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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들의 찬양
눅 2:8-21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21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하나님은 가이사 아구스도나 구레뇨 같은 권력자들이 아니라 목자들과 같은 사람들을 통해 당신 아들의 출생을 축하하셨습니다. 예수의 복음이 소외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전파될 것을 암시합니다.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8-12) 누가복음에서 세 번째로 천사가 등장합니다. 천사는 당시 소외되고 천대받는 계층의 사람들 중 하나였던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기쁨의 소식 복음을 들을 대상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온 세상입니다. 복음을 전하며 천사는 베들레헴이란 지명 대신 다윗의 동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는 구원의 약속인 다윗의 자손이며, 예수의 탄생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예언이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삼하 7:12-16).
하나님께 영광이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13-14) 천사와 수많은 천군이 찬양을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군대인 천군이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양대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하는 찬양은 구원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하는 누가복음 초반부에 나오는 아름다운 찬송 가운데 하나입니다(1:47, 68, 2:11, 30, 35). “지극히 높은 곳과 땅, 하나님과 사람들, 영광과 평화”가 서로 대구를 이루는 이 찬송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다룹니다. 예수의 탄생은 하늘과 땅에 두루 좋은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루어진 일을 보자(15-21)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지체하지 않고 현장을 목격하러 갑니다. 예수의 탄생을 확인하려는 목자들의 지체 없는 결단과 행동이 돋보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곧바로 반응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들에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확인한 목자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갑니다.
예수라 하니(21) 아기 예수는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은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 아래에 나신 것을 의미합니다(갈 4:4). 예수의 부모는 아기의 이름을 수태 전 천사가 일러준 대로 여호와는 구원이란 뜻을 지닌 예수로 짓습니다(눅 1:31; 마 1:21).
적용: 당신은 지금 하나님의 일하심에 곧바로 반응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까?
‘온전하다’라는 말은 끝날까지 마음에 품고 실천하라는 의미로 생애 동안 이 온전한 인내로 이겨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내 몸이 지치고 정신적으로나 심적으로 괴롭고 외부로부터의 압박으로 아플지라도 주님을 향한 소망이 있다면 인내로 이길 수 있습니다. 천국은 온전히 인내한 자들이 기쁨으로 가득찬 곳입니다. 우리의 목표인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기까지 예수의 온전한 인내를 닮아야 합니다.
< 설 교 >
하나님의 성탄선물
눅 2:7-14 / 이상호 목사
복된 성탄절을 맞이하여 서로 환영하는 순서를 갖도록 하십시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성탄아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와 자녀들 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복이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은 예수님입니다. 수많은 위인들과 종교 창시자들도 우리에게 갖가지 장밋빛 약속을 하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강조하지만 예수님과 같이 실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은 분은 없습니다. 바로 그분의 탄생이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기쁨 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 그리고 소식 중에서도 가장 좋은 소식.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오늘 이 시간 같이 은혜 받고자하는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성탄선물’입니다.
오늘은 세계 모든 사람들의 최대의 명절인 크리스마스 입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우리들보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더 들떠서 야단법석을 떠는 명절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성탄절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지구촌의 최고의 명절입니다. 가장 귀한 명절, 가장 즐거운 명절, 가장 큰 세계적인 명절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 오후 2시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축하 마구간축제 - 시낭송회를 가집니다. 모두들 참여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환영하고 축하합시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초라하게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요, 구원자, 메시야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시고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해결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죽음의 문제, 죄악의 문제, 질병의 문제, 근심과 걱정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의 길로, 참 평안의 길로, 영생의 길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서 하나님이신 분이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성탄 선물은 온 인류의 구원소식입니다.(11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의 시골동네 한 여관의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구유가 뭡니까? 동물들이 밥 먹는 밥그릇, 먹이통입니다. 구유는 깨끗하지 않습니다. 구유는 냄새가 납니다. 구유는 딱딱합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특별하지도 않은 곳입니다. 또 구유는 귀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습니다. 또 구유는 비싼 게 아닙니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 어디를 가나 구유는 다 있습니다. 아주 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구유교회가 있습니다. 옛날의 초라한 외양간의 모습을 그대로 살린 낮고 험한 장소 위에 큰 교회당을 세워 순례자의 발걸음을 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5: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예수 믿고 잘못 가는 인생의 길에 돌아서기만 하면 모두가 다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11절에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우리 예수님이 구주로 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죄인들도 오라. 가난한 사람도 오라. 돈 없는 사람도 오라. 소외된 사람도 오라. 멸시받는 사람도 오라. 천대받는 사람도 오라. 병든 사람도 오라. 몸이 불편한 사람도 오라.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건강,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2.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10, 14절)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소식이 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종말이 있고, 천문학자들은 얼마 후에는 태양과 지구가 소멸될 시기가 올 것이라고 공언합니다. 게다가 참으로 죄악이 관영하고 질병이 만연한 이 세상입니다. 한 보험회사의 광고를 보면 6656가지의 질병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답니다. 그러면 실제 인간이 앓고 있는 질병의 가지 수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고뇌하는 문제, 풀 수 없는 숙제도 부지기수로 심각한 상태입니다. 세상의 어느 부분을 살펴보아도 소망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생로병사의 인생 여정에서 고통하고 번민하는 속절없는 인생이여! 이 모든 것이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정녕 큰 기쁨의 소식은 없습니까?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크고 좋은 소식일 것입니다. 주택복권에 당첨되었다면 크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졌다면 크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생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풀 수 없기 때문에 인간보다 위대한 외부의 힘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분은 물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의 초림과 재림 소식은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요 가장 좋은 약속의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류를 긍휼히 여겨 구세주를 허락하셨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이 놀라운 구원의 약속을 기록하고 각 시대를 통해 전파하였습니다. 드디어 때가 차서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천여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의 상공에서 하늘의 천사들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예수님 탄생의 아름다운 소식을 인류에게 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신 날은 세계사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날이었습니다. 실로 그것은 너무나도 위대하여 형용하기조차 어려운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크고 놀라운 기쁨의 소식, 인류 구원의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이 성탄아침에 우리게 주셨습니다. 역사의 기원이 되어 기원전과 기원후로 가르는 대 역사적인 날이 곧 성탄절입니다. 모두 구원의 확신과 감격으로 크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3. 평화의 기쁜 선물입니다(14절)
인간은 서로 기대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은 평화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웃과의 평화가 회복되어야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다시 회복됩니다. 아니 하나님과 평화한 자는 이웃과도 평화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회복되면 인간과의 평화의 관계는 저절로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성탄을 통하여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셔서 평화를 이루셨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웃과 이웃 사이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관계를 회복시키셔서 평화를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형제와 이웃과 평화롭지 못하다면 먼저 가서 화해하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제물이 되셨습니다. 철저한 자기희생으로 우리의 화해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나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무시하고 불화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큰 잘못입니다. 먼저 가서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4.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전도하러 오셨습니다.
지난주에 마가 1:35-39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는 말씀을 봤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전도하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전도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의 필수사항입니다. 반드시 전도해야 합니다. 내 부모가, 내 자식이, 내 마누라가, 내 남편이 예수를 안 믿으면 영원히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불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영원히 고통당하는데 나만 구원받고 아름답고 좋은 천국에 간다고 좋아하며 그냥 앉아 있으면 되겠습니까?
전도해야 합니다.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전해야 합니다. 당신이 살 길은 예수 믿는 길 밖에 없다고 전해야 합니다. 남편을 위하여 아내를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친척들을 위하여 내 이웃들을 위하여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내 부모,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친구, 내 이웃에 전도의 문이 열릴 수 있도록, 전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교회에 나올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나가서 전도합시다. 전도 할 수 있습니다. 전도 하면 됩니다. 전도 해봅시다. 오후2시까지, 다음 주까지 반드시 한 명 이상씩 전도하여 이 전을 가득 채웁시다. 저와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전도! 할 수 있습니다. 전도! 하면 됩니다. 전도! 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상과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결정합니다. 하나님과 사이가 나쁘면 세상과 사람들과의 사이와 관계도 나쁩니다. 우리의 구원과 축복은 하나님과의 사이와 관계가 결정합니다.
올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는 인색하고 완악한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을 위하여 옥합을 깨고 향유를 쏟아 붓던 마리아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축하하기 위하여 먼 동방에서부터 찾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며 경배하였었던 동방박사들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아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탄선물은 온 인류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한 화해와 평화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한반도에 반드시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결단하십시다. 전도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평화의 왕,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직장과 사업과 가정과 가족,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넘치는 평화의 복을 누리며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며 간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복된 성탄절을 맞이하여 서로 환영하는 순서를 갖도록 하십시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성탄아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와 자녀들 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복이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은 예수님입니다. 수많은 위인들과 종교 창시자들도 우리에게 갖가지 장밋빛 약속을 하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강조하지만 예수님과 같이 실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은 분은 없습니다. 바로 그분의 탄생이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기쁨 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 그리고 소식 중에서도 가장 좋은 소식.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목자들의 이야기
누가복음 2:8-19 / 김태환 목사
오늘은 크리스마스 예배입니다.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팬데믹 상황에서 맞는 크리스마스 예배입니다. 벌써 우리의 의식구조와 일상생활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그것이 ‘new normal’이 되고 있는 때에,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성탄예배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말씀이 신명기 8장에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난 사십 년 동안, 여러분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시오. 주께서 그리 하신 까닭은 여러분을 겸손하게 만드시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가, 여호와의 명령은 지키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소.” (2절) 광야생활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사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런 환경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이 광야생활을 통해서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너희가 겸손하게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600년 전에 있었던 출애굽 때의 상황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뭐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지금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은 누구보다도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마스라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팬데믹을 핑계 대면서 나에 대해 감사할 것이 없다고 불평을 하고 있는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크리스마스를 기뻐하고 있는지 너희를 시험하고 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고 성탄의 은혜와 기쁨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제일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찬송이 어느 찬송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찬송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입니다. 이 찬송을 들으면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이 찬송은 1818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오스트리아의 ‘오벤도르프 (Obendorf)’라는, ‘잘스부르크(Salzburg)’에서 가까운 작은 마을의 한 성당에서 처음으로 연주되었습니다. 그 성당의 신부였던 ‘조셉 모르 (Joseph Mohr)’가 가사를 쓰고, 그 교회 성가대 지휘자였던 ‘프란츠 그루버 (Franz Gruber)’가 곡을 썼습니다. 교회 오르간이 고장이 나서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타 반주에 맞춰 부르도록 심플한 멜로디로 작곡한 노래입니다. 이 찬송은 현재 300개 이상의 언어로 불려지는 최고의 크리스마스 찬송이 되었습니다. ‘오벤도르프’는 크리스마스가 되어도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하다고 합니다. 24일 전에는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거나 부르는 일도 없는, 인구 3,000명의 작은 마을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면 여행객들과 마을 주민들이 ‘Silent Night Chapel’에 모여 예배 드리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작고 조용한 마을입니다.
