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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명진스님팬클럽 원문보기 글쓴이: 金理史
팔순노모 이계안 여사의 절규 들리시나요 | ||||||||||||||||||||||||
[부처님오신날 특집①] 명진 스님, 안거 전 마지막 만난 정봉주 모친 정봉주 생각에 매일 108배 “MB 순악질”...아들은 노모 걱정 옥중눈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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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세 노모가 얽은 손으로 끓여준 김치찌개는 필시 아들 생각이 듬뿍 담겨있다는 것을 짐작하고도 남겠다.
아들 면회를 가기 전 날부터 심장이 두근거려 늘 몸살을 앓았다. 너무나 보고 싶어 다리가 후들거리고 안방서 몰래 눈물을 훔치다 덜컥 몸살이 나버린다. “어떻게 키운 새낀데” 좁은 감방 안에 가둬놓고 잠이 올 리 없는 어머니다. 홧병이다. 108배를 하고 낮엔 접영으로 거뜬히 수영장 10바퀴를 돌 때만해도 노모는 좋아 보였다. 오후로 갈수록 더 심장이 벌렁거렸다. 해질녘 이후부터 아침까지 하얗게 세고 나니 몸살기가 심해졌다. 오전 8시 형 봉건 씨가 급히 근처의 병원으로 모셔가 2시간 동안 링거를 맞히고 부랴부랴 홍성교도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2시. 당초 함께 면회하기로 한 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 일행이 약속보다 1시간 늦었다. 아들과의 상봉시간을 더 주려는 배려였으리라. 덕분에 어머니 이계안 여사는 무려 1시간 반을 아들과 손을 잡고 있었다. 할 얘기가 많았지만 막상 할 말이 없었던 노모다. 면회를 다녀와 이 여사는 다시 자리에 눕는다. 매일 108배를 하고, 수영장 10바퀴를 가장 체력소모가 많은 접영으로 도는 ‘강철’이지만 잉어의 몸이 된 아들 걱정 앞에선 나약한 85세 노인네다.
그런 이 여사를 만난 것은 5월 17일. 명진 스님이 부처님오신날 직후 하안거에 들면 언제 나올지 모른다며 인사차 노원구 집을 찾았다. 면회를 다녀와 앓고 있던 몸살에도 점심시간에 맞춰오면 손수 김치찌개로 공양을 올리겠다고 이 여사가 밝혔단다. ‘나꼼수’의 또 다른 멤버 김용민도 미리 와 형 봉건씨와 얘기 중이었다.
김용민은 “벙커를 새로 차렸다. 꼭 하면 와 달라”고 명진 스님을 초청했다. 스님은 “벙커 같은 곳은 안 간다. 신문도 안보냐. 난 룸살롱만 간다”고 했다. 아픈 대답에 이 여사도 덩달아 웃었다. 스님은 “12년 전의 실수로 고개를 들 수 없고, 김 교수(김용민) 당신도 8년 전 막말로... 우린 동병상련이다”하고선 말을 아꼈다. 김용민은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 조사결과, 강북의 소망교회 앞에서는 ‘MB 잘한다’가 80%, 강남의 봉은사(명진 스님 주지 당시) 앞에서는 ‘MB 못한다’가 70%였다. 한 사람이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며 명진 스님을 되레 위로했다. 명진 스님은 룸살롱 파문이 다시 제기되는 것을 빗대 “다이아몬드는 똥물에 빠져도 건져내 물로 씻으면 된다”며 자신을 다이아몬드라고 ‘깔때기’를 들이댔다. 정봉주 전 민주당 국회의원의 모친인 이 여사는 신실한 불자다. 거울 냉장고 장롱...세간살이엔 모조리 ‘관세음보살’이라고 종이에 써 붙여 놨다. 거실에만도 두 곳에 반야심경을 걸어뒀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나무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집안 곳곳 시선이 가는 곳마다 반야심경을 왼다고 했다. 노모는 명진 스님에게 “강남 봉은사 빚을 다 갚고 나왔다면서요”라고 물었다. 스님은 “예. 그러고도 30억 남겨 놓고 나왔습니다”라고 했다. “법문도 너무 잘한다고 들었다”는 이 여사의 칭찬에 명진 스님은 자화자찬이다. “실은 저는 경전을 제대로 공부한 적도 없고, 한자도 잘 모른다. 월정사 시절 한 신도가 대웅전 현판을 물었다. 탄허 스님이 쓴 초서인데 내가 알 턱이 없지. 대적광전을 대불광전이라고 일러줬다. 잠시 후 신도가 다시 와서 종무소에 물었더니 대적광전이라고 하더라며 핀잔을 줬다. 나는 '부처님의 마음이 본래 고요하다. 불(佛)이 곧 적(寂)이다. 실은 대적광전이 맞다'고 둘러댔다. 이런 내가 봉은사 주지가 돼 법문할 능력이 있었겠나. 내 피나는 삶에 대해 매주 일요법회에서 얘기했다. 6세에 별세한 어머니, 꽃다운 청춘에 죽은 동생, 늘 싸움질한 얘기들을 순차적으로 들려주니 신도들이 주말드라마 같다고 했다. 그게 내 밑천이다. 150명이던 일요법회 참가자가 1,500~2,000명으로 늘었다. 그 법문을 묶어 출판한 것이 <스님은 사춘기>다. 매일 1천배씩 천일을 하면서 신도가 회계 행정에 참여하도록 했다. MB 욕만 안 했으면 지금쯤 카펫 깔아놓고 지구 한 바퀴 돌 수도 있었다” 이 여사는 “스님은 참 직설적이야”라고 말하곤 호탕하게 웃었다.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 영결식에 참석한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긍낙왕생하십시오‘라고 쓴 것을 두고 몇차례 희롱했는데’라고 취재진이 묻자 명진 스님은 “난 한문은 몰라도 한글은 알지 않느냐”라며 한 수 위를 자랑했다. 김용민은 “그래서 스님은 국민스님이다”며 너스레를 떨었고 명진 스님은 “지금은 집도 절도 없는 ‘국사’다.”라고 응수했다. “지금 목사들은 예수시대 가장 싫어했던 바리세인들”이라고 김용민이 꼬집자 스님은 “일부 스님들도 똑 같다”고 맞장구다.
