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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나심
눅 2:1-7
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눅 2:1-7 / [예수의 탄생;마1:18-26] 이 무렵에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전국에 호구조사를 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2) 이 조사는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 처음으로 시행한 것이다. 3) 이 칙령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본적지에 가서 등록하도록 되어 있었다. 4) 그래서 다윗의 후손인 요셉도 다윗왕의 고향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다. 그는 갈릴리의 나사렛을 떠나 그곳까지 가는 여행길에 5) 이미 만삭이 된 자기 약혼녀 마리아를 데리고 갔다. 6) 그들이 베들레헴에 있는 동안 마리아는 달이 차서 7) 첫아들을 낳았고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 동네 여관이 다 차서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2장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예수의 탄생과 특히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자세하게 다룹니다. 예수는 가상의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곧 인간의 역사(歷史) 속으로 인간 구원을 위해 들어오신 사랑의 신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팍팍한 로마의 식민지 유대 땅에 인간 구원을 위해 사람의 모습을 한 하나님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고 계십니다.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1-3) 대제국의 질서 유지와 세금 확보를 위해 로마제국 전역에 걸쳐 14년마다 행해지는 인구조사가 시작됐습니다.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모든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입니다. 이 일을 주도하는 존재는 살아있는 권력인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와 수리아 총독 구레뇨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인간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 계획을 역사 속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 이 일을 이끌어가는 진짜 권력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미 잉태하였더라(4-5) 요셉과 그의 약혼녀 마리아도 인구조사에 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굳이 동행하지 않아도 될 마리아가 이 여행에 동행합니다. 처녀 잉태로 인해 동네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것을 염려한 요셉의 사려 깊음과 배려가 빛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돌아간 곳은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입니다. 사람들이 천대하는 지역인 갈릴리 나사렛에 사는 남자가 약혼녀를 데리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인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초라한 여정입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다윗의 자손(눅 1:27)이 이 여정의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구원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유대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으로 가고 계십니다.
첫아들을 낳아(6-7) 사람으로 북적이는 베들레헴에는 빈 방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쉴 만한 곳이 없었고, 죄로 가득한 사람의 마음엔 하나님께서 들어가실 자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서 완전히 낮아지셔서 사람의 아들로 가장 누추한 곳에 태어나셨습니다. 인간의 죄가 만들어낸 빈 방이 하나님의 위로와 구원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습니다.
적용: 역사와 내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까?
모두에게는 의미있는 날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의미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바로 예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신 날이 아닐까요? 구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세주가 바로 예수이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의 오심으로 약속이 성취되고 완성되는 토대가 마련된 것입니다. 예수의 나심은 가장 귀하고 기쁜 소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추된 말씀을 믿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감사를 함께 누리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성탄을 맞는 자세
눅 2:1-7 / 김태복 목사
오늘은 성탄 전날입니다. 2006년 금년의 성탄은 특징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입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금년도에도 여전히 백화점이나 호텔은 수많은 오색등으로 장식된 화려한 불빛들이 비치고 있으나 점포마다 찬바람만 불 정도로 썰렁하다고 합니다. 그 만큼 경기가 밑바닥에 와있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은 말하기를 “크리스마스 특수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사람들은 많지만, 물건을 가지 않아 상인 입장에서 유령이나 마찬가지입니다”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강남에서 꽃 장사를 하는 상인은 말하기를 “10년 동안 하강하던 경기가 금년에 와서 바닥을 치는 것 같다고 합니다. 기자는 표현하기를, 20대는 취업, 30대는 내 집 마련, 40~50대는 실직 위기가 코앞에 걸려 있는 탓인지 크리스마스를 즐길 기분이 안 나는 것 같다고 합니다. 반면에 호텔의 크리스마스 이벤트는 예약이 꼭 찬 상태라고 합니다.
서울 시내 한 호텔 관계자는 ”예년에 2~3개 하던 디너쇼를 올해는 4개를 준비했다. 숙박 패키지 12월 예약율도 지난해보다 7~8% 상승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탄절마저 빈익빈, 부익부라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일입니다. 지금부터 2천 년 전에 첫 번 성탄절도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진정한 성탄을 맞는 자세가 무엇인가 배워야 합니다. 때로 우리의 관심은 성탄의 본질을 외면한 채 다른 영광과 평화에 쏠려 있습니다. 땅의 영광에 매여서 자신을 잃어버린 성탄, 금박과 은박으로 장식된 화려함과 선물, 그리고 상품화된 소유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값싼 성탄에 빠져 있습니다. 이제 진정한 성탄의 본질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성탄의 본질을 세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성탄은 하나님께 드려진 영광의 사건입니다.
성탄은 영광의 사건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조상에게 맹세하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지키신 사건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사건입니다. 아울러 이 영광의 사건은 세상의 영광과는 다른 방법으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세상에서의 영광은 높이 올라간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간 것을 영광으로 간주합니다. 예를 들면 고등학교에서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과장에서 국장으로 진급하고 영관급에서 별을 달면 영광이라고 간주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가장 높이 올라가 영광을 누린 사람은 누구입니까? 본문에 나오는 아우구스투스, 즉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악티움 해전(海戰)에서 정적인 안토니우스를 이기고, B.C 29년에 로마에 개선했습니다.
그리고 로마군대의 총사령관, 원로원의 수장, 그리고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는 신(神)의 반열에 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붙이는 달에 자기 이름을 사용하여 아우구스트, 영어로는 어거스트(August) 즉 8월을 만들었습니다. 신에게 드려지는 모든 영광을 얻었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보잘것없는 작은 고을, 그것도 마구간에서 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가장 천한 곳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천사들은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찬송했습니다. 세상은 신이 된 인간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인간이 되신 신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탄의 영광은 인간의 교만한 영광을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우리가 찾아야할 성탄의 영광은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낮은 곳을 찾는 역사입니다. 이 모습이 우리가 회복해야할 성탄의 본질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우리는 소위 상류층이라는 사람들이 스키장이나 호텔, 해외 휴양지 등에서 흥청망청 거리며 타락의 잔치를 벌이는 것을 결코 부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연약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낮고 천한 곳을 향해 내려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 주변에 오늘도 고통을 받고 있는 낮고 천한 자들을 돌아보는 성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성탄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평화의 사건입니다.
성탄의 사건은 평화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지역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평화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들,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 서로 화해하는 ‘샬롬’의 사건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는 전쟁이 사라진 평화의 시대였습니다. 소위, ‘로마의 평화’ 로 불린 시대였습니다. 무질서와 폭동이 사라지고 도시들은 그 광채를 발하였으며, 낡은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는 로마제국의 무력에 의하여 이루어진 평화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강력한 군대의 강압이 무서워 일시적으로 조작된 평화의 시대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동전에는 승리의 신인 빅토리아가 갑옷을 입고 창을 든 아우구스투스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씌워 주는 그림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평화는 전쟁과 폭력으로 이룬 힘의 평화로서 승전국인 로마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평화였습니다.
로마인들이 평화의 잔치를 만끽하는 그 밑에는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 드린 대로 위용이 빛나는 로마제국 안에는 6천만 명의 노예들이 짐승 이하의 취급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평화를 주시고자 가장 누추한 자리 마구간에서 아기로 태어났습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준 평화는 억압과 폭력의 힘의 지배로 이루어진 위장된 평화를 거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지배자와 피지배자, 인종과 계급, 성과 연령의 모든 벽을 헐고 함께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기독교 정신으로 운영된다고 하는 미국이 세계 평화를 위한다는 목적으로 무력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아프카니스탄이나 이라크를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그곳에는 평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진정한 평화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사탄의 꾀임에 빠져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과 인간들은 원수의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막고 있던 율법의 벽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벽을 뚫고 만들어 놓으신 좁은 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면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를 용납하고 환대한 것처럼 우리 인간들을 안으시고 기쁘게 자기의 백성, 자기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시간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성탄의 평화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시간이요, 동시에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이루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우리가 찾아야 할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샬롬의 평화입니다. 모든 증오와 폭력을 버리고 비천한 자들에게 위로를 주고 그들을 비참한 삶에서 일으키고 함께 누리는 평화입니다. 19세기 미국 교회의 대 부흥운동에는 무디 같은 위대한 부흥사뿐 아니라 그와 함께 복음성가와 간증으로 사람들을 크게 감동시켰던 생키의 영향력도 컸습니다.
한번은 생키가 증기선을 타고 멜러웨어 강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마침 12월 24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생키가 배에 탄 것을 알고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목자의 노래(Shepherd Song)’라는 캐럴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한 사나이가 앞으로 달려 나와 말했습니다. “당신은 전쟁 때 북군에 있었죠? 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사나이는 몹시 흥분해 있었습니다. 생키가 “내가 북군에 종군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떻게 나를 아시오?”하고 반문하자 그는 기막힌 사연을 고백하였습니다. “1862년 크리스마스 이브였습니다. 나는 남군의 척후병으로 북군 진지에 접근했습니다. 달이 밝아 마치 낮처럼 환한 밤이었습니다. 한 북군 병사가 언덕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죠.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접근해서 총을 겨누었어요. 그런데 그 병사가 노래를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 부르신 ‘목자의 노래’였어요. 아니 당신이 틀림없습니다. 그리운 어머니와 동생들, 교회에서 친구들과 크리스마스를 지내던 추억들, 당신이 2절을 부를 때쯤에는 나는 당신을 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믿던 어머니가 ‘살아서 돌아오너라. 기도하겠다’고 하셨는데, 북군 병사의 어머니도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기도를 아들을 위하여 할 것을 생각하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생키는 자신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보초를 섰던 일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얼싸안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이여,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평화의 방법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이번 성탄에 그 동안 화해하지 못했던 자들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으로 화해하고 용납하심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성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성탄은 진정한 섬김의 사건입니다.
성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입니다. 성탄의 주인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던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처럼 누추한 마구간이라는 곳으로 가야 합니다. 천사들은 구주를 만나려던 목자들에게 다른 것을 보지 말고 구유를 보라고 했습니다. 왕궁이 아닌 말구유로 시선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천해 보이는 한 아기에게 경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들의 지시에 따라 냄새나는 마구간에 고개를 숙이고 찾아온 자들만이 성탄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화려한 왕궁에서 권력의 권좌에 있던 자들이나 성경의 지식이라는 교만의 탑에 갇혀 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누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시선을 낮추고 버려진 마구간이라는 곳을 찾는 자들만이 성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자들이 성탄 가운데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화려하고 높은 곳에만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요, 낮아지고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탄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낮은 곳으로 임하시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낮은 자리에 임하셔서 소외되고 천한 자들을 돌보시고 계십니다. 마25장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오는데 의인의 자리에 선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라고 하시자 의인들이 놀라면서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때나 목마르신 때, 나그네 되신 때나 벗으신 때에 주님을 돌보았나니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라고 의아해 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대답하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된 자, 헐벗은 자, 병든 자, 옥에 갇힌 자와 함께 계시면서 저들을 돌보시다가 우리가 가서 저들을 도우면 곧 자기에게 한 것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불우한 자, 소외된 자들을 외면하고 사는 것은 곧 주님을 외면하고 사는 나쁜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천한 자들이나 소외된 자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요, 구원받은 자들이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어느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사랑의 훈련장이요, 시험장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탄은 주는 날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탄을 무엇을 받을까, 무엇을 즐길까로 생각합니다. 이는 성탄의 정신을 왜곡하는 자세입니다. 요즈음 기독교에서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 임에도 산타크로스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반성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사실, 통계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성탄의 주인공을 산타크로스로 알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막연히 성탄절에 산타크로스로부터 선물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순진한 아이들 중에는 ‘우리 집에는 굴뚝이 없으니 어떻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들어오시는가?’라고 근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산타크로스는 잘 사는 집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지중해에 위치한 마을인 '마이라(Myra)'에서 4세기 교회의 감독이었던 니콜라스는 가난한 사람의 친구였습니다. 딸 셋을 모두 창녀로 팔수 밖에 없는 처지의 가정을 구해주었고, 사회에 나온 죄수들, 가난한 어부들, 특히 불쌍한 고아들을 많이 돌보았습니다.
그는 12월이 되면 큰 주머니 속에 선물을 가지고 남들이 보지 않는 밤중에 가난한 아이나 병든 아이가 있는 가정을 찾아가 문 밖에 선물을 놓고 갔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성인으로 우러러보며 ‘성 니콜라스’라고 불렀으며, 후에는 ‘산타클로스’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받는 날이 아니라 주고 섬기는 날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아이들에게 성탄절 날 선생님들에게 카드로 보내는 것이나 불우한 분들을 도와주는 것도 훈련시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이여, 이번 성탄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과 기쁨을 나누는 평화의 잔치가 될 뿐 아니라. 모든 이웃들과 평화를 이루며, 더 나가서는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시간이 됨으로 우리 주님에게 기쁨을 드리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생의 양식으로 오신 예수
눅 2:1-7 / 박덕기 목사
메리 크리스마스! 참으로 기쁘고 즐겁고 복된 성탄절입니다. 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된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누가복음을 기록한 ‘누가’는 의사인데, 그 누구보다 인간의 출생비밀을 잘 아는 의사 누가는 예수님의 잉태가 모든 인생들의 출생방법인 부정모혈에 의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밝히 증거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된 예수님이 드디어 이 땅에 탄생하신 기사입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 기사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구체적인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1. 세속 역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가 있습니다.
1-3절은 당시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호적령을 내린 사실에 대한 기사입니다. 누가는 이러한 본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건이 단군 신화처럼 인간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재의 역사인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아구스도는 로마 초대 황제로 본래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입니다. 그는 매우 탁월한 황제로서 그가 재위했을 때 로마는 가장 흥왕했습니다. 그가 황제로 재위할 당시 로마의 영토는 페르시아에서부터 영국까지 확장되었으며, 따라서 당시 로마는 ‘온 지상의 제국’이라 불리었습니다. 그래서 그 옥타비우스 황제에게 로마 원로원은 ‘아구스도’ 즉 ‘위대하고 고귀하고 지극히 숭배 받는 자’라는 칭호를 붙인 것입니다. 그가 수리아 총독 관할에 있는 유대 백성들에게 호적을 명한 것은, 인구 조사를 확실하게 하여 세금을 원활하게 징수하고, 식민 지역에서의 질서를 확립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 천하의 제왕이 명령을 내렸으니 누구도 어길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중 하나인 유대 백성들도 그 명령을 따라야 했고, 요셉과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도 호적이 있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습니다. 베들레헴은 바로 유다 지파의 본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이사 아구스도의 이 명령 배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베들레헴에 탄생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미가 선지자를 통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예언하신바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제 이 예언을 하나님은 아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비록 이방 세계의 왕들이라도 그들을 신복처럼 부려서 자신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자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으로 하여금 그들을 포로로 잡아가게 하사 그들로 70년 동안의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게 하셨고, 그들이 회개하자 페르시아 왕 고레스를 통해 이스라엘을 재건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아구스도가 로마 제국을 주관하는 왕이라면, 하나님은 온 만물과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아구스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신복이 되어 호적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구속 역사를 진행하실 때 세상 역사도 간섭하시어 그분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유명한 역사 학지 아놀드 토인비는 말하기를 “세상의 역사는 교회를 축으로 도는 바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역사(history)는 바로 그분의 역사(His-story)다.”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사단과 이 세상이 아무리 하나님을 대적해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완전히 이루어져서 승리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세상 역사도 면밀히 관찰함으로서 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섭리도 발견할 수 있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역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역사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산물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는 영원한 다윗 왕국을 세우려고 오셨습니다.
4, 5절에 보면 요셉이 다윗의 후손인 것이 매우 강조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요셉이 다윗의 자손인 고로 호적을 하기 위해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요셉이 다윗의 자손인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성경의 예언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베들레헴에서 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 왕국을 회복할 자로 오셨음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메시아와 관련된 예언은 거의가 다윗의 왕국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 왕국은 솔로몬 시대를 거쳐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 후 퇴락의 길을 가다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분열되기 이전의 다윗 왕국은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왕국이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이루어진 나라요, 평화와 발전이 있던 나라며, 당시 팔레스틴은 물론 중근동 최강의 나라로 호령하던 영광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왕국 시대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메시아가 오면 이 무너진 다윗의 왕국을 세우고 또 영원케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아 왕국을 다윗 왕국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 군왕인 다윗의 신앙과 공로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랑의 군왕이었고, 또 용맹스러운 용사였으며, 공의롭게 나라를 다스렸고, 하나님 앞에 온유하고 경건했으며, 겸손했습니다. 여러분 마치 그리스도의 성품을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도 조직했고, 격식 있는 예배도 만들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평생 준비를 했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가서 예수님을 낳은 일은, 이제 다윗의 영원한 왕국이 재건될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무너진 다윗 왕국의 영광을 회복시키실 것이었습니다. 또 사랑과 공의로 그 백성들을 다스리실 것이었습니다. 예배도 회복시킬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바로 이 영원한 다윗 왕국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이 나라를 이길 세력은 없습니다. 우리를 우리의 왕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도 없습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후에 천국까지 연계되어 영원한 영생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다윗의 왕국은 지금도 번영해 나가고 있으며, 그 왕국의 영광과 권세를 우리가 누리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그리스도는 비천한 자의 친구로 오셨습니다.
6, 7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의 사실에 대한 보도입니다. 아기 예수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졌습니다. 그 아비인 요셉이 비천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에는 각처에서 호적하려고 온 유다 지파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렸을 것입니다. 베들레헴은 비록 다윗이 태어난 동네이지만, 아주 작은 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여행객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사관, 즉 여관이 많았을 리 없습니다. 그래도 유다 지파 중 유력한 자나 돈 많은 자들은 사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했던 요셉은 사관을 얻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해산을 하게 되자 급하게 마구간을 빌어 해산실로 쓴 것입니다. 본문에 ‘강보’라고 번역된 원어는 ‘찢다’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신생아를 감아 덮을 천도 없이, 가지고 있던 옷을 찢어 아기 예수님을 쌌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러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천하를 호령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와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그 얼마나 초라하고 비천한 상태입니까?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하기를 “그는 주 앞에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비천해도 마구간에서 출생한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인간으로 오시되 이렇게 아주 비천한 신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의 삶도 영광스러운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공생애 중에도 쉴 만한 방 한 칸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셨습니다. 그러기에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비웃음을 받고, 고향에서는 멸시를 받고, 제자 가룟 유다에게는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온갖 매질과 침 뱉음과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어찌 영광스러운 메시아라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이토록 비천한 인간으로 오신 이유는, 바로 비천한 우리들의 친구가 되기 위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선 시대의 어느 왕은 신하들이 지금 백성이 흉년이 들어 모두 굶어 죽고 있다고 하자, “아 왜 다들 밥만 먹으려고 하느냐. 다락에 있는 약과와 과일들도 좀 먹으라고 하여라.”고 했답니다. 지체 높은 사람들, 고난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들은 비천한 자의 처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친구가 되어 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이렇게 비천한 인간이 되어 오셔서 우리 같은 비천한 죄인의 손을 잡아 주시고 동정해 주시고 도와주시고 구원해 주심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자신이 아주 비천한 자라고 느끼십니까? 감히 그 보좌에 나아가기가 두려우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우리의 비천을 모두 체험하시고 우리를 동정하시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분을 의지하여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4. 그리스도는 영생의 양식으로 오셨습니다.
