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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om/watch?v=Ds3MH_Irerk&feature=shared
전문이 엄청나게 깁니다.
시간되실때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소설을 보는듯합니다.
맞춤법은 감안하셔서 보아주시길 그러면 감사하겠습니다.
107년전 일기
안녕하세요. 저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한국학 연구소장 미셀 라즈니 콜로입니다. 제가 도서관 사서 시절 우연히 발견한 1권의 일기장이 제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100년도 더 된 그 일기장에 담긴 놀라운 비밀과 인해 제 삶이 바뀌게 된 이야기는 정말 운명 같답니다. 프랑스인인 제가 어떻게 한국학연구소 소장이 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 일에 제 인생을 바치게 되었는지 여러분께 들려드리고 싶어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어요. 먼저 저희 외할머니 이야기부터 해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희 외할머니는 지금 파리 근교의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연세가 93세이심에도 한국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반짝이신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22살의 나이로 프랑스 적십자 간호사로 참전하셨던 외할머니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던 한국인들의 모습을 늘 이야기해 주셨다 모든 것을 잃은 상황에서도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던 모습 한 조각의 빵도 나누어 먹고 추운 밤이면 서로의 손을 잡아주던 그들의 모습이 마치 기적 같았다고 외할머니는 자주 회상하시곤 했죠. 그래서였을까요? 제가 처음 BTS 에 스프링데이를 들었을 때 왠지 모를 깊은 감동이 밀려왔어요. 전쟁의 상처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던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이 노래 속에 담겨있는 것만 같았거든요.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는 가사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희망의 메시지 그 모든 것이 외할머니가 들려주시던 한국인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답니다. 봄날이 꼭 올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나올 때면 폐허 속에서도 미래를 믿었던 그들의 눈빛이 떠오르곤 했죠.
그렇게 BTS 의 음악을 들으면서 저는 점점 더 한국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졌어요. 외할머니의 전쟁 이야기 속 한국인들의 모습이 7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를 감동시키는 케이팝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는 게 정말 신기했거든요. 그래서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도 빠져들게 됐답니다. 케이팝을 통해 시작된 호기심은 점차 학문적 열정으로 발전했어요. 소를본 대학 동양학 석사 과정을 마치자마자 한국학 박사과정에 도전했죠. 현대 한국 대중문화에 나타난 한국인의 정신세계와 그 역사적 맥락이라는 주제로 연구를 시작했는데 이는 외할머니의 기억 속 한국인들과 현대 한국 문화 사이의 연결고리를 학문적으로 탐구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랍니다. 제 연구 열정은 자연스럽게 콜레주 드 프랑스 아시아학회 200주년 기념 전시 준비에도 반영됐어요.
학회의 가장 젊은 연구원이었던 저는 한국학 섹션의 기획을 맡게 됐는데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제대로 된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한국학의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운 가까웠답니다. 그래서 저는 과감한 제안을 준비했어요. 200년이라는 긴 역사를 가진 우리 학회가 이제는 한국학을 독립된 영역으로 다뤄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전시회 준비위원회 회의가 열리던 그날 저는 평소보다 일찍 회의실에 도착했어요. 벽면에 걸린 BTS 월드 투어 포스터를 바라보며 발표 자료를 다시 한번 점검했죠. 그들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듯이 오늘 제 발표도 성공적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에요. 회의실이 하나둘 참석자들로 채워지기 시작했어요. 중국관과 일본관을 담당하는 큐레이터들의 모습이 보였고 그들의 표정에서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답니다. 아마도 제가 준비한 발표 내용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나봐요. 마지막으로, 회의실 창 밖으로 내리는 가을비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죠.
그리고 운명처럼 그날의 격렬한 토론이 시작됐답니다. 그날 회의장의 분위기는 처음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어요. 회의실 창밖으로는 파리에 늦가을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실내는 마치 한여름처럼 후텁지근 했답니다. 저는 한국학 전시 섹션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발표 자료를 들고 일어섰죠 회의실 벽면에 걸린 BTS 포스터가 제게 용기를 주는 것만 같았어요. 그런데 제가 한국학의 독립적인 전시 필요성을 설명하기도 전에 중국 측 대표 제나의 차가운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로질렀답니다. 그녀는 검은 뿔테 안경을 치켜 올리며 오만한 미소를 지었죠. 한국문화는 중화문명의 변방에 불과하다면서 독립적인 전시 가치가 있느냐며 조롱 섞인 말을 던졌어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제 가슴을 파고들었죠. 하지만 더 참을 수 없었던 건 일본 측 대표 하루카의 발언이었어요.
그녀는 회의실 반대편에서 차갑게 웃으며 일어섰는데 임라일 본부설을 언급하면서 고대 한반도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더군요. 그 순간 제 양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고, 심장은 마치 터져나갈 것처럼 쿵캉거렸답니다. 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켰어요. 그리고 현재 전 세계가 한국 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를 물었죠. BTS의 빌보드 1위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전 세계를 강타한 오징어게임까지 하지만 하루카는 저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비웃으며 이런 현대 성공이 과거의 역사적 진실을 바꿀 수는 없다고 말했어요. 그러면서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 증거가 있느냐며 차갑게 되물었죠. 회의실은 순간 숨 막히는 침묵에 빠졌어요. 제나와 하루카의 얼굴에는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가 어려 있었고, 다른 참석자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때였어요.
마치 운명처럼 제 휴대폰이 울렸고 화면에는 절친한 친구이자 도서 들어간 사서인 아미나의 이름이 떠 있었죠. 마치 구원의 손길처럼 찾아온 아미나의 전화 그 순간을 저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거예요. 회의장에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저를 향했죠. 평소에 차분한 성격과는 달리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미나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답니다. 무언가 믿을 수 없는 것을 발견했다며 당장 도서관으로 와달라고 재촉하더군요. 순간적으로 망설였어요. 중요한 회의를 중간에 빠져나가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미나의 다급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특별한 무언가가 저를 이끌었답니다. 제나와 하루카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고 저는 서둘러 회의실을 빠져나왔어요. 도서관으로 향하는 복도는 왠지 평소보다 더 길게 느껴졌어요. 20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오래된 벽돌 건물에 나무 계단을 한달음에 올라가 숨을 헐떡이며 도서관 깊숙한 곳에 있는 서구에 도착했죠.
그곳에서 아미나는 작은 손전등을 들고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미나는 저를 보자마자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어요. 마치 중대한 비밀을 간직한 사람처럼 그녀의 눈빛은 평소와 달리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죠. 그리고는 오래된 서가 깊숙한 곳으로 저를 이끌었는데 발걸음 소리조차 죽여가며 걷는 그녀의 모습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발견했다는 직감이 들었답니다. 먼지 쌓인 책장 사이에서 그녀가 꺼내온 것은 낡은 나무로 만든 작은 상자였어요. 상자의 모서리는 세월의 흔적으로 거무스름했고 작은 황동 자물쇠는 녹이 슬어 있었죠. 상자를 바라보는 순간 제 심장은 마치 고대 북소리처럼 쿵캉거리기 시작했어요. 이상하게도 이 작은 상자에서 뭔가 강렬한 기운이 느껴졌거든요. 손끝이 벌벌 떨렸어요. 마치 운명의 문을 여는 것 같은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죠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조심스럽게 말린 두루마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순간 숨이 멈는 것 같았어요. 아미나와 저는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눈빛을 교환했죠. 그녀의 눈동자에서도 같은 전율이 느껴졌답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우리는 두루마리를 펼치기 시작했어요. 오래된 종이가 부서질까봐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했죠. 서가 사이로 비치는 희미한 가을 햇살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두루마리를 비추었어요. 그리고 그 순간 거대한 탁본이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나듯 그 모습을 드러냈답니다. 숨이 머는 것 같았어요. 200년 된 도서관의 공기마저 이 순간을 위해 숨을 죽인 듯 했죠. 탁본 위로 드리워진 우리의 그림자가 마치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이건 단순한 발견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지금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마주하고 있었고, 제 온몸에 세포 하나하나 이 순간의 중요성을 온전히 느끼고 있었답니다. 마침내 완전히 펼쳐진 두루마리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규모였어요.
