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 시기 시즈오카현의 온천 휴양지 아타미에 있는 '아타미 매원'에서는 매화축제가 열린다. 수령 100년이 넘은 나무들이 즐비한 아타미 매원에서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매화를 보며 걷다 보면 정겨운 장독대가 보인다. 장독대 안쪽에는 낮은 담장과 한국식 기와 등으로 장식된 '한국정원'이 있다. 한국 정원은 2000년 9월 김대중 대통령과 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가 아타미에서 정상회담을 한 것을 계기로 매원 안에 조성된 것으로,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여름에 문을 열었다. 봄날 매원 안의 한국 정원을 보면 한일관계의 봄이 떠오른다.
한국정원 개원 4년 전인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불리는 한일 공동선언-21세기를 위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발표했다. 당시 일본은 "과거 한때 한국 국민에게 식민지 지배로 인해 많은 손해와 고통을 끼쳤다는 역사적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이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고 밝혔고, 한국은 일본의 "역사인식 표명을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고 이를 평가하는 동시에 양국이 과거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화해와 선린우호협력에 기초한 미래지향적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서로 노력하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답했다. 이 선언은 한일관계의 새 장을 연 선언으로 평가된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한국 대법원의 강제동원 피해 배상 판결을 놓고 한일이 팽팽히 맞섰던 2018년 다시 주목을 받았다. 김대중-오부치 선언 30주년을 계기로 악화된 한일관계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더욱 발전시킬 새로운 선언을 만들기 위해 논의하자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런데 이런 논의에는 그다지 큰 진전이 없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역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이에 대한 한국의 평가를 기반으로 했지만 강제동원 피해 배상 문제로 대립하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기반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한일 외교관계의 개선은 윤석열 정권의 개막과 함께 찾아왔다. 2022년 취임한 윤 대통령은 문재인 정권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기로 마음먹은 듯 한일 외교관계를 적극 개선하기 위해 달리기 시작했다. 한일 외교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는 데는 대부분 공감했지만 문제는 윤 정권이 한국의 잇단 양보로 관계 개선을 밀어붙였다는 데 있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한 축인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일본의 반성은 빠졌고 미래지향적 관계 발전이라는 말이 되풀이됐다.
2023년 3월 윤 정권이 일본 가해기업 대신 한국재단이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에게 판결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는 방식의 제3자 변제안을 발표하자 일본 정부는 반색했다. 윤 정권은 일본의 성의 있는 호응을 바란다고 했지만 그런 호응 없이 외교관계 개선이 진행됐다. 대규모 조선인 강제동원이 이뤄진 사도광산을 놓고 일본이 강제노역을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윤 정권은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에 찬성했다. 일본 언론은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윤 대통령의 용기를 칭찬했지만 윤 정권의 일방적 양보에 기초한 한일 외교관계 개선의 토대는 약했다.
올해는 광복 80년과 한일 국교정상화 60년을 맞는 해로 한일관계와 관련한 새로운 선언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이 다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패전 80년을 맞는 8월 15일 발표할 담화는 과거보다 후퇴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크다. 일본 정부는 전후 50년인 1995년 일제의 식민지배와 주변국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명시한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다. 역대 일본 정부는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해 왔지만 전후 70년을 맞은 2015년 아베 신조 총리가 발표한 아베 담화에서는 그 전쟁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리의 자식과 손자, 그리고 그 다음 세대의 자녀들에게 사죄를 계속하는 숙명을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며 실질적으로 후퇴시켰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도 지난해 4월 미 의회 연설에서 역대 일본 총리와는 달리 과거의 반성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19일 내란주모 혐의로 구속됐다. 윤 대통령이 밀어붙인 바탕이 약한 대일 정책도 곧 갈림길에 설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