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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 <이준형의 보물상자 : 20세기 초중반을 빛낸 이탈리아 테너의 전설들> (1)
오늘은 가슴벅차게도 테너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계보를 잇는 명테너들이라니..
# 엔리코 카루소 (Enrico Caruso, 1873~1921)
2. 루제로 레온카발로 (1857~1919)
<팔리아치> 중 '의상을 입어라(Vesti la giubba)'
- 엔리코 카루소(테너), 살바토레 코토네(피아노)
(2:11)
*1902년 녹음
1902년 카루소 음역이 넓고 대체로 어둡다는 평...전에도 그랬지만 카루소 음반들은 음반 상태도 그렇고 뭔지 집중이 잘 안된다.
게다가 오늘은 너무 짧았다. 30여년 전 중학교 영어교과서에서 카루소와 같이 훌륭한 성악가가 되고 싶다는 문장에서 처음접했을때
많이 궁금했었는데...기대에는 살짝 못미치는 듯하다.
요약 카루소는 자신의 음성을 음반으로 남긴 최초의 음악가로 당대 최고의 출연료를 받는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가수였던 인물이다. 9세에 교구 내 성가대원으로 활동했으나 정식 음악교육은 18세에 굴리엘모 베르지네에게 배우면서 시작되었다. 3년 뒤에 나폴리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모렐리의 <아미코 프란체스코>로 데뷔했고, 4년 뒤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신작 오페라 <페도라>에서 로리스 역을 맡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903년 11월 23일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개관 첫날 밤 <리골레토>로 미국 무대에 데뷔했으며, 이후 17년간 이 극장의 시즌 개시를 맡아 모두 36개의 배역을 노래했다. 호소력 있는 테너 음색을 가진 그는 목소리는 특히 저음부에서 풍부하게 울렸고 온화함과 생동감, 부드러움이 넘쳤다.
자신의 음성을 음반으로 남긴 최초의 음악가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20명의 아이 중 18번째로 태어났으며 어디서나 나폴리의 민요를 부르며 다녔다.
9세에 교구 내 성가대원으로 활동했으나 정식 음악교육은 18세에 굴리엘모 베르지네에게 배우면서 시작되었다. 3년 뒤인 1894년 나폴리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모렐리의 〈아미코 프란체스코 L'Amico Francesco〉로 데뷔했고, 4년 뒤 강한 인상으로 여러 배역을 소화해내고 나서 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신작 오페라 〈페도라 Fedora〉에서 로리스 역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역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직후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연을 가졌다. 〈라 보엠 La Bohème〉으로 라 스칼라 극장에서 데뷔(1900)한 후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 Adriana Lecouvreur〉·〈게르마니아 Germania〉·〈서부의 아가씨 La Fanciulla del West〉 등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라 스칼라 극장에서는 〈라 마셰르 La Maschere〉·〈사랑의 묘약 L'elisir d'amore〉의 주역을 맡았다. 1902년 봄 몬테카를로에서는 〈라 보엠〉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는 〈리골레토 Rigoletto〉에 출연한 이래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03년 11월 23일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개관 첫날 밤 〈리골레토〉로 미국 무대에 데뷔했으며 이후 17년간 이 극장의 시즌 개시를 맡아 모두 36개의 배역을 노래했다. 1920년 607번째 메트로폴리탄 고별공연 때 〈유대 여인 La Juive〉에서 엘레아자르 역을 노래했다. 카루소는 당대 최고의 보수를 받는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가수가 되었다. 강하면서도 동시에 서정적인 소리를 가졌지만, 만년에는 이런 특질이 다소 약화되었다. 호소력 있는 테너 음색으로 특히 저음부에서 풍부하게 울렸고 온화함·생동감·부드러움이 넘쳤다.
레제로-가장 가볍고 우아하며 투명한 테너 역할 티토 스키파, 레제로 테너의 정통을 이은 사람
영역은 좁다.
노래의 하프시코드, 그 아름다운 정취
Tito Schipa
고아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지닌 20세기 전반기의 대표적 리릭 테너. 오페라 가수로도 일급이었지만 가벼운 라틴계 음악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린 크로스오버의 원조다.
도니체티의 《사랑의 묘약》은 희극 오페라면서도 정말 사랑스럽고 서정적이라는 찬사가 잘 어울리는 작품이다. 제1막 거의 끝부분에 〈아디나, 내 말 믿어주오〉라는 단순하고 조금 덜 유명한, 그러나 이 오페라의 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가슴 저린 감동에 사무칠 노래가 나온다. 엉터리 미약(媚藥)을 마시고 하루만 지나면 약효가 발휘되리라 믿는 네모리노를 앞에 두고 아디나가 군인 벨코레와 당장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자신만만하던 네모리노가 당황해하면서 부르는 곡이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디나, 오늘은 (결혼)하지 말아요.
아디나, 내 말 믿어줘요.
내일까지만 기다려줘요.
그 까닭을 지금 얘기할 수는 없지만
내일이면 다 알게 될 터이니
제발 내 마음에 상처를 주지 마세요.
네모리노 역만큼은 루치아노 파바로티를 따라갈 자가 없다는 것이 나의 오랜 믿음이었다. 하지만 언젠가 티토 스키파의 음반에서 이 곡을 듣는 순간 그만의 감칠맛 나는 묘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짝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만용을 부렸지만 사실은 너무나 순진하고 새가슴인 네모리노의 아릿한 고통이 그대로 내 마음에 전해졌기 때문이다.
스키파는 종종 베냐미노 질리와 비교된다. 엔리코 카루소의 시대가 끝나갈 즈음인 1920년을 전후해 이탈리아 오페라의 차세대 테너로 많은 일급 가수들이 한꺼번에 전성기에 진입했는데, 이중 전형적인 리릭 테너에 해당하는 명가수가 질리와 스키파였다. 결점을 찾을 수 없는 완벽한 발성의 테너 질리에 비해 스키파는 여기저기 약점이 많았다. 그런데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로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다. 오죽하면 '가수 중의 가수'라는 영광스런 별명까지 얻었겠는가. 비록 성악적으로 가장 위대하지는 못했지만 노래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었으며 크로스오버의 진정한 원조라 할 만큼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린 테너가 스키파였다.
