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큰딸은 딸 둘 아들 하나를 두었고,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근교에 사는 작은딸은 외동아들을 두었다. 뉴저지주에 사는 우리 부부가 멀리 떨어져 있는 딸들 가족 모두를 한꺼번에 만나기란 정말 쉽지 않다. 올해 6월에 아내의 만 70세 생일 축하 모임을 큰딸 가족이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하며 작은딸 가족도 함께 만나고 헤아려 보니 가족이 모두 모인 건 지난번에 만나고 4년 만이었다.
큰 외손녀가 열두 살, 그 뒤를 이어서 큰 외손자가 아홉 살, 작은 외손자가 여덟 살, 작은 외손녀가 네 살이니 제일 막내와 나는 꼭 70년 차이가 난다. 먼 훗날 그 아이가 내 나이가 되면 이번 모임을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큰딸 가족과 우리 부부는 2년 만에, 작은딸 가족과는 1년 만에 만난 셈인데, 그동안 영상 통화를 통해 얼굴은 익힐 정도이지만, 직접 만난 건 오랜만이다.
짐을 풀고 나서 지난 2년 사이에 훌쩍 자라서 이젠 자기 엄마보다 키가 커버린 열두 살 된 큰 외손녀와 서로 그간의 안부를 물었다. 학교생활이 즐거운지, 캐나다로 이사하고 새로 배우게 된 프랑스어 공부는 할 만한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며 그간 외손녀가 몸과 함께 마음도 성숙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네 살인 작은 외손녀는 곧 열 살이 되는 큰 외손자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오빠~아”라고 다정하게 부르곤 했다. 오빠도 여동생을 수시로 챙겨 주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두 아이의 눈길은 늘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작은딸 가족은 우리가 도착한 날 밤늦게 별장에 도착하였다. 오랜만에 만나 낯설 수도 있었는데, 사촌끼리 금세 어울려서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낚시질하기, 호수에 뛰어들기, 모닥불 피우기, 카이약 타기, 전자 게임과 카드놀이에 열중하여 뛰놀고, 가끔 소리를 지르곤 했다. 작은 외손자는 성격이 원만해서 큰딸네 아이들 셋과 고루 어울려서 다투는 일도 없이 잘 지내기에 나는 그 아이를 ‘Sweet Boy’라 불렀다.
가족 모임을 마치고 뉴저지 집으로 돌아온지 반 달이 지났지만, 아직도 아이들이 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할아버지, 오빠가 물에 뛰어들었어요!”라고 외치던 작은 외손녀의 흥분된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그 아이 눈에는 자기 오빠만 보이나 보았다.
네 살 된 사촌 여동생을 쫓아다니며 물총을 쏘아대던 작은 외손자와 그걸 피하여 달아나며 깔깔거리던 외손녀는 물을 흠뻑 맞고도 즐거워했다.
아이들을 낚시에 미끼용 지렁이를 꿰며 오랜 시간 낚시터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물고기가 심심찮게 낚여서 초보 낚시꾼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부싯돌을 사용하여 캠프파이어용 장작에 불을 붙이던 아이들은 생각보다 끈기가 있었다. 카이약을 저으며 즐거워하고, 호숫물에 뛰어들며 소리 지르던 아이들은 물을 겁내지 않았다.
아침은 대개 큰 외손녀의 도움으로 팬케이크를 구웠는데 의젓한 외손녀의 뒷모습을 보고는 가끔 작은딸과 혼동하기도 했다. “아니, 얘가 언제 이렇게 컸담!”
가끔 밤늦게까지 호숫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딸들과 지난 이야기를 두런두런 주고받던 생각이 난다.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번 가족 모임을 추억하며 살게 될 것 같다. 기억에 남을 추억거리를 만든다고 왕복 스무 시간 거리를 아내가 운전하여 다녀온 후에 낡은 육신은 피곤하다고 아우성치지만, 여행 한번 잘 한 셈이네. 이제 나이 더 들면 그런 모험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음번에 이런 모임을 하게 되면 아무래도 비행기로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조손간에 가까이 지내려면, 무엇보다도 서로 사는 거리가 가까워야 하고, 자주 만나야 하고, 육아 도움 등을 통해 손자와 손녀의 삶에 다가가야 한다는데, 우리처럼 멀리 떨어져 살아서 몇 년에 한 번씩 어쩌다 만나게 되면 조손간의 거리는 좁혀지기가 어렵다. 그저 가끔 영상 통화로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으니 서글프다.
(2023년 7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