7절에 보면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구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가축의 먹이통입니다. 구유는 웬만한 어린이가 속으로 들어가 누울 정도로 큽니다. 아기 예수님은 아마 말이나 소의 구유에 눕혀졌을 것입니다. 가축의 구유통이 만왕의 왕과 인류의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의 요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지명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묘하게도 ‘떡 집’이라는 뜻입니다. 떡 집의 마구간 가축의 먹이통에 담긴 핏덩어리인 아기 예수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말씀이 떠오릅니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을 위한 영생의 양식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 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그래서 천사들도 목자들에게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가축의 먹이통에 담긴 아기가 구세주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님께서 가축의 먹이통에서 탄생하셨다는 것은, 그 분이 짐승처럼 비천한 우리가 믿음으로 먹어야 할 영생의 양식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성탄절에 베들레헴 곧 떡집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먹어서 영생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말 구유로 오신 예수
눅 2:1-7 / 이정익 목사
지난 한주간은 사학법 재개정 문제로 교계 전체가 아주 어수선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인들이 우려 섞인 모습으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저도 그 파동의 한복판에서 분주한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일부는 국회로 뛰어다녔고 일부는 청와대로 가서 협상을 벌렸고 일부는 단식을 하고 또 일부는 삭발까지 하는 진통을 겪었던 긴박한 한 주간이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주 걱정되고 우려 섞인 마음으로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은 삭발하지 않았는가 하고 걱정하신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삭발하는 것은 세련된 투쟁방법이 아닙니다. 저 자신도 삭발은 노동자들이 의례히 시위에서 관행처럼 하는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목회자들이 거리에 나서는 것도 볼썽사나운 모습인데 삭발까지 강행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어떤 분은 참담했다고 말하고 어떤 분은 왜 저런 행동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사학법이 통과된 것은 지난 7월이었습니다. 다른 법안들과 야당이 방심하는 가운데 이 사학법이 날치기 통과되었습니다. 각 학교에서는 개정된 사학법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였지만 지금까지 이를 지키는 학교는 전체의 절반도 채 안 됩니다. 그리고 지금 모두 저항 중에 있습니다.
지금 사학들과 기독교가 이처럼 사학법에 저항하고 재개정을 위해서 투쟁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임기문제”입니다. 사립학교의 총학장과 교장의 임기가 1회에 한해 중임하도록 만 허용했습니다. 그리고 사립유치원장은 8년만하고 못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또 학교를 설립한 이사장의 직계자손은 총학장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유독 사립학교만 족쇄를 채워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사재를 털어서 세운 사학에는 직계자손들이 관여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또 둘째는 사립학교에 사소한 분쟁이 발생했을 때는 재단임원을 취소하고 곧 바로 관선이사를 파송하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관선이사는 임기도 제한이 없습니다. 일반 이사는 월급도 없는데 관선이사는 월급을 주도록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 법은 겉으로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속을 들열다보면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학교를 쉽게 접수할 수 있도록 길을 터놓은 법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모든 사학들은 이제 정부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정부지시에 그대로 고분고분 순종하고 따라야 합니다. 현재 이것이 사립학교들이 처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사중 1/4을 개방형이사로 채우도록 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조항입니다. 현재 정부는 코드인사로 지적을 많이 받고 있는데 그때마다 “뜻이 맞는 사람끼리 일하고자 하는데 뭐가 잘못이냐”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사학은 기독교인들끼리는 안 된다고 신불신인을 섞어 놓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독교 사학 이사회가 비종교인들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일반학교라면 일반인 이사들이 들어오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기독교 사학은 비기독교인이나 타종교인이 이사로 들어오면 당장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법은 지금 정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기독교 사학으로 하여금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합니다. 그래서 문제의 소지가 발생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네 번째는 개방형이사를 추천하는 기관의 문제입니다. 지금 개방형 이사제도가 핵심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이사를 추천하는 기관이 초중고교는 학교운영위원회입니다. 그리고 대학에는 교수평의회입니다. 이 학교운영위원회는 지역대표 3명과 학부모대표 6명 그리고 교사대표 6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구성인원의 면면은 대다수가 비기독교인들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분들이 사외이사를 선출한다면 타종교인이나 비종교인 그리고 전교조 선생님들을 추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 사학 이사회에 비종교인이나 타종교인이나 전교조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것을 기독교 사학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이사진에 들어오면 이사회가 순탄하겠습니까.
더구나 이번 개정된 사학법에는 교사의 정치활동을 보장했고 노동운동을 보장해 놓았습니다. 그동안 정치활동을 금지했는데도 학교 내에서 좌경화된 교사들로 하여금 무서운 일들이 벌어졌는데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하게 각종 갈등들이 유발될 것입니다. 그러면 학교가 시끄러워지게 됩니다. 그것이 정부가 노리는 수순입니다. 그렇게 학교가 시끄러워지게 되면 정부에서는 무조건 관선이사를 파송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학교는 3,4년 이내에 완전히 접수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현재 대전에 있는 목원신학대학교에 분쟁이 일어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정부에서 관선이사를 파송했는데 불신자와 가톨릭 신자를 파송했습니다. 기독교 신학대학에 불신자 이사와 가톨릭신자를 이사로 파송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그 관선이사는 임기도 무제한입니다. 그리고 학교가 정상화 되어도 나가지도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그들에게 월급도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하나는 사외이사를 추천할 때는 같은 종교인으로 추천하게 해 달라는 단서를 넣어주고 또 관선이사를 파송하는 과정에 신중하게 하는 법을 삽입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개정요구가 무리입니까.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학법을 개정하는 이유를 정부에서는 “사학의 투명성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일반인들은 그 이야기만 듣고 금방 수긍하고 찬성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사학이 모두 불법만 저지르는 곳입니까. 물론 사학에 비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사장이 인색하고 사기업 다루듯 선생님들을 다루는 학교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두 시정되어야 할 일입니다. 시정되어야 할 일은 시정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송두리째 부정하고 바꾸려고 하면 되는 일입니까. 그리고 전체 사학을 모조리 죄인 취급하면 됩니까.
우리나라에 사학이 1,500개 정도 있습니다. 그중에 기독교 사학이 357개입니다. 정부에서는 사학이 비리의 온상인 것처럼 요란을 떨며 뒤졌는데 들추어 낸 것이 1,500여개 사학가운데 1.7% 20여 곳입니다. 그 20여 곳 사학은 현행법으로도 얼마든지 제재가 가능합니다. 문제된 사학은 마땅히 제재 받아야 되고 해야 합니다. 도에 지나친 사학은 문을 닫게 해야 합니다. 그런 사학을 문을 닫게 하는데 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비리가 있어서 법을 개정한다면 비리가 있는 곳이 사학만 있습니까. 국회의원의 부패는 27%입니다. 열린우리당은 각종 선거에서 지난 4년간 85%나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국민 지지율이 한자리수입니다. 그러면 거기도 퇴출시키기 위해서 특별법을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문제는 이 정부가 이상하게 전교조를 앞장세우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에게 자리를 주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듣자니까 열린우리당에서는 이제는 기독교 표는 포기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운영위원회와 전교조 표는 잃을 수가 없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 그 사람들 표 때문에 당선되었는데 그들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무 저의가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사학법개정은 열린우리당이 20년 장기집권 계획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발상은 일제 때도 유신 때도 군사 정권 때도 없었던 일입니다. 여기 학운위라고 하는 학교운영위원회는 현재 정권에서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친위그룹입니다. 이 위원회에서 개방형 이사 4분의 1을 추천합니다. 이 위원회에서 의식화 된 사람 한사람과 전교조 교사 중 한사람을 이사로 파송하면 그 학교는 끝납니다. 그들은 곧 바로 학교에 들어가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그러면 정부는 곧 바로 관선이사를 파송할 것이고 그 학교는 3,4년이면 곧 바로 합법적으로 접수되게 됩니다. 이는 불을 보듯 그 결과가 뻔한 일입니다.
여러분, 전교조 선생님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아이들을 동원해서 빨치산에게 추모식을 거행했던 사람들입니다. 아이들을 고궁에 데리고 가서 통에 화살 던져 넣기를 했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잘 넣지 못하니까 한 교사가 말하기를 “그 통이 미국 놈이라고 생각하고 던져보라”고 말해주었다는 사람들입니다. 학교에서 여고생 흡연방지대책회의를 할 때 “왜 학생들의 인권을 침해하느냐”하며 교장에게 큰소리를 쳤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북한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세금에서 해방된 민족”이라고 가르친 사람들입니다. 그런 교육이 아이들에게 먹혀들어서 사법연수원에서 공부하는 장차 이 나라의 법관 후보자가 대한민국의 제일의 적은 미국이라고 대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앞으로 계속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계속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학교를 아예 뺏으려는 의도입니다.
저 자신도 개혁주의자입니다. 저 자신도 개혁에 앞장서고 싶습니다. 우리사회나 교회나 기독교에나 학교에도 일대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정치권에도 기업에도 모두 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만 개혁은 무분별한 개혁은 해서는 안 됩니다. 개혁한다고 사회주의적으로 개혁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것은 개혁이 아니고 사회주의적 혁명입니다.
정부에서 이렇게 사학을 개혁하려고 하는데 가장 큰 문제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립학교의 공립화 시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학으로 하여금 정부에서 쉽게 관리할 수 있도록 조직을 정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학운위 사람들을 무작위로 학교 이사로 집어넣어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해 나가고 한편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사학에서 예배나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지금 정부에서는 할 일 없이 이런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주 5일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는 학교도 토요일 공부 안합니다. 그래서 일주일에서 하루 쉬는 시간만큼 한주에 3,4시간의 공부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면 무슨 과목을 줄여야 하겠습니까. 누가 생각해도 입시와 관련이 없는 학과를 줄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과목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성경공부와 예배시간일 것입니다. 개방형 이사를 추천하는 기관이 학부모회와 시민단체와 교사회입니다. 거기서 선출된 개방형 이사들이 비신앙인이고 전교조일 것입니다. 그들이 곧장 들고 나올 방안이 바로 성경공부와 예배의 폐지입니다. 기독교 사학이 성경공부와 예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인데 그것을 못하게 하면 기독교 사학이 존재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제는 사학 끝장난 것입니다. 현재 기독교 사학에서 교사를 채용할 때 기독교인만 채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학교의 교사들 모두가 비기독교인들로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학생 중 하나가 예배를 거부하면서 시위를 벌이면 학교에서는 꼼짝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학법의 내면에는 이런 무서운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도하십시오. 목사들이 할일이 없어서 거리로 나가 삭발을 하고 단식하며 요란 떨고 있는 줄 아십니까. 정부에서 사학의 비리 때문이라고 말하니까 대다수는 알지도 모르면서 찬성한다고 말하는데 저 내면에는 이런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사학개정법이 문제가 아니고 그 배후에 깔린 생각이 더 무섭습니다. 사학개정법은 열린우리당이 20년 장기집권 계획에서 나온 법안입니다. 지금 열린우리당에서는 다음 선거에서 다 뺏겨도 큰 것 하나는 챙기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지금 열린우리당에서 사립학교법에 목숨을 걸고 사수중입니다. 거기에 의식화된 한총련 출신 의원들이 이 일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타 의원들은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에서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저도 기회가 된다면 삭발을 하려고 했습니다. 한편에서는 총회장이, 목사가 노동자들이 삭발하듯 체통 없이 삭발하야 하는가 하고 말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내가 삭발하므로 문제가 풀린다면 나는 기꺼이 삭발하겠다, 왜 망설이겠는가.” 내가 삭발하고 더한 모멸을 당한다 해도 문제가 다 풀린다면 저는 그 보다 더한 것이라도 감행할 생각이었습니다. 제 두상도 잘생겼겠다 왜 망설이겠습니까. 체통이나 체면을 따지자면 주님이 더 따져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이야 말로 체면 지키고 체통 지키고 자존심 지키며 모두의 환대 속에 세상에 오실 분인데 주님은 그런 것 다 포기하고 마구간으로 아주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성탄은 주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체면을 버리고 하나님 아들의 자존심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날 입니다. 오셔도 이 세상에서 가장 오지로, 가장 초라한 자리로 오셨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십시오.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시는데 가장 초라한 자리로 오셨습니다. 환대는 물론이고 온갖 멸시와 천대와 냉대 속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까짓 머리 깎는 수모쯤이 문제겠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그 보다 더한 일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너무 자존심을 세우고 체면을 중시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나 체면을 극복하지 못해서 갈등하고 다투고 그 좋은 관계를 파괴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체면을 따지자면 우리 주님이 먼저 따져야 합니다.
오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 하면 밤새워 놀 일부터 생각하고 선물 주고받는 것부터 생각하고 산타부터 찾습니다. 성탄절은 예수가 주인인데 이제는 놀이와 산타가 주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는 사라지고 놀이와 상술만 남았습니다.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그래서 최근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체코에서는 산타클로스 없애기 운동을 펴고 있다고 합니다. 성탄절만 되면 주인인 예수는 없어지고 산타가 그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산타는 기원후 270년경 옛날 터키에 있었던 성 니콜라스라는 사람에게서 기인합니다. 어느 결혼 정령기가 된 세 자매가 빚에 의해서 돈이 없어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성 니콜라스가 금덩어리가 든 세 개의 양말을 몰래 그 집에 갖다 준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미국에서 1931년에 코카콜라 회사가 자사 색깔인 빨강색과 흰색의 옷과 모자를 쓰고 세상에 나타난 것이 계기가 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간 것이 산타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풍이 오늘까지 성탄절만 되면 낮고 천한 자리로 멸시를 받으며 오신 예수를 밀치고 산타가, 상업주의가 그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 없는 성탄절이 되어버렸습니다. 성탄절은 예수가 주인입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들이 오늘의 이라크 땅에서 베들레헴까지 수개월 동안 낙타를 타고 걸어서 찾아와 예수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마땅히 주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 날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크리스마스는 우리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섬기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의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은 내가 세상에 오신 주님을 위해서 무엇으로 섬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섬기는데 주저하면 안 됩니다. 욕을 먹어도 주님 때문이라면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더한 욕을 당하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금년 성탄절은 주님을 주님의 자리로 돌려드리는 성탄절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성탄절로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성탄절이 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눅 2:3-14, 행 2:37-42 / 류영모 ㅁㄱ사
I. 죄를 처리하려는 진지한 몸부림이 사라진 시대
한 사내가 염라대왕 앞에 섰습니다. “그대는 살아 생전 착한 일을 많이 했느냐 아니면 나쁜 일을 많이 했느냐?” 추상같은 질문 앞에 이 사내가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양쪽을 똑같이 한 것 같습니다.” “오호, 어찌 그런 일이?” “예, 저는 나쁜 짓을 한 뒤에는 반드신 뉘우치곤 했으니까요.”
탁월한 평신도 저술가 C.J. 루이스는 “타락한 시대에서는 죄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지한 몸부림이 사라진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에서도 자신의 죄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다가 질퍽거리는 눈물을 끌어안고 몸부림하는 사람들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죄를 안고 진지하게 고민을 해보지 못한 사람은 구원의 감격도 자유함의 환희도 맛 볼 수가 없습니다.
심지어 인본주의적 목회자, 심리학적 설교자들은 설교에서 “죄”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합니다. 죄악이란 말 대신 부적응, 잘못된 습관, 행동장애 등으로 표현하라고 충고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는 죄일 뿐입니다. 죄는 다른 말로 미화시킬 수 없는 그냥 죄일 뿐입니다. 죄에 대한 해결 또한 죄를 죄로 인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 집니다. 암은 암이라고 인정해야 치료의 길이 있습니다. 암을 “피부 부적응” “피부 장애” 등으로 미화시켜 놓고 연고나 발라서 치료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독약이 든 병에다 “설탕이나 꿀이 아님”이라 써 붙이고 아이들 앞에 갖다 놓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한국교회가 1907년 그날의 부흥을 새롭게 보고 싶다면 -
교회들마다 영적 부흥을 원한다면 -
우리 시대가 대각성의 기회를 얻고 싶다면 -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길 원한다면 -
비틀거리고 허우적 거리던 성도들이 바른 삶을 살고 싶다면 -
사탄의 영향에 갇혀 행복을 모르는 불행한 삶을 살던 사람이 자유하는 신앙인으로 살고 싶다면 -
우리는 모두 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정직하고 진지한 도전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2:37-38)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II. 회개: 부흥의 선행 조건
어느 시대나 부흥의 선행 조건은 회개였습니다.
오래전 영국 웨일즈 지방에서 있었던 위대한 부흥도 한 작은 교회에서 있었던 한 부인의 진지한 회개를 통해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있었던 이 교회에서 이 부인은 예배 시간 주기도문을 외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죄를 사하여 준 것같이” 이 대목에서 그는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최근 자신을 모함하고 아프게 한 형제의 얼굴이 떠 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기도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부질없이 봉사를 한다고 웃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심지어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심장에 화살맞은 노루처럼 뛰어나갔습니다. 용서가 안되는 그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미워했던 자기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했던 내 죄를 회개합니다.” 그때 그 형제 또한 진지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거기서 시작된 이 작은 교회의 회개운동이 웨일즈라는 도시에 번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한 시대를 불태웠던 웨일즈 부흥 운동의 시작입니다.
1907년의 대부흥 또한 회개로 시작된 부흥 운동이었습니다. 1907년 1월 10일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연례행사처럼 열리는 사경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시작전부터 여느 사경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첫날 집회를 마치고 그 자리의 영적 흐름을 정익로 장로는 이렇게 술회합니다.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굉장한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였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떨어버릴 수 있고 자유할 수 있을까 나는 몹시 번민하였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전보다 더 극심한 근심에 쌓인 얼굴과 죽음에 떠는 듯한 얼굴로 예배당으로 돌아와서 ‘오! 하나님 나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회개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집회내내 제직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 방위량 선교사님을 미워한 죄, 음란과 증오로 아내를 미워한 죄, 남의 물건을 훔친 죄 등등 회개와 고백이 줄을 이었습니다. 이길함 선교사는 이날의 역사를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고꾸라져 울었다. 그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제가 죽을 죄인입니다.”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나의 요리사는 사람들 가운데 고꾸라져 방 건너 쪽에 있는 나에게 소리쳤다. “목사님, 내게도 희망이 있는지, 과연 용서를 받을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눈물에 범벅이 되어 크게 부르짖었다. 때때로 회개의 고백 후에 모든 회중이 통성기도를 했다. 수백 명의 회중이 통성 기도를 하는 장관이란 뭐라고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시 회개의 고백을 한 후에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고 우리 모두는 함께 울고 또 울었다. 그 모임은 기도와 고백과 눈물로 새벽 2시까지 계속 되었다.
그렇습니다. 부흥운동은 곧 회개운동입니다. 성령의 대폭발이 있기 전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하나님과 우리 공동체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우리가 2007년 성령의 폭발을 기대한다면 반드시 회개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700날을 금식기도로 이어가며 우리가 영적 부흥 보기를 원한다면 먼저 회개운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III. 배경과 메시지
오늘 누가복음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을 살펴보십시다. 2000년전 유대인들은 로마의 속국으로 암담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던 헤롯 왕은 동생의 아내를 취하여 데리고 살만큼 도덕과 윤리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쥐꼬리만한 권력만 가져도 백성들을 착취할 만큼 사회는 혼탁할 때로 혼탁해져 있었습니다. 종교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기엔 껍데기만 남아 너무나 무기력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백성들을 붙들어 줄 유일한 힘이 있었다면 메시야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메시야는 오신다. 반드시 오신다. 나라를 잃고 어떤 고생을 해도 이들을 지켜주었던 힘은 바로 메시야 대망 사상이었습니다. 시간과 역사가 흘러도 이것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죽음도 이것만은 포기시킬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타락한 자리에서도 메시아 사상은 변질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려 400년 동안이나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의 메시지는 끊어졌고 하나님의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던 하나님의 음성은 어디 있습니까?
요셉을 사용하시던 하나님의 손길은 어디 계십니까?
모세를 인도하던 하나님의 지팡이도 어디에 있습니까?
다윗을 통해 세우시던 아버지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들려주시던 책망과 희망의 메시지를 우리는 어디서 들어야 한단 말입니까?
