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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 받으실 하나님
슥 14:12-21
12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 이러하니 곧 섰을 때에 그들의 살이 썩으며 그들의 눈동자가 눈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들의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13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14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 때에 사방에 있는 이방 나라들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이 모여질 것이요
15 또 말과 노새와 낙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가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7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19 애굽 사람이나 이방 나라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가 받을 벌이 그러하니라
20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21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슥 14:14-21 / 그때에는 유다 백성도 예루살렘을 위하여 싸울 것이고, 모든 이웃 백성들의 보물을 전리품으로 거두어 지극히 많은 금은과 값비싼 옷들을 차지할 것이다. 15) 예루살렘을 공격한 백성들의 진지에 머물러 있던 군마와 나귀와 낙타와 노새와 다른 모든 가축들도 사람과 똑같은 전염병에 걸려서 죽을 것이다. 16) [세계 만민의 시온산 순례]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백성들 중에서 살아 남은 자들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자기들의 왕으로 섬기고,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해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할 것이다. 17) 만약에 지상의 모든 족속들 중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온 세상의 주인이신 그 왕께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족속이 있으면, 그 땅에 전혀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다. 18) 만약 애굽 족속이 올라와서 경배하지 않으면, 그 땅에 비가 전혀 오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은 민족들에게 주께서 내리시는 재앙만 내릴 것이다. 19) 애굽뿐만 아니라 어떠한 민족이든지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으면 이렇게 형벌을 받을 것이다. 20) [여호와께 바쳐서 성별된 것] 그날이 오면, 말방울에도 `여호와께 바쳐서 성별된 것'이라고 기록할 것이며, 주님의 성전에 있는 냄비가 제단 앞에 제물을 바치는 주발과 똑같이 사용될 것이다. 21) 예루살렘 도성과 유다 나라에 있는 모든 냄비가 거룩한 그릇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와서 희생제물을 바치는 사람마다 어떤 냄비든지 가지고 제물의 고기를 삶을 수가 있을 것이다. 또 그날이 오면, 온 세상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계시는 성전 안에 더 이상 장사꾼들이 드나들지 못할 것이다.
본 단락은 예루살렘을 공격한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의 예언과 그 중에 남은 자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예루살렘은 거룩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이 심판을 받다(12-15) 하나님은 그날에 예루살렘을 공격한 이방 민족들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곧 그들이 서 있을 때 살이 썩고, 눈동자가 눈구멍에서 썩고,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심판은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 민족들이 키웠던 모든 가축에도 동일하다고 했습니다. 한편 원수들은 자기들끼리 공격하여 자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다가 예루살렘 전쟁에서 전리품을 거두어들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여호와께 경배하다(16-19) 침략 중에도 예루살렘 주민 중에 ‘남은 백성’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을 침략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진멸을 당하던 중에도 ‘남은 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남은 자가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경배하며 절기를 지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믿는 자들이 있게 될 것에 대한 예언입니다. 만일 이방 사람들이라도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경배하지 않고 절기를 지키지 않으면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비를 주관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거룩해지다(20-21) ‘여호와께 성결’이란 글은 대제사장이 쓰는 관에 달린 순금 패에 새겨진 글씨였습니다(출 28:36). 그러나 그날에는 ‘말 방울’(말 머리의 모든 장식품을 포함)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글씨를 새길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기물뿐 아니라 모든 솥이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날에는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가나안 사람은 부정하고 가증된 자에 대한 상징적 표현입니다.
적용: 남은 자(택한 자)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당신의 마음가짐과 결심을 서로 나누어 봅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바라는 것을 주실 때만 은혜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의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 수도 있습니다. 이 때에도 우리는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는 하나님만 경배해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두 가지 방법
스가랴 14:16~21
서 론
오늘은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연속극에서 마지막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 장면을 아슬아슬하게 만들면 다음 주에 어떤 내용이 나올까 궁금해하며 보게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시원찮게 끝나면 그 다음 주는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서 다음 회 연속극의 시청률이 달라집니다.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독자에게 강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은 우선적으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16년 동안이나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있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너희를 위해서는 살만한 집을 짓고 성전은 짓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전을 짓는 것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일차적인 사명이었습니다. B.C. 520년에 두 선지자가 예언을 시작해서 4년이 지난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으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완공은 연속극 한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회가 끝나고 또 다음 회를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면 그 성전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게 되실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 즉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를 메시아시대 혹은 신약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관한 예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용어로는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14장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완성될 것입니다. 결국 스가랴 선지자는 신약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달성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근본 목적은 인간의 존재 목적과 동일합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 43:7).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647년 영국에서 재정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이 ‘인간의 최고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십니까?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면서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하지만 연락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아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구약시대는 제사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시대가 되면서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이 아닌 모든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이고 신약의 예배는 실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민족적인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민족적인 제한이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의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드렸지만 신약의 예배는 이미 오신 메시아를 기념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16~19절까지는 신약의 예배에 관해 네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첫째, 예배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우리가 실천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절만 되면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우상숭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신은 우리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명절만 되면 드리는 제사는 죽은 사람에게 예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사상을 차리면 죽은 조상이 와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무슨 밥을 먹습니까? 밥은 살아계실 때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절에 아무리 모든 친척, 가족들이 연합해서 핍박한다 할지라도 제사는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친척 중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누이가 제사를 지내야 된다고 압박하자 초신자니까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 지내고 두 가지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고 둘째, 이웃집에 갔다가 개에게 물려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불신자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몹시 싫어하시고 강한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절에는 제사를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징계를 자초합니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명절만 되면 고생을 많이 하시는데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협하고 자꾸 뒤로 물러가면 귀신들은 더욱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 지내라고 압박하는 어르신이 계셔도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강하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저희 큰 집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믿고 큰 집에 전화했더니 그날 밤 형수가 꿈을 꿨답니다. 길 양쪽으로 한쪽에는 절이 있고 한쪽에 교회가 있었는데 절의 스님들이 목탁을 치면서 우리가 졌다고 하자 교회의 목사님이 어서 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큰 집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적으로 강하게 나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귀신들도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주체에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대인들만 예배를 드렸는데 신약시대에는 이방인들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0절은 천국에서 이 예언이 완성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천국은 예배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장소입니다. 천국에서는 족속과 방언을 가리지 않고 각 나라에서 나온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영광과 어린양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16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했는데 유대인에게는 일곱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장막절과 초막절은 같은 것입니다. 초막절은 7월 15일에 시작되는데 7일 동안 원두막을 짓고 원두막에서 사는 것입니다. 원두막에 들어가 7일을 지내고 8일째 되는 날 거룩한 성회로 모이는 것인데 초막절은 왜 지키는 것이냐? 레위기 23장 41~4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초막절은 지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지만 과거에 애굽의 노예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편안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과거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면서 장막에 거하며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7일 동안 원두막을 짓고 거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것과 광야 생활 가운데 보호하시고 축복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지키는 절기인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지옥과 영원한 멸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악한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풀어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광야 같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인 것입니다.