스키파는 이탈리아 남부의 레체(Lecce)에서 태어났다. 출생일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지금은 1888년 12월 27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집안 형편이 무척 어려웠고 당시 유명 가수의 출발이 대개 그러했듯 그도 노래 하나로 그 모든 상황을 극복했다. 성당 행사에서 독창을 불렀다가 마침 그곳을 방문한 주교의 눈에 띈 것이 인연이 되어, 신학교에 입학한다면 학비를 대주고 노래 공부까지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만난 스키파의 첫 성악 스승은 알체스테 가룬다(Alceste Garunda)라고 그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선생이었다. 그는 스키파의 재능을 철석같이 믿고 3년을 가르친 다음 자선음악회를 열어 그 수익금 전부를 제자에게 주었다. 밀라노의 에밀리오 피콜리(Emilio Piccoli)라는 더 좋은 선생에게 가라는 여비였다. 피콜리에게 2년을 더 배운 후 스키파는 이 두 번째 스승의 주선으로 《라 트라비아타》의 알프레도 역으로 데뷔한다. 1910년의 일이었다. 이때의 성공을 바탕으로 2년 동안 고향을 비롯한 각 지방 오페라 극장을 돌아다니며 20여 곡의 레퍼토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13년은 스키파에게 개벽이 이루어진 해였다. 밀라노의 달 베르메 가극장이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로 떠오르던 아멜리타 갈리 쿠르치(Amelita Galli-Curci, 1882∼1963)의 상대역으로 스키파를 지목한 것이었다. 벨리니, 도니체티의 정통 벨칸토 오페라에서 찰떡궁합을 자랑한 두 사람은 오랫동안 황금 콤비로 명성을 떨쳤다. 갈리 쿠르치와는 스키파 딸의 대모를 그녀가 맡을 정도로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다. 스키파 최초의 레코딩 역시 1913년에 이루어졌는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리골레토》, 《라 조콘다》 등의 아리아를 부른 이 음원은 현재 님버스와 EMI 음반을 통해 만날 수 있다. 최초의 해외 공연 역시 같은 해에 경험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가극장(Teatro Colon)이 그 무대였는데, 당시 메트로폴리탄이나 라 스칼라에 못지않은 세계적 극장이었으며 성악가들에게 엘도라도로 여겨진 곳이었다. 그의 명성은 끝없이 올라갔다. 너무나 정확한 딕션마저 화제였다. 스키파의 알아듣기 쉬운 발음 때문에 오페라 관객들이 따로 대본을 살 필요가 없어져서 밀라노 인쇄업자들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우스개 소문이 돌 정도였다.
1914년에는 로마 가극장과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 이듬해에는 1950년대까지 관계가 지속되었던 라 스칼라에 데뷔했다. 그에게 대가수의 기회를 열어준 달 베르메 극장에서도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의 지휘로 갈리 쿠르치와 함께 노래했다. 1917년에는 런던과 바르셀로나, 마드리드에 진출했는데 특히 스페인에서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때부터 스키파는 스페인을 제2의 고향이요, 스페인어를 제2의 언어로 여겼다고 한다. 한편 1917년은 푸치니가 《제비》를 초연한 해이기도 했다. 이 오페라의 주인공 루제로는 젊고 매력적으로 밝으면서도 열정적인 캐릭터로 스키파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이것을 안 푸치니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초연의 주인공으로 아직 20대의 젊은 테너 티토 스키파를 선택했다. 바야흐로 스키파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1919년 스키파는 시카고 시립 오페라(Chicago Civic Opera)에 데뷔했다. 반면 경쟁 극장인 메트로폴리탄에서는 이듬해 카루소가 떠난 빈자리를 베냐미노 질리가 채우게 되었다. 두 라이벌의 진검승부가 비록 각기 다른 도시였지만 미국에서 동시에 벌어진 셈이다. 스키파에게 유리했던 점은 아멜리타 갈리 쿠르치라는 최고의 파트너가 있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면 서로의 미성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교감이 생긴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스키파의 인기는 당시 시카고 오페라 경영진의 중요 지시 사항이었던 앙코르 절대 불가 원칙마저 깨뜨렸다. 《마르타》 중 〈꿈과 같이〉를 부른 후 청중들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앙코르를 요구하는 바람에 지휘자는 한 번 더 지휘봉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극장측이 이를 문제삼아 지휘자를 해고하겠다고 했더니 스키파가 "나도 함께 잘리겠노라."라고 고집을 피워 없던 일이 되었다. 〈꿈과 같이〉도 스키파를 상징하는 노래 중 한 곡이 되었으며, 그의 보기 드문 영상 자료 속에 남아 있다.
메트로폴리탄 데뷔는 뒤늦은 1932년에야 이루어졌다. 질리 때문에 12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지만 일을 풀어준 것도 질리였다. 1932년 시즌을 앞두고 메트측이 대공황을 이유로 출연료 일괄 삭감 방침을 전달하자 자존심이 상한 질리가 유럽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시카고를 떠난 스키파는 질리가 거절했던 계약 조건으로 그 빈자리를 선선히 물려받았다. 이미 충분한 부를 움켜쥐었으므로 '메트로폴리탄의 간판 스타'라는 명예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스키파도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 때문에 경력에 큰 오점을 남길 뻔했다. 1941년 남미 연주회 도중 무솔리니의 양자이자 이탈리아 외무장관이었던 치아노 백작(Count Ciano)의 권유를 받아 조국으로 돌아가버렸고, 전시에는 라 스칼라와 로마를 위시한 이탈리아 극장에서 노래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패전 후 파시스트 정권에 협조했다는 의심을 받았으나 다행히 적극적인 동조 혐의는 발견되지 않았다. 덕분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미국에서 스키파의 활동 기반이 처음에 시카고, 그 다음에 뉴욕이었을 때도 그의 저택은 이보다 한참 떨어진 서부의 할리우드에 위치해 있었다. 영화광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으로 직접 출연한 것이 확실히 밝혀진 것만도 세 편이나 된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영화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제7천국(The Seventh Heaven)》이란 작품이 있었는가 하면, 남미 목동의 이야기인 《가우초(Gaucho)》에서는 라틴아메리카 탱고풍으로 곡을 만들어 직접 부르기도 했단다. 폭발적 인기에 힘입어 스키파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다. 얼마나 큰돈을 벌었는지 1931년 나폴레옹 역으로 영화 출연을 요청받았을 때 미련 없이 거절했다고 한다. 출연료가 무려 50만 달러(당시 물가를 생각하라!)에 달했는데도 이유는 간단했다. 캐릭터가 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번 돈을 아낌없이 탕진했고 자식에게 큰 재산을 물려주지도 못했다.
그가 손을 댄 것은 영화음악만이 아니었다. 두 편의 오페레타와 한 곡의 미사, 상당히 많은 나폴리 민요, 대중음악 등의 작곡가로 이름을 올렸다. 직접 작곡한 나폴리 민요는 연주회에서 앙코르곡으로 불렀고 녹음도 남아 있다. 이밖에 〈맘마〉의 작곡가 빅시오(Cesare Andrea Bixio)가 스키파를 위해 쓴 나폴리 민요를 즐겨 불렀고, 제2의 조국으로 생각한 스페인 노래도 좋아했다. 이중에서도 〈아마폴라〉나 〈발렌시아〉는 스키파 덕분에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오페라 평론가 존 스틴(John Steane)이 카루소와 질리, 스키파를 비교한 글이 있다. 너무 스키파에게 우호적인 표현인 듯하지만 말이다.