백성들은 막연하고 암담한 하루 하루를 보내던 어느날 선지자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타난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신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왕되신 메시야를 맞아들이기 위해 벗을 것은 벗고,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리고, 이을 것은 이어라. 구부러지고 삐뚤어진 마음을 펴라.」 구부러진 눈으로는 모든 것이 구부러지게 보입니다. 깨진 거울로는 모든 것이 찌그러지게 보입니다. 상하고 깨진 마음을 펴라는 것입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눅3:5)
「실패와 낙담, 절망과 불신을 버려라. 모든 소망이 끊어져도 예수에겐 소망이 있다. 아무리 속고 속아도 예수님은 믿을 수 있다. 모두가 나의 것을 빼앗아 가도 예수는 내게 부어주신다. “나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나는 구원 받을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예수는 능히 너를 구원한다! 메시야가 오신다. 회개하고 그를 영접하라! 」
4절, 5절 - 여기까지가 세례 요한의 메시지입니다.
IV.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러한 회개의 설교를 듣고 세례를 받으러 백성들이 광야로 광야로 몰려나옵니다. 감동 받아 나아온 백성들을 환영팀이라도 만들어 환영을 해야 할 판에 요한은 여지없이 그들을 책망합니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눅3:7-9)
책망의 내용은 세 가지 정도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 진노를 피하는 보증수표로 세례를 받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저주받지 않기 위해, 알량한 종교인 행세를 하기 위해 세례를 이용하지 말라는 겁니다.
둘째 진정한 너희 회개를 삶의 열매로 보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입니다.
셋째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을 닮은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으면서 아브라함을 너희 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모독하는 일이라는 거지요. 믿음의 후손이면 믿음의 후손답게 믿으라는 겁니다.
이때 그들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되물었습니다.
10절 12절 14절에서 백성도, 세리도, 군인도 똑같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What shall we do?)라고 묻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습니다. 같은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도 “우리가 어찌할꼬”입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자기를 달래주기만을 기대하는 오늘의 교인들에게 세례 요한처럼 설교하고 세례 요한처럼 교회로 몰려온 사람들을 책망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이런 목사님은 빈 예배당에서 설교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처럼 설교한다면 교인이 몰려오기 보다는 다 떠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저처럼 큰 교회 목사들은 가짜 설교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함께 깊이 고민해 보십시다. 설교는 성도들을 행복하게도 하지만 고민하게도 해야 하는 거지요.
오늘 본문을 주목해 보십시다.
요한으로부터 정나미가 떨어지는 책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찔림받은 유대인들은 진심으로 회개를 했습니다. 이 말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우리가 어찌할꼬”하는 것입니다. 시비를 걸거나 트집을 잡자는 의도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건성으로 던져보는 말이 아닙니다. “가르쳐 주면 그대로 살겠습니다”하는 결단입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눅3:11, 13, 14b)
“혁명을 일으키라, 세상을 때려 부셔라, 구조적 정치적 변화를 시도하라, 사회를 개혁해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내적인 변화,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네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옷 한 벌을 나눠주고 밥 한 그릇을 대접하고 직장에서 내가 깨끗하게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리고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기업가를 때려 엎고 나면 노동자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은 공동체입니다. 우리 모두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입니다. 아픈 사람 벗은 사람 네가 가서 돌봐 주라는 것입니다.
어느날 엄마 아빠를 따라서 5살난 딸이 외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족 나들이였습니다. 길에서 아빠의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때 그 친구되는 이가 어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넌 꼭 아빠 닮았구나”라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그때 이 5살난 딸아이가 까만 눈을 껌뻑거리면서 아빠 친구를 바라보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니예요. 전 아빠 안 닮았는데요. 아빠는요 욕도 잘하구요, 술도 잘 먹구요, 저녁에도 늦게 들어오구요, 교회도 안 가구요, 잠꾸러기예요. 전 아빠 안 닮았어요.”
이 딸아이의 말이 곧 세례 요한의 설교입니다. 내 가정 안에서 제대로 사는 것이 회개입니다. 내 가정 안에서 존경받지 못하는 성자는 위선자입니다.
V. 그 날의 회개운동이 다시 이 땅에
회개하라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몹시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당시 회개란 말은 대단히 생소한 말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 - 선민인데,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무슨 회개를 하란 말인가? 회개란 개종한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설사 죄를 지어도 성전에 나아가 양 잡아 제사하면 되지 무슨 회개를 하란 말인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말라빠진 종교인들에게 회개란 낯선 단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 없는 부흥은 없습니다. 회개 없는 종교는 우상입니다. Again - 1907년! 이 말은 그 날의 회개운동이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날 있었던 “우리가 어찌할꼬” 하던 회개운동이 우리 심장에서, 교회들 마다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날도 조선 땅은 조용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한반도는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는 외교권이 박탈당했습니다. 경제는 도탄에 빠졌고 종교는 유교와 동학의 붕괴로 진공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교회는 혁명을 부르짖고 정치가, 기업가, 종교가들을 비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먼저 회개하자.”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차분히 젊은 민족지도자들을 키웠습니다. 이 운동이 일제의 핍박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3.1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이것이 8.15 해방을 가져왔습니다.
1903년 원산 기도회에서 캐나다 의료 선교사 하리영(R.A. Hardie) 선교사가 자신의 무력함을 통회 자복합니다. 선교의 열매가 없는 자신의 무능을 털어놓습니다. 그는 실패의 원인으로 한국인 앞에서 서양 선교사들의 우월의식과 자만심을 고백했습니다. 진심어린 한 선교사의 고백이 회개의 불을 붙였고 회개의 뒤를 따라 놀라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언제나 회개하는 심령에 성령이 임합니다. 이때부터 4년 5년 6년 - 그리고 1907년 평양 대부흥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는 회개의 물결로 출렁이고 있었습니다.
살인, 간음,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결한 일들, 도적과 거짓, 서로 상처를 준 일을 고백함, 훔친 물건을 돌려줌 등등 마을 마을을 서로 찾아다니며 회개하고 고백하느라 술렁이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는 부정직하게 장사하여 모은 돈을 나눠주고 다녔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국인을 대상으로 부정직하게 얻은 돈의 총액을 돌려주자 중국인이 엄청난 돈 보따리를 들고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여신도는 청일전쟁 때에 아기를 업고 도망하다가 무거워 빨리 갈 수 없어서 아기를 나무에 부딪혀 죽이고 혼자서 달아났던 참혹한 일을 자백했습니다.
1907년 집회에 참석한 신자들에 의해 인간으로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고 보고서는 기록합니다. 사람의 체면도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었습니다. 국법에 의하여 처벌을 받는다든지 또 비록 죽음을 당한다 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만이 그들의 동일한 소원이었습니다.
집회시간마다 머리를 바닥에 찢으며 몸부림하는 사람, 가슴이 뜨거워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을 뒹구는 사람, 공포와 두려움에 목놓아 울다 울다 지쳐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사람... 그 누구도 구경꾼이 아니었고 비판자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울부짖는 회개자들이었습니다.
이 회개의 용기가 일제 강점기 순교의 용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회개의 강물에 뛰어들었던 사람들이 너도 나도 순교의 피바다에 첨벙 첨벙 뛰어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VI. 맺으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 시대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진실한 회개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힘쓰고 애써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내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흥 2007 금식기도 대행진 !
우리가 어찌할꼬 운동입니다.
제가 먼저 회개합니다. 회개 운동입니다.
“내 탓이로소이다. 나 때문입니다.” 운동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라”(행2:38)
마굿간에 오신 예수님
눅 2:1-7 / 최응희 목사
성탄절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대림절을 예수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더 많이 가까이 하는 절기로 보내자고 하였습니다. 대림절 넷째 주간에 당도한 여러분, 지난 세 주간의 대림절을 은혜 중에 보내셨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마리아와 요셉이 호적을 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을 방문하는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이미 만삭이 되어서 무거운 몸이었지만 당시 로마제국의 호적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향인 베들레헴을 향하여 떠나게 된 것입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가느라 늦게 도착하여서였는지 이미 베들레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 곳, 저 곳 여관의 문을 두드렸지만 방이 남아 있지를 않았습니다. 아니면 이 호황기를 놓칠 수 없는 여관주인들이 그들의 초라한 행색에 고개를 돌렸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 됐든 그들이 머물 수 있는 방은 없었습니다. 그나마 짐승들의 마구간에서 차가운 이슬을 피할 수가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경로로 해서 예수님은 마구간 말구유에 태어나시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어찌 보면 가난한 사람의 슬픈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깊은 뜻이 그 속에 이미 숨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그 많은 장소를 두고 마구간으로 오셨습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이러한 주님의 모습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주이셨지만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렇게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심은 세상에 물질이나, 지위나, 지식에 이르기까지 풍성한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가난한 자들, 비천한 자들에 이르기까지, 건강하거나, 연약하거나, 온전치 못한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구원의 소망이 되시고자 가장 비천하고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화려한 왕궁이나, 거룩한 성전이나, 부자의 안락한 안방에서 태어나셨다면 아무나 가까이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아무나 올 수 있는 마구간에 태어나심으로 모든 인류의 구주가 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마구간에는 잠을쇠가 없습니다. 마구간은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마구간은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나 학위를 가진 사람만 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마구간은 낮은 곳입니다. 아무나 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또 아무나 오지 않는 곳입니다. 다만 겸손히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만 올 수 있는 곳이 마구간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절기에 우리 또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경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지식이 있거나, 지위가 있거나, 재물이 있는 분들입니까? 그래서 어디서도 높은 자리에 대접받는 분들입니까? 그럴수록 적어도 교회에 와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시기 바랍니다. 그 허술하고 추하기까지 한 마구간에 그 먼길 찾아와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아기에게 무릎을 꿇어 예물을 드렸던 동방박사들의 모습처럼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분들입니까? 배움도, 재물도, 지위도 건강도 시원치 못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분들입니까? 그래도 주뼛거림이 없이 마구간에 달려와 무릎을 꿇었던 목자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주님 앞에 감사와 기쁨으로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셔서 누우신 곳은 구유라고 하였습니다. 구유는 먹이를 담는 그릇입니다. 마구간에 오신 것도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만 구유에 누우신 것도 놀라운 상징으로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요한복음6:48-51
예수님은 생명의 떡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먹어야 산다는 것은 영혼이 예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그것을 자신의 삶 속에 담으면 그것이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말씀을 먹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인간은 영 혼 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육이 건강하려면 음식을 잘 먹어야 하고, 혼이 건강하려면 지식과 좋은 경험이 많이 쌓아야 합니다. 그러나 영이 생명을 갖고 풍성하려면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생명양식인 말씀이 없으면 그 삶을 텅 빈 삶이요, 죽은 삶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 마태복음4:4
마침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을 이름이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이라는 말의 뜻은 '떡동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떡동네에 먹이통 속에 생명의 떡으로 오신 것입니다. 여기에 이미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생명의 떡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눔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마구간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성령께서 별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는 아기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그곳에 함께 임재하여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지식인, 부요한 자--동방박사, 가난한 자, 소외된 자--목동, 요셉, 마리아, 아기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말하자면 남녀 노소, 빈부귀천, 하늘의 별들과 땅의 짐승들 모두가 함께 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작은 천국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마구간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는 모두 사랑의 나눔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은 그 먼 길을 찾아와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목자들은 달려와 빈손이었지만 경배함으로 자신들의 믿음과 마음을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드렸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당신을 인류 구원의 제물로 세상에 주셨습니다. 심지어는 마구간의 짐승들조차도 자신들의 거처와 먹이통까지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마구간에서는 이렇게 은혜와 사랑과 나눔의 잔치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 마구간에서 일어난 나눔의 역사들이나, 전통적인 이야기인 싼타클로스의 이야기 속에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성탄이 사랑과 나눔의 절기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이 오셔서 양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마태복음 25:35-36
언제 그러한 일을 하였느냐고 놀라는 양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마태복음 25:40
어떻습니까?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이 은혜의 절기에 성도 여러분 산타클로스가 되 보시지 않겠습니까? 아무 대가없이 사랑의 나눔을 실천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나의 사랑의 베풀음에 되 갚을 길이 없는 사람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절기가 될 수는 없겠습니까? 한 번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한 주간 동안 그 누가 되었든지 어떤 것이 되었든지 낯모르는 분에게 나눔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되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여러분의 사랑을 나누어주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림절, 성탄절, 나눔의 절기, 은혜의 절기, 사랑의 절기, 화평의 절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함이 없는 사랑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동방박사는 자신들의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심지어 짐승들은 자신들의 거처와 먹이통까지 나누어 드렸습니다. 이번 성탄절 모두 믿음의 산타클로스가 되셔서 나눔을 실천하는 은혜의 절기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눅 2:1-7 / 박상훈 목사
금년의 마지막 달인 12월을 맞이했습니다. 12월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성탄의 달입니다. 그래서 이번 한 달 동안은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된 성탄에 대한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런 가운데 성탄의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성탄에 대한 말씀이 신약성경에 와서 비로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약성경에는 성탄을 예언하는 말씀이 적어도 350번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성탄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신약성경에서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예컨대 구약의 선지자 미가는 예수님의 탄생이 유대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보다 700여 년이나 앞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이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을 이미 오래 전에 예언했습니다.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창35:19에 의하면, 베들레헴의 원래 이름은 에브랏 곧 에브라다였습니다. 그러다가 에브라다는 점차 “떡집”을 의미하는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본시 이 베들레헴은 유다 지파에 속하는 하나의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선지자 미가는 장차 이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메시야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근본은 상고부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참고로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은 유다라고 하고, 헬라어로 기록된 신약성경은 유대라고 합니다. 똑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다, 곧 유대에 속하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눅1:26에 의하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본래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던 곳은 갈릴리의 나사렛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마리아가 자신이 살던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낳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절대적인 권위를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도 메시야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성취를 위해서라도, 예수님은 반드시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셔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과연 예수님이 어떻게 해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위하여,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서 한 가지 특별한 사건을 예비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호적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의 명에 따라서,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호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갈릴리의 나사렛을 떠나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섭리를 밝히기 위하여,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의 상황을 세 분야로 나누어서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로마 제국 전체의 세계적인 상황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상황입니다. 셋째, 요셉과 마리아의 개인적인 상황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와 같이 세 대지로 나누어서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부터 이번 한 달 동안 성탄에 대한 말씀을 계속해서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 모두 성탄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과 평강을 풍성하게 누리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로마 제국의 세계적인 상황(The World Setting, 1~2절).
눅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오늘 본문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눅1:5을 보면, “유대 왕 헤롯 때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세워서 유대 나라를 다스리게 했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에돔 사람, 곧 신약의 이두매 사람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들과 에돔인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점을 이용해서, 로마는 이두매 사람 헤롯을 유대의 왕으로 세웠습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았습니다. 그러자 헤롯 왕은 자기의 왕위가 위태롭게 될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들레헴과 그 근처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다 죽이게 했습니다.
바로 이 헤롯이 유대의 왕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기록된 대로, 그 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 가브리엘이 제사장 사가랴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그에게 아들을 낳아줄 것임을 일러주었습니다.
그로부터 여섯 달이 지났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또다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갈릴리의 나사렛에 살던 한 처녀 마리아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잉태될 것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과연 천사가 전해준 대로, 먼저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이 곧바로 아들을 잉태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후에 해산할 기한이 차서, 엘리사벳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예수님의 사자로,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온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여섯 달 후, 하나님은 드디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도록, 모든 상황을 섭리하셨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를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가이사”라는 말은 로마의 황제를 가리키는 칭호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나오는 “아구스도”는 하나의 형용사로서, 그 뜻은 “매우 존귀한”(highly honored)입니다. 그러니까 “가이사 아구스도”라는 말의 뜻은 “매우 존귀한 황제”가 될 것입니다.
그의 본명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 63 B.C.~14 A.D.)였습니다. 그는 주전 31년부터 주후 14년까지 45년 동안 로마를 통치했습니다. 그는 강대한 로마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른바 “로마의 평화”(the Pax Romana)를 이룩한 인물이 바로 그였습니다.
그래서 주전 27년 로마의 원로원은 그에게 “아구스도”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그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본시 이 “아구스도”라는 말은 신들에게 붙이는 칭호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신으로 숭배를 받아, 여러 곳에 그를 위한 신전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를 제패하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인구 조사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에 의해서, 모든 사람은 14년마다 한번씩 호적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당시의 호적, 곧 인구 조사의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징병과 세금 징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경우는 로마군으로 징집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호적은 순전히 세금 징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이방 나라인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일을 좋아했을 리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호적하기 위해서 각자가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 때 갈릴리에서는 이것을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행5: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따르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따르던 모든 사람들이 흩어졌느니라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6년에 호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갈릴리에서는 그 것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주동자는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곧 그리욧의 유다가 아닌 갈릴리의 유다였습니다. 그러나 그 폭동은 곧 진압되었습니다.
눅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그 당시 성지 이스라엘은 크게 보아 수리아의 관할 구역에 속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수리아의 총독은 구레뇨였습니다. 그는 두 번에 걸쳐서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처음은 주전 6년~4년이었고, 나중은 주후 6년~9년이었습니다.
그는 주후 6년 유대 나라에 있었던 호적을 책임졌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난 뒤에 이루어졌던 호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된 호적은 그 14년 이전인 주전 8년에 있었던 것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주전 8년에 호적에 관한 영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첫 번째 실시되었던 호적이었던 관계로, 시행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리아 지역에서는 구레뇨가 총독이 될 때까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를 못했습니다.
주전 6년 구레뇨가 수리아의 총독이 되면서, 수리아 지역의 호적은 드디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대를 다스리고 있던 헤롯 왕에게 전달되어 시행되는 데에 또한 1~2년이 소요되었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연대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레뇨가 수리아의 첫 번 총독이 된 주전 6년 이후에 탄생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호적이 1~2년 안에 이루어졌다고 보면, 예수님은 주전 4년 무렵에 탄생하셨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의 세계적인 상황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천하로 호적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는 이 명을 유대 왕 헤롯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도 다 호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가이사 아구스도나,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나, 또한 유대의 왕 헤롯이나 모두가 하나님에 의해서 쓰임을 받은 도구들에 불과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사의 왕 고레스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위해서, 가이사 아구스도와 구레뇨와 헤롯 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류의 모든 역사를 홀로 주관하시며 섭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모든 나라의 흥망성쇠와 모든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하나님을 힘있게 의뢰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늘 나라 생명책에 우리의 이름을 호적한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을 앙망하며,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합시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언제나 그 선하신 뜻 가운데서, 우리의 발걸음을 선하신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상황(The National Setting, 3~5절).
그 당시 로마인들은 각자가 살고 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호적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렇게 손쉬운 호적 제도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독자적인 호적 제도에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첫 번 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이전에 어떠한 선례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왕은 유대인들의 방식에 따라서 지파별로, 족속별로, 집별로 인구 조사를 행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족보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법적 아버지인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그의 본적지인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해야만 했습니다.