넷째, 예배의 상벌을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에게 현세에도 복을 주시고, 내세에도 복을 주시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슥 14:19). 어떤 분은 이 구절이 예수님의 재림 이후 천년왕국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천년왕국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천년왕국이나 천국이 아닌 교회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축복이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과 멸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구원이 아닌 저주와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이중구조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8).
예배 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십시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실현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예배의 주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고, 예배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에 행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상이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고 영예며 축복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Ⅱ. “성결”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슥 14:20~21).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전면에 있게 하라” (출 28:36~37). 구약시대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머리에 쓰는 관이 있었는데 이 관 앞에 정금에다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서 매달았습니다. 그러면 이 관을 쓴 사람이 대제사장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말 방울은 말의 목에 달아 말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게 한 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솥도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성전에서 사용되는 솥만 성물이었는데 메시아 시대가 되면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다 성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히 여겨졌던 제단 앞에 피를 담는 주발 또한 성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성물이라던가 성결이라는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따로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그릇이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거룩한 그릇이고, 사람이 쓰면 거룩하지 않은 그릇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만 하나님께 구별되어 사용되었지만 메시아시대에는 천하게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도 구별되어 거룩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가인데 스가랴 14장 14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신약시대가 되면 제사장과 평신도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든 신자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사람에 대해서 민족적, 지역적, 교육적,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게 되고 아무리 천하고 더러운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으면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이 원리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랍비 등 거룩한 척하고 누구보다 의롭다고 생각했던 자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창녀로 살던 여인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자 거룩한 여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남편이 여섯 번이나 바뀐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갈취하던 세리 마태도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것을 다 내놓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절대 불가능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 중에서도 아주 먼 곳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거룩한 존재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수종들고 영광을 돌리도록 구별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시겠다고 하면 “예”라로 대답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왜 부르십니까?”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아낌없이 드리는 사람입니다.
결 론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출세하는 것이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도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 건강, 인기, 명예 이런 것들은 다 살아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첫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둘째,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함으로써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스가랴 14장에서는 두가지 표현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누구에게 숭배합니까? 여호와께 숭배합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슥 14:20).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됩니다. 스가랴 마지막 장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두 표현 ‘여호와께 숭배’와 ‘여호와께 성결’이 강하게 새겨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께 성결하라
슥 14:12-21 / 조무웅 목사
오늘 좋은 날이날이지요 한권의 책을 끝내는 날이기 때문에 책걸이 하고 그랬는데 훈장님에게 떡도 돌리고 그랬는데 떡 준비 안 했어요 오늘 스가랴 공부한 마지막 시간인데 아우슈비츠의 문신가라는 책이 있어요.
