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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예수의 정결의식
눅 2:22-40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눅 2:22-40 / [아기 예수와 정결 예식] 아기를 낳은 후에 지켜야 하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마리아가 성전에서 정결 예물을 드릴 때가 되자 아기의 부모는 아기를 주께 드리려고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23) 하나님께서는 ㄱ)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에서 어미의 태를 열고 처음 나온 맏아들은 모두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에게 바치라'고 율법에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ㄱ. 출13:2(참조,출13:12,15)) 24) 그들은 또 예수의 정결 예식을 위한 희생제물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드리라'는 율법의 규정을 따랐다. 25) 그날 성전에는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와 있었다. 그는 바르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성령이 충만하여, 메시야가 곧 오실 것이라고 늘 기다리고 있었다. 26) 그는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왕을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은 일이 있었다. 27) 그날도 그는 성령의 인도로 성전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침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 대로 아기 예수를 주께 드리려고 들어왔다. 28) 시므온은 아기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29) `주여, 주께서 제게 약속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30) 주께서 세상을 위하여 보내 주신 구주를 내 눈으로 보았습니다. 31) 이분은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시며 32)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십니다.' 33) 곁에 서서 이 말을 들은 요셉과 마리아는 놀랄뿐이었다. 34-35) 시므온은 그들을 축복한 후에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이 아기는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배척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배척은 그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원인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마음속 가장 깊은 생각들을 드러내게 할 것입니다.' 36-37) 여자 예언자 안나도 그날 성전에 있었다. 그 여자는 아셀 지파에 속하는 바누엘의 딸로 나이가 매우 많았다. 결혼한 지 일곱 해 만에 남편이 죽었으나 그후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살았다. 그 여자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하며 때로는 금식하면서 하나님을 섬겨 왔다. 38) 그 예언자는 마침 들어오다가 시므온이 마리아와 요셉에게 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후 구주를 기다리는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에게 메시야가 드디어 오셨음을 알렸다. 39) [나사렛으로 돌아오시다] 예수의 부모는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일을 다 마치고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 왔다. 40) 아기는 날로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랐으며 지혜가 뛰어났다. 하나님께서 늘 보살피신 까닭이다.
아기 예수는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받아 율법에 순종하십니다. 그때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던 두 사람 시므온과 안나를 통해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형식과 내용은 달랐지만, 두 사람의 공통된 증언은 아기 예수가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생 후, 예수는 전인이 조화를 이루는 성장을 하십니다.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22-24) 매우 가난했지만(2:24) 경건했던 예수의 부모는 모세가 명한 율법대로(레 12장) 생후 40일이 지난 남자아기인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가서 제사하려 했습니다. 산모가 부정에서 벗어나는 정결예식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죄가 없고 흠이 없으신 예수는 굳이 이 예식을 받으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께서 이 율법을 지키게 하십니다. 여기에는 예수를 율법 아래 태어나 율법을 완성하게 하심으로써(마 5:17) 율법의 굴레 아래 자유롭지 못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롬 8:1-11).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5-35) 그때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으로서 성령의 인도 아래 의롭고 경건했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찬송을 시작합니다. 그는 찬송을 통해 메시야이신 예수의 운명과 예수의 삶에서 일어날 일을 예언합니다. 이 아기는 하나님의 구원자인데, 나중에 대적에게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마침 이때에 나아와서(36-38) 또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인 여선지자 안나는 이스라엘의 구원과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든 유대인에게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39-40) 예수의 부모와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에 해야 할 율법의 조항을 모두 지키고 나사렛으로 돌아갑니다. 이 짧은 여정의 소개 사이에는 동방박사들의 방문, 헤롯의 어린 아이 학살 사건, 애굽으로의 도피 등의 기록이 생략되었습니다. 이 내용들은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가신 예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균형 있게 성장하십니다.
적용: 당신은 삶의 모든 순간에 당신에게 오시는 예수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성령으로 충만하여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경배의 뜻은 그 대상의 주(主) 되심을 인정하는 행위로서, 경배 받으시는 그분만이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시는 이로서, 홀로 영광받으실 분이심을 고백하고 찬양하는 행위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것이라는 말씀은 아주 오랫동안 구약에 예언된 일이며,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구원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를 경배하며 감사하는 시간을 채우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기다림
눅 2:21-29 / 김형준 목사
1948년 5월 14일은 이스라엘이 독립국가로 탄생한 날입니다. 이날 유대인들은 한 사람을 기억했습니다. 44년 전 44세를 일기로 외로이 세상을 떠났던 테오도르 허츨(Theodor Herzl)입니다. 그는 파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했습니다. 자신은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이 아닌 현대 유럽인 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내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 생각한 테오도르 허츨은 유대인이 믿는 하나님도 믿지 않고 유대인단체의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허츨이 존경하는 유대인이자 프랑스군의 장교인 드레퓌스(Dreyfus)가 반역자로 처형당하게 되었습니다. 드레퓌스는 유대인이지만 유대인이기를 포기한 사람이어서 자신과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이 일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허츨은 드레퓌스가 사형 당하는 현장에서 군중들이 외치는 소리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반역자를 죽이시오. 유대인을 죽이시오!’ 허츨은 드레퓌스가 처형당하는 이유가 반역자라는 사실보다 유대인이기 때문인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건 후에 허츨은 자신이 유대인인 사실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유럽인들은 유대인을 멸종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살 길은 국가로 독립하는 길밖에 없음을 허츨은 알고, 전 세계 유대인들을 향해 유대인의 나라를 만들자고 호소했습니다. 그의 꿈은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습니다. 신문에도 ‘절망에서 나온 허황된 꿈’이라고 평했습니다. 유대인 친구들조차도 정신 나갔다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강력한 소망이 허츨을 독립에 미치도록 만들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을 잃어도 계속해서 기다리며 외치게 했습니다. 그렇게 불가능해보이기만 했던 희망은 허츨이 세상을 떠난 지 44년 만에 이루어지고야 말았습니다. 그의 기다림은 희망이었고, 결국 현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몬과 안나 두 사람의 인생에 있었던 그 기다림도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많기에 잠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당시 두 사람의 개인 상황도 상황이었지만 시대상황도 매우 절망적이었을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에 올라왔을 때 메시아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가슴에 품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일을 기다리는 대강절 기간 동안 우리가 진정 기다려야 할 이는 누구인지, 그를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다시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주의 백성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두 사람에게서 교훈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시몬과 안나는 예수님을 ‘믿음과 희망 중’ 기다렸습니다.
두 사람이 바라본 당시 시대 모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흔적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시몬은 자신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안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주야로 금식하며 탄식의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먼저 시몬과 안나의 나이를 보십시오. 어떤 학자들은 이들이 100살 혹은 적어도 90살은 넘겼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나이가 들면 희망을 노래하기보다 포기에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합니다. 새로운 일을 하기 두려워합니다. 희망보다는 절망하기가 쉽습니다. 안나는 남편과 단 7년을 함께 살고 무려 84년이라는 시간을 홀로 살았습니다. 요즘 과부와는 다르게 당시 과부에게는 대외적이고 정치적인 지위를 주지 않았습니다. 환경으로만 보면 오로지 절망 속에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시대상황을 보더라도 지도층인 사두개파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로마 권력층에 붙어 평민들을 박해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자신들만 경건하다고 자랑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아예 상종도 않았습니다. 에세네파는 이것저것 보기 싫다며 은둔생활에 들어가 버렸습니다. 버려진 민중, 아무도 위로하지 않는 민중, 밟으면 밟히고 찍으면 찍힐 수밖에 없는 그 민중에겐 그들을 대변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간 희망의 메시지는 들려오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희망이란 무엇입니까? 불행이라는 터널을 지날 때 터널 끝에 비추이는 빛과 같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두려울 때 이길 수 있는 용기가 되기도 하고, 현실을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주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버림 받았다고 생각될 때 혼자가 아니며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리고 희망은 현실의 슬픔을 이길 수 있게 합니다.
남아공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이 감옥에 있을 때에 딸이 아이를 낳아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딸의 요청에 만델라는 아이의 이름을 ‘Hope’ 곧, 희망이라고 지었습니다. “너는 희망이야. 감옥에 있는 동안 희망이 나를 떠난 적이 없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희망은 나를 떠나지 않을 거야.”
제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석방되던 날 전 세계 매스컴에 비춰진 만델라의 모습이었습니다.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던 사람 같지가 않았습니다. 참 자유자의 표정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습니다. 대권을 이어 받은 만델라 대통령은 한 맺힌 사람의 모습이 아닌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사람으로 또한 세계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평화의 상징으로 등장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만델라에게서 희망이 떠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품어왔던 희망이 부서지고 깨져 절망하고 있는 분이 있습니까. 안나와 시몬은 그 희망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사람에게 두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늙었어도, 남편이 세상을 떠나 희망이 없다 할지라도 여태껏 약속을 지키신 신실한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그들은 희망 중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삶의 현장을 보십시오. 나 개인적으로 봤을 때 경제적인 희망이 없을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날 건강의 희망이 없을 수 있습니다. 민족 분단의 상황 가운데도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불러야 할 희망의 노래는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자기 태에서 나온 자녀도 버리는 세상 속에서 우리를 자신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담대하게 외치며 끝까지 붙드시는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노래해야하지 않을까요? 그 희망은 우리 가슴에서부터 터져 나와야 합니다. 세상을 포기하고픈 사람들,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에게 우리 입술을 통해 희망은 전달되어야 합니다. 교회로부터 어두움을 향한 희망의 빛은 증거 되어야 합니다.
대강절은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희망을 다시 찾게 해 주는 시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희망을 잃어버렸습니까? 희망을 어디에 두셨습니까?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 앞에 다시 두십시오. 어둠을 보지 마십시오. 내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나 자신을 보지 마십시오. 본래 거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희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 있습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약속 속에 있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고아와 과부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겠다던 약속을 붙들고 나간다면 우리 삶은 새롭게 변화될 것입니다.
둘째, 안나와 시몬은 언제든지 메시아를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며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아기 예수를 메시아인줄 알아본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야가 올 것을 알고 있었고, 오시면 맞이하리라 생각하며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두 사람의 기다림을 나타내는 동사는 수동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다림’ 이란 단어의 모양은 수동형입니다. 오면 만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두 사람이 기다린 기다림은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입니다. 메시야가 오실 것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본문 2장 25절 ‘시몬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실 메시아를 위해 시몬은 율법을 지켰습니다. 사람에게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가꾸었습니다. 언제 주님이 오셔도 맞이할 수 있도록 살았다는 것입니다. 2장 37절, 안나도 금식하며 기다렸을 뿐만 아니라 섬기는 일을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게 해왔다고 증거합니다. 희망이 없다던 시대에 시몬과 한나는 주님께서 보내실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아무것도 바랄 것 없는 그 때 간절한 바램으로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삶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는 흐트러지게 마련입니다. 환자들은 대체적으로 처음엔 희망을 가져보다가 더 이상 살수 없다는 선고를 받으면 자포자기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3절도 말세에 재림이 늦어지면 자기 정욕대로 행하는 사람이 많아진다고 말씀합니다.
정신과 의사였던 폴 트루니에는 현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 신앙인들의 비극 중에 하나는 구도의 정신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오실 것을 말하면서도 실제 삶 속에서는 진지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이 현대 신앙인들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독일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바리아(Bavaria)라는 성에 루드비히(Ludwig) 공작이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고 괴롭히는 포악한 공작을 성안에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어느 날 공작이 사냥을 나갔다가 숲 속에 한 작은 예배당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단 앞에서 오랜만에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예배당 벽에 무슨 글씨가 쓰이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보였다가 사라졌기에 앞부분만 기억났습니다. 삼일인지, 석 달인지, 삼년인지 아무튼 그 안에(In Three ~)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껏 죄를 많이 지었던 공작은 나름대로 해석하기를 삼일 안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삼일 동안 아내와 부하들에게 잘 해주었습니다. 죽어서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생각을 하며 삼일 째 되던 날 높은 탑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공작은 다시 생각했습니다. 삼일이 아니라 석 달이었구나. 석 달 동안 가족과 백성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세 달이 지나도 죽지 않는 것입니다. 공작은 이제야 확신을 가졌습니다. 삼 년이었구나. 3년 동안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팔소리와 함께 독일 왕실에서 사절단이 왔습니다. 바로 루드비히 공작을 독일의 황제로 모시기 위해서. 삼일, 삼 개월, 삼년을 하나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던 공작의 소문이 전 독일에 퍼져있었던 것입니다.
공작이 독일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선행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작의 선행을 가능하게 한 것은 ‘기다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린 것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면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는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것을 고민하는 것이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적극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앞으로 몇 십 년 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삼일 뒤에, 삼주 뒤에, 삼년 뒤에 심판대 앞에 설 것이라 생각하고 하루하루 희망 가운데 절제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시몬과 안나가 메시아를 기다렸기 때문에 경건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삶이 그러해야 하지 않을까요? 진정 주님을 만나기 원하십니까? 아름다운 만남을 위하여 오늘 우리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 시간과 물질, 건강을 바로 사용하고 있는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셔야 합니다. 그것이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적극적인 기다림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시몬과 안나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감사와 증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시몬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이 메시아인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만민 앞에 예비한 것이요 만민을 비추는 빛이라. 주의 백성이 이스라엘의 영광이라.’ 증거합니다. 38절을 보면 안나는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구속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백 년 가까이 살아온 시몬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자기 삶을 보고, 이웃의 삶을 보아도 절망과 상처, 위로받지 못함과 괴로움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이 희망을 잃지 않고 메시야를 기다렸던 어느 날 이제야 주의 구원을 보았노라고, 어둠 가운데 빛이 되시는 주님을 보았노라고 외쳤다면 그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요. 일평생 절망과 좌절만 보았던 시몬의 품에 안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랬기에 시몬은 더욱 감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안나는 얼마나 감격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외치는 안나의 음성은 그리 낯설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바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인생의 갈증 속에 헤매던 사마리아 수가 성의 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주의 구원을 보았노라고 외치는 감격, 안나와 마찬가지로 주를 만난 자의 감격입니다.
여러분은 주를 만난 감격을 갖고 계십니까? 아무리 보아도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나, 버려져 아무도 돌보지 않는 나를 찾아오신 주님, 조건도 이유도 없이 찾아오시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기까지 사랑하셨던 그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다면 우리가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경배 드리며 우리 입술을 다 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지 않을까요? 성탄의 계절,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내가 찾은 복음의 소식을 증거하는 것이 진실로 구원을 맛 본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본질적인 모습일 것입니다.
감사와 증인으로서 사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낙담과 탄식의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 내 인생을 찾아와 구원하고 인도하실 그 주님의 이름으로 딛고 일어나십시오. 절망과 낙담을 중단 하십시오. 삶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이제는 그만 두십시오. 내게도 빛과 희망이 되어주실 주님의 손을 붙잡고 당신을 둘러싼 그 어둠을 뚫고 나가십시오. 바로 그것이 주를 증거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고난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백성입니다. 이 땅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희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이 있기에 또 다시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희망이 원래 우리 것은 아닙니다. 내 안에서 찾을 수 없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원래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희망의 약속을 다시 붙드십시오. 다시 오실 주님을 향한 오늘 내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십시오. 마지막으로 받은 구원의 감격을 증거하십시오.
지난 특별 새벽기도 집회 중, 첫 대에 예수 믿은 성도들을 위한 축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일어났습니다. 인생의 목표와 의미 그리고 기쁨을 주신 예수님 때문에 혈육과의 갈등까지도 감당하며 복음의 증거자로 살아가고자 애쓰는 그들이었습니다. 남편조차도 아내조차도 이해해 주지 않는 상황 속에서 포기할 수 없는 비밀이 있기에 외롭고 고독하지만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 ‘하나님은 너를 지키시는 자 낮에 해와 밤에 달도 너를 상치 못하리.’ 축복할 때 그들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았습니다. 왜입니까? 포기할 수 없는 보물을 간직하며 사는 것은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달플지라도 가족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을 감당하고자 힘찬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 성탄의 계절에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납시다. 희망의 노래를 다시 부릅시다. 희망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모두 덮어두고 하나님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갑시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희망의 노래가 여러분의 가슴 깊이에서부터 시작되는 하루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므온을 위로하신 하나님
눅 2:21-35 / 김태환 목사
1975년 10월에 사망한 영국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는 20세기가 낳은 고고한 지적(知的) 리바이어던(Leviathan)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위대한 문명사가로써 오느날 많은 역사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최근에 주목을 받고 있는 새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문명 충돌론(The Clash of Civilizations)의 핵심도 사실은 토인비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토인비는 12권의「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를 썼습니다. 이 책을 구상하는데서부터 완결까지 40년이 걸렸고, 집필하는데만 2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책의 기본적인 가설은 ”문명의 성장은 계속되는 도전(challenge)에 성공적으로 응전(response)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는 것입니다. 그는 도전에 대한 응전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창조적 소수자(the creative minority)”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이 창조적 소수가 문제에 부딪칠 때마다 창조적 역량을 발휘 하여 문제의 해결의 길을 제공할 때 역사는 발전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다수의 길을 따라갈 때 역사는 쇠퇴한다고 보았습니다.
흑인 민권운동의 선구자인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토인비가 말하는 창조적 소수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창조적 소수자라는 말이 때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 잘못 사용되기도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주장이 옳다는 생각을 포기할 수 없다.”
누가복음을 쓴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쓰면서 데오빌로 각하(most excellent Theophilus)를 염두에 두고 썼습니다. 누가 는 복음서의 저자 가운데 유일하게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직업이 의사였습니다. 그는 당시 사회의 지식인이었습니다. 누가는 역사의식이 투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서를 쓰기 전에 그는 그 나름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입니다(누가복음1:3). 그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예사로 보아 넘기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처음부터 자세하게” 조사를 해두었습니다(I myself have carefully investigated everything from the beginning, it seemed good also to me to write an orderly account for you, most excellent Theophilus,).
