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이른 시간은 아니지만 지하철 첫차를 타 보긴 첨이네. 아니다, 예전에 노가다 나갈 때 몇번 타 봤군. 전철을 처음 타 본 것이 1976년도 여름께니 꼭 30년 됐군. 재수 할 때인데, 희자 찾으러 서울 올라 왔었지. 마지막으로 전철을 이용 할 때는 언젤까? 기억이나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용산역에서 6시 50분에 출발하는 전라선에 몸을 실었다. 좌석을 평택에서부터 배정 받아 몇 곳 역을 거치며는 자리를 두어곳 옮겨 앉았다. 그런데 아침에 집을 나오며부터 무릎 바로 위가 쓰리다. 등산복 바지 그쯤께에 쟉크가 있는데 그래서인가 하고 보니 그곳에 작은 상처가 있다. 쟉크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가만 보면 사는 것도 그렇다, 속 상하고 화 나는 것이 너 때문인 것 같은데 실상은 다 내 속의 상처가 덧 쓸리는 탓이다. 그래도 굳이 네 핑계를 대는 것은 네로 하여금 위안을 얻고 싶어서겠지.
내 얼굴을 볼 수 없어서인가 이렇게 배낭을 베고 나서면 맘이 꼭 이십대 같어. 근디 테크노마트 같은 곳에 컴퓨터 부품이라도 사러 가면 종업원들이 날 부른다. "아버님! 뭐 찾는 거 있으세요?" 이런 우라질! 그 소리 들으면 거울 안 봐도 내 얼굴이 보여.
차창 너머 신작로로 아이들이 학교를 가고 있다. 살면서 보기 좋은 모습 중 하나지. 짝 맞춰, 혹은 혼자서. 걷는 놈, 자전거 타고 가는 녀석, 무에 그리 신나는지 연신 지 짝에게 말을 건네는 아이까지가 우리 학교 갈 때와 똑같다. 어렸을 적엔 보자기에 책도 싸고, 이 나간 사기그릇에 밥도 싸오고 그랬어. 호남선 철뚝길 옆에 살 때지. 그래 그러고 보니 이때가 보릿고갠가? 바로 얼마전인데도 까마득히 잊고 살고 있군.
모내기가 다 끝났네. 처음 '모가 앓는다'는 얘길 들었을 땐 그말이 뭔 말인지 몰랐어. 나중에 알고 보니 못자리에서 다른 논으로 옮겨 심어진 모가 뿌리를 내리느라 잎끝이 누래지는 것을 말 하더군. 그려, 살아 있는 것이 자리를 떠나 새로 자리를 잡으려면 몸살이 나도 나겄지. 근디 말여, 왜 낸 맨날 모가 앓듯이 끙끙대며 사는 겨?
대전이 가까워 지고 있어, 신탄진이네. 어지간히 자주 왔었지. 여길 흐르는 금강이 대청댐 막히기 전엔 물도 제법 깊었구, 다리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면 뛰어 내리고 싶을 정도로 물이 참 맑었어. 수도 없이 여자들에게 채일 때마다 예 와서 맘(心) 고사를 지내곤 했지. 아주 오래전 일들이 시간을 넘어 바로 어제인 듯 하다. 그래도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아, 추억이야 늘 새로 만들어지니까.
음료수 조그만 병을 하나 샀어. 몇 모금 마시고는 차창 좁은 턱에 올려 놓았지. 열차가 제법 흔들리는데도 떨어지지 않고 잘도 버티네. 내용물이 반도 차지 않았는데. 그렇지? 음료수가 꽉 찼거나 빈병이었더면 흔들거림에 벌써 떨어졌을거라. 내가 살면서 제대로 버티지 못하는 것이 쓸모 없는 것으만으로 속을 꽈악 채우고 있거나, 쓸모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인가 봐.