이 소설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말라리아야 걸려서 죽게 되어요 고열이 나고 아우치비츠에서 나치들이 학살을 목격하고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이 다름 날 고열이 나면서 말라리아로 죽을 지경이 됩니다
거기에서는 노동력을 상실하면 바로 죽음이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의식을 잃었기 때문에 죽음의 자리로 가야 하는 것이어요 그런데 며칠 후에 깨어났어요 자기가 생각해도 이상해요 내가 어떻게 살아났지
그 사람을 살린 것은 그의 친구였던 아론이라는 이 사람을 지켜 낸 것이어요 나치로부터 이 사람을 지켜내고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 하고 끝끝내 이 사람을 돌 본 것이어요 아론이라는 사람은 마음 속에 어떤 확신을 품고 사느냐 하면 한 사람을 구하면 세상을 구한다
내가 세상 전체를 구할 수 없는데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 전체를 구하는 것이라고 믿었어요 의식을 잃은 사람 이름이 날레인데 날레가 이식을 되찾기 전에 아론도 끌려 가서 사라졌어요
돌볼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이 아론이 그에게 정성을 다해서 그를 살려낼려고 옆에 지켜 본 사람들이 정말 한 사람을 살려 낼 수 있는지 자기들이 위험을 무릎쓰고 랄레 입에 넣어주고 빵 조각을 입에 넣어주고 그래서 살리는 것이어요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세상을 살리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를 위해 위험을 무릎쓴 한 사람이 있었어 이것이 나를 지켜주는 힘이기도 하지요 내가 함부로 살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어요
하물며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내 삶을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는 데 하나님이 나를 기억하고 계신다 이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될까 스가랴의 듯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기억하신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역사의 겨울과 같은 상황을 만난 사람들에게 어떻게 봄을 가져다 주었는지 하나님이 개입하심으로 그들이 충만한 삶을 살수 있도록 하고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는 것을 우리가 보았거든요
이방 나라의 심판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는데
12절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는 재앙은 이러하니
우리가 지난 주 강의의 말미에 여기 예루살렘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예루살렘은 특정한 장소이지만 사실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성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 성전에 마당만 밟는 자들이 있다고 예언자들이 이야기 하고 있는데 사실은 성전에 가는 것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나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일이 기도 하지요
예배를 뜻하는 독일 말이 고테스딘스트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서비스를 하는 것이 예배이기도 한데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 그래서 영어로는 예배를 서비스라고 하거든요 고데스딘스트라는 말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서비스도 있어요
다시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은총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것이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치려고 하는 우리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려고 하는 마음이 만나는 사건의 현장이어야 합니다
그 사건은 언제나 변화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내가 변화되는 것이어요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요 이런 삶이 일어나고 있는데 예루살렘을 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지요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이야기 하고 있는 데 무서워요
섰을 때에 그들의 팔이 썩고 눈동자가 눈 구멍에서 썩고 혀가 입 속에서 썩을 것이요 이게 죽는다는 이야기인데 죽는다는 이야기인데 죽어서 부패해 가는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운명이 죽음이다 하는 것을 죽음이다는 보통 명사로 이야기 하지 않고 구체적인 그림으로 보여 주니까 훨씬 무섭게 다가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살이 썩는다고 이야기 했고 썩는게 눈과 혀만이 아닐 터인데 특별히 눈동자와 혀를 이야기한 까닭은 손도 썩을 것이어요 눈 악하게 보는 눈 악한 말을 하는 혀 이런 것들이 아닐까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13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치러 온 자들에게 크게 요란함을 준다고 이야기 하는데 다시 말하면 여호와의 공포가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하는 말인데요
사무엘 상 14장에 보면 요나단이 요나단이 누구여요 사울왕의 장남 다윗과 우정을 나눈 친구 요나단이 자기 부하들을 데리고 블레셋 진영을 유린합니다
삼상 14장 1절 왕이 금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거든요 요나단이 적진을 유인 할 때를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삼상 14장 15절 이 때에 블레셋 군인들은 진안에 있는 군인들이나 싸움터에 있는 군인들이나 전초 부대의 군인들이나 특공대의 군인들이나 모두가 공포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땅 마저 흔들렸다 하나님이 보내신 크나 큰 공포가 그들을 휘감았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공포가 이게 그들을 휘감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새변역 성서)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참 다양해요 어떤 분은 책 제목을 이런 책 제목을 쓴 분도 있어요 갓 해스 메니 페이시스 God has many faces 그러는데 하나님은 얼굴이 많으시다
하나의 얼굴이 아니어요 하나님이 하나님은 손도 많으셔요 하나님은 방법도 참 많으십니다 일하시는 방벋들어서 하나님은 예를 들어서 상훈씨나 성훈씨 처럼 노래 부르는 이들을 사람들의 굳어진 마음을 깨트립니다 우울해진 마음을 상순씨의 노래를 통해서 그 우울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주어진 생명을 기뻐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지요
참 기뻐해야 되어요 감사해야 되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 미란씨나 나온씨처럼 연기를 통해서도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연기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누군가의 마음속에 감동을 일으키실 수도 있지요
예술가들은 예술적인 영감으로도 그럴 수 있지요
하나님은 하시는 일이 참 다양해요 여기 계신 분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면 그 하나님의 영을 통해서 어떤 일을 하게 하시는 데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오면 하나님은 김기석 답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란씨 속에 영을 불어 넣으시면 하나님은 미란씨 답게 일 하셔요
하나님은 손이 굉장히 많지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 가운데는 감동을 일으키는 것도 있지만 두려움을 심어준 것도 있어요
여기 큰 공포가 임했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면 악한 뜻을 품고 연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해 관계 때문에 뭉쳐 가지고 누군가를 해고지 하는 사람들 그들의 뜻이 이루어졌어요
그러면 그들이 늘 평온을 유지합니까? 이들에게 일이 이루어진 다음에는 논공행상이 벌어져요 내공이 크냐 네 공이 크냐 분열이 벌어집니다.