누가가 역사의식이 투철했다는 사실은 그가 사도행전을 기록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됩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이방 세계에 전파된 기록입니다. 누가복음처럼 그는 모든 일을 "처음부터 차례대로(orderly)" 기록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처음부터 자세하게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가복음을 읽으면 좋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읽으면 초대 기독교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은 시므온이라는 한 늙은 제사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 다음에는 여선지자 안나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나이가 91세나 되는 늙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러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시므온에 대한 이야기와 안나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가는 당시의 지성인이었습니다. 누가는 역사에 대한 식견과 안목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므온과 안나에 대한 이야기를 그의 복음서에 기록했겠습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 이야기를 썼겠습니까? 아니면 누가가 의도적으로 이 이야기를 썼겠습니까? 누가도 마태처럼 화려하게 동방박사 이야기를 그의 복음서에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동방박사 이야기 대신 목자들의 이야기를 썼고, 시므온 제사장과 안나 선지자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성서학자인 윌리암 버클리(William Barclay)는 오늘 말씀을 주석하면서 “땅의 침묵자들(the Quiet in the land)”로 알려진 소수의 침묵자들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유대 나라에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권력과 힘을 가진 메시야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었을 때, 이 사람들은 단지 하나님이 오실 때까지 끊임없이 기도하며 조용히 깨어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내하면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을 위로하실 때를 기다렸습니다. 이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그 사회에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누가는 그의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이런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메시야에 대한 기대와 흥분으로 들떠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처음부터 자세하게 조사를 했던” 누가는 그들의 기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회에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사람들의 가치에 대하여, 이 사람들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상상력에서 온 것입니다만, 어쩌면 누가는 이사야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사야는 많은 예언자 가운데 “남은자(the Remnant)” 라고 하는 독특한 역사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잘못되었을 때도 그 시대를 구원하기 위하여 소수의 남은자들을 두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는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도 끈질기게 이어지는 자기 민족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면서 이 역사에 하나님이 남겨두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이사야 10:20-22). 그는 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남겨두신 “거룩한 씨(the holy seed)” 라고도 했고 “그루터기(the stump)”라고도 했습니다(이사야6:13). 나무를 밑둥까지 잘라 버려도 그루터기가 남아 있는 이상 다시 거기서 싹이 나고 줄기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영향을 받은 누가도 “땅의 침묵자들”을 보면서 똑 같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누가 이 시대의 남은자들인가?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 그의 구원의 역사를 이어 나갈 것인가? 헤롯당원들인가? 바리새인들인가? 사두개인들인가? 열심당원들(Zealots)인가? 아니면 엣세네파 사람들(Essene)인가? “누가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았던 "땅의 침묵자들," 힘이 없고 나약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위해 남겨둔 사람들이라는 믿음과 확신(確信)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토인비가 말했던 “창조적 소수자(the creative minority)”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토인비는 “창조적인 소수자”는 자기들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 삶의 목적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창조적인 소수자들이 그 사회를 이끌고 그 사회의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을 모방할 때(imitates) 그 문명이 발전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창조적인 소수자들이 창조적인 힘을 잃어 버리고 사회의 엘리트(the dominant minority)로 군림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그 문명이 쇠퇴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 역시 저의 상상력에서 온 것입니다만, 토인비 역시 그의 이 사상을 이사야의 “남은자” 사상에서, 그리고 누가의 역사의식에서 배운 것이 아닐까요? 토인비가 성경 이야기를 많이 인용하고, 그가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런 확신을 갖게 됩니다.
확실히 토인비가 말한 “창조적인 소수” 라는 말은 매력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말하고 있는 이 “창조적인 소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토인비를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토인비가 그렇게 경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이 창조적인 소수를 그 사회의 엘리트 그룹이라고 오해합니다. 정치인들은 정치인들대로 이 말을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이용합니다. 토인비의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자기들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 삶의 목적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창조적인 소수자들이라면, 쉽게 그 사회의 엘리트 그룹일 것이라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창조적인 소수자들이 누구냐고 하는 질문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보세요. 시므온 같은 사람이 역사를 지켜가는 창조적인 소수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세속의 역사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시므온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힘과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시므온같이 그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이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중에도 엘리트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십시오.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내 생각이 과연 성경적인가?” 소수의 엘리트들이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라는 위험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생각이 과연 성경적인 생각인지 스스로 물어 보십시오. 시므온을 보세요. 그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니까 “He was righteous and devout.” 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까? 정직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누가 정직한 사람입니까? 정직에 대한 정의(定義, definition)가 어렵지 않습니다. 정직은 거짓말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좀 불이익이 있어도 거짓말 하지 않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고 의로운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거짓말을 잘 합니다. 자식들에게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자기는 거짓말을 잘 합니다. 의로운 삶의 기초는 정직입니다. 누가 의로운 사람입니까? 불의한 일을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불의한 일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누가 의로운 사람입니까?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 양심의 소리에 민감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의로운 삶에 대한 보다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의로와질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의로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 받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자기 안에 있는 죄성(罪性)을 인정하고 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시므온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까? 성경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습니다(디모데후서3:5). 어떤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품이 닮는 삶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베드로후서1:4-7).”
또 누가 경건한 사람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책임과 의무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웹스터 사전에 보면 “경견한(devout)” 라는 말을 “devoted to religion or to religious duties” “expressing devotion” “devoted to a pursuit, belief” 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믿는 것을 위해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위해서 깊이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한 삶입니다.
시므온을 설명하는 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waiting for the consolation of Israel)”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민족을 위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조용히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좀 답답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다리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성급합니다. 금방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 합니다. 앞에 홍해 바다가 가로막혀 오도 가지도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Fear ye not, stand still, and see the salvation of the LORD, KJV, 출애굽기 14:13).” 는 말씀이었습니다.
기다리는 믿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다리는 믿음은 의(義)의 궁극적인 승리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디리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시므온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땅의 침묵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남은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토인비가 말하는 “창조적인 소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하고 다릅니다. 동(東)이 서(西)에서 멀고, 하늘이 땅에서 먼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하고 다릅니다. 우리는 힘있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이 역사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남은자,” 이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이어나가는 “거룩한 씨” “그루터기” 그리고 역사를 발전 시켜 나가는 진정한 “창조적인 소수자들” 이 있다면 그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다시 토인비의 말을 들어 볼까요? “창조적인 소수자는 자기들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 삶의 목적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창조적인 소수자들이 그 사회를 이끌고 그 사회의 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을 모방할 때 역사는 발전한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성경적인 가치들(biblical values)이 옳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자랑스럽게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습니까?
다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의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경건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어나갈 이 시대의 남은자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의 창조적인 소수자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성경적인 논리가 이 시대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구원의 빛으로 오시는 이
눅 2:22-38 / 이수용 목사
오늘 본문은 메시야 즉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던 두 사람이 아기 예수를 만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시므온이라 하는 남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안나라고 하는 나이가 매우 많은 여선지자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을 때였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하고, 27절에 보면 “...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합니다. 여기서 모세의 법은 무엇이며 율법의 관례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레위기 12장과 출애굽기 13장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레위기 12장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여인이 임신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곧 월경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여덟째 날에는 그 아이의 포피를 벨 것이요 그 여인은 아직도 삼십삼 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를 낳으면 그는 두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월경할 때와 같을 것이며 산혈이 깨끗하게 됨은 육십육 일을 지내야 하리라. 아들이나 딸이나 정결하게 되는 기한이 차면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회막 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여호와 앞에 드려서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리하면 산혈이 깨끗하리라. 이는 아들이나 딸을 생산한 여인에게 대한 규례니라.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정해주신 몇 가지 규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여덟째 날에 그에게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산모는 출산 후 사십 일 동안은 부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그 동안은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정결하게 되는 기한인 사십 일이 차면 산모는 번제를 위하여 일 년 된 어린 양을 가져가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제사장에게로 가져가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것입니다. 넷째, 만일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13장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사람이나 짐승을 막론하고 태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출13:2) 했습니다. 이 모든 규례에 따라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본문 23-24절을 봅니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한 사람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 년 된 어린 양이 아니라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를 드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셉과 마리아가 성전에 데리고 온 아기 예수를 시므온이 만난 것입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그 위에 함께하셨으며(본문 25절)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은 바 있었습니다(본문 26절). 그날도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으며 거기서 요셉과 마리아가 부모가 데리고 오는 아기 예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본문 27절). 비록 태어난 지 사십 일 밖에 되지 않은 아기였지만 그에게서 그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성령의 감동으로 된 일이었을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말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본문 28-32절) 시므온이 하는 말을 들은 요셉과 마리아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본문 33절). 왜냐하면 그가 한 말은 그들이 아기 예수가 태어나기도 전 그가 마리아의 배 안에 잉태될 때부터 천사에게서 듣고 마음에 간직해두었던 말들과 같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은 자기의 말을 놀랍게 여기고 있던 그들을 축복하고 마리아에게 말하기를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본문 34-35절) 했습니다. 시므온의 이 말 또한 놀라운 말입니다.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를 인정하고 믿지 못함으로써 영원한 멸망에 처하게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를 메시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히 복된 삶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그가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서기관과 바리새인 등 유대인교의 지도자들로부터 질시와 배척을 당하고 대역죄인으로 몰리게 되며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 위한 모의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마리아가 아들이 당할 십자가의 모진 고난과 죽음을 당하는 일로 가슴이 찢어지도록 아픈 고통을 당하게 되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끝으로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라.” 한 말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과 그에게 적대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의 분명한 구별이 드러나게 되리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이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으로 나아갈 자들 사이를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구원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성전에 모습을 나타낸 아기 예수를 제일 먼저 만난 또 한 사람은 나이 많은 여선지자 안나였습니다. 그녀는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고는 혼자가 되었습니다(본문 36-37절). 본문 37절에서 우리말로는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하지만 원문은 그녀가 아기 예수를 만난 때가 팔십사 세 때라는 것인지 아니면 혼자 된지 팔십사 년이 된 해라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일 후자의 경우로 본다면 그 당시 여자들이 보통 열네 살 때 혼인하던 것으로 쳐서 칠 년을 남편과 살고 그 후로 혼자 팔십사 년을 살았다면 그녀의 나이는 백오 세 정도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고령의 여선지자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본문 37절). 분명 그녀 또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그로 인해 겪고 있던 민족적 고난의 삶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회복의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하며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메시야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기 예수를 본 그녀는 그에게서 그녀의 오래고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확신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했던 것입니다(본문 38절). 여기서 예루살렘이라 한 것은 예루살렘 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말하는 것이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란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죄의 용서와 그들의 고난과 절망의 삶으로부터의 구원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회복을 바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나는 아기 예수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고대하던 메시야이심을 확신하며 사람들에게 그를 통해 드디어 민족의 염원이 이루어질 것임을 열심히 말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아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두 인물이 동시에 아기 예수에게서 인정하고 확신하며 하나님께 감격스럽게 감사와 찬송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시므온의 입에서 나온 말이 무엇입니까? 본문 30-32절을 다시 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아기 예수는 이스라엘뿐 아니라 천하 만민을 위한 구원의 빛으로 오신 이라는 것입니다. 안나는 또 아기 예수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그녀는 죄의 용서와, 고난과 절망의 삶으로부터의 구원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회복을 간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민족적 염원을 이루어주실 이로서 고대하던 바로 그 메시야로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녀에게도 아기 예수는 역시 구원의 빛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백성의 죄를 통회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빌며 나라와 민족의 구원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인물들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다고 합니까?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다 합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셨다” 합니다. 안나는 어떠했습니까? 그녀는 홀로 되고 팔십사 세 혹은 백오 세가 되기까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로 섬겼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이 땅의 모든 교회를 위하여,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주시기를 시므온과 안나처럼 기도하며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기도하며 기다리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오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지금 겉으로 보기에는 경제기술 강국 같고, 문화 강국 같아 보입니다. 전 세계에 한류를 유행시키며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구석구석 부패했고 비리가 넘치는 나라입니다. 뇌물 안 쓰고는 되는 일이 없으며 뇌물 쓰면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입니다. 경찰과 검찰이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싸우지만 국민은 둘 다 꼭 같이 대오각성하고 국민 앞에 석고대죄 해야 할 장본인들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대통령 선서를 꼭 열흘 앞두고 있습니다. 집 사고 땅 살 때 소위 다운 계약서 작성해서 탈세하던 자들이 진심 어린 사과도 제대로 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이 나라의 대통령 되겠다고 전국을 다니며 설치고 있습니다. 반대당 사람들 청문회 할 때는 도덕적 파렴치한으로 몰아 고위 공직에 오르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 쪽 사람이 꼭 같은 짓을 한 것은 관행을 따른 것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후안무치한 강변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이런 자들이 대통령이 되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말 이 나라와 국민을 부정부패와 양심불량과 거짓말 밥 먹듯 하기로부터 구해내며 우리 국민을 정직한 국민, 우리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 우리나라를 건강한 나라로 만들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위해 시므온과 안나처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모든 문제의 해결은 그 어느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구원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시는 주님을 우리 국민이 바로 맞이하게 되기를 위해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바른 기다림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구원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북한 땅에도 절실합니다. 우리와는 다른 모습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북녘의 땅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북녘 동포들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위로하시고 속량하시며 구원해주시기를 쉬지 않고 간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더욱 힘껏 그 일에 우리의 마음과 손을 한데 모으는 이번 대림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다림의 행복
눅 2:22-33 / 이정익 목사
여러분, 기다림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 아십니까. 옛날 설날이 다가오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좋았습니까. 설날 당일 보다 설날을 기다리는 1주일 전이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설날에 입을 옷을 매만지며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들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기다림의 즐거움이고 행복입니다. 그런데 막상 설날이 되면 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버렸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허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결혼 당일보다 결혼 날을 받아놓고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이 더 행복하고 좋을 것입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막상 결혼해서 살면 그날부터 전쟁인줄도 모릅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 동안 금식하기 위해서 굶습니다. 그 때는 먹고 싶은 생각이 절절이 느껴집니다. 그 때는 먹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강렬하게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온갖 유혹이 다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막상 금식을 끝내고 음식을 먹고 나면 또 별 것도 아닙니다. 그때 느끼는 심정은 이것 때문에 그렇게 안달했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기다림, 이것은 참 행복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오직 세상에 대한 사랑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당시 억압받는 삶을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약속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이제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오지 않았느냐” 하고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가 오시기만 하면”하고 모두 큰 기대를 했습니다. 그가 오시기만 하면 모든 고난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 기다림의 마음들이 얼마나 뜨겁고 간절했겠습니까. 그때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메시야의 오심을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때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안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6절을 보면 안나라는 여인은 결혼해서 남편과 7년을 살고 사별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혼자된 지 84년 동안 혼자 살면서 메시야가 오시기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직 이 여인은 나라를 위해서,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 땅에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이 결례를 행하기 위해서 성전에 온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에게 주어졌던 감동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사람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는 시므온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밤낮 기도하면서 메시야의 오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진지하고 경건하게 밤낮 기도했던지 성령으로부터 “태어나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마침내 정결예식을 받기 위해서 성전에 온 어린 예수를 품에 안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때 시므온은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그 말은 “이제는 이 민족의 앞날에 대해서 더 이상 염려 안 해도 되겠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애국자요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용히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면 너무 시끄럽고 요란합니다. 딴에는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떠들겠지만 곁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면 나라사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모두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진정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하는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다 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시므온이나 안나라는 여인이 진정한 애국자이고 민족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조용히 성전 지하에 숨어 주의 도래를 기다리며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주여 당신이 오실 때가 언제입니까, 언제까지 이 백성이 이렇게 고난을 받고 압박을 받아가며 설움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까”하고 자신의 평안이나 가정의 평안도 포기하고 평생 수절하며 기도하는 그 모습, 그 모습이 진정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으면 성령께서 어느 날 오셔서 “염려하지 말라, 네가 죽기 전에 그를 보게 되리라”하고 계시를 해 주었겠습니까. 정말 열심히, 경건하게 나라를 사랑하고 생각하고 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격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간절한 모습을 외면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들도 열심히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이유는 모두 내 뜻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전히 나에게 집중된 기도만 하니까 고생하고 수고롭게 금식하며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일 것입니다.
여기 이 시므온과 안나가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임이라” 이 약속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약속입니다. 장차 이 땅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메시야가 탄생하면 높은 곳이 낮아지고 억눌린 민족이 자유해지고 어린 양이 이리와 함께 뛰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메시야 오시기를 사람들이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약속이 있는 사람은 기다리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다림의 행복입니다.