아들만 네형제나 두셨다는 여든 넷 할머니 한분이 타고 계셔. 대전까지는 예순이 넘어 보이는 남자 걱정으루, 대전부터는 웬 아주머니를 말 벗으루 두고, 구례까지 가신다네. 아들 며느리가 멀리 한다구 신세한탄을 하시구,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다 한마디씩 거드네, 그집 자식들 욕하느라. 내 보기엔 그들두 오십보 백볼거라. 낸두 엄니에게 좋은 자식은 아니었어. 한때는 굉장한 효자였었는데. 장가가구 마누라 땜에 달라졌던 것이 아니구. 아니 오히려 애 엄마하구는 친하셨지. 그냥 미웠어.
함열 부근인데, 여긴 아직 모 안 낸 논이 더 많네. 예전엔 전라도 아주머니들이 저 북쪽 휴전선 부근부터 주욱 남으로 내려오며 모내기 품을 팔다가 자기 집에 와서 마지막 모를 냈다구 하더라구. 그러고 보면 우리 땅도 꽤 넓어. 통일이 되면 땅끝마을에서부터 육진이었던 쩌어기 함북 온성까지 걸어 가 봐야겠어.
전라선을 탈 때 늘 야간열차만 타서 몰랐는데 굴이 참 많다. 밖이 캄캄하고 대개는 잠에 빠져 있으니 잘 몰랐어. 논산에서 대전 올 때면 양정고개 쯤에 굴이 있는데 기차가 올라치지를 못하는거라. 그러면 뒤로 한참을 물러 섰다가 다시 으랏차차! 오래된 얘기야, 60년대 중반 국민학교 3,4학년 때의 증기기관차. 그야말로 칙칙폭폭 빼액하고 다녔지. 깨진 유리창으로 스며드는 그 알싸한 석탄 타는 냄새하며.
2006년 6월 1일 오후 12시 50분, 화엄사 도착
과부들이 이즈음 계절에 치를 떤다는 밤꽃향이 짙다. 어디 과부들 뿐이겠는가?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많은 여자들이, 심지어 제 몸에서 나오는 냄새도 잊고 사는 불쌍한 남자들이 부지기수니...
2006년 6월 1일 오후 3시 30분, 국수등
03년도 보다 확실히 더디군. 짐도 많고, 그때보다 지금이 살이 6Kg이나 더 나가니 당연하겠지. 오늘은 예정보다 한두시간 늦을 것 같은데.
아하! 좆나게 힘드네. 30분 늦고 있음.
2006년 6월 1일 오후 6시 18분, 노고단 도착, 1박.
에고, 죽는 줄알았다. 다행히 원래 예정했던 시간과 비슷하게 도착을 했어. 걸음이 느리고 둔해서 여유시간을 넉넉히 두거든. 그냥 잘 수 있나, 얼큰한 너구리에 어울리는 참이슬 한 팩! 예서두 혼자네.
2006년 6월 2일 아침 4시 55분, 노고단 출발.
날이 흐린 것 같지. 바람도 제법 차네. 지대가 높고 바람이 많아서 여름에도 시원하니 일제 때 피서지 였었다지.
바람이 많다구? 요즘 부쩍 바람 피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어. 뭐 내두 그 중 하나구. 남자의 바람은 뭘까? 내 경우? 글쎄 이게 바람인가 모르겠어, 아주 오래 전 사람을 놓지 못하구 있는 것. 같이 만나서 잠자릴 해야만 바람이라구 생각하지 않는 내가 좀 이상한 건가? 속으룬 별 짓을 다 하는데 까짓 잠자리가 대수겠어? 뭔 짓을 하냐구? 한마디루, 그 사람 죽으면 따라 죽기! 뭐 이런거지. 마누라가 알면 섭섭해 하겠네.
산길을 가다보면 죽은 나무가 종종 눈에 띄지. 그 고사목들이 시내 복판에 있었다면 쓰레기가 됐을건데, 산에 이리 있으니 살아있는 나무와 별 차이가 없어. 생물에서 무생물이 되었는데도 살아있을 때와 하나 다르지 않다고. 그러고 보면 산에 있는 바위나 돌두 그래. 그래서 지나가며 이 바위에도 한마디 건네고, 채이는 돌부리에도 괜한 시비를 붙어 보곤하지. 세상만물이 다 살아 있다고 봐.