"카루소가 듣는 이를 굴복시키고 질리가 명령하는 스타일이었다면, 스키파는 청중들에게 무엇인가 정중하게 요청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스키파는 자신의 장점과 한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미성이기는 하지만 아주 맑게 퍼지는 소리가 아니었으며 청중을 감복시킬 만한 큰 성량도 갖추지 못했다. 어떤 비평가는 스키파를 가리켜 '노래에 있어서 하프시코드의 정취'라고 평했는데, 아기자기하고 날카롭고 가녀린 아름다움에서는 특출하지만 남성적인 카리스마는 찾을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한 것이다. 옛 가수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자의적인 해석과 멋대로 늘어지는 템포, 불안한 음정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고아한 스타일', '세련된 매너', '무리 없는 가창법'이 스키파의 전설을 만들었다. "나는 절대로 오케스트라와 경쟁하면서 큰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이 같은 그의 신조는 오페라 가수라면 항상 지킬 수는 없더라도 반드시 유념해야 할 지침이다. 연기와 음악이 충돌을 일으킬 때 스키파는 연기를 포기하는 편이었다는 사실도 그의 성향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또 오페라면 오페라, 영화면 영화, 대중음악이면 대중음악, 이렇게 여러 장르에 손을 내밀면서도 항상 진지한 태도를 유지한 인간적 매력도 스키파의 전설에 일조를 했을 터이다.
스키파는 1953년 고향 레체에서의 《사랑의 묘약》을 끝으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했다. 64세였다. 그러나 평생의 라이벌 베냐미노 질리가 완전히 은퇴한 1955년 이후에도 리사이틀은 계속했다. 1957년에는 노대가의 따스한 음성으로 네덜란드와 동토의 땅 러시아를 녹였다. 1962년 10월 뉴욕에서 마지막 리사이틀이 있었고 3년 후 그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질리가 세상을 떠난 지 8년 후였다.
스키파는 많은 양의 레코딩을 남겼지만 정식으로 녹음된 오페라 전곡은 1932년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작업한 도니체티의 《돈 파스콸레》(EMI) 단 하나뿐이다. 10개 이상의 전곡 음반이 발매 중인 질리와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물론이고 당대의 다른 라이벌 테너들에 비해서도 적다. 아무래도 오페라 이외의 분야에 들락거린 영향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스키파를 비정통적이라고 폄하하는 분위기는 많이 사라졌다. 요즘의 한참 후배 테너들이 대중적 콘서트를 열거나 크로스오버 음반 작업을 할 때 단골로 내세우는 메뉴처럼 "위대한 테너 티토 스키파가 그랬듯이 저도 이번에……."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 베냐미노 질리 (Beniamino Gigli, 1890~1957)
4. 움베르토 조르다노 (1867~1948)
<안드레아 셰니에> 중 '5월의 아름다운 어느날(Come un bel di maggio)'
- 베냐미노 질리(테너), 올리비에로 데 파브리티스(지휘),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3:02)
베냐비노 질리: 1920-30년대 전성기 의외로 음반이 통용되던 시대. 어린 파바로티의 이상형이었다는...
이준형 선생님 말대로 부드럽고 테크닉이나 음역에 대해서 비할바 없이 훌륭하긴 했으나,
내가 제일로 치는 프리츠 분델리히보다 나은지는 모르겠다는..
그러나 레파토리도 많고 노년까지 계속했다 함.
라스칼라 극장이 그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완공되었다니... 이준형 선생님의 꿀팁은 한이 없다.
카루소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 테너 중 최고의 가수. 리릭 테너의 전형이었지만 드라마틱한 역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었고 '발성의 교과서'라 불릴 만큼 모범적인 가창 양식을 자랑했다.
20세기 최고의 테너로 불린 엔리코 카루소의 시대가 저물 즈음, 그러니까 1920년을 전후해 이탈리아 오페라의 차세대 주자들이 한꺼번에 국제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오늘날까지 역사적 테너로 손꼽히는 명가수들이 조반니 마르티넬리, 아우렐리아노 페르틸레, 티토 스키파, 베냐미노 질리, 자코모 라우리-볼피의 오인방이다. 나는 이들을 장난스런 표현으로 '오대천왕(五大天王)'이라 부르곤 한다. 그렇다면 오대천왕의 '왕중왕'은 누구일까. 두말할 필요 없이 베냐미노 질리다. 한때 '드라마티코(dramatico)는 마르티넬리, 리리코(lirico)는 질리'라는 등식이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질리는 연륜을 쌓으면서 《오텔로》를 제외한 마르티넬리의 거의 모든 영역까지 정복해버렸다. 또한 '음색의 아름다움은 스키파가 최고'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레퍼토리의 범위와 발성의 정통성면에서 질리보다 결코 나을 수는 없었다.
오페라 마니아 중 이 완벽한 테너에 대해 "질리가 곧 진리(眞理)다."라는 재치 있는 표현으로 찬미하는 이가 있는데, 질리가 이룩한 음악적 성과를 생각하면 과연 어울리는 말이다. 온갖 군웅이 할거한 오대천왕 시대를 제패한 최고의 테너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엔리코 카루소에서 베냐미노 질리, 그리고 나중에 다룰 유시 비욜링으로 이어지는 라인이야말로 테너의 골든 에이지인 1950년대를 성공적으로 준비한 황금 계보였다.
베냐미노 질리는 1890년 3월 20일 이탈리아의 레카나티(Recanati)에서 태어났다. 우연하게도 탄생일이 덴마크 출신의 헬덴테너(heldentenor) 라우리츠 멜히요르와 같다. 7세 때부터 지방 성당 합창단에서 노래했는데 '종루의 카나리아'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그 미성을 인정받았다. 종루(鐘樓)라는 말이 들어간 것은 원래 구두수선공이었던 부친이 대량 생산 시대의 도래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지자 성당 종치기로 전직했기 때문이며, 실제로 온 가족이 종탑 옆 단칸방에서 살았다고 한다.