아브람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량한 들판을 걸으면서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날마다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면서도 꿈을 꾸며 살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기약 없는 수형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지난날에 보여주셨던 꿈들을 생각하며 그 꿈이 언젠가 현실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약속이 있는 사람의 행복함입니다. 농부들이 씨를 심어놓고 새싹이 나오고 꽃이 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마음만큼이나 행복한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때로 주어지는 고난도 기쁘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고난을 기쁨으로 소화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고난을 모두 소망적으로 해결되리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당시의 고난을 잘 이겨냈고 그 고난 속에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지배를 받고 살았지만 오히려 로마인을 우습게 바라볼 수 있는 자존심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조상이 그랬듯이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하는 노래를 부르며 살았을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같은 힘이 있고 용기가 있고 행복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장차 주어질 천국에 대한 약속 때문에 바울이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살아갑니까. 그는 죽음 앞에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하고 의연합니까. 그것도 그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입니다. 폴리캅이 불에 타 죽어갑니다. 그의 절친한 친구가 와서 “로마황제도 신이라는 말 한마디만 하게, 그리고 죽음을 모면한 다음에 회개하면 하나님이 너의 입장을 참작하지 않으시겠나” 하고 회유할 때 폴리캅은 대답합니다. “그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기 보다는 차라리 의연하게 죽음의 길을 택하겠다.” 그리고 그는 초연한 모습으로 불에 타 죽어갑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도 그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약속이 주어진 사람에게는 이런 용기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신앙이 주는 용기입니다. 이 용기가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마침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 어느 기사를 보니까 김우경 검사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 젊은 검사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음속에 이 땅의 방황 대는 젊은이들을 위한 어떤 일을 해야 하겠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저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일을 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는 오늘 검사의 삶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매일같이 사람을 죄인으로 추궁하고 죄의 올가미를 씌워 재판에 부치는 이 일에 회의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이 땅의 방황 대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길을 인도해 주는 사역을 위해서 마침내 미래가 창창한 검사직을 버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그 자리를 새로운 사역을 위해서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출세의 길을 가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판인데 이 분은 용기 있게 그 자리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위한 사역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그 자리를 용기 있게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자기에게 주어진 이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있고 기대가 있고 미래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그것은 약속이 없는 사람입니다. 약속이 없는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있는 사람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대인의 자존심을 지키며 오늘인가 내일인가 기다리며 기도하고 고대했습니다. 그래서 안나와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이 없는 사람들은 현실에 매여 살아갔습니다. 당시 로마 치하에서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현실에 충실해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충성하고 온갖 혜택을 받고 현실에 안주해서 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삭개오 같은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에게 있다면 오직 현재만 있었습니다. 독립에 대한 생각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동족도 민족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동족에게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모아서 로마에 바치고 자신은 구전을 챙겼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동족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완용도 생각해 보니까 조선이 강한 일본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 어디를 보아도 조선이 독립할 기운이 엿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친일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절대 충성하고 온갖 혜택을 받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림이 없고 꿈을 잃고 기다림의 소망이 없으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의 나라에서 포로생활을 합니다. 몇 년간은 돌아가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까 돌아간다는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불가능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중 한 부류는 그래도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짐 보따리를 풀지 않고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미래를 포기한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판단을 하고 현실주의자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보따리를 풀고 현지인과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업에 몰두하고 터전을 이루어 안주하며 살아갔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비전을 잃으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꿈을 잃고 산다는 것은 이렇게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도 오늘 이 세상에서 이 꼴이 되어 살아가기 쉽습니다. 신앙인이 천국에 대한 미래와 꿈이 없으면 이렇게 오직 현실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현실에 집착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그날이 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이 온 것입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갑자기 어느 날 해방이 왔습니다. 모두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때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짐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돌아가면서 그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얼마나 발걸음 가볍게 고향을 향해서 돌아가겠습니까. 이것이 약속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약속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땅에 천년 살 것처럼 정착하고 가정을 이루고 터전을 이루어 살던 사람들이 고민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붙잡는 현실이 너무 무겁습니다. 처자들이 붙잡았습니다. 사업이 그들을 가지 못하게 붙잡았습니다. 힘들게 마련한 집이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그렇다고 막상 여기 남으려니 여기는 타향입니다. 여기는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그냥 남아있는 사람들이 흩어진 유대인들, 버려진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리라고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믿고 모두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기다리던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700년 동안 기다리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아무 징조도 소리도 없이 오셨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그때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의 합창소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고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왔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찾아 왔습니다. 얼마나 요란했으면 그 멀리서 사람들이 다 찾아왔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조용했습니다. 아무 소리도 징조도 꿈도 없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요란하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요란한 징조가 있었어도 그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소리만 들리지 않은 것이 아니고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없는 사람이 불행한 것입니다. 약속이 없으니까 기다림도 없는 것입니다. 이 다음 예수 재림 때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날도 어느 날 갑자기 올 것이 분명한데 그날도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기다림이 무엇이고 약속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시므온과 안나라는 노인들이 매일같이 금식하며 철야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땅에 오신 그 예수님을 품에 안아보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모습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시므온이 본 예수님
눅 2:22-35 / 마경훈 목사
벌써 12월 둘째 주일입니다. 성탄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성탄절을 상당히 기다린 듯합니다. 이미 성탄장식을 끝낸 곳이 많습니다. 교회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감사하여 성탄장식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교회보다 세상 사람들이 더 요란스럽게 성탄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백화점이나 상가 심지어 술집도 성탄 준비에 분주합니다.
정말 사람들은 성탄절의 의미를 알고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 성탄절을 돈벌이의 기회로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야의 탄생에 대한 음성을 듣고 기다리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고 우리의 자세를 점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기 예수를 만난 시므온
성경에서 시므온에 대해서는 별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없습니다. 단지 본문에서 드러난 몇 가지 사실만 알 수 있습니다.
시므온이 가졌던 영적인 특징은 성탄절을 기다리는 우리들이 취해야 할 모범입니다.
1)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25절).
그 당시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그 시대의 사람들과는 달리 매우 주목할만한 예외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의로움은 외적 생활을 말하고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내적 태도를 의미합니다. 이 둘은 항상 병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은 있는데 불의한 삶을 산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의로운 삶을 살지만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다면 그의 의로움은 영원할 수 없습니다.
2)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참으로 암울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동안 침묵하셨고 국가는 로마의 지배 아래 놓였습니다. 선민의식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정말 비참한 시대였습니다. 그런 때에 메시야를 기다리던 시므온에게는 메시야가 위로자였습니다.
우리도 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힐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환경에 절망하고, 사람에게 절망하고, 자신에게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 절망의 때를 만나면 사람을 위로자로 찾습니다. 돈을 통해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으며, 육체적 쾌락 속에서 위로를 찾는 경우도 흔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절망의 때가 없습니까? 그 때 당신의 위로자는 누구입니까? 주님을 위로자로 삼으십시오. 누구도 주지 못했던 위로가 그분에게서 당신에게 임할 것입니다.
3)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25-27절).
시므온은 성령에 충만했습니다. 25절에서는 "성령이 그 위에 게시더라"라고 말씀합니다. 그 때는 아직 오순절 성령 강림이 있기 전입니다. 성령이 내주 하시지 않고 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26절에서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27절에서는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 없이는 안됩니다. 성령의 증거로 예수가 그리스도로 믿어지고(고전12:3),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이 아버지로 믿어지는 것입니다(롬8:16).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인데, 그것이 성령의 역사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우리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참된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인도하심 없이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과 관련된 두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성령의 역사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을 무시하고 마치 창조시 독처 했던 아담처럼 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둘째, 성령님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육신의 욕망충족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성령께서 원하시면 돈버는 방법이나 인생 성공의 비결 등을 가르쳐주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으로 만들어지며,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쓰여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들을 위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행복한 성탄절이 될 것입니다.
2.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시므온의 예언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그리고 부모들 앞에서 축복합니다. 그 내용은 아기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드러내줍니다.
1) 만민의 구원을 위하여 예비 된 분입니다.
30절에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주의 구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아기 예수 그분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31절에서는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만민에게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세상', '누구든지' 등의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하나님의 구원이며,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면 그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다른 방법을 제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와 헌신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 그리고 전도도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지만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구원에 감사해서 그리고 주님이 그런 일들을 하도록 부르셨기에 순종하여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행4;12을 보십시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노아의 시대 홍수로 세상이 멸망을 당할 때 유일한 구원선은 노아의 방주밖에 없었던 것처럼 불로서 심판 받을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 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됩니다.
2)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빛이며 영광입니다(32절)
예수님은 하나님의 빛이며 영광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 있습니다. 그 어떤 빛도 예수 안에서는 필요치 않습니다. 어떤 아름다움도 예수님 앞에서는 초라합니다. 심지어 찬란한 햇빛도 그분 앞에서는 어둠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빛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을 마음에 모셔드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분과 연합합니다.
영광의 예수님을 모셔드리는 순간 우리들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게 됩니다. 다른 어떤 노력도 필요치 않습니다. 단지 그분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영광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그 찬란한 솔로몬 성전도 원하시지 않으셨던 하나님께서 믿는 자 속에 들어오셔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질그릇의 가치는 하찮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그릇 안에 보화가 들어갈 때 보화로 인하여 가치가 달라지는 것처럼 신자의 가치는 신자 속에 거하시는 주님에 의해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더욱 영광스러운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접붙여진 가지는 나무의 진액을 통해서 나무의 생명을 공급받으며 나무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성도들은 교회라는 공동체를 통해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주님의 몸이며 신자는 몸 된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빛이며 영광이신데 그분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영광이 되십니다.
3) 인생의 패함과 흥함이 그분에게 달렸습니다.
34절에서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축복하는데 예수님에 의해서 인생의 패함과 흥함이 결정된다고 말씀합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리고 난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며 동일한 고백을 드립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6-7)
천지만물을 움직이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법칙까지도 만드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하나님의 도움 속에서 산다면 그 사람은 특별한 은혜를 받는 사람입니다.
사사기에서 미디안 군대와 기드온의 300용사가 전쟁을 합니다. 이 때 미디안 군대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았습니다. 도저히 수적인 열세를 극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보리떡과 같은 기드온과 300용사가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미디안과 아말렉 사람들을 물리치게 됩니다. 이 전쟁이 흥함과 패함이 하나님께 달렸다는 증거입니다.
알레스카 대학의 유명한 송 춘근이라는 교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간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절망하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하던 중 은혜를 받아 벙이 고쳐졌습니다. 그 이후 알레스카 대학에서 가장 인정받는 교수가 되었고 1년의 절반 정도를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실패할 수밖에 없는 그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를 세우시고 축복하신 것입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도 나의 열심으로 목회를 해봤습니다.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실패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제 힘으로 목회를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데로 순종해 보려고 애를 씁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참된 승리의 비결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도우심 속에 사는 인생이 돼야겠습니다.
4) 십자가에서 죽으실 분입니다(35절).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라는 말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보며 마음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마리아는 예수님을 지켜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시기는 했지만 육신적으로는 마리아의 아들입니다. 아들이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죽어 가는 것은 어머니에게는 엄청난 고통입니다.
그런 고난의 목적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십자가를 통해 주님을 향한 마음의 진위가 분별된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믿는다고 하는데 진짜 믿음이냐 가짜 믿음이냐를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분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지혜로 보면 십자가는 너무나 미련해 보이는 방법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시겠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입니까?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 얻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믿어집니다. 그것이 믿어지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진리는 구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승리 생활에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주님의 생명을 붙잡고 사는 것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 분이 주신 위로
눅 2:22-35 / 조재호 목사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 조건이나 받을 자격 없는 우리들에게 베푸시는 호의와 선물을 말합니다. '값없다'는 것은 값이 싸다는 것이 아니라 값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끝없다'는 것은 우리가 모태에서부터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까지, 한 인생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 너머의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인생의 시작과 끝이 하나님 손에 있듯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는 것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오늘의 말씀의 제목은 '그 분이 주신 위로' 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가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사람이 없습니다. 위로가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위로가 필요 없을 만큼 상처 없는 삶이 없습니다. 위로가 필요 없을 만큼 온전한 삶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는 성경에 이르기를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1:3-4)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위로를 선포해야할 설교자이지만 저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저를 먼저 위로해 주십시오" "저도 속상하고 아픈 일이 있고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위로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자라"(25)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므온이 받은 위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시므온은 성전에서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전을 찾아 언제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는가 기도하며 사모하며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기다리며 사는 존재입니다. 기차가 기차역에서 고향 갈 사람을 기다리고, 배가 바다 저쪽 섬으로 가려는 사람을 기다리듯이, 사람도 무엇인가를 누구인가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승진을 기다리고, 어떤 사람은 직장을 기다리고, 어떤 사람은 제대를 기다립니다. 어떤 사람은 병나음을 기다리고, 어떤 사람은 기회를 기다리고, 어떤 사람은 사랑을 기다립니다. 우리는 기다리며 사는 존재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비유가 등장합니다.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밤은 깊어 가는데 오지 않고 있으니, 신랑이 이제나 올까 저 제나 올까? 모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등과 기름을 준비했지만, 등잔 기름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준비하며 기다리게 마련입니다. 등잔이 살아 있어서 신랑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잔치가 시작되고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등잔이 다 꺼져가고, 누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에서 잔치에 못 들어간 다섯 신부가 있었습니다.
미래는 준비하며 기다리는 사람의 몫인 것입니다. 희망은 준비하고 노력하고 기다리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 개인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준비하는 사람은 자신이 있고, 기다리는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 땅에 세워주신 목적이 있는데 한번 멋지게 쓰임 받기 위해서는 준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시므온은 위로 받기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로해 주실 날을 기다리며 사모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로마의 말발굽 아래 정치적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더욱 가엾은 것은 사회 종교 지도자들의 종교적 위선과 억압 속에서 어깨를 펴지 못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병에 시달리고, 무시당하고, 따돌림당하고, 차별 당하고, 불쌍한 사람들, 불쌍한 영혼들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와 어두움의 그림자가 있고 위로 받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위로 받고 고침 받아야 하는 대부분의 상처와 고통은 자연이 준 것이 아니라 산 속의 동물이 준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준 것들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준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잘 아는 사람에게서 받는 것들입니다.
단체로 해외에 여행 갔다가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예약했는데 레스토랑에 갔더니 구석자리를 주고 딱딱한 빵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상하던 지요? 지배인을 불러서 항의를 했더니, 코리언이 들어오면 조용한 식당이 시끄럽고 예의 없기 때문에 구석에 자리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할말이 없었습니다. 운전 하다가 파란 불에 0.5초만 늦게 출발해도 영락없이 빵빵거리고 뒤차의 운전사가 눈을 찌푸립니다.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사람이 준 것은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잘아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면 그것이 오래갑니다. 교회에서 말을 해도 뒤틀어서 하지는 마십시오. 언중유골이라 했습니다. 말속에 날카로운 것을 숨겨서 찌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위로하는 입술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 이사야에게 명령했습니다. 서로를 위로하는 사람이 됩시다.
시므온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첫째,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성전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셋째, 그는 죽기 전에 위로를 볼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반드시 믿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는 사람에게서도 오지만 진정한 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어느 작은 자동차 수리 공장 광고판에 "우리는 상한 마음만 제외하고는 어떤 것이든 다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붙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일류 기술자가 해결하지 못하고 세상의 법으로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돈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며 퍼 마시는 술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음을 만드시고 헤아리시는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위로의 하나님은 때로는 직접적인 방법으로, 혹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진정한 위로는 위로부터 오는 위로이며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을 통해 오는 위로입니다. 시므온은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교회와 믿음을 떠나지 않아야 하나님의 일하심을 만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시므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안음으로 평안히 놓임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에게 하나님은 아기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성전으로 나오는 한 아기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요 위로자라는 것을 강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 은혜를 안은 것이었습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 안자마자 그의 속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영혼에 밀려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음 한 구석에 드리워져 있던 그늘이 벗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두운 고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십니다. 종의 눈이 구원을 보았습니다. 온 세상을 비취는 구원의 빛이요, 주의 백성에게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고생하며 상처받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을 위로자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의 치유자로 보내셨습니다. 진정한 삶의 위로와 변화는 시므온 같이 예수님을 마음에 품었을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해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복음입니다. 한 가족의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딸을 준 가족이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만 교통사고를 상해, 딸은 두 다리를 심하게 다치고 보조다리 없이는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딸보다는 덜했지만 아빠도 보조다리를 끼게 되었습니다. 사춘기 딸은 죽고 싶을 정도의 열등감에 쌓여, 책상에 엎드려 울고 있을 때, 위안이 되어준 사람은 아빠였습니다. 보조다리를 하고 다니기 때문에 딸의 아픔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아빠의 사랑으로 딸은 사춘기를 잘 넘기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입학식 날, 아빠는 딸이 자랑스럽다며 눈물 글썽였습니다. 입학식이 끝나고 나올 때, 큰길에서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는데, 차량이 마구 달리는 길 한복판에 한 어린 꼬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뛰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아빠가 정상인 같이 보조 다리 없이 길로 내 뛰어 아이를 안고 걸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딸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엄마 어떻게 된 거지?" 엄마가 대답했습니다. "놀라지 말고 잘 들어라.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일지만 아빠는 그 때 교통사고 날 때 사실은 다리를 다치지 않고 팔을 조금 다치셨다. 너의 아픔을 이해하시고 위로하시려고 4년 간이나 보조다리를 하고 사셨단다" 딸은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하나님은 상처 난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로하시고 치유하십니다. 말뿐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심으로 이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입니다. 세상의 빛과 희망이신 예수님을 품음으로 위로의 삶을 새롭게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시므온의 기다림과 구원
눅 2:22-35 / 유영설 목사
오늘은 교회력으로 강림절이 시작되는 첫째 주일입니다. 강림절은 성탄절 4주 전에 시작하는 절기입니다. 서방교회는 강림절이 교회력의 시작입니다. 즉 새해가 된 것으로 봅니다. 강림절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가 시작되는 서막입니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 기간에 성도는 내적으로 생활을 정돈하고 영혼을 맑게 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영접하기 위해 마음속에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러시아 정교회는 성탄 절기에 금식 합니다. 11월 20일부터 12월 24일까지 40일간 계속됩니다. 금식 기간 중 월, 수, 금요일에는 생선과 금식용 기름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성자 니꼴라이 (산타클로스) 축일인 12월 6일 이후에는 토요일과 주일에만 생선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12월 20일 이후에는 하루에 한 번 씩 저녁에 식물성으로 간단히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12월 24일 성탄절 전야가 되면 엄격하게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의 목적은 생활을 자제하고 육체의 욕망을 이기려고 유혹과 죄로부터 정신을 강건하게 하자는 뜻입니다. 우리의 성탄절 문화와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성도들의 성탄절은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신 것을 확인하는 절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확신하는 절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본문을 가지고 기다림에 대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기다림은 희망의 상징입니다. 인내하는 자의 특징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불완전하고 부족한 것으로 가득합니다. 희망할 것도 인내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불완전하고 부족함에 집착합니다. 부당한 일, 억울한 일을 자주 경험합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 힘들고, 어렵고, 위험한 일이 너무 많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얻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위로해 주고 무엇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 역사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매우 많습니다. 특히 예수 시대의 유대 땅을 보면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삶의 소망을 잃어버리고 좌절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요? 몇 가지 원인을 보겠습니다.
1 정치적으로 로마의 식민지
우리가 일제 36년의 지배를 받아봐서 압니다. 주권을 잃고 국가가 없는 국민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는지 많이 경험했습니다. 삶의 기반, 민족 정서와 문화가 뽑혀 버린 채 살았습니다. 그 고통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대 땅에서는 북쪽 갈릴리 지역과 남쪽 유다 사람들이 갈등이 많습니다. 혈통의 문제 때문에 많은 차별과 불이익이 있었습니다. 북쪽 사람들은 이방인들의 침략 때문에 순수 혈통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에 협조하는 권력자들은 백성을 고통에 몰아넣고 자신은 영화를 누렸습니다.
2) 경제적인 착취
식민지를 개척하는 이유는 자원을 빼앗아가고, 노동력을 손쉽게 얻기 위해서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민족에게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형편 속에서도 예루살렘 권력자들과 성전의 사제들은 많은 부를 누렸습니다. 곡창지대인 갈릴리 지역의 땅은 대부분 이들의 것이었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소작인이 되었고 농지세를 받아갔습니다. 사제들은 성전 세를 거두어 갔고 로마정부에는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이중 삼중의 착취구조는 갈릴리 사람들의 삶을 매우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3) 율법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을 구속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이 일반 서민들의 생활을 율법으로 통제했습니다. 율법의 상당한 부분이 서민들이 지키기 어려운 것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어기면 죄인이 되었고 심한 경우 유다 공동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율법이 사회의 불만을 통제하고 조절하는 도구였습니다.
4) 민족적으로 문화적인 갈등을 많이 겪었습니다.
예루살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유다의 순수한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인종차별이 매우 심했습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점령하고서 자국민을 유다의 사마리아 지역으로 이주시켜서 정착하게 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유다 사람들과 혼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혼혈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이었습니다.