아미나는 6미터는 되는 것 같다며 놀란 목소리를 냈고 저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답니다. 이렇게 거대한 탁보는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것도 10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렇게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니 정말 믿기지 않았어요. 우리는 천천히 탁본을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비석의 균열을 따라 생긴 하얀 자국들이었죠. 아미나가 이 부분은 석회를 발라서 글자를 선명하게 만든 것 같다고 말했는데 그녀의 관찰력은 언제나 날카로웠답니다. 저는 그 위에 찍힌 환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어요. 각각의 글자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힘이 넘쳤거든요. 아미나는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중국 비문 치고는 뭔가 다른 느낌이 든다고 글자의 모양이나 새기는 방식이 특이하다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제 시선이 한 부분에 고정됐어요.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 아래 수많은 한자들 사이에서 한 글자가 제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신라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답니다.
마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등줄기가 서늘해지면서 동시에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솟구쳤어요. 이것은 분명 동아시아의 문서였지만 중국이나 일본의 것이 아닌 한국의 문화재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죠. 떨리는 목소리로 아미나에게 이 글자를 가리켰어요. 신라가 고대 한국의 왕국 이름이라고 설명하자 아미나의 눈도 커졌답니다. 순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했어요. 이것은 단순한 문서가 아닌 잃어버린 한국의 역사적 증거였던 거예요. 신라라는 글자를 발견한 순간에 흥분과 설렘을 가득 담아 아미나에게 속삭였어요. 그러나 도서관 서구에서 이런 중요한 문화재를 계속 살펴보는 것은 위험해 보였죠 아미나와 눈빛을 교환한 후 우리는 조심스럽게 탁본을 다시 말아 한국학 자료실로 옮기기로 했답니다. 자료실에서 탁본을 다시 펼치며 우리는 더욱 세밀하게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글자 하나하나를 확인할 때마다 이것이 한국문화재라는 확신은 더욱 강해졌죠 아미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한국학도서관의 노미숙 사서님께 연락을 드렸어요. 워낙 꼼꼼하고 신중한 성격인 아미나였기에 이런 중대한 발견에는 전문가의 확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나 봐요. 노미숙 사서 님은 파리의 한국 문화재 분야에서 가장 신뢰받는 전문가였어요. 30년 넘게 한국학 도서관을 지켜오신 분이라 혹시나 이런 귀중한 발견이 있을까? 늘 기대하고 계셨다고 해요. 전화를 받자마자 곧장 오시겠다고 하셨죠. 그런데 웬일인지 우리의 대화가 3층 건물 전체에 퍼져 나간 걸까요? 마치 그림자처럼 제나가 자료실 문 앞에 나타났어요. 중국 고문서 분야의 신성으로 불리는 그녀는 늘 완벽하게 다림질된 실크 블라우스에 테일러드 재킷을 즐겨 입었죠. 베이징대 최연소 박사 출신이라는 이력을 항상 자랑스레 내세우며 동양 고문서 분야에서 자신만한 전문가가 없다고 자부하던 사람이었답니다.
재난은 날렵한 하이힐 소리를 내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어요. 회의실에서 보았던 그 오만한 미소를 그대로 뛴 채 도수 높은 금태 안경 너머로 차가운 눈빛을 보내며 우리를 내려다보았죠 그녀의 긴 생머리가 어깨에서 우아하게 흔들렸지만 그 눈빛만은 매서웠답니다. 제나는 탁본을 힐끗 보더니,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어요. 한자로 된 문서는 당연히 중국의 것이라며 이는 분명 당나라 시대의 변방 기록일 것이라고 단정 지었죠.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탁본을 향해 뻗어오면서 이것을 중국 고문서 연구실로 가져가서 자세히 검토하겠다고 말했어요. 순간 제 심장이 쿵캉거렸답니다. 베이징 대학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제나가 이 탁본을 가져간다면 또다시 한국의 고대사가 중국의 지방 역사로 왜곡될 수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했거든요. 얼마 전에도 그녀는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 정도로 폄하하는 논문을 발표했었죠. 이대로 빼앗기면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이 온몸을 휘감았어요.
그때였어요. 노미숙 사서님이 자료실에 도착하셨답니다. 항상 한복을 개량한 듯한 단아한 치마를 즐겨 입으시던 그녀는 이날도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오셨어요. 노미숙 선생님은 6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늘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지적인 카리스마를 동시에 풍기는 분이었죠. 한국문화재 분야에서 3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그녀는 날카로운 지성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탁본을 유심히 살펴보셨어요. 비석의 글자 모양과 새김 방식 특히 받침도 부분의 특징적인 문양을 짚어가며 설명하셨죠. 더구나 비문에 등장하는 연호와 관직명이 명백히 고구려의 것이며 글자의 배치 방식도 전형적인 고구려 비석의 특징을 보인다고 하셨어요.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놀라움과 확신이 섞인 목소리로 운명 같은 말씀을 하셨답니다. 이것이 바로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이며 더구나 석회탁본 이전에 원석 탁본일 가능성이 높다고요. 제나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혈색이 가시는 게 보였어요.
자신만만하던 그녀의 오만한 미소는 순식간에 굳어버렸고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죠 특히 원석 탁본 이라는 말에 그녀의 표정이 더욱 창백해졌답니다. 원석 탁본은 비석의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던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 역사적 가치가 가장 높은 탁본이거든요. 노미숙 선생님은 이어서 광개토대왕비의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셨어요. 고구려가 동아시아 최강국이었음을 증명한 이 비석은 수나라와 당나라도 넘보지 못했던 그들의 웅장한 영토가 어디까지였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고 하셨죠. 더구나 이 탁보는 일본이 비문을 왜곡하기 이전의 것일 수 있다며 그 가치가 무척 크다고 덧붙이셨답니다. 제나는 창백한 얼굴로 자료실을 빠져 나갔어요. 아마도 아침 회의에서 자신이 한국 문화를 중국 변방의 문화로 폄하했던 말이 떠올랐던 걸까요?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복도를 따라 점점 멀어져 갔죠 제 가슴은 여전히 두근거렸지만 이번에는 흥분과 기쁨 때문이었어요.
아침 회의에서 하루카가 요구했던 바로 그 역사적 증거가 여기 있었으니까요? 노미숙 선생님은 이제 이 탁본의 체계적인 연구와 보존이 필요하다며 전문연구팀을 꾸리자고 제안하셨어요. 그리고 그 연구팀의 책임을 제게 맡기고 싶다는 말씀도 하셨죠. 창밖으로 비치는 늦가을의 햇살이 탁본 위에서 반짝였어요. 마치 광개토대 대왕이 우리에게 미소를 보내는 것만 같았답니다. 이제 우리는 잃어버렸던 한국의 역사 그 찬란했던 고구려의 이야기를 세상에 들려줄 수 있게 된 거예요.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루카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는 걸요 외할머니께서 늘 말씀하시던 한국인들의 자부심과 긍지가 이 탁본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도 말이에요.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BTS 의 콘서트장에서 느꼈던 전율과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발견했을 때의 그 떨림이 똑같았다는 게 놀랍네요. 마치 운명처럼 1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어진 한국의 저력을 직접 목격한 거니까요?