질리는 인복(人福)이 무척 많았다. 노래 공부를 위해 17세 때 무작정 로마로 향했는데 아그네제 보누치(Agnese Bonucci)라는 선생이 그를 무료로 가르쳤다. 생활비를 위해 뛰어다닌 질리를 심부름꾼으로 부린 스파노키 백작부인(Countess Spanocchi)은 특별히 그에게 매일 2시간씩 성악 레슨 시간을 배려해주기도 했다. 부인은 질리가 징집 영장을 받자 델피노 대령(Colonel Delfino)이란 군인을 소개해주었고, 대령은 질리를 통신병으로 빼내 성악을 계속하게끔 도와주며 음악원에서 제대로 배우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덕분에 질리는 이탈리아 출신의 세계적 성악가 중 드물게 명문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할 수 있었다. 그는 1914년 졸업 연주회에서도 최고상을 받았고, 파르마에서 열린 국제 콩쿠르에서도 우승했는데 당대의 명테너 알레산드로 본치(Alessandro Bonci)로부터 "이제 우리는 진정한 테너를 찾았다."는 격찬을 받았다. 이런 행운에 힘입어 바로 그해에 베니스 근교의 로비고(Rovigo)에서 《라 조콘다》의 엔초 그리말도 역으로 정식 데뷔했다.
적어도 오페라의 영역에서 카루소와 질리의 세대는 정말이지 완벽한 혜택을 입은 행운아들이다. 보이토, 마스카니, 레온카발로, 푸치니, 칠레아, 조르다노, 몬테메치, 볼프-페라리, 잔도나이 등 이탈리아 오페라 역사의 마지막 전성기를 꽃피운 수많은 작곡가들은 물론 토스카니니, 세라핀 등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명지휘자들이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같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질리는 처음에는 세라핀, 그 다음에는 토스카니니로부터 인정을 받아 순탄한 가수 생활을 이어나갔는데, 특히 27년이나 연배 차이가 있는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질리를 높이 평가하면서 이후 수십 년간 절친한 친구 사이로 지냈다. 《아를의 여인》,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를 작곡한 칠레아와도 오랜 친분이 시작되었다. 푸치니는 신작 오페라 《제비》의 이탈리아 초연에서 질리의 풍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티토 스키파를 선택했지만, 일단 질리의 노래를 들어본 후에는 크게 만족해하면서 다음 로마 공연에 그를 캐스팅했다.
1918년은 질리의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이었다. EMI의 전신인 HMV와 빅터 그라모폰(Victor Gramophone)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프레드 가이스버그가 질리에게 카루소의 레코드를 들려주었는데, 이것이 질리에게 경탄과 시샘이 뒤섞인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 덕분에 가이스버그는 질리와 10년 이상의 장기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같은 해에 베르디 이후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부격이었던 아리고 보이토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토스카니니는 라 스칼라에 그의 대표작 《메피스토펠레》를 긴급 편성했다. 질리는 이 오페라로 동가극장에 데뷔해 일대격찬을 얻어냈다. 이것이 영광의 정점은 아니었다. 당시 카루소가 장악하고 있어 다른 오페라 가수들은 군침만 흘려야 했던 뉴욕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의 지배인 줄리오 가티 카사차(Giulio Gatti Casazza)가 질리에게 관심을 표명했던 것이다. 1920년 메트와의 계약이 성사되었는데, 메트에서의 첫 무대 역시 《메피스토펠레》였다. 질리는 무려 34번의 커튼콜을 기록했다. 운도 따랐다. 난공불락의 카루소가 늑막염 때문에 메트 무대에 서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카루소는 자기 대신 성공을 거둔 한참 후배에게 축전을 보냈다. 게다가 이듬해 8월, 카루소는 나폴리 요양 중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메트로폴리탄의 간판 테너라는 영광스런 지위는 질리와 조반니 마르티넬리가 양분하게 되었다.
베냐미노 질리는 성악적으로 완벽한 테너로 불린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톤을 지녔으며 특히 그의 메차 보체(mezza voce, 약음의 테크닉)는 역사상 최고의 절륜(絶倫)이라 할 만하다. 의도적인 달콤한 음색이나 흐느끼는 듯한 표현 방식으로 통속성을 가미하는가 하면 그와 반대로 풍부한 성량과 극적인 힘을 드러내며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면을 충분히 살리기도 한다.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부터 베르디의 중후한 역, 베리즈모 오페라의 처절한 배역까지 온갖 다양한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너무나 편안하고 안정된 발성은 어떤 음역에서도 빛나는 음색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또한 곡에 대한 접근 방식도 다양했다. 면밀하게 가사를 분석한 것은 아니지만 어떤 때는 짐짓 서두르는 모습으로, 어떤 때는 자유자재로 늘어지는 방식을 취하면서 나름대로 대가만의 경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어느새 관객들은 카루소의 부재를 의식하거나 탓할 필요가 없었다.
질리는 1920년부터 12년간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영어는 배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걸 트집 잡는 사람도 없었고, 카루소에 비해 감정이 실린 연기력에서 크게 열세였지만 그럭저럭 넘어갔다. 온통 열광뿐이었다. 그러나 1932년에 이르자 메트와의 계약이 갑자기 종료되었다. 대공황을 이유로 극장측이 일률적으로 모든 가수에게 출연료 25퍼센트 삭감을 원했으나 질리의 자존심이 그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유럽 무대에 복귀했으며 토스카니니의 절대적 총애를 받은 아우렐리아노 페르틸레가 버티고 있던 라 스칼라보다 베를린과 런던을 주무대로 삼아 활동했다.
이 시기의 흥미로운 사실은 질리가 여러 편의 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되는 것만 해도 독일에서 11편, 이탈리아에서 6편을 찍었으니 마치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었다.
질리는 1939년 1월 메트로폴리탄에 돌아왔으며 얼마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는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기억할 만한 순간으로 회고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코 의례적인 박수는 아니었다. 1940년 이후 녹음한 질리의 음성을 들어보라. 50세가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소릿결이 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며 도리어 한층 힘이 더해져 그를 감싼 원숙한 풍모가 젊은 시절의 아름다움을 압도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1940년대 이후 질리의 극장 활약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는 별로 없다. 라이벌인 '오대천왕'의 다른 테너들도 대략 1940년 이전에 전성기를 마쳤다. 대신 1938년 메트에 데뷔했던 스웨덴의 유시 비욜링이 조국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45년 메트에 컴백했는데, 이탈리아 테너가 아니면서도 오대천왕을 제치고 새롭게 왕좌에 올랐다.
그러나 적어도 레코딩에 있어서 만큼은 질리의 황금기가 계속되었다. 비록 모노지만 기술적으로 큰 향상이 이루어진 시기였던 1918년부터 36년간 무려 370여 차례에 달하는 레코딩 작업을 진행했던 것이다. 특히 딸인 리나 질리(Rina Gigli, 1916∼2000)가 훌륭한 소프라노로 성장한 덕에 1943년 이후부터 함께 공연하거나 레코딩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실제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인데도 공연할 때는 보통 연인 관계로 등장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미로운 광경이었으리라. 질리의 마지막 녹음은 1954년이었는데 그때까지도 순회 공연을 계속한 것으로 전해진다. 고별 공연은 1955년이었고 2년 뒤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리나는 부친이 세상을 뜬 다음에도 활동을 계속했고 음반도 제법 남겼다. 리나의 바이오그래피에서 한국 공연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1971년에 은퇴했으니 그 이전일 것이다.
