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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업의 감동젓
“(저녁에) 장역(張譯)이 소릉하(小凌河)에서 감동즙(甘冬汁) 한 병을 사왔는데 맛이 몹시 좋다고 하는 것을 듣고서, 바로 가져오라고 하였다. 그 즙이 기름처럼 맑았는데, 돼지고기를 찍어 먹으니 참으로 맛있었다.”1)
이 글은 1712년(숙종 38) 음력 11월에 사은 겸 동지사(謝恩兼冬至使)의 일원으로 북경(北京, 베이징)을 다녀온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이 쓴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에 나온다. 이 글을 쓴 날짜는 1712년 음력 12월 14일이다. 이날 사신 일행은 소릉하를 지나 고교포(高橋鋪,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후루다오시葫蘆島市 소재)에 묶었다.
이 일기에 나오는 ‘장역’은 ‘한학상통사(漢學上通事)’, 즉 한어통역관인 장원익(張遠翼, 1654~?)이다. 장원익은 김창업을 많이 따랐던 모양이다. 이날 저녁 늦게 유봉산(柳鳳山, 황해도 봉산군 군수 출신으로 추정)과 함께 김창업의 방에 찾아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원익은 이야기 중에 소릉하에서 사온 ‘감동즙’이 맛있다는 말을 했다. 그러자 김창업은 장원익에게 바로 가져오라고 시켰다.
도대체 ‘감동즙’은 어떤 음식일까? 김창업은 이틀 전인 음력 12월 12일의 일기에 “자하젓(紫蝦醢)을 파는 자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감동젓(甘冬)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젓 속에 담근 오이가 굉장히 컸다”2)紫蝦)’로 담근 젓갈을 가리킨다. ‘자하’는 갑각류의 한 종류로, 8쌍의 가슴다리가 있고 가슴다리의 가죽에 아가미가 있다. 생김새가 새우와 비슷하지만 크기는 겨우 1~2cm에 지나지 않는다. 갑각의 색이 자주색이라서 ‘자하’라는 이름이 붙었다. 또 우리말로 ‘곤쟁이’라고 하며, 젓갈 이름도 ‘곤쟁이젓’이라고 부른다.
《세종실록 · 지리지》에서는 황해도의 해주(海州)와 연안(延安)의 바닷가를 비롯하여 경기도 남양만에서 ‘자하’가 난다고 했다. 즉, 조선 초에 한반도의 서해 중부에서 자하가 많이 어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창업은 《노가재연행일기》의 서론에 해당되는 〈산천풍속총록(山川風俗總錄)〉에서 “대릉하(大陵河)와 소릉하의 감동젓(甘冬醢)은 맛도 좋고 흔하였다”3)凌海)에서도 어획된다는 말이다.
이만영(李晩永, 1748~?)은 《재물보(才物譜)》(1798)에서 새우〔鰕〕의 한 종류로 ‘노하(鹵鰕)’를 언급하면서 한글로 ‘권쟝이’이며, 민간에서는 ‘자하’라고 한다고 했다.4) ‘권쟝이’는 한자로 ‘권정(權丁)’이라고도 적었다. 그것이 지금의 ‘곤쟁이’가 된 것이다. 또 맛이 너무 좋아서 ‘감동(感動)’ 받아서 ‘감동’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김창업은 “그 즙이 기름처럼 맑았”다고 했다. 1924년에 출판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는 감동젓을 담그면 위쪽에 기름조각이 떠오르는데, 이를 ‘감동유(甘冬油)’라고 부른다고 적혀 있다.5)6)最美)’, 즉 “참으로 맛있었다”라고 적었던 것이다.
김창업은 소릉하에서 구입한 ‘자하젓(감동젓)’을 두고 “젓 속에 담근 오이가 굉장히 컸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하젓’은 단지 ‘자하’를 소금에 절인 젓갈 그 자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젓 속에 큰 오이가 들어가 있다고 했으니, ‘자하오이김치’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김창업이 맛본 소릉하의 ‘자하오이김치’와 비슷한 ‘자하젓’은 1426년(세종 8) 음력 6월 16일자 《세종실록》에도 나온다. 명나라 사신 백언(白彦)의 요청으로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 “어린 오이와 섞어 담근 자하젓 두 항아리”를 보냈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7)
명나라와 청나라 때 편찬된 중국의 요리책에서는 아직 자하젓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 김창업은 귀국길이던 1713년 음력 2월 29일자 일기에서 “대릉하에 도착하니 거리에서 ‘감동’을 팔고 있는 사람이 갈 때보다 훨씬 많았다. 중국에는 일찍이 이런 물건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는데, 유독 이곳에서만 이처럼 많고 흔하니, 그 요리법은 틀림없이 우리나라에서 사로잡혀온 사람들에게서 나와서 퍼진 것이다”8)
《노가재연행일기》 제8권 1713년 음력 2월 29일자 부분. 왼쪽 끝 행에 “우리나라에서 사로잡혀온 사람들에게서 나와서 퍼진 것이다”라는 내용이 나온다.<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병자호란 이후 많은 조선인이 청나라의 포로가 되어 심양(瀋陽, 선양)과 북경 일대에 살았다. 김창업의 증조부인 김상헌(金尙憲, 1570~1652)도 청나라에 반대하다가 심양으로 압송되어 구금(拘禁)되었다. 김창업은 그때 포로로 잡혀온 조선 사람들이 자하젓을 퍼뜨린 것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이처럼 중국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고향의 맛을 잊지 못해 만들어 먹었을 정도였으니 조선시대 요리책에 자하젓 요리법이 빠질 수 없었을 것이다.
