인 역사입니다. 이면적인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의 구원을 방해하는 사단의 세력과의 싸움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요일3:8이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이 절박한 싸움이 일어난 곳이 감람산이요 겟세마네 동산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피땀흘려 영적 싸움을 하는 순간 감람산은 남과 북으로 나뉘고 그 사이에는 커다란 골짜기가 생겼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그 분의 이야기입니다. History is His story.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안 믿느냐로 갈라집니다. 생명은 아들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감람산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 안믿느냐로 커다란 골짜기를 이루었습니다. 그 골짜기를 사람들은 “기드론 골짜기”라고 부르지만(사진4), 역사적으로 그 골짜기를 “여호사밧의 골짜기”라 불렀습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따라 달라집니다. 막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영적 싸움을 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피땀흘려 기도할 때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눅22:43,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여러분은 천사의 존재를 믿습니까? 과학만능의 시대에 천사가 어떻고 하면 이상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성경에는 천사가 인간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이 104번이나 나오고, 계시록에만 52번 언급되었습니다. 마귀의 존재는 믿는 데 천사의 존재는 안믿으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오래전 빌리 그래함이 한국에 와서 집회하는 데 그때 들은 이야기가 지금도 떠오릅니다. 필라델피아의 한 유명한 신경과 전문의가 아주 피곤한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잠이 깼는 데 문을 열어 보니 한 소녀가 서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매우 위독하기 때문에 빨리 가서 치료해 줄 수 없느냐고 물었답니다. 날씨는 춥고 피곤했지만 그래도 의사는 소녀를 봐서 옷을 입고 따라 나섰답니다. 어머니는 중한 폐렴으로 누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치료했는 데 어머니가 물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아픈 줄 알고 왔어요?” 그래서 딸을 찾았는 데 딸이 없더랍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소녀가 자기에서 찾아와 자기를 데리고 왔노라고 했더니 그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답니다. “그러면 우리 딸인데 그 아이는 한 달 전에 죽었어요.“ 그리고 옷장을 가르키며 ”그 애가 입었던 신발과 코트예요“. 했는데 의사는 보았더니 바로 그 소녀가 입고 있던 옷이었습니다. 죽은 딸이 어떻게 나타난 것일까? 빌리 그래함은 그 설교를 하나님의 천사로 연결시켰습니다. ”성경은 수없이 천사 이야기를 한다.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지만 육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천사가 하는 일은 믿는 성도를 도와주는 일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보이지 않게 천사를 통해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신다”. 아멘. 스가랴에게 감람산은 말세에 일어날 영적인 싸움의 현장이었습니다. 과연 그의 예언대로 지금부터 2천년전에 예수님이 오셔서 피땀흘려 기도함으로 영적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교회는 감람산, 영적 싸움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싸우고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승리합니다. 우리도 승리합니다. 아멘.
생수: 하나님이 고치신다.
스가랴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이라고 두 번째 말한 부분을 살펴봅시다. 8절에서 11절입니다. 슥14:8-11,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게바에서 예루살렘 남쪽 림몬까지 이를 것이며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베냐민 문에서부터 첫 문 자리와 성 모퉁이 문까지 또 하나넬 망대에서부터 왕의 포도주 짜는 곳까지라.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라”.
스가랴의 두 번째 예언은 생수의 예언입니다. 예루살렘 감람산에서 엉적 싸움이 일어난 후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흐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동해도 서해로 흐르고 여름과 겨울, 항상 흐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시 예루살렘에 저주가 없으며 평안히 서리라는 것입니다. 먼저 동해나 서해는 우리 나라의 동해, 서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은 예루살렘이기 때문에 그 동쪽에 있는 사해를 동해라 부르고, 서쪽에 있는 지중해를 서해 혹은 대해라 불렀습니다. 계절이 여름과 겨울만 나온 것은 이스라엘은 4계절의 나라가 아니라 여름과 겨울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식으로 풀면 예루살렘서 솟아난 생수는 동해, 서해, 모든 바다에 이르고, 여름, 겨울 아무 때나 흐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아십니까? 이번 더위로 물이 없어 곡식, 식물, 가축들이 말라 죽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물이 얼마나 중한지 몰랐는 데 가물어 보니까 정말 물없이는 살 수 없슴을 알게 됩니다. 지난번 금식하면서 보니까 평소에는 물이 그렇게 맛이 없다가 금식하면서 보니까 물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은 물로 되었습니다. 태어날 때 10달 동안 어머니 양수로 살다가 태어나 점점 줄기는 하지만 노인이 되어도 우리 몸의 60%가 물입니다. 우리 몸에 물이 2%만 물이 없어도 심한 갈증과 괴로움을 초래하고, 3%가 부족하면 맥박과 호흡이 증가하고, 5%가 부족하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12%에 부족하면 사망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물이 필요하듯, 영적인 생명을 위해 영혼의 생수가 필요합니다.
