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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일 코카사스와 중앙아시아 여행을 시작한지 두달을 넘겼다. 8명이 동행 멤버는 이제 4명, 남은 여행지는 4개국 전부 땅이라는 뜻의 스탄이 국명에 붙은 우즈베키스탄, 타지크스탄, 키르기즈스탄 그리고 카자흐스탄. 오늘 우리는 이곳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에서 우즈베키스탄의 마지막 기착지 사마르칸트로 간다.
사마르칸트까지 기차이용이 가능하다. 우리는 오후 3시 55출발하는 기차로 부하라를 출발해서 아직 해가 있어 어둠이 깔리기전인 오후 6시 우즈베키스탄의 또하나의 가장 중요한 실크로드의 도시 사마르칸드에 도착했다. 사마르칸트는 2760년의 역사를 가진 중앙아시아 최고의 실크로드 도시다.
그리고 14세기에 칭기즈 칸 이후 중앙아시아를 전체를 통일하고 화려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던 티무르가 세운 제국의 수도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마르칸트에 지금 남아 있는 대부분의 유적들도 역시 티무르 제국 시대의 작품들이다.
티무르는 사마르칸트 부근의 한 몽골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칭기즈 칸의 아들 차가타이의 나라인 차가타이 한국에서 전사로 성장하면서. 대제국을 이룬 칭기즈 칸을 동경하며 마음에 품고 원대한 정복의 꿈을 꾸던 티무르는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마침내 1366년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주변 지역을 점령 자신이 칭기즈 칸의 후계자라고 말하며, 1405년 죽을 때까지 동쪽으로는 중국 일부, 남쪽으로는 인도 북부, 서쪽으로는 터키의 앙카라,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정복하고 대제국 티무르 제국을 건설, 몽골 이후 중앙아시아 최대의 제국이 되었다.
우리는 어두워지기전에 사마르칸트의 중심가 레기스탄광장 근처 호텔에 들수 있었다. 다음날인 2일과 3일에는 하루 넷이 40불 주기로하고 기사가 딸린 차를 빌렸다. 빌린 차는 CRV, 2일은 사마르칸드 3일은 사마르칸트에서 멀지않은 티무르 대왕의 탄생지 샤흐리사브즈를 관광한 후 같은 날 야간열차 새벽 1:08 사마르칸트를 출발 우즈베키스탄의 타지크스탄과의 국경도시 데나우로 가는 열차를 탔다
사마르칸트 역사 도시는 13세기부터 현재까지 중앙아시아의 문화와 정치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계들을 예술, 건축물, 도시 구조를 통해 보여 준다.
비비하눔 모스크와 레기스탄 광장 같은 건축물들은 지중해부터 인도 아대륙에 이르는 전 지역의 이슬람 건축 발전에서 중대한 역할을 했다. - 비비하눔 모스크-
사마르칸트는 세계 문화들의 교차로이며 용광로였다. 기원전 7세기에 고대 도시 아프라시아브로 건설된 사마르칸트는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티무르 제국 시대에 가장 큰 번영을 누렸다.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큰 교역로들이 교차하는 곳에 자리 잡은 사마르칸트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에 처음으로 호라즘(Khorezm), 박트리아(Bactria), 소그드(Sogd) 같은 거대 국가들이 생기던 시기에 전략적 요충지였던 지금의 사마르칸트인 아프라시아브는 소그디아나(Sogdiana)의 수도였다. 기원전 6세기부터 4세기 사이에는 아케메네스 제국(Achaemenid Empire)의 일부였고, 기원전 4세기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제국에 속했다. 중국, 아프카니스탄, 이란, 인도, 캅카스 지방의 교역로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이 도시는 서기 2세기에 비단 교역의 중요한 중심지로 번성하기도 했다.
6세기에 투르크 왕국의 땅이었던 이 도시는 이슬람 문화가 침투하기 시작했던 712년에 쿠테이바 이븐 무슬림(Kuteiba-ibn-Muslim)에게 정복당했다.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영토인 마베라나르흐르(Maverannahr)와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지역에 이슬람 문화가 유입되었다. 아랍의 지배자들은 고대 신전을 모스크, 행정 건물, 교육 시설, 궁전 그리고 국고로 바꾸었다. 이란계(系) 사만 왕조가 9~10세기, 투르크 인들은 11~13세기에 이 도시를 점령했다. 이어 13세기에는 호라즘 왕국에 속했다가 1220년에 몽골 칭기즈 칸의 침입을 받으면서 파괴되었다.
