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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일단 아는대로 구구절절 써봅니다. 난 이스라엘 편이기는 한데 팔레스타인 편드는 인간들도 이해는 어느 정도 함. 흑역사는 쌍방에 다 있기때문. (스압주의)
1. 대부분 팔레스타인을 굳게 편들고 이스라엘을 맹비난하는 사람들이 알고있는 역사 서사는 "유대인들은 로마 황제의 반란 진압 이후 완전히 이스라엘 땅을 떠났고 2천년동안 아랍인들만 살고 있었는데 갑툭튀해서 아랍인들을 쫒아냈고 그 과정에서 서양측의 지원도 많이 받았다"임. 그런데 이게 정확하지 않은 면이 있음. 일단 유대인들이 소수이지만 비잔틴제국-아랍제국-십자군왕국-오스만제국 시대 면면이 이어지며 계속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리스도교를 믿는 아랍인들의 커뮤니티도 존속해왔다. 근데 더 중요하게는 유목생활하는 베두인들이 이 지역의 주류 인구집단이었다. 베두인들은 스스로를 아랍인들과 묘하게 정체성을 구분함. 아랍인들은 원래 살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19세기 후반 오스만제국의 질서가 혼란해지자 이 지역으로 이주해 들어온 아랍인들이 더 많았다. 유대인들은 19세기 말에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등 중유럽과 동유럽에서 반유대주의적 박해가 심해지고 프랑스에서 드레퓌스 사건까지 나자 "우리만의 민족국가를 아무래도 가져야 우리가 안 당하고 살겠다"는 시오니즘 운동을 창설한다. 그리고 1890년대부터 이스라엘로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
2. 1대전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금융력과 유대인 커뮤니티의 이런저런 정치력이 영국을 많이 지원해주니까 영국이 유대인을 위한 독립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제안한다. 유대인들은 당연히 이스라엘을 요구했고 영국이 제안한 우간다나 남아메리카 일대를 거절했다. 1918년에 이스라엘 지역은 영국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유대인들의 이주는 합법화되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은 영국측과 적잖게 충돌했으며 영국 행정시설과 군대 등에 폭탄테러를 일으키는 유대인들도 많아서 영국이 골치꽤나 썩였었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무력충돌에서 영국이 유대인 쪽을 일방적으로 빵빵하게 지원했다는 팔레스타인 쪽의 얘기는 거짓말인 편에 가깝다.
3. 1930년대가 되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그랜드 무프티 등 지도자그룹은 반유대주의를 매개로 나치 독일측과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나치 독일의 외교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국으로서는 당연히 아랍인들을 더 경계해야 할 이유가 생긴것이다. 그 당시 이란의 샤(우리가 잘 아는 팔레비 샤의 아버지)도 나치에 줄을 서볼까 하고 얼쩡대다가 영국한테 딱걸려서 폐위당하고 아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등 중동 역시 2대전의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4. 2대전은 끝났고, 영국의 30년 위임통치 기간도 끝나가니 이제 본격적으로 지역의 미래를 놓고 유대인과 아랍인이 전면전 들어가는 시간이었다. UN의 1947년 분할안은 아랍인측은 확실히 거부했고 유대인측은 수락했다는 설과 역시 거부했다는 설이 있으나 어쨌든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해결책은 무력뿐이었다. 잘들 아시는대로 1차 중동전이라고 흔히 불리는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예상을 깨고 크게 승리한 결과로서 이스라엘이 건국되었다. 아랍인들은 무려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레바논 4개국의 지원을 받았고 사우디도 심정적으로 팔레스타인 쪽을 지지했으나 전쟁에서 졌다. 1948년 5월은 이스라엘 입장에선 '건국'이고 팔레스타인 입장에선 '나크바'(재앙)다.
5. 전쟁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아랍인들이 집과 땅과 재물을 빼앗기고 비좁은 서안지구, 가자지구에 몰려 난민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들의 귀환권 문제나 혹은 귀환권을 대신해 돈으로 보상하라는 부분이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고 이건 이해할만한 문제제기이다. (1945년 이전의 세상 같았으면 이건 그냥 무력으로 끝난 얘기지 인권같은거 따져줄리도 없었겠지만...) 서안지구의 통치를 맡게된 요르단이나 가자지구를 떠맡은 이집트 당국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귀찮고 부담스러운 존재로 여기고 냉대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빈곤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6. 이스라엘은 그나마 건국할때 국제적으로 지원받는 것도 미미했다. 미국은 국가승인은 신속하게 해줬지만 중동에까지 신경을 써야할지에 회의적이었다. 아시아조차도 애치슨 라인을 그어 선별을 하는 마당에 아직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싸움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미국이 비교적 냉담하던 차에 그나마 프랑스와 소련은 이스라엘을 편들어 줬다. 그렇지만 1948년 전쟁 자체를 위해 물적 지원이 들어간 것은 딱히 없었다. 유럽에 살아남아 있던 유대인들이 의용군으로 자원했고 그 외 지역 유대인들이 자금을 대주었다.