차별과 불이익, 소외의 문제, 경제적 불평등은 그 시대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삶이란 것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속 시원한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고 힘들고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은 이때에 나도 똑같은 생각과 말을 할 것인가?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주님의 백성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들입니다. 기름 부으심을 받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구별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명을 받은 자는 거룩함과 경건한 자의 상징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강림절 첫 주에 평범한 유다의 한 노인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시므온은 누구인가?
그는 예루살렘에 거주했던 의롭고 경건한 자였습니다. 의롭다(δίκχίοζ)는 것은 하나님과 그가 속한 사회에 의무를 충실히 이행했다는 겁니다. 경건했다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세심하고 주의 깊게 생각하여 행동하는 율법에 충실한 자라는 겁니다. 시므온은 성품으로도 종교적으로도 생활에서도 훌륭하고 성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것만으로 살아갔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함이 이 사람의 삶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에서 그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가 겸비했던 무엇으로는 현실의 삶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위로 자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위로 자를 열심히 찾고 있지만 잘못된 위로를 받으려 하는 분들이 혹시 있습니까?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술로 위로를 받으려고 합니다. 잊어버리자, 털어 버리자고 합니다. 여러분 웃게 하고 즐기게 하고 잊어버리게 하고 생각이 마비되게 하는 것은 어떤 것도 우리의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에게 성령이 함께하셨습니다. 성령은 그로 하여금 참된 위로를 분별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의 지시를 받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음으로 그가 기다렸던 메시야를 보게 될 것이라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시므온은 유다 인들의 살길이 구원자로 오는 메시야 되신 예수님의 위로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위로하는 자를 보기 위한 열망이 얼마나 컸는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 했습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보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흔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것들이 있는데 여러분에게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명예를 높이고 이름이 유명해지고, 자녀가 잘되고 후손이 번성하고 이런 것입니까? 이런 것들은 아주 개인적인 희망입니다. 사실 인생의 모든 것도 아닙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스라엘의 희망을 보고자 하는 끈질긴 기다림이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와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 예수님을 팔에 안았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통 많고 갈등 많은 세상에 예수그리스도가 구원의 시작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안은 시므온은 <마음의 평화>를 느꼈습니다. 시므온은 약속의 말씀을 회상했고 지금 자기 눈앞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된 사실을 깨닫고 감격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는 유일한 구원의 희망입니다. 그분을 만나면 삶의 고통은 사라지고 위로받고 평안을 체험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삶의 한이 풀립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의롭고 경건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의롭고 경건한 자에게 성령이 함께하시고 지시하시고 감동을 주셔서 우리의 진정한 위로 자를 만나게 하십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이 오늘의 힘든 삶을 이기게 해 주십니다. 지금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는 삶의 감격을 예수그리스도의 위로를 통해서 받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 경배자의 특징
눅 2:22-40 / 임덕순 목사
우리가 예수님의 생일을 크리스마스(Christmas)라고 하는데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의 Christ와 매스(Mass)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라는 말은 알겠는데 뒤에 붙은 매스가 생일이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시겠지만 사실은 예배 라는 라틴말입니다. 지금도 천주교는 예배를 미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를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음으로 예배한 날인데, 그날이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오늘은 그 처음으로 예배한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탄생하신 아기 예수께 예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성탄절에 관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동방의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에는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사들의 전하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경배하였고, 그리고 아기 예수가 성전에 올라갔을 때 거기에 있었던 시므온과 안나가 아기 예수가 자기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라는 사실을 알고 경배를 드렸다고 기록하였습니다.
동방박사, 목자들, 그리고 시므온과 안나, 이들이 바로 주님을 가장 먼저 경배한 사람들로서 첫 번 경배자들 입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주님을 경배한 사람들은 아주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이방인이 있는가 하면, 성전에 머물며 일생을 경건한 생활을 한 유대인이 있고, 율법을 알지 못한 채 그 날 그 날 가난하게 살아가던 목자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구태여 공통점을 찾는다면 이들은 무엇인가 역사를 변화시킬 새로운 존재의 탄생을 기다렸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들이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로 경배하게 된 것은 각각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신기하고 이상한 별을 보고 찾아왔고, 목자들은 천사들의 전하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으며, 시므온과 안나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분이 오실 것을 예고 받고 고대하고 있다가 마침 성전에 할례를 행하러 오는 아기 예수를 한 눈에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경배한 그리스도는 평범한 아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분에게 어떤 특별한 모습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얼굴에 광채가 빛났던 것도 아닙니다. 한 평범한 갓난아기를 보았을 뿐이지만 이 첫 번째 예배자들은 그 아기를 보고 경배하였고, 경배한 후에는 돌아가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가 나타내는 어떤 기적을 본 것도 없고, 그가 말씀하는 어떤 교훈을 들은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아기가 그리스도임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한 아기에게서 온 인류를 구원하실 미래의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 자기들의 삶에 당장 미치는 어떤 구원을 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삶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이루실 미래의 구원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돌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아 주님께 경배했던 사람들의 특징이고 공통점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첫 번째 경배자들로부터 배워야 할 교훈이 무엇일까요?
첫째, 그들의 예배는 이기심에 의해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예배에는 전혀 이기적인 동기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를 경배하면서 받은 외적인 혹은 세상적인 보상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오히려 값비싼 선물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아기 예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먼 곳에서부터 오느라고 많은 고생과 수고를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수 개월 이상의 여행을 해야 했으며, 이 여행을 위하여 적지 않은 경비를 들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여행한 끝에 아기 예수를 찾았고 기쁨으로 경배하고 선물을 드리고 돌아갔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으로 이들의 행위를 계산해 본다면 참으로 막대한 손해를 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조금도 이를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앞에 나타난 별을 보고 "기뻐하고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자기들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보람 있고 흐뭇한 순간으로 베들레헴 여행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이들은 마치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을 오르는 등산가들처럼 아무 보상을 바람 없이, 다만 그들 앞에 별이 빛나기 때문에 그 별을 따라서 나섰고 결국 그분을 만나서 감격했던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동방박사들처럼 멀리서 온 사람들은 아니지만 이들은 일생을 바쳐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사람들입니다. 안나 같은 여자는 결혼 후 7년 만에 과부가 된 84세의 할머니였습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를 본 순간 자기의 삶의 목적이 바로 그 아기를 만나는 순간에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시므온이 노래한 말을 보면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이 아기 예수를 보기 위하여 일생을 살며 기다린 보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이들의 예배야말로 순수한 예배가 아니겠습니까?
이들의 예배에는 복을 받는다든지 자기의 개인적인 소원을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든지 하는 이기적인 동기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 한 번의 경배를 위하여 일생을 기다린다든지, 아니면 상당한 모험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헌신적인 경배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의 예배야말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진 아름다운 예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예배는 너무나 이기심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축복을 기대하며, 자기의 이기적인 소원의 성취만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생명과 온갖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리는 대신에, 탐욕으로 얼룩진 무감동하고 무표정의 얼굴로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크리스마스 경배자가 되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순수하지 못한 예배의 태도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전체를 나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신 주님께 온전히 헌신하여도 아깝지 않다는 마음과 자세로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준비된 예배, 정성을 드리는 예배, 감사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감동적인 예배가 될 것입니다. 그런 예배여야 찬송을 부를 때 감격의 눈물로 부르게 되며, 간곡하고 진실한 기도를 올리며, 말씀마다 아멘으로 응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첫 번 크리스마스 예배자들에게서 배울 또 하나의 교훈은 그들은 한 아기에게 경배하였다는 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닌, 갖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예배했습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에게서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보고 예배한 것입니다. 현재의 유익을 보고 경배한 것이 아니라 감추어진 하나님이 약속하신 미래를 내다보고 경배하였던 것입니다.
시므온의 노래에서 이런 신앙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그는 한 아이를 보고서 말하기를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함께 성전에서 예수를 본 안나도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안나 할머니는 이 아기가 바로 예루살렘의 구속자가 될 것임을 계속 사람들에게 말하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목자들도 마구간에 갖 태어난 어린 아기가 그리스도주가 되심을 믿고 그에게 가서 경배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연약한 아기의 모습에서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실 능력의 그리스도를 뵈온 것입니다. 그들은 구유에 누어있는 아기를 한 아기로만 본 것이 아니라 미래의 구원자 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경배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오늘의 모습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의 모습에서 미래에 이루어질 징조를 내다볼 줄 아는 통찰력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에게는 먼저 특별한 계시가 있었습니다. 동방박사들에게는 빛나는 별이 있었고, 목자들에게는 천사들이 나타났고, 시므온이나 안나 에게는 성령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특별하지 않았으면 그 계시를 알아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므로 태어난 메시아를 경배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빛나는 별은 이 세명의 박사들만 보았을까요? 그건 아닐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은 누구나 볼 수 있게 반짝이고 있지만 그 별의 의미를 알고 그리스도를 찾아 먼 나라에서 찾아온 사람은 세 명의 박사들 뿐이었습니다.
천사들의 노래도 밤하늘에 널리 울려 퍼졌을 것이지만, 그 노래를 알아들은 사람은 아주 소수의 목자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누구에게나 역사하시는 분이지만, 경건하게 일생을 바쳐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므온과 안나에게만 성령이 감동하셨던 것입니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이나 영적인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밤하늘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별빛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도시에 사는 현대인들은 밤하늘의 별보기를 잊은 지 이미 오래 입니다. 도시의 어린이들은 여름밤 멍석 위에 누워서, 별 하나 나 하나의 꿈을 헤아리는 낭만을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이 주는 낭만과 꿈을 잊어버린 채, 별자리들이 이동하며 보여주는 우주의 속삭임을 듣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어떻게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육신적인 삶에만 얽매어 영적인 삶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어떻게 영적인 통찰력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땅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땅의 재미에 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신앙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베들레헴 들판의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밤에 양떼를 지키고 있는 목자들이란, 자기 집이 없이 떠돌며 양을 돌보는 직업 목자들인데, 이들은 매우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평생을 양을 따라서 광야로 유랑하면서 나그네로 사는 사람들인데, 이 세상은 어차피 나그네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광야의 메마름이 도시의 각박함보다는 오히려 견디기 쉬웠고, 아무데서나 천막을 치고 머물 수 있는 자유가 도시의 온갖 속박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광야에는 도시의 아귀다툼식 경쟁이나 중상모략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저들의 삶은 도리어 여유가 있고 순박했으며, 도시의 때가 묻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광야가 영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애급에서 나와 광야에서 40년을 지낸 사람들이고, 특히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율법을 받고 계약을 맺은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광야는 이스라엘의 신앙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자들은 이런 광야의 영성에 이끌려 그곳을 떠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복잡한 도시에서 남들과 경쟁하며 하늘도 볼 겨를 없이 살아가는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밤마다 하늘의 별을 세며 옛날 조상들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며 자기 양을 돌보느라고 밤을 새우는 목자들이 천사의 합창을 듣기에 가장 합당한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맑고 태초의 정적이 깃든 광야의 하늘이 천사들의 합창을 듣기에 훨씬 좋은 장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의 밤하늘에 나타난 천사와 그들의 찬양소리를 광야의 영성에 익숙한 목자들이 잘 들을 수가 있었고, 그들은 듣자마자 누구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천사들이 일러주는 소식을 의심 없이 믿고, 곧장 베들레헴으로 찾아가서 아기를 보았고,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는 그분께 경배하며 찬양하고는 다시 광야의 자기 자리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무식하고 가난한 목자들이었지만, 그들의 영적인 감각은 무디지 않아서 이스라엘의 그 어떤 종교 지도자들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의 탄생을 경배하였고, 그분이 베푸실 미래의 구원의 미리 바라보며 찬양했던 것입니다.
시므온은 어땠습니까?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로, 성령이 그 위에 계신"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는 사람이며, 사람들에게 경건을 가르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통찰하며 그분의 역사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아기 예수님을 한 눈에 알아보고 그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을 확인하며 찬양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성탄을 경배했던 사람들은 현재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미래를 바라보던 사람들이며, 당연히 첫 번째 경배자의 자격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들의 신앙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는 신앙, 이 땅에 미련을 두고 거기에 얽매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신앙, 하나님이 이룩해 가시는 구원의 역사를 살피고 연구하며 그것을 따라 살려는 신앙, 썩어 냄새나는 도시 문명에서 벗어나 광야의 영성과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살아있어야 현실의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미래의 빛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의 유익을 추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광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신앙이야말로 영원히 빛날 보배입니다.
지금 당장 내손에 아무것도 없고 내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아니하고 아기로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을 나의 삶과 마음 속 깊이에 영접하고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서 미래의 소망을 더욱 확고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첫 번 크리스마스에 주님을 경배한 사람들은 아기 예수께 경배하고 돌아가면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어떤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이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소중한 경험이었고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어떤 선물보다 귀중한 은혜의 체험이었습니다.
이들이 아기 예수를 만난 경험을 소중히 여긴 것은 영혼의 눈이 밝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영적인 은혜를 소홀히 할 때가 많습니다. 아직도 우리의 영혼의 눈과 귀가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고,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영성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찾아오셨는데도 우리가 보지 못하며, 영접하지도 동행하지도 못하고 진정한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것은 눈이 어둡기 때문이고 사모하며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 번 크리스마스에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고 심히 기뻐한 동방의 박사들과 목자들, 그리고 성전에 거하던 시므온과 안나의 신앙을 배웁시다.
이기심과 욕심으로 예배를 오염시키지 말고, 몸과 마음을 바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되십시다. 우리의 마음을 비우고 겸손히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도시의 물질문명에 오염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지 말고,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도 그 백성들을 먹이고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광야의 영성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성도가 됩시다. 땅만 바라보며 살지 말고 별들이 빛나는 하늘을 보며 약속하신 미래를 기다리는 성도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장차 임할 주님 재림의 기쁜 소식은 순수한 신앙으로 주님을 고대하는 성도에게만 전하여 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주님께 경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힘씁시다. 열심히 기도하며, 경건한 삶을 힘쓰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에도, 재림의 그날에도 가장 기뻐할 수 자격을 가진 성도들이 되십시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들
눅 2:25-33 / 이정익 목사
오늘 본문은 시므온이라는 어느 노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사회에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의 김씨처럼 많은 이름입니다. 어느 주석자는 여기 나오는 이 시므온이 AD 13년에 산헤드린의회 의장을 지낸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시므온은 평생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700년 전에 장차 세상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때는 예언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0년 후 말라기가 예언자로 활동을 마치고 주님이 태어나실 때까지 400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400년간을 영적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여기 시므온은 그런 400년 동안 영적 암흑시대를 살면서도 메시야의 오심을 확신하면서 기다렸던 그 시대의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시므온이 확실하게 메시야를 기다렸던 이유가 2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메시야를 만나보고 죽으리라”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렸겠습니까. 그러다 마침내 태어나신 예수께서 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왔을 때 만나게 됩니다. 결례는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40일 만에 여자 아이는 80일 만에 제사장에게 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모가 해산하면 몸이 부정해지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산모와 아이가 깨끗해졌다는 확정을 받는 예식이 정결예식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예수가 태어난 지 40일 만에 시므온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 시므온이 아기를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또 36절을 보면 아셀 지파의 비누엘의 딸 안나라는 여인도 그런 경우입니다. 이 안나는 시므온과 달리 지파명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아셀지파는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 이름입니다. 비누엘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이라는 지명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로 한나라는 이름과 동일한 이름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조혼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안나도 14세를 전후해서 결혼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14세에 결혼해서 7년 남편과 살았고 남편과 사별하고 84년을 혼자 살았으니까 지금 안나의 나이가 105세쯤 됩니다. 이 여인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주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그 여인은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찬송 부를 때 그 소리를 듣고 뛰어 나가 아기 예수를 보고 사람들에게 이 아기는 이스라엘을 속량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라고 증거 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으면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예수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선포하고 공개하였습니다. 그 후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대망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시므온과 안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다림에도 종류가 있었습니다.
신앙적 기다림
사람들은 메시야가 탄생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처럼 이제나 저제나 기도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그대로 예수께서 오시면 이 세상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며 위로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메시야가 오시면 창을 녹여서 쟁기를 만들고 어린 아이가 맹수들과 함께 놀며 뱀의 구멍에 손을 넣는 그런 회복의 세상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평화를 기대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진정한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갈등과 고뇌와 불화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만 하면 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기다림이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이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약속이 있다는 말이고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장3절을 보면 “이 계시의 말씀을 듣고 믿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이나 뉴스도 믿지 않으면 헛것입니다. 소돔성이 심판받기 바로 직전, 유황불이 쏟아지기 직전에 롯이 사위들에게 빨리 피하라 곧 재앙이 쏟아진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사위들이 농담인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노아시대에 홍수 심판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을 때 노아가 그냥 있었겠습니까. 노아는 황급히 돌아다니며 준비하라, 이리로 들어오라 이제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을 것입니다. 비웃으면 헛수고 입니다. 그래서 이 믿는다는 일이 복된 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불행입니다. 믿음을 갖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아서 불행입니다. 여기 시므온이 예수를 만나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을 철하게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입니다.