김창업보다 40여 년 뒤에 활동한 영조 때의 의관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은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1766)에서 자하젓 만드는 법을 다음과 같이 적어두었다.9)
“젓갈로만 담가 먹는데, 그 방법은 먼저 전복 · 소라 · 오이 · 무(4조각으로 썰면 된다)를 마련하여 소금을 많이 뿌리고 갈무리해둔다. 자하가 날 때를 기다려서 앞의 4가지 재료를 가져다가 소금기를 뺀다(짠맛을 조금 남겨둔다). 자하도 여느 방법대로, 소금을 뿌리고, 4가지 재료와 함께 항아리에 켜켜이 넣는다. 다 담고서 기름종이로 항아리 입구를 단단하게 막아 땅속에 묻는다. 뚜껑을 꼭 덮고 다시 항아리 입구를 잘 타고 남은 재로 둘러 바르고 묻는다. (이렇게 하면) 개미는 물론 비와 습기도 막을 수 있다. 오래도록 두었다가 먹으면 더욱 맛있다.”
이 요리법은 이후에 한문으로 편찬된 대부분의 요리책에서 인용되었다.
이쯤에서 앞에서 소개한 1712년 음력 12월 12일자 김창업의 일기에 적힌 “젓 속에 담근 오이가 굉장히 컸다”는 내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전복 · 소라 · 오이 · 무에 자하젓을 버무려 담근 《증보산림경제》의 자하젓은 김창업이 대릉하와 소릉하에서 맛보았던 것에 비해 맛이 특별했을 것이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이 요리법이 얼마나 널리 쓰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최근 세상에 알려진 일명 《주초침저방(酒醋沈菹方)》10)11) 그것도 ‘감동저(甘動菹)’란 이름으로 말이다. 국어학과 서지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 책은 늦어도 17세기 초반 이전에 필사된 것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자하젓(감동젓)’ 요리법의 변천사를 추정할 수 있다. 즉, 16세기까지만 해도 어린 오이를 함께 넣어 담근 자하젓 요리법이 보편적이었을 것이다. 세종 때 ‘자하젓’을 요청했던 명나라 사신 백언은 본래 조선인이었고, 본가가 수원에 있었다.12)
한편, 유중림이 기록해놓은 ‘자하젓’ 요리법은 18세기 중반 왕실의 요리법일 가능성도 있다. 유중림은 조선식이거나 민간의 요리법이면 해당 부분에 반드시 ‘속방(俗方)’이란 글자를 덧붙였는데, 자하젓 요리법에는 이런 표시가 없다. 숙종대 이후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당시 왕실의 재정도 그전과 달리 넉넉해졌다. 그런 덕에 자하젓만 하더라도 왕실의 주방에서는 오이뿐 아니라 전복과 소라, 무까지 함께 버무려 담근 화려한 젓갈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19세기 이후가 되면 이 화려한 자하젓에서 전복 · 소라 · 오이가 빠지고 무채만 넣고 담근 ‘무채감동젓’이 해주에서 생겨났고, 20세기 초반에는 자하젓과 양념을 넣어 버무린 ‘감동젓깍두기’가 서울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김창업의 증조부 김상헌은 인조 때 청나라에 반발하여 ‘척화(斥和)’를 내세운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뿐만 아니라 김창업의 집안은 부친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그의 두 형제, 그리고 김창업과 그의 다섯 형제들이 후세인들로부터 ‘삼수육창(三壽六昌, ‘수壽’ 자와 ‘창昌’ 자 항렬 양대에서 가장 출중했던 9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벼슬이나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던 명문가였다. 그런데 1689년(숙종 15) 남인이 후궁 소의장씨(昭儀張氏)의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을 몰아내고 재집권하게 된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유배지 진도에서 사약을 받은 김수항은 자식들에게 벼슬에서 요직을 피하고 학문에 전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창업의 형제들은 부친의 유언을 지키려 노력했다. 김창업 역시 1681년 24세에 이미 진사(進士)가 되었지만, 부친의 유언에 따라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가재(稼齋)’라는 김창업의 호(號) 역시 농사지으며 살겠다는 그의 의지를 담은 것이다. 그러나 1694년(숙종 20) 폐비민씨 복위에 반대하던 남인이 실권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조정에서는 이 명문가의 형제들에게 조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중앙의 고위직에 나올 것을 집요하게 요청했다. 장남 김창집(金昌集, 1648~1722)은 1695년에 철원 부사(府使)를 맡으면서 그들의 요청을 무마하려 했다. 그러나 요청은 계속되었고, 결국 1700년 봄에 예조 참판(參判), 1701년에 호조 판서(判書)가 되었다. 그리고 1712년 음력 6월 23일, 같은 해 음력 11월에 출발할 ‘사은 겸 동지정사’로 임명되었다.