이런 모든 것들 속에 하나님의 숨결이 이런 공포를 일으켜서 사람들을 서로 물고 뜯게 만들기도 한다 그 다음에 그렇게 되자 하나님이 그런 방법을 통해서 이방 나라들을 예루살렘을 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탄하기 시작하자 유다 정복 전쟁에 참여합니다
14절 용기를 내셔 유다 나라의 회복 전쟁이 동참하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했고요
이방 나라들의 보화 말과 노쇠 가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을 것이라 이야기 함으로 이방 나라들의 금은 보화가 예루살렘에 모여드는 후대 유대교에서 이방의 재물들이 모여드는 것이 후기 유대 교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메시야 시대의 징조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어요
그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흥미로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한 것이
2절 이방 민족이 들어옴으로 성읍이 허물어 지고 집들이 약탈당하고 여성들과 어린이들이 죽임을 당하지요
하나님은 남겨진 자들이 있을 남은자 사상이 중요하거든요 넘운 자가 있어 세상이 제 아무리 악하게 흘러가도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사는 남은자들이 있다는 것이어요 기독교인은 이 시대에 남은자이어야 합니다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돈에 지배 받지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예루살렘에도 놀라운 비젼이 벌어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방 나라 사람들이 살이 썩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고 눈동자가 썩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고 혀가 입안에서 썩을 것이라고 이야기 해서 그들의 파멸을 이야기 했는데 이방 나라 가운데도 하나님은 남겨둔 사람이 있어요
16절 선민인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16절 남은 자가 있어요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자가 있어요 왜 올라오느냐 하면 침략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국의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 온다는 것이어요
이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해마다 올라와서 그들이 무엇이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그 왕 만군의 여호와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전쟁에 참여하는 그들이 하나님의 공포를 맛본 후에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어요
그분이 왕인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왕 만군의 하나님 그래서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올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데요 신명기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삼대 순례 명절이 있지요
순례해야 하는 삼대 명절이 무엇이었지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장막절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칠칠절은 오순절이라고 맥추절이라고 유월절 무교절이라고도 하는 데 삼대 순례 명절입니다
그런데 가장 성대한 명절이 초막절입니다 포도라든지 오리브라든지 수확을 하고 초막절 욤키푸르라고 하는 대 속죄일이 와요 속죄일이 지난 다음에 와요 속함을 받은 다음에 초막절이 시작이 되는데 행복한 절기여요 이 축제가 9일동안 지속됩니다
다양한 축제 의식이 벌어져요 그리고 아시겠지만 초막질에는 초막을 짓습니다 거기에 나무들을 쓰는데 어떤 마무들을 쓰느냐 하면 시트론 종려나무 매화나무 버드나무 이 네 나무를 가지고 초막을 짓는 데 초막의 조건이 우리는 집 잘 지으려면 비가 세면 안 되지 않아요
초막은 비가 내리면 비가 새야 되어요 별빛이 스며들 수 있어야 해 초막절에 기억하는 것은 초막은 포도나 올리브를 수확하기 위해서 들에 머물러야 하는 그 상황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지만 그 초막이 연상 시키는 것은 광야 생활이어요
애굽에서 집을 지을 때 시멘트 바르고 이렇게 집 지을이가 없지 않아요 얼기 설기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그 날의 초심을 잊지 말자고 집을 대충 지어야하는 것이어요 너무 잘 지으면안 돼 그렇게 지어요
그리고 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하곤 하는데 한해의 결실 추수에 대한 감사의 절기입니다
그리고 이 초막절이 면제년 7년에 한번 돌아오는 면제년이 되면 초막절에 율법을 낭동해야 돼 초막절 지난 다음에 그들의 신년이 오거든요 새해가 곧 와요 율법을 낭독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언약 갱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되세기고 내가 이렇게 살겠습니다하는 것을 재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초막절은 그렇기 때문에 가장 성대한 의식으로 치루어 지게 되거든요
16절 이방에 남은 자들이 그 왕 만군의 여호와 앞에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올라온다는 것은 무도하게 폭력과 힘을 숭상하며 살았던 것이 그들의 지난날의 삶이라면 이제는 율법의 정신 율법 정신의 핵심은 무엇이어요
그런데 어느 신학자가 율법의 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했어요 가난한 자에 대한 우선적 관심 율법의 정신은 어려운 자들이 그들의 살 권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거듭되고 있어요
폭력과 힘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가 살아 있는 그런 세상을 이루는 일에 이방인들도 동참하게 되는 초막절을 지키러 온다는 것은 그 이야기여요 지금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는 나라라고 하는 것은 나라라고 하는 것 때문에 나라에는 세가지가 있어야 하는 데 영토 국민 주권 하나님 나라는 어디엔가에 있는 장소로서의 사람들이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곳이어요
눅 17장 21절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있다 할 때 여기 있는 사람들을 수단으로 사용하고 야비하게 이용한다면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이어요 이분들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통치여요
그러니까 통치이지만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에 그런 공동체가 열리게 되지요 그게 나라 영토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기독교인들은 그런 영토를 만들어야되어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어떤 나라에 갈 생각만 하지 말고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만들어야 해요
나만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던 이방인들 가운데도 초막절을 지키러 옴으로 율법의 폭력의 힘의 세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래하도다 독립 선언서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그 도의의 핵심이 하나님 경외가 있는 것이어요 독립선언서는 감동이어요 바로 그런 시대가 오고 있다 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7절 땅에 있는 족속들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경배하러 오지 아니한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이것만 보면 하나님 너무 편협해요 그런 생각이 들지요 올라오지 않는다고 그러신 것 아니요 그러실 수 있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않는 것을 그 사람이 말을 타고 오든 반드시 와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존숭하지 않는 자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그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자들이지요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비를 내리지 않는다 그리고 예를 들고 있는데
18절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않을 때 비를 내리지 아니하리니 초막절을 자카료 dgffjdg자 어나허눈 아벙 너러둘우ㅏ 서럼울 차사눈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실 것이라
어떤 나라 사람이든지 초막절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그 이야기는 정말로 말을 타고 와야 된다는 말 보다는 바로 이 율법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을 자기의 삶의 원리로 삼기로 거절하는 삶이 얼마나 척박해 질 것인지
우리도 그래요 살면서 돈 많으면 좋지 않아요 돈 많은 사람이 다 행복해요 그렇지 않지요 돈 없으면 불편하지요 돈 없는 사람이 다 불행해요 돈 많으면 좋겠어요 없으면 좋겠어요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어떤 사람이 돈 많아 질 수는 있어요
그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내포합니다 그 마음이 없을 때 그의 삶은 황무지로 변할 수 밖에 없어요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누리지 못해요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부자 관원이 주님을 찾아 오지요 영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마가복음 10장 19절 그 때 예수님이 계명을 지켜 도적질 하지 간음하지 마 십계명에 안 나온 이야기를 해요 그게 무엇이냐 하면 속여 빼앗지 말며 그게 나요
그 말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말은 무엇이냐 하면\이