탁본이 발견된 다음날 저는 한국학 도서관에 특별 연구실에서 새벽을 맞이했어요. 탁본을 조심스럽게 펼치자 그 웅장한 크기가 다시 1번 저를 압도했답니다. 6미터가 넘는 길이의 탁본은 마치 고구려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것만 같았거든요. 먼저 노미숙 선생님의 조언대로 탁본의 진위를 정확히 감정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대재 교수님과 화상 통화를 준비했어요. 박 교수님은 광개토 대왕비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특히 동북공정에 맞서 고구려사 연구에 평생을 바치신 분이었죠. 화면 속에 밖 교수님은 탁본을 보자마자 눈빛이 달라지셨답니다. 이것이 정말 대단한 발견이며 덧칠하기 전에 원석 탁본일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을 해주셨어요. 비문의 보존 상태에 대해 말씀하시던 중 제나의 동북공정 주장을 전해 들으시곤 교수님의 목소리가 격앙되기 시작했어요. 이런 식의 역사 왜곡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며 박 교수님의 떨리는 목소리에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가득했어요.
광개토대왕비는 고구려가 동아시아 최강국이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하시면서 이 탁본의 연구와 보존이 이제 제 책임이라고 당부하셨답니다. 교수님의 말씀에 가슴이 뭉클해졌답니다. 그리고는 곧바로 비문 해독 작업에 몰두했어요. 1글자 1글자를 확인할 때마다 고구려의 웅장한 역사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았죠 특히 광개토대왕이 만주 전역을 평정하고 백제를 굴복시키며 신라를 도와 왜구를 물리치는 내용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뜨거워졌답니다. 연구실 벽에 커다란 지도를 펼쳐놓고 비문에 나오는 고구려의 영토를 하나씩 표시해 나갔어요. 그러다 문득 제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죠. 표시된 영역이 현재 한국 기업들의 세계 진출 지도와 놀랍도록 겹쳐지는 게 아니겠어요. 마치 1500년 전 광개토대왕이 개척했던 그 길을 따라 현대의 한국 기업들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만 같았답니다. 이런 놀라운 발견에 가슴이 두근거리던 그때 아미나가 커다란 스크린을 들고 연구실로 들어왔어요.
우리는 곧바로 고구려 영토 지도 위의 현대 한국 기업들의 진출 현황을 투사해보기 시작했답니다. 과거 고구려가 지배했던 만주지역에는 현대자동차의 공장들이 들어서 있었고, 광개토대왕이 원정했던 내몽골 지역에는 삼성전자의 거대한 생산기지가 자리 잡고 있더군요. 심지어 신라를 도와 왜구를 물리쳤던 바닷길은 현재 케이팝이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문화의 통로가 되어있었어요. 이 발견을 정리하면서 문득 깨달았답니다. 15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고구려의 진취적인 기상이 현대 한국인의 DNA 속에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는 걸요 마치 광개토 대왕이 말을 타고 만주 벌판을 누비며 새로운 영토를 개척했듯이 현대의 한국인들은 기술과 문화로 세계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거예요. 더욱 흥미로웠던 건 비문에 새겨진 고구려인들의 기상이었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주변국과 당당히 맞서 싸웠답니다.
이런 자부심 심은 지금의 BTS가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고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며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를 열광시키는 한국인들의 자신감과 똑같아 보였죠 노미숙 선생님이 들려주신 말씀이 떠올랐어요. 진정한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그려나가는 힘이라구요. 그 순간 저는 이 탁본 연구가 단순한 학술적 발견을 넘어 한국의 저력과 미래를 보여주는 중요한 열쇠가 될 거란 확신이 들었답니다. 박 교수님께 이런 분석 결과를 보고하자 교수님의 눈시울이 부러지셨어요. 프랑스의 젊은 연구자가 고구려와 현대 한국의 연관성을 이렇게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하신 것 같았죠 외할머니가 한국전쟁 때 보았던 한국인들의 불굴의 의지가 실은 광개토대왕 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었다는 생각에 저도 뭉클해졌답니다. 연구실의 창 너머로 저녁 노을이 물들기 시작했지만, 저희 흥분은 가라앉을 줄 몰랐어요.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새겨진 비석이 세워진 곳 중국 지린성 지안시는 현재 고구려 고분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됐거든요. 그리고 그곳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수많은 고구려 고분들이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알게 됐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웠던 건 이 비석이 단순한 기념비가 아니라는 사실이었어요. 광개토대왕의 영토 확장과 군사적 승리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안녕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는 내용도 담겨있더군요. 마치 현대 한국 기업들이 세계 시장에서 성공하면서도 사회적 책임을 잊지 않는 것처럼 고구려의 지도자들도 힘과 책임의 균형을 잘 알고 있었던 거예요. 아미나는 비문의 마지막 부분을 가리키며 의미심장한 발견을 했답니다. 능묘를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규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는데, 이는 후세에 자신들의 역사가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았어요.
마치 1500년 전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만 같았죠 그날 밤 연구실을 나서면서 고구려 사람들과의 약속을 마음에 새겼어요. 제나와 같은 사람들의 왜곡된 주장으로부터 이 찬란한 역사를 지켜내겠다고요. 그리고 현대 한국의 놀라운 성공이 결코 우연이 아닌 광개토대왕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민족의 위대한 유산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겠다고 말이에요. 탁본의 진위를 밝혀낸 다음날 저와 아미나는 1가지 중요한 의문을 품게 됐어요. 도대체 어떻게 이 탁본이 프랑스까지 오게 된 것일까? 하는 점이었죠. 노미숙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아시아학회 기록에 따르면 1917년 5월 11일 앨리스 게티라는 여성이 이 탁본을 기증했다고 해요. 하지만 그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답니다. 아미나는 특히 한 가지 점이 의문이라고 했어요.
당시는 일제강점 청정전기 시절인데 어떻게 서양 여성이 이렇게 중요한 한국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었는지 또 왜 하필 프랑스 아시아학회에 기증했는지 말이에요. 우리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도서관 지하 수장고로 향했답니다. 습기 차단을 위해 특수 제작된 2중 문을 열자 100년이 넘는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공기가 느껴졌어요. 앨리스 게티는 당시 유명한 동양 미술 연구가였다고 해요. 특히 불교 미술의 조예가 깊었고 1914년에는 북방불교의 불상과 도상에 관한 자료집을 발간했다는 기록도 있더군요. 재미있는 건 이 자료집 발간 전 6 년 동안 그녀가 세 차례나 동아시아를 여행했다는 사실이었어요. 특히 중국 베이징의 골동품 상가인 유리창을 자주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죠. 당시 이곳은 문화재 거래의 중심지였다고 하네요. 기증한 날짜인 1917년 5월 11일 바로 그날 동양학자이자 아시아 학회 회원이던 에두아르 샤바 샤반이 이 탁본에 대해 짧게 소개했다는 기록이 있더군요.
샤반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소장한 또 다른 광개토대왕비 탁본의 수집가이기도 했죠. 이런 기록들을 정리하다 보니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자꾸 눈에 띄었어요. 왜 게티는 자신이 수집한 탁본을 프랑스 국립 도서관이 아닌 아시아학회에 기증했을까? 게다가 샤바니 같은 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도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엔 너무 의심스러웠죠 서구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졌어요.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인 고문서들의 먼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죠. 우리는 동아시아 관련 자료가 보관된 뒤구역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개티가 기증한 다른 불교 미술 자료들도 함께 보관되어 있었답니다. 서가 사이를 지날 때마다 삐걱거리는 오래된 나무 바닥 소리가 울렸어요. 그때였어요. 오래된 책장 뒤편에서 묘한 금속음이 들렸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벽면에 은밀하게 숨겨진 작은 금고를 발견했답니다. 표면에는 에이 지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고, 금고 주변으로 불교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어요.
