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광주대교구장으로 임명되어 2000년 은퇴하고도 지금껏 교회는 물론 광주의 역사와 함께해온 윤 대주교. 그에겐 듣기만 해도 여전히 심장을 죄어오는 이야기가 있다. “이북에서 아슬아슬하게 38선을 넘어오던 때, 그리고 5·18을 떠올리면 지금도 혈압이 올라요. 5·18 때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더 속을 태웠어요.” 윤 대주교는 잠시 숨을 고른다. 그러곤 금남로에 있던 가톨릭센터 건물 유리창이 다 깨진 사건부터 시위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던 계엄군의 만행 등 목격했던 광경과 일어났던 일들을 날짜별로 또렷하게 들려주었다. “신부님들이 수고를 많이 하셨어요. ‘대주교님 뭘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신부님의 말에 가책도 받았어요. 너무 무력했지.”
윤 대주교는 계엄군에게 폭행당해 피투성이가 된 청년을 도우려 내려가지 못한 것, 그해 6월 진상규명과 구속자 석방을 위한 미사를 준비하고도 두려움 때문에 직전에 철회한 것을 여전히 후회와 아픔, 부끄러움으로 가슴에 담고 있다.
작은 한숨을 내쉬는 윤 대주교에게서 아직 가시지 않은 미안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겸손한 표현과 달리 윤 대주교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잡기 위해 애를 썼다. 계엄군 분소장들에게 여러 번 연락하여 군의 잘못을 인정하고 평화적인 수습을 하도록 요구했고, 최규하 대통령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시 광주시민들은 믿고 의지할 데가 없었다.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시민들과 함께하며 사태 수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그 결과 사제 여덟 명이 투옥되었다. “김성용 신부가 잡혀가서 군사재판을 받는데 군인 판사를 막 야단쳤어요. 누가 재판받는 건지 모르겠어.” 서슬 퍼런 재판장에서도 당당하고 용감했던 김성용 신부에 대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윤 대주교는 무겁던 분위기를 웃음으로 풀어준다.
그러곤 5·18 이듬해 광주대교구 사제들과 명동성당에서 갑작스레 드리게 된 미사 이야기를 꺼낸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정신을 구현하는 세미나에 참석했던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세미나를 마치고 수원에서 명동성당으로 몰려갔다. 교회에서도 광주에 대한 적극적인 표현이 없고, 사법부마저 광주민주화운동을 ‘내란’으로 광주시민들은 ‘폭도’로 규정한 시국에 무슨 소리라도 내야겠다는 결의였다. “저도 신부님들이 모여 있는 명동성당으로 갔고, 다음날 5월 10일 12시 미사를 집전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어요. 그러곤 강론을 준비했어요.”
서울에서 처음 광주의 진실을 알리게 된 이 사건에 대해 사제들의 5·18 증언록인 『저항과 명상』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윤 대주교는 이전까지 진상규명과 수습의 차원에서 강론을 하던 틀을 뛰어넘어 군인들의 살해행위에 대한 발언을 하였다. 이것은 광주 내부에서 발언하는 내용이 아니라 전 국민과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