며칠 전에 한 기사를 읽었는데요. ‘박홍규의 이단아 읽기’라는 시리즈 기사였습니다. ‘레오폴트 코어(Leopold Kohr, 1909-1994, 오스트리아)’라는 사람에 대한 글이었습니다. ‘레오폴트 코어’는 경제학자이며, 법률가 (Jurist)이며, 정치학자이며, 철학자입니다. 그 시대의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1937년에 프리랜서 특파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면서 조지 오웰, 어니스트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의 친구가 되었고, 2차 대전 중에는 뉴욕 저널에 반 히틀러에 대한 글을 기고하면서 파시즘과 싸웠습니다. 그가 쓴 대표작은 ‘국가의 붕괴(The Breakdown of Nations)’라는 책입니다. 그의 주장은 중앙집권적인 거대한 정부는 필요 없고 소규모의 사회조직을 구성하여 공동체적인 기능만 유지하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구 10만명 정도의 대학 도시인 잘스부르크나 인스부르크(Innsbruck) 정도의 소도시가 인간이 살기에 가장 알맞은 규모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그의 음악에서 인간의 삶과 자연의 조화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모차르트의 고향 잘스부르크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레오폴트 코어는 1983년에 인류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킨 사람들에게 주는 Alternative Nobel Prize를 받았습니다.
이 글을 쓴 박홍규씨의 주장은, 이 레오폴트 코어의 고향이 바로 오스트리아의 작고 조용한 마을 ‘오벤도르프’라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 ‘오벤도르프’에서 불후의 크리스마스 찬송이 나왔고, 이 작은 마을에서 레오폴트 코어 같은 사상가가 나왔고, 바로 옆 마을 잘스부르크에서 모짜르트가 나왔고, 그리고 레오폴트 코어에게서 영감을 받은 프리드리히 슈마허 (Ernst Friedrich Schumacher, 1911-1977, 영국) 같은 사람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슈마허가 1973년에 쓴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 A Study of Economics As If People Mattered)’라는 책은 그가 레오폴트 코어의 집에 머물면서 썼다고 할 정도로 슈마허는 레오폴트 코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큰 건물이나 호텔도 없고, 번쩍번쩍한 쇼핑 센터도 없는 작은 마을, 자동차 보다는 자전거가 어울리고, 걷는 것이 어울리는 작은 계곡의 마을 ‘오벤도르프’에서 처음 불려진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하는지 보여 준다고 했습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밤에 구세주를 찬양하는 것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시끄럽고 화려한 파티의 크리스마스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찬송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올해는 코로나바이러스 덕분에 파티 없는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읽은 본문 말씀 속에 나오는 ‘목자들의 이야기’는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말씀의 무대는 베들레헴 근교의 들판입니다. 한 밤중에도 목자들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목자들이 지키고 있는 양들은 예루살렘에 사는 부자들의 소유이거나, 아니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될 양들일 것입니다. 갑자기 천사들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을 둘러 비췄습니다. 이 목자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놀라 무서워했습니다. 천사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10-12절) 천사들이 말을 마치자 하늘 군대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14절) 사방이 조용해졌을 때 목자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어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합시다.” (15절) 목자들은 서둘러 그 밤에 베들레헴으로 달려갔고, 거기서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습니다. 목자들이 이 아기에 대하여 들은 것을 말했을 때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이 목자들의 이야기 속에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는 성탄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들이 목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목자가 어떤 사람들인지, 예수님 당시에 목자의 사회적인 지위는 어떠했는지 잘 모릅니다. 한마디로 목자는 매우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작년 ReNEW에 세미나 강사로 왔던 김동문 선교사의 글에 의하면 그 당시에 목자는 ‘극한 직업 (extreme job)’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목자는 아주 천한 직업이었다.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 독일)의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 (Jerusalem in the Times of Jesus)>에 의하면, 당시 목자는 낙타몰이꾼, 당나귀몰이꾼, 마부, 뱃사공, 의사, 푸줏간 주인 등과 함께 천직으로 취급받았다. 베들레헴 지역의 양떼들은, 대개, 예루살렘의 권력자들, 부자들의 것이었다. 양떼의 주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 양떼를 지켜야 하는 목자들의 삶은 다분히 독립적이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직면해야 하는 거친 직업이었다. 광야의 맹수들의 공격으로부터 양떼를 지켜야 하고, 양을 훔치는 도둑들로부터 양을 지켜야 하는 목자의 직업은 낮과 밤, 뜬 눈으로 지내야 하는 험한 직업이었다. 이런 평판 때문에 목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 없는 쓸모 없는 존재들이었고, 목자의 사회적 신분은 '죄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탄생을 가장 먼저 들었던 증인으로 목자들을 내세운 것은 하나님의 충격적인 인물 캐스팅이었다.”
재미있는 글입니다. 사실 구약 성경에서는 목자라는 직업이 나쁜 직업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목자였고, 이삭도, 야곱도 목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훈련시키기 위하여 미디언 광야로 보내 40년간 목자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가업(家業)으로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목자를 고용해서 양을 치는 식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목자는 남을 속인다, 남의 것을 훔친다, 거짓말을 잘한다는 식의 사회적인 편견이 생겨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목자의 사회적인 신분은 ‘죄인’이었습니다. 재판장에서 증인으로 설 수 없을 만큼 신용이 없는 사람들로 취급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목자들에게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시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둘째로, 목자들이 들은 성탄 메시지는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준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 1969-현재)가 부른 ‘Jesus Born On This Day(오늘 예수께서 나셨네)’가 생각납니다. 이 노래는 머라이어 캐리가 어린이 합창단과 같이 부른 아름다운 성탄 노래입니다.
(1절) 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Today a child is born on earth)/Today the glory of God shines everywhere/For all the world (오늘 세상에 한 아기가 나셨어요/오늘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비쳐요./온 세상을 위해)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ight and salvation/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the King of all nations (오, 예수님이 오늘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빛이시고 구원이예요/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모든 민족들의 왕이예요)
(2절) Behold the lamb of God has come/(Behold the lamb of God has come)/Behold the Savior is born/Sing of His love to everyone (보세요. 하나님의 어린양이 오셨어요/보세요. 구세주가 나셨어요/모든 사람을 위한 그의 사랑을 노래해요)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avenly child in a manger/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ord and Savior (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구유에 누인 하늘의 아기/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주님이시고 구세주예요)
(3절) Today our hearts rejoice in Him/(Today our hearts rejoice in Him)/Today the light of His birth/Fills us with hope/And brings peace on Earth (오늘 그를 기뻐해요/오늘 그의 탄생의 빛이/희망으로 우리를 채워요/그리고 세상에 평화를 주네요)
(합창) 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our light and salvation/Oh, Jesus, born on this day/He is the King of all nations (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우리의 빛이고 구원이예요/오, 오늘 예수님이 나셨어요/그는 모든 민족들의 왕이예요)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사람들에게 ‘good news that will bring great joy to all people’입니다. 이 성탄 소식은 누구나 다 듣고 기뻐해야 하는 소식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성탄절을 축하하고 기뻐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Let the Christmas catch you in a good mood!” 라는 말이 있습니다. 또 “May the magic of Christmas fill your heart all year long!”이란 말도 있고, “As for me, I like to take my Christmas a little at a time, all through the year.” “With joy-filled hearts, let’s continue the Christmas celebration all season long.” 어느 누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은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팬데믹으로 고생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크리스마스는 기쁜 소식입니다. 우리들의 우울한 마음을 단번에 날려 줄 기쁜 소식입니다.
셋째로, 천사들의 메시지에 이어 하늘의 군대 (the armies of heaven)의 합창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Glory to God in highest heaven, and peace on earth to those with whom God is pleased).” (14절) 이 말씀에서 궁금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실까요?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소식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리 FKCC 교우들이, 그리고 지금 팬데믹으로 고생하는 온 세상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평화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성탄의 소식을 들은 목자들이 그 시간에 베들레헴으로 달려갔다는 말씀이 우리 마음에 큰 감동을 줍니다. 목자는 사회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고,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고, 재판장에 증인으로 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목자들이 자기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목자들은 그런 것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이 현장을 떠나면 양들은 누가 지킬까 하는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목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서 베들레헴 마을에 가서 천사들의 메시지를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한번 보십시오. “목자들의 말을 듣고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All who heard the shepherds' story were astonished).” (18절) 'astonished'라는 말은 단순히 놀랐다는 의미가 아니라 번개를 맞아 충격을 받은 것처럼 놀랐다는 뜻입니다. 구세주가 탄생하셨다는 소식 앞에서 목자들에 대한 어떤 불신도, 편견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목자들에게서 나는 양 냄새에 코를 막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목자들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은 오직 구유에 뉘여 있는 아기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이 성탄의 메시지를 듣는 우리에게도 모든 편견과 불신들이 해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입니다.
