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론성지.

배론이란 지명은 이곳 지형이 배 밑바닥 처럼 생겼다는데서
유래되었으며 한국 천주교회 초기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 들어와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왔다.
이곳은 초기 한국천주교의 역사와 관련, 세가지 중요한 사실들이 있다.
첫째,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이 있는 곳이다.
1801년 2월 황사영(알렉시오)는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서
토글에 은신하고 있었다.
그는 토굴속에서 순교자들의 죽음을 세계 교회에 전하고,
박해로 무너진 천주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간곡한 서신을 비단에 써서 북경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중국에 보내지기 전에 백서는 압수되고 그 또한 채포되어
그해 11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다.
백서는 현재 교황청 선교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둘째, 우리나라 천주교 성직자 양성을 위한 첫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있었던 곳이다.
1855년 초 성인 장주기(요셉)의 집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교에서는
프랑스인 프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의 지도 아래 김 사도요한,
권 요한, 유 안드레아 등 10여명의 신학생들이 교육을 받았다.
라틴어, 철학, 신학 등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문학을 배운
신학생들이 사제양성의 열매를 맺을 무렵인
1866년 초에 박해가 일어났다.
그 결과 두 신부와 장주기가 각각 서울 새남터와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하였고, 신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다.
셋째, 우리나라에서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묘가 있는 곳이다.
그는 1836년 12월 중국 마카오에 유학하여 신학을 공부하였고,
184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2년 동안 하느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혼을 구하려는
불같은 열정, 그리고 훌륭한 판단력 등으로 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과로로 1861년6월 문경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해 11월 성 요셉 신학교 뒷산 언덕에 묻혀
사제의 길을 걸으려는 후학들의 길을 밝혔다.
이와같이 배론성지는 종교적인 면에서 교회사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역사의 땅이요 교육의 땅이라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배론성지 안내도.

*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인생여정).

* 배론성당 전경.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이 성당은 배 모양으로 설계 시공되었으며
성당은 대지 8,749m2, 연면적 2059.18m2로
대성당 수용인원 2,000여명, 소성당의 수용인원 300여명,
전시관(대형 스크린 사용 가능)까지 포함하면
총 수용인원은 약 3,000여명이다.
* 최양업(토마스) 신부상.

* 배론성당 내부 모습.




외형도 대단하지만 배의 형상을 하고 있는
내부의 규모 또한 정말 대단합니다.
* 성당 내부에 있는 유물관.








여러 박해의 기구물들이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 최양업 신부 조각 공원.










* 신학교 쪽으로 넘어갑니다.



* 순교자들의 집.

* 최 도마 신부 회관.

* 황사영 순교자 현양탑.

* 성 요셉 성당.

* 옹기 가마굴.


* 장주기 요셉 신부 상.

* 신학당.

* 영원의 샘물.

* 사제관.

* 배론연못.

너무 아름다운 연못입니다.
* 마무리.



강행군의 순례를 마무리하며 건배와 덕담으로 이바구 꽃을 피웁니다.
오늘 강원도와 충청북도를 넘나들며 세 곳을 순례하느라 조금은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피곤한 기색없이 즐거움 가득한 모습들입니다.
이번 순례도 풍수원, 용수막, 베론성지를 기억하면서
좋은 묵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항상 성인들의 신심을 본받으며 따라 살 수 있는 성숙된 믿음과
또 겸허한 신앙인의 자세를 가져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준비하신 임원진과 함께하신 사도회원님 수고하셨습니다.
(혹 원본 사진이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내년에 또 봐요~~~
첫댓글 깊어가는 가을안의 배론성지...
딩구는 낙엽과 함께 되돌아 보는 묵상의 시간, 힐링의 시간
알차게 보내고 오셨습니다.
풍수원, 용소막, 배론 성지를 파트별로 잘 나열하시고 재미나는 설명과 함께 올려주시어 실감이 절로 납니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