순간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했어요. 엘레스 게지 바로 그녀의 금고일 거란 직감이 들었거든요. 우리의 발견에 들뜬 마음도 잠시 서구 입구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어요. 일본 고문서 담당 큐레이터인 하루카였죠 평소와 달리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는데, 동아시아 고문서 보존 상태 점검이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었거든요. 그녀는 여전히 싸늘한 미소를 뛴 채 금고를 힐끗 보더니, 고문서 보존을 위해 이곳은 즉시 폐쇄해야 한다며 서구 열쇠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문서보존이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조사를 방해하려는 의도가 너무나 뻔히 보였답니다. 하루카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긴장감이 감돌았지만 아미나가 재치있게 상황 돌파했어요. 노미숙 선생님의 공식 허가를 받은 조사라며 허가증을 내밀었거든요. 하루칸은 입술을 깨물며 돌아섰지만 우리를 감시하듯 서고 입구 근처를 맴도는 게 느껴졌답니다. 금고 앞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자 불교 문양 사이에 숨겨진 작은 숫자들이 보였어요.
아미나는 이것이 개티가 남긴 암호일 거라며 그녀의 불교 미술 자료집을 가져왔죠 우리는 자료집 속 불상 도판 번호와 금고의 숫자를 대조해 가며 비밀번호를 추측해 나갔답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금고가 열렸어요. 불교 문양 속에 숨겨진 번호를 맞추자 100년의 시간을 간직한 금고가 무거운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답니다. 먼지 섞인 공기가 새어 나왔고 오래된 가죽 냄새가 코끝을 스쳤죠 금고 속을 들여다보는 순간 가장 먼저 눈에 뛴 것은 낡은 가죽 커버의 일기장이었어요. 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답니다. 100년 전 누군가의 비밀을 들여다본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했거든요. 더구나 이 일기장이 바로 앨리스 게티의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치 역사의 문을 여는 것 같은 긴장감이 온몸을 휘감았죠 그 옆으로는 누렇게 변색된 편지 몇 통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그 사이로 1장의 사진이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었어요. 저는 떨리는 손을 천천히 뻗어 사진을 집어 들었죠.
아미나도 숨을 죽인 채 제 어깨 너머로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사진을 꺼내드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작은 탄성을 내뱉고 말았어요. 세피아 빛사진 속에는 한 명의 서양 여인이 한복을 입은 세 명의 여인들과 나란히 앉아 있었거든요. 우아한 자태의 서양 여인은 분명 개티였을 텐데 놀랍게도 그녀의 눈빛에서는 당시 조선 여인들과 똑같은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답니다. 마치 그들과 하나가 된 듯한 무언가 중요한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어요. 떨리는 손으로 사지 사진을 뒤집어 보는 순간 저는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10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검은 잉크로 쓰인 글씨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거든요. 조선의 독립을 꿈꾸며 1912년 베이징 이 글귀를 읽는 순간 저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답니다. 이제야 개티의 눈빛이 왜 그토록 강렬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죠. 숨을 고르며 일기장을 집어들었어요.
표지에 가죽은 오랜 세월을 견뎌낸 듯 바스러질 것처럼 보였지만 묘하게도 단단했답니다. 첫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기자 모리스 쿠랑의 편지가 모습을 드러냈어요. 프랑스어로 쓰인 그의 필체를 알아보는 순간 저는 심장이 멈출 것만 같았죠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제 손은 계속해서 떨렸어요. 일제가 한글을 탄압하고 말살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쿠랑이 이를 막기 위해 비밀리에 한국어 문법서를 편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거든요. 특히 한글은 인류가 만든 가장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문자라는 것 구절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편지 뒷면이었어요. 프랑이 은밀히 기록해둔 한글 보존 계획이 상세히 적혀 있었죠. 당시 그가 파리 동양화학교에서 가르치던 학생들과 함께 한글로 된 책들을 수집하고 프랑스어로 번역해서 보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예요. 아미나가 저를 바라보며 속삭였어요.
우리가 지금 발견한 것이 단순한 옛 기록이 아니라 한국의 문자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라고요.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죠.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또 다른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됐답니다. 일기장 속에서 발견한 두 번째 편지는 샤를 바라의 것이었어요.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그의 편지에는 믿기 힘든 내용이 담겨 있었죠. 1910년대 일본이 조선의 문화재를 약탈하려 할 때 그가 비밀리에 고구려 문화재들을 프랑스로 반출했다. 그것도 조선의 독립운동가들과 협력해서 말이에요.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답니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문화재를 숨기고 보호하는 과정이 마치 첩보 영화처럼 상세히 적혀 있었거든요. 특히 광개토대왕비 탁본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숨이 머는 것 같았어요. 바라가 쓴 글에 따르면 이 탁본은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고구려의 영광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였기에 반드시 지켜내야 할 가치가 있었다는 거예요.
개티의 일기는 여기서 더욱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답니다. 그녀는 불교 미술 연구가라는 신분을 이용해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했다고 해요. 특히 유리창에서 문화재를 구입하는 것처럼 가장하여 실제로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전달했다는 기록도 있었죠.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발견한 그녀의 고백은 우리를 완전히 숙연하게 만들었어요. 나는 중국과 일본의 문화를 모두 연구했지만, 한국의 문화야말로 가장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고 확신한다. 이 탁본을 프랑스 아시아학회에 기증하는 것은 언젠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았을 때 그들의 찬란했던 역사를 증명해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 모든 기록들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저와 아미나는 말을 잃었어요. 서양의 한 여성이 이토록 한국의 독립과 문화수호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라웠거든요. 창밖으로 비치는 햇살이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게티의 일기장을 읽어나갔답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건 게티가 광개토대왕비의 가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점이었어요. 그녀는 일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었죠. 고구려는 중국이나 일본과는 차원이 다른 문명을 이룩했다. 광개토대왕비야말로 그들이 동아시아의 최강 대국이었음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이 비문을 훼손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게티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아닌 아시아학회에 탁본을 기증했던 거예요. 당시 일본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이면서도 샤반과 같은 동양학 전문가들이 있어 탁본의 가치를 제대로 연구하고 보존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죠. 갑자기 아미나가 일기장 속에서 작은 쪽지 하나를 발견했어요. 거기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답니다. 이 금고의 내용물은 반드시 한국이 독립을 되찾고 그들의 찬란했던 역사가 재평가될 때 세상에 공개되어야 한다. 저는 그 순간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어요.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닌 한 세기 동안 잠들어 있던 진실이었던 거예요. 하지만 우리의 발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일기장 맨 뒷부분에서 발견한 낡은 지도 1장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았답니다. 그것은 당시 고구려 유적지들을 표시한 지도였는데 특히 광개토대왕비가 있는 지린성지안 지역 여기 붉은 잉크로 강조되어 있었죠. 게티는 지도 아래에 이런 메모를 남겼더군요. 이곳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수많은 고구려의 문화재들이 묻혀있다. 특히 광개토대왕비 주변에는 더 많은 비석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것들을 파내는 것은 위험하다 일본이 이를 약탈하거나 훼손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순간 저는 전율이 잃었어요. 단순히 불교 미술 연구가였던 줄 알았던 게티가 사실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광개토대왕비 탁본을 프랑스로 가져온 것이 단순한 문화재 수집이 아닌 치밀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문화수호 운동이었다는 사실에 정말 소름이 돋았답니다.