첫 크리스마스 찬양
누가복음 2;8-20 / 계강현 목사
연말이 되면 한해의 뉴스를 종합해서 각 신문마다 방송마다 10대 뉴스를 뽑아서 발표한다. 올해의 빅뉴스는 무엇일까? 2019년 한 해에 지구촌에선 갈등과 충돌이 많았다. 경제 성장의 정체와 사회 양극화 속에서 국가, 계층, 세대 간 분쟁이 심해지면서 패권 다툼 양상으로까지 번졌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경제난이 심해진 남미와 중동에서는 생활고에 시달리던 서민들의 반정부 시위가 잇따랐다. 홍콩에서는 송환법에 반대하는 민주화 시위가 반년 넘게 이어졌다. 올해 우리나라 빅뉴스는 뭘까? 아마도 남북미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함께 만남 이후 벼랑 끝에 선 남북미 관계가 아닐까 싶다. 동물국회 재현한 패스트트랙 파문과 조국 사태와 양분된 시위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본의 백색국가 한국 제외와 지소미아 갈등도 오는 24일의 한일 정상회담 결과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좋은 소식도 있는데,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영화가 한국 최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고, 오스카상 후보에도 올라가게 된 것과 20세 이하 월드컵 축구에서 우리나라가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준우승한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 역사 상에 가장 빅뉴스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아기 예수로 탄생하신 크리스마스가 될 것이다. vv1-7에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자기 고향으로 가서 호적하라고 명령하였다. 요셉은 유다 자손으로 베들레헴 사람이었기에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호적하러 고향에 갔다가 그만 해산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각처에서 조그만 촌 동네 고향으로 호적하러 왔기에 머물 여관이 없어 겨우 마굿간을 빌려 아이를 낳고 포대기에 싸서 말밥통인 구유에 아이를 뉘어 놓았다. 이 하나님이 아기 예수로 탄생한 이 사건은 어떤 뉴스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지상최대의 뉴스다.
그 소식은 우리가 읽은 본문에 보니까, 베들레헴 지역에서 밤중에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처음 전해졌다. 당시 목자들은 가장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광야에서 짐승들과 뒹굴며 살아야 했기에 옷은 언제나 땀 냄새와 짐승 냄새가 진동했다. 오랜만에 동네사람들이라도 만나면 다들 코를 틀어막고 피하려고 했다. 이들은 대게 돈 많은 부자들로부터 고용된 사람들로, 늘 집을 떠나 짐승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로움 때문에 술과 음담패설에 젖어 잊기가 일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에게 천사가 성탄의 소식을 처음으로 전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이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다.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고 밝은 영광의 빛이 두루 비추자 목자들은 몹시 두렵고 불안했다. 그러자 그 천사가 “두려워 말라”하면서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good news of a great joy for all people)’을 전했다. 이어서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너희에게 구주가 나셨으니,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12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vv11-12) 말했다. 그러자 갑자기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더니 첫 크리스마스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렸다. v14,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이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순간 두려움이 기쁨으로, 불안은 평화로 바뀌었다. 천사들이 하늘로 사라지자, 목자들은 즉시 아기 예수가 탄생한 베들레헴 마구간으로 찾아 나서서 아기 예수가 마리아와 요셉과 함께 구유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 아기 예수께 경배했다. 그리고 이 아기 예수에 관해 천사가 전한 소식을 그들에게 알려주었다. 첫 크리스마스 찬양을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자.
1. 아기 예수 성탄은 하나님께 영광이다.
v14a,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라고 하였다. 왜 아기 예수의 탄생이 하늘의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엄밀히 말하면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내어주신 슬픈 사건이다. 하나님이 하늘나라 영광의 보좌를 버리고 말구유에 인간으로 탄생하시고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신 비참한 사건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나?
1)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람도 계획하던 일이 이루어질 때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영광스럽나? 수년 간 공부하던 학생이 원하던 대학에 가게 되면 기쁘고 영광이 된다. 수십 년간 정치하던 정치인이 마침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얼마나 큰 영광인가! 내 집 마련을 하기 위해 주부고 알뜰살뜰 아껴가며 절약하다가 마침내 아파트에 입주하는 날, 이 주부는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럽겠는가! 이 크리스마스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발생한 일이 아니라, 영원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결국 이루신 장엄한 사건이다. 성경 창세기에서부터 약속한 구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날이 바로 성탄절이다.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하신 것을 성취하신 사건이다. 오랫동안 계획하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으니 하나님께 기쁨과 영광이다.
2) 죄인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심은 바로 인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죄 가운데 멸망당하여 가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신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 십자가에서 죄인인 인간 대신 죽음으로 죄 값을 지불하게 하셨다. 누구든지 아들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주셨다. 우리 사람들은 모두 살려고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려고 태어나셨다. 한 사람 예수님의 죽음으로 그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구원 얻기를 원하신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늘에서는 잔치가 벌어지고 하나님 아버지가 의인 아흔아홉이 회개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 오늘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죄인들이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성탄은 하나님께 기쁨이요 영광이 된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할렐루야!
2.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다.
v14b,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성탄이 바로 진정한 평화의 사건이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다.’ 즉, 엄밀히 말하자면 이 성탄의 복음은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복음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에게만 그 복음의 능력이 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 주님으로 모시면 어떻게 되나?
(1)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는 자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맺게 된다. 전에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된 자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가운데 있는 자였다. 그런데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예) 아버지가 불효한 자식이 항상 마음에 평화를 잃어버린 채 살다가 돌아와 잘못을 회개할 때 아버지는 아들을 품에 안아주고 용서하신다. 그러면 참 평화가 임하게 된다.
(2) 내 심령 속에 평화가 넘치게 된다. 세상은 늘 요란하여 전쟁과 기근과 환란이 그치지 않는다. 더구나 젊었을 때는 내 주먹을 믿으라며 떵떵 거리지만, 나이가 들면 몸과 마음이 약해지지 마련이기에 두렵다. 또 사람은 미래를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하다. 5분 뒤에 일을 모르기 때문에 자동차 사고가 나는 것이다. 안 그런가! 5분 뒤를 알면 사고를 피하지 왜 거기에 있다가 사고를 당하겠냐? 자녀를 위한 염려는 어릴 때부터 장성해질 때도 여전히 끊이지 않는 게 부모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마음에 믿고 영접하여 모시면 그분으로부터 참 평안이 넘치게 된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요 14:27,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예수 믿는 것은 인생에 아무런 풍랑과 고난이 없는 무사안일의 삶이 결코 아니다. 예수 믿는 삶은 풍랑 속에서도 주님이 다스리시기에 평화를 누리는 삶이다. 환란과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참 평화이신 주님을 꼭 붙들고 살자.
(3) 인간관계 속에서 참 평화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평화의 왕을 모실 때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호 간에 참 평화가 이루어진다. 예수 잘 믿는 삶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잘 세우는 삶이다. 하나님 관계가 바로 되면 이웃관계를 잘 세워나갈 힘이 생긴다. 부부관계, 목원과의 관계, 교우관계. 친구관계, 직장 동료 관계 등 관계를 잘 세우는 것이 신앙성숙이다.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관계 속에 참 편화가 임하게 된다. 십자가 밑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이 무너졌다. 부자와 빈자의 담이 없어진다. 상전과 노예의 담이 무너졌다. 남자와 여자의 담이 깨졌다.
여러분, 기독교의 영향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을 아는가? 정치가로서 기독교 신앙을 철저하게 실천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영국의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 노예제도 폐지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그는 25세 때 회심하였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사명을 노예제 폐지와 사회 악습 폐지라고 믿었다. 왜소한 체구의 윌버포스는 21세에 하원의원이 되어 노예 매매를 폐지하기 위해 기득권을 가진 강력한 당과, 노예 제도를 자연스럽고 성경적인 제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대항하였다. 150번이나 되는 대 의회 논쟁을 통해 “영국이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가 되려면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 영국이 황금에 눈이 어두워 노예제도를 고집한다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드디어 1807년 영국하원은 그의 연설에 유례없는 열광과 존경을 보내면서 ‘노예무역금지법’을 통과시켰다. 그의 의지와 신념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아예 인류 최대의 악습인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쪽으로 밀어붙였다. 마침내 1833년 7월 27일 윌버포스가 뜻을 세운지 56년 만에 영국의회는 노예제도를 영원히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그리고 열흘 후인 8월 6일 그는 필생의 목표를 이룬 환희와 감격 속에 생을 마감한다. 그때로부터 일 년 후, 1834년 7월 31일 밤 12시를 기해 80만 명의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전 세계 역사에 획을 긋는 엄청난 일이 발생했다.
1870년 프랑스와 독일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을 때였다. 여기 저기 총탄이 날아다니고 포탄이 터지는 전쟁터에도 크리스마스는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병사들은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고향 생각에 잠겼고 성탄의 낭만과 추억을 그리게 되었다. 갑자기 프랑스군의 참호에서 한 병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총과 칼을 내어 던지면서 아름다운 테너로 하늘을 향해 감격적인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다. “오 거룩한 밤, 별들 반짝일 때, 거룩한 주 탄생한 밤일세. 오랫동안 죄악에 얽매여서 헤매던 죄인을 놓으시러, 우리를 위해 속죄하시려는 영광의 아침 동이 터온다. 경배하라. 천사의 기쁜 소리, 오 거룩한 밤, 주님 탄생하신 밤, 그 밤, 주 예수 나신 밤일세.” 이 찬송을 듣고 있던 독일군 병사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바리톤의 목소리로 마르틴 루터가 작사한 유명한 찬송을 불렀다. “하늘 위에서 땅으로 내려 왔노라.” 이 사건 때문에 전쟁터에서는 잠시 휴전이 선포되고 크리스마스는 예수님 때문에 평화를 누리는 시간이 되었다. 예수님이 전쟁터에도 평화를 제공해 주셨다. 오늘 여전히 전쟁과 테러의 위협 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평화가 진정으로 필요할 때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탄은 인류에게 평화를 전해주는 복된 소식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복된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할 때에 사망의 죄에서 용서받고 지옥으로부터 천국으로 구원받는 하늘의 평화가 임한다. 성탄은 온 세상 모든 백성에게 미치는 구원의 기쁜 소식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복음의 기쁜 소식이다.
그러니 이 구원의 주 평화의 왕 예수님과 그의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우리의 사명인 것인가! 우리가 전하지 않으면 저들은 기쁜 소식을 듣지도 못한 채 지옥에 간다.