조선시대 연행사의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은 아들이나 동생, 조카 등 친인척 한 명을 수행원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이들의 공식 자격은 ‘자벽군관(自辟軍官)’ 혹은 ‘자제군관(子弟軍官)’이다. 중병을 앓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김창집은 1712년의 연행에 아들이든 누구든 수행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50대 전후의 그의 형제들 모두가 가고 싶어 했다. 처음에 셋째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가겠다고 나섰다가 그만두었고, 결국 넷째 김창업이 가게 되었다.
김창업은 ‘타각(打角)’의 직책을 맡는 것으로 임금의 재가를 받았다. 타각은 사신의 행차에 쓰이는 모든 기구를 감독하고 지키는 사람을 부르는 말로, 공식 행차 때 반드시 군복을 착용했다. 군복을 입어야 하는 ‘타각’이란 직책 때문에 주위 사람들은 김창업을 조롱했다. 친구들도 만류하고 나섰다. 그러나 일생에서 한 번뿐일 이번 중국행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증조부가 구금되어 있었던 땅, 책에서만 보아온 유적지와 명승지, 김창업에게는 직접 현장에 가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결국 55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주위의 조롱과 비난을 무릅쓰고 큰형의 연행을 따라나섰다.
김창업은 귀국 후에 9권 6책의 문집 체제로 연행일기를 엮었고, 책 제목을 《가재연행록(稼齋燕行錄)》이라고 지었다. 그런데 책의 각 권에는 《노가재연행일기》라는 제목을 적었다. 아마도 이 책이 일기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같다. 1967년 국역본을 내면서 이 책 이름을 《연행일기》라고 붙였지만, 수백 권이 넘는 조선시대 연행록과 구분하기 위해 학자들은 대부분 《노가재연행일기》라고 부른다.13)
이 책의 서론에 해당되는 제1권의 〈왕래총록(往來總錄)〉에서 김창집은 자신의 여정을 “임진년(1712, 숙종 38) 11월 3일에 서울을 떠나서 22일에 의주에 도착하여 4일을 묵었다. 26일에 강을 건너 12월 27일에 북경에 도착하였고, 옥하관(玉河館)에서 46일을 지냈다. 2월 15일 귀국길에 올라 3월 13일 다시 강을 건넜고, 30일에 서울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왕복 5개월, 날짜로 146일”을 여행했다고 적었다. 다닌 거리도 계산하여 적어놓았는데, “서울에서 의주까지 1,070리, 의주에서 북경까지 1,949리, 합하여 3,019리이다. 북경에서의 나들이와 도중의 유람 및 우회한 거리가 또 653리다”. 주로 말을 타고 갔고, 유람할 때는 노새를 빌려 타기도 했다. 요사이 사람들이 승용차로 다녀온다고 해도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게다가 여행 중에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으니 김창업은 대단한 여행가라 할 수 있다. 매일의 일기는 날짜와 그날의 간지(干支), 그리고 날씨를 기록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음에 어디에서 언제쯤 출발하였고, 아침이나 점심을 어디에서 먹었으며, 도착한 곳과 숙소가 어디인지를 적었다. 이것은 김창업의 일기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이다. 그다음에 나오는 내용은 매일의 여정에서 있었던 일과 만난 사람, 그리고 현지인과 나눈 대화 등이다. 또한 자신의 생각을 갈무리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심지어 여행에서 방문한 사찰과 유적지, 혹은 숙소에 걸려 있는 시를 옮겨 적기도 했다. 한시를 잘 지었던 김창업은 여행 중에 402수의 한시를 지었다. 이 시들은 따로 자신의 문집인 《노가재집(老稼齋集)》에 실었다.