영혼의 생수가 무엇입니까? 다시 8절을 보면 슥14:8,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했습니다. 생수는 고인 물이 아니라 솟아나는 물입니다. 샘도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물이 고여 있는 샘이 있고 솟아나는 샘이 있습니다. 고여 있는 샘을 히브리어로 “브엘”이라고 하고, 솟아나는 샘을 “엔”이라 합니다. “브엘세바”(사진5), “7개의 우물”이라는 뜻인데 물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비가 오면 빗물을 모아 마시는 샘입니다. 가물 때는 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에인하롯“(사진6), 기드온 300용사가 마신 샘입니다. 지금도 물이 나옵니다. ”에인케렘”(사진7), 세례요한이 태어난 마을입니다. 지금도 물이 나와 온 동네에 꽃들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자, 8절 보시겠습니까?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예루살렘에서 솟아나는 샘은 어떤 샘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말씀했습니다. 요4:14,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여기서 “솟아나는 샘물”을 영어 성경으로 보았습니다. “a spring of water welling up to eternal life.". ”welling up“입니다. 솟아나는 데 지금도 솟아나고 있습니다. 영원한 현재형입니다. 옛날에도 솟아났고 지금도 솟아나고 앞으로도 솟아날 샘물입니다. 마르지 않습니다. 비가 안와도 상관없습니다. 속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2008년엔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간 적이 있는 데 그때 빅토리아 호수에 갔었습니다. 빅토리아 호수는 케냐, 탄자니아, 르완다, 우간다등 여러 나라에 걸친 남한의 반절만한 호수였습니다. 그때 놀란 것은 그렇게 큰 호수도 가물 때는 물이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백두산 천지는 마르지 않습니다. 연간 12억t의 생수가 속에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 물이 계속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으로 흐릅니다. 속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류의 유일한 생수는 예수님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성경이 표현한 하나님과 관련한 생수의 표현입니다. 먼저 성부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입니다.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입니다. source of living water, 예수님은 생수입니다. I am the living water, 성령님은 무엇입니까? 생수의 강입니다. stream of living water,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source of living water I am the living water, stream of living water
(생수의 근원) (생수) (생수의 강)
그러니까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생수이신 예수님을 통해 생수의 강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그 생수가 우리 속에 있으면서 우리 속에서도 흐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요7:39절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생수가 속에서 솟아나듯이 우리 속에 성령이 임하면 생수처럼 또 솟아납니다. 여기서 “배”는 육신의 “배”가 아닙니다. 영적인 배, 우리 존재의 깊은 곳, 성령이 머무시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생수가 하나님의 근원에서 흘러 성령의 강으로 흐르듯이 우리 안에 있는 성령도 속에서 솟아납니다. 그래서 그 능력으로 우리가 삽니다. 다시 한번 확인합시다. 예수님이 생수입니다. I am the living water, the가 들어갔으니 유일한 생수입니다. 예수님은 생수입니다. 흙탕물이 아닙니다. 오수, 폐수가 아닙니다. 맑고 깨끗한 하늘의 물소리입니다.
중요한 것이 이 물이 흘러가는 곳에 회복과 치유와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수는 피와 물입니다. 요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십자가에서 흘린 물과 피는 우리를 고차고 치료합니다. 피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먼저 적혈구는 깨끗하게 합니다. 산소를 공급하고 이산화탄소를 빨아들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 죄를 씻는 능력입니다. 히9:12,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피에는 또 백혈구가 있습니다. 백혈구는 우리 몸에 칩입한 병균을 싸워 최후까지 승리하게 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그 피를 의지하면 승리합니다.