10장 21절 그 부자가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 지 보여 주어요 그래서 주님이 하는 말이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라 이게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십계명에 안 나온 이야기가 나와요 이것이 중요한데 데 세상에는 풍요롭지만 누리며 살지만 풍요롭지만 누릴 수 있는 복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요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돈이 있으니까 갑질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인격으로 대하고 그런 사람들 그들은 자기 권력이 대단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마음은 황무지입니다 척박한 땅입니다 그렇지요
우리 많이 보지 않아요 갑질 하는 사람들 돈 있다고 그러나 가진 것이 정말 없는대도 다른 사람들을 해피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교인들 가운데도 년세가 90세 이렇게 되신 어르신들이 계신데 그 분들은 돈이 많지 않은대 어떻게든지 누군가를 대접하려고 하고 있어서가 아니어요 그분들의 마음은 행복해요 그것 자체로 이만큼만 있어요 누군가 주고 싶어요 이 마음이 더 큰 복이어요
이만큼 있는데 남에게 줄 게 없는 자 여러분 진짜 부자와 가자 부자를 이야기 돈이 억만금 있어요 남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부자여요 나누지 않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어요 적게 소유해도 남과 나누는 사람은 부자여요 참된 부를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초막절을 지키지 않은 자들에게 벌을 이야기 하고 있고요 그들에게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하는 그들의 삶을 그만큼 척박해 진다고 받아집니다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은 토라를 토대로 산다는 것이고 나와 더불어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고통 받은 자를 아주 소중한 이웃으로 대하여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그 마음으로 살 때
20절 그 날에는 말 방울에 까지 여호와께서 성별이라 기록될 것이다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자단단 앞 주발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말에 다는 방울까지도 여호와께 성결 이게 재미난 말입니다 성결 거룩함이지요 깨끗함이지요 저는 굉장히 강조한 것 가운데 하나가 레위기에 성경 법전 레위기에 19장에서 26장까지를 성결 법전이라고 하는데 대 명제가 레위기 19장 2절 나는 여홍화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런데 거룩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안식을 잘 지키고 제물 엉터리로 바치지 말고 이 이야기가 나아요 종교적인 덕목이지요 그런데 내려가다가 탁 나오는 무엇이냐 하면 레위기 19장 9절 추수할 때 밭에 한 모퉁이를 남겨두라
10절 포도원에 포도를 거둘 때도 포도를 남겨 두어라
14절 듣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저주하지 마라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 앞에 걸림돌을 놓지마라
13절 일군에 품삯 떼어 먹지 말라
진자 거룩함이라는 것은 성경 백번 읽고 이틀씩 거룩이 아니라 철야 기도하는 것이 거룩이 아니라 일상적인 나의 삶 속에서 함께 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 거룩함이어요
왜 귀히 여겨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내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들의 있음 그 자체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래요 말 방울에 까지 성결이라는 말이 무엇인자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를 통해 볼 수 있는데
20절 제단 앞 주발과 다를 바가 없다고 이야기 함으로 거룩함이 성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대하는 모든 것들이 거룫함이라는 사실을 스가랴는 넌지시 보여주고 있어요 그렇지요 그래서
21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성물이 될 것인즉 여러분 성전에 쓰이는 성전 기구만이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토라를 중심으로 모든 사람들이 사는 일상의 삶의 자리가 여호와께 성물이 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름다운 비젼입니다 어떤 아름다운 비젼이냐 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마음이 일상에 모든 순간 속에 스며들므로 무엇이 일어나느냐 하면 일상의 성화가 일어나요 나의 일상생활에 성화가 일어나는 것이어요
아주 옛날에 고진하 시인의 아머니의 장곡대 라고 하는 시를 보면 80이 넘어신 어머니가 하얀 날마다 장독대에 가 가지고 행주를 가지고 장독대를 닦습니다 어머니 맨날 닦으세요 어머니가 이야기 합니다 야 산에 있는 다람쥐가 보면 부끄럽지 않아
그런데 어머니에게는 어머니의 지성소이거든요 닦아 옛날에 어른들이 가지고 있는 일상에 대한 정성 스러움 우리는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시기이기에 그 정성 스러움을 잃어 버리고 있는 데
21절 오늘 스가랴가 보여 주고 있는 비젼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거룩한 것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솥들이 여호와께 바치는 솥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바로 일상이 변화되는 삶이지요 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때 일상을 성화한다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함부로 대할 수가 어없어요 귀히 여기는 것이어요 아끼는 것이어요 저는 우리 시대에 가장 빈곤함이 아낄줄 모르기 때문에 사람을 함부로 규정하고 함부로 이 사람은 어떻고 규정하고 이게 인간에 대한 가장 악마적 태도라고 느껴요
스가랴가 이 세계는 아름답습니다
21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성물이 될 것이다 제사드리는 자가 그 솥을 가져다가 제물을 삶을 것이다고 이야기 하고 있고요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재미 있습니다
마지막 절에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난한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아름다운 이야기만 하다가 가나안 사람이 없을 것이다고 이야기 합니다 왜 그러지요 왜냐 하면 성경에서 가나안 사람은 장사 군으로 소개 되고 있습니다
새번역은 상인들 공동 번역은 장사꾼들 그렇게 번역했어요 우리 상인들은 거기에 못 간다는 말이 아니고 이익 동기에서 움직이는 사람 내게 이익 되는 것만 가지고 나를 중심으로 사고 하는 것 이것을 상인 근성이라고 하는 데 상인 근성이 진리의 적이라는 말을
진리의 가장 큰 적은 나를 세상에 중심에 놓으려고 하는 이익 동기입니다 회복된 나라에서는 그들의 자리가 없다 그들은 아끼지 않아요 귀이히 여기지 않아요 모든 것이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귀이히 여기고 아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된 나라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해서 회복된 나라의 꿈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이 땅 우리끼리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이 드러나야 하는 자리 하나님의 거룩한 빛과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가야 하는 사실을 일깨어 주고 그렇게 살게 될 때 교회는 존재 이유를 되 찾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들이 세상에 빛과 샘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두 가지 방법
스가랴 14:16~21
서 론
오늘은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연속극에서 마지막 장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지막 장면을 아슬아슬하게 만들면 다음 주에 어떤 내용이 나올까 궁금해하며 보게 됩니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이 시원찮게 끝나면 그 다음 주는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장면이 어떻게 끝나느냐에 따라서 다음 회 연속극의 시청률이 달라집니다.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독자에게 강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은 우선적으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16년 동안이나 성전을 짓지 못하고 있자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들에게 “너희를 위해서는 살만한 집을 짓고 성전은 짓지 않는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말했습니다.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여 성전을 짓는 것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일차적인 사명이었습니다. B.C. 520년에 두 선지자가 예언을 시작해서 4년이 지난 B.C. 516년에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으로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사명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스룹바벨 성전의 완공은 연속극 한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번 회가 끝나고 또 다음 회를 기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면 그 성전에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서게 되실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 즉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대를 메시아시대 혹은 신약시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관한 예언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종말론적인 용어로는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합니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가랴 14장이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면 완성될 것입니다. 