김창업이 연행을 떠나는 날, 바로 아래 동생 김창즙(金昌緝, 1662~1713)은 여행 안내서 세 가지를 챙겨주었다. 하나는 연로(沿路)에 있는 명산 · 대천(大川) · 고적이 기록된 책이고, 다른 하나는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여행기 《각산여산천산유기록(角山閭山千山遊記錄)》, 그리고 《여지도(輿地圖)》 중 〈의주북경사행로(義州北京使行路)〉 한 장이다. 김창업은 도중에 이들 자료를 보고 지리를 확인하고, 간혹 본진에서 떨어져 나와 명산대천을 유람하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단검 · 호리박 · 가죽주머니도 챙겼다.
“호리박에는 술을 담고 가죽주머니엔 붓과 벼루, 요기할 음식을 넣었다.”14)
붓과 벼루는 현지인과 필담(筆談)을 나눌 때나 메모를 할 때 사용했다.
김창업은 간식거리로 전복 · 쇠고기 · 꿩고기 · 홍합 · 대추 · 인삼 등을 말린 것과 전약 · 약과 · 청심원(淸心元)도 준비해갔다. 아마도 매일 아침 길을 나설 때마다 이들 음식 중에서 몇 가지를 가죽주머니에 넣었을 것이다. 김창업은 이들 간식거리를 자신이 먹기도 했지만, 현지에서 만난 중국인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전약과 약과를 받은 중국인 중에는 만드는 방법을 묻기도 했다. 특히 청심원이 인기였다. 청심원을 받은 중국인들은 약효가 좋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15)
조선 후기 연행사의 규모는 많게는 500여 명, 적게는 250여 명이었다. 이와 같은 대규모 인원이 약 4~5개월 동안 먼 거리를 이동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동의 효율성, 숙소와 식사 문제 등을 원활하게 해결하기 위해 삼사(三使, 정사 1명과 부사 2명)의 경우 35명 내외의 인원으로 구성된 ‘방(房)’을 각각 조직했다. 정사인 김창집의 조직은 ‘상방(上房)’이라 불렸는데, 여기에 소속된 인원은 모두 36명이었다. 김창업도 이 인원에 포함되었다.
한 개의 방에는 군관 · 역관 · 의관 · 인로(引路, 길안내) · 건량마두(乾粮馬頭) · 주자(廚子) · 마부 · 노비 등 업무별 담당자가 배속되어 정사의 연행을 도왔다. 이 중 ‘건량마두’는 사신의 양식을 싣고 가는 역마를 맡은 자이다. 김창업이 소속된 상방의 건량마두는 용천(龍川, 지금의 평안북도 용천)의 관노 한 명이 맡았다. ‘주자’는 요리사이다. 이들은 지방 관아의 소주방(燒廚房, 음식 만드는 부서)에 소속된 노비로 김창집의 상방에는 곽산(郭山, 지금의 평안북도 정주)과 선천(宣川, 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차출된 관노 두 명이 배속되었다.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 땅에 도착하면 주자 두 명은 미리 지급받은 은화로 현지의 식재료를 구입하여 식사 준비를 했다. 간혹 구입 과정에서 청나라 상인에게 속아서 과도한 지출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구입한 식재료의 값을 높게 보고하고 중간에 착복하는 일도 있었다. 이러다 보니 귀국길에 ‘방’의 식재료비가 거덜 나서 제대로 식사를 준비하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삼사’는 물론이고 따라가는 사람들도 개인적으로 먹을거리를 준비해 갔다.
1713년 음력 1월 3일 북경에 머물고 있던 김창업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오늘 죽통에 넣어두었던 초장(炒醬)을 꺼내어 먹었다. 올 때에 역관들이 초장은 맛이 쉽게 변해서 먹을 수 없다 했다. 하지만 나는 큰 죽통 한 마디를 둘로 잘라, 각각에 초장을 넣은 뒤, 모두 입구를 막고 다시 전과 같이 (하나로) 합쳐서, 종이로 바깥을 발라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했다. 마침내 꺼내보니 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16)
‘초장’의 한자를 보면 ‘볶은 장’이지만, 김창업의 글로는 그것이 볶은 고추장인지, 된장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김창업 당대나 이후의 요리책 중에서 ‘초장’ 혹은 ‘볶은 장’의 요리법은 오직 한글로 쓰인 《주식시의(酒食是儀)》에만 나온다. 제목은 ‘장 볶는 법’이다.17)
《주식시의》는 대전의 은진송씨(恩津 宋氏)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둘째 손자인 송병하(宋炳夏, 1646~1697)의 집안에서 전해져오다 최근에 발견된 요리책이다. 학자들은 이 책이 19세기 초반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김창업의 집안과 송준길 집안이 학파도 당파도 같다는 점이다. 아직 근거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지만, 이런 인연 때문에 《주식시의》의 ‘볶은 장’이 바로 김창업의 ‘초장’이 아닐까 추정해본다.