몽골에 의한 파괴이후 14세기, 도시는 티무르(Timur the Lame, Tamerlane, 1336~1405)의 노력으로 주요 중심지로 떠올랐다. 사마르칸트는 아프라시아브의 남서쪽인 현재 위치에 다시 지어졌고, 강력한 티무르 제국의 수도이자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인도로까지 뻗은 정복지로부터 가지고 온 재화의 저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울루그 벡(1409~1449)과 그의 후계자들이 통치할 때까지 티무르 제국의 문화적 수도로 남아 있었다. - 사마르칸트에 있는 레기스탄 광장의 마드라사 -
사마르칸트의 중심지 레기스탄 광장의 마드라사, 마드라사는 이슬람교의 고등 교육기관
티무르는 성채, ‘푸른 궁전’(Kuk-Saray), 그리고 다른 중요한 건물들을 지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예술들이 새롭게 통합됐다는 점이었다. 사마르칸트의 전통은 제국의 다른 지역들, 즉 페르시아 호라산과 호라즘 지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주요 도시의 문들 앞에 비비하눔 모스크와 구르 에미르 단지, 무하마드 술탄의 궁전 옆에 에미르(Emir)의 무덤을 지었던 것도 같은 이치였다. 도시의 동쪽 문은 레기스탄 광장으로 알려진 도시의 중심부와 연결되며, 울루그 벡은 1447년 레기스탄 광장에 주요 건물들을 짓기 시작했다.
17세기에도 몇몇 눈길을 끄는 건축물들이 지어졌지만, 16세기에 우즈벡의 점령(1500) 이후 16세기에 사마르칸트는 부하라한국에 속하게 되면서 점차 이전의 중요성을 잃었다. 17세기에 지어진 건축물들 가운데는 레기스탄 광장의 울루그 벡 마드라사 맞은편에 얄란투시 바하두르(Yalandtush Bahadur)가 세운 시르도르(Shir-Dor) 마드라사가 포함된다. 뒤이어 레기스탄 광장에 틸라카리(Tilla Kari) 마드라사와 새로운 금요일 모스크(Friday mosque)가 지어지면서 단지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다 러시아가 1868년에 사마르칸트를 점령, 1887년에 지방 수도로 삼았고, 점차 도시는 회복되어 갔다. 1888년에 카스피 해 철도가 놓이면서 유럽의 러시아와 중앙아시아가 연결되었고, 철도는 중요한 교역 중심지로서 사마르칸트의 역할을 강화시켰다. 러시아는 학교, 교회, 병원을 지었고, 사마르칸트의 서쪽 지역은 새로운 도시 계획에 따라 재개발되었다. 그러나 티무르 시대에 지어진 성채 같은 몇몇 기념물들뿐만 아니라 도시의 성벽과 문들이 당시에 파괴되기도 했다. 20세기 초 이 도시는 세 주요 구역들로 구성되게 되었다. 고대 도시 아프라시아브의 고고학 발굴 지역, 중세 티무르 도시, 1870년대에 건설을 시작한 현대 도시가 세 주요 구역들이다.
1941년 발굴된 티무르의 묘당인 ‘구르 아미르’ 안 모습. 앞에 보이는 관은 가짜로, 진짜는 같은 위치에서 지하로 4미터 정도 아래에 있다. 내부 사진 촬영은 돈을 받으며, 참배객들이 들러 예배를 보곤 한다. 타지크어로 ‘구르’는 ‘무덤’, ‘아미르’는 지배자(수령)’란 뜻이니 ‘지배자의 무덤’이 된다. 원래 이 무덤은 티무르가 페르시아 원정에서 전사한 손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것이나 그가 죽은 뒤 일가족 무덤이 되었다. 티무르의 흑갈색 연옥 관을 중심으로 주위에 스승과 아들, 두 손자들의 돌관이 놓여있다. 그런데 지상의 관들은 모두 비어있다. 가짜다. 진짜 관들은 4m 지하의 바로 그 위치에 그대로 놓여있다고 한다.
