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에서 60년 넘게 개성 넘치는 연기를 펼쳤으며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 운동의 얼굴 격이었던 배우 진 해크먼(95)이 지난 26일(현지시간) 오후 1시 45분 부인이며 클래식 피아니스트인 벳시 아라카와(64)과 함께 뉴멕시코주 산타페의 선셋 트레일의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고 외신들이 보도했다. 함께 지내던 반려견도 부부와 운명을 함께 했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현지 당국은 폭행이나 외부 침입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해크먼은 액션, 범죄, 스릴러, 역사물, 코미디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8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해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소화해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
1930년 캘리포니아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0년대 해병대에서 복무했다. 열여섯 살이었는데 나이를 속여 군에 입대했다. 4년 반 동안 중국, 하와이 섬, 일본 등을 돌며 근무하다 1951년 전역한 뒤 뉴욕에서 일리노이 대학에서 저널리즘과 텔레비전 프로덕션을 전공하고 서른 무렵 고향으로 돌아가 연기자의 꿈을 실현하겠다고 마음 먹어 1960년대 연기를 시작했다.
그 뒤 할리우드 대작 영화에 주연급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해크먼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신세대 감독들이 연출한 새로운 영화를 일컫는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를 대표하는 얼굴 중 한 명이었다. 1967년 아서 펜 감독이 연출한 범죄·로드무비 '보니와 클라이드'(국내에선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로 개봉)에서 워런 비티, 페이 더너웨이와 함께 출연해 오스카(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로 지명됐다.
이 영화는 같은 시기에 개봉한 '졸업'과 함께 클래식 할리우드 영화의 막을 내리고 새 영화의 시작을 알린 작품으로 꼽힌다. 해크먼은 '졸업'의 주인공인 더스틴 호프먼과는 캘리포니아 파사데나 연극학교에서 만나 무명 시절을 함께 견뎌낸 친구 사이였다.
해크먼은 1971년 개봉한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의 '프렌치 커넥션'에서 지미 뽀빠이 도일 역할로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1992년작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 리틀 빌 다게트 역할로 오스카 남우조연상을 받는 등 연기력을 널리 인정받았다.
주요 출연작으로는 '슈퍼맨' 시리즈, '노웨이 아웃', '미시시피 버닝', '크림슨 타이드',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로열 타넨바움' 등이 있다.
고인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컨버세이션'에도 출연했다. 코폴라 감독은 27일 인스타그램에 "위대한 배우"였다며 "그가 떠남을 추모하며 그의 존재감과 기여를 축하한다"고 애도했다. 스타트렉 배우 조지 타케이는 엑스(X)에다 "우리는 스크린의 진정한 거인 중 한 명을 잃었다. 진 해크먼은 누구라도 연기할 수 있었으며, 여러분은 그 뒤의 인생을 통째로 느낄 수 있었다"고 적었다. 나아가 "그는 모두가 될 수 있었으며, 으뜸 가는 존재감은 장삼이사가 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얼마나 힘에 넘치는 배우였던가. 그가 그리울 것이지만 그의 작업은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고인은 오스카 두 차례 수상에다 두 차례 영국아카데미상과 네 차례 골든글로브, 한 차례 스크린 배우조합상을 수상했다. 고인의 메이저 유작은 '웰컴 프레지던트'(Welcome to Mooseport, 2004)의 먼로 콜 역할이었는데 그 뒤 할리우드를 떠나 뉴멕시코주에 머무르며 조용히 말년을 즐겨왔다.
고인의 첫 번째 아내는 페이 말티스로 함께 30년을 지내다 1986년 이혼하기 전까지 세 자녀를 길렀다. 말년에 그는 무려 33살 연하의 아내 벳시를 받아들였는데 그녀는 늘 대중 앞에 나서지 않다가 2003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세실 B 드미랑을 수상했을 때 함께 모습을 드러내 큰 관심을 모았다.
2008년 고인은 로이터 통신 인터뷰를 통해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털어놓으며 " 지난 몇 년 동안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었다. 정말 멋진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더 이상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아울러 자신은 빅 스크린으로부터 주의를 딴 데로 돌리고 소설을 쓰는 데 더 조용하고 차분하게 하려고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고인은 한때 "난 배우로서 훈련받은 것이지, 스타로 훈련한 것은 아니다. 난 역할을 연기하도록 훈련 받았지, 명성과 에이전트들과 변호사들과 언론과 거래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인터뷰 마지막 말이다. "스크린의 내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많은 감정 노동을 강요한다. 스스로 생각하면, 난 꽤 젊다는 느낌을 갖는다. 그리고 난 홀쭉한 턱과 피로한 눈, 그리고 벗겨진 머리칼 등등을 가진 이 늙은 남자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