김창업은 북경에서 술도 직접 담갔다. 1713년 음력 1월 7일자 일기를 보면, 김창업은 북경의 숙소에서 백화주(百花酒)의 밑술을 만들어 중국식 온돌인 캉(炕, 실내 한쪽에 벽돌을 쌓아 바닥 일부분만 난방을 하는 온돌시설) 위에 두고 익혔다.18)
김창업이 살던 당시에 편찬된 요리책을 보면 백화주 빚는 법이 두 가지로 소개되어 있다. 하나는 쌀과 누룩, 그리고 그늘에 말린 여러 가지 꽃으로 빚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쌀과 누룩, 그리고 밀가루로 빚은 것이다. 그렇다면 김창업은 어떤 방법을 택했을까? 일기에서 김창업은 “올 때 백화주방(百花酒方)을 베껴 가지고 왔다”고 썼다. 혹시 김창업의 집에 백화주 만드는 방법을 적어놓은 요리책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현재까지 전하는 조선시대 요리책 중에서 백화주 제조법이 나와 있는 책은 18세기의 책으로 추정되는 저자 미상의 《주방문초(酒方文鈔)》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주식방문》이다. 두 책 모두 한글로 쓰였다. 이 중 《주식방문》에는 ‘안동김씨 노가재공’과 ‘유와공(牖窩公) 종가 유품’이라는 글이 적혀 있어 김창업 집안에 전하던 요리책임을 확인할 수 있다.19) ‘노가재’는 김창업이고, ‘유와공’은 그의 증손자 김이익(金履翼, 1743~1830)이다. 이 책에 적힌 ‘백화춘 술방문’이 바로 김창업이 연행을 떠날 때 베껴서 간 백화주 제조법일 가능성이 많다. 한자 ‘춘(春)’은 ‘주(酒)’를 뜻한다.
“백미 1말 매우 씻어 하룻밤 담갔다가, 이튿날 작말(作末, 가루로 만듦)하여 놓고 끓인 물 3병을 풀어 덩이 없이 주물러 익게 쑤어 채우고, 가루누룩 1되, 진말(眞末, 밀가루) 1되, 좋은 술 1보(보시기)에 넣어두었다가, 3일 만에 백미 2말을 정히 씻어 매우 쪄 채우고, 밑술에 버무려 넣되 가루누룩 5홉 넣고 물 6병을 넣고, 맵게(독하게) 하려면 1병을 덜 넣나니라. 익은 후에는 날물은 붓지 말라.”20)
만약 이 제조법을 베껴 갔다면, 김창업은 서울 집을 떠나면서 가루누룩을 챙겨 갔을 것이다. 그런데 걱정은 현실로 다가왔다. 1713년 음력 2월 8일자 일기를 보면, 밑술을 담근 지 32일이 지났는데도 익지 않았다. 그래서 수일 전에 중국의 청주인 계주주(薊州酒) 두 잔을 밑술에 넣었더니 이날 비로소 약간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21)
김창업은 1713년 음력 2월 14일 저녁에 술독에서 술을 퍼서 맛을 보고 매우 기뻤다. 술맛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는 역관 장원익에게 술지게미도 거르지 않은 채 한 사발을 보냈다.22)23)24)
이쯤 되면 김창업 일행은 해외여행을 가면서 고추장이나 깻잎장아찌 따위를 짐 속에 챙겨 넣는 요사이 일부 한국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김창업이 중국에서도 오직 조선 음식만 찾았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그는 여행 중에 중국 음식이 나오면 반드시 먹어보았고, 조선 음식과 비교하는 글을 일기에 남겼다.
의주에서 심양을 향하는 중이었던 1712년 음력 12월 12일, 김창업은 시장에서 파는 국수가 맛있다는 말을 듣고 ‘주자’를 시켜 사오게 하였다. 그리고 먹어본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가늘고 길게 이어진 이곳의 국수는 모두 밀가루로 만드는데, 그 맛이 메밀국수보다 훨씬 좋았다.”25)
조선에서는 겨울에 밀가루를 구하기가 어려워 주로 메밀가루로 만든 국수를 먹어왔을 터, 김창업이 한겨울 연행길에 먹어본 중국 밀국수는 부드럽고 맛도 좋았을 것이다.