정치적 기다림
개중에는 신앙적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또 대다수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예수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는 상대하기가 너무 컸습니다. 로마가 몇 년 안에 무너지거나 망할 것이라는 징후는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낙심이 더 컸습니다. 우리민족이 일제 때 일본이 너무 강하고 커서 낙심이 더 컸습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때 유대인들에게 희망의 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장차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현재 상황이 더 열악하니까 유대인들은 그 메시야의 오심을 더 기다리고 대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 메시야가 오기만 하면 잃어버린 다윗시대의 영화를 회복하고 화려함이 그대로 재현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빈들에 5천명이나 모였습니다. 어린아이 노년 여인들까지 포함하면 2,3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해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수십만 인파가 모였습니다. 왜 모였는가 하면 근래 기적을 행하는 젊은이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예수라는 젊은이가 나타나서 5병2어를 행하고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고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하고 돌아다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큰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해서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은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힘과 능력을 가지고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장차 오시겠다는 메시야는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때 모두 그런 기대를 하였습니다. 일본이 망하라고 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빨리 재림하셔서 일본의 천황부터 심판하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성결교단은 재림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에 성결교회가 제일 먼저 교회 문을 폐쇄당하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로마 압제로부터 해방되기를 기원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때 기다린 메시야는 힘을 가진 초능력을 발휘하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무찌르고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고대하였습니다. 목표를 갖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의 초점이 잘못되거나 왜곡되었다면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장차 오실 것이라고 예언된 예수는 구원자 예수입니다. 평화의 예수, 구속의 예수, 하나님의 속량의 역사를 펼치러 오시는 예수입니다. 무력과 해방과 로마를 무찌르는 메시야와는 상관도 없는 예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로마를 무찔러 이기는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대가 어긋날 때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던 것입니다. 곡해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를 곡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내 삶을 이익 지향적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내게 유리한 대로 이루게 하고 복을 주시는 예수로 해석합니다. 내 삶에 형통을 주고 고침을 주고 성공하게 하는 예수를 기대합니다. 유대인들이 정치적 메시야로 해석하는 것과 똑같은 해석입니다. 모두 정치적인 예수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삶에 형통을 주시려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오셔서 로마로부터 압제에서 정치적으로 해방하는 일들은 생각도 없으십니다. 사람들이 왕을 삼으려고 했을 때 도피하고 다녔습니다. 왕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로마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고 능력을 발휘했으면 국민적 영웅이 되고 세상에 유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내 두 아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가룟 유다가 가장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고 개의치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실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실망한 나머지 예수를 배반한 것이고 유대인들도 모두 실망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강도를 풀어주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 기대를 하고 복을 달라 하고 건강을 달라 하고 입시에 아이들이 붙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때 모두 유대인들이 실망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망하게 됩니다. 그 결과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듯이 모두 실망하고 어떤 사람은 시험에 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믿어도 별수 없다 하고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모두 정치적 예수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곡해한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은 목표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될 대로 되라 하고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 이 포기에서 오는 결과는 무서운 짓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거지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살아야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먹고 살만한데 살아야 할 이유도 목적도 없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무의미나 허무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다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로마치하에서도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곡해이기는 했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때 주님이 재림하기를 고대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참고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기다리며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표가 없고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표가 없으니까 때로 쉽게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없고 목표가 없기 때문에 친일파가 되어 미래를 현실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민족을 이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민족을 팔아먹기도 하였습니다. 목표가 없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나치시대에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다가 잡혀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불이 났습니다. 빛이 났습니다. 사명감에 불탔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장사하며 삶을 살아가다가 붙잡혀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항의했습니다. “나는 아무 짓도 안했다, 억울하다, 나는 나치에 대항하지도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때 레지스탕스가 눈을 부릅뜨고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은 왜 아무 짓도 안했는가, 지금 민족이 다 죽어가고 피 흘리고 신음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목표가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긴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이익 챙기는 일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지난해 보훈처에서 청소년들의 의식을 조사했는데 오늘 젊은이들이 아주 대견했습니다. 한국 일본 미국 중국에서 각각 젊은이 600명씩 모두 2,400명에게 물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참전하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중국 74.8 % 미국 49.7% 일본 29.3% 한국 56.3%가 나왔습니다. 또 우방과 관계발전의 의지를 물었습니다. 중국 78.9 % 미국 70.3% 일본 67.1 % 한국 80.1%가 나왔습니다. 또 다문화인들의 사회 기여도를 물었더니 한국이 단연 최고 수치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아주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국민은 때로는 불평도 많고 요구도 많습니다. 때로는 이기적일 만큼 자기를 챙기는 면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습니다. 데모하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치열하게 열심히 합니까. 그것을 나쁘게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만큼 우리민족이 열정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뭔가를 해 내는 것입니다. 교육열을 보십시오. 입시 때가 되면 산속 절간 추운 곳에서 하루 수백 번씩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정성을 다해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금식기도를 왜 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이 금식하는 일입니다. 일주일만 금식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를 실감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금식을 하는가 하면 당면한 일을 해결하기 위한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금식기도가 순수하게 영적 삶을 위해서 한다면 더욱 뜻이 깊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금식기도 한다면 더더욱 소중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진리가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주님이 더욱 기뻐하실 기도입니다. 내가 좀 더 깊은 영적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내가 좀 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금식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가 얼마나 순수하겠습니까.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외면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퓨 리서치가 오늘 미국인의 성인 1,546명을 대상으로 신앙의식을 조사한 통계를 보면 오늘 미국도 희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10명중 4명이 2050년 안으로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응답했습니다. 미국인 41%는 향후 40년 안에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미국인 중 58%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하였고 32% 나는 가톨릭교인 이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인 전체에서 기독교인이 90%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세상에 아들 예수를 보내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약속을 믿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고 안나는 금식하며 기다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매일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다렸고 목자들은 양을 치면서 주의 오심을 고대하였습니다.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던 날 동방박사들에게, 목자들에게, 시므온에게, 안나에게 사전에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다음 주님의 재림의 날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기다림 자체가 없이 어느 날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목적이 없으니까 방종하고 무질서하게 살고 까마득히 잊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어느 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시므온이 주님을 맞이하듯이 안나가 주님을 맞이하듯이 그렇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기까지
눅 2:25 / 김광일 목사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 van Rijn)는 ‘시므온의 노래’ (Simeon in the Temple)라는 작품을 1669년, 그가 죽던 해에 그렸습니다. 그림은 시므온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렘브란트 특유의 검은 색을 배경으로 시므온은 눈이 먼 듯 거의 감겨진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배어있고 대머리에 흰 수염을 날리며 고뇌와 우수가 담긴 듯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마치 노년의 렘브란트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렘브란트는 청년시절에 부유하게 지냈지만 노년에는 파산 선고를 당하여 아무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할 정도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두 아내와 자녀 여섯이 있었지만 모두 자기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본 비운의 화가였습니다. 그런 고뇌가 그의 얼굴 표정에 담겨 있습니다.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에도 ‘성전에 나타나심’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 이란 제목으로 시므온을 그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때는 시므온이 클로즈업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 중에 하나이거나 다른 한쪽을 쳐다보고 있는 옆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밝은 색의 톤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기 예수를 힘 있게 안고 있습니다. 그 손은 보통 손보다 더 크고 밝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젊은 시절 렘브란트가 가진 희망과 신앙을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유작이 된 ‘시므온의 노래’는 나이 들어 늙고 처연하고 고통에 찬 모습의 시므온이 그려졌습니다. 아기 예수보다 시므온이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인생의 깊이와 신앙의 신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눈이 멀고 나서야 비로소 영혼의 눈이 뜨인 깨달음을 시므온의 얼굴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 아기 예수는 눈멀고 주름진 시므온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곳에 빛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므온은 아기예수를 두 손으로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 손 또한 어두운 색으로 검은 색 배경과 구분이 가지 않지만 매우 거칠고 뼈마디가 돋아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모습이 교차되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 희망입니다. 육신은 늙고 눈은 보이지 않지만 떠받든 손 안에 아기 예수라는 희망이 들려 있습니다. 이제 그 인생을 평안히 놓아주시기를 간구하는 노인의 모습이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평생을 무명으로 산다 해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쓰임 받는다면 인생은 존귀할 것입니다. 시므온은 성령께서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한 마디 부르심에 그의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품에 안겨 성전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를 모두 몰라보았으나 시므온만큼은 이스라엘의 위로자로, 만민의 구원자로, 이방의 빛으로 증언하며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삶의 목적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부르심을 깨닫고 인생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가치는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처럼 주 그리스도를 보기까지,
첫째로 경건하리라
로마 바티칸 궁전에 ‘피에타(Pieta)’라는 조각상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비탄에 잠겨 있는 모습인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가슴이 저미는 아픔과 성스러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입니다. 이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탁을 받고 3년간에 걸쳐 조각한 것입니다. 피에타와 관련된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교황과 추기경들과 귀족들이 피에타상 제막식에 모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피에타 상에 압도 되고 말았습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 당신은 정말로 위대한 예술가요” 라고 치하했습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대답합니다. “교황 성하, 피에타상은 제가 조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신이 이미 대리석 덩어리 안에 만들어 놓으신 피에타상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곁에 붙은 부스러기를 제거했을 뿐입니다.” 경건이 무엇입니까? 온갖 죄와 탐욕으로 얼룩진 모습을 다듬어 내면의 깊은 곳에 담아 두신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경건하지 못한 마음에는 탄생하신 예수를 모셔 들일 수 없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시므온은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고 경건한 자였습니다. 여기의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는 정직한 모습을 의미합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공의와 사랑을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경건은 하나님께 헌신된 모습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기기에 순종하며 삽니다. 시므온은 사람에게는 의롭고 하나님께는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죄와 불의를 두려워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므온에게 눈으로 메시아를 보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시므온은 오로지 이 약속을 붙들고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민족의 구원이 올 것이라는 소망도 가졌습니다.
비록 현실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절망이 떠나가고 소망이 넘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마침내 약속대로 그는 죽기 전에 예수를 만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마음이 되어 성탄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기다리리라
바실레이아 슈링크 (Basilea Schlink)의 저서 ‘사랑의 승리(The Victorious Love)’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중국에서 공산주의 혁명으로 핍박이 많을 때 장로님이 끌려갔습니다. 예수를 부인하고 전도를 중단하면 살려주겠다고 하였지만 듣지 않자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심한 매를 맞았습니다. 어느 날 영문도 모르게 석방이 되었습니다. 교회로 돌아왔더니 교인들이 영접하고 반가워하면서 온몸에 낭자한 피를 닦아주는데 놀랍게도 상처 하나 없고 거짓말처럼 깨끗한 것입니다. 모두 어찌된 일이냐며 놀라워하니까 장로님은 매를 맞을 때마다 스데반을 생각했다고 웃으며 말합니다. “스데반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었다면서요?” 계속 스데반을 사모하다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천사의 얼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석방이 된 것입니다. 신비로워 석방을 해준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그렇게 매를 맞고 감옥에 들어갈 때마다 예수께서 나타나 상처난 자리를 만져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십니다. 주님의 오심을 기다는 것은 사모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의 내용이 증거로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시므온이 경건한 삶을 살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가 받은 약속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시므온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은 삶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시므온은 세상적인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형통함이나 개인적 행복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이스라엘 위에 임하시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로해주실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위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실 날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시므온이 기다린 위로는 바로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죄 중에 버려진 자의 구원과 고난당하는 자들을 위로해 주시기 위한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마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임할 것입니다.
셋째로 충만하리라
존 하이드(John Hyde)가 선교를 위하여 배를 타고 인도로 항해할 때였습니다. 젊어서부터 위대한 선교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그것은 야망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으로 잘 포장되었지만 밑바닥에는 자아 만족과 명예욕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한 통의 편지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친구 목사가 그에게 보낸 편지에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존, 네가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너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야!” 그는 편지를 보고 화가 치밀어 구겨서 바닥에 던졌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까지’ 라는 말은 지금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인도에 가고 있는 나는 당연히 성령 충만한데, 성령 충만 받지 못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말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분노가운데 있던 하이드는 다시 편지를 집어 들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마음은 여전히 괴로웠으나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기도하면서 자신이 품었던 꿈이 이기적인 야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 충만을 구하였습니다. 배가 항구에 도착하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하고 말리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무명의 선교사가 되어도 좋으니 다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달라고 구했습니다. 그의 영적 몸부림은 항해가 끝날 무렵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일을 통해 하이드는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선교사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본문 25절입니다.“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다렸습니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은 메사아가 오면 맞이하리라며 수동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의 기다림은 능동형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실 것을 능동적으로 준비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이 떠나지 않으셨기에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거룩한 소망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고 인내하고 기다립니다. 기쁨으로 자신을 경건하게 지키며 기다립니다.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전에 들어갔을 때 아기 예수가 들어오셨습니다. 그 순간이야말로 시므온의 인생에 있어 축복의 절정이었습니다. 성령이 인도하셨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였기에 메시아 예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았습니다.
지금 가슴에 무엇을 안고 있습니까? 금번 성탄에 미움을 안고 경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를 안고 찬양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죄악을 안고 맞이해서는 더더욱 안 될 것입니다. 부디 예수 그리스도를 안고 경배하는 성탄이 되시기 바랍니다. 경건하고 의로운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령의 충만한 자가 되어 아기 예수를 안고 경배하는 성탄을 맞이하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사람
눅 2:25- 32 / 문기태 목사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탄절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라면 성령강림절은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런데 성탄절에 비해 성령강림절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중에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과 절친하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받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께 인정받기 바랍니다. 동시에 성령의 사람으로 성령님께 사랑받으며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시므온을 만나게 되는데 그의 영혼이 아주 행복한 미소로 가득차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영혼에 미소가 가득하여 자연스럽게 그 행복함이 겉으로 배어나오게 되기를 바랍니다. 시므온의 영혼이 미소가 가득하며 큰 은총을 받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성령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습니다. 성경은 시므온을 소개하며 계속 성령님과의 관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므온은 성령님에 의해서 이끌려 산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시므온처럼 성령님에 이끌려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면 아름답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행복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은혜를 풍성히 경험합니다.
1.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임재를 누리며 삽니다.(25)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새번역은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계셨다'입니다. 그것은 성령님이 임재하셨다, 또는 심령에 성령이 충만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이 떠나지 않으시고 시므온의 위에 머무셨을 때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하며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평생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세상을 위해 보내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소망중에 하루하루를 살았습니다. 오랜시간이 흘러도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지만 확신을 가지고 소망중에 인내하며 끈기를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거룩하고 큰 소망이 있었기에 의미있는 하루하루를 살 수 있었습니다.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거룩한 소망으로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며 고난중에도 인내하며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기쁨으로 자신을 경건하게 지키며 기다립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망을 붙잡고 바라보며 기쁨가운데 기다리는 삶을 사십니까?
또한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기에 성령님이 늘 그 위에 임하였습니다. 여러분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 안에는 성령님이 거하고 계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 성령님을 근심케 하지말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죄가 우리의 삶안에 들어오면 성령님이 근심하십니다. 더 이상 우리안에서 충만하실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의 조건은 경건함 즉 영적인 깨끗함입니다. 시므온은 깨끗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그에게 충만하게 임한 것입니다. 성령님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는 거룩한 사람, 심령이 깨끗한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 안에서 충만하게 임재하십니다.
주일학교 행사를 위한 예비연습에서 다섯 살 난 한 여자 어린이가 짧은 시 하나를 외우기 위하여 강단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어린이는 아주 용기있게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이는 교회 안을 온통 둘러보더니 실망하는 표정을 띠었습니다. 그러자 곧 입술은 떨리기 시작했고 흐느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때 그 어린이의 아버지가 한 기둥 뒤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그 기둥 뒤에서 어린 딸을 바라보고 있다가 딸을 팔에 안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지? 나는 네가 그 귀절을 아주 잘 아는 줄로 생각했는데." "그랬어요. 아빠, 그러나 나는 아빠를 볼 수가 없었어요. 아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나를 세워주세요. 그러면 무섭지 않아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이와같은 일은 없는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곳에 서는 때가 많습니다. 죄와 교만이 기둥처럼 서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립니다. 이 죄와 교만에 하나님의 얼굴이 가리워 보이지 않으면 실망과 눈물만이 우리의 삶에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경건한 생활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여러분안에 충만하게 임재하시고 거룩한 소망으로 밝게 빛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성령의 사람은 성령님의 지시를 따라 삽니다.(26)
시므온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았을 뿐 아니라 성령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주께서 보내시는 그리스도를 보기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의 약속을 성령의 지시를 통해서 받을 만큼 시므온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노인이 되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자기의 경험을 앞세워 고집스러워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자기의 고집대로 살지 아니하고 항상 성령의 지시를 받아 그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시므온의 인생 목표는 분명했습니다. 주께서 보내시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를 보기 위하여 오래 살도록 건강을 관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보기 위하여 경건한 생활에 힘썼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감정적 충동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기적인 계산에 이끌려 살아갑니다. 또 많은 사람들은 욕심에 이끌려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령님의 지시를 받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의 충동에 이끌려 우왕좌왕하는 것보다 성령님의 지시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의 지시를 받지 못하는 큰 이유는 성령님의 지시하심을 기대하여 간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님의 지시를 받지 못하는 더 큰 이유는 성령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좋은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 좋은 계획을 갖고 다가오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계획에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자기 계획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때 그때 기분내키는대로 행동합니다.
고든 맥도날드라는 사람이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이라는 책에서 사람들을 두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쫓겨다니는 사람'과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 세계의 질서를 회복하고 예수님이 자신에게 주신 선물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쫓겨다니는 사람이 되지 말고 주님의 부르심을 알고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에게 성령님은 어떤 지시를 하셨습니까? 어떤 은사와 어떤 사명을 주셨습니까? 무엇을 위해 살도록 성령님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까?
저는 목회를 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제자삼는 목회를 하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성령님의 지시하심에 순종하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다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게 여겨졌습니다. 불안함과 두려움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성령님의 지시하심에 순종하며 나아가다보니까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물론 믿음이 작아 머뭇거리며 불순종하여 더 큰 축복을 놓치고 후회한 때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이만큼 복을 받고 귀하게 쓰임받은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 덕분입니다.
여러분, 성령님께 어떤 지시와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사명을 발견하고 전적으로 순종하며 나아가기 바랍니다. 아직도 내게는 성령님이 아무런 지시를 않는다고 여기시는 분이 있습니까? 세상의 분주함을 내려놓고 조용히 기도하며 그분이 말씀하시도록 기다리시기 바라니다. 성령님의 지시하시는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성령님의 지시를 받았으면 흔들리지 말고 그 지시를 굳게 붙들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며 삽니다.(27)
시므온은 그날 성령님의 인도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마침 그 시간에 마리아와 요셉이 율법이 정한 아기의 정결예식을 행하고자 아기 예수를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바로 그때 시므온의 심령이 성령으로 뜨겁게 감동되었습니다. '이 아기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리스도시로구나! 내가 오늘까지 살아 있는 이유는 이 아기 예수를 보기 위함이었구나!' 시므온은 달려가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주님, 이제 주께서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종이 세상에서 평안히 떠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주께서 이것을 모든 백성 앞에 마련하셨으니,이것은 이방 사람들에게는 계시하시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눅 2:29-32)"
시므온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전에 들어갔을 때 마침 아기 예수님도 들어오셨습니다. 이 얼마나 절묘하고 기막힌 타이밍입니까? 그순간이야말로 시므온의 인생에 있어 축복의 클라이막스입니다. 만약 그 순간을 경험하지 못하였다면 시므온의 인생은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부유했어도, 출세했어도 허무하기 짝이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하나님이신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한없이 행복해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그순간에 다 만끽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누가 하나님을 자신의 품에 안아 볼 수 있었습니까? 세상에 자신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며 눈을 감은 사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시므온은 지금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하고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예수님을 만나는 축복된 경험을 맛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감동을 받으며 사십니까? 설교를 듣다가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하심을 경험하십니까? 기도를 하는 중에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하실 때가 있습니까? 어느 순간에 헌신하도록, 용서하도록, 사랑하도록 성령님의 감동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까?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어떤 반응을 하십니까? 성령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하실 때 즉각 순종하십니까? 머뭇거리고 갈등하다가 감동을 소멸하지는 않습니까?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라고 강조합니다.
