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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국수를 무김치나 배추김치에 말고 돼지고기를 넣은 것을 냉면(冷麵)이라고 부른다. 또 국수에 여러 가지 채소와 배 · 밤, 쇠고기 · 돼지고기 편육, 기름장을 넣고 섞은 것을 골동면(骨董麪)이라고 부른다."1)
이 글은 홍석모(洪錫謨, 1781~1850)가 편찬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1849)의 음력 11월 월내(月內)에 나온다. 여기에서 '월내'란 특정한 날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그달에 주로 행해지는 풍속을 소개할 때 쓰는 말이다. 홍석모는 이 글에서 '냉면'과 '골동면' 두 가지 국수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도 단지 '국수〔麵〕'라 하지 않고 '메밀국수〔蕎麥麵〕'라고 구체적으로 밝혀놓았다. 170여 년 전의 글이지만 요사이도 냉면을 즐겨 먹기 때문에 앞의 '냉면'은 '물냉면', 뒤의 '골동면'은 '비빔국수' 혹은 '비빔냉면'임을 바로 짐작할 수 있다.
먼저 냉면부터 살펴보자. 홍석모는 메밀국수를 무김치〔菁菹〕나 배추김치〔菘菹〕에 만다고 했다. 19세기 말에 쓰인 요리책으로 추정되는 대전의 은진(恩津) 송씨 송병하(宋炳夏, 1646~1697) 집안의 《주식시의(酒食是儀)》에서는 '냉면'의 국물로 '동치머리' 즉, '동치미'를 쓴다고 했다.2) 1896년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요리책 《규곤요람(閨壼要覽)》에서는 "싱거운 무김칫국에다가 화청(和淸)해서"라고 했다.3) 여기에서 '화청'은 꿀을 넣는다는 말이다. 동치미 국물뿐 아니라 꿀까지 넣어 냉면 국물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홍석모는 배추김치에도 메밀국수를 만다고 했다. 국물이 거의 없는 양념으로 버무린 요사이 배추김치를 생각하면 이 말은 무척 생경한 대목이다. 그러나 19세기 초는 국물이 많은 배추김치와 양념 위주의 배추김치가 막 분화하기 시작하던 때다. 홍석모가 문성(文星, 훌륭한 문인)이라고 존경했던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유중림(柳重臨, 1705~1771)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권8)에 나오는 싱거운 소금물에 배추만을 절인 국물이 많은 '배추김치 만드는 법〔菘沈菹法〕'을 인용하면서 '숭저(菘菹)', 즉 '배추김치'라고 불렀다.4) 그러니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배추김치에 메밀국수를 말아 먹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요리법이었다. 냉면 위의 고명으로 홍석모는 돼지고기〔猪肉〕를 꼽았다. 여기서 돼지고기는 아마도 지금도 냉면 고명으로 올리는 돼지고기 편육을 이르는 듯하다.
냉면에 이어 홍석모가 언급한 골동면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홍석모는 골동면의 국수를 단지 '국수'라고만 적었지만, 앞뒤 문장의 내용으로 보면 골동면도 메밀로 만든 국수를 사용했을 것이다. 국수 외의 재료로는 한자로 '잡채(雜菜)'라고 적은 여러 가지 채소와 배 · 밤, 그리고 쇠고기 · 돼지고기 편육이 있다. 냉면과 달리 골동면에는 쇠고기 편육도 들어갔다. 이 밖에 눈에 띄는 점은 국수와 재료들을 비빌 때 사용하는 양념이다. 홍석모는 기름장〔油醬〕으로 비빈다고 했다. 당시의 기름장은 참기름과 간장을 섞어서 만든 것이다. 만약 이 기름장만 넣고 비볐다면 요사이처럼 고추장 · 간장 · 참기름 · 설탕 등으로 만든 양념장으로 비빈 비빔냉면과는 맛이 아주 달랐을 것이다.
