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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애가 3장 강해]
/ 하나님의 본심을 알자
예레미야는 유다의 고난을 보고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희망에 불탑니다. 고난을 적극 받으며 자신의 내면이 변화되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을 소망을 바라봅니다. .
제일장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과녁 삼으십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면서 고통을 표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시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입니다.
“1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당한 자는 나로다”
유다는 하나님의 진노의 몽둥이에 얻어맞고, 고난당하는 자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죽어도 고통을 모릅니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동물은 배고픔과 육체적인 고통을 당합니다. 사람은 소외감과 고독과 같은 정신적인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생각하며 고통을 당합니다. 하나님이 진노의 매를 들어치십니다. 예루살렘의 죄와 불의를 교정하기 위해서 치십니다. 그 당시에 바벨론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고난을 주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를 대우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죄를 나의 죄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대해서 진노하지만 나의 죄에 대해서 진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자신을 진노하시는 매로 생각하는 사람은 예레미야 하나입니다. 다른 사람은 예루살렘이 망한 것을 정치 경제적인 문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것을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진노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봅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봅니다.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 경제의 문제가 아닙니다. 영적인 감각이 민감해야합니다.
“2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3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하나님은 사실 시온에 대해서 매를 계속하여 때렸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시온을 때리는 매가 자신을 치고 있다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대속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동족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받아들입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이끄시어, 빛도 없는 캄캄한 곳에서 헤매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온종일 손에 매를 들어서 예레미야를 치고 또 치십니다. 하나님은 자주 자주 쳐서 죄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사람 살다보면 몸이 뜨끔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하루에 300번 뜨끔하다고 합니다. 어디가 뜨끔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일에 대해서 민감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욕심부리지 말고 고집 부리지 말아야합니다. 50이 넘으면 남의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잘못만을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늙으면 젊은이에게 신세를 져야 합니다. 신세를 질 젊은이를 잘 대해야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통하여 나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해야합니다.
“4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5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6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게 하셨도다”
주님께서 시온에게 뼈에 가죽만 남았는데, 뼈마저 부서뜨리셨습니다. 가난과 고생으로 시온을 에워싸고 둘러싸셨습니다. 죽은 지 오래 된 사람처럼 흑암 속에서 살게 하십니다. 죽은지 오래 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사라진 자가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입니다.
“7 나를 둘러싸서 나가지 못하게 하시고 내 사슬을 무겁게 하셨으며 8 내가 부르짖어 도움을 구하나 내 기도를 물리치시며 9 다듬은 돌을 쌓아 내 길들을 막으사 내 길들을 굽게 하셨도다”
하나님은 시온이 도망갈 수 없도록 담을 쌓아 가두시고, 무거운 족쇄를 채우십니다. 당시에 바벨론은 이렇게 가두어두어 죄수를 죽였습니다. 예레미야가 살려 달라고 소리를 높여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가장 큰 행복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도를 물리치시고 안 듣는 것처럼 보일 때 고통스럽습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시온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는 것 같은 고통이 있습니다. 이 때는 아무리 기도해도 나의 가슴이 답답합니다. 기도가 되지 않아서 답답합니다. 평상시는 기도의 문이 하늘로 향하여 열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기도의 문이 닫힙니다. 나의 허물과 죄로 인하여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은 기도가 열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다듬은 돌로 담을 쌓아서 시온의 앞길을 가로막으십니다. 유일한 출구조차 막힙니다. 길을 가는 시온을 괴롭히십니다. 예레미야는 그런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입니다.
“10 그는 내게 대하여 엎드려 기다리는 곰과 은밀한 곳에 있는 사자 같으사 11 나의 길들로 치우치게 하시며 내 몸을 찢으시며 나를 적막하게 하셨도다”
주님께서는 엎드려서 예루살렘을 노리는 곰과 같습니다. 몰래 숨어서 예루살렘을 노리는 사자와 같으십니다. 길을 잘못 들게 하시며, 예루살렘의 몸을 찢으시며, 예루살렘을 외롭게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사랑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예루살렘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자신이 예루살렘이 받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12 활을 당겨 나를 화살의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13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주님께서 시온을 과녁으로 삼아서, 활을 당기십니다. 주님께서 화살 통에서 뽑은 화살로 시온의 심장을 뚫으십니다. 시온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비방의 표적이 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비방을 자신이 대신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모든 비방을 자신이 당하면서 고통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시온에 있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관심이 예레미야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나 하나만을 사랑의 대상인 것처럼 모든 것을 사랑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아이는 세계에 자기가 중심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위해서 돈벌어오는 사람입니다. 형은 놀아주는 사람입니다. 젖이 둘이면 하나는 먹고 하나는 노는 것입니다. 내가 울면 아무도 말릴 수 없다고 합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나 하나를 위해서 세계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세계가 있습니다. 세계 속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는 나를 위해서 움직인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바쁘실 텐데 나를 돌보실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나를 돌보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나를 위한 것으로 봅니다. 홍수가 나고 가뭄이 나도 나를 위한 것입니다. 장례식에 가고 교통사고를 통하여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도 죽을 수 있고 너도 교통사고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역사하고 나에게 관심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표적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 생각으로 세계를 보고 역사를 봅니다.
