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구의 이름이 뭔지 아는가?
이 도구의 이름은 '운반대차'다.
일명 '대차'라고 부른다.
금년 1월에 아들의 초대를 받아 송파구에 있는 그의 거처에 가보았다.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조그만 처소를 얻고나서 가족들을 초대했으니 고마웠다.
또한 축하할 일이었다.
그런데 방 구석에 이 '대차'가 세워져 있었다.
택배업을 하는 청년도 아닌데 '대차'가 방안에 있는 것이 약간 생소했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아이고 주여"
대답을 듣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유구무언이었다.
정말 깜짝 놀랐다.
작년 12월에 혼자서 이사를 했는데 그때 짐을 나르기 위해 이 '대차'를 구입했다는 것이다.
스스로 전셋집을 알아보고, 계약하고, 이사하고, 정리까지 다 끝낸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들어서 우리부부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약 1킬로 정도 떨어진 거리라고 해서 나는 '용달트럭'이나 '렌터카'를 이용해 한 줄 알았다.
아들 이삿날이었던 12월중순,
나는 고교 친구들 5부부, 10명을 가이드하여 한라산을 등반하고 있었다.
날씨가 꽤 추웠다.
바람도 몹시 드셌다.
저녁무렵에 전화가 왔다.
"이사 잘 했어요"
"애썼다. 내가 조만간에 술 한 잔 사마"라고 대답했었다.
스무살이 넘었으면 딸이든, 아들이든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한다고 가르쳤고 우리 가정에선 그게 너무나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지금 하늘나라에 계신 내 아버지도, 나도 그리 살았으니 그 핏줄이 어디 가겠는가?
한달 후쯤에 아들 거처에 초대받아서 갔는데, 방문 후에 비로소 실상을 알았다.
이렇게 작은 '대차'에 짐을 싣고 예닐곱 번을 왔다갔다 했단다.
뭔가 가 내 가슴을 꾸욱 찌르는 것 같았다.
뭉클하기도 했고 저릿하기도 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혼자 한번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곰 같다고 해야 하나, 성실하다고 해야 하나, 잘했다고 박수를 쳐줘야 하나,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한가지 분명했던 건 그 순간, 아무튼 애비의 가슴은 마냥 저릿했다는 것이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뜨거운 뭔가가 내 심장을 관통하며 지나갔다.
추운 한겨울에 조그만 '운반대차'에 이삿짐을 싣고 낑낑거리며 혼자 왕복 2킬로의 거리를 예닐곱번을 왕복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했다.
"밥 먹으러 가자"
아들의 처소에 세제와 휴지 꾸러미를 두고 녹차 한 잔을 마신 다음 서둘러 나왔다.
우리 네 가족은 주변 식당에서 식사하며 술도 한 잔씩을 곁들였다.
그리고 힘차게 건배했다.
"청년의 작은 보금자리에 푸른 꿈이 무성하기를"
"위하여"
"위하여"
지하철역에서 헤어지면서 아들을 꼬옥 껴안았다.
스물여덟 살 청년, 가슴팍이 실하고 따뜻했다.
"네 앞길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 잘 살아라"
이 한마디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는 요즘도 길을 가다가 가끔씩 이 '운반대차'를 보면 아들의 이삿날 풍경이 생각난다.
내가 현장을 본 건 아니지만 눈으로 본 것보다 더 생생하게 그려지곤 한다.
나의 이십대보다 더 속이 꽉 찬 것 같다.
스스로에겐 엄격하고 검소하지만, 주변의 이웃이나 사회적인 약자들에겐 늘 베풀고 나누며 헌신하는 청년이 되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한겨울 일기를 5월 중순인 오늘에서야 쓴다.
그동안 잊고 있어서 못 쓴 게 아니라 바로 노트를 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그냥 그랬다.
지난 주 어버이날 때 자녀들로부터 받았던 선물도 훗날 때가 되면 다시 일기장에 게재할 날이 오겠지.
살아간다는 건 '감사'와 '감동'으로 점철된 높고 큰 산맥이다.
인생의 시간은 급류처럼 흐른다.
하루 하루가 찬미와 공감으로 예쁘게 모자이크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첫댓글 제 업무상 저 운반대차를 사용하는 것을 매일 봅니다.
평평한 사내에서는 문제없는데
동선이 조금만 평평하지 않아도
거친 소리와 중심이 흐트러져 참 힘들게 이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작은 물건은 그나마 괜찮은데
혼자만의 살림이라지만 저 대차로 그렇게..
형님 말씀대로 곰인지 성실한것인지... ㅎㅎ
한번쯤 해보고 싶었다는 그 용기(?)가 부럽기만 합니다.
멋진 청년의 발걸음에 응원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