19세기 말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 요리책 《시의전서(是議全書) · 음식방문(飮食方文)》에는 '골동면(汨董麵)'을 한글로 '부븸국슈(비빔국수)'라고 적었다. 그런데 요리법은 홍석모가 적어놓은 '골동면'과 다르다. 즉, "황육(黃肉, 쇠고기) 다져 재서 볶고 숙주 · 미나리 삶아 묵 무쳐 양념 갖춰 넣어 국수를 비비어 그릇에 담고 위에는 고기 볶은 것과 고춧가루 · 깨소금 뿌려 쓰되 상에 장국 놓으라"5)고 했다.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증손자 김이익(金履翼, 1743~1830) 집안의 《주식방문》에 나오는 '국수부비음'이란 요리법 역시 《시의전서 · 음식방문》과 비슷하다.6) 홍석모의 사촌형인 홍경모(洪敬謨, 1774~1851)는 1798년에 쓴 〈의초(擬招)〉라는 글에서 "우리나라에서는 국수에 배 · 유자 · 닭고기 · 돼지고기 등의 다섯 가지 재료를 섞는데, 이를 골동면이라 한다"7)고 했다. 이와 같이 지역마다 집안마다 비빔국수에 넣는 재료는 약간씩 달랐지만, 국수 비벼 먹기는 상당히 유행했던 듯하다. 홍석모 역시 그러한 모습을 놓치지 않고 《동국세시기》에 담았다.
조선시대에는 냉면 국수를 주로 메밀로 만들었다. 그런데 메밀가루에 전분을 섞으면 반죽이 이내 돌덩어리처럼 단단해져서 국수를 뽑으려면 장정이 국수틀에 올라가서 힘껏 눌러야 국수 가락을 낼 수 있었다.김준근, 〈국수 누르는 모양〉, 19세기 말, 종이에 채색, 독일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소장.
홍석모는 냉면과 골동면을 소개하면서 "관서(關西)의 국수가 가장 훌륭하다"8)는 말을 마지막에 적었다. 여기서 '관서'는 한반도 북서부 지역인 평안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평안도 안에서도 특히 평양부(平壤府)는 당시에 이미 냉면의 본고장으로 알려졌으며, 지금도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다.
홍석모가 음력 11월의 세시음식으로 냉면을 꼽은 데 비해 대략 한 세대 앞서서 살았던 유득공(柳得恭, 1748~1807)은 비록 윤달이지만 음력 3~4월에 평양에서 냉면을 먹었다.9) 이면백(李勉伯, 1767~1830) 역시 1826년 음력 3월에 평양에 들러서 사람을 얼게 하는 냉면을 먹고 시를 지었다.10) 이로 미루어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평양 사람들은 겨울은 물론이고 봄에도 냉면을 먹었던 듯하다. 그즈음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평양 지도인 〈기성전도(箕城全圖)〉에는 아예 냉면 거리가 표시되어 있을 정도다. 대동강 주변의 즐비한 가옥 사이에 '향동(香洞) 냉면가(冷麵家)'라는 지명을 표시해놓았는데, 아마도 당시 평양에 냉면을 판매하는 음식점이 밀집한 거리가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평안도뿐 아니라, 황해도 역시 당시에 냉면으로 유명한 고장이었다. 1797년 음력 윤6월부터 1799년 음력 1월까지 곡산(谷山, 지금의 황해북도 곡산군)의 부사(府使)로 재직했던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서흥도호부(瑞興都護府, 지금의 황해북도 서흥군)의 부사(府使) 임성운(林性運)에게 한시를 한 편 보내면서 "(음력) 시월 들어 서관(西關, 평안도와 황해도)에 한 자나 눈이 쌓이면, 겹겹이 휘장에 푹신한 담요로 손님을 붙잡아둔다네. 벙거짓골(삿갓 모양의 전골냄비)에 저민 노루고기 붉고, 길게 뽑은 냉면에 배추김치 푸르네."11)라고 했다. 황해도 사람들 역시 한겨울에 냉면을 즐겼던 것이다.
앞에서 홍석모가 소개했듯이 조선시대에는 냉면 국수를 주로 메밀로 만들었다. 당시 메밀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서 재배되었던 곡물이다. 이응희(李應禧, 1579~1651)는 《옥담시집(玉潭詩集)》에서 메밀을 음력 7월 초순에 심어 가장 늦게 수확한다고 했다.12) 메밀은 여름에 파종하여 2~3개월만 지나면 수확할 수 있을 정도로 생육 기간이 짧고, 토양을 가리지 않고 잘 자란다. 특히 가을에 추수하는 벼와 한여름에 추수하는 보리 · 밀과 재배지와 농사 기간이 겹치지 않아 구황작물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홍석모가 살던 당시 황해도와 평안도 사람들은 한여름에 겨울밀을 수확하여 만두와 함께 국수를 자주 만들어 먹었다. 그 식습관 때문에 겨울이 되면 늦가을에 추수한 메밀로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 그래서 홍석모는 음력 11월 월내 세시음식으로 냉면을 꼽았던 것이다.