질리는 카루소의 후계자로 불리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제2의 카루소가 아니라 질리 그 자체로서 평가해달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탈리아 오페라의 큰 흐름 속에서, 또 청중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카루소의 미덕을 여러 형태로 계승했음은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녹음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에 절대적 인기를 누린 데 힘입어 제대로 된 오페라 전곡 음반을 풍부하게 남긴 최초의 명테너에 속한다. 한때 그 소중한 자료들은 스테레오 녹음에 밀려 거의 사라졌지만 최근에 다시 복각되는 추세다. 적어도 12종 이상의 전곡 오페라를 현재 구할 수 있다.
탈리아비니는 우아한 목소리일뿐 아니라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같은 테너라도 각자의 영역이 있다는 말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굳이 박승화와 박상민을 비교하지 않더라도^^
페루초 탈리아비니
분야 | 테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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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3년 8월 14일, 바르코(이탈리아) |
수상 | 1938년 피렌체의 성악 콩쿠르 제1위 |
데뷔 | 1938년, 푸치니:오페라 ≪라 보엠≫의 로돌포, 피렌체 시립극장 |
주요 레코드회사 | 이탈리아 체토라 미국 RCA 영국 EMI |
주요 레퍼토리 | 이탈리아 오페라 |
출신교 | 파르마 음악원 (이탈로 브랑쿠치) |
사사 | 아마데오 바시 |
피렌체에서 데뷔하여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테너로서 활약하며 영화에도 출연하여 명성을 높였다. 1942년부터 밀라노 스칼라 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하며 ≪몽유병의 여자≫의 엘비노, ≪친구 프리츠≫와 ≪베르테르≫의 타이틀 롤로 절찬되었고 ≪친구 프리츠≫는 부인 타시나리와 공연한, 작곡자 마스카니 지휘의 녹음도 있다. 전쟁 후에는 남미에서 먼저 성공하며, 47년부터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도 출연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또 구미 각지의 오페라 극장에도 초청되어 전후를 대표하는 테너로 절찬받았다.
‘스키파’의 후계자로 일컬어지며, 또한 ‘빌로드와 같은’으로 수식되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미성과 절묘한 여린 소리는 벨 칸토 오페라의 리리코역에서 최고로 발휘되었다. ≪사랑의 묘약≫의 네모리노, ≪루치아≫의 에드가르도, ≪라 보엠≫의 로돌포 등도 적역으로 유명하며 나폴리 민요 등에도 독특한 매력을 발휘했다.(아사리 고조)
# 마리오 델 모나코 (Mario Del Monaco, 1915~1982)
6. 움베르토 조르다노 (1867~1948)
<페도라> 중 '페도라, 파리에 사는 그 여자야(Fedora, quella donna e a Parigi)'
- 마리오 델 모나코(테너), 마그다 올리베로(소프라노), 람베르토 가르델리(지휘), 몬테카를로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5:49)
마리오 델 모나코:황금의 트럼펫-드라마틱 테너 같이 부르는 마그다 올리베로의 소프라노 소리가 꽤나 근사하다.
테너 목소리가 우렁차고 내지르는게 시원시원하다. 우리나라 판소리 명창들이 생각났다.
부드러움은 약했으나 강력한 보칼 보이스
델 모나코는 1915년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공무원이었고 모친은 카루소의 첫 아내인 소프라노 아다 지아케티의 사촌이었다. 자연스럽게 카루소는 델 모나코의 영웅으로 자리잡았다. 아들이 음악가가 되는 것을 기대한 부친은 델 모나코를 페사로 음악원에 보내 바이올린을 배우게 했는데 정작 자신은 바이올린보다 미술 아카데미에서의 그림, 조각, 건축 공부를 더 좋아했다. 특히 그림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 가수로 성공한 후에도 전시회를 가질 정도였다. 그의 아들 잔카를로(Giancarlo del Monaco)가 오페라 연출가로 성공한 것도 예술 전반에 대한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덕분일 것이다.
델 모나코는 성악의 소질을 발견하고 전공을 바꾸었지만 로시니의 전통이 남아 있는 페사로 음악원은 그의 개성과 맞지 않았다. 이런 사정을 아는 음악원 동기이자 후일 베르디 지휘자로 크게 성공하는 람베르토 가르델리(Lamberto Gardelli, 1915∼1998)가 아르투로 멜로키(Arturo Melocchi)라는 선생을 소개해주었다. 델 모나코는 음악원을 그만두고 멜로키에게 개인 레슨을 받았다. 프랑코 코렐리 편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멜로키식 발성이란 목을 열어 후두를 내리고 강력한 호흡을 불어넣어 크고 강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이 방식은 정통 스타일과는 배치되는 것으로서 목을 지나치게 혹사시키므로 많은 경우에 성대를 망가뜨릴 수 있는데 델 모나코에게는 잘 맞았다. 멜로키로부터는 15세부터 6년간 배웠다. 실력을 쌓자 로마 오페라 예비 학교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장차 아내가 될 소프라노 리나 필리피니(Rina Filippini)를 만나는 행운도 얻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새로운 발성법에 적응하지 못해 좌초될 위기에 처했고 결국 다시 멜로키를 찾아가 자기 스타일을 되찾을 수밖에 없었다.
인생에서 성공하려면 운도 따라야 한다. 델 모나코에게는 운이 따랐다. 전쟁 중 징집 당했지만 후방에 배치되었고, 상관이 오페라광인 탓에 노래 공부를 용인해주었다. 제대와 동시에 1940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데뷔했고 여러 극장을 거쳐 1945년에는 《나비부인》으로 라 스칼라에 데뷔했다. 이듬해 코벤트 가든에서 《토스카》를 불러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국제적인 가수로 등장했다. 이때부터 수년간 나폴리나 로마뿐 아니라 당시 부유했던 남미 순회 공연을 통해 명성을 쌓고 돈도 벌었다. 그의 상징인 《오텔로》를 처음 노래한 곳도 1949∼1950년 시즌의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 이듬해에는 메트로폴리탄에 진출했다. 조국에서의 인기도 대단해 스릴러(thriller movie)와 오페라를 포함, 5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으로 알려졌다.