7. 벤 구리온을 비롯한 이스라엘 건국자들은 다 좌익이었다. 그리고 건국전쟁 당시 참전하러 이스라엘에 들어온 유대인들 대부분은 유럽에서 반나치 레지스탕스, 파르티잔 활동으로 전투 경험이 있는 좌파들이었다. 소련이 이들 때문에 이스라엘을 일단 편들었던 것이고 중동지역의 신생국 하나를 친공산 국가로 만들 것이라 기대했던 바도 있었다. 실제로도 건국 이후 30년간 이스라엘의 경제는 키부츠 중심의 사회주의를 근간원리로 하여 운영되었다. 아무튼 덕분에 1950년대와 1960년대에도 동구권, 중국 할 것 없이 이스라엘을 친공 우방으로 여겼고 행사같은거 할때 연대의 대상으로 이스라엘을 호명하고 인정해줬었다. 1956년에 영국, 프랑스와 손잡고 나세르의 이집트를 공격하는 수에즈 전쟁을 일으켰다가 미국과 소련과 3세계의 여론전으로 영, 프, 이 연합군은 순식간에 패배하는 쪽이 되어버린다. 이건 사실 프랑스가 이스라엘의 안보를 지원해주는 대가로서 요구했던 면도 컸는데 이때의 일탈은 소련이 잠시 눈감아주었다.
8. 상황이 크게 바뀐 건 1967년 6일 전쟁(3차 중동전)이었다. 이때 소련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아랍권의 마음을 얻으려고 말을 갈아탔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크게 이겼고 예루살렘, 서안지구, 가자지구, 골란고원을 싹다 점령해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이후로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는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데 군정이 장기화되니까 팔레스타인인들의 스트레스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군과 유대인 정착민들도 결코 호의적으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대해주지 않았고, 아랍인들 역시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계속해서 키워나갔다. 유대인 강경파들은 여기도 당연히 유대민족의 강역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정착촌을 건설하여 유대인의 지배권을 굳히려고 했다. (가장 강경한 유대인들은 지금의 요르단과 시리아 등 솔로몬 이스라엘의 최대영역까지가 이스라엘판 레벤스라움이라고 주장한다.)
9. 1967년의 점령 이후 PLO가 탄생했고 이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알리기 위한 테러활동을 시작한다. 1972년 뮌헨올림픽 인질극이나 이후 1980년대의 잦은 항공기 납치에 이르는 일련의 국제 테러 활동을 벌인다. 공산권이 이제 확실히 팔레스타인 편이 되었으니 PLO는 카다피의 리비아나 헤즈볼라 등과 더불어 서방권에 대한 적대활동을 공산권으로부터 자주 하청받는 입장이 된다. 이제 이-팔 갈등은 국제적 냉전의 일부가 된다.
10. 그런 전쟁 와중에도 이스라엘은 경제발전에 차근차근 성공해 간다. 1970년대 말까지는 공산권과의 국제적 대립과는 별개로 여전히 사회주의 경제를 유지했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대대적인 친시장적 경제개혁을 시작했고 이때부터 제조업과 IT산업을 중심으로 급격하게 고도성장을 하게 된다. 이를 '요르단강의 기적'이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스라엘인들은 건국 초기의 사회주의 경제 역시도 국가의 생존기반을 다지고 사회를 통합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보며 이스라엘 현대사의 자랑스러운 일부로 평가한다.
11. 1987년 이스라엘의 군정을 견디다못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1차 인티파다(봉기)를 일으킨다. 이것이 당시 서방 민주국들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공론화되었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서양인들이 처음으로 민족간 분쟁이 아닌 인도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 또한 아시아, 남유럽, 라틴아메리카를 중심으로 한 '제3의 민주화 물결'이 중동에도 다다르는 것 아니냐는 시각으로 인티파다를 분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때마침 냉전은 끝나가고 있었고, 더 이상 이-팔 문제를 공산권과의 전쟁의 일부로만 바라볼 필요는 줄어들고 있었다. 1993년 클린턴의 중재로 성사된 오슬로 협정은 이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오슬로 협정에 참여한 이스라엘 총리 라빈은 극우파에게 암살당했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된 아라파트는 여기대로 아랍인들에게 이스라엘에 너무 많은걸 양보했다고 욕 먹었다. 오슬로 협정 이후에 예리코와 같은 일부 도시 지역은 이스라엘의 군정에서 벗어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행정력 하에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안보상의 이유"로 이스라엘이 철수.양보하지 못하는 지역들이 여전히 많다.