현대 도시 사마르칸트는 1924년~1930년에 우즈벡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Uzbek SSR)의 수도였다가 나중에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이곳의 많은 기념물이 세계문화유산의 유적지에 포함된다.
역사에는 일세를 풍미한 영웅호걸들이 수두룩하지만 티무르(1336~1405)처럼 운세를 타고 세상에 두각을 나타낸 풍운아는 흔치 않다. 그는 선과 악, 공과 과, 행운과 불운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세파를 마술사처럼 용하게도 헤쳐나간 인물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70평생의 평가는 세월을 두고 엇갈렸으며, 늘 수수께끼의 인물로 입에 오르내렸다.
티무르는 사마르칸드 남쪽으로 80km쯤 떨어진 케쉬(현 샤흐리사브즈) 부근 호쟈이루그 마을의 한 몽골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후일 제국을 세운 뒤 이곳에 궁전을 지었는데, 궁전 기둥에 “누가 내 힘을 의심하면 내가 지은 이 궁전을 보여드리라”는 티무르의 호기어린 한 마디가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그만큼 화려함에는 자신만만했다.
변신과 임기응변의 능수인 티무르는 청장년 시절 여러 세력 사이를 줄타기하면서 기반을 다져갔다. 상전에 대한 모반을 다반사로 하고, 결맹한 의형제를 모살하면서까지 제국의 대권을 거머쥐었다. 왕위에 등극(1369)했지만, 칭기즈칸의 직계자손은 아니어서 감히 ‘칸’으로 일컫지는 못했다. 대신 칭기즈칸 후예의 딸을 취했다는 이유로 ‘구르간(사위)의 아미르(지배자)’라고 자칭했다.
티무르는 자신의 출신 부족들로 강력한 친위대를 꾸려 대외정복에 나섰다.약 30년간의 정복전쟁 결과 서쪽으로 소아시아와 지중해 동안의 시리아, 동쪽과 남쪽으로는 차카타이 칸국과 북인도, 북쪽으로는 카프카즈와 킵차크 칸국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그는 최후 일전인 오스만 터키와의 앙카라 전투(1402)에서 대승을 거두고 수도 사마르칸드에 개선한다. 전의에 불탄 노장은 70세 노구를 끌고 다시 동쪽의 명나라 원정을 시작했으나, 오트라르에서 급사한다. 기나긴 원정과정은 살육과 파괴로 얼룩졌다. 페르시아의 타크리트 성채를 공격할 때는 적병을 모조리 살상한 뒤 자른 머리로 피라미드를 쌓았다. 호라싼을 점령하고는 연와와 석회 속에 사람을 생매장해 성벽을 쌓기도 했다.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 등 그가 공략한 도시는 가차없이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비비하눔 모스크
사마르칸트의 센트랄 바자르에서 갖가지 김치를 파는 아줌마, 그의 입에서 한국말이 금방 나올 것 같다.
사마르칸트의 센트랄 바자르
전통방식으로 종이를 만드는 사마르칸트 사람들
물레방아를 이용해서 종이 제조과정에 필요한 물을 공급한다.
아프라시압 박물관의 벽화, 머리에 새깃털을 한 오른쪽 끝의 두사람이 한반도에서 온 고구려인이라고 한다.
아프라시압 박물관 벽화
아시아의 끝에서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연결했던 실크로드의 길
아프라시압 박물관의 전시물
아미르 티무르 대왕의 손자 울루그 백, 왕이면서 학자이자 레슬링 선수이기도 했다.
비비하눔하면 떠오르는 것이 유명한 ‘운명의 키스’ 전설이다. 티무르의 비 9명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비였던 비비하눔은 인도에 원정간 남편이 돌아오면 줄 선물로 사원을 짓기 시작했다. 모든 공정이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아치 하나만 미완으로 남아 있었다. 비를 연모하던 이란 출신의 젊은 건축가는 공사 완성을 조건으로 비에게 키스를 요구했다. 공사가 늦어지는 데 안달이 난 왕비는 자기 말고는 누구와의 키스도 허용한다고 했으나 건축가는 응하지 않는다.
