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칼뱅의 생애와 사상]
칼뱅과 현대 서구문화의 형성(3)
칼뱅과 자연과학
현대 자연과학의 기원은 복잡하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다. 예를 들어, 루이스 퓨어(Lewis S. Feuer)는 현대 과학이 '쾌락주의와 자유의지주의 정신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열렬히 주장했다." 그러나 한가지 통제 요인으로 자연과학의 놀라운 발전을 설명하려는 이론들은 야심만 크고 설득력이 없다. 발전 과정에 많은 요인이 이바지한게 분명하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중 하나는 종교적 요인이고 이는 장 칼뱅과 관련이 있다.
한 세기 넘게 이어진 대규모 사회학 연구가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기독교 내 프로테스탄트 전통과 로마 가톨릭 전통은 우수한 자연과학자를 배출하는 능력에 일관된 차이를 보였다. 다양한 국가에서 나타나는 이 차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프로테스탄트가 로마 가톨릭보다 자연과학을 육성하는 능력이 훨씬 뛰어나다. 알퐁스 드 캉돌(Alphonse de Candolle) 이 1006년부터 1883년까지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 소속된 외국인 회원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가 로마 가톨릭교도보다 훨씬 많았다. 알퐁스 드 킹돌 인구 비율을 근거로 회원의 60퍼센트가 로마 가톨릭이고 10퍼센트가 프로테스탄트일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실제 조사 결과 18.2퍼센트만 로마 가톨릭이고, 81.8퍼센트는 프로테스탄트였다. 16세기 네덜란드 남부에서 칼뱅파는 소수에 불과했는데, 이 지역 자연과학자 대다수가 칼뱅파였다. 런던 왕립학회 초창기 회원 중에는 청교도가 가장 많았다. 연이은 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16세기와 17세기 동안 물리학과 생물학을 좌지우지한 것도 칼뱅파였다. 어떤 식으로든 설명이 필요할 만큼 놀라운 결과다.
칼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자연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적극적으로 장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연구의 발전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을 제거했다. 첫번째 공헌은 창조의 질서를 강조한 것과 특별한 관련이 있다. 물질계와 인체는 하나님의 지혜와 성품을 증언한다.
하나님은 누구도 복을 얻는 일에서 배제당하지 않게 하시고자 이미 앞에서 말한 종교의 씨앗을 우리 마음에 심어 놓으셨을 뿐 아니라, 우주구조 전체에 자신을 드러내셨고, 또한 날마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기뻐하셨다. 그래서 사람은 눈을 뜰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연유로 히브리서 기자는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고 멋지게 묘사했다. 곧 우주의 세련된 구조가 일종의 거울이 되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그 속에서 보게 하는 것이다. ..… 하늘과 땅에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선포하는 무수한 증거가 있다. 천문학이나 의학이나 그 밖의 온갖 자연과학을 통해 자세히 탐구해야만 알 수 있는 조금 심오한 증거뿐 아니라,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보기만 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증거가 무수히 많아서 눈을 뜰 때마다 그것들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1.v.1-2).
그래서 칼뱅은 천문학과 의학을 칭찬한다. 사실 칼뱅은 이 두 학문에 살짝 질투가 난다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천문학과 의학은 자연 세계를 더 깊이 탐구할 수 있고, 그리하여 창조 세계의 질서 정연함과 그것을 지으신 창조주의 지혜를 밝힐 증거를 더 많이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칼뱅이 코페르니쿠스를 혹평했다는 생각은 근거가 전혀 없는 미신에 불과하다.
칼뱅은 자연과학을 창조 세계에 깃든 하나님의 지혜로운 손을 포착하고,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이 붙들고 계신 창조세계에 대한 존중심을 강화할 수단으로 여겼다. 따라서 칼뱅이 지극히 종교적인 이유로 자연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도록 사람들을 자극하고 또 이러한 연구를 정당화해 주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저지대 국가에서 특별히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지역 식물학자들과 물리학자들에게 특히 주목을 받았던 칼뱅파 신앙고백서인 《네덜란드 신앙고백confessio Belgica》(1561)은 자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자연은 "크고 작은 창조물을 모두 담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책으로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글자로서 지금 우리 눈앞에 있다.” 따라서 창조 세계를 자세히 연구하면 하나님을 알아챌 수 있다.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자연이 '하나님의 제단'이 되는 방식, '망망대해와 무시무시한 숲'이 사실적으로 하나님을 보여 주는 방식에 관심을 기울였다" 17세기 왕립학회에는 이와 비슷한 견해가 반영된 기풍이 널리 퍼져 있었다." 영국 신학자 리처드 밴틀리(Richard Bentley)는 1687년에 출간된 아이작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ce Naturalis Pri ncipia Matbematica>를 토대로 1692년에 강의를 진행했다. 이 책에서 뉴턴은 자신이 정립한 우주의 규칙성을 설계의 증거로 해석한다. 뉴턴은 강의를 준비하던 벤틀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우리가 속한 우주에 관한 논문을 쓸 때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이 고려할 만한 원리들에 유의했습니다. 이 책이 그 목적에 도움이 된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없을 겁니다." 이 편지에는 우주를 가리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는 극장'이라고 했던 칼뱅의 말이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다. 이 극장에서 인간은 안목이 있는 관객이다(I.vi.2).