1955년 가을 미국 오레곤주 유게네라는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어느날 마을회관에서 종교영화를 상영한다는 광고가 났습니다.그 영화는 한국전쟁에서 생긴 고아들의 참상을 소개하며 이들을 돌보는 손길을 찾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영화를 보았던 한 농부 부부의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습니다.하지만 이들은 그 고아들이 불쌍하기는 하나 가난한 농부가 나설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영화의 마음 아픈 장면들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이들 부부는 이 일을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농장의 일부를 팔아 직접 한국에 가서 8명의 고아들을 양자로 데려오는 것이었습니다.이 사실이 마을 신문에 기사로 나가자 여기저기서 이들을 돕겠다는 편지가 왔고 어떤 가정에서는 고아를 양자로 삼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그래서 이 농부는 전적으로 이 일에 매달리게 됐는데 그들이 바로 유명한 홀트 양자회의 주인공인 해리 홀트 부부입니다.
우리도 성령께서 주시는 감동을 소멸치 않고(데살로니가전서 5:19) 순종할 때 이처럼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이 감동하시는 순간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절묘한 타이밍인 것입니다. 사단이 순종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겠지만 결단하고 감동하심에 즉시 순종하십시오.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십시오. 시므온처럼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예수님을 안으십시오.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찬양하십시오.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축복하십시오.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기뻐하십시오. 성령님의 감동에 이끌려 말씀을 전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기쁨으로 충만하여 참만족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시므온처럼 성령의 임재를 느끼며 살고 있습니까? 거룩하고 경건한 생활을 통해 성령충만한 상태를 유지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아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바라보고 약속의 성취를 보며 달려가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감동하심과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며 귀히 쓰임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시므온
눅 2:25-35 / 최정인 목사
도입 Introduction: 우리는 주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죽어서는 안 된다. We should not die before we meet the Lord's Christ.
한 사람은 어머니의 태중에 있는 동안 이 세상에서의 삶을 준비하듯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영원을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무에서 왔다가 무로 사라지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비록 우리 육체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우리 영혼은 하나님께 속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하나님이 계신 우리의 본향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에, 인간이 사는 어느 문화에도 종교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추구를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역사 가운데 발전시킨 종교, 인간이 만든 종교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인간을 우상숭배로 이끌 뿐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에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인간 구원 방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2장에서, 평생 구원을 사모하다 그 늘그막에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시므온 선지자에 대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그는 주의 그리스도를 만나 보기 이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지난 대강절을 지나면서 우리에게는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점점 더 차올랐습니다. 이제 시므온이 주님을 만나는 것을 통하여 우리도 또한 주님을 만난 그 기쁨과 감사를 누리는 이 성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he would not die before he had seen the Lord's Christ” (25-27)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상태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순종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셨습니다. 아직 요셉과 마리아가 정식으로 결혼하기 이전에 그들은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유대 베들레헴으로 인구조사를 위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태중의 예수님을 보호하여 여행했지만, 안타깝게도 작은 성읍 베들레헴에는 요셉과 마리아를 위한 숙소는 없었습니다. 따스한 마음을 가진 한 주민의 사랑 덕분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 사람이 제공하는 마구간에서 여장을 풀게 되었고, 마침 예수님은 그곳에서 태어나셔서 구유 안에 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시되, 낮은 곳, 낮은 곳, 더 낮은 곳으로 오셨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저와 여러분 같은 이의 마음에도 들어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생후 8일에 할례를 받으시고, 천사의 지시대로 “예수”라는 이름을 받으셨습니다. 이 이름은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지며,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음으로 부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에게 임하였음을 깨닫고 누리게 됩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율법이 정한 대로 산후의 정결 기간을 지낸 후, 첫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식을 행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님은 시므온을 만나게 됩니다.
25절에 보니 시므온(“하나님께서 들으심”)이라는 사람이 소개됩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경건하다는 것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가지는 하나님 앞에서의 바람직한 모습을 그려줍니다. 더욱이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consolation)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은 주전 587년 바빌로니아 왕국에게 패망한 후,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수 세기 동안을 나라가 없는 민족의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민족이 이방인의 지배를 받으며 산 것이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든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해방, 하나님의 위로를 사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구원과 해방과 위로를 가져올 이가 바로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을 부음 받으신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그러하듯이 시므온도 하나님의 위로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성령이 늘 함께하셨습니다.
26 It had been revealed to him by the Holy Spirit that he would not die before he had seen the Lord's Christ.
시므온과 함께하셨던 성령께서는 그에게 특별한 한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주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시모온과 함께하셨던 성령께서는 성부께서 보내주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뵌 후에야 죽음을 보리라는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는 시므온을 잠시 생각해 보세요. 그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떠나지 않으며 성전에 첫아들을 드리러 오는 모든 젊은 부모의 모습을 매일처럼 유심히 살폈을 것입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한 해 두 해, 십 년 이십 년... 지칠 법도 하였겠지만, 시므온은 지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죽음을 만나기 이전에 주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아 그리스도를 만날 것이라는 그의 기대는 그의 죽음이 가까워올수록 오히려 더 커져만 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크리스마스는 작년에도 있었고, 올해에도 있고, 내년에도 올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크리스마스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 크리스마스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크리스마스, 즉 그리스도를 예배하는 이 절기에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 계시지 않는다면, 이 크리스마스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음으로 마음에 모셔 들인 분이 진정한 크리스마스를 누릴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시므온이 사모하여 주님을 만났듯이 그렇게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바랍니다. 이미 주님을 만난 주의 자녀들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7 Moved by the Spirit, he went into the temple courts. When the parents brought in the child Jesus to do for him what the custom of the Law required,
이제 하나님께서 시므온에게 약속하신 그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가 왔습니다. 그에게 약속하여 주신 성령께서는 성전을 방문하는 그 무수한 아기 중에서 오늘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 하나님의 성전을 방문하신 그 아기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감동하심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얼마나 감격된 순간이었을까요? 이에 시므온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28절부터 시므온의 반응이 나옵니다.
2.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For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28-33)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28 Simeon took him in his arms and praised God, saying:
시므온은 요셉과 마리아의 허락을 받고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아마 시므온은 아주 나이 많아 늙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눈은 환희로 반짝이고,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이고, 그의 입에는 찬송이 터져 나오고, 그의 음성은 떨리고, 그의 얼굴은 기쁨과 감사로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29 "Sovereign Lord, as you have promised, you now dismiss your servant in peace.
“주재여!” “주재”(Sovereign Lord)는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특별히 강조하는 호칭입니다. 이 호칭을 부름으로써 시므온은 창세전부터 이 시점까지, 그리고 영원 후까지 온 세상을 통치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순간 자신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이 특별한 순간을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찬송합니다.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이 한 문장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들어있습니까? 주의 그리스도를 만나 뵙게 이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주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이 세상에 그의 육신을 내려놓고 이제는 평안 가운데 하나님께서 계신 그곳에 갈 때가 되었다는 고백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도 언젠가는 이 땅에서 우리의 육신을 내려놓고 주님을 만나게 되는 그 순간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저와 여러분은 시므온처럼 이렇게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라고 찬송하며 주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 육신, 이 살과 피를 가지고는 주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이 육신을 벗어나서 주님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이 육체를 돌보며, 이 육체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이 육신을 두고 떠나야 할 때가 반드시 옵니다. 그 때 저와 여러분은 어떤 말씀으로 주님께 드릴까요? 그 때 저와 여러분은 어떤 말을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남길까요? 미리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도 아름다운 것이 되어야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도 또한 더욱 아름다운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0 For my eyes have seen your salvation,
시므온이 이렇게 감사의 찬양을 드린 것은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그의 눈으로 주의 구원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구원 방법이신 예수님의 구원은 무엇보다도 “나”에게 주어지는 복이 되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내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복이 아닌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대박은 주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눈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까? 주의 구원을 받았습니까? 주의 구원을 체험하였습니까? 이러한 복 가운데 누리는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1 which you have prepared in the sight of all people,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만민을 위하여 준비된 것입니다. 그 어느 한 사람이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2 a light for revelation to the Gentiles and for glory to your people Israel."
그래서 예수님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며,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이방과 이스라엘이라고 할 때, 우리는 곧바로 만민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실 때부터 하나님은 오직 이스라엘만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셔서 이방과 이스라엘, 즉 만민을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셨고, 그것이 지금 시므온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입니다. 시므온은 이렇게 자신과 이방과 이스라엘에게 임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탄생을 감사하는 예배를 드리면서 부른 모든 찬양이 근본적으로 시므온의 찬양과 같은 기쁨과 감격의 찬양인 줄로 믿습니다.
33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33 The child's father and mother marveled at what was said about him.
시므온의 이 찬양은 예언과도 같은 성격이 있었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그의 찬양을 듣고 매우 놀라운 감정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기사가 누가의 복음서에 기록된 것이 아닐까요?
3.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And a sword will pierce your own soul too” (34-35)
34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4 Then Simeon blessed them and said to Mary, his mother: "This child is destined to cause the falling and rising of many in Israel, and to be a sign that will be spoken against,
이제부터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과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더 초점을 맞춘 예언과도 같은 성격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 말씀은 아마도 마리아의 평생 동안 마음에 남아서 힘을 주는 격려의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시므온에 마리아에게 준 아기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말씀은 예수님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표적(sign)이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표적입니까?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찬양할 때 흥하고 비방할 때 패하는 기준이 되도록 세움을 입은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갈보리 언덕에서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실 때, 어떤 이는 예수님을 비방했고, 어떤 이는 그분을 옹호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좌우에서 각자 그들의 십자가에 달렸던 두 강도의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하며 죽었지만, 다른 강도는 예수님께 자신을 의지하며 죽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를 의지한 강도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갈보리 산에 서있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흥하고 패하는 하나의 표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이에게 예수님은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에게 예수님은 패망의 방법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나시렵니까?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5 so that the thoughts of many hearts will be revealed. And a sword will pierce your own soul too."
각 사람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는 각 사람이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집행했던 백부장은 오히려 예수님 앞에 회개하였지만, 많은 군중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며 먼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자신을 구하면 자기들도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라는 표적은 하나님 앞에서 각자가 가진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에 대한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하나님의 패망의 방법인 지옥에 가면서 핑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지 못하는 것처럼, 지옥에 가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졌던 불신의 마음을 탓하게 될 것입니다.
시므온은 또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르듯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 그리고 특히 예수께서 체포되어 모든 고난을 받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 발아래 계시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이 육체로 받던 그 모든 고통과 갈증과 수모와 치욕을 그 마음으로 다 체험하시게 될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시므온은 칼이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듯 할 것이라고 예고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사랑하기에 또한 주님의 고통이 마리아에게 전달되듯이, 우리에게도 또한 전달됨을 믿습니다.
결론 Conclusion: 당신의 눈은 주의 구원을 보았는가? Have your eyes seen the Lord's salvation?
이제 2016년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우리를 돌아봅시다. 우리 각자의 눈은 주의 구원을 보았습니까? 주님을 만났습니까? 그리하여 이 크리스마스가 우리의 크리스마스입니까? 시므온이 주님을 만나 기쁨으로 찬양하고 노래했듯이 그렇게 기쁨으로 크리스마스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2017년도 크리스마스를 다시 만날 때까지 주님의 구원 가운데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기다림의 행복
눅 2:25 / 이대성 목사 광성교회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기다림의 행복”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기다림의 행복”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절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예수 성탄 전 4주간을 말합니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대림절을 지키게 된 것은 7세기 경 부터이고, 그 신학적인 의미를 바로 세워서 본격적인 교회력의 한 절기로 삼기 시작한 것은 10세기부터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대림절의 신학적인 의미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성탄을 마음을 다해 정결하게 준비하고, 다른 하나는 영광가운데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림절은 한 마디로 기다림의 절기인 것입니다.
신학의 거장인 몰트만은 "나는 소망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의 삶속에서 희망을 빼면 절망의 늪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꿈과 희망 그리고 기다림은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기다림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기쁘고 행복한 날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기다립니다. 제아무리 현실이 힘들고 어려워도 내일을 향한 꿈과 희망이 있으면 기다릴 수 있습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은 27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만델라 대통령이 감옥에 있을 때에 딸이 아이를 낳아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아버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세요.”
딸의 요청에 만델라는 아이의 이름을 ‘Hope’ 즉 ‘희망’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너는 희망이야. 감옥에 있는 동안 희망이 나를 떠난 적이 없었지. 그리고 앞으로도 희망은 나를 결단코 떠나지 않을 거야.”
만델라가 석방되던 날, TV에 비춰진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안하고 기쁨과 확신에 찬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힌 자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한 맺힌 사람의 모습이 아닌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용서한 자의 넉넉함이었습니다. 마침내 만델라는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평화의 아이콘으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만델라에게서 희망이란 단어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감옥생활 속에서도 그는 희망의 봄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은 그에게 참된 자유와 소망,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은 절망을 뚫고 새로운 소망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급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다리는 것을 못 견딥니다. 특별히 ‘빨리 빨리 병’에 걸린 우리는 기다리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사탕을 입에 넣자마자 치아 건강을 자랑하기라도 하듯 ‘으드득’ 씹어댑니다. 실제로 사탕을 주고 실험해 본 결과, 한국 사람이 가장 먼저 사탕을 깨트려 먹었다고 합니다.
자판기에 커피를 뽑는 것만 봐도 얼마나 기다리지 못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실험을 했는데 10명 가운데 3사람은 동전을 넣자마자 뚜껑을 열고 컵을 붙잡고 있더랍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어떻습니까? 다 나오면 불이 꺼지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대부분은 뚜껑을 열고 허리를 숙여 쳐다보고 있더랍니다.
밥을 할 때도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빨리 밥 먹겠다고 솥뚜껑을 열면 밥이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뜸을 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패스트푸드 문화, 인스턴트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들로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다림은 내일의 희망이요 꿈입니다. 기다림은 우리 인생을 성숙시키고, 풍요롭게 합니다. 기다림은 오늘의 현실을 넘어 내일로 다가가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진정 지혜로운 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일생동안 희망을 품고 한 사람을 기다렸던 사람이 나옵니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입니다.
시므온은 한 평생 동안 장차 이 땅에 메시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전에는 결단코 죽지 않겠노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기쁨과 감사의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시므온은 비록 나이가 들었음에도 가장 멋진 노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마음은 기쁨과 평안으로 충만합니다. 그의 입술에는 찬송이 넘칩니다.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천사의 미소가 있습니다.
어쩌면 시므온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영혼은 행복한 미소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노년이 시므온처럼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시므온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행복이 넘치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다같이 25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기를 원합니다. (시작)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아멘.
첫째로,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의롭고 경건한 자”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시므온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의롭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서는 결단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이것을 ‘칭의(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의롭다고 인쳐 주시는 크고도 놀라운 은혜를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인정받았기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에만 진정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자기 노력으로 의롭게 되려고 몸부림쳐도 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로마서 3:10-18절 말씀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여러분? 이는 진정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가진 자들이 제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쓴다한들, 의로운 자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에야 비로소 의의 길로 인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진정 올바른 삶을 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므온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고 살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시므온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덧입고 날마다 주님 앞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또한 성경은 시므온은 경건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경건은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경건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경건한 자는 예배를 소중히 여깁니다.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경건한 자는 말씀을 귀하게 여깁니다. 말씀을 머리로만 듣지 않고, 내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말씀, 살아있는 레마의 말씀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항상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또한 경건한 자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경건한 자는 남을 배려하고 사랑합니다.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경건한 자는 세속에 물들지 않고, 자기를 지켜 거룩함으로 성화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삶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닮는 삶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본받아 날마다 겸손과 온유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므온처럼 저와 여러분 모두 다 늘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받음으로, 하나님을 진정 미소 짓게 하는 행복한 주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둘째로, 시므온은 위로를 기다리는 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위로를 기다리는 자” 여러분?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말씀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상태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는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모든 식민지 백성들은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겨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경건한 신앙인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땀 흘려 거둔 곡식은 로마에 세금으로 바쳐야 했습니다.
시므온은 하나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장차 오실 메시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된 위로를 주실 분임을 알았습니다. 이사야 49:13절 말씀입니다.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백성들을 위로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 한 복판에서 그 어떤 어려움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모두다 위로해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떤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위로하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며 감사 찬송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환난 중에도 찬송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 누군가 내 곁에서 진정 위로해 준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위로는 바로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 곁으로 다가가서 그들 곁에 서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방금 읽은 이 모습이 진정 위로자의 모습입니다. 욥기 2:13절 말씀입니다.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제가 거룩한빛 광성교회에서 처음으로 교구를 맡게 되었을 때 가장 큰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상담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자매님으로부터 울면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를 만나서 꼭 상담을 하시겠다는 겁니다.
간곡한 요청에 저는 딱히 거절할 수도 없고 해서 오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제 마음은 두근 반 세근 반....쿵덕 쿵덕 마구 심장이 요동쳤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상담이란 걸 도대체 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제 입술을 주관해 주세요!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을 자매님에게 허락해주세요!” 드디어 자매님이 왔습니다. 그리고 상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만히 곁에 앉아서 들어주는 일이었습니다. 그녀의 애환을 통감하며 듣고 또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달라고 함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마자 자매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닙니까? “전도사님, 상담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l 이제 마음에 참으로 위로가 되네요.”
그런데 여러분?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단지 자매의 이야기를 들어준 것 밖에 없는데 감사하다는 겁니다. 제가 오히려 마음에 위로가 됐습니다. 제가 오히려 기뻤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요!