비는 각기 다르게 색칠한 40개의 달걀을 내놓고는 겉모양은 다르지만 알맹이는 같지 않는가 하는 말로 그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자 건축가는 한 그릇에는 깬 달걀을, 다른 그릇에는 꿀을 넣어 내밀면서 겉모습은 같아도 알맹이는 다르지 않는냐고 몰아세웠다. 비는 할 수 없이 키스를 허용한다. 키스 자국이 비의 볼에 반점으로 남았다.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이 반점을 단서 삼아 사건의 내막을 알고는, 건축가는 가차없이 처형하고, 비비하눔은 미나렛에서 내던져 죽게 만들었다. 이후 티무르는 제국 여성들에게 천으로 얼굴을 가리도록 특명을 내렸다고 한다.
티무르의 풍운은 살육과 파괴, 기행만이 전부는 아니다. 역사 앞에 남긴 긍정적 일면도 묵과할 수는 없다. 특히 실크로드 요로에서 문명교류에 기여한 면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는 제국 건설 과정에서 이질적 문명의 수용에 인색하지 않았다. 정복지의 우수한 건축사나 기술자들을 사마르칸드에 불러들였다. 영내 각지에서 건축자재를 반입해 사마르칸드를 중세 세계의 가장 화려한 도시로 건설했다.
시리아 등지에서 돔(원형지붕) 건축양식을 도입하고, 자신이 즐기는 청색이 주조를 이루도록 도시를 미화했다. 그리하여 사마르칸드는 ‘푸른 도시’, ‘이슬람 세계의 보석’, ‘동방의 진주’란 찬사를 자아냈다.
뿐만 아니라, 대상로(隊商路)를 정비하고 대상의 숙박소, 보호소를 도처에 설치했으며, 교역도 적극 장려했다. 멀리 지중해 동안에서 이란을 거쳐 사마르칸드와 타슈켄트, 탈라스를 지나 몽골에 이르는 동서 대상로가 원활히 소통되었다.
아프라시압 박물관의 전시물
몽골제국 멸망에 따라 잠깐 중단되었던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육로는 그 기능을 회복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티무르 제국시대 동서 문명간 ‘활자의 길’이 트이면서 우리 금속활자가 구텐베르크의 활자 제작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개연성까지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샤흐리삽스는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80 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 아미르 티무르의 고향으로 유명. 본래 이 곳은 기원전 4 세기 즈음 ‘새로운 장소’ 라는 뜻의 나우타가 (Nautaka) 라고 불리는 소그드 (Sogd) 의 한 지역 이었다.
이후 7 세기 즈음에는 게쉬 (Kesh) 라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14세기부터는 '초록색의 도시' 라는 뜻인 샤흐리삽스라 불린다. 티무르의 힘으로 도시에 나무와 아름다운 건물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에 초록색 도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한 샤흐리삽스는 수공으로 만드는 직물 등으로 도 유명.
샤흐리삽스에 있는 악-사리이를 그대로 직역하면 «하얀 궁전» 이지만 «고귀한 궁전»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380-1386년 사이에 아미르 티무르의 명령에 따라 거대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지어졌다. 티무르와 그의 부인들이 머무르던 별장인 동시에 접대의 궁전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와 성문만이 남아 있다. 광장 북쪽에 악 - 시라이라고 남아 있는 두 개의 건축물은 악 - 시라이 궁전의 성문, 성문 바로 앞에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성문은 원래 아치 형태의 모습이었으나 지금은 아치가 붕괴듸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넓이 22,5미터, 높이 38미터인 성문의 규모로 보아 엣날의 악 - 사라이가 얼마나 크고 응장했을지 상상할수 있다.
샤브리 샤브즈에 있는 티무르 제국의 건설자 아미르 티무르 동상
티무르제국의 화려했던 건물도 지진 같은 자연재난이나 인간들의 파괴에서 벗어날 수 없어 지금은 거의 만신창이가 되었다. 뜯은 철문을 녹여 동전을 만들기도 하고, 마굿간이나 면화상점으로도 사용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지금 30년 복구계획에 따라 보수한다고는 하지만 여의치 않은 것 같다.
레기스탄 광장의 밤 풍경
사마르칸트의 어느 가게 앞에서 우즈베크 사람들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