델 모나코는 1950년대 전반기에 마리아 칼라스와 많은 공연을 가졌다. 특히 《노르마》는 전설적인 명연으로 회자된다. 다만 워낙 무대에서의 카리스마가 대단한 두 사람이라 상대방이 더 많은 박수를 받는 것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칼라스가 무대 뒤에서 델 모나코를 걷어찼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레나타 테발디와의 유명한 파트너십은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되었다. 데카사가 전속 계약을 통해 테발디-델 모나코 콤비의 오페라 음반을 무수히 쏟아냈고, 같은 시기에 칼라스-디 스테파노를 내세운 EMI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아직 발매 중인 테발디-델 모나코의 오페라 전곡 음반은 데카에서 나온 것만 해도 15종에 달한다. 칼라스와 테발디, 델 모나코와 디 스테파노, 여기에 카를로 베르곤치, 프랑코 코렐리까지 가세해 자웅을 겨루던 이 시기야말로 오페라 공연사상 최고의 황금기였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의 녹음들은 음질도 뛰어나다.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1963년, 48세의 델 모나코는 치명적인 사고를 당했다. 스피드광인 그가 몰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한 것이었다. 종이처럼 구겨진 차 안에서 델 모나코는 왼쪽 발이 으스러진 채 간신히 구조되었다. 긴급 수술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이 C를 질러보고 안심하더란 얘기는 아직도 전설처럼 남아 있다. 그러나 사고의 후유증은 컸다. 바이로이트의 수장이었던 빌란트 바그너와 얘기가 잘 진행되어 바그너 오페라에 진출할 예정이었고, 라 스칼라의 《리엔치》에는 출연 계약까지 맺은 상태였지만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으스러진 다리를 이어붙이고 오랜 재활 끝에 재기했지만 무대에서의 활동도 이전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다리가 불편하니 이전의 불같은 카리스마도 살아나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인기는 높아 몇 개의 녹음을 더 했지만 이전의 델 모나코는 아니었다. 이렇게 델 모나코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렸다. 만약 그에게 사고가 없었다면 《로엔그린》이나 《발퀴레》 정도에서는 독특한 성과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특히 《발퀴레》의 지그문트 역을 좋아하여 독창회에서 종종 불렀던 노퉁(notung, 지그문트의 칼)의 노래는 실황 녹음으로 남아 있다.
델 모나코의 특징은 통상적인 드라마틱 테너와 구별된다. 드라마티코는 일반적으로 '묵직한, 어두운, 두터운, 힘 있는'과 같은 표현이 어울리는 음색을 지녔다. 바리톤적 테너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델 모나코의 별명은 그 유명한 '황금의 트럼펫'이 아니던가. 힘차다는 점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겠지만 결코 묵직하거나 어두운 음색은 아닌 것이다. 그의 발성은 엄청난 횡경막의 힘으로 밀어올리는 원시적인 것으로서, 성악 이론과는 배치되지만 호쾌하고 빛나는 소리였다. 고음으로 갈수록 더욱 힘이 실리는 특징마저 있었다. 이런 음색이 델 모나코의 카리스마 넘치는 기질과 결합하면 일순 엄청난 감정의 폭풍으로 바뀌고 숨이 넘어갈 듯한 리얼리티를 향해 거침없이 돌진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를 델 모나코에게 매료시키는 비결일 것이다.
워낙 이례적인 드라마티코이기에 그에게는 후계자도 없다. 주세페 자코미니, 니콜라 마르티누치 같은 훌륭한 드라마틱 테너들이 나왔지만 감히 델 모나코의 재래로 불리지는 못했다. 너무 두텁고 어두운 소리를 지녔기 때문이다. 호세 쿠라도 예외는 아니다. 데뷔 초기 델 모나코를 연상시킨다는 소리를 잠깐 들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스타일로 평가된다. 요즘은 이탈리아에서조차 멜로키식 발성은 위험하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보니 이런 선생을 찾기란 몹시 어려울 것이다. 델 모나코의 아류라면 몰라도 그를 닮은 대가수가 다시 등장할 가능성은 낮아진 셈이다. 마리아 칼라스를 가장 뛰어난 가수라고 하면서도 그 발성법을 따르는 것은 무리라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1975년 60세가 되자 델 모나코는 미련 없이 은퇴했다. 마지막 작품은 《팔리아치》였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계속 손짓을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워낙 대범한 성격이어서 아쉬운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델 모나코는 돈도 많이 벌었으므로 트레비조 인근의 호화 빌라에서 여생을 즐겼다. 빌라는 값비싼 컬렉션과 화려한 데코레이션,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모두 델 모나코가 평생토록 취미 이상으로 열중한 분야다. 이밖에도 밀라노에 방 9칸짜리 대저택, 맨해튼의 아파트, 로마 근교의 부동산을 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호사를 오래 누리지 못했다. 은퇴 7년 만인 1982년 10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것이다. 관에 누운 델 모나코의 시신에는 베네치아공화국의 장군 복장이 입혀졌다. 《오텔로》의 위대한 가수였음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남편이 떠난 후 아내 리나 필리피니는 델 모나코가 일상 생활에 있어서도 오텔로를 연상시키는 면모가 있었음을 증언했다.
끝으로 델 모나코의 노래를 듣는 방법에 관해 얘기하겠다. 가장 훌륭한 배역과 음반은 오로지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에 몰려 있으며 그중 벨칸토 오페라는 《노르마》같이 이례적으로 무거운 작품을 제외하고는 잘 부르지 않았다. 따라서 델 모나코의 3대 영역이라면 베르디의 묵직한 오페라, 푸치니의 일부, 그리고 베리즈모 오페라를 꼽아야 할 것이다. 이런 작품에서 델 모나코는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프랑코 코렐리 정도를 제외한다면 결코 비교 상대조차 찾기 어려운 짜릿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감격한 나머지 델 모나코의 모든 오페라를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델 모나코의 숭배자를 자처하는 나로서도 그의 《리골레토》라면 손사래를 친다. 델 모나코는 자기 캐릭터에 맞지 않는 역을 만나면 영웅적 음성을 잃고 비음이 잔뜩 섞인 소리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표현 방식에도 문제가 많다. 그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호소하는 맛이 별로 없고 '내가 싫으면 그만두라'는 식으로 불러대기 일쑤였다. 그의 드라마틱한 표현력은 비극적이고, 영웅적이고, 절박한 상황에서나 빛을 발했던 것이지 결코 모든 장면에 어울린 것은 아니었다.
# 프랑코 코렐리 (Franco Corelli, 1921~2003)
7. 주세페 베르디 (1813~1901)
<아이다> 중 '청아한 아이다(Celeste Aida)'
- 프랑코 코렐리(테너), 주빈 메타(지휘), 로마 오페라 극장 오케스트라
(4:41)
프랑코 꼬렐리:공무원으로 일하다가 뒤늦게 음악원에 가서 데뷔함. 스핀토, 아름답고 힘차게 뻗어나가고 고음이 어마어마하다는
이준형 선생님의 평. 그나저나 베네치아 사투리는 무엇일까? 막스 마라 거래선 지오바니 사투리 정도 생각하면 될지 모르겠다.