저는 지난 주 금식하면서 폴 투르니에가 쓴 <치유>라는 책을 읽었습니다(사진8). 폴 투르니에는 스위스의 내과의사로서 우리에게는 심리치료사, 정신과의사로 더 많이 알려진 분입니다. 그가 책에서 치유에 대해 말한 세 마디가 저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생명을 좋아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생명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둘째 인간의 고통은 곧 하나님의 고통이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가장 고통스러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셋째 질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문이다. 질병으로 죽지 않는다면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만일 죽는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은혜를 받는다. 그래서 질병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관문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치료합니다. 그가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통당할 때 가장 고통스러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고쳐주십니다. 질병은 이러나 저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관문입니다. 고쳐주시면 은혜의 문으로, 고쳐주시지 않으면 천국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생수이신 예수님의 능력이 여러분의 몸과 영혼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마12: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우리가 믿음을 병든 손을 내밀고 예수님도 능력의 손을 내밀어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흘러올 줄 믿습니다. “생수야, 이 사망의 당한 자의 몸에 들어가 저희를 살게 하라. 주께서 일으키시리라“. 아멘.
초막절-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스가랴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이라고 세번째 말한 부분입니다. 16-19절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스가랴는 말일에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초막절을 지키라 말합니다. 그런데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하며 올라오지 않은 자는 비도 내리지 않고 벌을 내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이렇게 스가랴는 강력하게 초막절을 지키라고 말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초막절은 다른 이름으로 장막절이라고 부릅니다. 히브리어로는 “수콧”이라고 부르고 유월절, 칠칠절과 함께 이스라엘 삼대 절기중의 하나입니다. 이때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트로그”라는 과일과 무성한 가지인 “도금양 나뭇가지”,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와 “버드나무 가지”를 초막을 짓고 그 집에 7일동안 삽니다. 보통은 집앞에 초막을 짓지만, 아파트의 경우에는 배란다나 아파트 입구에 짓고, 학교에는 교실에, 회당에, 그리고 광장에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초막 속에 들어가 가족별로 7일간 이스라엘백성이 40년동안 광야에 살았던 것을 기념합니다. 이것은 괜히 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3대 절기를 통해 보면 이렇습니다.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3-4월 5-6월 10-11월
애굽에서의 탈출 시내산 도착 가나안 정착
죄로부터 구원 말씀과 성령으로 싸움 하나님의 통치
기억 기도 기대
구원 성화 영화
유월절이 애굽에서 해방을 기념한다면 초막절은 가나안땅 입성을 기념합니다. 하나는 민족 구원이 시작되고 하나는 완성되었습니다. 7일동안 초막을 짓고 사는 것은 이제는 가나안땅에 도착했으니 하나님의 집에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은 14:20절, “하나님께 성결한 삶이며”, 14:21, “하나님께 드리는 제단의 솥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나팔절과 속죄일과 장막절입니다. 나팔절은 양각 나팔을 부는 신년 절기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것이 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리고 속죄일은 모든 죄를 씻고 용서받는 날입니다. 그리고 장막절은 새집을 짓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새로워졌습니다 죄용서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겠습니다
이 세 가지를 합친 것이 초막절입니다. 스가랴는 주넌 520년,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와 학개와 함께 성전을 재건했으나 그는 성전 재건보다 큰 것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건축하려는 성전은 어떤 성전인가? 영적인 건측으로서의 성전은 무엇인가? 앞으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오시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오늘 마지막 시간은 그 시대에는 만날 수 없었으나 우리는 만난 에수님을 소개했으니 그는 감람산에서 기도로 싸우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 너희도그렇게 해라. 그는 예루살렘에서 솟아나는 생수인 피와 물로 세상을 치유하고 정결케 하셨다. 너희도 그렇게 해라. 그는 초막절에 세상의 왕으로 우리를 영원히 다스리신다. 이 축복을 누려라.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울 성전이다. 스가랴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복합니다.
여름날의 축복
슥 14:7-8 / 조재호 목사
스가랴서는 구약 성경 중에서도 가장 메시야적인 책으로서 성전의 성공적 재건과 신앙적 부흥에 대하여 중심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신 끊임없는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바르고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스가랴라는 이름에는 "여호와를 기억하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중요하게 반복되는 말중에 하나는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받은 은혜가운데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생활가운데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지식과 추억은 잊어도 되지만 절대로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주님입니다.