12. 유대인과 아랍인의 근본적인 민족주의적 적대감정 자체가 쉽게 사라지지도 않겠거니와, 군정을 하다보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검문검색도 수시로 받아야 하고 경제활동의 자유가 제약되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 토지를 강제수용당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유도리 있게 다가가고 싶다가도 경계를 늦츨 수 없으니 엄격하고 때때로 가혹하게 대할 수밖에 없고,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군인들과 언쟁을 해야 하고 시비가 붙고 애원을 해도 사정을 들어주지 않으니 이러면서 불만이 계속 쌓일 수밖에 없다. 그걸 배경으로 해서 무장단체 대원들은 늘어만 가고 이들은 이스라엘 군경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테러를 저지른다.
13. 유대인 측에선 강경파 정착촌 주민들이 계속해서 outpost들을 세우고 새로운 마을을 개척하려고 한다. 이스라엘 정부에게 정착촌 주민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요구하고, 또 경제적인 지원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과 분리된 별도의 교통망 건설도 요구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정착민들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지나치게 자극할 것을 염려하고 또 군인들의 작전범위가 너무 넓어져 군사적으로 곤란한 상황이 올 것도 우려한다. 그래서 때때로 일부 멀리가는 정착민들에게는 군인의 보호대상이 아니라고 선포하기도 하고 전기.수도 등의 공급을 일체 거부하기도 하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대인의 강역을 확실히 해야한다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처럼 온갖 자원을 요구하는게 많으니 이스라엘의 중도층들도 종종 이들을 피곤해하지만, 또 그렇다고 동료시민인 이들을 때려잡을 수도 없으니 어느 정도는 봐줘야 할 수밖에 없는것이다. 정착촌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주택을 구입하고 잘 정비된 최신 인프라와 학교 교육의 혜택을 누리려는 사람들은 1980년대 이후에 이스라엘에 유입된 에티오피아, 러시아,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들이 대부분이다. 유대인의 강역 확보를 위해 이들이 아랍인과의 전방에서 공격당할 위험을 감수하고 몸빵을 해주는 안보 비용으로서 관대한 복지를 제공하는 셈이다.
14. 물론 이스라엘 군의 무장단체 대원 체포 및 소탕을 위한 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의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발생하는 부분과 강경파 유대인들이 아랍인을 대상으로 테러를 저지르는 행위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을 이런저런 이유로 지나다녀야 하는 유대인들 역시 총격을 당한다. 그걸 넘어 아예 이스라엘 본토로 진입해 들어와 시내버스나 쇼핑몰에 폭탄테러하는 무장대원들도 있다. 이스라엘이 2001년에 거대 분리장벽을 설치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물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 장벽이 대단히 위압적인 이스라엘 지배의 상징이라 보기 때문에 분노한다.
15. 한편 그런 와중에도 이스라엘에서 일자리를 얻어 돈을 버느라 출퇴근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많아졌다. 물론 경계를 넘을때마다 빡쎈 검문검색을 받아야만 하고, 종종 이 과정이 너무 굴욕적이라고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들도 나온다. 그러나 이스라엘로서는 출퇴근 노동자 사이에 테러범이 섞여 있지 않을까 늘 불안하기 때문에 빡쎄게 해야만한다. 종종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인 노동허가 규모를 늘리거나 줄이는 일은 정치적 협상 카드가 되기도 한다.