한 생명을 위로하여 주신 주님께 저는 감사와 찬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할렐루야^0^ 여러분? 친구에게 참된 위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그와 함께하되 말하지 말고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놀라운 일이 생겨날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이 넘쳐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서 1장 19절 말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랑하는 큰빛광성교회 성도 여러분?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시기 바랍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되 성내기도 더디 하시기 바랍니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과 함께 땅에 앉아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인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를 위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위로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참된 위로는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욥을 위로하는 데 실패했을까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엘리바스를 필두로 빌닷과 보발이 연이어서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처음 부드럽게 시작됐던 그 말은 점점 더 강도가 심해지더니 드디어 욥을 정죄하기에 이릅니다.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냉철한 판단을 통해서는 결단코 욥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오직 저와 여러분의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의 위로가 필요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묵묵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성령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사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위로와 평안을 그들 모두에게 허락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40장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은 택함을 받은 주의 자녀들이 어려운 사람에게 다가가서 위로자가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어려운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고독한 사람, 상처 입은 사람에게 위로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위로가 있는 곳에 사막이 오아시스로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참된 위로가 있는 곳에 미움과 질투, 원망과 불평은 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참된 위로가 있는 곳에 용서와 사랑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참된 위로가 있는 가정이 평안과 행복이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참된 위로가 넘치는 교회가 진정 부흥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림절을 보내면서 주변에서 내 위로가 필요한 바로 그 사람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위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축복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사랑의 전화 한 통화, 위로의 격려 메시지, 위로가 담긴 편지가 한 사람의 인생을 절망에서 소망으로, 슬픔에서 기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시므온은 진정 위로가 필요한 시대에 영원한 위로자 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아기 예수님을 가슴에 안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다 예수님처럼 상처 입은 치유자로서 내가 치유 받은 그 따뜻한 위로를 이제는 온 세상에 기쁨으로 전하는 참된 위로자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셋째로, 시므온은 성령 충만한 자입니다.
다같이 따라합시다. “성령 충만한 자” 여러분? 시므온은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살았습니다. 25절에 보면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26절에 보면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지시를 따라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감동하심 가운데 순종하고 있습니다. 27절에 보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시므온은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살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았으며,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순종했던 자입니다.
한마디로 시므온은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 나이가 들면 자기의 경험을 앞세우게 됩니다. 여러분?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세 가지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첫째, 나이가 들면 들수록 염려와 근심이 늘어납니다. 젊음의 패기와 열정이 사라지면 염려와 근심이 많아집니다. 노후에 대한 염려, 건강한 대한 염려, 자식들에 대한 염려 등등... 여러분 안에 염려가 많아지면 내가 늙어가고 있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둘째,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고집이 늘어납니다. 자존심이 강해집니다. 지는 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뭐든지 자기주장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자 합니다. 자꾸만 고집을 부리게 됩니다.
셋째, 나이가 들면 들수록 욕심이 많아집니다. 내 손에 쥐고 있어야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자꾸 내 것으로 만들려는 욕심이 늘어납니다. 여러분 가운데 염려, 고집, 욕심이 늘어나고 있으면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가는 구나 여기시면 됩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의롭고 경건한 자의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위로를 기다리는 겸손함으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그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인도와 다스림 가운데 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하나님의 비전을 붙잡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육신의 삶에 매이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바라봅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아멘!
성령이 임하시면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나이든 자들은 꿈을 꾼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 하면 나이에 상관없이 꿈을 꾸고 삽니다. 시므온의 꿈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내가 죽지 아니하리라.’는 놀라운 꿈입니다.
그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 오직 하나의 희망, 오직 한 가지의 기다림으로 자신의 모든 삶을 채웠습니다. 그것은 바로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보는 것입니다. 평생을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살아왔을 때, 마침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으로 들어오는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순간이 그에게는 인생 최고의 클라이막스 입니다. 한 평생을 기다렸던 희망이 이뤄지는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자신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는 감격에 겨워 이렇게 고백합니다. 29절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여러분?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꿈을 이뤘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 시므온은 드디어 메시야를 품에 안는 놀라운 감격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려드리고 있습니다. 30-32절 말씀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아멘.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보면서 눈을 감은 사람이 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시므온은 지금 성령의 인도하심과 다스림 가운데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복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인도하심과 다스림에 온전히 순종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은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반드시 성취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시므온처럼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아기 예수를 안으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하나님께 찬양돌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아기 예수를 맘껏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기쁘다 구주 오셨네. 만백성 맞으라!” 온 세상에 담대히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이미 지나간 과거의 추억을 붙잡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새로운 꿈과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 바로 그 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그 분의 다시 오심을 진심으로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시야 오심을 참고 인내하며 기다렸던 시므온처럼,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면서 진정 기다림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다림과 인생
눅 2:25~27 / 조학환 목사
1. 기다림이 인생을 결정합니다.
19세기 중반 미국에 나다니엘 호손이라는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청교도 가정에서 태어나 대표작인 주홍글씨를 비롯한 많은 교훈적 소설을 남겼는데 그중에 ‘큰 바위 얼굴’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 어니스트의 고향마을 앞산에는 인자한 사람얼굴 모양의 큰 바위가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이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사람이 나타나 이 땅에 큰 소망과 위로를 줄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기다리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어니스트는 한편으로는 그런 분을 꼭 만나보겠다는 기대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도 큰 바위 얼굴을 닮아 많은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과 위로를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진실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갑니다.
세월이 흘러 그가 장성하였을 때 그 마을에는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는 많은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돈을 많이 벌어 거부가 된 사람, 위대한 장군이 된 사람, 유명한 정치가나 학자가 된 사람 등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다고 하는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큰 바위 얼굴처럼 환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어니스트는 그들이 큰 바위 얼굴이 아님을 알고 실망합니다.
그러는 동안 어니스트는 전도사가 되어 어느 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 설교를 들은 한 시인이 이 분이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외치게 됩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도 어니스트가 큰 바위 얼굴임을 인정하며 그의 삶과 말씀을 통해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러나 정작 어니스트는 자신은 큰 바위 얼굴이 아니라며 계속해서 큰 바위 얼굴처럼 살기를 힘쓰며 그를 기다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기다림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됩니다. 어니스트는 인자한 얼굴의 성인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렸기에 그를 기쁨으로 만나기 위하여 또는 그 자신이 큰바위 얼굴과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하여 큰 바위 얼굴 닮기 위하여 힘썼던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큰 바위 얼굴을 기다리며 그 모습을 닮기를 힘썼을 때 마침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죽자사자 돈만 바라는 사람은 죽자사자 돈을 따라가게 되고 그러면 그 사람에게서는 돈 냄새가 날 것입니다. 그저 세상 즐거움만 바라보는 사람에게서는 결국 향락에 찌든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늘 일만 생각하는 사람은 일에 파묻혀 살게 되고 결국 그 얼굴이 일에 찌든 모습이 나타날 것입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은 주님 뜻대로 살아가기를 힘씀으로 주님의 모습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설렘으로 기다립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기쁨으로 만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깨끗하고 예쁘게 단장을 합니다. 그래서 겉모양뿐 아니라 말도 예쁘게 하게 되고, 행동도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몸도 마음도 예뻐지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과 설렘을 가져다줍니다. 동시에 기다림은 그 기다림의 대상과의 기쁨의 재회를 위하여 우리를 돌아보게 만들고 가다듬게 만들고 아름답고 거룩한 모습이 되기를 힘쓰게 만듭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희망과 소망과 아름다운 삶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 8:34,35절에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 대저 나를 얻는 자는 생명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얻을 것임이니라.” 주의 은혜를 간절히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를 사모하고 기다리며 가까이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을 받기 위하여 더욱 힘쓰게 되고 그럴 때 결국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은총을 풍성하게 받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우리에게 정말 생명의 은총과 기쁨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에 대한 기다림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의 유일하고 완전한 스승이시며 구세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영광과 은총을 가져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전한 생명이시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와 소망과 기다림속에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주실 참된 평안과 위로와 영원한 천국에 대한 기다림속에 살아갈 때에 점점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가며 더욱 은혜와 기쁨과 소망이 넘치는 복된 인생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기다림의 대상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암만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을 써도 엉뚱한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고 힘쓰면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아니 그냥 아무 소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공연히 시간과 돈과 정열을 헛된 곳에 사용하게 되고 정작 반드시 해야 할은 하지 못하게 됨으로 큰 낭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생명과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줄 수 있는 것을 기다리며 그런 분을 만나고 그 안에 있는 은혜를 누리기 위하여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참 생명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바로 그렇게 우리가 유일하게 기다리고 사모해야 할 분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살던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시므온이라는 할아버지였는데 당시 이스라엘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압제 하에 있었고, 경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형식주의와 외식주의가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류의 위로자시며, 구원자이신 메시아가 속히 오셔서 그 나라와 백성을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그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타난 시므온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과 위로와 자유를 가져다 줄 참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만나 참 생명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25,26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무엇을 기다렸다고요? 이스라엘의 위로입니다. 그러면 그 위로라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정치적으로 로마에서 해방되는 것이었습니까? 헐벗고 굶주림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습니까? 더 웅장한 예배당에서 멋진 프로그램과 그럴듯한 예배의식 속에서 폼나게 종교생활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어떤 것을 통한 위로가 아니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2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그는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신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고 그러자 성령께서 죽기 전에 꼭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 말씀대로 그는 죽기 전에 예수님을 만나 큰 위로와 기쁨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위로와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자유와 평화와 안식과 위로와 소망과 기쁨을 줄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물론 돈도 어느 정도 위로가 됩니다. 정치가 안정되면 어느 정도 평안을 줍니다. 경제가 활성화되면 어느 정도 사람들의 삶속에 활기가 넘치게 됩니다. 압제를 당하던 사람들이 압제에서 풀려나면 그것도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의 완전한 위로와 소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죄와 무지 속에 있는 인생은 결코 참된 평안과 기쁨과 위로와 소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 돈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평안이 된다면 왜 대기업 총수들이 무슨 비자금이다 사기성 어음이다 하면서 툭하면 검찰에 불려 다니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겠습니까? 권력과 명예와 지식이 위로와 기쁨과 평안을 줄 수 있다면 왜 많은 정치인이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무슨 뇌물이다 향응 제공이다 하면서 불려 다니고 망신을 당하고 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위로와 기쁨과 평안과 소망과 안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그 안에 참 생명과 기쁨과 행복과 자유가 있습니다. 요8:32을 보십시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무엇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까? 진리 곧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죄와 유혹과 욕망과 어둠과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과 사망과 사탄의 권세로부터, 세상의 모든 돈과 권력과 명예와 영광으로부터 우리를 완전히 자유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14:27절에는 또 말씀합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나의 평안을 주겠다. 세상이 주는 것은 상황과 환경에 따라 변하고 결국은 사망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지만 내가 주는 평안은 상황과 환경을 초월하고 심지어는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세상의 소망이나 기다림은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확실히 현실화된다는 보장도 없고, 설령 현실화된다해도 그런 것들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이요, 한시적인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안개처럼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끝까지 지켜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기대와 소망과 기다림은 너무나 확실하게 우리 현실 속으로 다가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에게 대한 완전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모든 시대 모든 공간 모든 사람에게 효력이 있습니다. 영원하고 완전한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대한 소망과 기대는 우리의 모든 것을 완전히 충족시켜 주는 완전한 소망이요, 완전한 기다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 필요한 정신적 물질적 육체적 풍성한 은혜에 대한 소망이나 기다림도 물론 가져야 하겠지만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온전한 위로와 자유와 평강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에게 진정으로 완전한 소망과 기쁨과 자유와 평강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님이 주실 그 놀라운 은혜에 대한 기다림속에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리는 자에게 한량없이 베풀어주시는 주시는 풍성한 생명의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기쁨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기다리는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기다림이 있어야 하는데 우선은 기다림의 대상이 올바르게 해야 하고 그 다음에는 기다리는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헛된 것을 기다리면 소용이 없고, 또한 아무리 옳은 것을 기다려도 기다리는 자세를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기다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승진을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하는 사람이 성실하게 일하며 열심히 자기를 계발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기다림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사람이 열심히 씨앗을 뿌리고 가꾸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기대가 이루어지겠습니까? 좋은 성적표를 원하는 학생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좋은 성적표를 받아 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꿈은 이루어진다고 하지만 사실 꿈이라고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허황된 꿈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올바르고 건전한 꿈이라해도 열심히 꿈만 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힘쓰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25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이라는 분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주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즉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올바른 기대 즉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고 그것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고 주님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기 때문에 더욱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기 때문에 성령이 함께 하셨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기전에는 죽지 않을 거라는 약속을 받게 되었고, 결국 그 약속대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래서 감사와 기쁨으로 영광을 돌리고 할렐루야 찬양하며 영광의 나라를 향하여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만이 진정한 생명과 평안과 기쁨과 은혜와 자유와 위로와 소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러한 주님 안에 있는 위로와 소망과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그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의롭고 경건한 모습으로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 그 풍성한 은혜를 누리다가 마침내 영광의 나라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롭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말그대로 옳은 것입니다. 그러면 옳은 게 뭡니까? 무엇이 정말 옳은 것입니까?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이 옳습니까? 정치인들이 말하는 게 옳습니까? 경제적 논리에 부합되는 것이 옳은 것입니까? 다수가 가는 길이 옳습니까? 물론 그 중에는 옳은 것도 많은 있습니다. 그러나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설령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절대 의가 아니라 상대적인 의에 불과합니다. 한시적이고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절대적인 의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바르고 확실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오직 거기에 영원한 생명과 자유와 평강과 은총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의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의로운 삶인 것입니다.
그러면 경건은 뭡니까?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이 말씀도 의롭다는 말씀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옳고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은혜와 평안과 자유가 있음을 믿고 그래서 하나님께 경외심을 가지고 말씀을 따라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말씀에 비추어 정말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 이것이 하나님의 생각인지 아닌지, 이것이 그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길인지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길인지를 따져보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따라 행동하는 것이 경건한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의롭고 경건한 삶입니다. 오직 그 안에 생명과 기쁨과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십니다. 진리이고 생명이십니다. 완전한 거룩과 의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완전한 의이고 생명인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따르는 것만이 영원한 생명과 기쁨과 은총을 보장받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의요 경건이요 진리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죽으나사나 주만 따라 살아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주님안에 진정한 소망 생명 기쁨 은혜 자유 평안 행복 은혜가 있음을 기억하며 주님께 대한 소망과 기대속에서 그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기다리며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특별히 대강절 첫째주일입니다. 대강절은 성탄절을 맞으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절기입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 심령을 성결하게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강절을 맞이하여 더욱 우리의 유일한 참 생명이요 기쁨이요 은혜와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이 주실 평안과 위로와 영광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주님과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기쁨으로 만나기 위하여 의롭고 경건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진정 주님께서 기쁜 마음으로 우리 속에 찾아오실 때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기쁨과 희망과 위로와 소망과 평안을 마음껏 맛보며 더 나아가 세상에 주님 안에 있는 그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위로와 평안을 보여줌으로 세상에도 생명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눅 2:25-27 / 서정호 목사
누군가가 인생을‘기다림의 삶’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인생의 여러 기다림 중에서도 참 기쁨과 행복,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기대는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입니다.
기다릴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기다리며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끝이 안 보이는 기다림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절망을 지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기다림에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림을 통하여 질그릇을 금 그릇 되게 하십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잘 기다리게 하는 힘이며 뿌리 깊은 영성이란 기다림의 영성입니다. 이러므로 인생의 실패는 기다림의 실패이며, 신앙실패의 원인 중에 하나는 조급함에 있습니다. 사단은 언제나 '당장 이루라' 재촉하며 충동하지만 성령은 하나님의 때를 잠잠히 기다리라 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므온이 기다렸던 분은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까지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하심을 받고 결국 탄생하신 메시야 아기 예수를 만나 뵙게 됩니다.
이 시므온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일생동안 의롭고 경건하게 지내며 그리스도를 기다렸을까요? 그것은 시므온이 살던 세상이 어두움의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세상은 개인적인 윤리, 사회적인 윤리가 다 파괴되어지고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종과 여자들의 인권은 여지없이 무시되었고, 기형아와 비록 멀쩡한 아이라도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기는 죽이는 것이 용납이 되었습니다. 이교도의 우상숭배가 만연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건하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유대인들도 무거운 형식적 율법주의에 속박되어 있었고, 예언자들의 소리는 그친지 오래되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로마에 식민지 된 상태에서 유대 백성은 로마의 압박과 수탈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또 로마에 빌붙어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 왕가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했으며 백성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온갖 사치와 향락 속에서 지냈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세상 속에서 시므온은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이 어두운 세상이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두운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되실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다림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탄생한 그리스도를 만나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에 어둠을 밝히실 빛으로, 온 인류의 위대한 희망으로 오십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밝게 비추이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어떠합니까? 시므온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물질문명이 발달했지만 죄로 인한 세상의 어두움은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멀리 여행하고, 더 신속하게 의사를 전달하고, 더 높이 건물을 지으며, 더 많은 문화의 혜택과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어두움은 초나 전기가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어두움은 정신적, 영적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삶의 여러 분야에 짙은 어두움이 전혀 걷히지 않고 있습니다.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 성으로 인한 차별, 출신지로 인한 차별이 여전하며, 무자비한 폭력과 지능적인 범죄가 계속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이 시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서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치 이천년 전에 시므온이 시대의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린 것같이 우리도 예수를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떠나간 임이 올지 안 올지 몰라서 불안과 탄식으로 범벅이 된 절망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시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오시는 분에 대한, 오셔서 어두움을 비추시는 빛이 되시며, 어두움을 깨치시고, 새벽을 여시는 분에 대한 기대와 감격에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기다림도 암울한 현실 앞에 불안해하고 있는 인류에 참 소망을 주실 것에 대한 간절한 기대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의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우리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어두움에서 구하실 유일한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이 시대가 간절히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간절한 기다림을 볼 수 없습니다.