얼마 전에 소천하신 노목사님은 연로해 가심에 따라 그 큰 목회를 한 기억들을 안타깝게도 잊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잊지 않고 있는 말은 "예수님,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이었다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려도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살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잊어 버려도 하나님만을 기억하면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가랴의 부모는 그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수많은 환상을 보여 주시고 신앙적 회개와 영광스런 회복, 그리고 메시야의 구원과 통치에 대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날에 있을 축복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더운 여름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여름날의 축복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1. 여름은 우리의 생활에 필요하고 중요한 계절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사계절이 뚜렷합니다. 계절에 따라 전혀 다른 옷이 필요해서 옷 사는데 돈이 필요하지만, 사계절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대단히 큽니다. 생활이 단조롭거나 지루하지 않고 변화가 있어 다양해서 좋습니다. 특히 여름 중에 장마가 끝나는 7월 하순부터 8월 중순 사이가 한 여름인데 집중 호우가 내리기 쉽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솝우화에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미는 여름 내내 쉬지 않고 일하고 겨울 먹이를 잘 준비하고, 베짱이는 나무 그늘에서 하루 종일 노래만 하고 놀아서 겨울에 거지꼴이 된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것이 그들에게는 커다란 일입니다.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여러 암컷들에게 잘 보여서, 더 많은 새끼들을 퍼뜨리려고 다른 동물들에게 잡혀 먹는 위험을 무릎 쓰고 노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생명을 걸고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름은 곤충에게도, 식물에게도 사람에게도 필요한 계절입니다. 여름은 무덥고 지루하지만 여름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계절입니다. 여름의 강열한 햇빛은 과일을 익히고 가을을 준비하게 합니다. 여름의 뜨거운 햇빛은 사람들의 얼굴과 등에 땀이 나게 하지만 그래야 몸 안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제거됩니다. 여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첫 번째는 땀을 식혀주는 부채일 것입니다.
여름에 우리가 살아가는데 부채보다 백배나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물일 것입니다. 열대야와 같은 더위로 밤에 잠들기가 쉽지 않은데, 자다가 일어나 냉장고 문 열고 시원한 물 한 컵 마시고 다시 드러누우면 온몸이 시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다로 계곡으로 수영장으로 물을 찾아 떠나는 것 같습니다. 더운 여름철에 우리에게 시원한 물이 필요합니다.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공통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곧 물입니다. 물은 생활과 생명의 근원입니다.
2. 오늘 말씀에 하나님이 생수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생수(生水, living water)는 말 그대로 살아있는 물입니다. 물에는 죽은 물이 있고 살아 있는 물이 있습니다.
죽은 물에서는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죽은 물에는 산소가 없고 죽은 물을 마시면 죽습니다. 그러나 생수는 살아 있는 물입니다. 그 안에 산소가 들어 있고 그 안에 먹이가 들어 있고 그 안에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등산하다가 언덕에 올라 작은 돌에 걸터앉아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을 상상만 해도 통쾌합니다.
생수는 우리의 육신에 생명을 부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수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생수가 됩니다. 무더운 여름,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피곤하시고 갈증이 나시고 햇볕은 내리 쬐고... 예수님께서 수가라는 동네 우물가에 피곤에 젖어 앉게 되셨습니다. 때 마침 어느 여인이 두레박을 가지고 물을 길으러 왔다가 예수님 만나게 되었습니다. "마실 물을 좀 달라"는 주님의 말에 어색해 하고 의아해 하는 여인을 향하여, "내가 생수의 근원이다. 내가 곧 우물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 않을 것이고, 그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생수가 되시고 생수의 근원이 되십니다. 생수는 살아 있는 물이고 살리는 물입니다. 생수는 곧 말씀입니다. 생명에 생기를 주는 것은 말씀의 은혜입니다. 생수는 기쁨과 평안의 은혜입니다. 생수는 축복과 희망의 선물입니다.
오늘 말씀가운데 이 생수에 대하여 세 가지 진리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생수는 성경적인 표현으로는 말하자면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목마르다고 불평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반석을 통해 물을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쳤더니 물이 솟아 나왔습니다.
시편에서는 말씀하시기를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시 85:11)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 마다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는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라고 하였습니다. 솟아난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솟아난다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지독한 가뭄에 저수지의 물은 줄어들고 흘려 내보내는 물의 양은 줄어들지만, 주님에게는 가뭄이 없습니다. 주님의 저수지에는 생수가 가득하고 언제나 솟아나는 샘물이 있기 때문에 가뭄이 없습니다. 주님이 없어서 혹은 부족해서, 모자라서 못 주시는 경우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영적인 가뭄이 없습니다. 어느 집사에게, "집사님, 요즘 경기가 어때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하기를 "목사님, 말도 마세요. 가뭄이에요. 오랜 가뭄이에요"라는 것입니다. 의미를 잘 몰라 "가뭄이라니요?"라고 했더니, "돈 가뭄이에요. 많이 말랐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가물고 마르면 땅이 푸석거리고 먼지가 날립니다. 메말라집니다. 가뭄을 만난 사람은 그 마음 밭에 먼지가 날립니다. 푸석거리고 먼지 나는 곳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주님에게는 가뭄이 없습니다. 주님에게는 솟아나는 사랑과 은혜가 있습니다. 무한한 저수지입니다.