둘째, 칼뱅은 자연과학의 발전을 방해하는 주된 장애물을 제거했다. 그 장애물은 바로 성경 문자주의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는 해석법에서 과학 관측과 과학 이론을 해방하는 작업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첫째로, 칼뱅은 성경의 지당한 주제는 이 세상의 구조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된 하나님의 자기 계시와 구속이라고 선언했다. 둘째로, 칼뱅은 성서 언어의 적응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제 이 둘을 각각 살펴보도록 하자.
칼뱅은 (완전히 일관성 있게 이 점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주로 관심이 있다고 말한다. 성경을 천문학이나 지리학, 생물학 교과서처럼 취급해서는 안 된다. 칼뱅은 피에르 올리베탕이 1534년에 번역한 신약성경에 서문을 썼는데, 이 원칙을 아주 명료하게 밝힌 한 단락을 1543 년판 서문에 추가했다. “성경 전체의 요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이 지식이 암시하는 모든 것)를 알게 된 뒤에는 거기에서 멈추고, 더 많은 것을 배우길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안경을 제공한다(I.v.8, I.vi.1). 이 안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자 자기표현인 이 세계를 볼 수 있다. 성경은 천문학과 의학 정보의 확실한 보고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을뿐더러, 그럴 의도도 전혀 없다. 따라서 자연과학은 신학적 제약에서 효과적으로 벗어난다.
1539년 6월 4일, 루터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공전한다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이론은 1543년에 출간되었다)을 신랄하게 비평했다. “성경은 그 반대가 옳다고 말하지 않는가?" 루터는 그렇게 지동설을 퉁명스럽게 일축했다. 이 독일 종교개혁가는 성경 문자주의를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마지막 저녁 식사에서 예수께서 빵을 떼며 하신 유명한 말씀인 "이것은 내 몸이다”(마26:26)의 의미를 놓고 츠빙글리와 논쟁할 때 루터는 '이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동일하다'라는 뜻으로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이런 태도를 종교와 언어를 잘 모르는 어리석은 태도로 여겼다. 언어가 다양한 차원에서 작용한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해서 하는 말로 간주했다. 츠빙글리에 따르면, '이다'는 '의미한다'를 뜻한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칼뱅은 '적응'이라는 정교한 이론을 전개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그림 같은 것으로 하나님을 상상하길 좋아하는 우리의 타고난 기호와 이해력에 자신을 맞추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으시고 인간의 능력에 맞는 형태로 보여 주신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지적 능력에 딱 맞게 팔, 입 등등이 있는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이것들은 생생하고 기억하기 쉬운 은유일 뿐이다. 하나님은 계시가 원래 겨냥했던 사람들의 능력과 상황에 적합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따라서 창조와 타락(창 1-3장)에 관한 성경의 이야기는 비교적 평범하고 천진한 사람들의 능력과 한계에 맞춰져 있다." 문자 그대로 표현된 실제 상황으로 받아들이라고 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사상은 특히 17세기 영국 과학 이론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에드워드 라이트(Edward Wright)는 성경 문자주의를 지지"하는 이들을 상대로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했다. 첫째, 성경은 물리학에 관심이 없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방식은 "유모가 어린아이들에게 하듯이 보통 사람들의 이해력과 말투에 맞춰져 있다. 이 두 논거는 모두 칼뱅에게서 나왔다.
19세기 이후 서구 문화에서 종교와 과학은 목숨을 건 전투에 말려든 것 같다. 어떤 저술가들은 칼뱅이 서구 기독교에 과도하게 영향을 끼친 탓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라고 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사태는 후기 추종자들이 칼뱅의 영향을 너무 적게 받은 탓이라고 말하는 게 정확하다. 이른바 진화론의 비성경적 특성을 중심으로 진행된 1925년 스콥스 재판과학 교사 존 스콥스가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게 한 테네시주 법률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쳤다가 재판에 넘겨져 벌금형을 받았다―옮긴이)은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에 관한 설명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증명했다. 그러나 칼뱅은 '엿새 동안의 창조'라는 관념조차도 하나님이 인간의 인지 능력에 맞춰서 설명하신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의 사실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보았다. 만약 칼뱅이 동시대 추종자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쳤더라면, 현대 서구 문화의 중심축 중 하나인 '종교와 과학의 갈등'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칼뱅이 후기 추종자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쳤더라면, 진화론 논쟁은 전혀 다른 과정을 밟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어났을 법한 일을 추측하는 것에 불과하고, 우리의 관심사는 이미 일어난 일을 분석하는 것이다. 16세기 이후 자연과학이 빠르게 발전하는 과정에 종교적 자극이 있었고, 부분적으로나마 장 칼뱅의 사상과 영향력이 그런 자극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