16. 기본적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땅이 워낙 좁기 때문에 인구 밀도도 높고, 통제권 하나하나에 민감해지는 부분이 있다.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설립하게 되면 영토, 영해, 영공주권을 완전히 그들에게 이양해야만 하는데, 이걸 이스라엘 군은 받아들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군대 배치나 조기경보 레이더 탐지망, 해공군의 활동 영역을 빼앗기게 되면 가상 적국의 침입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요르단강 계곡은 깊이가 3천미터에 달해 방어를 위한 좋은 전략적 요충지이다. 아마 '2국 해법'을 받는다해도 이스라엘은 그 조건으로 이스라엘 군이 팔레스타인 내에서 일정한 활동을 가능케하는 권한을 얻을 것을 고집할 것이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걸 받아들일 리도 만무하다. 그리고 유대인 정착민들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것인지, 2국 성립 후에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에 합법적인 절차를 통해 이민을 올 권리를 받을 수 있을것인지, 그 역으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순수히 개인으로서 체류하거나 거주할 수 있을것인지도 관건이다. 혹은 팔레스타인의 군경이 아예 이스라엘의 군경과 긴밀히 협조하여 활동하거나 거의 통합적으로 활동하게끔 해서 2국이 공동으로 안보와 치안을 수행하는 방안도 있겠지만 이 역시 양측이 다 감정적으로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17. 아이러니한 것은, 팔레스타인은 중동세계 전체(당연히 이스라엘은 논외로 했을때)에서 가장 근대화된 지역이라는 것이다. 민주선거가 2006년에 도입되기도 했거니와, 이스라엘의 군정이라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역설적으로 상업을 통해 성공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아랍인들이든 재외 팔레스타인인들이든 장사꾼으로서 유능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다른 아랍국들이나 이란이 석유 중심 경제에 의존하거나 이집트, 튀니지처럼 저개발, 고실업, 빈곤 상태에 놓여있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사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는 이유는 자신들이 이스라엘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장사할 권리를 얻길 바래서이기도 하다. 또한 세속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비율도 타 아랍국들보다는 높은 편이다. PLO의 나세르주의적 뿌리와 구 공산권과의 연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스라엘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팔레스타인 사회의 자체적인 근대화와 세속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실력양성론자'들이 있어서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또 워낙 부유한 시장경제 국가이자 민주주의 국가이고 상당한 수준의 세속주의적 문화와 표현의 자유가 있는 이웃이니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다. 어차피 맘먹으면 이스라엘 TV같은걸 얼마든 볼 수 있는 물리적 거리이니. (이슬람 국가 치고 성소수자 운동이 나름 활발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18. 이스라엘 진보파는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철저히 고립되어 있다.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 자체와 세속적 민주정치 및 시장경제를 인정하는 한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따스하게 다가가고 조금씩 대화와 협상을 통해 서로의 경계심을 줄여나가자는 입장에 있는 유대인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건 팔레스타인이건 이미 쌓이고 쌓인 적대감이 워낙 커서 화해를 위한 접근은 정말 어렵다. 이스라엘 중도파는 1990~2000년대에는 잠시 유화정책에 관심을 가졌으나 하마스 등 무장단체들의 민간인 공격 사건이 잊을만하면 발생하고, 또 군경을 전투나 테러로 잃게 될 때에도 자기 주변 사람일 확률이 높으니 더욱 울분이 터지고 복수심에 차게 되었다. 다만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제압하거나 절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까지는 인정한다. 그러니 그냥 아무런 진전이 없더라도 그냥 현상태를 유지하면서 팔레스타인에 아예 관심을 끊는 것이 인생을 피곤하지 않게 하는 상책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스라엘 중도층을 비롯한 국내여론의 대세는 팔레스타인 문제 자체에 대해 냉담하며, 단지 그들이 공격을 해올때 또는 공격 위협이 높다고 판단될 때 대응이나 잘하자는 쪽으로 모아졌다. 정착촌 주민들과 강경파는 이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여 이득을 챙기고 있다. 이스라엘 진보파는 이렇게 국내에서 지지를 잃고 있는데, 그나마 해외 좌파도 이스라엘 진보파와의 연대는 거부하고 있다. 해외 좌파는 이스라엘인의 내재적 맥락 자체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팔레스타인의 저항은 정당하다는 원론적인 명제에 갇혀 실질적인 진전을 위한 해법은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 중도층의 생각을 돌리려면 이들의 안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무장노선을 누그러뜨려야 한다. 물론 이-팔이 어렵게 화해 과정에 들어선다 해도 무엇을 양보해야 할지 매우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을것이지만 말이다.
19. 하마스 등 팔레스타인의 강경파와 팔레스타인 국내 및 해외의 이슬람 원리주의자, 해외 좌파의 일부는 1948년의 이스라엘 건국 자체가 잘못되었으며 이스라엘 국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갖고있다. 이런 입장이라면 그냥 무력으로 결론을 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그 외에 친팔레스타인 정치에서 지배적인 입장은 1967년 이전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2국을 성립시킬 것을 주장한다. (1949년 휴전선 Green Line을 이-팔의 국경으로 정하자는 입장.) 예루살렘의 동쪽 일부를 팔레스타인의 수도로 인정해달라는 부분이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된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다른 나라 특히 이쪽의 문제는 깊이 있게 들여다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많네요. 단편적인 지식으로 머라하기는 좀 그렇네요.
단지 지난 일요일(10/22) 오후 종로에서 팔레스타인 데모데를 보고 지나가다 집사람이 눈물이 난다고 하더군요. 저도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거기 사는게 얼마나 삶이 고달플까 하고 또 나와 있는 사람들도 조국을 바라보면 참 가슴이 아프겠지요
좋은 글 보고 그냥가기가 그래서 한줄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