요셉은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때는 겨울철이었습니다. 비가 내릴 때였습니다. 게다가 요셉의 아내 마리아는 해산할 기한이 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먼길을 떠나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에 따라서,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는 자기 구역 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호적을 끝마쳐야 할 기한을 확실하게 못박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셉은 힘든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없이 먼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는 이 호적으로 말미암아, 가이사 아구스도의 상당한 신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이 호적이 성공적으로 잘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임기가 끝나고 나서, 뒤에 다시 한번 더 수리아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눅2: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여기서 밝히고 있듯이, 요셉은 호적하기 위하여 자기 혼자 베들레헴으로 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요셉의 아내 마리아를 가리켜서, 요셉과 약혼한 사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천사의 분부에 따라서, 요셉은 그의 아내 마리아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는 분명히 약혼을 끝내고, 그들이 결혼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직도 요셉과 마리아가 약혼 상태에 있는 것처럼 언급을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마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그들은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은 그들이 동침하지 않았음을 밝혔습니다. 이 사실을 누가복음은 오늘 본문에서 다른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법적으로는 결혼을 했지만, 아직도 그들은 약혼 관계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직선 거리만 130km에 이릅니다. 만일 요단강을 건너서 베뢰아 지방으로 돌아간다면, 그 거리는 훨씬 더 되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베들레헴은 해발 600m 고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호적하러 “올라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지금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그러한 몸으로 먼길을 여행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요셉은 마리아를 데리고 갔습니까? 마리아도 다윗의 자손이었기에,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해야만 했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마리아가 동행한 것이 의무적인지 자발적인지에 대해서는 밝히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여자도 세금을 내기는 하지만 본인이 호적하러 갈 필요는 없었습니다. 한 가정의 호주가 그의 가족을 대신해서 호적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가 나사렛에 혼자 남아서 아들을 낳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했다는 사실을 천사를 통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은 마리아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마리아를 주변의 비난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갔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무엇입니까?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영을 내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만일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가 호적하는 기일을 정하여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만일 헤롯 왕이 각자의 처소에서도 호적할 수 있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에서 탄생하셨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예언은 응하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결과 성경은 절대적 권위를 상실하게 되고, 아울러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사실도 분명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그 당시 로마 제국의 세계적인 상황과 그 당시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상황을 섭리 가운데 주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들로 하여금 베들레헴으로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눅12: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눅12: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든 일을 당하셨습니까? 처해 있는상황이 너무 어렵습니까? 그럴지라도 낙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맙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섭리하시며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의 손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의 세세한 것까지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정녕 늘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날마다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요셉과 마리아의 개인적 상황(The Personal Setting, 6~7절).
눅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드디어 요셉과 마리아는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마리아가 만삭의 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여행길을 재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가급적 천천히 움직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나사렛을 출발한 지 아마도 닷새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베들레헴에서 얼마 동안을 머물렀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호적할 사람들이 많아서, 그들의 순번이 될 때까지 기다렸을 수도 있습니다. 호적은 끝이 났지만,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찼기 때문에 그 곳에 그대로 머물렀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 그들이 갈릴리 나사렛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반드시 그대로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섭시다. 그리하면 우리가 붙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찼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성령님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이는 분명히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는 모두 방법을 따랐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마리아의 태중에서 10개월을 자라셨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태어나셨습니다. 눅2:21 말씀처럼, 예수님은 난지 팔 일이 되어 할례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지혜도 자라시며, 그 키도 자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우리와 똑같은 성장 과정을 거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통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능히 도우시며, 우리를 모든 고통 가운데서 능히 구원해 내십니다.
히2:17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
히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하셨습니까? 혼자서 괴로워하지 맙시다. 예수님에게 아뢰며,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을 능히 이겨내게 하실 것입니다.
눅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리아는 “외아들”을 낳은 것이 아니라, “첫아들”을 낳았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 계속해서 자녀들을 낳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주교에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동정녀의 상태를 그대로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틀린 말입니다.
마13:15~16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막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눅8:19 예수의 어머니와 그 동생들이 왔으나 무리로 인하여 가까이 하지 못하니
요2:12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이와 같이 예수님의 형제들과 누이들에 대해서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에 자녀를 낳지 않고 끝까지 동정녀로 살았다는 천주교의 주장은 전혀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내용입니다.
마리아는 그의 첫아들 예수님을 낳아서 강보로 쌌습니다. 강보는 갓난아기를 둘러싸는 천을 뜻합니다. 강보는 갓난아기의 체온을 보호해줍니다. 그리고 몸에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보호해줍니다. 아울러 팔과 다리가 곧게 자라도록 도와주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모양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도 알몸으로 태어나셨습니다. 키도 얼마 안되고, 몸무게도 얼마 나가지 않는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태어나시자 말자, 다른 아이들처럼 강보에 싸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놀라운 말씀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구유에 뉘었으니.” 아기 예수님은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구유는 가축의 꼴을 담는 그릇, 곧 여물통을 의미합니다. 갓난아기가 태어나면 따뜻한 방안에 눕혀야 하는데,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눕혔습니다.
우선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예수님이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구유에 누이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음이 분명합니다.
오늘날 유대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 탄생 교회」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곳을 기념해서, 그곳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장소를 가보면, 그 곳은 동굴로 되어있습니다. 아마도 그 당시에는 동굴이 가축을 기르는 마구간으로 이용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그 당시 마구간에서 사용하던 구유는 갓난아이를 누이기에는 적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강보에 싼 아기 예수님을 임시로 구유에 뉘었습니다. 그러면 왜 아기 예수님은 마구간의 구유에 뉘일 수밖에 없었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이유를 이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베들레헴은 작은 동네였기에, 그 곳에 숙박 시설이 발달했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호적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서, 그 곳의 숙박 시설이 동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숙박 시설 앞에는 으레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당시의 숙박 시설 앞에는 으레 마구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나귀나 노새와 같은 짐승들이 교통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여관에 딸린 마구간에서 그들의 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더럽고 냄새나는 그 곳에서 아기 예수님을 해산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후에 준비해온 강보에 아기 예수님을 싸서 구유에 눕혀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며칠이나 마구간에 머물렀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지를 못합니다. 단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호적을 마친 사람들이 되돌아가고 난 뒤에는, 그들이 여관에 머물 곳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마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이와 같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이르렀을 때, 아기 예수님은 더 이상 마구간의 구유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이미 집으로 옮기고 난 뒤였습니다. 말하자면 여관에 있을 곳이 생겼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베들레헴에서 탄생시키기 위해서 가이사 아구스도를 사용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로마의 황제를 동원하시는 하나님이 왜 그 아들의 탄생을 위해서는 마구간과 구유만을 준비하셨을까요?
고후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리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난해지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요해졌습니다. 예수님이 마구간의 구유에 누이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구간이 어떠한 곳입니까? 더럽고 지저분한 곳입니다. 추하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곳입니다. 마구간은 우리의 죄를 잘 상징해주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마구간보다도 우리의 죄를 더 더럽게, 더 역겹게 여기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더럽고 추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더럽고 추한 죄를 모두 담당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의 모든 허물이 깨끗하여진 것입니다.
또한 구유는 어떠한 곳입니까? 짐승들에게 줄 먹이를 담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구유에 뉘이신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것을 잘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기쁨으로 예수님을 위하여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뜻깊은 성탄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 모두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본받읍시다. 우리 모두 가난한 심령이 되어, 우리 속에 천국을 풍성히 소유합시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마음을 예수님의 보혈로 청결하게 하여,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밝히 바라봅시다.
아울러 우리 모두 성탄의 기쁨으로 충만해서, 우리를 짓누르는 죄의 짐과 세상적인 근심과 염려 및 두려움에서 온전히 벗어납시다. 그리고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우리 주변의 모든 이웃들과도 함께 나누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구유속의 하나님
눅 2:1-7 / 조재호 목사
어제 차안에서 뉴스 중에 재미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듣게 되었습니다. 네티즌들이 이번 성탄절에 산타클로스에게서 받고 싶은 선물 1위는 디지털카메라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산타클로스가 선물은 그냥 두고 취직 자리나 알아다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했답니다. 어린아이들이나 어른들도 성탄절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산타클로스입니다.
지금부터 약 1700년 전 소아시아 루시아주에 있는 파타냐라는 항구 도시에 니콜라스라는 사람이 태어났습니다. 그는 후에 감독이 되었는데 인격이 훌륭하고 마음씨 착한 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이맘때만 되면 어려움에 처해 있는 많은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도움도 주고 선물도 건네 주었습니다. 후대에 그의 이름을 따서 '성 니콜라스' 즉 '세인트 니콜라스'이지만 사람들이 발음하기 좋게 '산타클로스'로 불리게 된 것이 그 유래입니다. 성탄절의 정신 중의 하나가 곧 산타클로스가 보여준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더 복된 계절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것이 구세주로 오신 아기 예수의 오신 목적이고 주님이 가르쳐 주신 정신입니다. 내 것을 남에게 베푸는 실천을 통해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여러 분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 기록입니다. 길지 않지만 아주 중요한 3가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시게 된 정치적 상황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점입니다. 셋째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실 속에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성령님이 들려주시는 그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1. 첫째로 예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가 사는 갈릴리 고장을 떠나 남쪽 유대 땅에서 태어나게 된 까닭은 로마 황제의 호적하라는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인물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태어나기 27년 전부터 예수님 탄생후 14년까지 세계를 호령하는 로마의 황제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기원전 27년에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위대하고 지극히 숭배 받을 만하다'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고 최고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로마에 속해 있는 여러 식민지 나라들을 잘 다스리는 방법 중의 하나는 인구조사를 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최고 통치자 로마 황제가 영을 내렸습니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황제의 영은 곧 법입니다. 그 나라에서 살기 원하면 그 나라 임금의 법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호적하려고 각각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이동하는 틈에 요셉과 마리아도 끼어 있었습니다. 마리아의 몸은 많이 무거워 보였습니다. 그래도 부지런히 발걸음을 재촉하여 고생하며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우주와 역사의 진정한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도 우리로 정확하게 호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적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지를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호적은 한 인간이 이 땅에 존재한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출생기록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출생기록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출생 기록은 하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3:5)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들의 이름 석자가 먼저 하늘 생명책에 기록되어야 합니다. 인생 길이 멀고 험해도 여러분의 이름이 먼저 호적에 올라야 합니다. 하늘의 호적에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흐리지 않게 기록될 수 있습니까? 아이가 태어나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태어나면 됩니다. 이미 태어난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난다고 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나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믿음의 고백이 이루어지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입니다. 하늘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는 예수님께서 조상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내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1000년전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인 다윗이 이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으로부터 7Km 정도 떨어져 있고 나사렛으로부터는 150KM정도 떨어져 있는데, 오래 전 옛 이름은 에브라다였고 야곱의 아내 라헬이 묻힌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곳에서 다윗 왕국의 진정한 메시야가 태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 선지자들을 통해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그렇게 오신 것은 하나님 약속의 성취입니다. 세상 임금의 명령으로 마리아가 그곳에 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 하십니다. 지금도 선한 사람을 선하게 사용하시고 악한 사람을 악하게 사용하십니다. 거듭난 바울도 크신 하나님 구원역사에 사용하시고 무섭고 악한 바로도 하나님 역사의 일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악한 도구가 아니라 선한 축복의 도구로 사용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오신 것은 우리의 생명 양식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의 이름의 뜻은 떡을 만들고 떡을 파는 '떡집'입니다. 낙원동 떡집하면 옛날에는 유명했습니다. 겨울에 긴 떡을 뜨거울 때 참 기름 조금 떨어뜨린 간장 찍어 먹는 맛이 최고입니다. 떡을 먹으면 속이 든든합니다. 떡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에 온 떡이니 나를 먹는지 마다 주리지 않고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배부른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로 배부른 부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셋째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상상치도 못할 고약한 냄새나고 지저분한 곳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저녁 늦게 들어가면 집으로 올라가는 통로 가까이에 주차할 공간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지하 공간을 두 바퀴쯤 돌아도 자리가 없을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늦게 들어서는데 아니나 다를까 자리가 꽉 차고 집에서 먼 곳에만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요? 내가 주차하기 가장 좋아하는 넉넉한 장소 가장 가까운 장소가 딱 하나가 비어 있는게 아닙니까? 그럴 때 나오는 소리가 무엇인줄 아세요? 운전대를 탁 치며 하는 말, "할렐루야! 내가 오늘 무척 피곤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 가장 좋은 한 자리 비워 두셨구나" 신나서 일층으로 올라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데 1층에 있던 엘리베이터가 내가 타기도 전에 그만 위로 올라가는게 아닙니까? 어찌 이런 일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데 5층이나 10층 가는 것도 아니고 층층이 서면서 18층까지 가는게 아닙니까. 수능수험 만점을 맞고도 대학에서 떨어지면 하나님이 외면하신 것이 아닌가? 엘리베이터가 나를 기다려 주지 않고 떠나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잘 되어야 하나님 은혜이고 하나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역사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9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스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주행 중이던 화물차가 제방에 부딪히는 큰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화물차 뒤칸에는 운전자의 아내가 누워 있었고 그녀는 임신 8개월 째였습니다. 충돌 충격으로 31세의 아내는 앞 유리창을 깨고 앞으로 날아갔습니다. 복부에 치명적인 자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궁 속에 있던 아이가 몸밖으로 길바닥으로 퉁겨져 나왔습니다. 인근에 살던 18세 패트리샤 웰치라는 소녀가 달려갔고 영하 10도의 길바닥에 퉁겨져 나온 아기를 담요로 감싸주었고, 잠시후 구조요원이 도착해 탯줄을 자르고 검진을 했는데, 아기는 무릎에 가벼운 상처를 입은 것 외에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운전하던 아빠는 놀랐고, 응급처치하던 사람들은 차에서 길바닥에 떨어져 펼쳐진 성경책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아기는 하나님이 내린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생각에 하나님 너무 하신다고 생각지 않았을까요? 다른 아기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태어나실 텐데, 동네 여관마다 묵을 곳이 없더라도 한 곳은 비워 두셔야 하지 않는가요? 그래야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는데, 그래야 은혜라고 하나님이 인도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곳은 정상적인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양이나 염소, 혹은 말, 소가 지내는 축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최악의 장소를 통해 이 땅에 오시게 하셨을까요? 가축들의 냄새나는 먹이통은 죄악 많은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이 깨끗하고 살기 좋아서 하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로 얼룩지고 냄새나는 곳, 평화가 없고 다툼과 미움이 있는 어두운 곳으로 오셨습니다. 가축들의 냄새나는 먹이통은 죄악 많고 욕심 많고 지저분한 우리들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러한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가십니다. 은혜 주시는 곳이 그러한 곳입니다. 가축들의 냄새나는 먹이통은 가난하고 낮고 천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화려한 궁궐에서는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없습니다. 떵떵거리는 사람들 틈에서는 아기 예수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 울음소리는 평화를 가져다 주는 소리, 그 울음소리는 구원을 가져다 주는 소리입니다. 여러분 구유 속에 계신 예수님을 모시고 싶습니까? 여러분들 마음이 낮고 천한 구유가 되어 아기 예수의 울음소리가 들리기를 축원합니다.
있을 곳이 없게 하는 것
눅 2:1-7 / 김명혁 목사
지난 월요일 아침 송명희 시인이 다음과 같은 성탄 메시지를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그 메시지의 제목은 "자리를 빼앗긴 노숙자 아기 예수" 였습니다. 그 메시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무식한 느낌인지 모르나 선물을 주는 산타는 사탄 같고 뿔 달린 빨간 코의 루롤프 사슴은 루시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하나님께서 사람 되신 놀라운 선물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방해에 해마다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 분위기 띄우는 날인 양 흥청대는 밤 거리의 캐롤송이 마음을 아프게 만듭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도, 그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릴 수는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화려한 백화점 앞의 산타도 분주한 거리의 사람들도, 성모 마리아도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육신 되시고 하나님이 사람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이제 만왕의 왕으로 다시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2003년 크리스마스를 맞으며.. 송명희 시인”
저는 다음과 같은 글을 즉시 써서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송명희 시인에게, 2003년도 성탄을 맞으며 지금 우리들의 서글프고 부끄럽고 안타까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서술한 글을 오늘 12월 1일 아침에 보내주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송명희 시인의 글은 그 옛날 누가가 서술했던 서글픈 성탄의 이야기의 글과 꼭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을 몰아내고 우리가 주인이 되어 파티를 열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항상 예리한 영혼의 가슴과 눈과 귀와 손으로 주님을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하며 그리고 세상을 똑 바로 보고 묘사하는 송명희 시인의 글을 저는 너무너무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지난 9월 28일 주일 갑자기 송명희 시인과 부모님이 우리 강변교회에 와서 함께 예배 드릴 수 있었던 것 참으로 좋았습니다. 이번 12월에도 다시 한번 올 수 있으면 너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송명희 시인과 가정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2003년 12월 1일 김명혁 목사”
송명희 시인은 2002년 성탄절에도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라면 하나로 세 사람이 끼니를 때우고 추위와 배고픔을 안고 이리 저리 방황하는 노숙자 가족을 보면서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배 고플까?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면서 어느 날 새벽에 노숙자로 오신 아기 예수님이 떠올랐습니다. ‘맏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한 젊은 부부가 외지에서 얼마동안 묵을 숙소를 찾았지만 그들에게 따뜻한 방 하나 빌려 줄 사람이 없어서 그들은 길거리를 헤매었고 마침 그 아내는 임산부였습니다, 하마터면 길에서 아기를 낳을 뻔 했는데 숙소를 찾다 찾다 마굿간에 가서 아기를 낳았던 쓸쓸한 그 노숙자 가족! 그 이야기가 바로 크리스마스 스토리입니다. 해마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누구를 위한 크리스마스인가? 누구를 위해 징글벨 종은 울리나? 주인을 잃은 크리스마스와 자리를 빼앗기신 노숙자 아기 예수님을 인해 가슴이 저립니다.”
오늘 아침 12월 첫째 주일을 맞아 “죄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가지고 17번째 설교를 합니다.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은 “있을 곳이 없게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을 노숙자로 만드는 것이 죄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있을 곳이 없게 하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탄생했을 때 있을 곳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찼는데 마리아가 있을 곳이 없었고 아기 예수가 세상에 탄생했는데 아기 예수가 누울 곳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죄는 우리들을 찾아 오신 주님을 노숙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이 있을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문을 닫고, 우리의 집 문을 닫고, 우리의 일터의 문을 닫아 우리를 찾아 오신 주님이 있을 곳이 없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불행한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1).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왔으나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느니라”(요5:43).