평양 성내의 전경을 그린 회화식 지도 〈기성전도(箕城全圖)〉이다. 대동강을 따라 20여 척의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과 함께 대동강변의 향동(香洞)에 ‘냉면가(冷麵家)’라는 표시가 있다. 평양냉면의 명성이 조선 후기 지도에까지 담겨 있다.〈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홍석모는 풍산(豐山) 홍씨 추만공(秋巒公) 홍영(洪霙, 1584~1645)의 자손이다. 이 집안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1735~1815, 헌경왕후)를 배출하는 등 대대로 권세를 누리던 경화세족(京華世族, 서울에 살면서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는 명문가)이었다. 부친 홍희준(洪羲俊, 1761~1841)은 이조판서와 홍문관 제학을 지내고 기로소(耆老所, 조선시대에 70세 이상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갈 정도로 막강한 세력가였다. 모친은 용인(龍仁) 이씨로 1781년 음력 7월 29일에 홍석모를 낳았다. 홍석모는 1795년에 고모뻘 되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에도 참석했다. 아마 이때쯤 부인 청주(淸州) 한씨(1780~1857)와 혼인을 한 듯하다.13)
1804년 생원시(生員試)에 2등으로 합격했지만, 조상을 잘 둔 덕에 그 이후의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음사(蔭仕)로 1815년 35세에 대학장의(大學掌議)가 되었다. 4년 가까이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1819년 39세에 과천현감(果川縣監)을 시작으로 1833년 음력 7월에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임명되는 등 오랫동안 지방관을 지냈다. 1839년 음력 4월에 강릉(康陵, 명종과 인순왕후의 능, 서울 도봉구 공릉동)의 관리 책임자인 영(令)이 되었고, 같은 해에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 종4품의 책임자)에 임명되었다.
홍석모는 어릴 때부터 서예에 재주가 있었다. 12세 때인 1792년 평안도 관찰사인 조부 홍양호(洪良浩, 1724~1802)를 따라 평양에 간 적이 있는데, 이때 조부가 지은 영명사(永明寺, 지금의 평안남도 평양시 금수산에 있는 절) 중수기(重修記)를 붓글씨로 써서 족자로 걸어놓을 정도였다.14) 한시에도 조예가 깊었던 홍석모는 24세 때 과거공부를 하면서 '상심계(賞心契)'라는 시사(詩社, 시 창작모임)를 주도하였고, 말년에 '국사(菊社)'라는 시사도 만들었다.
《동국세시기》는 음력 1월부터 12월까지 각 달에 있는 명절의 명칭을 적고 그다음에 각각의 세시풍속을 적었다. 특정한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는 세시풍속은 '월내'라는 소제목 아래에 배치했다. 《동국세시기》 음력 1월의 내용은 유득공의 《경도잡지》에서 많이 옮겨왔다. 세시풍속의 유래에 대해서는 6세기에 중국의 종름(宗懍)이 양쯔강 중류에 있던 '형초' 지방의 풍속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를 비롯하여 중국 문헌에 의지했고, 지방의 세시풍속 기록은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인용하였다. 그 밖의 내용은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동국세시기》의 서문을 쓴 이교영(李敎英, 1786~1850)은 "한 나라의 풍속과 아울러 중국의 옛 풍속까지 묘사해 유사한 것을 살려 엄연한 하나의 체계로 엮어냈다"15)고 했다. 그전에 편찬된 《경도잡지》와 《열양세시기(列陽歲時記)》의 저자들이 주로 왕실과 서울의 세시풍속을 기록하려고 했다면, 홍석모는 《동국세시기》에서 조선 전체의 세시풍속을 담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또한, "풍부하다. 그의 표현력이여. 반드시 후세에까지 충분한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고 한 이교영의 기대대로 《동국세시기》는 20세기 이후에 가장 많이 인용된 조선시대 책 중의 하나가 되었다. 《동국세시기》는 1911년 7월 20일,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주도한 서양식 출판사 겸 고전간행단체인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유득공의 《경도잡지》,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열양세시기》와 함께 근대 인쇄술로 간행되면서 수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특히 《매일신보》에서는 1916년 12월 15일부터 이듬해 4월 1일까지 《동국세시기》의 주요 내용을 40회에 걸쳐 연재했다. 해방 이후에도 《동국세시기》에 적힌 세시풍속은 명절마다 언론에 소개되었다.