결국 스가랴 선지자는 신약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을 달성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근본 목적은 인간의 존재 목적과 동일합니다.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사 43:7).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1647년 영국에서 재정된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의 첫 번째 질문이 ‘인간의 최고 목적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인간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로 모이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십니까? 우리가 자식들을 키우면서 자식들이 부모와 함께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습니까? 하지만 연락도 하지 않고 부모에게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속상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아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두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Ⅰ.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구약시대는 제사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시대가 되면서 유대인뿐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예루살렘이 아닌 모든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이고 신약의 예배는 실체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민족적인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민족적인 제한이 없습니다. 구약의 제사는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의 제한이 있지만 신약의 예배는 그런 제한이 없습니다. 어디서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드렸지만 신약의 예배는 이미 오신 메시아를 기념하면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예배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16~19절까지는 신약의 예배에 관해 네 가지 측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첫째, 예배의 대상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한 진리를 우리가 실천하지 않습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 외에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절만 되면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고 우상숭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신은 우리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살아있는 사람이나 죽은 사람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명절만 되면 드리는 제사는 죽은 사람에게 예배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제사상을 차리면 죽은 조상이 와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귀신들이 모여드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분이 무슨 밥을 먹습니까? 밥은 살아계실 때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명절에 아무리 모든 친척, 가족들이 연합해서 핍박한다 할지라도 제사는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 친척 중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지 얼마 안 되었는데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시누이가 제사를 지내야 된다고 압박하자 초신자니까 어쩔 수 없이 제사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사 지내고 두 가지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첫째,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뻔했고 둘째, 이웃집에 갔다가 개에게 물려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는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불신자가 제사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제사를 지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몹시 싫어하시고 강한 징계를 내리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명절에는 제사를 지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징계를 자초합니까?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명절만 되면 고생을 많이 하시는데 영적으로 싸워야 합니다. 귀신들은 우리가 강하게 나가면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타협하고 자꾸 뒤로 물러가면 귀신들은 더욱 우리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 지내라고 압박하는 어르신이 계셔도 나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강하게 이야기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저희 큰 집이 오랫동안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믿고 큰 집에 전화했더니 그날 밤 형수가 꿈을 꿨답니다. 길 양쪽으로 한쪽에는 절이 있고 한쪽에 교회가 있었는데 절의 스님들이 목탁을 치면서 우리가 졌다고 하자 교회의 목사님이 어서 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 큰 집도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적으로 강하게 나가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귀신들도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의 주체에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다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은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남은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유대인들만 예배를 드렸는데 신약시대에는 이방인들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 이것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천국에 올라가게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9~10절은 천국에서 이 예언이 완성된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9~10). 천국은 예배의 장소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장소입니다. 천국에서는 족속과 방언을 가리지 않고 각 나라에서 나온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영광과 어린양의 은혜를 찬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이 된다는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16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했는데 유대인에게는 일곱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오순절, 나팔절, 속죄일, 장막절. 장막절과 초막절은 같은 것입니다. 초막절은 7월 15일에 시작되는데 7일 동안 원두막을 짓고 원두막에서 사는 것입니다. 원두막에 들어가 7일을 지내고 8일째 되는 날 거룩한 성회로 모이는 것인데 초막절은 왜 지키는 것이냐? 레위기 23장 41~43절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초막절은 지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지만 과거에 애굽의 노예였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건져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편안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과거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하면서 장막에 거하며 살았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 7일 동안 원두막을 짓고 거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신 것과 광야 생활 가운데 보호하시고 축복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지키는 절기인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가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를 지옥과 영원한 멸망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악한 마귀의 권세에서 우리를 풀어 주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고 광야 같은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이 예배의 내용인 것입니다.