1974년에 희한한 소식이 전해졌다. 2차 대전이 종료 됐는데,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과 미군의 전단지를 믿지 못하고 필리핀 정글에서 30년 가까이 숨어 지냈던 일본군 오노다 소위가 결국 발견되어 필리핀에 항복하고 고국 일본에 돌아온 사건이다. 그때 그의 나이 52세였다. 일본정부는 전쟁영웅 취급을 했고 브라질에 이민을 가서 농장을 운영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구십 몇 세에 세상을 떠났다. 반대로 만약에 1945년 8월 15일, 36년간의 일제 강압의 시대가 끝났고 대한민국의 독립을 쟁취했음을 선언한 광복절의 소식을 듣지 못한 채 독립군이 산에 숨어서 계속 살고 있다면 얼마나 불쌍한 노릇인가? 미국 노예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한 채 계속 노예로 살고 있다면 얼마나 한심한 일이 되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목자들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그리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보고 들은 천사의 복된 기쁨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들의 말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고이 간직하고, 마음속에 곰곰이 되새겼다. 오늘도 이런 성탄에 숨겨있는 구원의 소식을 전하면 많은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하며 무시하지만, 구원받을 자는 그 소식을 마음에 간직하고 새기며 구원받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목자들은 천사의 소식과 하늘군대가 찬양한 그대로 이뤄진 것을 보고 확인한 후 돌아가면서 하나님에게 영광과 찬양을 드렸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첫 성탄의 찬양이 울려 퍼진 이후 2000년 넘는 세월동안 계속 성탄이 찾아오고 올해도 성탄의 종이 여전히 울리는 것은 아직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많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주님의 탄생을 축하하며 감사하며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오늘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모두에게, 또한 오후에 성탄축하 발표회를 통해 하늘의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이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
누가복음 2:8-20 / 김태환 목사
누가(Luke)가 어떤 경로를 통하여 복음을 듣게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전승(傳承)에 의하면 누가는 그리스 사람으로 시리아의 안디옥 출신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이 안디옥에 교회를 세우고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서 일년 동안 가르친 적이 있는데(사도행전 11:26), 그 때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것으로 보입니다. 직업이 의사였던 누가는(골로새서 4:14) 바울이 로마로 호송될 때 바울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신실하게 바울 곁을 지킵니다. 누가는 역사 의식이 뛰어난 사람이어서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누가복음 1:3). 그는 예수님에 대한 자료를 모아 누가복음을 기록했고, 바울을 수행하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해 자료를 모아두었다가 사도행전을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누가복음의 기록은 역사가로서의 누가의 진면목(眞面目)을 한껏 드러낸 값진 기록입니다. 한번 그 말씀을 보실까요? “그 때에 아구스도(Augustus) 황제가 내린 칙령에 따라 온 나라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레뇨(Quirinius)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행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호적을 등록하러 고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요셉도 다윗 가문의 자손이었으므로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유대 지방에 있는 다윗의 마을로 갔습니다. 이 마을은 베들레헴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는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을 등록하러 갔습니다. 마리아는 그 때에 임신 중이었습니다. 이들이 베들레헴에 있는 동안 아기를 낳을 때가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첫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습니다. 그것은 여관에 이들이 들어갈 빈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1-7)
만일 누가의 이 기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의 역사적인, 정치적인, 사회적인 상황이 어떠했는지 잘 몰랐을 뻔했습니다. 그리고 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는지도 이유를 알 수 없을 뻔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세상은 참 시끄럽고 요란했습니다. 그 때 유대나라는 로마제국의 지배 밑에 있었습니다. 그 때 로마 황제는 아우구스투스였습니다. 그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Octavianus, BC 63-AD 14))로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 BC 100-BC 44)가 죽은 후 정적 안토니우스(Marcus Antonius, BC 83-BC 30)를 물리치고 로마제국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 칭호에는 ‘숭고한 자’ ‘고귀한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아우구스투스’가 시리아의 총독 ‘구레뇨(Quirinius)’의 지휘 아래 호적 등록을 하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그 때 유대나라는 행정적으로는 시리아에 속해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아우구스투스’는 세금을 더 거둬들이기 위해 그런 칙령을 내렸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유대인들은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등록하라고 했으니 그 일대에 많은 사람들의 이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베들레헴 같이 작은 마을에 갑자기 외지(外地)에 나가 살던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오니까 막상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는 여관에 빈 방이 없어서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낳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저항심이 강한 민족입니다.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로마인들에게 저항했습니다. 그 중에 과격한 민족주의자들은 살인과 방화(放火)를 서슴치 않았습니다. ‘바라바(Barabbas)’같은 유명한 죄수(a notorious prisoner)가 있었습니다(마태복음 27:16). ‘바라바’가 이렇게 유명했던 이유는 이 사람이 단순한 살인자가 아니라 민족주의자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중에도 많은 사람들은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짜 메시아들이 끊임없이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암하레츠(Am-ha' aretz)’라고 불리는 민중들 사이에는 조용히 기도하면서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8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all those who were looking forward to the redemption of Jerusalem)’이 바로 ‘암하레츠(Am-ha' aretz)’들입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는 형식적인 예식이 되어 버렸고(요한복음 2:12-17), 헤롯 왕은 무리하게 성전을 증축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46년째 공사 중이었습니다(요한복음 2:20).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 기록한 대로 백성들은 목자를 잃은 양처럼 유리하며 방황하고 있었습니다(마가복음 6:34, 마태복음 9:36).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때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종교적으로 소란하던 때였습니다. 결코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로운 때가 아니었습니다. 민족의 대 이동이 있었고, 유대 민족들은 로마의 지배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반란들이 일어났습니다. 성전 예배는 백성들의 삶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뭔가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이 돌고 있던 때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그 맑고 환한 밤중에 뭇 천사 내려와 그 손에 비파 들고서 다 찬송하기를 평강의 왕이 오시니 다 평안하여라. 그 소란하던 세상이 다 고요하도다. 이 괴롬 많은 세상에 짐 지고 가는 자 그 험산 준령 넘느라 온 몸이 곤하나 이 죄악 세상 살 동안 새 소망 가지고 저 천사 기쁜 찬송을 들으며 쉬어라.” (112장 그 맑고 환한 밤중에) 예수님의 탄생으로 소란하던 세상이 고요하게 되었고 이 세상에 새 소망이 주어졌다는 찬송가 가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때가 무르익어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But when the time had fully come, God sent his Son).” (갈라디아서 4:4)
누가는 놀랍게도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들이 한 밤중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그 기쁜 소식이 제일 먼저 목자들에게 들렸을까요?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불과 8.8km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거리입니다. 차로 가면 20분 거리 밖에 안 되고, 걸어가도 2시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고, 산헤드린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살았습니다. 왜 그런 사람들에게 성탄의 기쁜 소식이 들리지 않고 밤 중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먼저 들렸을까요?
어떤 사이트에서 본 것입니다만, 직업 중에 ‘극한 직업(extreme job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벌목공, 원양어선 선원, 광부, 지뢰 제거반, 환경 미화원, 수색 구조원, 용접공, 정비공, 트럭 운전사, 택배 기사, 화상병원 의료진, 말벌 채집꾼, 해양 폐기물 수거반, 동물 사체 제거반, 하수도 맨홀 청소원, 버킹엄 궁전 근위병, 브라질 연구용 모기 채집가, 이런 직업들이 극한 직업들입니다. 일은 힘들고, 위험하고, 월급은 적은 직업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태어난 당시에도 ‘극한 직업들’이 있었습니다. 요아킴 예레미야스(Joachim Jeremias, 1900-1979, 독일)가 쓴 ‘예수 시대의 예루살렘(Jerusalem in the Time of Jesus, 1969)’이라는 책에 보면, 당시 천한 직업으로 취급받은 직업들이 등장합니다. 낙타몰이꾼, 당나귀몰이꾼, 마부, 뱃사공, 의사, 푸줏간 주인, 어부, 목자 등이 천직으로 취급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목자는 부정직하다는 사회 인식 때문에 법정에 증인으로도 세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목자들은 그 사회에서 쓸모없는 존재들이었고, 구덩이에 빠져있어도 유대인들은 그를 구해주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이런 목자들에게 부여된 사회적 신분은 ‘죄인’이었습니다. 당시 세리들이 ‘죄인’ 취급당했듯이, 목자들도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을 어떻게 보셨을까요? 성경에 보면 목자로 살았던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모세입니다. 이집트의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살았던 모세는 여차여차하여 도망자가 되어 ‘미디안’이라는 땅으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목자로 40년을 살게 됩니다. 하지만,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도자로 훈련시킨 기간이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에서 가장 훌륭한 왕이었던 다윗도 어린 시절을 목자로 보냈습니다. 사울 왕에게 어린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참 인상 깊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양 떼를 지키던 사람입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서 양을 물어 가면, 저는 그 놈을 공격하여 그 입에서 양을 구해 냈습니다. 그 놈이 저를 공격하면, 저는 그 놈의 턱을 잡고 때려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사무엘상 17:34-35) 다윗은 아버지의 양을 지키는 목자로 살면서 양 한 마리의 생명이 내 목숨을 걸고 지킬 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장차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목자는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목자를 잘 표현하는 말은 ‘humble’ ‘humbleness’ 혹은 ‘humility’라는 말입니다. 목자는 직업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지키고 있는 양에게 눈길을 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목자를 겸손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근처 들판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And there were shepherds living out in the fields nearby, keeping watch over their flocks at night).” (8절) 어떻습니까? 목자들이 있는 곳은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 ‘들판’입니다. 모두가 잠자는 이 시간에도 목자는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으면서 양들을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도둑들이 와서 양을 훔쳐갈까 봐, 혹시라도 사나운 짐승이 양을 해칠까 봐 양들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갑자기 주님의 영광이 목자들을 둘러 비추면서 천사들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증거이다.” (10-12절) 천사들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서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다고 하면서 메시아를 알아볼 수 있는 증거까지 목자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포대기에 싸여 있는 아기는 많이 있겠지만, 포대기에 싸여 구유(manger)에 누워 있는 아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천사들은 그 아기가 메시아임을 부인할 수 없는 빼박 증거를 보여주었습니다.