예수님이 1907년 조선 땅에 오셨을 때에도 조선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있을 곳이 없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선주 장로님이 “이상한 귀빈과 괴이한 주인”이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은 이상한 귀빈이시고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는 괴이한 주인입니다. 존귀하신 분이 비천하고 누추한 땅에 오셨으니 이상한 귀빈이십니다. 귀중한 몸인데도 오셔서 밖에서 오래 기다리시니 이상한 귀빈이시고 전능하신 분이 간절히 두드리시니 이상한 귀빈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귀빈을 맞아드리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입니다. 자애하신 귀빈을 환영치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고 간절하신 음성을 듣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이며 굳게 닫은 방문을 열지 않으니 괴이한 주인입니다.” 길선주 장로님은 준엄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부르짖었습니다. “문을 열라 문을 열라 문을 열고 환영하라.” 설교가 끝나고 길선주 장로님의 기도가 시작되자 감동을 받은 회중은 여기 저기서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지르며 통회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장내는 금새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조선 땅에 찾아오신 예수님을 조선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모셔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베들레헴에 탄생했을 때 베들레헴 사람들은 아기 예수가 있을 곳이 없게 했습니다. 아무도 자기 집을 열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여관 문을 열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마음을 열고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모시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 자기 일들에 분주하고 바빴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베들레헴 사람들은 고향 찾아오는 고향 사람 맞느라 정신이 없었고 여관 주인들은 손님 받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갈리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눅2:1-5). 베들레헴은 고향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것이고 돈 벌이로 북적거렸을 것입니다. 헨드릭슨이라는 유명한 주석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것은 재산, 명예, 쾌락, 사업 등에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게는 예수께서 머무르실 방이 없었고, 예수를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바클리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오시기를 원했지만 사람들의 마음 속에 너무 많은 잡동사니들이 가득 차 있어서 들어오실 수가 없었다. 지금도 주님은 들어오시기를 원하시지만 지금도 사람들은 주님을 거절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 가정 일이나 친척 일이나 고향 사람 일이나 사업 일에 정신이 팔릴 때 주님이 있을 곳이 없게 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일에 너무 분주하고 바쁜 사람은 주님을 모시는 예배 시간과 기도 시간을 모두 빼앗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자기 일에 너무 분주하고 바쁜 사람은 주님을 모실 수가 없게 됩니다. 주님을 노숙자로 만듭니다. 주님이 있을 곳이 없게 만듭니다. 이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둘째 아기로 오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베들레헴 사람들이 아기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것은 자기들을 찾아오신 아기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을 몰랐고 그 아기가 자기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구세주이신 것을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겔덴후이즈라는 주석가는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은 주님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자신의 감정이나 애정이나 생각이나 소원이나 결단이나 행동이나 습관에 들어오시기를 거절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이 중요한지를 모를 때 그것을 거절할 수가 있습니다. 가정 일이 제일 중요하고 사업이 제일 중요하고 공부가 제일 중요하다고 착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을 거절할 수가 있습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고향 사람들이 더 중요하고 돈 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들을 찾아오신 가장 중요한 분을 받아드리지 않고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아기로 오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아기 예수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을 노숙자로 만들었습니다. 주님이 있을 곳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셋째 아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헤롯왕은 아기 예수가 유대인의 왕으로, 메시야로 오셨다는 사실을 동방 박사들을 통해서 그리고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통해서 듣고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없었습니다. 헤롯왕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었지만 아기 예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결국 헤롯왕은 아기 예수를 맞아드리는 대신 그를 쫓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애굽의 피난민으로 애굽의 노숙자로 만들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듣고 많이 알고 있지만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마음과 자기 집에 모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송명희 시인이 자기의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자기 마음과 자기 집에 모셔드렸습니다. 임명희 목사와 이선희 목사가 노숙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며 예수님을 자기 마음과 자기 집에 모셔드렸습니다. 이천년 전에도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셔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베다니에 살던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는 자기 집을 열고 예수님을 모시곤 했습니다.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니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눅10:38). 세리장 삭개오도 뽕 나무에서 내려와서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눅19:6). 베다니에 살던 문둥이 시몬이란 사람도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막14:3). 자기의 문둥병을 고쳐준 주님의 은혜와 한 동내에 사는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만찬이었습니다. 주님을 자기 집에 초대할 수 있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이 있을 곳이 없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마음 문과 집 문과 일터의 문을 굳게 닫아 걸고 주님이 있을 곳이 없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자기의 마음 문과 집 문과 일터의 문을 열고 주님을 맞아드리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 문과 집 문과 일터의 문을 열라고 두드리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문을 열고 주님을 모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의 것을 다 들어내고 항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주님을 높이고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하여금 나의 주인이 되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나의 마음과 몸의 주인이 되게 하시고, 나의 가정의 주인이 되게 하시고, 나의 일터의 주인이 되게 하시고, 나의 삶의 주인이 되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안식일 곧 주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주일 하루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일 오후와 저녁 시간에서 주님을 좇아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찌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찌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시24:7). 닫혀있던 것들을 다 여십시다. 숨기고 있던 것을 다 들어내십시다. 손 들고 항복하십시다. 그리고 주님을 모셔드립시다. 주님으로 하여금 나의 마음과 몸과 집과 일터와 시간의 주인이 되시게 하십시다. 성탄의 달과 사랑의 달을 맞아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드리는 행복한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324장을 부르시겠습니다.
구유 속에 누운 두 아기
눅 2:1-7 / 김흥규 목사
1994년 두 명의 미국인이 러시아 교육부의 초청을 받아서 러시아로 갔습니다. 이들은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교도소나 사업장, 소방서나 경찰서, 심지어 큰 고아원을 방문하면서 윤리 도덕을 가르쳤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신앙적인 관점에서 가르쳐도 된다는 허락을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탄절이 가까워져 왔을 때 큰 고아원을 방문해서 원생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고아원에는 100 여명의 남녀 어린이들이 있었는데 모두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학대를 받고서는 정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들어온 아이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 조사를 하기 위해 고향인 베들레헴 땅에 왔지만 비어있는 여인숙이 없어서 짐승들이 잠자는 축사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며, 만삭이 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아서 구유에 놓았다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고아들은 물론이고 고아들을 돌보는 직원들까지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경청했습니다.
이제 예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 마친 다음에 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예수님의 탄생 모습을 공작으로 재현해볼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래서 마분지 세 개를 나누어주면서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구유, 즉 여물통을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동네에서는 색종이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란 냅킨에서 잘라낸 조그마한 정사각형 종이도 아이들에게 한 장씩 나누어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지시를 따라서 종이를 찢어서 지푸라기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그 조각들을 구유 안에 흩어 놓았습니다. 또 어떤 미국 여자가 러시아를 떠나면서 버린, 다 낡아빠진 나이트 가운에서 잘라낸 작은 헝겊조각들을 아기 예수를 감싸는 강보, 즉 담요처럼 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는 두 사람이 미국에서 가져온 어떤 가죽제품을 오려서 인형처럼 만들어 쓰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두 사람의 미국 선생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열심히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샤(Misha)라는 이름을 가진 여섯 살 먹은 아이가 만든 구유는 이상했습니다. 구유 안에 아기 예수 혼자 누운 것이 아니고 두 아이가 함께 누워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미국 선생 하나가 물었습니다. "아니, 너는 구유에 왜 아기를 둘씩이나 뉘여 놓았니?" 미샤의 대답은 무척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구유에 뉘였을 때 갑자기 예수님이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머무를 빈방이 있는지 물으셨어요. 저는 예수님께 아빠도 엄마도 아무 일가친척도 없는 제가 무슨 빈방이 있어서 예수님을 모실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아, 네가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좋겠구나' 하시면서 저와 함께 있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 그건 안됩니다. 저는 다른 아이들처럼 돈이나 있어서 예수님께 사 드릴 선물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어떻게 저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이세요?' 하면서 만류했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과 꼭 함께 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저와 함께 계실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추운 날씨에 구유에 누워 계시니 얼마나 추우실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어 드릴 수는 없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또 여쭈었지요.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따뜻하게 만들어드리고 싶은데, 그것이 예수님께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때 예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미샤야, 네가 나를 따뜻하게만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일찍이 내가 받을 수 있었던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란다.'--'Misha, if you keep me warm, that will be the best gift anybody ever gave me.' 그래서 저는 주저하지 않고서 예수님께서 누워 계신 말구유에 들어가서 함께 누웠지요. 둘이 함께 누워 있으면 온기로 따뜻해질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제가 구유에 들어가 예수님 곁에 누웠더니 예수님께서 저를 쳐다보시면서 '미샤야, 고맙구나. 이제는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어주마' 하고 말씀해주셨어요."
어린 미샤가 이 말을 끝냈을 때 그 미국 선생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 고아 소년은 그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학대를 받았기 때문에 다시는 자기를 버리지도 않고 학대도 하지 않을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미샤는 바로 그런 사람을 구유에 누워 있는 예수님께서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유 속에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있고 싶은 생각에서 구유 안에 인형 두 개를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 아기는 예수님이고 또 다른 아이는 바로 자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추위에 떨 아기 예수님을 자기 체온으로 녹여주어서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반대로 이 고아 소년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해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구중궁궐에서 나지 않으시고 마구간의 구유에서 나셨다고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 조사를 하기 위하여 나사렛에서 선조의 고향인 베들레헴까지 80 마일 정도를 달려갔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 정부는 주기적으로 인구조사를 했는데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그랬습니다. 첫째는 세금 문제 때문이었고, 둘째는 병역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징집 면제가 되었기 때문에 순전히 세금을 부여하기 위한 목적으로 호적 조사, 즉 인구 조사를 실시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구 조사 문제 때문에 먼 길을 달려갔던 마리아는 만삭의 몸이었습니다.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베들레헴 땅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빈방이 없었습니다. 아기를 자유롭게 해산할 수 있는 아늑한 여인숙 방 하나를 구하기 어려웠다는 말입니다. 결국 본문 7절에 보니까 어쩔 수 없이 아기 예수님을 낳아서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 여인숙의 방들은 큰 공중 마당을 마주보면서 여러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짐승의 축사처럼 생겼습니다. 대개 손님들은 자기가 먹을 음식을 가져오는데 여인숙 주인이 제공하는 것은 짐승들 먹일 사료와 음식을 만들 수 있는 땔감 정도였다고 합니다.
결국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여인숙 방도 사람들이 차고 넘쳐서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여인숙 방들이 바라다 보이는 공중 마당, 아니면 여인숙 뒤편 어딘가에 짐승들을 위해 파놓았던 작은 동굴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해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말이나 낙타에게 사료를 먹이는 구유에 아기 예수님을 뉘어 놓게 된 것입니다.
마 1: 23에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불치의 병에 걸려서 의사 선생도 희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을 때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학생들이 시험을 치렀는데 엉망이 되어서 F학점을 받는 그 순간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나갈 때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가장 외롭고 힘들어하는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사업에 실패하고 좌절할 때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자식들이 속을 썩이고 가정에 큰 위기가 닥치는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임마누엘이 되셔서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 예수님을 따뜻하게 만들어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고아 소년 미샤가 그랬던 것처럼 구유에 함께 들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과 떨어지지 않고 주님 역시 우리 곁을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아기 예수님과 함께 구유에 있기를 거부합니까?
첫째로, 엉뚱한 곳에서 기쁨과 위로와 희망을 찾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집이나 나이트 클럽, 파티나 샵핑 몰 등에서 기쁨을 찾고 위로를 찾고 희망을 찾습니다. 물론 그런 곳들이 우리에게 일시적인 기쁨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참 기쁨은 주지 못합니다. 잠시 잠깐 동안의 위로를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오랫동안 지속되는 위로는 주지 못합니다. 금방 있다가 사라질 희망은 안겨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인 희망은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잘못된 곳에서 기쁨과 위로와 희망을 찾았다면 오늘 성탄절을 기점으로 해서 올바른 곳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마구간의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안에서 진정한 기쁨과 위로와 희망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 여러분 모두 그 구유 안에 아기 예수님과 함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여러분들은 예수님을 따뜻하게 만들어드릴 수 있고, 예수님 역시 여러분들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참 기쁨과 위로와 희망을 허락하여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들은 세상일에 너무 바빠서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님께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아기 예수님께서 누워 계신 구유에 관심을 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바쁜 사람들은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들에 비해서는 훨씬 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칠 정도로 바쁜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바빠서 ∼을 하지 못한다"고 핑계를 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느냐 죽느냐 하는 영적 문제에도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것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때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바쁘게 살았느냐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분주하게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태어나시던 날 여인숙 주인들을 비롯하여 세상 사람들은 전부다 세상일에 바빴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손님을 받아서 대목을 챙기겠다는 열심 하나로 메시아가 태어났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아니,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 나중에 땅을 치며 최고로 후회했던 사람이 있었다면 베들레헴의 여인숙 주인들이었을 것입니다.
만삭이 된 마리아가 빈방을 찾아 헤맬 때 "빈방 없어요!" 하고 방문을 꽝 하고 소리가 나도록 닫았을 주인들을 생각해보세요. 돈버는 일에 대목 잡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메시아, 그리스도를 외면했습니다. 그리하여 일생일대의 최고의 축복된 일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놓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 놈에 바쁜 것 때문에 구세주, 그리스도, 주님께서 편안하게 태어날 따뜻한 방 하나 제공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천추의 한을 남겼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맞아 차분히 구유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 구유에 들어가 예수님과 함께 거하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는 역사가 일어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사람들은 의심하기 때문에 구유에 누운 아기를 보지 않습니다.
테러의 위협이 끊어지지 않고, 미국과 이라크 사이의 전쟁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지고,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겠다고 하는 세상에 과연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가 해결사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의심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2천년 동안 총칼로 도저히 해결하지 못했던 일들을 평화의 왕 예수님은 단숨에 해결하셨다는 사실을! 로마는 칼로서 세계를 정복했지만 칼 때문에 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칼도 없이 총도 없이 오직 사랑과 용서 하나로 세계를 간단히 정복해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빛이시요, 소망이시요, 생명이십니다! 폭력으로 무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어딘가 누워 있는 핵무기나 미사일이 세계 평화를 보장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오직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 그 예수님이 주시는 사랑과 평화와 용서와 정의와 자유만이 진정한 세계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마구간의 구유로 초대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화려하고 안전하고 영광스러운 곳이 아닌, 가장 초라한 곳 마구간으로 여러분들을 인도하십니다. 겨울 추위에 떨고 계신 아기 예수님은 여러분의 따뜻한 체온을 그리워하십니다. 여러분들이 구유에 함께 있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루만이라도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그 구유에 함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 역시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고 영원히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
눅 2:1-7 / 조상호 목사
저는 그 동안 우리 교회에 부임해 온 후 지난 7년 동안 계속했던 성탄카드를 올해에는 보내지 못했습니다. 작년에는 중국선교에 가서 구입한 그림엽서로 대체했지만, 올해에는 바누아투에 선교를 다녀온 후, 밀린 여러 가지 사역들을 감당하느라 단 한 장의 성탄카드도 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린이들과 청년들과 성도님들로부터 성탄카드와 쵸코렛, 등의 선물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가 제일 기억나는 선물 두 가지가 있습니다. 두 가지 다 청년으로부터 받은 선물입니다.
제가 몇 주 전 2부 예배에서 ‘목사도 작은 일에 무너질 때가 있다’라고 하면서, 제가 바로 전 날 비스켓 하나 때문에 아내와 다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메시지를 준비하던 토요일 오후, 커피 한 잔과 함께 비스켓을 먹으려고 아무리 집안을 살펴보아도 비스켓 한쪽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우리 집안은 비스켓 한 쪽도 없냐?”라고 무심코 말하자, 아내가 “우리 가정은 손끝으로 절약하며 살아야 되요.”라고 대답하는데, 저도 모르게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부부싸움을 하지 않는 편인데 그 날은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내에게 “그래, 비스켓은 비싸고 밤과자는 비싸지 않냐? 지난 번 혼자서 밤과자 먹다가 나한테 들켰잖아.”하면서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목사도 이렇게 한심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고 청년들에게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의 그 이야기를 들었던 청년들 중 한 자매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날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목사님, 작은 정성이에요. 목사님 생각이 나서 준비했어요.”라고 하며 조그만 상자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선물이었을까요? 비스켓이었습니다. 우리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문제의 비스켓 3 PACK이 예쁜 종이 쇼핑백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3일이 흘렀는데, 이번에는 한국으로 귀국하는 한 형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번에도 “목사님, 작은 정성이에요. 목사님 생각이 나서 준비했어요.”하면서 비닐봉지에 쌓여 있는 것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선물이었을까요? 역시 우리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게 된 원인을 제공한, 문제의 밤과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저는 두 청년들로부터 받은 그 선물, 비스켓과 밤과자를 결코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값으로 환산해보야 각각 10불 정도밖에 되지 않는 선물이지만, 그 선물들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무슨 선물을 받고 싶습니까? 아니 어제 크리스마스 이브에 무슨 선물을 받았습니까? 1년 전의 통계입니다만, 어느 방송에서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크리스마스가 무슨 날이냐’고 물었더니, ‘산타클로스의 생일’이라고 대답한 어린이가 무려 64%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에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휴대전화라고 대답한 어린이들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남자아이들은 게임 CD이고, 여자아이들은 예쁜 옷과 액세서리, 등이라고 합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크리스마스 = 선물 받는 날’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이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선물이나 주고받으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는 날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육적인 즐거움을 찾기에 분주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Mery Christmas" 라고 인사를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거워하지만, 진정으로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신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지옥 불에 던져져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낮고 천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출생케 한 날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오늘, 우리 인류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이 선물은 세상에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쵸코렛이나 칠면조 고기나 게임 CD, 등과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최고의 선물을 거절했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는 어떠한 여관집 주인도 따뜻한 방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 집에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최고의 선물이신 아기 예수님은 당시 짐승들을 키우던 마굿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갓 태어나신 아기 예수께서는 누울 침대조차 없었습니다. 하는 수없이 아기 예수님은 짐승들이 여물을 먹는 구유에 눕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우리 인류를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우리 인류가 최초로 준 선물은 구유였으며, 마지막으로 준 선물은 십자가였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아기 예수님을 거절했을까요? 왜 아기 예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을까요?
가득 차 있었기 때문
첫 번째 이유는 모든 방들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유대 나라는 로마제국에 나라를 빼앗긴 채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아구스도는 세금을 매길 자료를 얻기 위하여 모든 로마제국의 인구를 조사했습니다. 따라서 로마제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각각 자기들의 고향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당시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던 요셉은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아구스도 황제의 명을 따르기 위해 호적을 정리하러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그 어디에도 빈방이 없었습니다. 먼저 온 사람들이 이미 모든 방들을 다 차지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어디에도 들어가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베들레헴의 상황은 우리들에게 영적인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의 방이 가득차버렸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가득 차서 주님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사역을 하고 계시는 최효섭목사님의 명상록에서 굉장히 의미 있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월요일, 주님이 내 집에 오셨지만 문 앞에서 돌아가 버리셨습니다. "네 마음에는 아들 딸이 가득 차서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구나." 화요일, 노크만 하신 주님은 발길을 돌이키셨습니다. "네 집은 돈으로 꽉 차 발디딜 틈도 없구나." 수요일, 나를 부르시던 주님은 슬픈 낯이 되셨습니다. "세상 재미에 귀가 먹어서 내 음성을 못 듣는구나." 목요일, 주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내가 찾아왔는데도 조금 피곤하다고 인사도 안 하니?" 금요일, 주님은 우셨습니다. "뭐라고? 나보고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라고?" 토요일, 거센 노크 소리와 함께 주님의 고함 소리. "이젠 나에게 문도 안 열어주느냐!" 주일, 교회에 갔더니 주님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날마다 네 집에 가도 들어갈 자리가 없었는데, 그래도 오늘 하루라도 잊지 않고 잠깐이라도 들려주니 고맙구나!"
저와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저와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람은 아닙니까? 너무 바쁜 나머지 주님을 잊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말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산다고 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주님을 잊은 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배당에 와서 귀로는 설교는 듣고 있지만, 머릿속으로는 “예배 후 오늘 오후에 뭘 할까, 내일 Boxing Day에는 어디를 갈까, 어떻게 해야 퍼팅을 잘 할 수 있을까, 2006년에는 어떤 사업을 시작해야 하나”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의 마음의 방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무엇으로 여러분들의 생각의 방이 채워져 있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의 방이 세상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주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들어가시지 못합니다. 2,000년 전 모든 방들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아기 예수께서 마굿간에 태어나신 것처럼, 우리 마음속에 세상적인 것들로 가득 차게 되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우리는 2005년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정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을 위한 마음의 방을 새롭게 마련해서, 주님을 모시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영적인 무지함 때문
예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의 영적인 무지 때문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있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조상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고, 중요한 부분은 달달 암송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미가서 5장 2절에서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 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는 말씀대로 자기들의 고향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실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정작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래 전 영국의 런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 날, 런던 교외의 한 농가를 지나가던 몇 사람이 그 집 주인에게 우산을 하나만 빌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주인은 별 생각 없이 자신이 쓰던 우산 중에서 다 부서진 낡은 우산 하나를 쓰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주인인 한 여인에게 그 우산을 씌워주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다음 날 어떤 사람이 예쁘게 포장된 편지와 함께 그 우산을 다시 가져왔는데, 그 편지에는 “참 감사합니다”라는 정중한 인사와 함께 어제 우산을 빌렸던 여자의 싸인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싸인은 “엘리자베스 여왕”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농부는 자기의 엄청난 실수를 후회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 줄 알았더라면 내가 정성을 다해 그 분을 영접했을 텐데. 그 분에게 내가 가진 가장 좋은 우산을 드렸을 것을....”