2006년 6월 2일 오전 10시 32분, 연하천산장 도착.
지난번 종주때는 여기서 하룻밤을 잤지. 예정보단 1시간 빨리 도착 했는데 몸 상태가 속도를 내긴 어려울 것 같아. 점심이나 챙겨 먹구 천천히 움직이자.
저건 뭐야? 파리를 위한 안내문인가 아니면 파리에 대한 변명인가? 파리가 많이 꾀니 음식물 남기지 말라구 하는 것은 알겠는데, 파리두 먹고 살아야지. 파리가 나쁜 곤충만은 아냐. 알아? 썩어서 없어져야 할 것들을 빠르게 처리하는데는 구데기가 젤 이라구.
요즘 산길을 가다보면 나뭇잎이 돌돌 말려 있는 것을 자주 보게 되지. 저번 주 검단산에 갔을 때 하나 주워서 열어 봤어. 마무리를 어찌나 튼실하게 해 놓았는지 깨끗하게 열지를 못하구 결국은 조금 찢을 수 밖엔 없었는데, 돌돌 말려진 제일 안쪽에 알이 딱 하나 있더라구. 언젠가 TV에서 본 듯 한데, 직접보니 참 신기하데. 다시 잘 말아 보려 했는데, 열 때처럼 제대로 할 수가 없었어. 내 공연한 호기심으루 알 하나가 부화가 안 됐을거야. 미안혀. 인터넷에서 찾아 보니 '거위벌레'라는 곤충의 알이라네. 옛날에는 '두견새의 투서'라고 여겼데.
요번 종주에 필요한 물건을 준비하다가 스틱이 없길래 종로 노점상에서 5천원 주고 하나 샀어. 뭐 당연히 중국산이겠거니 했는데 어디두 표시가 없더라구. 그런가 보다 했지. 지금 보니 'Made in China'가 있네. 큭, 검정색부분에 검정색으로 스티커 처리가 돼 있어서 몰라 봤던 거야. 테이프가 벗겨지니 눈에 들어 오네. 참, 이 사람들 허군. 중국에 3년 있으면서 그 사람들을 많이 이해는 하게 됐는데, 반도나 섬나라 사람들 보다 더 얄팍한 짓을 많이 하곤 하지.
2006년 6월 2일 오후 5시 54분, 세석평전 도착.
한 13시간 걸었군. 오늘 목적지가 장터목산장인데 도저히 안 되겠어. 여긴 예약두 안 해 놓았는데, 우선 저녁부터 좀 챙기자, 배 고파. 점심 때 잠깐 마주쳤던 이들이 눈인사를 건네는군.
올해는 철쭉 빛깔이 좋질 않다네. 아주 여린 분홍이라서 맨눈으루 봐두 트미허구 사진에두 희미하게 꽃자욱만 찍혀. 명불허전이라고는 하지만 소문난 잔치 먹을 것 없단 속담두 있으니까.
안빈낙도安貧樂道라 했겄다. 땀도 제대로 씻지 못하구 칼잠을 자야 되지만, 이리 누워 있으니 세상 시름이 싸악 사라지는군.
2006년 6월 3일 새벽 3시 8분, 세석산장 출발.
저것이 은하수다. 은하수! 잊고 사는 것들 중 하나지. 도시에서 사는 탓에 불빛에 가려서 일 수도 있고, 이제는 밤에 하늘 보고 누워 볼 일이 없어서 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은하수 챙겨 볼 만큼 여유가 없어서 겠지. 참 좋다.
2006년 6월 3일 아침 5시 4분, 장터목 산장 도착.
아침을 챙기고 있는데 어제 저녁 잠깐 이야기 나눴던 젊은이들이 도착을 했어. 천왕봉 왕복과 하산을 함께 했으면 하는 뜻을 자꾸 내비치길래, 김치 남은 것을 털어주고는 매몰차게 혼자가야 함을 강조했어. 핑게야 체력이 달려 보조를 맞출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속내는 사람이 싫어서야. 사람 싫어하지 말자. 개새끼도 미워하지 말자. 특히 개새끼 안고 다니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말지라!
