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세(48)의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은 1980년대 한국만화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83년 초 제1권이 나온 후 84년 말
제30권으로 완결될 때까지 모두 100만권이 팔렸다.
86년에는 이장호 감독에 의해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라는 영화(최재성 이보희
주연)로 만들어져 40만명이 봤다.
까치의 말에서 따온 정수라의 노래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라면’도 크게 히트했다.
과장된
굵은 선, 거친 붓질의 삽화체, 앵글의 급격한 전환 등 만화 고유의 매력 외에도, 까치둥지 같은 머리의 주인공 오혜성의 힘이 컸다.
오혜성의 모델은 경주중ㆍ고 동기동창인 영화배우 조상구. 그는 이장호 영화에서 조상구 투수로도 출연했다. 외인구단은 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연패를 거듭했던 삼미 슈퍼스타즈를 모델로 삼았다.
작가는 까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슬플 때는
눈동자에 별이 반짝이는 순정체, 화가 날 때는 코에 주름까지 잡히는 극화체로 표현하고 싶었다. 다양한 얼굴을 독자가 계속 까치로 알아보게 하기
위해 물방울 같은 머리카락과 각진 얼굴을 만들었다.”
'공포의 외인구단' 까치
본명 오혜성. 1960년 청주 태생. 어머니는 일찍 죽고 아버지는 술주정꾼. 황남초 4학년때 최엄지의 권유로 야구 시작.
졸업 후 엄지는 서울로 가 서울 화성고의 천재타자 마동탁의 애인이 됨. 83년 7월31일 프로야구 서부구단에 입단. 계약금
1,000만원에 연봉 1,000만원. 한때 동탁과 자신의 사이에 끼어 들지 말라는 엄지의 부탁으로 야구를 포기하려 했다. 84년
외인구단 탄생. 1루수 까치, 투수 조상구, 지명타자 최관, 4번 타자 백두산, 유격수 최경도. 5명은 지옥훈련 후 최강의 멤버가 돼
서부구단에 합류하고, 프로야구 후기리그 50연승 신화를 달성. 그러나 코리안시리즈마저 4연승을 거두기 직전, 엄지가 남편인
마동탁을 위해 져달라고 부탁하자 동탁의 직선타에 일부러 맞아 게임을 포기하며 장님이 되고, 엄지는 자책을 느껴 정신병자가 됐다.
85년 6월,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정신병원에 요양중 엄지와 재회.
◆ 2004년 5월30일 난 앞을 못 본다.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다. 20년 동안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도 정확히
모르겠다. 한때 몸 담았던 프로야구는…, 별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하나다. 지금 내 옆에는 엄지가 있다는 사실이다. 내일
마동탁이 찾아온다고 했다.
◆ 2004년 5월31일 마동탁을 만났다. 그놈 안경 낀 얼굴을 봤어야 했는데…. 그놈은
여전히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혜성,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난 예전 그대로네. 체격이나 외모, 모두. 지기 싫어 하는 성격까지도,
하하. 자네의 그 까치머리도 여전하군. 그래, 엄지씨는 잘 있나? …. 결국 자네가 이겼네. 하지만 결코 내가 졌다고는 생각하진 않아. 자넨
자네가 원하던 바를, 난 내가 원하던 바를 서로 차지했을 뿐이지. 엄지씨를 차지하니, 그래, 행복한가?”
난 결코 마동탁, 그놈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엄지의 증세가 심해졌다. 날 알아보지 못했다.
◆ 2004년 6월1일 강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강한 것은 정말 아름다운 것일까. 지금은 고인이 된 손병호 감독이 늘 입에 달고 다닌 말이 있다. 강하다는
것, 그것은 좋은 일을 많이 할 수도 있다는 것. 그는 말했다. 자신이 외인구단을 만든 것은 힘이 없어서 언제나 당하기만 했던 우리나라의
역사에 굴욕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또 다시 천황의 제단에 강제 참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선, 바르고 착하게만 살기에 앞서 무엇보다 강해야
되는 거라고.
외팔이 최관, 키 작은 최경도, 혼혈아 하국상, 둔한 백두산, 그리고 나 오혜성. 외인구단 5명은 모두 불구였고
약자였다. 그 지옥과도 같은 사지(死地)에서의 훈련을 마치고 상경한 날, 남들은 비아냥거렸다. 누구는 왕년에 눈물 젖은 빵 한번
안 먹어 봤냐고? 우리는 외쳤다. 당신들은 죽어본 적 있냐고.
그랬다. 우리는 약자였으되 강자였다. 1984년 여름
창단한 외인구단은 그 해 프로야구 후기리그 50연승, 코리안 시리즈 3연승을 거두며 전승신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관중들은 외인구단에
열광했다. 시대의 아픔을 잊으려 했다. 피로 탈취한 신군부의 군화 아래서 사람들은 신음했고, 그런 연약한 패배자의 입장에서 외인구단의
강함을 사랑했다.
◆ 2004년 6월2일 내가 야구를 시작한 것은 너, 엄지 때문이었다. 엄마 없이 술주정꾼
아버지한테 늘 얻어맞고 자란 나.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어 보는 게 어떻겠니?” 라는 네 편지 한 통으로 내 인생은
바뀌었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니까. 너는 신이었고 네 편지는 성전(聖典)이었으니까.
내가
야구를 그만둔 것도 엄지, 너 때문이었다. 코리안 시리즈 마지막 4차전에서 관중들은 외인구단의 마지막 게임의 승리를 갈구했지만,
외인구단은 졌다. 내 고의 실수였다. 나는 비웃었다. “이까짓 승부가 무슨 소용인가. 엄지를 독차지했다는 것만으로 네 놈이 이긴 건데.”
마동탁이 친 직선타에 맞아 시력을 잃었고, 엄지는 이런 내 모습에 정신병자가 됐다. 그리고 네 놈은 엄지와 이혼했다. 넌
원래 그런 놈이니까. 어릴 때부터 누구하고 무엇을 하건 지고서는 잠을 못 이룬 게 네 놈이니까. 엄지는 그런 네 천성을 가리기
위한 훌륭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 2004년 6월3일 내 인생에 후회는 없다. 엄지에 대한 나의 사랑이 광기 이후에 얻은
상처투성이라고 욕해도 좋다. 외인구단은 결국 자신들을 소외시킨 강한 자들의 습성을 그대로 복제했다고 욕해도 좋다. 그러나 누가
엄지를 악녀(惡女)라 욕하는가. 두 남자를 파멸로 몰아넣었다고? 청순 가련한 얼굴을 한 채 자신의 부와 행복과 성공을 위해 손쉽게 남자를
파멸로 몰아넣은 살로메라고? 후후, 까불지 마라. 누구든지 엄지를 울리거나 욕하면, 가만두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