북경 가는 길에 묵었던 사하(沙河,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 남부)의 중국인 민박집에서 먹은 식사는 모두 중국 음식이었다. 집 주인이 감귤(柑橘) · 증정(橙丁, 채 썬 오렌지를 설탕에 조린 음식) · 민강(閩薑, 채 썬 생강을 설탕에 조린 음식) · 개암 · 수박씨 · 산사정과(山査正果, 산사로 만든 정과) · 돼지고기 · 계란 등 10여 접시의 음식을 대접했다. 김창업은 이 음식들이 “매우 정교하고 맛있었다”고 일기에 적었다. 또 이 집 주인은 김창업 일행에게 술도 한 항아리 대접했다. “물처럼 맑으면서 약간 푸른색을 띠었다. 향이 강했지만 맛은 순했다.” 김창업은 연거푸 4잔이나 마셨지만 그리 취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두고 김창업은 “하기야 잔이 작아서 한 잔이라야 우리나라의 반 잔”에 지나지 않아서 그렇다고 했다.26)
의주에서 심양, 심양에서 산해관까지 가면서 먹은 현지 음식은 그런대로 입에 맞았다. 여행 중에 간혹 조선의 김치와 비슷한 배추김치 · 동치미 · 갓김치도 먹을 수 있어 연행사 일행은 음식 때문에 고생하는 일이 적었다. 그러나 북경에 들어와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특히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방문한 자금성(紫禁城)에서 대접받은 음식이나 음료는 만주인의 식성을 따른 것이라 조선 사신들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김창업은 사신들과 달리 이런 음식들에 호기심을 보였다.
18세기 청나라 건륭(乾隆) 연간에 제작된 〈만국래조도(萬國來朝圖)〉 부분. 여러 나라 사신들이 정초에 황제를 조회하는 의식을 그린 그림이다. 왼쪽 아래 코끼리 뒤에 선 일행이 조선 사신단이다.〈출처: 베이징고궁박물원〉
1713년 음력 1월 1일 황제에게 세배를 하러 자금성에 가서 있었던 일이다.27)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녘 오경(五更, 새벽 3~5시 사이)에 자금성으로 향한 조선 사신단은 자금성 안의 서정(西庭)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하례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뒤에 청나라 관리가 조선의 역관을 시켜 세 사신에게 청차(靑茶)를 내오고, 이어 타락차(駝酪茶)를 큰 병으로 하나 보내 왔다. 차야 그런대로 마실 수 있었지만, 문제는 이어서 나온 타락차였다. 김창집은 물론이고 부사 두 사람도 마실 엄두를 내지 않았다.
청 황실의 타락차는 찻잎을 끓인 물에 소 · 양의 젖에서 얻어낸 유지방과 소금 따위를 넣고 만든 ‘수유차(酥油茶)’이다. 12세기경부터 중국 변방의 유목민족 지배층 중에 차 마시기가 습관이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직접 차를 재배할 수 없는 자연환경으로 인해 남방에서 생산된 전차(磚茶, 벽돌 모양으로 압착한 덩어리 차)를 말과 맞바꾸어 찻잎을 확보했다. 이렇게 어렵게 구한 찻잎을 아껴 먹기 위해 개발된 것이 바로 수유차다. 청나라 황실의 만주인은 물론이고, 그들과 혼인하여 황족이 된 몽골인, 황실 불교의 승려인 티베트인들은 모두 수유차를 즐겨 마셨다.
요사이 한국인들 중에도 수유차, 즉 타락차를 잘 못 마시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 왕을 비롯해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평생 유제품이라곤 맛도 보지 못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런데 김창업은 “나는 일찍이 그 맛이 좋음을 알았기 때문에 연거푸 두 잔이나 마셨다”고 했다. 대단한 식성이 아닐 수 없다. 《노가재연행일기》를 읽다 보면, 곳곳에서 김창업의 이런 호기심을 발견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 이래 조선의 선비들은 기회가 생기면 누구든지 연행사의 일원이 되어 중국에 가고 싶어 했다. 공자 · 맹자 · 주자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서양에서 들어온 문물까지 가득한 중국, 특히 수도 북경은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법고창신(法古創新)’의 땅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나 생소한 그곳의 음식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나고 자란 땅을 벗어나면 생소한 음식과 식생활 관습 때문에 몸도 마음도 고생일 수밖에 없다. 타지의 그런 환경 속에서도 현지 음식을 맛보고 그 느낌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 김창업. 그는 국경을 넘나든 미식가였다.