천사들의 메시지가 끝나자 다시 천사들과 하늘의 천군(天軍)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Glory to God in the highest, And on earth peace among men with whom He is pleased, NASB).” (14절) 메시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메시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잘 읽어보면 메시아의 탄생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임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이 베들레헴의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사회적인 평판(評判)이 좋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목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도 설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편견을 버리고 목자들이 전하는 성탄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맞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평화를, 하나님의 ‘살롬’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다시 이 말씀을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목자들처럼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라고요.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 성탄의 소식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교만한 사람들은 성탄의 소식을 믿지 않습니다.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이 성탄의 소식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메시아 탄생의 기쁜 소식이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전해지지 않고 먼저 겸손한 목자들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God opposes the proud but gives grace to the humble, 야고보서 4:6, 잠언 3:34)”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 대로입니다.
겸손한 사람들에게 성탄의 소식이 들립니다. 겸손한 사람들이 성탄의 소식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가 임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십시오.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십시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
오늘 여기에 구주가 나셨습니다
눅 2:8-14 / 문기태 목사
어느 교회에 어린이 한 명이 전도되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성탄절이 다가와 교회에서는 성탄절 준비로 부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하는 말 "어, 교회에서도 크리스마스해요?"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바르게 알고 본래 그 날을 정한 이의 의도대로 지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정확한 날짜를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12월 25일을 정해 놓고 우리가 성탄절을 지키고 있지만 정확한 날짜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의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아기 예수가 탄생하셨다고 하는 것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신 것을 우리는 믿고, 또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고 하나님께 경배해야 되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탄생 년도와 날짜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해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1세기는 그리스도인들의 핍박으로 인해 지금처럼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날을 찾아 축제처럼 보낼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생일보다는 사망일을 더 기념하는 풍습이 있어서 크리스마스가 없었습니다. 2세기에도 거의 비슷한 상황에서 쫓기던 사도들 이 순교하여 체계적인 정립이 어려웠습니다.
4세기에 들어와서 당시 만연되어 있던 마니교에 대항하기 위하여 주님의 생일을 성대히 경축하게 되었는데 알렉산드리아에 크레멘트가 탄생일의 중요성을 언급하여서 354년 로마의 주교 리베리우스가 로마의 동짓날인 12월 25일을 성탄일로 지켰는데 이날은 낮에 길이가 가장 짧다가 차츰차츰 길어지는 날이요 이는 생명의 상징이라 하여 그날로 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5세기초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최대의 축일로 선언했고, 로마의 유스트니아우스 황제는 주님의 탄생 일자에 관하여 여러설을 다 폐하고 칙령으로 12월 25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확정을 지어서 공포한 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지키는 성탄절이 된것입니다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하는 앞자와 미사라고 하는 두 글자를 합쳐서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용어를 만들어 냈고, 다시 말씀 드려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날에 그분을 위해 미사를 드린다고 하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은 온 세계에서 축하하고 있고 주님의 나심을 기원으로 하는 서기 달력을 온 세계에서 사용하고 있으니 주님은 만왕의 왕이 되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 탄생의 날자는 정확하게 모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탄생은 분명하고 확실하고 정확한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낮은 곳으로 찾아오신 예수님
왜 크리스마스가 되면 즐겁습니까? 빨간 날이라 쉬면서 마음껏 춤 추고 술을 마시며 놀 수 있어서 즐겁습니까? 선물을 받고 재능을 뽐낼 수 있어서 즐겁습니까? 아닙니다. 높으신 하나님이 낮은 곳으로 임하셨기에 기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높은 곳으로 임하지 않았습니다. 궁궐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나신 것이 아니고 마굿간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따뜻한 방이 없어서 아니 돈을 넉넉히 주고 빌릴 방 한칸이 없어서 모두가 방이 없다고 거절하여서 마굿간에서 출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할 구주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였다는 기쁜 소식이 제일 먼저 천사들에 의해 들에서 한 밤중에도 쉬지 못하고 양을 돌보던 목자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왜 당시에 예루살렘에 제사장들도 많고 레위지파도 많았는데 그들에게 먼저 기쁜 소식이 전달되지 않고 들에서 양치는 목자들에게 먼저 전달되었습니까? 왜 양치는 목자들이 먼저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아기 예수를 먼저 뵙고 경배하는 특권을 누립니까?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낮은 자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낮은 자들에게 기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낮은 자들을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낮은 자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병들고 힘없고 가난하고 버림받고 죄인취급받고 외로운 이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들에게 치유해 주시고 용서를 주시고 기쁨을 주셨습니다.
1818년 어느 늦은 밤. 크리스마스를 일 주일 앞둔 오스트리아의 한 작은 시골 교회에는 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26세된 젊은 모올 신부는 늦은 밤인데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 일 주일 후면 성탄 예배도 드려야 하고 연극발표회도 해야 하는데 하나뿐인 오르간이 고장난 것입니다.
오르간을 고치려고 이리저리 뜯어보았으나 시골에서는 수리하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새로 구입할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모올 신부는 하나님께 기도을 드리고 깊은 밤에 창 밖으로 마을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참으로 고요한 밤이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마을을 모습에 감동을 받아 시 한편을 적어 보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시를 들고 교회의 오르간 주자이자 학교 선생이 구루버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제가 시를 한편 써 보았습니다. 이 시로 작곡을 좀 해 주세요. 그래서 성탄 예배 때 기타 연주를 하면 어떨까요?"
크리스마스날 시골의 한 작은 교회에서는 신부가 쓴 시에 곡을 붙인 음악이 기타로 연주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생기게 된 역사이며 불리워진 이유입니다. 지금은 성탄절에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가 되었지만 아마도 예전에 이 작은 시골 교회가 오르간 때문에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면 이 노래는 세상의 빛을 보지못했을 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스스로 마음을 높은데 두지 말고 낮아져야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어떻게 가난한 마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낮아질 수 있습니까?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병든 이들앞에서 나는 다르다고 우쭐거리지 않는 것입니다. 함게 안타까와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한없이 부족함을 깨닫고 은혜를 간청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판단하며 의인인체 하지 말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위기의 때에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는 한없이 어지러운 때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로마의 폭정아래 시달릴 때였습니다. 1절에 보면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에 다 호적하라 명령하였습니다. 왜 호적을 다시 정리하는 것입니까? 식민지 백성을 착취하려고 인두세를 거둘려고 황제가 호구조사를 실시한 것입니다. 힘없는 백성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신고를 해야 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만삭의 몸으로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이런 위기의 때에는 돈많고 힘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좋습니다. 그러나 힘없는 백성들에게는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입니다. 불안하고 불편한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그 사이에 부정과 부패는 권력과 손을 잡고 판을 칩니다. 헤롯과 같은 이는 권력을 이용하여 베들레헴 근동의 갓난 아이들을 마구 죽이지 않습니까?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이 야합하여 예수님을 죽이는 음모도 그래서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때는 억울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억울하게 재산을 빼앗기고 가정이 무너집니다. 억울하게목숨을 잃는 이도 많습니다. 정의가 실종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왜 하필 평안한 때를 피하여 이런 때에 오셨습니까? 위기에 처한 이들을 억울한 이들을 위로해 주시고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주고, 무조건 병든이는 다 낫게 해주고, 분쟁이 있는 이는 해결해주고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둠에 갇힌 많은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 주었습니다. 먼저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고통을 해결해 주었습니다. 슬픔이 걷히고 기쁨이 밀려오게 도와 주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불법과 부정 그리고 죄악이 난무하는 이 세상 너머의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죄사함의 확신을 주시고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 두려움을 몰아내시고 평안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심각한 위기의 시대입니다. 지도력의 실종으로 혼란의 연속입니다. 나라 안팍의 복잡한 문제들이 꼬여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테러가 날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테러가 자행되는 전쟁터에 우리의 자녀들을 군인으로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치싸움은 온 국민들로 식상케 만들고 나라의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경제는 심각해지고 불황의 터널은 언제까지 지속될 모르는 상황이며 많은 이들이 일자리에서 내 몰리고 있습니다. 희망을 확신있게 말하는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 시대는 2000년 전의 유대땅처럼 예수님만이 오셔서 빛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소망을 줄 수 잇습니다. 예수님만이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불안한 분이 있습니까? 위기를 맞아 절박한 사람이 있습니까? 억울한 일을 만나고 답답한 일을 만나 고통스러운 분이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을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오늘 그 예수님을 만나시고 평안을 얻기 바랍니다.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랍니다.
하워드 존슨 목사는 명설교가로 이름높은 분입니다. 그런데 맏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온 가족이 큰 슬픔에 잠겨서 지냈습니다. 성탄절이 가까운 어느 저녁 식탁에서 둘째 아들이 불쑥 말했습니다. "형이 하늘나라로 가서 처음 크리스마스를 지내겠지?" 그러자 막둥이가 얼른 대답을 하였습니다. "바보 같은 소리. 하늘 나라에는 예수님이 계시니까 날마다 크리스마스야." 이 말을 듣고 존슨 목사 내외는 잠에서 깬 듯 서로 마주보며 벙실 웃었습니다. 아들의 사망 후 오랜 만에 웃는 밝은 미소였습니다. 목사요 사모인 그들은 하늘날에는 말마다 예수님이 곁에 계시니 특별히 성탄절이 필요 없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몇 년 전 모 연예인이 방송에 출연, 고교시절 겪었던 성탄절 기억을 이야기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대입시험을 치른 이 연예인은 같은 교회에 출석 중이던 친구들과 밤을 새워 놀던 중 바람을 쐬러 밖에 나갔다가 사귀고 있던 여자 친구와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길을 걷던 그가 여자 친구와 밤을 보낼 여관을 찾았지만 빈방이 없어 황당했고, 다섯 군데 정도의 여관을 돌아다녔지만 결국 방을 구하지 못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당시에도 성탄 전야에는 여관을 구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연인들이 여관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설레임으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려야 할 그 날이 성의 해방의 날로 인식되고 전락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탄을 앞둔 젊은이들의 거리에 복음은 없습니다. 주위의 교회들의 십자가 불빛들은 거리마다 가득한 술집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에 빛을 잃어가고, 거리에 울려 퍼지는 구세군 자선냄비의 종소리도 요란한 캐럴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세상은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찾아 오신 놀라운 복음을 타락과 방종과 순간 지나가는 쾌락거리로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성탄절은 이렇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모르던 이들에게도 성탄절은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교회에 나오지않던 어린아이들도 교회가면 떡과 선물도 받고 재미 있는 연극과 노래 등 무언가 볼 거리 먹을 거리가 풍성하다는 것을 알고 발걸음을 교회로 옮겼습니다. 교회마다 성탄절에는 아이들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성탄절에 한 두번 교회나가보았다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왔다가 성탄절에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을 갖게 된이가 참 많습니다.