오늘 천왕봉 일출시간이 아침 5시란다. 그러니 이제부터 부지런히 올라도 해는 이마꼭지까지 오르겠지. 이번이 세번째 천왕봉 나들이인데 일출을 보기엔 아직 운때가 맞질 않는가 보다. 허긴 3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니, 선조는 그만두고라도 내 하는 행실로야 어디... 이렇게 이른 아침을 예서 건강히 맞는 것만도 다행이지. 하, 그래두 쫌 아쉽다. 오늘 하늘에 구름 한점이 없어 일출이 장관이었다네.
'사스레나무 - 높은산 정상 부근에서 자라는 나무' 나무 이름도 처음이라 눈에 띄었지만, 높은산 정상부근에서 자란다니, 나무가 산높이도 가늠하고 뿌리 내릴 곳도 결정을 한다고 봐야하는가 하는 시비가 공연히 인다. 고산지대라고 만 표현하기엔 아마도 나무의 식생형태가 좀 특이한가 보다.
2006년 6월 3일 아침 6시 31분, 천왕봉.
유명한 산사람에게 물었데, '왜 산에 오르냐?'구. 대답! '산이 거기 있으니까.' 왜들 산 좀 다닌다고 하면 지리 종주를 꾀하는가? 오늘 등반객들중 한 사람이 이런 얘길 하더군, 요즘엔 세상 사람이 두 부류로 나뉜데, 하나는 지리 종주를 하루에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뭐야 이거. 힘들게 올라와 사진 한장 박느라고 돌탑주변에서 한 이십분 서성인 것이 다네. 참 싱겁다. 원래 사는 게 다 이래, 그렇지?
오르내리며 구례중학교 학생들을 만났는데, 짜식들 인사 참 잘하네. 뒤통수건 면전이건 어른만 보이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안녕하세요' 하네. 내 사진두 그 학교 여선생님이 찍어 주셨는데, 제자들 기념사진 찍어 준다고 자리를 잡고는 한시간 째 부들부들 떨고 있더라구. 바람이 꽤 차거든. 선생님이 참 중요헌데, 내 가슴속엔 남아 있는 선생님이 안 계셔. 국민학교 1학년 때 강오석선생님만 이름이 남아 있고 다 잊어버렸어.
원래는 대원사길로 하산을 하려 했는데, 오후에 인천에 도착해야 해서 중산리로 길을 바꿨어. 근데 암만 터덕거리고 내려서도 준비해간 지도와 시간이 맞지가 않는거라. 이상하다? 별로 체력이 뒤지고 있지도 않는데 말이지. 슬슬 짜증이 밀려오더라구. 게다가 점점 늘어나는 등산객들이 내 인사를 제대로 받아주는 사람이 거의 없는거라. 속에선 욕이 나오고, 마음은 바쁘고. 산에서 다 내려오고 나서 原 地圖로 확인을 해 보니 글쎄 그게 1시간 정도가 생략된 걸루 준비했더라구. 그러니 오늘 짜증이 또 그놈의 탐진치貪嗔痴였던겨! 예단, 선입견, 편견.
첫댓글 사람 시러라 하시든지 말든지....어디가서두 열심이 사시는구나 싶군요.
서울이유? 순대 좋아허면 연락하시구랴, 쐬주 한잔 합시다. 016-435-0139.
산에 있으니 고사목들이 살아있는 나무와 다를게 없네...정말 공감이 가는 부분입니다.옛날 대학 시절에 지리산 종주한 기억을 회상하게 만드네요...잘 읽고 갑니다....
그 여자가 누구여유~~
어찌 낯익은 글체라 했더니만 중간쯤에 읽어 내려오다 사진보구야 궁금증이 확 풀렸니더 ...잘 계시죠.가끔 글로서나마 뵙길 바라는 마음임다...건강하시이소^^**
헷 갈리네.
"아버님!" 어르신보담 낫네요. 테크노마트의 주 고객이 청소년아닌교?
내 고향 ...내모교...아!!!!! 구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