김창업(金昌業),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제2권, [임진(壬辰)] 12월 14일, 계해(癸亥) : 夕, (중략) 聞張譯到小凌河買甘冬汁一甁味絶佳, 卽令取至. 其淸如油, 蘸猪肉食之, 最美. 이 글의 원문 인용과 번역은 한국고전번역원의 고전번역DB를 참조하였다.
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 제2권, [임진] 12월 12일, 신유(辛酉) : 有賣紫蝦醢者, 卽我國所謂甘冬也。醢中所沈瓜絶大.
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 제1권, 〈산천풍속총록(山川風俗總錄)〉 : 大小凌河甘冬醢味佳而賤.
이만영(李晩永), 《재물보(才物譜)》 제4책 ‘인충보(鱗蟲譜)’, ‘鰕(새오)’ : 〇鹵鰕 권쟝이 〇紫蝦(俗),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 소장본.
영창서관(永昌書館) 편집부(찬),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 영창서관, 1924, 214쪽.
영창서관 편집부(찬),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 영창서관, 1924, 214쪽.
《세종실록》 32권, 세종 8년(1426) 6월 16일 2번째 기사 : 童子瓜交沈紫蝦醢二缸于迎接都監, 白彦欲進獻也.
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 제8권, 1713년 2월 29일 : 至大凌河, 路上賣甘同者, 比去時更多. 中國未嘗聞有此物, 而獨此處多而賤如此, 其法必出於我國被虜人所傳也.
유중림(柳重臨),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제9권, 〈치선(治膳) 하(下)〉, ‘자하(紫蝦)’ : 只可沉醢. 其法先用生鰒小螺青苽蘿葍根(四破可也), 多加塩貯之. 待紫蝦時, 取前四味以退去塩(略留醎氣). 紫蝦亦依常法加塩, 與四味作層隔下瓮中. 訖以油紙堅封瓮口, 埋地中. 用盆盖定, 又以猛灰緣瓮口邊埋之. 以防虫蟻亦防雨湿. 經久食之尤佳; 농촌진흥청, 《증보산림경제Ⅱ》, 농촌진흥청, 2003, 247~248쪽.
이 책은 본래 개인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학자들의 해제와 부분 번역에 의해서 세상에 알려졌다. 당초 책의 표지가 없어 제목도 없었는데, 이들 연구자들이 술 · 식초 · 침저의 내용이 많은 것을 이유로 책 제목을 《주초침저방》이라고 지었다(백두현, 〈『주초침저방(酒醋沈菹方)』의 내용 구성과 필사 연대 연구〉, 《嶺南學》 제62호, 2017; 박채린·권용민, 〈「주초침저방(酒醋沈菹方)」에 수록된 조선 전기(前期) 김치 제법 연구-현전 최초 젓갈김치 기록 내용과 가치를 중심으로〉,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32(5), 2017).
《주초침저방(酒醋沈菹方)》, ‘감동저(甘動菹)’ : 어린 외를 따서, 소금물에 하룻밤 재웠다가, 꺼내서 (물 빼기를 하여) 반쯤 말렸다가, 자하젓으로 버무려 담근다. 어린 외를 끓는 물에 데쳤다가 (물 빼기를 하여) 반쯤 말렸다가 (자하젓으로) 버무려 담가도 좋다(童子苽摘取, 沈塩水經一宿, 拯出半乾, 紫蝦醢交沈. 兒苽曝湯, 半乾交沈, 亦可.).
《세종실록》 31권, 세종 8년(1426) 2월 15일 4번째 기사.
《노가재연행일기》가 책으로 묶이자 당시 많은 지식인이 빌려서 베껴 옮겼고, 18세기 중반에 한글 번역본까지 나왔다. 20세기 초반에 일부가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영어 번역본은 캐나다 출신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S. Gale, 1863~1937)이 〈Translation of diary of Korean Gentleman's trip from Seoul to Peking 1712-1713 A.D.〉라는 제목으로 《코리아매거진(The Korea Magazine)》의 1918년 7월호부터 1919년 4월호까지 매달 게재한 것이다(백주희, 〈J. S. Gale의 노가재연행일기영역본(老稼齋燕行日記英譯本) 일고(一考)〉, 《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 제27집, 2014).
김창업(金昌業),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제1권, 1712년 11월 3일 : 以短劍胡盧革囊掛鞍. 胡盧盛酒, 囊貯筆硯療飢之物也.
김창업(金昌業),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제9권, 1713년 3월 12일 : 一胡云, 去年九月生小兒患急驚風, 目直牙堅, 嚼淸心元灌之, 便甦, 仍得痊可. 抱其兒來示, 稱其神效云.