어른들도 자녀들의 성화에 내 자녀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하고 쑥스럽고 멋적으면서도 자녀 사랑하는 마음에 자녀가 부르는 노래와 율동, 그리고 연극을 보러왔다는 빌미로 교회당에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렇게 나오다가 어느날 성탄절 연극을 보며 실수에 웃음을 자아내고 어린아이들의 연기에 매료되어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열고 믿음을 갖게된 이들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사단의 간교한 계략이 성탄절의 복음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성탄절에는 믿는 이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사단에 속아 성탄절에 타락하지 말고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기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2000년전 베들레헴의 말구유에 나셨을 뿐 아니라 오늘 여기에 구주가 나셨습니다. 위기의 시대에 상처받고 낮은데 처해 있어 괴로운 여러분의 마음에 찾아 오셨습니다. 천사의 말을 듣고 찾아가 경배한 목자들처럼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 나아가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탄선물
눅 2:7-14 / 이상호 목사
복된 성탄절을 맞이하여 서로 환영하는 순서를 갖도록 하십시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참 잘 오셨습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성탄아침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체와 자녀들 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복이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분은 예수님입니다. 수많은 위인들과 종교 창시자들도 우리에게 갖가지 장밋빛 약속을 하고 우리로 하여금 은혜를 강조하지만 예수님과 같이 실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놓은 분은 없습니다. 바로 그분의 탄생이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기쁨 중에서도 가장 큰 기쁨, 그리고 소식 중에서도 가장 좋은 소식.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입니다.
오늘 이 시간 같이 은혜 받고자하는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성탄선물’입니다.
오늘은 세계 모든 사람들의 최대의 명절인 크리스마스 입니다. 오히려 예수 믿는 우리들보다 예수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더 들떠서 야단법석을 떠는 명절이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성탄절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지구촌의 최고의 명절입니다. 가장 귀한 명절, 가장 즐거운 명절, 가장 큰 세계적인 명절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 오후 2시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탄축하 마구간축제 - 시낭송회를 가집니다. 모두들 참여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환영하고 축하합시다.
베들레헴 말구유에 초라하게 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 예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요, 구원자, 메시야요,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서 오셨습니다.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일반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해결하시고자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도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해결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죽음의 문제, 죄악의 문제, 질병의 문제, 근심과 걱정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행복의 길로, 참 평안의 길로, 영생의 길로,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서 하나님이신 분이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성탄 선물은 온 인류의 구원소식입니다(11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태어나셨습니까? 우리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의 시골동네 한 여관의 말구유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구유가 뭡니까? 동물들이 밥 먹는 밥그릇, 먹이통입니다. 구유는 깨끗하지 않습니다. 구유는 냄새가 납니다. 구유는 딱딱합니다. 편안하지 않습니다. 특별하지도 않은 곳입니다. 또 구유는 귀하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습니다. 또 구유는 비싼 게 아닙니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계 어디를 가나 구유는 다 있습니다. 아주 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에 가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구유교회가 있습니다. 옛날의 초라한 외양간의 모습을 그대로 살린 낮고 험한 장소 위에 큰 교회당을 세워 순례자의 발걸음을 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시러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5: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만 하면, 누구든지 예수 믿고 잘못 가는 인생의 길에 돌아서기만 하면 모두가 다 구원받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저와 여러분들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나를 위하여,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우리의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11절에서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우리 예수님이 구주로 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죄인들도 오라. 가난한 사람도 오라. 돈 없는 사람도 오라. 소외된 사람도 오라. 멸시받는 사람도 오라. 천대받는 사람도 오라. 병든 사람도 오라. 몸이 불편한 사람도 오라.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 세상이 줄 수 없는 건강,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2.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10, 14절)
아침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소식이 온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종말이 있고, 천문학자들은 얼마 후에는 태양과 지구가 소멸될 시기가 올 것이라고 공언합니다. 게다가 참으로 죄악이 관영하고 질병이 만연한 이 세상입니다. 한 보험회사의 광고를 보면 6656가지의 질병이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답니다. 그러면 실제 인간이 앓고 있는 질병의 가지 수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인간이 고뇌하는 문제, 풀 수 없는 숙제도 부지기수로 심각한 상태입니다. 세상의 어느 부분을 살펴보아도 소망을 찾을 길이 없습니다. 생로병사의 인생 여정에서 고통하고 번민하는 속절없는 인생이여! 이 모든 것이 피조물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정녕 큰 기쁨의 소식은 없습니까?
지지하는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크고 좋은 소식일 것입니다. 주택복권에 당첨되었다면 크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졌다면 크고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생의 문제는 인간의 힘으로는 풀 수 없기 때문에 인간보다 위대한 외부의 힘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분은 물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의 초림과 재림 소식은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이요 가장 좋은 약속의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류를 긍휼히 여겨 구세주를 허락하셨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은 이 놀라운 구원의 약속을 기록하고 각 시대를 통해 전파하였습니다. 드디어 때가 차서 선지자들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이천여 년 전 유대 땅 베들레헴의 상공에서 하늘의 천사들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 2:10),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라고 예수님 탄생의 아름다운 소식을 인류에게 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나신 날은 세계사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날이었습니다. 실로 그것은 너무나도 위대하여 형용하기조차 어려운 소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크고 놀라운 기쁨의 소식, 인류 구원의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이 성탄아침에 우리게 주셨습니다. 역사의 기원이 되어 기원전과 기원후로 가르는 대 역사적인 날이 곧 성탄절입니다. 모두 구원의 확신과 감격으로 크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3. 평화의 기쁜 선물입니다.(14절)
인간은 서로 기대어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깨어진 인간은 평화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웃과의 평화가 회복되어야 하나님과의 평화의 관계가 다시 회복됩니다. 아니 하나님과 평화한 자는 이웃과도 평화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가 회복되면 인간과의 평화의 관계는 저절로 회복됩니다.
하나님은 성탄을 통하여 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시키셔서 평화를 이루셨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웃과 이웃 사이에, 나라와 나라 사이에 관계를 회복시키셔서 평화를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형제와 이웃과 평화롭지 못하다면 먼저 가서 화해하고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제물이 되셨습니다. 철저한 자기희생으로 우리의 화해와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나의 이익과 명예를 위해서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무시하고 불화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면 큰 잘못입니다. 먼저 가서 화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입니다. 우리가 서로 평화롭게 사는 모습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위하여 평화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4. 끝으로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전도하러 오셨습니다.
지난주에 마가 1:35-39절에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는 말씀을 봤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전도하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전도는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그런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기독교인들의 필수사항입니다. 반드시 전도해야 합니다. 내 부모가, 내 자식이, 내 마누라가, 내 남편이 예수를 안 믿으면 영원히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불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영원히 고통당하는데 나만 구원받고 아름답고 좋은 천국에 간다고 좋아하며 그냥 앉아 있으면 되겠습니까?
전도해야 합니다.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전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라고 전해야 합니다. 당신이 살 길은 예수 믿는 길 밖에 없다고 전해야 합니다. 남편을 위하여 아내를 위하여 부모를 위하여 자식들을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친척들을 위하여 내 이웃들을 위하여 새벽기도, 철야기도, 금식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내 부모,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친구, 내 이웃에 전도의 문이 열릴 수 있도록, 전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교회에 나올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나가서 전도합시다. 전도 할 수 있습니다. 전도 하면 됩니다. 전도 해봅시다. 오후2시까지, 다음 주까지 반드시 한 명 이상씩 전도하여 이 전을 가득 채웁시다. 저와 여러분은 할 수 있습니다.
“전도! 할 수 있습니다. 전도! 하면 됩니다. 전도! 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상과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를 결정합니다. 하나님과 사이가 나쁘면 세상과 사람들과의 사이와 관계도 나쁩니다. 우리의 구원과 축복은 하나님과의 사이와 관계가 결정합니다.
올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는 인색하고 완악한 사람이 되지 말고, 예수님을 위하여 옥합을 깨고 향유를 쏟아 붓던 마리아와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의 태어나심을 축하하기 위하여 먼 동방에서부터 찾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며 경배하였었던 동방박사들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맞아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성탄선물은 온 인류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한 화해와 평화의 좋은 소식입니다. 이 한반도에 반드시 평화와 통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는 전도자의 삶을 결단하십시다. 전도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평화의 왕,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직장과 사업과 가정과 가족,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넘치는 평화의 복을 누리며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고백하며 간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를 위한 좋은 소식
눅 2:8-20 / 이병권 목사
오늘 저는 “우리를 위한 좋은 소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2장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다섯 장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탄생, 둘째: 주변 반응, 셋째: 할례와 이름, 넷째: 예언적 찬양, 다섯째: 성장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둘째에 해당하는 “주변 반응”에 대한 장면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탄생과 그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좋은 소식과 반응입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의 탄생 소식, 그리고 하늘로부터 땅으로 이어지는 반응으로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반응은 하늘에서 천사로부터 시작되어, 땅으로 목자들에게 그리고 목자들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에게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서 목자들은 하늘의 반응과 땅의 반응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럼 먼저 좋은 소식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선포합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나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1장에 있었던 사가랴와 마리아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천사가 등장하고, 천사를 본 사람은 무서워합니다. 그러면 천사는 무서워하지 말라, 말하고 메시지와 함께 표적을 전합니다.