홍석모 본인이 경화세족 출신으로 일생의 많은 시간을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동국세시기》에는 서울과 경기도의 세시음식에 대한 기록이 지방에 비해서 훨씬 풍부하게 실려 있다. 특히 홍석모는 서울 사람들이 행하는 세시풍속을 소개할 때 앞머리에서 '도속(都俗)'이라고 별도로 칭했다. '도속'의 '도(都)'는 도시, 즉 '서울'을 가리키고, '속(俗)'은 민간의 관습을 뜻한다. 그러니 '도속'은 당시 서울 사람들의 관습, 즉 당시에 서울에서 유행한 풍속을 이르는 말로 굳이 지금 말로 옮기자면, "서울의 민간에서는"이라는 표현이다.
홍석모는 음력 3월의 '월내'에서 "서울 남산 아래서는 술을 잘 빚고, 북부(北部)에서는 맛있는 떡을 만드는 곳이 많다"16)고 했다. 조선시대 서울은 지금과 달리 북악산과 남산, 그리고 사대문 안쪽이 시가지였고, 청계천이 서울의 남북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이러한 지리환경을 바탕으로 서울은 오부(五部,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 중부)로 나뉘었는데, 앞에서 말한 북부는 바로 청계천 북쪽, 지금의 종로구 일대였다. 요사이도 낙원상가 일대에 떡집이 몰려 있듯이 홍석모가 살았던 시대에도 꼭 그 자리는 아니지만 북부 쪽에 맛있는 떡을 판매하는 떡집이 많았던 것이다.
1750년대 초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의 〈경도오부(京都五部)〉. 조선시대 서울은 지금과 달리 북악산과 남산, 그리고 사대문 안쪽이 시가지로, 동부 · 서부 · 남부 · 북부 · 중부의 5부로 나뉘었다.<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홍석모는 "서울 사람들은 (이를 두고) '남주북병(南酒北餠)'이라고 일컫는다"고 했다. '남주'는 당시 서울에서 술을 양조하고 판매하는 곳인 매주가(賣酒家)가 많이 몰려 있는 곳이다. 《동국세시기》에서는 남산 아래와 마포의 공덕(孔德)을 꼽았다. 남산 아래의 양조장에서는 음력 3월이면 소국주(小麴酒, 누룩을 적게 하여 담근 청주) · 두견주(杜鵑酒, 진달래꽃을 넣어 빚은 청주) · 도화주(桃花酒, 복숭아꽃을 넣어 빚은 청주) · 송순주(松筍酒, 소나무의 햇순을 넣어 빚은 청주) · 과하주(過夏酒, 여름에 빨리 시지 않도록 청주에 소주를 섞어서 빚은 술) 등을 빚었다. 증류주인 삼해주(三亥酒)는 공덕의 독막〔甕幕〕에서 내린 것이 유명하다고 했다. 음력 8월이 되면 이들 양조장에서는 햅쌀로 술을 빚었다고 적었다.
음력 10월에는 서울의 민간에서 기름 · 간장 · 계란 · 파 · 마늘 · 후춧가루로 양념한 쇠고기를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 난로회(煖爐會)가 유행한다고 적었다. 난로회는 이때부터 겨울 내내 즐기는 일종의 불고기 파티였다. 열구자신선로(悅口子神仙爐)도 난로회처럼 사람들이 여럿이 모여서 먹는다고 했다. 또 서울의 민간에서는 이때 김장을 했다. 홍석모는 "무 · 배추 · 마늘 · 고추 · 소금으로 질그릇 항아리에 김치를 담근다. 여름의 장과 겨울의 김장은 민가의 일 년 중 큰일이다"17)라고 적었다.