김창업(金昌業),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제4권, 1713년 1월 3일 : 是日, 出竹筒中炒醬啖之. 來時譯輩言炒醬味易濇, 不可食. 而余用大竹筒一節, 中截爲二, 各裝入炒醬後, 皆閉口還合如故, 用紙塗外面, 令風不入. 及出, 味不少變.
작자 미상, 《주식시의(酒食是儀)》, ‘장 복는 법’ : 맛 됴흔 고초장을 고기 두다려 거른 거시 장과 고기 슛치 갓게 고 고기을 노구 바닥의 몬져 편 후 장흘 우흐로 노흐되 젼장만 복그면 맛시 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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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업(金昌業),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제4권, 1713년 1월 7일 : 是日, 爲酒酵置所居炕. 此來時謄取百花酒方, 故依此釀之. 而人皆謂不可成, 以水味惡故也. 瓮制亦異, 下殺上闊, 厚寸許, 其大可容數十斗. 而酒酵只一斗, 求相稱之器, 終不得入來.
현재 알려진 《주식방문》은 두 가지 종류이다. 하나는 2003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김창업 후손 집의 고문헌을 조사하면서 수집된 것이며, 다른 하나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안동김씨 노가재공댁’과 ‘유와공 종가 유품’이라는 묵서가 적힌 것이다. 후자는 ‘정미년 이월달에 베김’이란 글이 있는데, 학자들은 글씨체로 미루어서 1907년에 필사한 책으로 추정한다. 전자의 장서각본은 국립중앙도서관본에 비해 내용이 거의 두 배에 달한다. 국립중앙도서관본의 전체 내용 중 약 85% 정도는 장서각본과 동일하다(차경희, 〈노가재공댁 「Jusikbangmun (주식방문)」과 이본(異異)의 내용 비교 분석〉,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 31(4), 2016).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주식방문》 ‘백화춘 술방문’ : 미
말
호 씨셔
로밤 담가다가 이튼날 작말
야 노코
린 물 셰 병을 풀러 덩이 읍시 쥬물너 익게 쓔어
우고 가로누록
되 진말 한 되 조흔 슐 한 보의 너허 두어다가 삼 일 만의
미 두 말 졍히 씨셔
호
우고 밋슐의 버무려 너흐되 가로누록 닷 홉 너코 물 여셧 병을 너허고
게
랴면 한 병을 둘 늣난니라 익은 후의난 날물은 붓지 말나.
김창업(金昌業),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제5권, 1713년 2월 8일 : 所釀酒, 以甕厚, 至三十二日猶不熟. 數日前, 入薊州酒二盞. 是日始有醅意, 卽加麴飰.
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 제6권, 1713년 2월 14일 : 是日, 夕出酒嘗之, 極佳. 以張遠翼嗜酒, 送不漉酒一鉢. 李惟亮朴再蕃, 亦各送器皆送之.
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 제6권, 1713년 2월 15일 : 出瓮酒分送行中, 下逮驛卒, 無不稱美.
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 제6권, 1713년 2월 16일 : 在北京發行時, 以所釀酒和糟, 貯賜壺掛鞍. 到此喫之, 其味好. 亦進伯氏.
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 제2권, 1712년 12월 12일 : 聞巿麵美, 使廚房買來. 細而紉此處麵, 皆小麥粉, 而其味殊勝於蕎麥.
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 제3권, 1712년 12월 21일 : 主人出茶果一卓, 柑橘橙丁閩薑榛子西瓜仁山査正果猪肉鷄卵凡十餘碟, 極其精美. 又出酒一壺, 其淸如水, 而色微碧. 香烈味淡, 余連飮四盃, 亦不甚醉. 然杯亦小, 一盃僅當我國半杯也.
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 제4권, 1713년 1월 1일 : 三使臣列坐於西庭, 余就坐伯氏後. (중략) 使譯官進淸茶於三使臣. 繼送駝酪茶一大壺. 使臣不肯進. 余曾知其味佳, 連啜二鍾.
발행일 : 2018. 06. 08.
저자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음식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어내는 ‘음식인문학자’.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 문화인류학과에서 〈김치의 문화인류학적 연구〉로 석사학위를, 중국 중앙민족대학교 대학원에서 〈중국 쓰촨성 량산 이족의 전통칠기 연구〉로 민족학(문화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문화예술학부 민속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 《음식전쟁 문화전쟁》, 《음식인문학》, 《식탁 위의 한국사》, 《한국인, 무엇을 먹고 살았나》, 《한국인은 왜 이렇게 먹을까?》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중국음식문화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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