오늘 본문이 1장과 조금 차이 나는 것이 있다면,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습니다. 또한 메시지를 전하는 천사 역시 이름이 소개되지 않습니다. 1장에 등장했었던 가브리엘 천사인거 같으면서도,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닐 수도 있고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이 누구지?” 라는 질문보다 이들 가운데 벌어진 사건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 이제 그 사건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8절과 9절입니다.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목자들은 밤중에 베들레헴 어느 들에서 자기의 양 떼를 돌보며 있었습니다. 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캄캄한 밤, 모두가 잠들어 있는 고요한 밤, 목자들은 그 밤에 양을 보호하기 위해 잠을 쫓으며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천사가 그들 가까이, 그들 곁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어두움을 몰아내는 놀라운 빛이, 하나님의 영광이 목자들 주위를 비춥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캄캄한 밤에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밤을 밝힐 수 있는 여러 종류의 조명들을 사용하기 때문에 주위가 환하게 밝아지는 것에 대해서 아주 익숙합니다. 하지만 이때는 지금처럼 길에 가로등이나 전등이 있던 때가 아닙니다. 목자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밝은 빛을 봅니다. 그 눈부신 빛이 목자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무서워합니다. 아주 많이 두려워합니다. 사람들은 이처럼 천사가 나타나거나, 초자연적인 일을 만나게 되면 두려워합니다. 이럴 때 천사가 꼭 하는 말이 있죠? “무서워하지 말라” 10절입니다.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천사는 자신과 목자들 사이에 장애물이 되는 두려움을 제거하고, 자신이 전해야 하는 메시지를 분명히 전합니다. 천사가 전하는 메시지는 두 가지로 표현됩니다. 첫째, 이 메시지는 좋은 소식입니다. 쉽게 말하면 복음입니다. 그들을 벌하기 위한 심판의 소식이 아니라 그들의 복을 위한 소식입니다. 둘째, 이 메시지는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될 놀랍고 커다란 기쁨을 전하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은 커다란 기쁨으로 반응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소식들은 많이 있습니다. 소소하게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여러 종류의 소식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부분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작은 것입니다. 지금 천사가 말하는 소식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전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어떤 소식입니까? 11절입니다.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구주, 다시 말해 구원자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구원자가 태어나셨습니다. 그럼 이것이 왜 기쁨의 소식이 될까요? 이 소식이 기쁨이 되는 이유를 세 가지 질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언제?” 라는 질문입니다. 이 소식이 기쁨이 되는 이유는 “오늘”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오늘 구주가 나셨습니다!”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기다림은 끝이 났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어디서?” 라는 질문입니다. 이 소식이 기쁨이 되는 이유는 “다윗의 동네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누구?” 라는 질문입니다. 이 소식이 기쁨이 되는 이유는 “너희를 위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일차적으로 목자들입니다. 천사가 이와 같이 말한 것은 이 소식이 개인에게 적용되는 측면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온 백성”을 위한 소식일 뿐만 아니라 각 개인을 위한 소식입니다. 그리고 목자들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적용되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은 바로 나를 위한 소식입니다. 그래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 소식이 왜 우리에게 기쁨이 되는 좋은 소식입니까? 하나, 더 이상의 기다림이 필요 없는 이미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 하나님의 약속 그대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셋, 우리를 위해, 바로 나를 위해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천사는 이 소식을 전하면서 예수님께 두 가지 호칭을 덧붙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 다시 말하면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주가 되십니다. 절대 주권을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은 로마 제국 배경 속에서 제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에 태어나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강력한 통치자인 로마 황제를 역사의 주인공이라 생각했고, 로마 황제를 구주라 부르며, 구원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천사는 진정한 구주가 누구인지 분명히 선포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태어난 아기 예수, 이 분이 구주이십니다. 이 아기가 그리스도이시며 진정한 주님이십니다.
천사는 이어서 목자들에게 아기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알려줍니다. 12절입니다.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천사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의 표적을 줍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강보에 싸여 있는 것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구유는 짐승의 여물통입니다. 가축의 밥그릇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구주이자 메시아인 아기 예수님은 가축을 위한 장소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분의 침대는 구유입니다.
우리가 크리스마스카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광경이 아닙니다. 뭔가 따뜻하고 낭만적인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위대하심과 너무도 대조되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은 그분이 하실 일과 잘 어울립니다.
그리고 이제 13절부터는 좋은 소식에 대한 반응이 이어집니다. 먼저 그 반응은 하늘로부터 시작됩니다. 13절과 14절입니다.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가 목자들에게 메시지를 선포하고 나자, 갑자기 그 수를 알 수 없는 수많은 천사들이 메시지를 전한 천사와 함께 찬송합니다. 누가는 천사들의 찬양을 간략하게 들려주는데, 표현에서 둘씩 서로 짝이 됩니다. 14절에 보시면, 지극히 높은 곳과 땅이 짝이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이 짝이 됩니다. 그리고 영광과 평화가 서로 짝이 됩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합니다. 그리고 땅에서는 사람들이 평화를 누립니다. 여기서 “평화”라는 말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라는 말은 구약에서 “샬롬”에 해당되는 단어입니다. 많은 경우에 ‘평안’으로 번역이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평화,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화목한 관계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은 이미 마리아의 찬양에서 언급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그 의미를 같이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하늘로부터 시작된 반응은 이제 땅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그 소식을 들은 목자들입니다. 15절 보겠습니다.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임무를 마친 수많은 천사들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목자들은 다시 어둠 속에 남겨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은 그 어떤 때보다 환하게 밝아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움직입니다. 자신들이 들은 것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 하며 가서 보자고 말합니다. “자,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얼른 베들레헴으로 가자! 주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이 놀라운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직접 보자!”
목자들은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알리신 것을 단순하게 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아기를 찾으려고 재빠르게 움직입니다. 가서 아기를 찾습니다.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직접 보기 위해서 갑니다. 마침내 목자들은 아기를 찾았고, 부모와 함께 있는 아기를 만납니다. 천사가 말한 그대로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봅니다.
특별히 누가는 이 목자들의 반응에 대해서 동사를 연이어 말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생동감 있게 전합니다. 목자들은 서로 말했고, 빨리 가서, 아기를 찾았고, 그 아기를 보고, 그리고 자기들이 이 아기를 찾아오게 된 이유를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목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그 들은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들은 말씀이 이루어짐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들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 들은 말씀에 반응했습니다.
이 반응은 이제 목자들이 전한 소식을 들은 사람에게까지 이어집니다. 18절입니다. “18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목자들이 전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듣는 자”라고 되어 있는데, 원래 단어는 복수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목자들이 그 소식을 전할 때, 마리아와 요셉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목자들의 증거를 듣는 사람들은 놀람으로 반응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은 단순히 한 번 놀라움을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19절에 나오는 마리아의 반응과 대조를 이룹니다. 19절입니다.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우리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래 19절은 ‘그러나’로 시작됩니다. 목자들이 전한 소식을 듣고 놀랐던 사람들과는 달리,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합니다. 전해들은 말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지속적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마리아는 1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또 다시 말씀을 듣고 바르게 반응하는 모습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목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찬송으로 마지막 무대를 장식합니다. 목자들은 천사를 통해 들은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목자들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찬송하며 돌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하늘에서 천사로부터 시작된 찬송은 이제 땅에서 목자들에게까지 연결되어 울려 퍼집니다. 그 아름다운 찬송이 하늘로부터 이 땅까지 메아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여러 궁금한 것들이 생깁니다. 목자들은 지키던 양들을 어떻게 했을까? 천사들이 함께 부른 찬송은 어떤 노래일까? 천사들은 임마누엘 찬양대처럼 화음을 넣어서 불렀을까? 혹은,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때 누가 아기를 받았을까? 하지만 성경은 이와 같은 질문에 답을 주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이런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이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이 땅에 구주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윗의 동네에,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주, 그리스도,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누가복음의 기록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하셨는지 분명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유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구유에 뉘어져있는 아기입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11절을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시작!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유에 뉘어져있는 그 아기가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 메시아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완벽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 모든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에게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우리를 위한 좋은 소식입니다.
찰스 스윈돌은 그의 책에서 그가 받은 크리스마스카드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읽어드리겠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지식이었다면 하나님은 이를 위해 세상에 위대한 교육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하나님은 이를 위해 세상에 위대한 과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하나님은 이를 위해 세상에 위대한 경제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오락이었다면 하나님은 이를 위해 세상에 위대한 연예인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죄 사함과 용서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구주를 보내셨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구주입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구주가 필요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구주, 우리를 사망에서, 영원한 멸망에서 구해줄 수 있는 구주, 우리는 구주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구주 없이는 안 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구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평화가 없는 자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소망이 없는 자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 기쁨이 없는 자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생명이 없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구주가 오셨다는 이 좋은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빨리 달려가서 그 이루어진 일을 확인하고, 자신이 들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목자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좋은 소식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뭐 당연히 천사가 말한 대로 됐겠지”라고 말하며 그 자리에 그냥 머물겠습니까? “에이, 귀찮게 뭐 하러 힘들게 그래!” “난 그런 일에 별로 관심이 없거든!” 이렇게 말하시겠습니다.
이 목자들에게는 자기 생애에 다시 있을 수 없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그 역사적인 현장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에 우리나라가 월드컵 결승에 진출했고, 여러분이 결승전을 제일 좋은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경기를 코앞에서 볼 수 있는 정말 값비싼 표가 생겼습니다.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표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 귀찮으니까, 그냥 집에서 TV로 볼까요? 우리는 멋진 풍경을 보고 색다른 경험을 하기 위해서 오랜 시간, 차를 타고 가야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유명한 식당을 찾기도 하고, 놀이기구나 특별한 공연을 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경험하기 위해 시간과 돈을 투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말씀에 반응함으로, 그 말씀을 경험하는 일에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을 때 사람들은 다양하게 반응합니다. 어떤 사람은 듣지 않습니다.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딴 생각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듣고 놀라기는 하지만 그러나 좀 더 깊은 생각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계속해서 들으면서도 그냥 그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듣고 때때로 놀라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취해야 할 반응은 단순히 놀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마리아는 들은 모든 말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간직하고 다시 되새기며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러분이 이 좋은 소식을 들었을 때, 여러분이 말씀을 들었을 때, 그에 대한 반응이 단지 일시적인 감정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우리가 들은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은 달라집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들어야할 말씀을 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삶 속에서 말씀을 따라 생각하고 말씀을 따라 말하고 말씀을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말씀이 여러분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에 대해서 말씀이 무엇이라고 하는지 생각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한 좋은 소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과 그 소식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를 위한 좋은 소식과 그에 따른 우리의 반응”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는 것, 이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우리 구주의 나심을 알고, 이 기쁨의 좋은 소식을 들은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오셨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응답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오심을 통해 유익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큰 복을 받은 자입니까?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이 좋은 소식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아기가 되셨습니다.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참된 평화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좋은 소식입니다.