내가 실제로 성가대에서 고음은 빼고라도 보통음만 이정도 비슷하게나마 나와줬으면 참 좋겠다는 비현실적인 생각을 해보았다.
극도로 예민한 성품을 지녔지만 목소리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으르렁거리는 파워를 보유했던 테너. 어떤 영화배우보다도 잘생긴 미남 가수의 전형이다.
2003년 8월말, 짧은 외신은 82세의 프랑코 코렐리가 심장 발작 증세로 밀라노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며 매우 위중한 상태라고 전했다. 2002년 밀라노의 한 시상식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소식에 노가수의 건재를 믿고 싶었던 코렐리팬들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10월 30일자 외신은 코렐리가 처음 입원한 병원에서 뇌졸중(腦卒中)으로 타계했음을 알렸다.
그리스 조각상보다 더 완벽한 용모와 6척이 넘는 훤칠한 키. 코렐리는 남자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너무 잘생긴 존재였다. 그가 타이츠 차림으로 무대에 서면 그 쭉 뻗은 다리만으로도 여인의 심장을 녹여버렸다고 한다. 유명한 성악평론가 존 스틴은 코렐리를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팝뮤직과 영화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프랑코 코렐리 같은 (정말 멋진) 남자가 오페라를 선택한 것에 대해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해야 할 것이다."
코렐리는 극도의 예민한 성품으로, 일종의 대인공포증을 가졌다고 할 만큼 사생활 노출을 꺼렸다. 그에 대한 많은 부분이 자신의 언급보다 주변 사람이 전하는 일화를 통해 알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1921년 4월 8일 이탈리아 아드리아나 해 연안의 항구 도시 안코나(Ancona)에서 태어났다고 하지만 출생일부터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존 스틴의 말처럼 코렐리가 오페라를 택한 것도 그다지 자연스런 과정이 아니라 어쩌다 우연히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편이 더 맞을 듯싶다. 부친은 해군 엔지니어였으며 코렐리 역시 엔지니어를 지망했다. 어려서는 노래에 관심을 갖지 않아 18세가 돼서야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가 대단히 크다는 것을 깨달은 정도였단다. 5년 후 성악가가 될 생각 없이 단순 취미로 페사로 음악원에 등록했는데 B플랫을 내기 힘들 정도로 고음에 취약했다고 한다. 바리톤으로의 전향도 고려했지만 테너를 바랐던 취향과 맞지 않자 그만두었다.
다행인 점은 카를로 스카라벨리(Carlo Scaravelli)라는 절친한 친구가 마리오 델 모나코(코렐리보다 6년 연상이다)의 성악교사였던 아르투로 멜로키에게 배우고 있었다는 것이다. 코렐리는 친구가 따끈따끈하게 중계하는 멜로키의 가르침을 마치 전공인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듯 스펀지처럼 빨아들였다. 물론 델 모나코에게 그랬듯이 멜로키의 교수법은 무리할 정도로 목을 혹사시키는 방식이었지만 그 덕분에 코렐리는 빛나는 드라마티코의 자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의 직업은 가수 지망생이 아니라 평범한 엔지니어일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가수 입문은 매우 늦었다. 30세인 1951년, 피렌체의 마지오 무지칼레 경연에서 우승함으로써 비로소 전문 성악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첫 출발부터 《카르멘》의 돈 호세와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등 무거운 역을 불렀고, 불과 데뷔 3년 만에 스폰티니의 《베스탈의 무녀》로 라 스칼라 무대에 섰다. 당시 상대역은 무서운 기세로 승승장구하던 마리아 칼라스. 코렐리는 칼라스를 만난 덕분에 벨리니와 도니체티의 벨칸토 레퍼토리에 주력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노르마》, 《해적》, 《폴리우토》 등의 작품에서 1960년경까지 황금의 파트너십을 이루면서도 '누가 더 인기 있는가?' 하는 문제로 묘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프랑코 코렐리 최고의 오페라로는 《일 트로바토레》와 《투란도트》, 그리고 《토스카》가 꼽힌다. 특히 《일 트로바토레》는 1961년 1월, 베르디 서거 60주년을 기념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레온타인 프라이스(Leontyne Price, 1927∼)와 함께 데뷔하면서 공전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뉴욕 전체가 어떤 영화배우보다도 잘생겼고 불을 뿜는 듯 남성적 음성을 지닌 이탈리아 테너에게 매료되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모든 신문이 이 뉴스를 톱기사로 다루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일 트로바토레》는 코렐리의 인기에 불을 지르기도 했지만 노래 스타일에도 큰 변화를 일으킨 작품이다. 원래 코렐리는 고음에 특기를 발휘하지 못한 바리톤적 테너였다고 한다. 1950년대의 녹음을 들어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벨리니의 오페라 때문에 높은 음역대를 향상시켜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느꼈고, 1958년 처음으로 《일 트로바토레》를 노래하게 되자 근본적인 변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코렐리는 격정적인 음성이 뿜어내는 야성적 이미지와는 달리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카루소를 비롯, 과거 명테너들의 레코드를 들으면서 이번에도 스스로의 힘으로 고음역을 터득했다. 드디어 1960년대 초반, 높은 D플랫까지도 깨끗하게 낼 수 있었고 음색 자체도 맑아진 상태에서 메트로폴리탄에 데뷔한 것이다.
《투란도트》 역시 메트에서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상대역을 불렀던 비르기트 닐손과 누가 높은 음을 더 크게 내는지 겨루었다는 일화는 지금도 전설처럼 전한다. 1961년부터 1974년까지 그는 메트 무대에만도 무려 263번이나 섰으며 뉴욕은 이제 그에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코렐리의 아내는 메조소프라노 로레타 디 렐리오(Loretta di Lelio)다. 20세기 최고의 바소 부포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움베르토 디 렐리오(Umberto di Lelio)의 딸이며, 비록 주역급은 아니지만 1950년대 여러 레코딩에 등장한 중견이다. 코렐리는 결혼한 시기에 대해서도 침묵했는데 동료들은 1957년이나 1958년으로 추측한다. 디 렐리오는 코렐리와 해로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병상을 지켰다.
코렐리의 음성을 들으면 그가 특별히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란 것을 알아채기 힘들다. 남성적으로 선이 굵고 호방하며 이탈리아 사람답게 낙천적인 성격일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는 친절한 호인이었지만 공연이나 녹음을 앞두고는 매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주변 사람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굉장한 음성을 갖고 있는데도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는 거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긴장한 상태였으며, 무대에 올라서도 몸이 풀리고 제대로 연기가 나오려면 시간이 필요했다고 한다. 데카사의 한 레코딩 엔지니어는 자신의 목격담을 이렇게 전한다.