특히 한글의 우수성을 알아보고 보존하려 했던 모리 스쿠랑의 노력 고구려 문화재를 지키려 했던 샤를 바라의 활동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원했던 게티 이분들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는 이렇게 찬란했던 우리의 역사를 증명할 수 없었을 거예요. 아까 전 우리를 막으려 했던 하루카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제가 느끼는 이 전율은 아마도 100년 전 개티가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이었을 거예요. 마치 제가 독립운동가가 된 것 같은 이상한 흥분감도 들었죠. 그리고 이제는 제가 그들의 뒤를 이어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내야 할 차례라는 사명감도 함께 말이에요. 아미나와 저는 서로를 바라보았어요.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이제는 분명해졌답니다. 100년 전 개티가 그랬듯이 이제는 우리가 이 역사적 진실을 지키고 알려야 할 차례였으니까요?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개티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자 과제였던 거예요. 그때였습니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저와 아미나는 순간 얼어붙었어요. 하루카가 서구관리팀 직원들을 3명이나 대동하고 나타난 거예요. 그녀의 차가운 미소 뒤에 숨겨진 의도가 느껴졌죠 마치 100 년 전 일제가 우리 문화재를 약탈하려 했던 것처럼 하루카는 정식 공문을 내밀며 문서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우리의 발견을 중단시키려 했답니다. 제 머릿속에는 게티의 일기에서 읽었던 구절이 스쳐 지나갔어요. 그들은 언제나 그럴 듯한 명분으로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려 들 것이다. 저는 침착하게 일기장과 편지들을 정리하면서 아미나와 눈빛을 교환했죠. 비록 지금은 물러서야 하지만 우리는 이미 진실을 확인했으니까요? 다음날 아침 일찍 노미숙 선생님과 박대재 교수님을 모시고 급히 회의를 열었어요. 어제 사건과 개티의 일기장에서 발견한 내용들을 하나하나 전달하는 동안 2분의 표정이 점점 더 무거워졌답니다.
특히 고구려 유적에 대한 개티의 예언적인 언급을 전달했을 때는 박 교수님의 눈빛이 마치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났죠. 박 교수님은 주먹을 불끈 쥐시며 우리의 사명을 강조하셨어요. 개티가 백 년 전에 예견했던 것처럼 지금도 고구려의 문화유산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위험에 처해 있다고요.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나서서 이것을 지켜내야 할 때라고 말씀하셨답니다. 노미숙 선생님도 깊이 공감하시며 결연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어요. 프랑스의 구석구석에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한국 문화재들이 잠들어 있을 것이며 개티와 같은 분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이 소중한 유산들을 이제는 우리가 찾아내고 연구해야 할 때라고요.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했어요. 이것은 단순한 문화재 발굴 사업이 아닌 한국의 진정한 역사를 되찾는 역사적인 프로젝트가 될 거였죠 프랑스 전역에 도서관과 박물관에 숨겨진 한국문화재들을 발굴하고 그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것 바로 게티가 우리에게 남겨준 마지막 투쟁이자 과제였으니까요?
그리고 운명은 우리의 결심을 기다렸다는 듯이 놀라운 반응을 보여줬답니다. 회의가 끝나고 막 연구실로 돌아왔을 때였어요. 제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했는데 전 세계 언론들이 우리의 발견에 대한 취재를 요청하고 있었던 거예요. 광개토대왕비 탁본의 발견은 순식간에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죠. 르몽드지가 가장 먼저 프랑스에서 발견된 동아시아 제국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인 보도를 했고 피가로지도 한국 고대사를 뒤흔들 새로운 발견이라며 특집 기사를 실었답니다. 특히 게티의 일기장 발견까지 더해지면서 이 이야기는 단순한 문화재 발견을 넘어 100년에 걸친 감동적인 역사 드라마가 되어버렸어요. 특히 BBC와 CNN 의 후속 보도는 이 발견의 의미를 더욱 극적으로 전달했어요. 천오백 년 전 동아시아 최강국이었던 고구려의 진면목이 프랑스의 작은 도서관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전 세계인들의 이목을 사로잡았거든요. 하지만 진짜 도전 도전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답니다.
저는 콜레주 드 프랑스 이사회에 한국학 독립 부서 설립을 제안했어요. 더 이상 중국이나 일본 전문가들이 한국 문화재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주장이었죠. 현재 콜레주 드 프랑스의 한국문화재 연구는 중국과 일본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되고 있었어요.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를 자국의 지방 정권으로 왜곡하고 일본의 임나일본 부설은 한반도 남부를 일본의 식민지처럼 서술하면서 한국의 고대사를 심각하게 왜곡하고 있었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학 독립부서 설립은 단순한 조직 개편이 아닌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는 중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죠. 특히 제가 주목한 것은 고구려의 영토 확장과 현대 케이컬쳐의 세계화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었어요. 고구려가 자발적인 문화적 매력으로 주변국들을 매료시켰듯이 케이컬쳐도 강제나 침략이 아닌 아닌 자연스러운 문화적 영향력으로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거든요.
이는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문화를 강요하는 중국의 문화공정이나 경제적 우위를 내세워 자국 문화를 전파하려는 일본의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답니다. 연구소장 취임식 날 제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벅차올랐어요. 창밖으로 비치는 은은한 아침 햇살이 마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만 같았거든요. 외할머니께 전화를 드렸을 때 할머니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기억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했답니다. 그때 할머니가 보았던 한국인들의 불굴의 의지가 지금 제가 시작하는 이 여정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니 가슴 한편이 뭉클해지더군요. 이제 저는 매일 아침 연구소에 들어설 때마다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된답니다. 광개토대왕비가 1500년 동안 고구려의 진정한 모습을 지켜왔듯이 프랑스 곳곳에 숨겨진 한국의 역사적 진실들을 찾아내겠다고요. 그리고 언젠가는 더 이상 우리의 역사가 타인에 의해 왜곡되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면서 오늘도 열정적으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답니다.
이것이야말로 107년 전 1917년 앨리스 게티가 그녀의 일기장에 꾸준히 적어두었던 진정한 한국학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사연은 여기까지입니다. 어떻게 들으셨나요? 오늘 사연이 재미있으셨다면 구독 버튼 1번만 꼭 클릭해주세요. 저는 더 좋은 사연으로 찾아 뵐게요 감동도서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중국은 과거부터 5천 년간 대국으로서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어요. 주변국들은 중국의 눈치를 보며 조공을 바치면서 나라를 운영했어요. 특히 중국과 가까이 있던 고구려는 독자적인 문화가 없었습니다. 여기 하버드대학교 세미나장에서 개념 없는 중국 학생이 망언을 쏟아내고 있는데요. 이때 한국 학생의 1마디에 세미나장은 일순간의 정적이 되고 중국 학생은 더 이상 고개를 들지 못하게 됩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안녕하세요. 저는 하버드 대학교에 다니는 샹롯 윌슨이에요.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역사와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버드 대학 입학을 위해서는 자기소개서와 에세이의 제 경험을 잘 녹여내야 했는데 저는 제 관심사를 살려 열정적으로 작성했어요. 특히 2년간 주말마다 참여했던 지역 문화유산 보존 활동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전국 고교생 역사논문대회에서 세계 대공황이 동아시아 국가 간 관계에 미친 영향이라는 주제로 대상을 받은 것도 제 열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경험이었어요. 이런 노력 덕분에 하버드 동아시아학과의 장학생으로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첫 학기가 시작되고 기숙사에서 룸메이트 사만다를 만났어요. 차만다는 영어학을 전공하는 2학년 학생이었는데. 우리는 금세 친해졌죠 어느 날 밤 사만다가 디즈니 영화 뮤란을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사실 저는 평소에 다큐멘터리나 역사 드라마를 주로 봐서 애니메이션은 좀 어린이틱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사만다의 열정적인 설명이 궁금해져서 함께 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서 제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어요뮬란이라는 한 여성이 가족을 위해 남장을 하고 전쟁에 나가는 용기 있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거든요. 특히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현대사회의 많은 젊은이들의 고민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의 배경도 눈길을 끌었어요. 웅장한 자금성 끝없이 이어지는 만리장성 안개 낀 산수화 같은 풍경들까지 이런 요소들이 중국의 역사와 문화유산 두산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비록 애니메이션이지만 이를 통해 중국의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었죠. 영화를 본 후 궁금증이 폭발했어요. 뮬란 이야기의 실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일까? 영화에서 묘사된 훈족과의 전쟁은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 중국의 군사 문화와 여성의 지위는 어땠을까?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에 가서 관련 책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유튜브에서도 중국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를 찾아봤어요. BBC에서 제작한 더 스토리 오브 차이나라는 시리즈가 특히 도움이 많이 되었죠. 이런 관심이 커져서 2학기 수강 신청을 할 때 주저 없이 중국 영화의 이해라는 수업을 선택했어요. 이 수업에서는 매주 다른 중국 영화를 보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정말 흥미진진 했습니다. 특히 존 우 감독의 적벽대전을 보고 기쁜 큰 감동을 받았어요. 이 수업에서 중국인 유학생 왕위를 만나게 된 것도 큰 행운이었죠. 베이징 출신인 그는 중국 문화와 영화에 대해 정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거든요. 영화 토론 시간마다 왕위는 영화의 숨겨진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의미를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듯 설명해 주었어요. 특히 제가 깊은 감명을 받았던 적벽대전의 대한괴해석이 정말 인상적이었답니다. 왕위는 이렇게 말했어요.