비록 세시음식 자체에 대한 설명은 아니지만, 서울 사람들의 음력 3월 한식(寒食) 때의 성묘에 대한 묘사도 《동국세시기》에 나온다. 즉, "서울의 민간에서는 이날 조상의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낸다. 설날 · 한식 · 단오 · 추석의 네 명절에 술 · 과일 · 포(脯, 말린 고기 혹은 말린 생선) · 해(醢, 식해) · 떡 · 면 · 확(臛, 탕) · 적(炙, 산적) 등의 음식으로 지내는 제사를 절사(節祀)라고 하는데, 선대로부터의 전통과 가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식과 추석에 가장 성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식 때 "사방 교외에 남녀들의 행렬이 줄지어 끊이지 않는다"고 그 풍경을 기록했다.18)
가을이 되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서울 사람들 역시 음식을 먹으면서 단풍 구경을 했다. 즉,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서울의 민간에서는 이날 남과 북에 있는 산에 올라가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노는데 이것은 등고(登高)하는 옛 풍습을 따른 것이다. 청풍계(靑楓溪, 인왕산 동쪽 기슭의 북쪽,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 일대의 골짜기) · 후조당(後凋堂, 남산 기슭에 있었던 조선 개국공신 권람(權覽)의 집, 지금의 중구 예장동) · 남산 · 북한산 · 도봉산 · 수락산에 단풍 구경하기 좋은 곳이 있다"19)고 적었다. 단풍 구경을 하면서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에 대해서 적어놓지는 않았지만, 홍석모가 밝힌 중양절의 국화전과 국화떡, 그리고 국화주가 당시 서울 사람이 단풍 구경 때 먹고 마셨던 세시음식이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서울 사대문 안팎의 인구가 대략 30만 명 전후였다고 하는데,20) 《동국세시기》를 통해 그 당시 서울에 떡집 · 음식점 · 양조장 · 채소장수 · 생선장수가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사대문 안에 살던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농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식재료를 시장에서 사든지 물건을 팔러 다니는 부상(負商, 등짐장수)이나 보상(褓商, 봇짐장수)에게 구입하였다. 지금이야 웬만한 식재료는 제철이 따로 없을 정도로 아무 때나 구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제철이 아닌 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때를 지켜 음식을 만들고 즐기는 일이 풍습이 되었다. 떡집인 '매병가(賣餠家)'에서도 제철에 나는 식재료로 온갖 떡을 만들어 사람들의 입맛을 유혹했다.
음력 2월 1일, 삭일(朔日, 초하룻날)에 "매병가에서는 팥, 검은콩, 푸른콩으로 떡소를 넣거나 혹은 꿀을 섞어 싸기도 하고, 찐 대추나 삶은 미나리를 떡소로 넣기도 한다. 이달부터 먹는 세시음식이다"21)고 했다. 홍석모는 이 글의 앞에서 음력 2월 1일부터 농사가 시작되기 때문에 농가에서는 정월 대보름 때 세워놓았던 볏가릿대에서 알곡을 털어내어 흰떡〔白餠〕을 만들고, 삶은 콩 떡소를 넣은 반달 모양의 송편〔松餠〕을 노비들에게 나누어준다고 했다. 노비떡에 대한 내용은 오래된 풍습으로 앞선 시기에 나온 유득공의 《경도잡지》에서도 이미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서울의 떡집에서 콩뿐 아니라 팥 · 꿀 · 대추 · 미나리 따위를 떡소로 넣어 만들기도 한다는 내용은 홍석모가 직접 확인한 당대의 생생한 풍경이다.
이것뿐이 아니다. 홍석모는 서울의 떡집에서 음력 4월에 찹쌀가루 반죽에 술을 넣고 발효시킨 방울 모양의 떡에다 삶은 콩과 꿀을 섞어 만든 소를 넣고 대추 과육을 떡 위에 붙여 찐 증편을 판다고 했다.22) 음력 5월 단오에는 쑥을 짓이겨 멥쌀가루와 함께 반죽하여 수레바퀴 모양으로 만든 떡,23) 음력 8월에는 햅쌀로 만든 송편이나 무와 호박을 넣은 시루떡, 검은콩이나 노란콩 가루나 혹은 볶은 참깨가루를 묻힌 찹쌀 인병(引餠, 인절미)과 밤단자 · 토란단자,24) 그리고 음력 10월에는 찹쌀가루를 술에 반죽하여 조각 낸 다음 햇볕에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낸 여러 가지 색을 낸 강정〔乾飣〕을 판다고 했다. 특히 백색과 홍색 강정은 다음 해 설날과 봄철에 민가에서 제물로 사용하며, 설날 손님맞이용으로 없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이달부터 세시음식으로 시장에서 많이 판다"25)고 적었다.