매일 108배로 ‘출옥’을 기원하는 어머니에게 봉주는 어떤 아들일까. “고3때 학력고사를 앞두고 체력장을 보는데, 원체 달리기를 잘하던 녀석인데 사단이 났지. 자기는 잘 달려서 만점을 받아놓고 장애인 친구를 대신해 또 달린 거지. 학교에서 뒤늦게 알고 야단을 치니 선생님들을 다 패버린거야. 정학을 당해 경희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 이번엔 경희대 학생들과 싸움이 붙었어. 결국 누나와 형이 가서 자퇴서를 쓴 거지.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 운동으로 금메달을 땄어. 그랬더니 거기 반장이 시비를 걸어. 굴러온 놈이 박힌 돌 빼니 미운게지. 반장 턱을 때려 그 때 돈으로 50만원을 물어줬지. 우여곡절 끝에 재수해 한국외대에 진학하자마자 경찰공무원인 아버지가 ROTC에 강제로 집어넣었지. 사람 되라고. 1년 6개월 정도 장교교육 받으면서 잘 견디나 했더니 행방불명이 된 거여. 6개월만에 나타난 게, 세상에, 외대 옥상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오면서 유인물을 뿌렸어.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았지. 식구들은 3일 밤낮으로 찾으러 다닌 끝에 청량리경찰서 있다는 것을 알았지. 거기서 또 ‘1식3찬인데 규정대로 안 준다’고 난동을 부렸어. 애들 아버지는 봉주가 성동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면회를 못 가게 하려고 가족들 신분증을 다 빼앗아 버렸지. 나도 겨우 한 번 면회한 게 다야.“ 이 여사는 “요즘은 감옥에서 책도 많이 읽고 기타도 배운다”며 안심하더니 금새 “다른 형제들 10년 속 썩일 걸 봉주는 하루만에 한 거여”라고 애증이 섞인 말로 아들 생각에 잠겼다.
정 전의원의 옥중편지는 늘 사모곡이다. “다른 모든 것은 제가 다 당당하게 대처해도, 팔순노모이신 어머니 생각만하면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어머니께서도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잠도 못 이루시다 벽운사와 주지 스님께 크게 의지하면서 마음의 안정을 많이 찾으신 것 같아, 스님께 너무 감사한 마음뿐입니다....스님, 어머니 잘 부탁합니다.(5.14 卍雲(정봉주) 합장)” 명진 스님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가장 많은 부분을 어머니 얘기에 늘 할애하곤 했다. “깊은 슬픔에 젖어 계실 때 제 어머니를 큰 사랑으로 위로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있지 못할 듯합니다.(4.30. 행복한 ‘국민혁명정부’의 문지기 정봉주 합장). <스님은 사춘기> 책 다 읽었습니다. 첫 부분의 어머니와 동생의 내용을 보고는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어요. 가뜩이나 가족들의 정이 사무치고 그리운데...(3. 19 정봉주 합장)” 그의 편지는 팔순 노모 못지않은 불교적 사색(佛心)도 녹아 있다. “스님! 공부하고 또 공부하겠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든 국가정책에 대한 공부든 수행자의 자세로 정진하고 또 정진하겠습니다... 고통도 제 스스로 고통이 되면 행복이듯이, 더위도 제 스스로 불덩이가 되면 즐거운 한계절이 될 듯합니다. (공포의 여름감옥을)두려움 없이 잘 수용하겠습니다.” “이 곳 교도소에 갇힌 것이 5개월에 접어들고 이제 5개월도 점차 반이 넘어가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아무도 원망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원망이나 미련이나 울분이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이곳에 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제 전생, 이생의 업의 결과로 업풍이 이곳까지 몰고 왔다는 생각으로, 제 업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곳 생활로 인해 제 업장이 다 소멸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더 기쁘고 영광된 일이겠습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하루의 생활을 받아들이면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 108배를 통해 참회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봉도사 덕에 점심은 잘 먹었지만 노모의 속마음을 생각하면 편치 않았다. 내가 얻어먹을 점심이 아닌 것 같아서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지 되레 노모는 3병의 꿀을 담아 건넸다. 옥상에서 직접 딴 거라 설탕을 넣지 않았다면서. 명진 스님은 “지옥에 있어도 자기 마음 편하면 극락이요, 극락에서도 마음이 가시방석이면 지옥입니다”며 “불자는 이런 일로 상심하면 안 됩니다. 마음을 굳건히 하세요. 제가 봉암사 하안거 들어가 봉도사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라고 상심한 노모를 달랬다. “면회가 끝나고 교도관이 수갑 찬 아들 등을 떼밀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것은, 에미로선 지옥이지. 암. 눈 뜨고는 못 봐. MB는 정말이지 순악질이야” 힘이 들어간 채 낮게 속삭이던 노모의 목소리가 절을 빠져나와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는 내내 귓전에 맴돌았다. 이 여사는 다시 안방에 드러누웠을 것 같다. |
첫댓글 ㅡ_ㅜ 장애인친구를 위해 또 달린 고딩 봉주...
어머님을 생각하면 또 맘이 아픕니다.
봉도사님 생각을 하면 더 아프구요 .;;;;;;;
어머님..봉도사님 두 분 모두 항상 건강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가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