찰롯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가 바로 이 적벽대전이야 이 전투에서 제갈량은 정말 대단했지 오나라의 힘을 빌려 손 하나 까딱 않고 위나라를 물리쳤어 그리고 조조가 보낸 장관을 역이용해서 이간질까지 했다니까 왕위의 이 말을 듣고 저는 깜짝 놀랐어요. 이간질은 분명 나쁜 것이지만 전쟁 중에는 이런 책략이 전략상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전쟁의 혼란 속에 이렇게 정교한 계략을 세울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그러면서 문득 이런 전략이 현대 정치나 국제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어요. 과연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오히려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될지 고민이 됐어요. 제가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왕위가 더 놀라운 이야기를 덧붙였어요. 찰럿 제갈량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아 전쟁 중에 마음대로 바람까지 조정했대 동남풍을 불게 해서 조조의 함선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지 뭐야?
왕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마치 제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적벽대전 현장으로 순간 이동한 것 같았어요. 정말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졌죠 그러던 어느 날 이렇게 중국 영화의 매력에 푹 빠져있던 제게 뜻밖의 일이 벌어졌어요.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왔는데 사만다가 드라마를 보고 울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거예요.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사만다는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 시즌 투가 올해 12월에 개봉한다며 그전의 시즌 2를 다시 보고 있다고 했어요. 저는 의아해서 예전에 1번 봤으면 됐지 무슨 드라마를 다시 또 볼 이유가 있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러자 사만다는 한국 드라마는 매번 볼 때마다 새로운 의미와 감동을 준다며 함께 보자고 제안했어요. 그러면서 사만다가 오징어 게임의 내용을 설명해 주었는데 그 말을 듣고 저는 잠시 망설여지게 되더라고요. 오징어 게임의 기본 줄거리가 456 명의 참가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456억 원에 상금 획득하는 서바이벌 게임이었거든요.
너무 폭력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하고 있는데, 차만다는 이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고 말해주었어요. 미국은 물론 홍콩 대만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14개 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거예요.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문득뮬란을 통해 중국문화의 관심을 가지게 된 경험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한국 드라마도 1번 시도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결국 사만다와 함께 오징어 게임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때부터 오징어 게임에 완전히 빠져들고 말았어요. 특히 지영의 이야기는 정말 가슴 아프면서도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지영이 구슬치기 게임에서 새벽과 짝이 되는 순간부터 그들의 대화를 통해 서로의 아픔을 나누는 과정이 너무나 감동적이었어요. 지영은 어렸을 때 고아로 자라서 구슬치기 게임에서 이기고 상금을 타더라도 만날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반면에 새벽은 상금을 타게 되면 잃어버린 동생도 찾고 제주도 여행도 가고 어머니도 만나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영은 구슬치기에서 지게 되면 죽게 되는 상황인데도 일부러 새벽한테 져주게 됩니다. 지영의 불운한 과거와 그로 인한 상처 그리고 그녀가 새벽에게 보여주는 따뜻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특히 지영이 새벽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구슬을 떨어뜨리는 장면은 정말 가슴 아팠죠 그녀가 마지막으로, 강새벽 고마워 나랑 같이 해 줘서 라고 말할 때 저와 사만다는 함께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어요. 이 장면을 통해 한국 드라마가 얼마나 감동적이고 깊이 있을 수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단순한 서바이벌 게임을 넘어서 인간의 본성과 사회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는 방식에 감탄했어요. 한국 드라마가 이렇게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부터 올리며 감정을 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만다를 통해 이 드라마가 미국 방송계 최고권위상 에미상 시상식에서 유발 6관왕을 달성하며 새 역사를 썼는지 알게 되었죠. 게다가 왜 한국 드라마와 케이 콘텐츠의 전세계 사람들이 열광하는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습니다. 오징어 게임을 본 후 저는 한국 문화에 대해 더 깊이 빠지게 되고 궁금해졌어요. 사만다에게 오징어 게임 투가 개봉하는 날을 물어보고 10월 26일을 달력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더 재미있는 드라마가 없는지 물어봤죠 사만다는 더 재미있는 것을 찾아보자며 휴대폰으로 검색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의 휴대폰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폴더블 삼성 폰이었습니다. 이전에 사만다의 휴대폰으로 오징어 게임을 볼 때는 몰랐지만 그것이 반으로 접히는 휴대폰이었던 거예요. 접으면 휴대폰이 주머니에 쏙 들어가고 영상을 볼 때는 펴서 고화질로 영상을 볼 수 있어서 정말 탐났어요.
더 놀라운 것은 사만다에게 물어보니 삼성은 폴더블 기술력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나고 그래서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미국인이라서 당연히 애플을 쓰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사만다의 말을 듣고 다음에는 삼성 폰으로 바꿔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어요. 사만다는 삼성이 애플보다 뛰어난 점이 영상 화질에 있다면서 심지어 이번 파리올림픽에서도 애플폰이 아니라 삼성폰이 중계 독점권을 받았다고 말했어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인 애플을 제치고 한국 기업이 올림픽 중계권을 따냈다니 말이에요. 스마트폰과 티브이는 역시 한국이 IT 강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곡면 디스플레이와 폴더블폰 같은 혁신적인 기술들은 우리 미국에는 없거든요. 이쯤 되니 저는 한국의 기술력에 대해 완전히 감탄하게 되었어요. 제가 이렇게 한국 드라마와 제품에 관심을 많이 갖고 다진이 사만다도 저에게 더 많은 한국 문화를 소개해 주고 싶어 했어요.