조선 후기 서울의 떡집에서는 음력 5월 단오가 되면 수레바퀴 모양의 떡(왼쪽)을, 음력 10월에는 찹쌀가루 반죽을 햇볕에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낸 강정(오른쪽)을 판매했다.〈출처: 셔터스톡〉
특히 음력 3월의 월내에 적어놓은 매병가의 판매용 떡에 대한 묘사는 요리책을 능가할 정도로 요리법이 정연하다. "매병가에서는 멥쌀로 작은 흰떡을 만드는데 모양이 꼭 방울 같고, 그 속에 콩으로 떡소를 넣은 후에 머리 쪽을 오므린다. 그 방울 같은 떡에 오색 물을 들여 구슬을 꿴 것처럼 다섯 개를 이어 붙인다. 푸른색이나 흰색으로 반달 모양의 떡을 만들기도 한다. 작은 것은 다섯 개를 이어 붙이고, 큰 것은 두세 개를 이어 붙인다. 이를 모두 산병(饊餠, 수란떡 혹은 셋붙이)이라고 부른다. 또 오색의 둥근 떡, 소나무 껍질과 쑥으로 만든 둥근 떡을 만드는데, 이를 환병(環餠, 고리떡)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 큰 것은 마제병(馬蹄餠, 말굽떡)이라고 부른다. 또 찹쌀에 대추의 과육을 섞어 증병(甑餠, 시루떡)을 만든다"26)라고 했다. 본인이 직접 만드는 과정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자세히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석모가 언급한 매병가의 산병 요리법은 《시의전서 · 음식방문》에도 나온다. 즉, "각색(各色, 여러 가지 색)으로 하나씩 떼서 등으로 휘여 두 끝을 마주 붙이면 이름이 산병이니라"27)고 했다. 홍석모의 묘사와 비교하면 그 요리법이 상세하지 않은 편이다. 1924년에 간행된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서는 산병을 '셋붓치(셋붙이)'라고 부른다고 적었다. 아마도 청 · 홍 · 황 삼색 떡을 이어 붙였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홍석모는 오색 떡을 이어 붙인다고 했으니 '다섯붙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산병과 달리 환병과 마제병의 요리법은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시대 요리책에서 찾지 못했다. 조선시대 요리책은 주로 중국의 문헌이나 왕실과 사가(私家)의 것이라서 서울 떡집의 요리법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오색 산병'은 서로 경쟁하던 서울의 떡집에서 개발해낸 떡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가능성이 많다.
비슷한 시기에 인구가 100만 명이 훨씬 넘었던 일본의 에도〔江戸, 지금의 도쿄〕에 있던 한 음식점에서는 자체 요리책을 출간하여 마치 전단지처럼 손님에게 뿌렸다고 한다. 음식점이 성업하면서 새로운 요리법이 많이 개발되고 또 그 요리법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런 방식으로 음식점을 광고한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서울의 떡집은 사가에서 만드는 떡보다 훨씬 다양한 종류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요리책을 낼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행스럽게 홍석모가 그중 몇 가지 요리법을 기록으로 남겨놓았으니, 오늘날에도 조선시대 서울 떡집의 떡맛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동국세시기》의 서문을 쓴 이교영은 홍석모가 "가까이는 서울부터 멀리는 궁벽한 시골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행사라고 해도 명절에 해당되는 것은 비록 비속한 것일이지라도 남김없이 모두 수록하였다"28)고 평가했다. 그렇다. 더욱이 홍석모는 그전의 다른 세시기에 비해 세시음식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그중에는 평양의 냉면, 서울 떡집의 각종 떡, 그리고 선물로 주고받았던 술도가에서 빚어낸 명주에 대한 기록이 특히 눈에 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조선의 명절과 세시풍속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주로 중국 문헌에 기댄 홍석모를 두고 비판을 한다. 그러나 《동국세시기》를 내용별로 분류하여 읽으면 무엇보다 홍석모가 살던 시대의 세시음식을 만날 수 있다. 문득 19세기의 세시음식이 궁금해진다면 《동국세시기》를 꺼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