넷째, 예배의 상벌을 하나님께서 보장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에게 현세에도 복을 주시고, 내세에도 복을 주시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슥 14:19). 어떤 분은 이 구절이 예수님의 재림 이후 천년왕국에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천년왕국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천년왕국이나 천국이 아닌 교회시대를 말하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결국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축복이지만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심판과 멸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받습니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구원이 아닌 저주와 멸망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이중구조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8).
예배 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일이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리십시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언이 실현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예배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예배의 주체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되고, 예배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과거에 행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이며,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상이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고 영예며 축복입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Ⅱ. “성결”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슥 14:20~21).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너는 또 정금으로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그 위에 새기되 여호와께 성결이라 하고 그 패를 청색 끈으로 관 위에 매되 곧 전면에 있게 하라” (출 28:36~37). 구약시대에 오직 대제사장만이 머리에 쓰는 관이 있었는데 이 관 앞에 정금에다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겨서 매달았습니다. 그러면 이 관을 쓴 사람이 대제사장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말 방울은 말의 목에 달아 말이 움직일 때마다 소리가 나게 한 것인데 이것의 의미는 천하고 보잘 것 없는 것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기록된다는 것입니다. 솥도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성전에서 사용되는 솥만 성물이었는데 메시아 시대가 되면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다 성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히 여겨졌던 제단 앞에 피를 담는 주발 또한 성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성물이라던가 성결이라는 것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따로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그릇이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거룩한 그릇이고, 사람이 쓰면 거룩하지 않은 그릇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나 제사장과 같은 사람들만 하나님께 구별되어 사용되었지만 메시아시대에는 천하게 여김을 받았던 사람들도 구별되어 거룩하게 쓰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가인데 스가랴 14장 14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신약시대가 되면 제사장과 평신도의 구별이 없어지고 모든 신자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사람에 대해서 민족적, 지역적, 교육적, 신분적 차별이 없어지게 되고 아무리 천하고 더러운 존재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으면 하나님께 구별되어 쓰임 받는 거룩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통해 이 원리를 실제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사두개인, 랍비 등 거룩한 척하고 누구보다 의롭다고 생각했던 자들에게 회칠한 무덤과 같은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창녀로 살던 여인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믿고 따르자 거룩한 여인이라고 한 것입니다. 또 남편이 여섯 번이나 바뀐 여인도 예수님을 만나서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을 갈취하던 세리 마태도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것을 다 내놓는 거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절대 불가능했던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 중에서도 아주 먼 곳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거룩한 존재가 되었으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수종들고 영광을 돌리도록 구별된 사람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쓰시겠다고 하면 “예”라로 대답하고 달려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 “왜 부르십니까?”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하면 아낌없이 드리는 사람입니다.
결 론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습니다. 출세하는 것이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을 버는 것도 사람의 목적이 아닙니다. 돈, 건강, 인기, 명예 이런 것들은 다 살아가는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 한마디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첫째,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함으로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둘째, 하나님께 구별되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함으로써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스가랴 14장에서는 두가지 표현이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슥 14:16). 누구에게 숭배합니까? 여호와께 숭배합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슥 14:20).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으면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됩니다. 스가랴 마지막 장을 보면서 우리 마음에 두 표현 ‘여호와께 숭배’와 ‘여호와께 성결’이 강하게 새겨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대적을 멸하시는 승리의 날
스가랴 14:12-21 / 김명섭 목사
1. 의의 최후 승리
① (12절)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곧 섰을 때 그 살이 썩으며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 여호와의 날과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하나로 연결된다. 스가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하나님의 통치를 대적하는 세력과의 큰 영적전쟁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이 전쟁은 시대마다 모양은 다르지만 언제나 존재한다.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들을 통칭한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더 진해지듯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때 사단, 곧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강력한 훼방이 함께 나타난다.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이 이러하니” 스가랴는 마침내 하나님을 대적하던 모든 대적을 멸하시고 의의 최후 승리를 이루어내실 것을 예언한다. “그 눈이 구멍 속에서 썩으며” 눈은 관점이나 안목 같은 ‘가치관(무엇이 소중한가)’과 ‘세계관(무엇이 다스리는가)’이다. “그 혀가 입속에서 썩을 것이요” 혀는 말을 가리키는 은유다. 적그리스도는 말로 대적하고 훼방한다. 여호와의 날에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던 가치관과 세계관의 비극적인 종말을 예고한다.
