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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ita No.2 in D minor, BWV1004 바흐 /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2번 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
제 1악장 알르망드(Allemande) d단조 4/4박자. 활기에 찬 장중한 무곡인데 두도막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서곡의 역할을 한다. 제 2악장 쿠랑트(Courante) d단조 3/4박자. 활기에 차 있으며 선율도 아름다운 두도막 형식이다. 제 3악장 사라방드(Sarabande) d단조 3/4박자. 제 2박자를 긴 음으로 하여 과히 빠르지 않게 연주하는 중음주법 의 무거운 악장이다. 제 4악장 지그(Gigue) d단조 12/8박자. 두도막형식의 빠른 템포인데 활기에 찬 불꽃 튈 정도의 눈부신 장면 이다. 제 5악장 샤콘느(Chaconne) d단조 3/4박자. 16세기 스페인등지에서 생겼다는 3박자의 춤곡인데 여기서는 클라이맥 스에 이른 감이 있다. 그의 풍부한 환상과 깊은 감정, 격조 높은 품위에 짜임새 있는 기교를 다았다. 당당한 테마는 위험 있는 장중한 것으로서 30회 가량 변주 반복한다. 이 샤콘은 바이올린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편곡되어 즐겨 연주된다. Nathan Milstein 나탄 밀슈타인(1904∼1992) 밀슈타인의 고향은 러시아의 오데사다. 바로 위에서 소개된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와 같은 곳이다. 이곳은 20세기 초의 위대한 음악가들을 다수 배출했다. 두 사람 외에 길렐스와 체르카스키, 코간 정도라면 이에 대한 이견은 없을 것이다. 밀슈타인도 오이스트라흐와 마찬가지로 오데사 음악원에서 스톨리알스키에게 사사했다. 그리고는 다시 아우어에게 배우러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세 살 위인 하이페츠가 이미 와서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이 머문 것은 잠깐일 뿐이다. 하이페츠는 혁명 전에 러시아를 빠져나갔고, 밀슈타인은 혁명 이후에도 남게 되었다. 1920년경 호로비츠를 만났다. 호로비츠가 그의 공연을 보러 찾아왔던 것이다. 동갑내기였던 두 사람은 그로부터 죽을 때까지 우정을 지켜나갔다. 1925년, 둘은 함께 묶여 정책적으로 서방에 소개되었다. 이로써 이들은 스탈린의 철권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첼로의 피아티고르스키도 합류했다. 밀슈타인이 서방으로 망명해 연주활동을 시작할 당시 하이페츠는 이미 자리를 확고히 잡고 센세이션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태양과 같은 그의 강렬한 빛에 엘만, 후베르만, 시게티, 티보, 부쉬 등의 1등성들조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원로인 크라이슬러와 신성인 메뉴인만이 어느 정도 버티고 있었다. 하물며 밀슈타인 같은 햇병아리 바이올리니스트야 두말할 나위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 기교로서 하이페츠에 대적할 수 있는 것은 밀슈타인이 유일했다. 1929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미국 데뷔공연을 가진 후 이듬해 미국에 귀화했다. 미국에서 그는 이미지를 바꿀 수 있었다. 파가니니뿐만 아니라 바흐의 전문가로도 인식되기 시작했다. 기교와 음악성을 모두 갖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인식변화였다. 그리고 점점 파가니니의 이미지는 엷어져 가고 바흐만이 남게 되었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dg)는 두 번의 녹음이 있는데, 그중 나중에 한 70년대 것이 원숙미가 돋보인다. 밀슈타인은 20세기 초, 러시아가 낳은 바이올리니스트, 아니 위대한 예술가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연주했고 또 살아남았다. 물론 슈라 체르카스키가 조금 더 오래 연주, 생존했지만 그는 연주활동에 기복이 심했고, 밀슈타인보다 6년이나 연하였다. 밀슈타인도 체르카스키도 세상을 떠난 지금, 20세기 초의 러시아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모두 전설로 남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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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하고~감사드립니다~!!
그날 앵콜곡,숨죽이게 했었던 아름다운 곡~다시 들으니..행복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