사만다는 내일 점심을 학교 앞 판인 식당 고추장에 가자고 제안했어요. 다음날 사만다와 함께 고추장에 갔습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풍성한 한국 음식 냄새가 코를 자극했어요. 놀랍게도 식당은 한국 식당인데 손님들은 거의 다 미국인이었습니다. 하버드에 다니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근처에서 일하는 직장인들까지 점심시간이면 이 한인 식당을 찾아 북적거린다고 하더라구요.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식당을 운영하시는 아주머니의 인상이 정말 푸근했어요. 음식도 1그릇 가득 풍성하게 담아 주셨죠 저는 가장 추천하는 메뉴가 무엇인지 물어봤고 아주머니는 비빔밥을 추천해 주셨어요. 비빔밥을 먹어보니 여러 가지 채소와 고기 계란이 어우러져 한 그릇에 건강한 한 끼를 담은 것 같았어요. 너무 맛있어서 어떻게 만드는 건지 아주머니께 여쭤봤더니, 친절하게 재료와 조리법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김치의 아삭한 식감과 매콤새콤한 맛이 입안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았고 불고기의 부드러운 육질과 달콤한 양념 맛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한식이 왜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지 직접 체감할 수 있었어요. 건강에도 좋고 맛도 있어서 정말 놀라웠습니다. 미국에서도 이렇게 훌륭한 한국 문화와 먹거리를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왜 이제야 알게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한탄했어요. 차만다 라는 룸메이트를 만나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 생각했습니다. 그녀 덕분에 한국 문화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었고 앞으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그래서 수업이 끝난 후 왕희에게 한국 문화에 대한 제 새로운 관심사를 신나게 이야기 했습니다. 오징어 게임 독특한 스토리와 한국 음식의 맛 그리고 삼성이 혁신적인 기술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했어요. 하지만 제 이야기를 들은 왕위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더니, 갑자기 오징어게임은 한국이 중국 것을 베낀 거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저는 깜짝 놀라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죠. 왕위는 한국은 과거부터 중국의 속국으로 소국이라 불리면서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어요. 오징어 게임 같은 대작이 중국에서 베낀 것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왕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어요. 한국 문화의 중국 기원설을 계속해서 주장했거든요. 한복이 중국의 한포에서 유래했다느니 한국의 전통 음식들도 대부분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느니 하는 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공부해본 걸 종합해 봤을 때 왕위의 말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어요. 한국의 김치나 비빔면 김밥 같은 음식들은 한국의 기호와 식재료 그리고 문화적 특성이 깊이 반영된 고유한 음식이라고 배웠고 한식 식당 고추장에서 주인 아주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게다가 한식의 발효문화나 장 문화 같은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한국식 문화를 중국 거라고 주장하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말이었어요.
심지어 제가 사만다랑 같이 갔던 미국 내한식당 이름마저 고추장인걸요 그래서 저도 나름대로 반박을 했어요. 문화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각국의 고유한 특색이 더해져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은 한국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발전시켜 독자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고 설명했어요. 이는 단순히 베끼기가 아니라 창조적인 과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렇지만 왕위는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결국 우리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 왕의 주장이 일리가 있는 건지 아니면 단순한 질투심 때문인지 혼란스러웠어요. 이 일을 계기로 저는 동아시아의 역사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특히 왕위가 주장했던 과거부터 한국이 쭉 중국의 속국이었다는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이는 한국의 정체성 자체를 부정하는 말이나 다름없었거든요. 특히 과거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 그리고 삼국시대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싶었어요.
한국이 정말로 늘 중국의 속국이었는지 아니면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를 가진 국가였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거든요. 도서관에서 관련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가 중국의 수 당과 맞서 싸운 역사 신라가 당과 동맹을 맺어 삼국을 통일한 과정 등을 알게 되었어요. 특히 고구려 을지문덕이 평양성에서 수나라 군대를 유인의 살수해서 대승을 거둔 전략은 정말 놀라웠어요. 고구려의 역사를 깊게 공부해보니 을지문덕이 중국 중국의 전략과 제갈량의 적벽대전 전략보다도 더 뛰어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갈량이 적벽대전에서 불과 20만의 군대로 조조해 80만 대군을 물리쳤다면 을지문덕은 30만의 군사로 수나라의 113만 대군을 격파했으니까요? 한편으로는 어떻게 고구려가 5천 년간 중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독자적인 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핵심 원동력이 무엇인지도 궁금해졌습니다.
이런 뛰어난 전략과 군사력이 고구려의 독립을 지켜낸 큰 요인 중 하나였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왕위와 어색한 논쟁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이었어요. 기숙사 현관 앞 게시판에서 한 포스터가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버드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주최하는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세미나에 대한 안내문이었어요. 이 세미나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진과 외부 전문가들도 참여했습니다. 참여하는 공개 토론회 형식이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과 연구자들이 모여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는 자리라는 설명이 있었어요. 포스터를 읽으며 이 세미나에 참석하면 제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여기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나중에 왕위와 더 깊이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특히 이번 세미나의 주제가 고대 동아시아 국가들의 관계와 문화 교류여서 제 관심을 더욱 끌었습니다.
이는 제가 최근 고민하던 문제들과 딱 맞아떨어지는 주제였거든요. 그 자리에서 바로 참가 신청을 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이 세미나를 통해 역사를 더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다양한 시각과 의견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되었습니다. 세미나 당일 저는 설렘을 안고 하버드 동아시아 연구소로 향했어요. 세미나장에 들어서자 참석자 명단이 눈에 띄었고 거기서 뜻밖에도 왕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왕위도 참석했다니 놀랐어요. 아마도 그도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찾고 싶었던 모양이에요. 한편으로는 왕위가 또 다시 헛된 주장을 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세미나는 주제 발표 후 자유 토론 형식으로 진행된다고 했어요. 각국 학생들과 전문가들이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세미나장은 유자 형태로 책상이 배치되어 있었고, 아시아 학생들이 많았어요. 특히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있는 외국 학생들의 참여가 눈에 띄었습니다.
미국 학생들과 교수님들은 중간중간에 위치해 있어 토론 전체를 조율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죠. 토론이 시작되자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각국 학생들은 자국의 입장을 대변하려는 듯 열정적으로 손을 들어 발언 기회를 얻으려 했어요. 특히 중국과 한국 외국 학생들 사이에 신경전이 눈에 띄었습니다. 외국 학생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양측의 주장을 경청하는 모습이었어요. 토론이 시작되자 왕위가 먼저 발언권을 얻었어요. 그는 제 예상처럼 처음부터 거침없었습니다. 중국은 과거부터 5천 년간 대국으로서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했어요. 주변국들은 중국의 눈치를 보며 조공을 바치면서 나라를 운영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중국과 가까이 있던 고구려는 약탈문화를 기초로 해서 성장한 나라라고 언급했어요. 역시 제 예상처럼 왕위는 중국 역사를 우선시하고 의도적으로 한국의 문화를 폄하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도 왕위와의 대화 후 도서관에서 공부했던 내용을 말하려고 손을 들려고 했어요.
고구려는 중국의 조공을 바치기보다 용맹하게 맞서 싸웠고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등 제가 봤던 것을 이야기 하려 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먼저 손을 들고 발언권을 얻었어요. 그는 키가 크고 단정한 외모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학생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이름이 박민준이었는데. 그는 눈빛부터 결연하고 날카로웠어요. 민주는 차분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주는 왕의 주장이 편협한 국가주의적 사고라고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어요. 고구려는 독자적인 국가로서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군림했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증거로 광개토대왕 비문을 언급했는데 그의 설명이 매우 구체적이어서 놀랐습니다.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고구려의 영토 확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준이 말했어요.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하여 58 성 700 촌을 빼앗았고 신라를 도와 왜구를 물리쳤으며 말갈족을 정복하고 동부여를 멸망시켰습니다. 심지어 요동 지역까지 진출해 한반도를 넘어 만주 전역을 지배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어요. 민준의 상세한 설명에 세미나장이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이렇게 구체적인 역사적 증거가 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고구려가 정말로 강대국이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민준의 말에 따르면 오히려 한국이 강대국으로서 아시아에서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거였어요. 그러자 왕위가 다시 반박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동요가 느껴졌어요. 고구려의 약탈문화처럼 최근의 오징어 게임도 중국의 것을 모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세미나 장의 공기가 팽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이 말을 듣고 민준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습니다.
