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동 기행
무슨 연유에서 만리재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라는 양반이 살았기에
비롯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치 않다. 아무튼
서울역 뒤 잊혀진 곳 아니 숨겨진 곳. 아니 숨겨졌었던 곳.
이 동네의 터줏대감은 배문학교인데 주소가 서계동으로
되어 있으니 사실상 이곳은 만리동이 아니다. 만리시장도
서계동에 있다. 배문학교 뒤 언덕 마을도 아마 청파동이지
만리동은 아닐 것이다. 만리동은 만리재길 건너편 중림동과
함께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곳을 여전히 만리동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마치 발전이라는 것을 거부해야만 하기라도 하듯이.
학교 정문 옆 문방구와 만두집과 떡볶이집. 1960년대
70년대 우리들 학교 다닐 때와 똑같은 풍경.
신앙촌 가게는 정말 오랜만에 본다. 어린 시절 아버지 따라
소사쯤이었던가 당시 최고로 쳐주던 신앙촌 표 나일롱 양말을
사러 갔던 기억이 난다. 신앙촌 캬라멜도 있었지 아마.
성우 이발소. 곧 무너져버리기라도 할 만큼 너무 낡았기에 서울
미래유산으로까지 등재되었다. 주인 할아버지가 여전히 영업을
하고 계시나 보다. 언제 이발하러 한번 가봐야겠다.
깍을 머리도 남아 있지 않지만.
이 낡은 동네에 참 이상한 것이 미장원이 많네. 이곳 인구도
없을 뿐 아니라, 뽀글 파마머리의 쭈글쭈글 동네 할머니들은
물론이요 아줌마들도 매일 머리 만져야 할 만큼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데도. 모두들 온종일 미장원에서
수다를 떠는 것이 유일한 낙이기 때문일까.
골목마다 집집마다 조금의 공터가 있으면 화분을 놓고 있다.
꽃이 없으면 삭막하였을까. 아니지. 오아시스이기 때문에 꽃이
피어난 것이 아니라 꽃을 피웠기에 오아시스가 된 것이다.
이 도시의 사막에서도.
시베리아의 가장 혹독한 강제노동 수용소에서나 겨우
만날 수 있을까 이처럼 황량한 소비에트식 건물은 서울에서
처음 본다. 그래도 언젠가 어디선가 마치 내가 살았었던 듯
여겨지는 곳. 아니면 꿈 속에서라도. 마치 잃어버린 길
끝에서 고향 땅을 우연히 다시 밟게 된 것처럼.
런던의 워털루역 뒷편의 어느 버려진 건물 같다.
그렇지. 여기도 서울역 뒷편.
도시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다.
봉제공장.이 건물안에는 우리의 누님들이 여전히 미싱과
힘겨운 삶을 겨루고 있다. 1970년대 열다섯 살 구로공단의
그 어렸던 여공들이 이제 예순다섯 노년이 되어서도.
수많은 작은 봉제공장 주변에 그보다 더 많은
작은 하청업체들이 공생하고 있다.
이곳에 목욕탕도 있었나 보다.
만리시장. 현대의 경제논리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는 존재. 그러나 경제가 삶이라면,
삶 자체를 과연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까.
백반 오천 원. 언제 와서 한번 먹어 봐야겠다.
촌스러운 신발가게.
해방촌의 신흥시장처럼 이곳 만리시장에도 젊은이들이 하나씩
둘씩 들어와서 트렌디한 카페와 인테리어 부틱을 열기 시작하고
있다. 낡은 것 속의 새 것. 빈티지와 테크노.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어울림. 다만, 오래된 것들이 바로 잊혀지지 않기만을 바라본다.
언젠가는 잊혀져야 하겠지만.
저 과일가게에서 저 생선가게에서 도대체 누가 과일과 생선을
사주는 것일까. 가게 주인조차도 장사를 하려하지 않는 듯하다.
그냥 언제나 그랬듯이 가게에 앉아 있을 뿐. 파리 날리며.
촌스러운 구멍가게와 진짜 촌스러운 옷가게. 너무 촌스럽기에
없던 정도 다시 든다. 어린 시절 할머니 사시던 시골 마을 가게들
처럼. 아! 이제 여름이고 방학인데 내가 갈 고향은 없구나.
나는 언제나 좁은 골목과 골목이 멈춘 곳 끝의 계단을 좋아했다.
광장은 전장이었고, 총알이 어디에서 날아올지도 모를 광장에
나가 싸워야만 하는 것이 피곤했다.
동네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예쁜 카페도 들어섰다.
청파동이라면 숙명여대의 뒷편이니 학생들이 여기까지
올라오기도 하겠지. 루미에르의 악센트 악상 그라브는
붙였으면서 카페의 악상 에귀는 왜 붙이지 않았을까.
숙명여대 불문과에 전화 좀 걸어야 할까 보다.
예전의 부촌이어서 그런지 큰 저택들도 간간이 보인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 곳이라고 경찰서 경고문까지 붙어 있네.
화분 천지 꽃 천지. 버려졌기에 예쁜 것인지
예쁘기에 버려진 것인지.
다가구 주택의 계단들. 나는 네델란드 판화가 에셔의
작품을 좋아한다.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이며 어디가
밖이고 어디가 안인지도 모르게 얽히고 얽힌 공간을.
위상수학의 우주를.
효창공원 뒤. 오늘 늦은 점심은 이 집에서 먹어야겠다.
손으로 뽑은 짜장면이 단돈 오천 원.
젊은시절 쿵푸 영화의 악역 엑스트라를 닮은 동갑내기 사장님.
짜장면 철가방 배달부터 시작하여 이 자리에서만 무려 삼십팔
년째 중국집을 자랑스레 그러나 겸손하고 검소하게 하고 있다.
혼자서 점심시간만 장사하고 짜장면 한 가지만 딱 판다. 오후
꽤 늦었음에도 다행히 문을 열어 놓았고 짜장면까지 뽑아주니
감사하다. 덕택에 어느 중국계 비행기 회사의 남들 부러워하는
자리에서 일한다는 딸내미 자랑을 반찬 삼아 들었다.
하지만 여기 공원에도 하릴없는 노인들이 함께 모여 인생의
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마지막 여행도 함께라면 즐거울까.
난 혼자 떠나고 싶다. 가족도 친구도 추억도 아무도 없는 곳으로.
완전한 허무와 망각 속으로.
이곳 만리동의 추억처럼 개발의 이름 아래 뭍혀져 잊혀져야지.
숙명여대 뒤 로타리. 예전 아름다왔던 여름날들처럼
분수까지 뿜어주고 있다. 그러나 나는 갈 방향을 잡지
못한 채 그냥 몇 바퀴째 돌고 또 돈다. 다행히 로타리는
또 모든 돌아가는 것들은 시계의 반대방향으로 돌아간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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