"제네바에서 레나타 테발디와 듀엣집을 녹음하는 중이었습니다. 테발디는 준비가 끝났고 오케스트라도 스튜디오에 모였는데 벌써 도착한 코렐리가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디 갔나 찾아보았더니 글쎄 로레타가 고개 숙인 남편의 등을 두드려주며 이제 되었으니 스튜디오에 입장하라고 격려하는 거예요. 그러고 나서야 스튜디오에 올라왔는데, 막상 노래를 시작하니까 언제 그랬냐는 듯 끝내주더라고요!"
196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보낸 코렐리는 메트에서 변함없는 인기를 누렸고 50대의 나이에 접어들어서도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가 여전하다고 믿었고 외모도 최소 10년 이상 젊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드라마틱 테너의 지향점이라는 《오텔로》를 부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점점 공연 회수를 줄여나가던 코렐리는 메트를 떠났고 55세이던 1976년에 급기야 은퇴를 선언했다. 그 이유도 결국은 지나치게 예민한 성격 탓이었다. 다음은 좀처럼 속을 털어놓지 않던 코렐리가 직접 얘기했다는 은퇴의 변이다.
"나는 항상 긴장해 있었습니다. 데뷔 초기에는 높은 B나 C음이 나오지 않을까 두려워했고, 막상 높은 음을 잘 부르게 된 다음에는 그걸 잃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어떤 때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정말 소리가 안 나와서 가슴이 콩알만해진 적도 있습니다. 공연이 없는 날에도 목소리가 제대로 살아 있을까 계속 의심했지요. 나는 내 모든 공연을 녹음합니다. 공연이 끝나면 그걸 듣느라 3시간이나 보냅니다. 지치고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었지만 그렇게 못 했던 것이지요. 테이프를 듣고 만족하면 기분이 좋아져서 잠을 설치고, 그렇지 못하면 절망해서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무슨 인생이 이렇답니까? 이 도시 저 도시 돌아다니면서 호텔방에 혼자 앉아 TV를 보거나 고독을 씹고 있으니 감옥의 죄수나 마찬가지 생활이지요. 나는 자유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안코나에서 바다(자유를 상징한 말인 듯)와 불과 50미터 떨어진 곳에서 태어났단 말입니다. 카루소가 이런 정확한 말을 했지요. 우리 테너들은 시작한 곳은 알지만 끝은 알지 못한다고요."
코렐리는 은퇴 후 4년 정도 경과한 1980년 전후에 뉴욕 근교 뉴어크와 뉴저지의 갈라 콘서트에서 몇 곡의 노래를 불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모습에 대한 평가는 상이하다. 어떤 평자는 특유의 영웅적인 목소리가 여전했다고 감격을 전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노쇠했다고 기록했다. 아무튼 은퇴 후 코렐리는 뉴욕과 밀라노를 오가며 편안한 노후를 즐겼다고 한다. 다만 특별히 친분이 없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여전히 꺼리면서 말이다.
코렐리는 마리오 델 모나코와 종종 비교된다. 둘 다 듣는 사람의 가슴을 짜릿하게 흥분시키는 영웅적이고 우렁차며 풍부한 성량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차이도 많았다. 델 모나코는 극에 몰입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다. 처절한 장면에서는 무비의 경지에 오르지만 잘못하면 과잉 연기로 흐른다. 반면 코렐리는 노래만큼은 델 모나코 이상으로 시원하지만 연극적으로 약점이 많았다. 두려움이 많은 성격 탓에 연기에만 몰입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대신 드라마티코의 한 방향으로 감정을 고양시키지 않고 따뜻한 인간성을 담고자 노력했다.
코렐리는 슈테판 주커(Stephan Zucker)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세간의 평가와 달리 '영웅적인 것'보다 '로맨틱한 것'에, '위세'보다 '눈물'에 더 끌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처럼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코렐리가 드라마틱 테너로는 이례적으로 비제, 구노, 마이어베어 등 제법 많은 프랑스 오페라 레퍼토리를 섭렵했다는 점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또한 자기 과시적 태도를 지녔던 델 모나코와 달리 코렐리는 자신의 부족함을 고민하고 또 발전시키고자 노력한 가수였다.
"수면 중에도 노래를 부릅니다. 꿈에 음표가 보이는 거예요. 나는 언제나 스스로를 향상시키고자 정진하기 때문에 절대 편안히 쉬지 않습니다. 만일 내게 완전히 자유로운 석 달간의 휴가가 주어진다면, 오로지 성악 테크닉을 향상시키는 데 쓸 겁니다."
마리오 델 모나코는 벌써 한참 전인 1982년 세상을 떠났다. 코렐리마저 타계함으로써 20세기 후반기의 양대 드라마티코가 모두 사라진 셈이다. 코렐리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며칠 후 '프랑코'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드라마틱 테너 프랑코 보니졸리가 그보다 불과 수일 앞서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
애통하여라. 두 프랑코의 죽음을 맞는 기분은 당연히 그렇거니와 이로써 열정적 테너의 시대는 종언을 고한 것이 아닌지 하는 불안한 심정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사실 '열정적 테너'보다는 '이탈리아적 테너'로 바꿔 표현하는 것이 더욱 실감나고 정확할지 모르겠다. 델 모나코와 코렐리, 그리고 보니졸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모두 오페라 왕국 이탈리아의 남자, 아니 보다 직설적인 단어로 바꾸자면 '종마' 혹은 '수컷'을 대표하는 존재들이었다. 벨리니와 도니체티, 베르디와 푸치니, 그리고 여러 베리즈모 작곡가들이 자신의 오페라에서 그려냈던 그 남자들, 즉 자기 감정에 충실하고 조국애 또는 사랑 앞에서 앞뒤 가리지 않고 좌충우돌하는 바로 그 이탈리아 남자를 상징했던 것이다.
코렐리의 또 다른 장기였던 나폴리 민요를 들어보면 디 스테파노의 그것과는 엄청나게 다름을 실감할 수 있다. 디 스테파노는 섬세한 감성으로, 이를테면 나폴리 민요를 예술적 경지로 승화시킨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 나폴리 사람들은 코렐리가 보여주는 직접 화법으로 노래하고자 한다. 너무 예민한 면은 있었지만 코렐리 역시 가장 이탈리아적이고 인간적인 테너의 한 사람이었다.
-다음주에 계속됨
첫댓글 이건 방송에 나오는 내용인가요?
파란색부분은 나오는 내용이고 테너 소개부분은 제가 발췌했습니다.
정성 가득한 글이네여 !! 짱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