그의 표정에서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함께 현대문화까지 깎아내리는 것에 대한 불쾌감이 읽혔어요. 민준이 어떻게 반박할지 긴장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민준은 베끼는 건 오히려 중국이 한국을 베낀다고 강하게 주장했어요. 오징어 게임 투의 개봉과 전 세계적 흥행을 모함하려는 의도라고 말하면서 실제로 베끼는 건 중국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최근 사건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했어요. 2018년 중국이 한국 기업 직원들을 빼내가 반도체 기술을 유출한 사건을 예로 들며 이를 명백한 기술 탈취라고 했습니다. 또한 한국의 대장금이 중국에서 그대로 리메이크된 것과 김치를 중국의 파오차이라고 주장한 논란도 언급했어요. 민준의 말을 들으며 저는 제가 본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떠오르면서 그때 느꼈던 감동이 생생하게 되살아났습니다. 저런 퀄리티 높은 수준의 드라마가 단순한 모방에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국 드라마를 보면 영혼이 팔리는 것처럼 심장이 뛰는 걸 경험 그러면서 한국 드라마는 그 안에 자본주의 모순과 인간의 갈등 그리고 화합이라는 본연의 감정을 녹여내는 뛰어난 예술작품이었죠. 민주는 계속해서 태양의 후예나 별에서 온 그대 같은 한국 드라마들이 중국에서 무단으로 표절되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고 말했습니다. 한국 문화를 베끼면서도 오징어 게임 같은 세계적인 콘텐츠는 훼방 놓기에 바쁜 게 중국이 아니냐고 반문했어요. 왕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지만 여전히 뭔가 흠집을 내고 싶어 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한국 드라마는 폭력적인 내용으로 젊은 층에게만 인기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오징어 게임을 예로 들며 사람을 죽이는 잔인한 내용이 어떻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지 반문했어요. 민주는 침착하게 반박했습니다. 오징어 게임이 나이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드라마 라고 말하면서 실제 드라마에 주인공이 오지 오일남 할아버지라는 점을 강조했어요.
그는 이어서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드라마 안에 담긴 깊은 휴머니즘과 철학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민주는 오징어 게임이 단순한 생존게임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이 드라마가 현대사회의 자본주의와 불평등 문제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으며 빚에 시달리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보편적인 문제 의식이 전세계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다고 덧붙였어요. 또한 오징어게임의 주인공 오일남 할아버지 캐릭터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오일남 할아버지가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끈 세대를 상징한다고 말하면서 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모습이 한국인의 유연성과 문화적 적응력을 보여준다고 설명했어요. 이런 복합적인 캐릭터를 통해 한국 드라마가 단순한 오락을 넘어 깊이 있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민준의 설명을 들으며 저는 한국 드라마의 깊이와 영향력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어요.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를 넘어 현대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인간의 본질적인 고민을 담아내는 한국 드라마의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에 왕위는 얼굴을 붉히며 반박했습니다. 제끼기만 하는 나라가 어떻게 천하를 통일할 수 있겠느냐며 당시 중국은 진시황이 분열된 제국을 통일한 최초의 왕조였다고 주장했어요. 그러자 민준이 날카롭게 받아쳤습니다. 진시황이 가장 원했던 것은 천하통일이 아니라 문화통일이었다고 말하면서 그 당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척을 만들어 동아시아의 표준을 세웠다고 설명했어요. 민준의 설명에 따르면 척은 물건을 재거나 세금을 거둘 때 기준이 되는 자를 말하는 거예요. 민주는 고구려의 척은 단순한 측량 도구 도구의 변경이 아니라 국가 정체성과 독립국가의 권력과 힘을 나타낸다고 말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고구려 척 길이가 35.6CM로 한나라 척의 23.7CM보다 11.9CM나 길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이 그토록 존경하는 맹자도 고구려 척의 편리함을 알고 칭송했다고 말했습니다. 더불어 이 고구려 척이 신라 백제 심지어 일본까지 전파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것이 고구려의 국제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주장했어요. 민주는 열정적으로 말을 이어갔습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누구를 모방하거나 베끼지 않고 독자적인 표준을 만드는 나라였습니다. 과거에 고구려가 세운 척이라는 문화 기준이 현대에 와서 글로벌 대한민국이 전 세계 표준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고구려 시대에 35.6 6CM 척이 동아시아를 휘어잡았듯이 지금의 대한민국은 케이팝 K드라마 케이뷰티 케이 기술 케이푸드까지 전 세계를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우리의 DNA에는 세계의 표준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혁신의 정신이 흐르고 있는 거예요. 고구려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언제나 세계를 선도하는 문화강국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민주는 이러한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한국이 문화 강국으로서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강조했어요. 그는 한국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문화의 표준을 만드는 나라라고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이 설명을 들으며 저는 고구려의 척 하나가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깨달았어요. 단순한 측량 도구가 아니라 한 나라의 경제 문화 그리고 국제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는 점이 놀라웠습니다. 민준의 설명 설명이 끝나자 세미나장은 잠시 숨죽인 듯한 적막에 빠졌습니다. 왕위는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의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것이 보였어요. 그는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듯했습니다. 토론은 거의 끝나가는 듯했고 모두가 결론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어요. 그때 갑자기 세미나장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두가 그쪽을 바라보자 하버드 동아시아 연구소의 소장인 마이클 퍼셀 박사가 일어섰습니다.
퍼셀 박사는 중국 학생들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씀하셨어요. 여러분 역사는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고구려 시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은 대국으로서 동아시아의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고구려의 척이 동아시아의 표준이 되었듯이 현대의 한국 문화와 기술이 세계에 표준이 되고 있어요.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광개토대왕이 만주 벌판을 호령하며 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했듯이 지금의 대한민국은 문화와 기술 면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케이팝 케이 드라마 반도체 조선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은 세계의 중심에 서 있어요.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적 맥락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퍼셀 박사의 말씀이 끝나자 세미나 장은 잠시 적막에 빠졌어요. 그의 권위 있는 평가에 모두들 수긍하는 듯했어요. 저는 이 말을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졌어요.
한국의 역사와 현재가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의 입에서 한국의 위상을 듣게 되니 왠지 모를 소름이 돋았어요. 세미나가 끝나고 나오면서 저는 한국 문화에 대해 더 깊이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경험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는 제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이런 걸 느꼈습니다. 앞으로 저는 한국어를 본격적으로 배워볼 생각이에요. 언어를 통해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죠. 또한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수업을 더 많이 듣고 관련 책들도 찾아 읽어볼 계획입니다. 더불어 한국의 현대문화도 적극적으로 체험해보고 싶어요. 콘서트에도 가보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도 더 많이 보려고 해요. 기회가 된다면 한국 문화체험 프로그램이나 교환학생 프로그램에도 참여해보고 싶습니다. 이번 경험을 통해 문화의 힘과 영향력을 실감했어요. 앞으로 제 진로도 문화교류나 국제관계 쪽으로 고민해볼 생각이에요.
한국과 미국 나아가 전 세계의 문화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거든요. 오늘 사연은 여기까지입니다. 어떻게 들으셨나요? 광개토대왕이 만주 벌판을 호령하며 아시아의 최강자로 군림했듯이 지금의 대한민국은 문화와 기술면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 말에서 정말 소름이 돋았네요. 한국 드라마와 영화가 사랑받는 이유가 광개토 대왕님 때부터였군요. 여러분 생각은 어떤지 댓글 많이 달아주세요. 그전에 구독 버튼 꼭 클릭해 주시고요. 저는 더 좋은 사연으로 찾아 뵐게요 감동 도서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잘 읽었어요
흥미있는 내용이에요
더 알고싶어졌네요
사회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인간사회에 신물을 느껴가는 중인데 그래도 한국은 저력이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잘읽었읍니다
흥미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