유대 땅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여관집 주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영국 여왕을 알아보지 못했던 그 농부처럼,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셨건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메시아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역사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지 못했습니다. 혹시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탄선물을 주면서도,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면서도, 크리스마스 츄리를 보면서도, 2,000년 전 오늘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서 아십니까? 여러분, 오늘 2005년도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다시 한번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주의 주가 되시며 모든 인류의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잊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너무 바빴기 때문
예수께서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세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세상일에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먹고 사는 일에 바쁘다보니 아기 예수 탄생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서 출생하건 그들은 상관하지 않고 돈 벌이에만 급급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바쁜 생활로 인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놓칠 정도로 바쁘게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쁘게 사시는 분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바쁘게 살았느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바쁘게 살았느냐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어제 드라마를 통해서 우리가 보았지만,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여관집 주인과 부인,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세상일에 바빴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손님을 받아서 큰 돈을 벌겠다는 생각 때문에 여관집 아줌마는 만삭이 된 마리아와 요셉이 빈방을 찾아 헤맬 때 "빈방 없어요!" 하며 거절했습니다. 나중에 여관집 아저씨는 마굿간에 머무르도록 배려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곳에서 아기 예수께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돈버는 일에 정신이 팔려서 메시아를 외면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일생일대 최고의 축복된 사건을 경험할 수 있는 찬스를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구촌교회 이동원목사님이 쓰신 글에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배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히틀러가 가장 신임하던 롬멜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롬멜 장군은 독일이 유럽과 전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이미 자기들이 정복한 프랑스 땅을 잘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의 남부해안을 지키고 그 지역을 요새화하는 일에 힘을 썼습니다. 1944년 5월 말경, 며칠 동안 그곳의 날씨가 좋지 않았습니다. 바다에는 안개가 자욱해서 작전을 전개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롬멜 장군은 연합군대가 그곳으로 공격해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며칠 동안 휴가를 갖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 6월 6일이 아내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롬멜장군은 아내의 생일 다음 날 새벽,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를 기점으로 전쟁의 무드는 독일군에서 연합군으로 넘어갔고, 결국에는 독일이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유럽의 역사는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사소한 일 때문에 엄청난 비극이 벌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여러분, 땀 흘려 일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증거하려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바쁘게 사느라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놓쳐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러시아에서 있었던 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1994년 두 명의 미국인이 러시아 교육부의 초청을 받아서 러시아로 갔습니다. 그들은 러시아에 머무르면서 교도소와 소방서와 경찰서, 심지어 큰 고아원을 방문하면서 윤리와 도덕을 가르쳤습니다. 러시아 정부가 신앙적인 관점에서 가르쳐도 된다는 허락을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자주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탄절이 가까이 왔을 때 큰 고아원을 방문해서 원생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습니다. 고아원에는 100여명의 어린이들이 있었는데, 모두 가족들로부터 버림을 받았거나, 많은 학대를 받은 후, 학대를 피하여 정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들어온 아이들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두 사람은 고아들에게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이야기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 조사를 하기 위해 고향인 베들레헴 땅에 왔지만, 비어있는 여관이 없어서 짐승들이 잠자는 축사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며, 만삭이 된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낳아서 구유에 놓았다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고아들은 물론이고 고아들을 돌보는 직원들까지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에 따른 이야기를 다 마친 다음, 두 사람은 아이들에게 마분지 세 개를 나누어주면서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구유, 즉 여물통을 만들어 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동네에서는 색종이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노란 냅킨에서 잘라낸 조그마한 정사각형 종이도 아이들에게 한 장씩 나누어주자, 아이들은 지푸라기처럼 보이게 하기 위하여 종이 조각들을 구유 안에 흩어 놓았습니다. 또 작은 헝겊조각들을 담요처럼 사용하여 아기 예수를 감싸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두 사람의 미국 선생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억하면서 열심히 구유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미샤(Misha)라는 이름을 가진 여섯 살 먹은 아이가 만든 구유는 이상했습니다. 구유 안에 아기 예수 혼자 누운 것이 아니고, 두 아이가 함께 누워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미국 선생님 중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니, 너는 구유에 왜 아기를 둘씩이나 뉘여 놓았니?" 그러자 미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구유에 뉘였을 때 갑자기 예수님이 저를 쳐다보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머무를 빈방이 있는지 물으셨어요. 저는 예수님께 아빠도 엄마도 아무 일가친척도 없는 제가 무슨 빈방이 있어서 예수님을 모실 수 있겠느냐고 대답했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아, 네가 그렇다면 오히려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것이 좋겠구나' 하시면서 저와 함께 있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 그건 안 됩니다. 저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돈이 없어서 예수님께 사드릴 선물이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어떻게 저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이세요?' 하면서 만류했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과 꼭 함께 있고 싶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저와 함께 계실 수만 있다면 제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요.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추운 날씨에 구유에 누워 계시니 얼마나 추우실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만들어 드릴 수는 없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또 여쭈었지요. '예수님, 제가 예수님을 따뜻하게 만들어 드리고 싶은데, 그것이 예수님께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까요?' 그 때 예수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어요. '미샤야, 네가 나를 따뜻하게만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것은 일찍이 내가 받을 수 있었던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란다(Misha, if you keep me warm, that will be the best gift anybody ever gave me.)' 그래서 저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누워 계신 말구유에 들어가서 함께 누웠지요. 둘이 함께 누워 있으면 온기로 따뜻해질 수 있다는 생각 하나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제가 구유에 들어가 예수님 곁에 누웠더니 예수님께서 저를 쳐다보시면서 '미샤야, 고맙구나. 이제는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어주마' 하고 말씀해주셨어요."
저는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교훈입니까? 주님은 어린 미샤와 같이 항상 당신과 함께 동행하기를 갈망하는 사람을 좋아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과 영원토록 임마누엘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도움을 구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영적인 무지함 때문에, 삶의 분주함 때문에 만왕의 왕이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거절했던 여관주인과 마을 사람들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주님과 항상 임마누엘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눅 2:1-21 / 임덕순 목사
세계는 오늘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소리를 높여 즐겁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성탄을 즐거워합니까? 그분이 오신 사건이 왜 이리 기쁜 일일까요?
그분이 만약 오시지 않으셨다면, 지금 이 세상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어느 캄캄한 밤, 베들레헴 경내 들판에서, 자기가 맡은 양들을 지키느라고 밤잠도 자지 못하며 추위에 웅크린 채, 양들을 지키고 있는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남들은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서 편안하고 따스한 방에서 가족들과 함께 잠들어있는 한 밤중인데 이들은 자기의 양들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양들과 함께 들판에서 떨고 있는 착한목자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늘이 갑자기 휘황찬란해지면서 천사들의 고요하고 황홀한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목자들은 무서워서 땅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내 하늘에서 이런 우렁찬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이 말을 하고는 천사들은 다시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 목자들이 천사들의 말대로 베들레헴 동네로 가서 여관집의 비천한 마구간 말구유에서 태어난 아기예수님을 찾아내었습니다. 그 아기를 보자 한눈에 천사들이 가르쳐준 귀중한 분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목자들은 그 아기께 굽혀 경배하고 하나님께 찬미하며 양떼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목자들이 만났던 그 아기, 작은 마을인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난 그 아기는 마구간지기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처녀 마리아의 아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모를 잘못만난 한 가난한사람의 아이가 아니라, 생명을 만드시며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입니다. 그는 하나님이시며 심판주시며 세상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세 있는 왕으로가 아니라, 연약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오셨고, 따스한 방 한 칸도 없이 초라하게 남의 집 마구간에서 나서 말 밥그릇에 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선지자는 이사야 9:6에서 이분에 대하여 말하기를,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라고 예언했습니다.
비록 천하게 보이는 아기로 태어났지만, 때가되면 사람들이 그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기묘라 모사라, 평강의왕이라" 고 부르게 될 거라는 예언입니다.
그분은 다만 죄인을 위해 죽으려고 죄 아래 있는 인생의 몸을 입었고, 인생의 나약함을 체험키 위하여서 연약한 어린아이로 태어났으며, 가난한자를 위해 오셨기에 남의 마구간에 태어나 말구유에 누우셨던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인류의 구주였습니다.
그분은 30여세가 되시자 당신의 일, 즉 인간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고 3년 만에 죄 없이 죄인이 되어 예루살렘 성밖 골고다 언덕위에서 죽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은 지 사흘째 되는 아침에 살아계실 때 예언하신 바처럼 돌무덤을 열고 살아나셔서 그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하셨던 말씀들이 참말임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40일을 더 계시면서 내세에 관하여 가르치시고 감람산에 올라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다시 오실 것을 분명히 약속하시고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예언하시면서 승천하셨습니다.
그 뒤 제자들은 성령에 충만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가는 곳마다 열심히 전파했으며,
예수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 마다 놀라운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식을 근본으로 하는 학교가 세워져 무지가 깨어졌고
병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병원들이 세워져 질병이 퇴치되어갔으며
전쟁을 치르면서라도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노예가 자유인이 되어갔으며
여자와 아이들과 가난한자들이 사람대접을 받게 되었으며
죄인들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고 성자로 변신되어 갔으며
돈에 얽매어 살던 구두쇠들이 자선사업을 할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소망을 잃은 사람들, 죄로 공포 속에 사는 사람들이 용서와 평안과 천국의 영광을 소망하는 참된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쟁과 짓밟음이 가득한 세상에서 사랑과 격려가 번져갔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주고가신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이세상의 빛이요 생명이며 구원이시며, 인류가 받은 최고의 선물인 것입니다.
1.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성탄절이 없고, 크리스마스 캐롤도 없을 것이고, 성탄카드가 없을 것이며 성탄 선물이 없고 성탄의 즐거움이 없겠지요?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고 말까요?
아마 이 세상은 벌써 망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의 패괴한 성품들을 제지하는 종교가 없고 용서받을 길이 없고, 바르게 살아도 인정해줄 신이 아니 계시니, 더욱 거칠고 사나와 졌을 것입니다. 서로가 미워하고 증오하는 세상이 되고 지금보다 훨씬 더 살벌할 것이고 사람을 죽이고 죽는 전쟁은 더욱 빈번해 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가 벌써 망하였거나 아니면 지금보다 훨씬 더 지옥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2. 만약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다는 약속이 애당초 없었을 것이요 그런 약속이 없다면 구약과 신약, 성경이라는 하나님의 말씀 책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성경책이 없었다면,
인생에게 자신이 어디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보여주며 인생의 근본을 알게 하고 인생의 바른길을 가르쳐주는 이가 없을 것이며, 창조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바르고 의로운 삶을 가르쳐주며, 절망할 사람에게는 구원의 소망과 약속을 기억케 하며, 죄로 더러워진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깨닫고 회개하게 하며, 죄인에게도 용서와 구원을 약속하시는 복음의 말씀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은 한번 빗나가면 돌이킬 방법이 없고, 자신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고 어디로 가야할지 방향도 없으며, 용서와 바로잡음도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인생들은 각기 조상들이 닦아 놓은 죄악의 길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나서 죽기까지 진노의 일생을 한줄기 희망의 빛도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절망속의 삶을 살다가 지옥으로 떨어져 갈 것입니다. 아,~ 상상도 못할 두려운 일입니다.
3. 만약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천국의 보좌 위에만 계시고 당신의 영광만을 생각하셨다면, 부자가 자기 돈으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불의한 것이 아니듯이 인간을 외면하는 하나님을 불의 하시다 할 수는 없지만, 인생은 더없이 비참할 것입니다.
한전에서 무슨 사고가 나서 몇 시간만 전기를 보내주지 않아도 큰일인데, 만약 겨울 중 한 달간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고 가상해봅시다. 온 서울 시내가 난리가 날 것입니다.
전기불이 없으니, 온 장안은 캄캄할 것이고, 모든 보일러가 돌아가지 않으니, 도시는 추위에 떨고 있을 것이며, 동력이 없으니 모든 공장이 문을 닫을 것이며, 그 결과 물품이 품귀현상을 빚게 될 것이고, 길거리는 캄캄하여 범죄가 들끓을 것이고, 인심은 살벌하고 질병은 만연하며, 폭동이 생겨나고 정치는 궤도를 잃으며 우리를 넘보던 적들은 이때다 하고 덮칠 것입니다.
만약 한 달간만 전기만 들어오지 않아도 이렇게 아찔한 세상이 될 텐데, 하물며 세상의 빛이시며,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을 공급하시는 생명의 원동력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세상은 사랑이라는 따스함이 없는 차디찬 세상이 될 것입니다.
진리의 빛이 없으니 모든 법은 무용지물이 되어 무법천지가 될 것이고 힘 있는 사람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사랑이 아닌 편리를 위해서만 만났으므로 가정법원이 초만원이 될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자기유익만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므로 재판사건들이 너무 많아서 법원이 마비가 될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귀찮다고 내다 버리며 자식은 늙은 부모를 내다 버리니 인간의 도리가 간데없으며 자기의 유익을 위해 속이고 속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며 아침밥상을 받다가고 강도를 만날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예수 없는 사람들, 예수가 지배하지 않는 사회의 모습이니 만약 예수님이 아예 안 오셨다면, 기독교의 진리가 아주 없다고 하면 보나마나 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4. 만약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노예시장이 한 동에 하나씩 있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민주화되고 법률이 발달한 로마제국 내에도 자유인 6000만 명에 노예가 6000만 명이 있었습니다. 노예들은 아주 싼값에 팔리고 있었고, 주후70년에는 97000명의 유대인들이 로마의 노예시장에 끌려가 아주 싼값에 팔렸습니다. 한국에도 복음이 들어오기 전까지 양반과 상민의 계급이 엄존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정복하지 못했더라면, 지금도 지구촌 모든 곳에는 노예가제도와 계급차별이 존재할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석가모니가 태어났지만 그들의 카스트 제도라고 하는 계급을 타파하지 못해서 지금도 짐승 취급당하는 불가촉천민 계급이 있습니다. 만약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지금도 자유인보다 노예가 더 많았을 것이요 여기 앉아있는 우리 중에 절반 이상은 노예로 살아갔어야 할 것입니다.
5. 만약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인간에게는 소망이라는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미래의 소망이라는 것을 가져보지 못했습니다. 죽기 싫어서 불로초 불사약을 찾아 헤맸지만 모두 소용없었으며, 결국 죽기 싫어 발버둥치며 눈을 부릅뜨고 죽어가야만 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죽음 이후에 대한 희망을 말하지 못했으며, 인생의 허무를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 어떤 성인들도 인생에게 내세를 말씀하지 못했고, 그 나라의 영원한 삶을 약속하지 못했으며, 공자나 석가도 자신의 장래문제도 모른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어서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 6) 나를 통하면, 아버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다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라고 부활과 영생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보라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 내려오니 신부가 그 신랑을 위하여 예비한 것 같더라." 이 얼마나 확실한 약속입니까? 얼마나 분명한 하늘나라에 관한 비전입니까?
그리고 죄인을 그 영생으로 가게 하려고 당신의 공로로 사죄를 선포하셨습니다.
" 딸아 평안히 가라, 네 죄 사람을 받았느니라."
"내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리라"
그래서 평생 지은 죄로 죽고 멸망해야 하는 우리에게도 사죄와 구원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모든 인생은 고통과 체념 속에서 한을 품고 한세상을 살다가 죽음 앞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몸부림치며 죽어갈 것입니다. 인생의 결말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면, 차라리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늙거나 병이 들어 죽는 사람보다 더 많을 것이며, 이 세상에는 기쁜 소식이란 것이 도무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예수님이 우리 인간 세상에 오셨습니다. 내세를 알려주셨습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진리를 당신의 생명을 드려 준비하여 주셨습니다. 죄는 은혜로 용서를 받고, 나름대로 행한 선행은 행한 대로, 상을 받는 분명한 내세를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되었고 이 세상에는 전파할 복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우리가 알게 된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이 곧 온 인류가 갈망했던 복음입니다.
6. 만약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세상은 심판의 마당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름다운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으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처음부터 배반했습니다. 그들이 하는 행위는 모두가 죄악이요 그들이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은 모두 죄악과 악한습관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만들고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등지고 우상들을 섬기며 짐승과 바위와 죽은 영혼과 귀신들만을 섬기며 벌벌 떨고 있으니, 이러한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돌려주실 보상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만약 당신의 외아들을 통하여 인간들을 구원할 계획이 없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일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인생들을 용서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실 마음이 없다면, 세상에는 날마다 하나님의 심판하는 채찍 소리와 인간의 비명소리만 가득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범죄 할 때마다 즉시즉시 벼락을 내렸을 것이고, 교통사고나 질병으로 죽는 사람들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날벼락을 맞아 죽는 사람들이 몇 백배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세상은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찼을 것이 분명합니다. 혹시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도 몸이 성한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손에 벼락을 맞은 사람, 발에 벼락을 맞은 사람, 눈이 썩은 사람, 혀가 썩은 사람, 머리가 끊어져 죽은 사람, 다리가 끊어진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렇게 잠깐 동안만 생각해보아도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불행했을까를 짐작하는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시고 당신의 외아들을 우리들을 위하여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기록해준 언약의 책인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약속대로 2003년 전에 정말로 이 땅에 오셨고, 예수님이 우리들을 구원하시려 우리 인류의 죄를 등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사람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길이 열렸습니다.
그 십자가 사건 뒤에 이 세상에는 진실한 회개와 용서란 것이 생겼습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생겼고 진리가 드러났고 공의와 진리운동이 번졌습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내세가 있다는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축복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것 때문에 시작된 일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영광과 감사와 찬양을 우리 주 예수님께 드립시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우리가 대단한 복을 받은 사람임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랑합시다.
다 같이 일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라고 힘차게 찬양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성탄을 온 누리에 힘차게 전파합시다. 그분께서 우리의 기쁨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평화의 선물
누가복음 2:1-14 / 이진영 목사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탄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난 100년 사이에 태어난 세 명의 천재들 덕분에 온 인류는 큰 혜택을 입고 또 많은 변화를 맛보았다는 기사를 어느 신문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세 명의 천재들은 심리학자 프로이드와 화가 피카소,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었습니다.이 기사를 보면서 옳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탁월한 천재들이었기 때문에 20세기 과학과 문화 예술을 주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000여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전 인류가 어떠한 혜택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가를 누가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이를 다 끌어 모아 놓아도 그 내용을 다 쓸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개인이 받은 간증과 개인이 받은 은혜들을 다 기록하려 한다면 종이가 모자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에 싸여 있는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심으로 인해 우리 인류가 어떤 놀라운 축복과 은총을 입었는지 잘 모르고 있고, 알고 있다 해도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신문 한 모퉁이에라도 거기에 대해 감사하다고 쓰는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라고 묘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무슨 용기가 필요합니까? 용기라는 덕목은 하나님에게는 해당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아니 하나님 자신이 처녀 마리아의 태를 빌려 세상에 오신 이야기를 성경에서 읽을 때면, '아무리 광대하고 크신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용기 없이는 그렇게 하시기가 참 어려웠을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필립 얀시라고 하는 탁월한 저술가가 현대 의학의 지식을 빌려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설명하는 글을 보았습니다. '만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작아지시고 작아지시고 또 작아져서 마침내는 하나의 난세포가 되기까지 작아지는 형태로 오셨다.' 다시 설명을 하면 육안으로서는 식별이 불가능한 수정란이 불안에 떨고 있는 10대 소녀 마리아의 태 중에서, 태아가 형성되기까지 세포 분열을 계속해서 커져 가야 될 난세포가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좀 심한 표현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탄생은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전혀 과장된 말도 아니고, 지나친 상상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 그렇게 작아지실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사람이 되어서 세상에 오실 수가 있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탄생할 때에 유대 나라에 있는 왕과 모든 귀족들이 정장을 하고 서서 무슨 환영 축제를 했습니까? 팡파레를 불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시민들이 와서 축하를 드리기를 했습니까? 아무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구간에 있는 짐승 몇 마리와 천사들의 말을 듣고 달려온 가난하고 천한 몇 명의 목자들 외에는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셔서, 그토록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놀라는 사람도 없었고, 영접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영국의 여왕 엘리자베스가 얼마 전에 미국을 방문할 때였습니다. 그의 행차를 놓고 많은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며 경쟁하듯이 여왕의 의전품 목록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행사 때마다 2벌씩 갈아입을 옷을 가져갔고, 누가 죽었을 때를 대비해서 상복까지 가지고 갔으며 왕이 병이 들면 급하게 쓰려고 19l짜리 혈장액을 들고 가고, 또 화장실에 들어가서 아무 변기에나 앉다가 세균에 오염될까 두려워서 변기 깔개까지 들고 간 것입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챙기다 보니 짐만 해도 2000kg이 넘었고, 게다가 전속 미용사 두 사람에 경호원과 수행원을 수십 명씩 데리고 갔습니다. 이 여행에 들어간 경비가 우리 돈으로 무려 26억원이나 되었습니다. 여왕이 모습을 드러내는 곳마다 유명하다는 사람은 다 모여서 그를 영접하느라고, 또 언론사들은 그 사실을 보도하느라고 이만저만 요란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영국이라는 나라는 먼지보다도 더 작을 것입니다. 제 방에는 밀키웨이 즉, 천문학자들이 발견했다고 하는 은하계를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그것을 펴놓고 들여다보면, 그 안에서 태양계는 그야말로 모래알보다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태양계 중에서도 아주 작은 별 중에 하나인 지구, 그 중에서도 아주 작은 나라 중에 하나인 영국이라는 나라의 여왕이 다른 나라를 방문하는데도 그렇게 요란을 떠는데, 하나님의 아들, 그 크신 분이 오신 것에는 누구 하나 주목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 이처럼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14절이 바로 그 해답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샬롬이요 에이레, 우리 나라 말로 화평이요, 화목을 주시기 위해 주님이 오셨습니다. 본문 바로 위에 있는 1장 79절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6개월 먼저 세상에 보냄을 받았던 세례 요한의 아버지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 가운데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나님이 그토록 작아지시고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꼭 오셔야 될 이유, 그것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 천년 전에 이사야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내다보면서 평강의 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라고.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 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없는 우리의 현주소가 무엇인가 잘 아실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1절에서 명료하고 간단하게 우리의 현주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 이것이 우리 모두의 현주소였습니다.