믿음에서 나태해지고 멀어진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계절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그 생수의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흘러간다고 했습니다. 여름철에 사람들이 동해안으로 가고 서해안으로 가는 것처럼, 생수가 동해와 서해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세상각처로 골고루 흐른다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로나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은혜는 사람이나 여건이나 환경을 초월합니다. 복음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든지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은 낮은 곳일수록 잘 흘러 들어갑니다.
낮아지고 가난해진 여러분의 심령에게 여름날의 축복이 강물과 같이 흘러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생수가 여름에도 겨울에도 흘러간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연중 강우량이 부족합니다. 그나마 여름에는 건기입니다. 땅이 마릅니다. 물냉면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여름에 먹어도 겨울에 먹어도 감칠맛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는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 몸도 마음도 지치기 쉬운 계절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교우들, 몸이 불편해서 병원이나 집에 있는 고척가족들, 여름 큰비에 고통받았던 교우들, 더위와 씨름하며 수고했던 교사와 여종들, 교회 안팎에서 헌신하는 귀한 일군들, 입시 공부하는 학생들, 군과 타지에 가있는 가족들, 모두가 떠오릅니다. 저는 이 여름에 모든 고척의 가족들에게 주님의 생명수가 흘러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이 여름에 몸과 마음과 생활에 균형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시원한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온전케 하시는 주님의 은혜
슥 14:1-11
스가랴 14장의 개요를 간단히 말씀하면 슥 14장은 여호와의 날에 있을 이스라엘의 회복과 열방의 심판에 대한 내용으로 스가랴서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여호와의 날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쳤던 예언의 중심 주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강림,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가리킵니다. 즉 우리 예수님이 구원자로 나타나셔서 자기 백성들을 모든 원수에게서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시고 복 주시는 날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날은 그 날만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고후6:2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 충만이 임하는 날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고대하는 여호와의 날을 성령 안에서 지금도 맛볼 수 있다니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사모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알아야 할 것은 은혜의 날이 임할 때 진정 온전케 하심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은혜의 날에 어떤 온전케 하심이 있을까요?
1. 참 신앙의 남은 자가 됩니다.
1-2절입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너의 중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열국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보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은 고대의 정복전쟁에서 패자가 당하는 전형적인 재난을 묘사한 것입니다. 전쟁에서 진 자는 비참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가운데서도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쳐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나무는 베어도 그루터기는 그대로 있음과 같이 하나님의 남은 자가 있습니다. 아무리 타락해도 참 믿음 가진 소수는 반드시 꼭 있어요. 예를 들면 다 타락했지만 타락하지 않은 노아와 같이,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그리고 요한계시록 3장에 실상은 죽은 사데 교회에 흰옷 입은 소수의 참 신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남은 자입니다. 그 사람은 성령 받은 자입니다. 성령 충만 받았기에 변함이 없습니다.
은혜의 날이 오면 모두 이런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전쟁의 날에 당하는 시련과 같이 인간 이하로 이렇게 당하고 저렇게 당하고 욕을 먹고 매를 맞고 옥에 갇히고 누명을 쓰고 빼앗기고 고난과 고통과 죽음을 당해도 은혜 받은 성도는 그 믿음이 변함없습니다. 은혜가 이렇게 귀합니다. 영원히 불변한 믿음으로 만들어줍니다.
2. 이기는 생명으로 역사하여 주십니다.
3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열국을 치시되 이왕 전쟁 날에 싸운 것같이 하시리라” 옛날 전쟁의 날에 싸우시던 것 같이 싸워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주셨습니다. 정말 그래요. 성령 받으면 성령께서 내 앞서 역사하십니다. 옛날에는 미움을 물리치기가 어려웠는데 우리가 고민하기도 전에 주님이 앞서 가셔서 미움은 만날 수 없도록 처리하시고 우리에게서 용서와 사랑이 흘러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범죄하지 않게 하시고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게 하시고 말씀대로 사는 은혜를 주십니다. 전에는 미리 대비하지도 못했는데 이제는 성령께서 미리 알려 주시고 대비하게도 하십니다. 이 대신 앞서 싸우시는 은혜는 성령 충만 받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3. 피하는 은혜로 나타납니다.