▶ (창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노아가 말씀대로 준행하여 방주를 지을 때 멸시하고 조롱하던 것과 같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눈으로 멸시하고 말로 조롱하던 입술에 재앙을 내리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네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민14:26~28)” 주님의 일 할 때 내 견해를 내려놓고 말조심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본 대로 행하고 말한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6~37)” 무엇보다 여호와의 날에 말한 대로 심판하신다.
② (13절~14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로 크게 요란케 하시리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며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싸우리니 이때에 사면에 있는 열국의 보화 곧 금 은과 의복이 심히 많아 모여질 것이요”
▶ ‘그 날에’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동시에 사단도 역사한다. 적그리스도는 합종연횡을 시도하며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지만 결국 자중지란으로 자멸하게 될 것이다. 창세기의 바벨탑사건이 그 실 예다.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여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3~4)” 바벨탑은 연대와 연합으로 인간적인 힘과 기술력을 총동원해서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의 상징이다. 교만의 본질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란케 하시고 흩어버리심으로 인간의 오만을 무참하게 무너뜨리셨다. 세속적인 이해관계로 모인 연합이나 연대는 결국 이해관계의 충돌로 인해 스스로 분열하고 만다. 이는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통치에서 벗어난 교회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교회 공동체는 이해관계로 모인 동아리나 동호회 같은 인간적인 연합을 위한 친목단체가 아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긍휼과 희생에 목적을 두는 사랑의 공동체다.
③ (15절) “또 말과 노새와 약대와 나귀와 그 진에 있는 모든 육축에게 미칠 재앙도 그 재앙과 같으리라”
▶ 아담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지 않은 불순종이다.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의 죄악은 그 땅의 소산물에까지 저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그 역도 성립한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순종으로 인해 온 세상에 구원이 임하듯 하나님을 경외하고 준행하면 땅의 소산물까지 축복이 임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축복도 이와 같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22장12~18)” 성경이 시종일관 전하는 심플한 삶의 원리다. 멸시하면 불순종으로 저주에 이르게 되고, 경외하면 준행으로 축복에 이르게 된다. 신명기는 이를 더 분명하게 강조 한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신28:2)”,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네게 명하신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므로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너를 따르고 네게 미쳐서 필경 너를 멸하리니 이 모든 저주가 너와 네 자손에게 영원히 있어서 표적과 감계가 되리라(신28:45~46)” 순종하면 축복의 본보기가 되지만 거역하면 저주의 본보기가 된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섬기는가에 따라 축복과 저주의 서로 다른 운명에 놓이게 된다.
2. 초막절, 은혜를 기억하는 삶
① (16절)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 스가랴는 그 날에 펼쳐질 최후승리의 영광을 선포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던 적들도 하나님 앞에서 승복하게 될 것을 예고한다. 초막절은 광야 사십년 동안 지키고 보호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날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진실을 깨닫는 순간이 반드시 온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종말의 날이다. 개인의 삶에서는 죽음의 순간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진실을 그 날에 가서 깨달으면 너무 늦는다. 하루라도 빨리 은혜를 깨닫고 사는 것이 지혜다. 그래야 헛된 세상에서 감사와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스가랴의 예언이 전하는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② (17절~19절) “천하만국 중에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숭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아니하실 것인즉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열국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애굽 사람이나 열국 사람이나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자의 받을 벌이 이러하니라”
▶ 스가랴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창일하게 흐르는 강물도 자연현상에 따른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이라고 증언한다. 삶에서 누리는 일상이나 건강, 물질이나 재능도 마찬가지다. 초막절의 정신은 광야를 통한 체험학습에서 터득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솔한 감사의 고백이다. 그 날에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살던 죄악을 심판하신다. “만군의 여호와를 경배하지 않는 자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고, 창일함이 있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자신의 공로와 공덕을 내세우며 사는 오만한 삶은 불평과 원망으로 귀결된다. 몰라주면 서운하고 알아주면 자만해서 만족이 없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의 실상은 은혜를 모르는 교만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4:6).”
③ (20절~21절) “그 날에는 말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취하여 그 가운데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 말방울은 생활용품이고 솥은 주방도구인데 사소하고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가리키는 은유다. 그 날에 일상생활에서 누리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게 될 것을 증거 한다.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공짜는 없다!’ 반복되는 일상과 사소하게 누리는 작은 일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사는 것이 지혜다. 아무 사고 없이 보낸 하루, 먹고 마시고 숨 쉬는 것, 잠자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선물)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부요와 재물을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전5:19)”,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전6:2).”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진실을 누구나 명료하게 깨닫게 되는 그 날이 온다. 우리의 일상과 모든 삶(생명, 건강, 물질, 자녀)과 작별하는 날이다. 세상에 의지하던 모든 것이 무너지는 죽음의 순간이다. ‘그 날에’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거룩한 도구로 쓰임 받게 된다. 생명을 잃어버린 후에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심을 깨닫거나, 건강을 잃어버린 후에 하나님이 건강의 주관자이심을 깨달으면 너무 늦는다. 물질을 잃어버린 후에야 하나님이 물질의 주관자이심을 깨닫거나, 일상을 잃어버린 후에 하나님이 일상의 주관자이심을 깨달으면 너무 늦는다. 모든 것이 은혜임을 하루라도 빨리 깨닫고 사는 게 지혜다. 이것이 스가랴가 여호와의 날을 통해서 전하는 최종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