“14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 거리가 되었도다”
예레미야의 백성이 모두 예레미야를 조롱하고 놀려댑니다.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됩니다. 진실된 복음을 전하고 예루살렘의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데 백성은 예레미야를 미친 사람 취급합니다. 예레미야가 매일 울고 다닌다고 미쳤다고 합니다. 회개치 않은 백성이 미친 것이요 예레미야가 정상입니다. 나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내가 미친 것인지 저 사람들이 미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나의 뜻이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내가 미칠 지경이 되는 것입니다. 조롱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고 어떤 말도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정신적으로 허약하였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누가 위로해주는 말이 비웃음으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자꾸만 오해가 생깁니다. 나를 위로하는 말이 비난으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심령이 약해졌을 때입니다. 모든 백성의 말이 조롱하는 소리로 들립니다. 위로해주는 말도 비웃음으로 들립니다. 이제 주저앉아야 합니다.
“15 나를 쓴 것들로 배불리시고 쑥으로 취하게 하셨으며 16 조약돌로 내 이들을 꺾으시고 재로 나를 덮으셨도다”
하나님은 쓸개즙으로 예레미야를 배불리시고, 쓴 쑥으로 예레미야의 배를 채우십니다. 예레미야는 쓰디쓴 고통을 당합니다. 돌로 예레미야의 이를 바숩니다. 손발이 묶인 상태에서 땅바닥에 던져진 것을 먹다가 이를 다칩니다. 예레미야의 얼굴을 땅에 비비십니다.
“17 주께서 내 심령이 평강에서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내가 복을 내어버렸음이여 18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서 평안을 빼앗으십니다. 평강이 멀리 떠납니다. 영적인 지각을 가진 목자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습니다. 앞에 다가오는 심판을 알기 때문에 평안이 없습니다. 예수님도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며 말씀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평안의 길을 잃었다고 하십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십니다. 지금은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무너질 것을 생각하며 우십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두렵고 불안합니다. 잠시 후에 시온을 치니, 시온은 행복을 잊고 말을 것입니다. 나오는 것은 탄식뿐입니다. 이제 시온에게서는 찬란함(힘)도 사라지고, 주께 두었던 마지막 희망마저 사라졌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이 패망을 생각하며 말씀하십니다.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와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하십니다. 영적 지각이 있는 사람은 먼저 그 심판의 고통을 느낍니다. 시온은 하나님께 대한 소망이 끊어집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만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복을 받을 그릇이 없습니다. 용서받을 긍휼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율법을 찾는 한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사하시겠다고 합니다. 한 사람의 의인이 없으니 하나님이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 앞에서 울며 기도해야합니다. 이런 때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신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제이장 고난 중에 소망을 갖습니다.
[주일메시지] / 하나님의 본심을 알자
(애 3:19-33)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한 목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목사의 아버지는 아주 엄하였습니다. 항상 외아들인 자신에게 매를 자주 대었습니다.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시켰습니다. 새끼를 꼬게 하고 가마니를 하루에 여덟 장씩 짜게 하고 짚신을 삼게 하였습니다. 부자라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먹고 살았는데 일을 시켰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게 하고 늦잠 자는 꼴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꼭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미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대화를 엿들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왜 그렇게 자식을 때리기만 하느냐 왜 그렇게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시키느냐 아들을 사랑하기는 하는 거냐고 핀잔을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사랑은 겉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속으로 하는 거야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아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그래도 자신을 사랑하기는 하는가보다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냥 말로만 그러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북한에서 탄광에 끌려갔다가 도망 나와 산에 숨어 있었습니다. 아들은 산속 토굴 속에 숨어 살았습니다. 그곳에 음식을 갖다 주다 들키면 총살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신에게 목숨을 걸고 몇 달 동안 음식을 가져왔다고 하였습니다. 아무 말씀도 안하고 몸조심하라가 전부입니다. 그때가 열일곱 살입니다. 그때서야 그는 아버지가 자신을 본심으로 사랑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들은 집에 내려가면 평생을 효도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집에 내려왔을 때 아버지가 공산당에게 총살당하는 것을 멀리서 보았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때문에 총상을 당했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시체 가까이 가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살아야 효자다! 그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월남하여 살았다고 합니다. 아들은 얼마동안 아버지의 본심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그분이 곽선희 목사님이야기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전혀 뜻하지 않았던 고난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쉽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때론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은 우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영혼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현재 유다는 많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18개월 동안 포위합니다. 예루살렘은 아이를 삶아 먹을 정도로 큰 고통을 겪습니다.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가 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전도 무너졌습니다. 성전의 모든 도구들은 전리품으로 가져갔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싸우다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남자들은 징병으로 끌려갔습니다. 여자들은 정신대로 끌려갔습니다. 어른들과 아이들은 징용으로 끌려가 고통 하였습니다. 가혹한 세금으로 수탈당하였습니다. 유다의 역사사 가장 절망적인 때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유다를 사랑하지 않고 버려서 고통을 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았습니다. 유대인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 때 이미 하나님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줄 그것을 보았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고 자원함으로 적극 고난을 받았습니다.