대강절 기간에 그리스도의 오심 즉 성탄을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탄생은 보통 사람들의 출생과 구별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자연적이고 단순한 출생의 사건만이 아니라 특별한 "오심", "강림"의 사건, 즉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그분은 저절로 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오신 목적을 알려주는 칭호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주시고 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즉 기름부음을 받은 분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바로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전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며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는 평화가 됩니다. 그 분은 오셔서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분은 오셔서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분은 죄의 어둠, 실패의 어둠, 좌절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빛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욱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분은 혼돈과 무질서의 세상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가 오신 것은 세상 모든 백성에게 미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 바로 이러한 분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과 벅찬 감격 속에서 성탄을 맞았습니까? 진정한 성탄 준비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없으면 화려한 성탄 장식이나 행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간절한 기다림 속에서 이 대강절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시므온처럼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감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탄절을 보내면서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벅찬 감격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간절히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오신 사건이 정말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시므온은 평생 동안 간절하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감격에 벅차 하나님께 찬송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 시므온처럼 우리 개인의 소망이시며, 인류의 희망이시고 구원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기도하며 대강절의 남은 기간을 보냄으로써 벅찬 감격 속에 성탄절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최고봉은 기다림
신앙의 최고봉은 기다림이며 연단 중에 마지막 연단도 기다림입니다. 인생의 성패도 기다림에 따라 좌우됩니다. 인생은 출발부터 기다림으로 출발합니다. 산모가 새 생명을 잉태하여 열 달을 기다림으로 채워야 출산의 기쁨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만일에 새 생명이 열 달의 기다림을 다 채우지 못하게 되면 조산하게 되고, 조산하게 되면 미숙아로 분류되어 인큐베이터 안에서 남은 기다림을 채워야 합니다. 이처럼 기다림이 없는 곳에는 생명도, 축복도, 응답도, 성취도 기쁨도 없습니다. 찬란한 새벽도 길고 긴 밤중을 기다려야 찾아오고, 새파란 봄도 매서운 겨울을 기다려야 우리 곁에 찾아옵니다. 뿐만 아니라 풍성한 가을의 수확도 지루한 장마와 태풍을 기다려야 살포시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이러고 보면 세상살이가 기다림의 연속인 듯합니다. 이러므로 기다림을 아는 자가 인생을 알고 하나님을 닮은 자입니다. 세상에는 하루아침에 성취되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건축 시에도 기다리지 못하여 시공을 급하게 서두르게 되면 그 건물은 부실공사 되어 나중에는 붕괴위기를 만나게 되는 것처럼 인생과 신앙의 건축도 마찬가지 입니다. 충분히 그리고 마땅한 기다림을 견뎌내지 못하면 설익은 밥과 같고 떫은 감과 같게 됩니다.
결혼이 급하십니까? 성공이 급하십니까? 다이어트가 급하십니까? 신앙의 성장이 급하십니까? 기도 응답이 급하십니까? 교회 부흥이 급하십니까? 내 집 장만이 급하십니까? 그래도, 돌아가야 합니다. 결코 서두르지 말고 기다리고, 견디고, 꾹~ 참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기다림 없이 거저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밥을 지을 때도 30분을 기다리지 못하고 1분에 한 번씩 솥뚜껑을 열어 본다면 그 밥은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입니다. 과속이 당장은 빠른 듯 보이나 결국은 사고로 이어지게 되고, 과식이 금방 포만감을 느끼나 곧, 배탈을 가져오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속도에 예민해 있고, 빠른 속도에 익숙하여 삽니다. 이제는 고속이 아니라 초고속이며, 정보가 아니라 첩보시대입니다.
21세기는 '속도전쟁의 승리자가 진정한 강자'라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속도전쟁에 덩달아 춤을 춥니다. 그래서 기다림과 더딤에 어색해 하며 못 견뎌 합니다. 빨리, 하루아침에 성자가 되기를 바라며 빨리 기도응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빠른 교회부흥을 원하며, 빨리 내 뜻대로 주변사람들과 상황들이 변하기를 조급해 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의 불평과 마르지 않는 목마름은, 속도에 대한 하나님과의 충돌현상입니다. 우리는 급한데, 하나님은 느긋하시다 못해 꿈쩍도 안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당장 눈에 보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10년, 20년. 숨어 계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아픔과 맥 빠짐과 무너짐의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기다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부족과 미숙을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의 덜됨과 철없음을 기다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우리를 향하신 기다림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10년, 20년을 끈질긴 사랑으로 기다려 주셨고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지체들을 향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응답과 역사하심에 대하여 한 달을 길다 합니다. 1년 앞에 쉽게 포기하고 절망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하여 기다림의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부부, 자녀, 친구, 동료, 교우, 이웃에 대하여 기다림에 너무 인색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로 인하여 늘 마음이 눌려 있고 상해 있습니다. '왜? 저 모양인가...' '왜? 저렇게도 안 변할까...' '왜? 아직도 그 수준밖에 안되나....' 이런 넉두리와 한숨 속에는 내 자신에 대한 교만과 다른 지체들에 대한 조급함과 경시함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의 마음도 이러하실 터인데...'왜 그렇게 믿음이 없냐?' '왜 그렇게 성화되지 못하냐?' '왜 그렇게 아직도 그대로냐?'고. 한 번도 내색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도 극심한 조급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당장 마실 물을 달라 하고 고기와 먹을 것을 달라합니다. 안주면 돌아간다 합니다. 이것이 우리 내면의 일그러진 실존형상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당장 응답하시라 보챕니다. 하나님의 때를 앞당기라 떼를 씁니다. 왜 이렇게도 더디냐고 따집니다. 그런데 조급함의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며, 우리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25년을 기다리고, 야곱이 21년을 기다리고, 모세가 80년을 기다리고, 요셉이 13년을 기다렸듯이, 가족에 대하여 남편에 대하여 아내에 대하여, 자녀들에 대하여, 포기하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기다리되 투덜거리지 말고 잠잠히 기다려 주십시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습니다. 만일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기다려주지 않으시고 당장 포기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은 몽둥이와 잔소리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기다려 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변화속도 만큼 남도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기다리게 하실까요? 그 이유는 기다림을 통하여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며 궁극적인 목적은 나를 깨뜨리시기 위함입니다. 기다림처럼 우리를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깨뜨릴 방법은 없습니다.
그 기다림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교만은 부서지고, 자아는 죽고, 속사람의 찌꺼기는 걸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 자신을 나보다 더 잘 아시는 것은 나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아시고 치명타를 아십니다. 어떤 부분을 건드리면 빨리 깨어지고 쉽게 항복하는지를 아시기에 하나님은 그 부분을 건드리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기다리심
우리의 기다림과 하나님의 기다리심 중에 어느 쪽이 더 힘들까요.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주님이 계시고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준비케 하시는 놀라운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 속에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배려가 있습니다. 기다림의 끝은 나의 깨어짐으로 앞당겨 질수 있습니다. '기다리라' 하심은 하나님의 필연적인 섭리이며, 나를 나 되게 하시는 기막힌 은혜입니다. 그런데 그냥 막연히 기다리시면 안 됩니다. 기도하며 은혜 받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마침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실수 있습니다.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 도다.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예레미야 애가 3;25-26)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 32 : 6) 주께서 우리 자신과의 교제를 원하시고, 또한 우리가 그분과 함께 있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기다리신다는 사실은 다른 어떤 일보다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명상의 시간을 변화시켜 주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응접실에 주님을 홀로 기다리게 하지 마시고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주님과 함께할 시간을 찾으십시오. 주님과의 교제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준비하며 기다리자
성탄이 우리에게 축복의 날이고 또 그날에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하여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우리가 그날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입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준비하여 맞이할 때 우리 가슴에 가득한 기쁨과 축복을 누리지만 기다림 없이 의미 없이 맞이한다면 성탄으로 베푸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행사는 조용하고 검소하게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기다림으로 들떠야 합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4 주 전부터 대림절을 지킵니다. 대림절이라는 말은 기다리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다가오는 절기라는 말이 아니라 기다려야 다가오는 절기라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기다리는 사람이 맞이하는 절기입니다.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그냥 기다리기만 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맞은 사람은 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준비하여 기다렸습니다. (마태 2장) 안나와 시므온은 사모하며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누가2:25-40). 세상에 가장 불쌍한 사람은 준비 없이 일을 당한 사람입니다. 중요한 일이 있는데 준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준비 없이 맞을 때 성탄이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인 것처럼 주님의 재림 때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도 준비하는 신자가 됩시다. 이번 성탄은 준비하여 맞이합시다. 깨끗하고 넓고 넉넉한 마음을 준비하고 주님을 맞읍시다. 주님은 너무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더러운 마음에는 오실 수 없으시고 주님은 너무 크신 분이기에 좁은 마음에 오실 수 없고 주님은 사랑이시기에 미움이 있는 곳에는 오시지 못합니다. 비록 마굿간처럼 낮은 마음일 지라도 넓고 깨끗하고 넉넉한 마음에 오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공간을 넓히고 단장하고 맞이합시다. 그러면 성탄이 참으로 큰 축복이 절기가 되어 성탄의 축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끝 날까지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
눅 2:25-30 / 김남준 목사
들어가는 말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아기로 탄생하신 이후에 할례를 받고 또 결례를 받은 이 야기를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아이가 태어나면 그 태어난 아이가 7일 동안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결례는 바로 마리아가 부정한 기간이 끝나고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를 드리는 장면입니다.
그때의 그 제사를 지나고 예루살렘에 올라갔는데 시몬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서 부정한 기간을 거치고 정결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제일 먼저 보았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몬이 그 아이의 대하여 예언도 하고 찬송도 하는 이러한 일이 있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어떻게 될 것이며, 그분이 왜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는지에 대한 생생한 예언이 35절까지 이르게 되고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수난을 받을 때에 마리아가 마음의 고통을 받을 것까지의 전부 다 예고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오늘 이 예루살렘에 있던 그 시몬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나게 되었는가에 대한 하는 것과 그리고 그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별한 계시
우선 오늘 성경은 이 시몬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가 임했다고 말합니다. 그 계시는 메시야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계시였습니다. 메시야를 보기를 사모하던 사건은 아담과 하와부터 시작이 된 것입니다.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는 못하지만은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은 즉시 아담에게 언약을 주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것들을 확연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자손을 낳는 것이야말로 뭔가 소망스런 일과 연관되어진다라고 하는 분명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정죄함을 받고, 그리고 낙원에서 쫓겨난 이후의 삶이 그 낙원에서 주님과 함께 살았을 때에 그 삶과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는 이들은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한없이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가까운 교제 속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는 지극한 영락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저주를 받게 되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전에는 모든 자연을 통해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 자연을 향한 두려움과 무서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서, 아담과 하와는 이전에 무죄 상태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았던 그 아름다웠던 시절들을 그리워하게 되었음에 틀림없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인간의 그 참된 구속, 그 회복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믿음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뭔가 분명하진 않지만 어쨌든 우리 후손이 그러한 회복에 소망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회복은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오게 했던 장본인인 그 사단의 세력과 우리 몸에서 나온 후손과의 괄목할 만한 투쟁을 통해서 자손이 승리하게 되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찌하든지 우리가 그 옛날로 돌아가는 그 회복과 관계가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온 이래로 수많은 족장들이 그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나라가 서고 왕이 서고, 선지자와 제사장이 서면서 끊임없이 이런 소망을 가지고 선자자들은 때때로 불같은 목소리로 모든 회복을 위해 오실 여자의 후손인 그리스도 예수 이 한사람을 향하여 주목하며 내다보며 예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구체화시키실 때마다 백성들과 선지자들은 그 주어진 말씀을 보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뛰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우리를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잃어버린 이 비참함으로부터 건져내실 그 구세주가 오시리라 하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바라보고 즐거워 하다가 죽었을 뿐이라고 히브리서는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몬이라고 하는 선지자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하는 복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축복 중에서 이 사람과 같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전에 선지자들이 받았던 모든 계시에 대한 복을 합계를 해도 이 사람이 받았던 축복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께로 들었으나, 이 사람은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들은 바 그리스도를,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을 그 시대에 증거해 주었고 기록 속에 남겼지만, 이 사람은 친히 보았고 그를 축복했습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 시몬
그런데 왜 시몬이었을까요? 우린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것은 그 사람의 성품과 내면세계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삐뚤어지고 왜곡된 그 시대를 바라보면서 그 시대의 참된 희망이 제사장이나 혹은 율법사들이나 유대교에 있지 아니하고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고 붙들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의를 찾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 시대에 불의한 모든 사조와 모든 타락한 종교로부터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이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대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과 경건을 잃어버린 종교 지도자들과는 구별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여기에 한 번 나오고 성경에 영원히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름이 알려진 사람도 아니었고 수많은 추종자가 딸린 사람도 아니었습니다만 그러나 이 사람은 가슴속에서 하나님의 참된 구원을 위해서 오셔야 할 그리스도 예수의 의한 기다림으로 말미암아 심령이 경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또한 이 사람의 삶은 어떠한 삶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이라" 이것은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삶의 방식을 살았느냐 하는 것은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참된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이 가장 불행한 시대에 모든 동포들과 함께 태어났던 사람이었습니다. 나라가 메대와 바사에게 찢기고 헬라에게 빼앗기고 로마에게 또 넘어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신앙도 급격히 하락하고 종교적인 형편은 심히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이 시몬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위로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켜 그리고 로마 나라를 쳐부수는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로마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치적으로 잘 타협해서 독립된 주권이 회복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위로라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의 참된 위로는 그 한 아이의 태어남에 달렸다는 것이 시몬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나름대로 다른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말구유에 태어난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궁궐에 태어난 자랑스런 왕자였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마굿간에 벌거벗고 누워있는 강보에 싸여 누워있던 한 아이가 아니라 백마를 타고 기사처럼 이 땅에 나타나는 장군이었던 것입니다. 기저귀를 차고 아장아장 걸어다니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들이 원했던 것은 지혜와 모략을 한 번에 가진 위대한 정치가였던 것입니다. 그 모든 권력을 손에 쥐고 그리고 그 모든 용기와 담력으로 세상을 파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해방자였던 것입니다.
가끔 위대한 임금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해방을 맛보았고, 능력 있는 장군이 나타났을 때, 그들은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전리품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한 영원한 위로, 이스라엘을 향한 완전한 위로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저희를 죄에서 구원할 아기가 이 땅에 태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참된 위로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진심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유일한 위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시몬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듣기만 했던 그 그리스도 예수를 눈으로 뵈옵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그릇된 위로를 구하면서 주님의 참된 위로를 바라지도 않고 소원하지도 않으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게 되었다하더라도 그들은 자기의 참된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위로를 구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위로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완전한 위로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이해 받지 못할 때에도 우리는 그 위로가 없는 것 때문에 외로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가 되어주시기 때문에, 환경이 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때에도 위로를 동정해 주지 않아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그분을 소유함으로 그분 안에서 참된 위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분으로부터 참된 위로를 받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믿음으로 헤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위로가 넘치는 삶, 이것은 우리의 소망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로 하여금 이 험악한 세상을 이겨나가게 한 유일한 원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여러분의 한 해 동안 인생이 고달프고, 눈물이 많은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삶이었습니까? 아우성치는 파도와 물거품을 헤치며 노도와 싸우며 등대마저도 불빛이 꺼져버린 그런 칠흑과 같은 바다에서 부러진 돗대를 부여잡고 항해하는 것과 같은 삶이었습니까? 괴롭고 어려웠던 모든 것을 잊어버리십시오. 그리고 얼마나 내가 하나님의 참된 위로의 넘치는 삶을 살았는지 보십시오. 금과 은은 우리에게 없었으나 그리스도가 계셨습니다. 비록 고속도로를 드라이브하는 것과 같은 평탄한 길을 걸어오진 않았지만, 이 풍랑 인연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여러분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세상의 위로가 없는 것을 인하여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도무지 세상에서는 위로 받을 수 없는 그러한 마음의 갈망을 가지고 있을 때에 기뻐하십시오. 여러분들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 시몬
시몬의 마음이 의롭고 경건했고 이 사람의 삶의 목표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이었다면 이 사람의 영적인 삶에 대해서 성경은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그의 영적인 삶이었습니다.
아무도 한 아기가 이스라엘의 소망이며, 이스라엘의 구원임을 믿지도 않았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을 매일 베껴 쓰는 사람들도 몰랐고, 성경을 매일 가르치는 사람들도 실패했습니다. 어린양들은 이 예수의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며 제사장들은 그 아기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백성을 위해 자기 이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그리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죽어갈 어린양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이 사람은 성령이 그 위에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언제든지 음성을 들려주어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불러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언제든지 교제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성령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영적인 삶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사무엘아, 사무엘아!’주님은 분명히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셨지만,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사무엘 그 어린 아이 하나였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1년 동안 우리의 영적인 삶이 얼마나 깊어졌습니까? 주님을 향하여 더 활짝 열려진 영적인 삶,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늘 성령이 동행하며 그를 떠나시지 않는 영적인 삶을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하실 때에 언제든지 여러분들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여러분들은 그 음성을 듣고 오늘 시몬이 그랬던 것같이 성령의 지시를 받을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깨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위에 함께 하고 계십니까? 언제든지 주님은 우리에게 알려 주실 때에 우리는 들을 수 있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예민합니까? 깨어서 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인 것입니다.
시몬은 보통 영적으로 깊은 삶을 살았던 게 아닙니다. 그 날도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에 감동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들어가니까 똑같은 시간에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나와 오는 장면과 딱 마주치는 겁니다. 누가 하신 겁니까? 성령이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번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는 삶을 산 것으로 충분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함께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하더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아기와 함께 결례를 받기 위해서 성전으로 들어오는 그 메시야를 안으신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면 어떻게 이 예언이 이루어졌겠습니까? 그는 언젠가 한번 그 위에 성령이 함께 하시던 사람이 아니라 계속 성령이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성령이 그렇게 함께 하시니까 아기가 들어 올 그 시간에 성령으로 그 마음을 감동시키는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상식이 아닙니다. 상식이 아니라 생생하고 선명한 하나님의 인도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이러한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주님이 무엇을 꾸짖고 계시는지 예민해져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한 해를 정리함에 있어서도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상식으로 한해를 정리하고 상식으로 한해를 맞는다면, 내년은 올해보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를 위한 생애
그는 놀라운 감동 속에서 아기를 만났습니다. 시몬은 그들에게로부터 아이를 안고 하나님을 높이 찬송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난지 7일밖에 되지 않아서 밖을 내다보면서 눈이 부셔서 눈도 잘 뜨지 못하는 이 작은 2∼3㎏되는 어린아이를 안고 가슴에서 복 받쳐 오르는 터져 나오는 찬양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아이가 인생의 모든 문제를 향한 궁극적인 해결임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찬송 가운데 이 시몬의 찬송은 저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시몬의 생애는 이 한 순간을 위해 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참된 위로를 기다리며, 주님께 기도하며 주님의 영이 함께 하시며 살 때에 내가 이스라엘의 위로가 되는 참된 구원자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할 그 때 그 이후로부터 시몬의 인생은 오로지 그리스도께 매이는 생애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로지 이 태어날 핏덩어리 어린아이 하나에 매이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한 사람 때문에 하루를 살았고, 1년을 살았고 이 한 아이를 만나기 위해, 그는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그 분 하나에 매여 있었고, 그리스도 예수 그분 하나가 이 모든 인생의 푯대가 되었습니다. 모든 인생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먹고 입고 사는 모든 것이 거기에 매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다운 하나님의 백성이 누구이며 진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누구이며 진심으로 참된 위로를 기다리는 그의 백성들이 삶이 어떠한 것인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우리의 삶과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영적인 생활이 그리스도와 함께 묶이는 삶으로 나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