자! 이제 우리가 이 좋은 소식을 들은 자로서 합당히 반응할 차례입니다. 목자들이 말씀을 듣고 길을 떠났던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길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들은 이 기쁨의 소식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들은 소식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나누며, 말씀을 신뢰함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러한 동기가 부족하다면, 그러한 열정이 식었다면, 다시 그분께로 돌아가십시오. 십자가를 기억하며, 그분을 묵상하십시오. 지금 내 상태가 어떠한지를 그분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며 우리의 어두운 눈을 밝혀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다시 힘을 얻어 주님을 위해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통해, “우리를 위한 좋은 소식”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눅 2:8-14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기서 “너희는” 누구일까요? 우리일까요? 온 세상 사람들일까요? 그들이 누구인지는 8, 10-12절에서 나타납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에도 백성 전체에게 말하신 것이 아니라 다윗 동네의 목자들만을 골라서 “너희에게” 전한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더 의아한 것은 “너희를 위한 구주”라는 표현입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임에도 예수님은 엄연히 먼저는 “너희를 위한” (즉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을 위한) 구주이십니다.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도 12절에 따르면 ‘온 백성’이 아닌 “너희 (즉 목자들)에게” 표적이 됩니다. 이렇게 10-12절에서 “너희”라는 말이 4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리고 14절에 가면 “너희”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로 바뀌어 나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은 온 백성에게 미칠 좋은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서 베들레헴의 목자들에게만 먼저 전해주셨습니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일에 대한 중요한 암시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백성을 위한 복음으로 오셨지만 모두가 이를 기뻐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도 콕 집어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이 따로 있었고 그들이 베들레헴에서 밤새워 양을 지키던 목자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를 위해서는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곳이 중요합니다.
아헨 관청에서 비자 신청을 하다가 살짝 입씨름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영문 증빙서류에 나오는 호적 중에서 성씨에 관한 내용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고향을 제 고향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유래한 최초의 곳은 풍천 임씨 - 즉 황해도 풍천입니다. 가본적도 없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이에 대한 기록란이 없습니다. 독일에 제일 많은 성씨들은 Mueller 방앗간에서 일하는 사람, Schmidt 대장장이, Schneider 옷만드는 사람, Weber 직조공처럼 직업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고 Meyer 처럼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어느 특정 지역을 말하지 않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이 원래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굳이 밝히는 시스템이 없습니다. 그래서 독일 공무원이 이해를 못한 거였어요. 물론 현재 ZDF Morgenmagazin의 앵커인 Harriet von Waldenfels처럼 자신이 Franken 지방의 Burg Waldenfels에서 유래한 가문출신이라는 귀족성이 남아있기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호적 등록을 위해 베들레헴으로 갔다는 것은 그곳이 이들의 Ursprung 즉 원적지라는 뜻입니다. 요셉만이 아니라 마리아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의 시스템은 여자들도 인구조사에 포함시켰습니다. 참고로 이집트는 여자 인구조사를 안했습니다. 나쁜 말로 사람 취급을 안 한 거지요.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대신 여자들도 12살부터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집트 여자들은 반대로 세금을 안냈습니다. 이는 요셉도 마리아도 가난하고 못살아서 갈릴리로 강제 식민을 간 사람들의 후예로 추정되지만 (우리나라 세종 때에 김종서 장군에 이끌림을 받아 함경도에 정착했던 전라도와 경상도의 빈농들처럼...) 원래는 엄연히 다윗의 후예 (왕족) 이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것이 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고려 왕조의 왕씨들도 조선 시대에 아주 피곤한 삶을 살았지요. 멸망한 왕가의 일원으로 숨어살며 공무원도 될 수 없었습니다. 아주 가난하게 살았지요.
우리는 다윗이 원래 베들레헴의 목자였다는 것도 기억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이 가진 첫 직업 중의 하나가 농부와 함께 목자로 되어 있습니다. 모두를 먹여 살리는 중요한 일로, 직업에는 높고 낮음이 없는 게 맞지만 인간들이 점점 모여 도시를 만들면서 목자의 삶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직업의 분화이지요. 지금은 직업 사전이 따로 있을 정도입니다. 2018년 한국 직업 사전에 따르면 12,145개의 직업이 있다 합니다. 옛 근동에서 만들어진 직업 리스트가 발굴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도 목자의 위치는 이미 낮게 나옵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힉소스라는 민족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들을 쫓아내면서 우리가 목동들의 지배를 받았었다며 수치심을 보였습니다. 보불 전쟁 때에 비스마르크가 독일군과 함께 행군한 자리를 파리 사람들이 나중에 깨끗이 물청소 했었지요 그처럼 이집트 사람들도 힉소스의 기록을 깨끗이 지워버렸습니다. 목동 출신 요셉이 이집트에서 국무총리를 했던 기억도 그렇게 지워졌을 거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유목민이었고 정착을 해서도 이를 소중히 여겼습니다. 최고의 왕이라 불리는 다윗도 목동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건설한 시온산의 예루살렘은 목동이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 망대라 불리웠습니다. 그래서 미가서 4:8은 그렇게 노래합니다.
“양떼를 지키던 망대, 언덕에 자리잡은 수도 시온아, 네가 잃었던 주권을 도로 찾으리라. 수도 예루살렘의 국권을 되찾으리라.” (미가 4:8 공동번역)
그러나 그 이후 목자의 가치는 점점 더 떨어졌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오면 많은 경우 부자들이 짐승떼를 가지고 있고 목자들은 고용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바리새파가 작성한 살생부로서의 직업 목록이 있었습니다. 그들에 따르면 사람은 행위로 구원받는데 어떤 직업들은 일 자체가 죄를 강요합니다. 때문에 너무 많이 죄를 짓고 그것이 일상이 될 경우에는 값을 수 없어서 또는 가난해서 값을 수 없기에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목자라는 직업이 그렇다고 판단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밤중에 늑대가 양 한 마리를 물어 가면, 목자는 이를 값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필리핀의 바나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바나나를 따서 운송하지만 이를 살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고 굶는 것처럼) 그래서 옆집 양을 자동으로 훔치게 되지요. 이런 일이 빈발해서 저들은 늘 거짓말하고 따라서 구원받을 수 없다 해서... 구원받을 수 없는 직업 목록에 올라 있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자연스레 선한 목자와 거짓 목자가 생겼습니다. 어차피 인정받지 못하는 천한 직업 - 손해 보지 않고 돈만 보는 삯꾼들이 생겼고 다른 한편에는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는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많이 벌지 못하고 환경이 어렵지만 1000년 전의 다윗처럼 여전히 양을 사랑하고 밤을 새워 지키는 목자들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정직한 옛 선비들 같지요. 그 선비들이 꼿꼿하고 정직하며 전통에 따라 학문을 사랑했다면 이 목자들도 정직하며 말씀을 따라 양을 사랑하는 사람들인 거지요. 다윗의 동네에서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며...
이를 우리식으로 적용하면 참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질문합니다. ‘내가 꼭 교회를 주일마다 나와야 하냐고? 십일조를 꼭 드려야 하냐고? 봉사를 하고 양육을 받고 순종하며 헌신해야 하냐고? 내가 필요할 때만 열심히 하고 그 다음에는 대충 하면 되지... 그래도 다 구원받는 것 같은데...’ - 유감스럽게도 그 질문과 이유들이 제 귀에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상황을 왜 모르겠습니까? 저도 바보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반대편에는 한국의 초대교인들이, 또한 저의 선조들이 저에게 알려준 복음과 신앙의 표본이 있습니다. 성도들을 거룩히 여기고 사랑하고, 어려우나 슬프나 함께 있으며, 정해진 시간을 지키며, 주님 앞에 예물을 드리며, 다시 오실 주님을 진짜로 기다리는 삶입니다. 참 목자와 거짓 목자의 삶이 다른 것처럼 참 그리스도인들과 거짓 그리스도인들의 삶도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만백성을 위한 복음을 주시지만 아무에게나 알리실 수는 없으십니다. 한 밤중에 그렇게 베들레헴의 밤을 지키며 다윗처럼 양을 치는 목자들에게 천사들을 다가와 하나님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하나님은 목자 바로 그들에게 좋은 소식을 주셨습니다. 주님이 후에 그렇게 이야기 하셨지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태복음 5:8) 어떤 분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는지?’ 질문합니다. 예 여기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목자들처럼 하면 하나님을 봅니다. 그리고 주님은 후에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우리는 이를 양들을 이끌고 가시는 목자의 전원적인 모습으로 기억하지만... 정말 목자가 선한 지 아닌 지 드러나는 때는 오늘 본문처럼 어둠의 때입니다. 깊은 밤 추울 때입니다. 칭찬이 아니라 멸시를 받을 때입니다. 오늘 본문의 목자들은 그 때에 자신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같은 참 그리스도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사회에서 우리가 사람과 돈을 본다면 승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 오실 주님을 기억하며 이 자리를 지킨다면 우리는 저희에게 다가오는 주의 말씀과 얼굴을 다시 볼 줄 믿습니다. 주님 앞에 정직한 목자로서 결단하며 오늘도 고백하기 원합니다. “그 누구보다 바로 나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그가 나의 길을 인도하실 것이다.” 이를 믿으며 겸손히 나아가는 여러분과 저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