여러분, 어린 아들이 아버지와 원수가 되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신하가 임금과 원수가 되어서 어떻게 하룻밤인들 베개를 높이 하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하물며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인간이 어떻게 하루인들 마음 편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잠을 자는 것이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웃고 떠드는 것이지, 만일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의 현주소가 얼마나 저주스러운가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한 사람도 마음의 평안을 가지고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사는 그 자체가 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인간의 이와 같은 저주스러운 처지를 보다 못한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인간과 화해하려고 노력하셨습니다. 평화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때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한 세대를 완전히 불로 심판하시면서 다시는 인간이 하나님을 함부로 거역하고 범죄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셨습니다. 또 어떤 때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악하고 음란하고 더러운 성을 본보기로 심판하시면서 남아있는 이 지구상의 사람들에게 경고하시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하나님의 이와 같은 화해의 몸짓에 눈을 돌리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생각다 못한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중대한 결단을 내리셨습니다. '내가 직접 내려가 보아야 하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서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것도 다수에 해당하는 평민의 모습으로, 다수에 해당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친히 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직접 찾아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원수 된 인간과 화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느 신학자가 평범한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설명한 글을 보았습니다.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면서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던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두 사람이 크게 다투고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일년 동안 그들은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정을 쌓는 데는 수 십년이지만 그 우정의 탑을 발로 차 버리는 것은 1분이면 족하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 우정입니다. 1년이 넘도록 서로가 상종을 하지 않고 지냈는데 그 두 사람 중에 하나가 아마 교회를 다녔나 봅니다.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설교를 듣는데 마음에 가책이 왔습니다. '내가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해서 되겠는가?' 집으로 돌아간 후 그 옛날 친구와 다시 좋은 관계로 회복되기 위해서 노력을 무척 많이 했습니다. 편지를 5통이나 보냈는데도 그 친구에게는 일언반구 반응이 없었습니다. 고민하다 못해서 이 사람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도무지 그날 밤을 그대로 넘기면 안될 것 같아 눈을 맞으며 꽤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안에 있던 친구가 문을 열어 보니 자기 친구가 눈을 소복이 맞고 오들오들 떨면서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급히 그를 집안으로 불러들였습니다. 그 두 사람이 다시 우정을 회복하는 데는 10분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낮아진 자리에서 자기와 평화하기 위해서 찾아왔기 때문에, 그 앞에 녹아지지 아니할 사람의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사람의 모습, 그것도 천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 마구간에 탄생하셔서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바로 눈을 맞고 떨면서 문 밖에 서서 벨을 누르는 친구의 모습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그 이상이다. 이건 비유가 안된다.'고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이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원수 된 우리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아버지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평화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만 나가면 모든 허물과 죄를 순식간에 용서받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드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우리 모두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오늘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면서 예배하고 있는데 이런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4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무나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땅에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만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의교회에서는 1년에 한 400건 정도 장례가 납니다. 400건이면 매일 한 건 이상 난다는 말이 아닙니까? 엄청나게 많습니다. 교회가 크다 보니 그런 십자가도 져야 됩니다. 물론 그 중에 대부분은 연로하신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는 장례입니다. 복되고 영광스러운 죽음도 많이 있지만, 가슴 아픈 장례도 있습니다. 자녀가 먼저 예수 믿고 주님을 만난 뒤 이 구원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도 예수 믿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하고는 수년 동안 부모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어떤 때는 직접 찾아가서 꼭 예수 믿으라고 눈물로 전하기도 하고, 대각성 전도 집회 때는 초대해서 복음을 듣게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안 믿고 계속 미루기만 하시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그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을 하나님과 다시 손잡고 화목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면 온 인류가 하나도 빠짐 없이 하나님과 평화하는 은혜의 길이 열릴 것도 같은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만이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습니까?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드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찬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이유가 없는데, 그만한 구실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잘 보셨습니다. 우리만 보시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무조건 자기와 화목하시고 자기 품에 안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라고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와 이세상 끝날까지 동행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둘 사이가 가까워졌는지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마.'라고 약속하시게 되었습니다. 한순간도 나를 혼자 떼어놓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31절 이하에 바울이 너무나 흥분하고 너무나 황홀해서 소리친 그 말씀이 정말로 우리 마음에 그대로 와 닿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하리요?' 다시 말하면, 말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어찌해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미리 아시고, 나 같은 것을 예정하시고, 나 같은 것을 때가 되자 부르시고, 부르신 다음에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주신 다음에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화롭게 하셨는가? 이렇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일에 대해서 무슨 말이 필요한가'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고, 우리와 평화 하셨는데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하겠는가?'라는 뜻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롬8:32) 의롭다 하시는 이는 누굽니까? '하나님이시니 누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를 자기의 소유로 받으시고 우리와 평화하신 하나님인데 누가 우리를 보고 이러니 저러니 말하겠는가'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깰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할렐루야! 우리의 평화를 흔들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화를 주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만큼 우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없습니다.
천사가 목자들을 만나 한 이야기는 '이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눅2:10)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는데, 왜 기쁩니까? 왜 좋은 소식입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하게 하시는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는 세상의 암흑과 혼돈 속에서도 없어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평화는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찬송가 469장을 여러분은 다 잘 아실 것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은혜스럽게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저 혼자 불러도 1시간이라도 부를 수 있는 찬송가입니다.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축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얼마나 우리 예수님이 좋은지요. 우리 중에 아직도 믿음이 없어서 이 평화의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못하고 있는 형제 자매가 있습니까?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 용서 받고 하나님과 원수 된 관계를 청산하시고 하나님과 화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아직 잘 몰라서 이 평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자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펴놓고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십시오. 그분 앞에 더 가까이 나가서 그의 영광을 보십시오. 세상의 염려와 근심이 너무 무거워 이 평화를 잃어버리고 있는 자가 있습니까?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의 왕입니다. 근심, 걱정을 그에게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분은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다 책임져 주시는 분이시오, 우리의 인생 길을 인도하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둘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이웃과 평화 할 수 있게 하시게 위해서 오셨습니다. 티끌보다 많은 죄, 석탄보다 검은 죄를 예수의 이름으로 씻음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 사람은 자기 안에 놀라운 능력이 생기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무슨 능력입니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화해해서 다른 형제와 평화 하고자 하는 능력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생기는 것입니다. 평화를 주신 주님 때문에,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내 안에서 다스리시는 그 은혜 때문에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고 평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로마서 12장 18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라.' 주님이 이렇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충분한 은혜가 뒤에 따라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명령합니까?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내 안에 계시고 그분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형제까지도 나는 용서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한 종교적인 미사여구가 아닙니다. 할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명령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나우웬이 말했습니다. '용서는 공동체인 교회 생활의 접착제입니다. 용서는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우리를 함께 있도록 붙들어 주고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는 가운데 자라게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나는 용서받아야 될 사람이요, 용서해야 될 사람이요, 당신도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요, 항상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서로 인정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보면 평화의 왕을 아직도 만나지 못한 사람처럼 형제와 원수가 되어 있는 사람들도 많고, 한 번 상처를 입으면 두고두고 그 상처가 묵은 상처가 되어 고침을 받지 못하는 비극도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용서를 안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좋은 말을 하지만, 속으로는 그 사람의 실수를 절대 잊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그렇습니다. 고부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형제간에도 그런 것을 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옆에 앉아 있는 형제들까지도 서로 용서하지 못하는 앙금을 가지고 예배를 드리는 것을 봅니다. 여러분, 만약에 우리가 이런 사람이라면,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봐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평화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감정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서로가 좀 심한 다툼도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나는 절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나는 절대 어떤 사람에게도 상처 주는 일이 없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장담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피해를 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피해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누구나 다 감정이 상할 수 있습니다. 오늘 친했다가 내일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다 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의 왕이 내 가슴이 항상 살아 계셔서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무조건 백번이고 천번이고 일곱번씩 일흔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해야 될 사람입니다. 용서함으로써 그들과 평화를 누림으로 우리가 평화의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임을 세상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묵은 감정을 가지고 계속 그를 접대합니까? 그렇다면 한 가지만 알아두십시오. 주기도문을 통해서 날마다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준 것같이 하나님이여 나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보십시오.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형제를 용서하고 평화하지 못하면 하나님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을 보류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죄 용서함을 받지 못하고 있고 마음에 증오가 있으면 누가 손해를 봅니까?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이 손해 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손해는 내가 보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영적으로 점점 더 병이 들어갑니다. 자기도 모르게 병이 들어갑니다. 병이 들어가면 은혜와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나중에는 정신적으로 큰 피해를 입습니다. 그것이 심해지면 육신까지 병이 납니다. 누가 손해를 봅니까? 평화의 왕을 모시고 있다면서 모순된 삶을 사는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새천년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과 평화 하였다고 하면서 형제와 불화하면 안됩니다. 뒤의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20세기를 잊어버리십시오.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 달려 갈 자세를 다시 가다듬으십시오. 과거의 묵은 감정이나 원한, 피해의식을 다 묻어 버리십시오. 다시 말하면 과거에 대해서 문을 닫고 못질을 해 버리십시오. 자물통을 잠가 버리고 다시 보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용서하면서 새로운 2000년을 맞이해야 합니다. 평화의 왕 예수님이 나를 지배하시어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으로서, 가는 곳마다 이 평화의 왕이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 되어 미움이 있는 곳에 진정한 사랑이 꽃 필 수 있도록 하는 평화의 사신이 되어야 합니다.
10년 전에 이 강단에서 어느 자매가 한 세례 간증을 제가 기억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을 때 그는 생활이 넉넉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간염이 걸려서 고생을 하고 되었습니다. 사업을 하는 남편은 그런대로 수입이 좋고 잘 사니까 마음이 다른 데로 갔나 봅니다. 투병 생활을 하는 아내를 돌볼 생각은 안하고 바깥으로 돌면서 마음을 다른 데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얼마나 그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잠을 못 자고 고민하는데 이웃에 있던 우리 교회 순장이 가서 전도를 했답니다.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 믿으면 다 이길 수 있어요.' 새가족반에 나왔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그날 말씀을 배웠습니다. 무조건 믿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구주가 되시고 내 마음에 계신다고 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다락방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점점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그 놀라운 평화가 자기 마음에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렇게 불안하고 용서하지 못해서 갈등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치유함을 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평화의 왕, 살아계신 주님이 그 자매의 마음에 오셔서 좌정하시고 다스리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이 그 마음을 다스리니까 평화를 해치는 모든 것들이 다 쓸려 나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자기도 모르게 남편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을 다 용서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남편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항상 최고가 아니면 안된다는 강박 관념으로 자녀들을 들볶으며 그들에 대해 항상 상한 감정을 가지고 있던 마음도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이 연약한 그대로, 못난 그대로 얼마나 감사하게 여겨지는지 몰랐습니다. 그러자 애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집안의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영적으로 치유를 받으니까 얼마 후에 간염까지도 깨끗이 고침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끝으로 이렇게 간증을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마음의 평안이 있기에 인생의 거센 파도를 두려움 없이 타고 넘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평화의 왕이 오셨습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우리는 이 세상 어디를 가든지 평화의 사신으로, 평화의 대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평화 합시다. 그리고 내가 일하는 직장에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였음을 선포합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 평화를 통해서 새로워지는 은혜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주님이 다스리시는 새 역사가 창조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목격하면서 사는 내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를 다시 한 번 기억합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아멘.
연약함 속에 깃든 신비
눅2:1-7 / 김기석 목사
∙어두운 시대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2:14). 천사들의 이 찬양이 우리 마음에도 깊이 울려퍼지기를 빕니다. 오늘만큼은 인생의 무거운 짐과 우울함, 부정적인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한껏 기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967년에 남부 기독교 지도자 컨퍼런스에서 했던 설교 “우리는 여기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의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날들이 절망의 먹구름에 뒤덮여 황량할 때, 우리의 밤이 수천의 한밤중 보다 더 어두워질 때, 이 우주에는 거대한 악의 산을 낮추는 창조적인 힘이 작동하고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 힘은 막다른 곳에서 새로운 길을 내고 어두운 어제를 밝은 내일로 변화시킵니다. 도덕적 우주의 현은 길지만 그것이 정의의 방향으로 구부러져 있음을 자각합시다(the arc of the moral universe is long, but it bends toward justice).”(Jim Wallis, , HarperOne, 2018, p.56에서 재인용)
마틴 루터 킹은 이 설교에서 하나님은 조롱받으실 분이 아니라면서, “우리는 승리했다! 우리는 승리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우리가 승리할 것임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사실은 절망과 어둠이 최종적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누가는 주님이 오신 소식을 전하면서 그 시기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던 때,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입니다. 누가는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열었다고 칭송받았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거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통치는 강압적 통치였습니다. 호적 등록은 식민지를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로마는 고분고분하게 억압과 착취를 받아들이는 이들은 그냥 내버려두었지만,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사람이나 도시는 무자비하게 다뤘습니다. 로마 통치의 기반은 ‘폭력‘이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러한 시기에 이 세상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오늘의 세계도 그 때와 다를 바 없습니다. 도의의 시대가 저물고 탐욕이 사람들의 마음과 세계 질서를 움직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계를 호령하고 있는 스트롱 맨들은 자국의 이익을 강화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런 세계 질서에 대해 당연히 문제를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약자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기 위해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의 주류 교회들은 그런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념화된 증오와 혐오가 종교의 의상을 걸치고 나타나고 있고,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을 당연한 질서로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미국의 양심적 기독교인들은 이런 현실을 두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납치했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현실 가운데 오셨습니다.
∙무정한 세상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고향인 베들레헴에 갔을 때, 마침 해산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준 이들이 없었습니다. 예수는 환대받지 못한 존재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의 탄생을 경축하는 악사들의 연주는 물론 없었습니다. 아기 예수는 포대기에 싸인 채 말 먹이통인 구유에 눕혀졌습니다. 쓸쓸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그 광경은 거룩함에 대한 우리 생각을 가다듬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는 평생 예수의 본을 따르고 싶어했습니다. 광산촌인 보리나주에서 전도사로 생활했을 때 뿐만 아니라 일평생을 그런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화가의 꿈을 품고 파리로 나와 지낼 때 그는 시엔(Sien)이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시엔은 임신 중이었는데 남자에게 버림받은 채 먹을거리를 구하기 위해 겨울 거리를 떠돌고 있었습니다. 고흐는 시엔을 누추하고 비좁은 자기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피난처를 제공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 섞인 눈길을 보냈습니다. 매춘을 하며 살던 여인과의 동거가 그의 평판을 나쁘게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흐는 “버림받은 여인을 모른 척하고 버려두는 것과 거두어 들여 돌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품위있고, 사려 깊고, 남자다운 일일까?” 되물었습니다. 까칠한 시엔과의 공동생활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고흐는 그를 차마 내칠 수 없었습니다. 해산할 날이 다가오자 고흐는 시엔을 산부인과에 보냈습니다. 얼마 후 고흐는 시엔의 옆에 누워있는 작은 아기를 보며 깊은 경탄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광경은 그가 그렇게도 흠모했던 렘브란트의 성화가 구체화된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신비한 광채와 절망을 넘어서는 생명의 충만함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무정한 세상에서 시엔은 무너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흐의 돌봄과 배려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거룩함의 신비는 벌거벗은 생명을 따뜻하게 감싸주고,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려는 이들에게 나타나는 선물입니다. 주님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25:40) 하셨습니다.
∙취약함 속으로
주님이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작고 여린 생명은 누군가의 돌봄을 필요로 합니다. 그 연약한 생명을 귀히 여기고 돌볼 때 사람은 잃어버렸던 순수를 회복하게 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약한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냉혹한 세상은 우리의 약함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사는 이들은 자기들의 약함을 시인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연약한 이들이 다른 이들 속에 있는 선함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할 때도 있습니다. 주님의 오심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이들은 오늘 우리 가운데 있는 연약한 지체들, 우리 사회의 그늘진 땅에 머물고 있는 이웃들의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홈리스들, 실직자들, 희망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젊은이들, 빈곤한 노인들, 높은 철탑에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사회적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 난민이 되어 세상을 떠도는 사람들의 시린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 곁에 한 걸음 쯤 다가서려 할 때 우리는 주님과 가까워질 것입니다. 부디 주님을 외롭게 하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예수님의 방
누가복음 2:1-7 / 배 혁 목사
이제,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일 주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집안에 어떤 사람이 임신을 하게 되면, 태어날 아이를 맞이 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출산을 기쁨으로 맞으며 축복하게 됩니다. 이제, 성탄이 가까이 오는 이 때에, 저와 여러분들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잘 준비하고 있는지를 한번 살펴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기 위해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모습은 어떠한 것이 있는지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던 때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은 베들레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육신적인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곳은 베들레헴이 아니라, 갈릴리 나사렛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편하게 출산한 것이 아니라, 90마일 정도 떨어진 베들레헴에 어렵게 가서 원정 출산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베들레헴에 마리아의 친정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출산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당신의 로마 황제였던 '가이사 아구스도'가 모든 사람들은 호적을 해야 한다고 명령을 했기 때문입니다. 호적을 하게 하는 주된 목적은 효과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려는데 있습니다. 혹시나 세금을 징수하는데 누락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인구조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기 때문에 그의 조상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하기 위해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을 출산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들레헴까지 가셔서 출생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탄생이 보통 사람의 탄생이 아니라, 메시야의 탄생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미가 5:2절에 보면,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라고 했습니다. 곧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는 예언인데, 이것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사야 11:1절에는 메시야의 혈통까지 나타나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음을 통해,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이, 이 땅을 구원할 메시야의 탄생을 예언한 구약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통해서 메시야 예언이 성취된 것 이외에, 출산과 관계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누일 여관에 방이 없어서, 아기 예수님을 강보에 쌓아서 구유에 뉘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만삭이 된 아내를 데리고 간신히 베들레헴에 도착을 했지만 아내와 함께 쉴 방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은 방을 구하기 위해서 여러 곳을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들려 오는 말은 "방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 보라"는 말만 들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인테넷으로 여관 방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미리 예약을 하고, 편안하게 출산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과 마리아가 도착했을 때에는, 먼저 온 사람들로 인해서 그들이 들어갈 방을 다 찼기 때문에, 요셉으로서는 산모와 곧 태어날 아기 예수님을 위해 방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에게는 방을 구하는 일이 불가능했겠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아버지에게도 불가능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을 몇 백 년 전부터 예언하고 준비해 오셨습니다. 아들의 길을 예비하라고 세례 요한도 미리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했을 때에는 동방박사와 목자들을 준비하셨다가 아기 예수님을 보고, 경배하게 하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탄생하실 방을 능력이 없어서 준비해 놓지 못하신 하나님은 아니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다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를 맞춰서, 베들레헴에 유명한 건축업자가 나타나서, 가장 좋은 여관을 만들게 하시고, 그곳의 가장 좋은 VIP 방을 비워두게 하셨다가, 요셉과 마리아를 맞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말씀도 성취하고, 예수님도 보기 좋게 탄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방이 없으셔서 마굿간에 누우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게 됩니다.