4절에 “감람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감람산을 반으로 갈라 이스라엘에게 피할 곳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웃시아 왕 때 일어난 지진처럼 대 지진이 있어 피하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암1:1).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에 “그의 산골짜기”란 ‘나의 산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 골짜기는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의 짐을 다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아래 모든 짐을 다 부릴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우리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부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십자가에 우리 짐이 다 부려진단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4. 크신 능력과 은사와 역사가 나타납니다.
5절에 “ 모든 거룩한 자”란 천군천사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유1:14에도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했는데 수만의 거룩한 자는 천사입니다. 천사는 우리를 도우라고 보내신 종들입니다. 그러니까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온갖 은사와 역사와 능력과 축복으로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면 각종 능력과 은사가 임합니다. 천사의 도움이 바로 형통입니다.
5. 천국의 질서 아래 살게 됩니다.
6절 “그 날에는 빛이 없겠고 광명한 자들이 떠날 것이라” 여기 빛이나 광명한 자는 해와 달과 별을 가리킵니다. 이 광명은 창 1장에 나오듯 이 지구에 징조와 연한과 사시와 연한을 이루고 빛과 어두움, 밤과 낮을 이루게 하는 중요한 것들입니다. 이 지배와 이 법칙을 거슬릴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의 날에는 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벧후3:10에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그랬습니다. 벧후3:13을 보면 그 때 성도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거한다고 했습니다. 그 날에 더 이상 세상의 광명이 필요가 없는 더 좋은 곳에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 충만 받으면 성도는 몸은 지상에 살지만 영적으로는 천국의 질서 속에 삽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시면 그것이 해이고 그것이 달이고 별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기 전에는 외부 환경에 기분이 좌우했지만 은혜 받은 후에는 외부의 상황이 아무리 악해도 예수 안에 참 평안이요, 아무리 세상 법칙으로 이해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법칙에만 충실하면 성공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성도는 세상을 살아도 천국의 사람이며 천국의 서비스를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6. 생명수가 강같이 흐릅니다.
8절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이스라엘에는 우기와 건기가 있어 겨울에는 물이 범람하고 여름에는 땅이 바짝 바릅니다. 여호와의 날이 오면 사막에 샘이 넘쳐 사시사철 마르지 않는 낙원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재림의 날은 물론이요, 성령 받으면 이렇게 낙원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7:38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이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요4:13). 그렇게 은혜가 귀합니다. 참된 만족이 있습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7. 하나님만 높이게 됩니다.
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 여기 “홀로 하나”는 ‘유일하다, 특별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하나님이란 유일해서도 나의 하나님이지만 나의 특별한 존재이시기에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재림의 날에 세상 나라의 주권은 하나님께 귀속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 받으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유일하시고 특별한 왕으로 대접하게 됩니다. 은혜 받기 전에는 나와 세상 것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나 은혜 받으면 온 천하에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제일주의로 변합니다.
8. 겸손과 순종의 사람이 됩니다.
10절에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 - 예루살렘이 높이 들려 그 본처에 있으리니” 지대로 보면 아라바는 평원이고 예루살렘은 높은 산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세상의 높은 산들은 다 아라바와 같이 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겸손하고 순종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례 요한도 와서 높은 산들로 낮아지게 한다고 했는데 실재로 낮춘 산은 없었고 이는 회개로 돌이키게 함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봐야 합니다. 대신 은혜 받으면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만 우뚝 솟듯 하나님만 높이고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을 어떻게 아느냐? 기적이 얼마나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겸손하고 하나님만 높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9. 평안과 사랑 안에 거합니다.
11절에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안연히 서리로다” 역사를 볼 때 예루살렘 얼마나 환난을 많이 당한 도성입니까? 그러나 은혜가 임하면 저주는 다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은혜 받으면 새 예루살렘 축복을 받으면서 살게 됩니다. 저주는 다 사라지고 더 이상 염려도 불안도 방황도 목마름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모든 것을 다 몰아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곳곳에서 우리에게 “은혜 받아라. 은혜 받아라.”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은혜 받아야 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는 죽을 육체까지도 온전케 되는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도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 그 온전케 하시는 은혜를 맛보며 살게 됩니다. 우리 모두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 받아서 더욱 온전케 하시는 은혜 속에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