첫째 고난 중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 돼지 쓸개를 매달아 놓고 놀랬을 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모든 쓸개가 쓰지만 돼지 쓸개도 매우 씁니다. 사실은 유다가 망했을 때 예레미야는 큰 고통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에게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가 겪은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유다를 사랑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사랑하는 유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사랑은 이처럼 함께 기뻐하고 함께 고통 하는 것입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민족의 고통을 시시각각으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잠시도 고난을 잊을 수 없으므로, 고난 중에 이제 유다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가 생각하며 마음에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고난을 죄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죄를 회개하지 않으므로 소망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는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가서 고난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면서 마음속으로 곰곰이 고난을 생각하다가 오히려 희망을 갖습니다. 그는 고난이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훈련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고난 중에 크고 좋으신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유다를 훈련하시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정금처럼 연단시키십니다. 그 후에 복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고난이 클수록 더욱 큰 소망은 커집니다. 하나님이 유다를 크게 쓰시고자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의대에서 의사고시를 공부하거나 로스쿨에서 사법고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고난 후에는 전문직에 종사하여 더 많은 월급을 받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을 기대하며 고난을 받습니다. 의대생들이 의대 공부하는 것을 특권으로 알듯이 우리는 특권의식을 갖고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고난은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역사상 큰 두 번의 두 번의 고난을 갖습니다. 첫째가 430년 애굽의 노예살이 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살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내기 위해서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열 가지 재앙을 보면서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홍해를 육지같이 건너면서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로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살이 한 것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를 통하여 유대인의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고난을 주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훈련시키셨습니다. 메시야의 소망이 분명해집니다. 대부분의 선지서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망하는 것을 배경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통하여 586년 후에 그들에게 메시야를 보내십니다. 그들에게 사도 바울이 나오고 열두 사도가 나옵니다. 거기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시작됩니다.
둘째 고난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합니다.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예레미야가 고난 중에 희망을 갖는 이유는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영원하므로 유다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주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합니다. 그는 아침에 말씀을 받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느끼고 있습니다. 주님의 신실이 크다고 늘 말하였습니다. 주님이 성실하시다는 말은 주님이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70년 후에 회복시키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할 때부터 구원자를 보내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메시야를 보내사 죄사함을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 사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케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면 왜 너에게 고난을 주시느냐는 것입니다. 고난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고난을 받으면 마음에 쓴 뿌리가 생겨 하나님을 떠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신과 분노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표시입니다. 하나님은 남의 자식을 징계하지 않습니다. 징계가 없으면 남의 자식입니다. 죄를 짓는데도 모든 일이 잘 되면 그는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단지파가 그래서 망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로 대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합니다. 히브리서 12장 6-8절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사랑하는 자식에게 매 하나 더 주고 미운 자식에게 떡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합니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감사의 눈물을 흘립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치고 고난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다윗 누구하나 고난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신뢰하고 자랑하는 욥은 가장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매를 맞기에 합당한 자로 대우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고난을 받는 사람은 나를 아들로 사랑하시는 것을 알고 감사를 드려야합니다.