1. 먼저, 예수님을 위한 방이 없다는 것은, 구세주의 오심을 맞아들이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의 모습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여관의 방이 없다고 할지라도, 곧 출산할 임산부가 방을 찾는데 방이 없다고 다른 곳에 가보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이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방이라도 내어서 임산부에게 주어야 할 상황일 것입니다. 하지만 만삭의 마리아를 보았던 여관 주인도, 먼저 여관에 투숙했던 손님들도 자신의 방을 대신 쓰라고 양보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을 거부하고, 맞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헤롯왕의 모습을 보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로부터 '유다의 왕이 탄생했다.'는 말을 들은 헤롯 왕은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 놓고,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냐" 고 묻습니다. 그리고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헤롯이 한 일은 베들레헴과 그 주변 지역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은 모두 죽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그리스도가 탄생했다는 말을 듣고도, 예수님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헤롯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일에 함께 동조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장성하신 이후에도 이러한 일들은 지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로 영접하기를 거부하고, 끝내는 십자가로 죽이기까지 예수님을 몰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마굿간에 누우신 예수님의 모습은, 죄인된 사람들을 구하려고 오신 예수님의 찾아오심을 거부하였던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살려주시기 위해서 오신 주님을 방치해 놓은 것입니다.
내 자신의 편의를 고집하려고 하면 베들레헴의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방을 내어 드리지 못합니다. 내 자신의 유익을 고집하려고 하면 헤롯처럼 예수님께 방을 내어 드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들이기 위해서 양보할 만한 방이 없었던 것입니다.
2. 그런데, 하나님은 달랐습니다. 구유에 누어 있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은,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방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을 보면서 메시야를 거부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뿐만 아니라,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한 방을 만들어 주셨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왕들의 왕이요, 주들의 주가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시기에 가장 합당한 곳은 왕궁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왕궁에서 태어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위대한 이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따라오면서, 왕궁에서 왕자가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왕에 왕궁을 찾아가서, "유대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경배하러 왔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왕들 중의 왕인 예수님을 왕궁에서 태어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의 평범한 목수의 집에 아들로 임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먼 베들레헴까지 가게 하셔서 원정 출산을 하게 하셨는데, 그것도 좋은 곳이 아니라 마굿간에서 겨우 출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마굿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은 사람이면 모두 와서 주님을 만나고 경배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과 같이 이방 사람도 올 수 있고, 높은 지위의 사람들도 올 수 있는 곳입니다. 목자들과 같이 그 당시 가장 천대받고 고된 일을 하는 사람들도 올 수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방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왕궁에서 태어나셨다면,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탄생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맞이할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낮추셨습니다.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세상의 왕궁의 영광이 하늘의 영광에 견줄 만 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용납하시고 만나기 위해서 마굿간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내가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 스스로 낮아져서 우리에게 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감히 그 분께로 갈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마굿간에서 태어나셨고, 사람들이 그를 만나고 경배할 수 있도록 방을 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고 예배할 수 있도록 방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면서, 언제나 우리를 맞이하실 방을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마굿간에 태어나신 주님을 보면서, 우리를 맞이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3. 그런데 이 성탄의 계절에 깨닫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를 향하여서, "당신에게는 내가 거할 방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소아시아의 있는 일곱 교회 중에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기독교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랑은, 자신들은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책망하시기를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 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시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을 했지만, 정작 예수님은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문 밖에 서서 문 열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함께 먹고 마실 사람이 없어서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문을 두드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셔서 인격적으로 그들과 만나며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맞을 방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삶이 주님으로 인해서 간섭 받고, 불편해 지는 것이 싫었습니다. 지금 있는 세상의 부요함을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알고 누리면 됐지, 굳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그들의 삶에 모시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두드리십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여관집 주인과 같이, 그곳에 투숙했던 사람들과 같이, 우리의 삶을 주님께 내어드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탄절에 잘 알려진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미국 어느 작은 마을에 '윌리'라는 9세 소년이 있었다. 4학년에 해당되었지만 지적 능력이 다 소 떨어져 2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그 해 성탄절에 주일학교에서 성극을 하게 되었는데 윌 리가 맡은 역은 여관집 주인역이었다. 예배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연극이 진행되던 중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주인역할을 하는 윌리가 나와 “방이 다 찼으니 다른 곳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간절히 사정했다.
"우리는 너무 멀리에서 왔습니다. 아내는 금방 출산할 것 같습니다. 제발 좀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는 말을 잊은 채 마리아를 오래도록 쳐다보았다. 무대 뒤 에서 대사를 읽어 주던 선생님은 윌 리가 대사를 까먹은 줄 알고 자꾸 읽어 주었다. 한동안 서 있던 윌리는 선생님이 크게 읽어 주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안돼요. 방이 없다니까요. 가세요.!" 결국 요셉과 마리아는 슬픈 얼굴로 돌아섰다.
바로 이때였다. 각본대로 이제 방문을 딛고 들어가야 할 윌 리가 돌아가는 요셉의 가족을 걱정스러운 듯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요셉, 마리아! 가지 말아요. 마리아를 데리고 들어와요!" 물론 각본에 없는 대사였다. "내 안방을 쓰세요. 내 방에 어서 들어가란 말이예요!"
물론 연극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 장면을 지켜보던 많은 교인들은 "내 생애에 있어서 이렇게 감동적인 성탄극은 처음 보았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방을 찾으실 때에 그 방을 내어 드려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여전이 예수님을 문 밖에 세워 놓고,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하는 일이 바빠서 안될 것 같고, 좀 한가해 지면 그 때 한번 생각해 보겠다고 미루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하지만, 아직도 나를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에,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같이, 자녀와 같이, 이웃과 같이 함께 대화하며, 우리의 삶의 고민을 들어 주시고, 함께 기뻐해 주시고, 우리의 삶을 지도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집밖에서 잠깐 대화하다가 떠나가는 세일즈맨이 아닙니다. 잠깐 초대받아서 왔다가 용무 마치고 돌아가는 손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함께 먹고 살면서 우리의 삶에 함께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꽉 찬 것들을 비워드려야 합니다. 내 자신의 시간, 계획들, 하던 일들을 비우지 못하면 주님을 모셔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금씩이라도 주님께 내 시간을 드리십시오. 좀 더 기도하며 주님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을 드리십니다.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을 내 드리십시오. 내 계획을 드리십시오. 이제는 내 생각과 뜻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뭘 원하시는지 관심하시고, 내 생각과 생활 방식을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으로 조금씩 드리십니다. 내 생각과 마음과 생활 속에 예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조금씩 내 자신을 비워 가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주님께 내어 드리십시오.
그러다가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들어와서 함께 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께서 나를 점차 지배하시고 이끌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만삭이 된 마리아에게 방이 없다고 외면한 베들레헴 사람들의 매정한 모습을 봅니다. 두 살 아래의 아기들을 죽이라는 헤롯의 잔혹함도 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외면을 당하면서도, 여전히 구유에 누우셔서 사람들을 맞고 만나주시는 주님을 보게 됩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속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면서, 우리의 삶을 품어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자 시간과 열정을 쏟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성탄의 계절을 통하여서 우리의 방을 조금이라도 주님께 내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대화하기 위해 기도의 시간을 좀 더 내어 드리고, 말씀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내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조금 더 주님을 더 알아가고, 주님과 더욱 가까와 질 수 있는 시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 탄생의 의미와 축복
눅 2:1-14 / 박인걸 목사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2월 25일 추운 크리스마스 날 밤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여인이 출산을 앞두고 산 너머 사는 선교사의 도움을 받으러 눈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선교사의 집으로 가는 길에 작은 다리가 놓인 도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선교사 집이 가까워질수록 진통이 심해져 더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다리 밑에서 혼자 예쁜 아들을 순산하였습니다. 추위에 아기를 덮어 줄 것은 입고 있던 치마와 저고리뿐이었습니다. 산모는 자신의 입고 있던 옷을 몽땅 벗어서 아기를 감싸주었고, 주변에 흩어져 있던 가마니나 천마 조각 같은 것들을 모아 바람을 막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산모는 하혈과 함께 뒤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선교사 부부는 한국 친구에게 선물을 주려고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이곳에서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그때 어디에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나는 곳은 다리 밑이었습니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아기가 엄마의 저고리에 싸인 채 울고 있었고, 곁에는 그의 엄마가 얼어 죽은 채 누워 있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갓난아이를 데려가 잘 키웠고, 그 집에서 자식처럼 자랐습니다.
선교사는 아이의 열 두 번 째 생일인 크리스마스 때 모든 사실을 그에게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 무덤에 가보자고 선교사에게 부탁하여 함께 그곳에 갔습니다. 소년은 무덤가에 다다르자 울면서 기도한 후 갑자기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한 겨울 추운 날씨였지만 아이는 자신의 옷을 다 벗어 무덤을 덮어주고는 벌거벗은 몸으로 무릎을 꿇고 오돌 오돌 떨면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엄마! 엄마는 이것보다 더 추웠겠지요?” 이 아이는 어머니의 극진한 사랑이 자기를 살려준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어린 아기로 탄생한 날입니다. 오늘 성탄절을 맞아 자신이 죽고 우리를 살리러 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본문의 구조와 상황을 살펴봅니다. 카이사르 아구스트는 로마의 가장 위대한 황제였습니다. 그는 병력과 과세를 위하여 인구조사령을 내렸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 땅의 주민들은 선조들이 살던 곳에 가서 행정적 신고를 해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의 조상들이 살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호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두 사람은 이미 약혼 상태였고, 마리아는 임신 막달이었습니다. 걸음걸이가 둔 했던 임신부는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그곳에 도착하였고, 이미 여관은 만원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허름한 마굿간을 빌려 잠을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에 출산을 한 것입니다. 요즘도 임산부가 기차, 버스, 비행기, 혹은 일을 하다 낳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은 것입니다.
한편 성탄은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오신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되기 위한 수많은 징조와 현상들이 주변에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이상한별의 움직임을 따라 베들레헴에 찾아와 예물을 드렸고, 본문에는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내방을 받고 마굿간에 찾아와 경배를 하였으며, 천사들의 노래가 온 하늘과 땅에 울려 퍼졌습니다. 또한 22-39절에는 예수의 부모가 아기를 안고 성전에 올라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이 때 두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하며 감사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의 주는 의미와 축복을 함께 생각하며 은혜 받는 성탄절이 됩시다. 그렇다면 성탄은 어떤 축복을 우리들에게 주었습니까?
1. 홀연히 임한 축복입니다(눅 2:8-14)
목자들은 그날들에서 양을 친 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양들 틈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 목자들은 자신들이 양들을 방목하고 있었고, 4월에서 11월까지 들에서 지냅니다. 그렇지만 한 겨울에도 날씨가 춥지 않으면 방목을 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양들 틈에서 하늘을 쳐다보며 밤을 지내야 했습니다. 이 때 하늘에 천군과 천사들이 큰 무리를 지어 나타났고, 그 중에 한 천사가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을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0-14)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예수께서 에브라다 베들레헴에서 출생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미가5:2)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면서 메시아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안나와 시므온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메시아 오심에 대한 지식과 준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홀연히 그들에게 주님 탄생의 소식이 천사들에 의하여 알려진 것입니다. 목자들은 그 길로 베들레헴을 향하여 달려갔고 어린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홀연히 라는 말은 뜻하지 않게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사건이나 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목자들은 양을 치고 있었고, 밤에 잠을 청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천사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의 탄생을 고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이렇게 홀연히 찾아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고지했습니다. 홀연히 일어난 사건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고 했습니다. 모세도 가시떨기에 불이 붙어 타는 장면을 목격하고 가까이 다가갔다가 홀연히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됩니다.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120명의 성도가 모여서 열흘 동안 기도하고 있었는데 열 흘 되던 날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나 나더니 볼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었고, 각자가 방언을 하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고, 베드로는 청중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 하여 3,000명이 구원을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 사도도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길에서 홀연히 강한 빛이 하늘에서 쏟아지면서 눈이 멀었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 한 후 사도요 복음전도자요. 예수님의 종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는 이렇게 홀연히 임하는 축복입니다. 뜻하지 않은 때에, 갑자기 찾아와 말씀하시거나 사명을 주시거나, 길을 인도하시거나 위대한 일을 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홀연히 임하시는 축복이 있기 원합니다. 목자들에게 주님의 성탄을 알린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① 당시 목자들은 그들 사회에서 소외된 계급이었으며, 천시된 직업군에 속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로 인하여 버림받은 천한 인간들을 위하여 오신 사건입니다. ②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면서 맹수들로부터 지켜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목자로 오신 분이며 요한복음 10장에서 주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한편 그날 밤에 부른 천사의 노래는 두 가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하늘에 영과, 둘째, 땅에는 평화입니다. 주님은 하늘에 이루어진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운동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평화가 없습니다. 싸우고, 죽이고, 해치고, 빼앗고, 망하고, 망가집니다. 지금 코레일 파업 사건으로 인하여 전국이 들썩거립니다. 이런 일은 끊임없이 인간 세상에 일어납니다. 인간의 탐욕이 낳은 결과입니다. 우리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양보, 대접, 나눠 줌, 내려놓음, 섬김, 겸손, 화해, 평화, 긍휼, 자비, 사랑, 동정, 충성, 헌신, 감사, 보답, 선이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아무튼 홀연히 임한 우리 주님의 축복이 이번 성탄에 우리 성도들에게 임하시길 축복합니다. 성탄은 또 어떤 축복을 우리들에게 주었습니까?
2. 기다리는 자들에게 임한 축복입니다(눅 2:22-39)
누가복음1,2장에는 예수님의 탄생과 구세주 되심에 대한 네 편의 찬송이 있습니다. 마리아의 노래(눅1:46-48), 사가랴의 찬송(눅1:68-79), 천사들의 찬송(눅2:14) 시므온의 찬송(눅2:28-32) 여기 시므온은 유대 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A.D13년 산헤드린의 의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추측일 뿐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므온은 평생토록 경건하고 의롭게 산 사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을 정도로 깊은 영성을 지닌 인물입니다. 그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 마리아와 요셉의 할례를 행하러 데리고 온 어린 아기 예수님을 보는 순간 성령께서 그 아기가 예수, 즉 그리스도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마음껏 하나님께 찬양했습니다.
한편 아셀 지파의 마누엘의 딸 안나 라는 여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안나는 히브리어로 한나와 같은 이름입니다. 과부 된지 84년이었고, 결혼 한지 7년 만에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당시 조혼으로 인하여 14세경에 결혼을 하였다면 14+7+84=105세쯤 되는 여성입니다. 이처럼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야에 금식하며 메시아를 대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 즉 그리스도 예수님을 가슴에 안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하나같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와 축복은 홀연히 임하시기도 하지만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자에게 임하시는 축복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은 그를 기다리는 자에게 은혜로, 축복으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임하시는 분입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앙모한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기가 엄마의 젖을 사모하듯, 병아리들이 어미 품을 사모하듯, 목마른 사슴이 물을 사모하듯, 배고픈 사람이 빵을 사모하듯, 그렇게 주님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자들에게 우리 하나님은 은혜를 부어 주시고, 기도 응답을 주시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고, 구원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어느 날 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는 꿈결에 사랑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께서 어거스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아들아,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어거스틴이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만을 원합니다.” 우리가 진정 사모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진작 예수님을 만나려는 생각, 예수님에 대한 관심, 예수님의 뜻과 생각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욕심이나 탐욕을 채우려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수 없이 많이 봅니다. 물질, 사업, 건강, 자녀, 가정, 직장, 삶의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받기 위하여 나오는 경우들이 태반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런 문제들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말고, 예수님 자신, 즉 자체를 만나러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서 주님과 관계가 깊어지면 그분이 우리들의 모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여 주시는데 예수님을 사모하지 않고, 자신의 문제들만 가지고 나오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이번 성탄절을 계기로 오직 주님만을 사모하고 주님만을 만나는 절기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성탄은 우리들에게 어떤 축복이 됩니까?
3. 만민을 위한 축복입니다(눅 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만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으며, 열방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만을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닙니다. 한 국가를 위하여 오신 편협한 분이 아닙니다. 옹졸한 신도 아닙니다. 그는 광대하시고, 무한하십니다. 그의 복음은 이스라엘의 국경을 넘어 세계만방으로 퍼져나갈 것임을 나타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의 사도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9)고 했습니다.“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막156:15)고 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명령을 준행하였습니다. 나가서 만민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은 땅 끝까지 전파되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 구석구석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지구촌에는 예수 이름으로 충만하며 모든 열방과 나라들이 예수 이름으로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받아 드리는 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는 축복을 받습니다. 더불어 이 땅에 사는 동안 그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풍성한 은혜 안에 살게 됩니다. 엊그제 최낙중 목사님 어머니 권사님이 소천하여 그분의 빈소인 삼성병원에 다녀왔습니다. 7남매를 두었습니다. 9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한 번도 병원에 가 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지난주일 아침에 일어나서 가슴이 아프다고 하더니 그냥 눈을 감았습니다. 최낙중 목사님이 고등학생 때 예수를 믿고 가족을 모두 전도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형제 누이들이 모두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큰 아들은 장로님, 둘째는 목사, 셋째는 고등학교 교감이면서 장로, 넷째는 목사, 두 딸은 모두 목사 사모, 그리고 손자들 가운데 둘이 목회자와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매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여 기도로 하루를 마칠 정도로 자식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셨다고 합니다. 권사님인데 영성이 목회자 못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복음이 한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이 구원을 받고, 마을에 들어가면 마음이 구원을 받고, 국가와 민족에게 들어가면 그 나라와 민족이 구원을 받고, 문화 속으로 들어가면 문화가 바뀌고, 사상으로 들어가면 기독교 사상으로 세상이 변하며 그 시대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의 장성택 처단과 함께 피의 숙청이 계속 되는 모습은 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우상 숭배와 공산주의를 받아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사건은 개인뿐만 아니라 온 나라 백성들이 모두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는 축복을 받게 함이며, 하나님의 축복이 인류 모두에게 골고루 임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만민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한 것입니다. 아직도 불교 문화권, 이슬람 권, 회교 문화 권, 중화문화 권, 그리고 라마교 문화권과 샤머니즘 문화권 가운데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무수히 많습니다. 저들에게 복음이 전파 되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나라에 복음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탄생과 구원의 축복이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게 해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홀연히 임한 축복입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 임한 축복입니다. 만민에게 임한 축복입니다. 우리는 메시아 강림의 축복을 통하여 구원을 얻었고, 온갖 풍성한 은혜 안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 복음을 안 믿는 자들과 열방에 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교회가 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