이렇게 고난이 사랑이라고 해도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이것을 아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영접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유대인을 징계하지만 회개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완전 부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악된 인간을 먼저 사랑하여 자신의 아들을 징계하십니다. 유다를 징계하듯이 자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아들이 그들의 모든 죄 값을 치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완전히 사랑하였습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유대인을 사랑한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유대인 뿐 아니라 온 인류를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볼 때 어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곰곰이 생각해야합니다.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고난 중에 인내해야합니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예레미야는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라고 고백합니다. 기업은 상속하는 재산이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가 가진 것이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전부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상속재산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이 기업인 지파입니다. 그들은 상속재산을 분배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상속재산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만 바라보면 하나님이 먹여 살립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림으로 레위지파는 그것으로 먹고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상속재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봉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직장 장래 결혼을 책임져주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에 하나님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알아야합니다. 나의 삶을 모두 책임져주시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랑의 하나님을 알 때 고난을 참을 수 있습니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를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여호와를 찾고 구하는 자에게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반드시 선을 이루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포로생활이 70년 지나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70년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잠잠히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기다려야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고난의 때는 참고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주시지 않고 기다리게 하십니다.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주님께서는 상주실 것을 기다려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복주실 것을 기다립니다. 주를 찾는 사람에게 주님은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이 홍해 바다 앞에 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3,14절에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하시는 보라고 합니다. 이사야 30장 15절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고 잠잠히 있어야 힘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에 원망 불평 절망하지 말아야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라고 합니다. 떠들지 말고 조용히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에 짜증내거나 원망하거나 절망의 말을 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신 분이십니다. 좋으신 분이십니다. 실수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가 저녁에는 절망해도 아침에는 소망을 갖고 기다려야합니다. 아침마다 소망이 새롭습니다. 주님께서 구원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고난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메시야의 은총을 기다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크게 쓰실 소망을 기다립니다.
넷째 자원하여 고난을 받아야합니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젊은 시절에 이런 고난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젊었을 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좋습니다. 젊어서 고난을 받아야 늙어서 영광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오십 지나서 비참하면 실패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정결하게 살아야합니다. 젊어서 고난을 받아야 나이가 들어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하라고 합니다. 매도 젊었을 때 맞아야 합니다. 늙어서 깨달으면 돈도 건강도 길도 없습니다. 군대 가서 새 사람이 되어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오만함이 사라집니다. 여유 만만합니다. 고난을 받을수록 희망은 커집니다. 짊어서 진 멍에가 무거울 때에는 잠자코 있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멍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고난 받는 사람을 도와주지 말아야합니다. 자신의 십자가는 자신이 지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시는 소망을 바라보면 자신의 멍에를 메야 합니다.
“29 그대의 입을 땅의 티끌에 댈지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지로다”
왕이 행차하면 입을 땅에 댑니다. 나를 낮추면 하나님이 나를 높이십니다. 고난을 받을 때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르니 겸손하게 고난을 받으며 사는 것이 좋습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쓴 뿌리가 생기고 교만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고난을 받으며 겸손히 기다려야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해서 교만을 깨뜨리고 겸손해져야합니다. 교만을 통하여 나의 내면이 거룩하게 변화되기에 힘을 써야 합니다. 고난이 아니면 우리의 내면이 바뀌지 않습니다. 나의 믿음과 인격이 변화되기에 힘을 써야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게 하십니다. 시편119편 71절입니다. 우리는 고난의 때에 머리를 땅에 대고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감사가 넘치게 하십니다. "피난처"란 책을 쓴 코리텐 붐여사는 나찌 독일의 감옥소에서 겪었던 일을 간증합니다. 모두들 음식도 나쁘고 더구나 이와 빈대가 득실거리는 감옥소의 환경을 탓하는데 자기 동생 벳시는 늘 감사 하더라는 것입니다. 몰래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벳시가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자신들을 감시하는 독일군사로 인한 어려움을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부터인가부터 아침과 저녁으로 감시 나오던 그 독일군이 저녁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자세히 알아보니 "나는 저녁에는 이 감방에 오고 싶지 않아. 다녀만 가면 빈대가 많이 몸에 붙어 근지러워 잠을 잘 수가 없어"하며 친구 병사에게 불평을 털어놓는 것을 어느 날 듣고는 "하나님께서 많은 벼룩을 보내주셔서 참 감사하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감사함으로 나찌 수용소의 고통을 참고 견뎠습니다.
“30 자기를 치는 자에게 뺨을 돌려대어 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32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치욕으로 배불리라는 말은 고난과 치욕이 음식과 떡이라는 말입니다. 이사야 30절 20절 하나님은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떡으로 먹고 주님이 주시는 훈련을 적극적으로 받아야합니다. 환난과 고생이 우리를 성장시키는 우리의 영양분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마음껏 먹어야합니다. 예레미야는 고난 받는 백성들에게 적극적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자원함으로 고난을 받으라고 합니다. 때리려는 사람에게 이제는 자원하여 뺨을 대주고, 욕을 하거든 기꺼이 들으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어쩔수 없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더욱 기쁨으로 자원하여 고난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두지는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많은 사람이 군대를 가지 않고자 합니다. 대부분이 군대를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갑니다. 그러나 자원하여 고생하는 해병대에 입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왕 고난을 받으려면 자원해서 받으라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야합니다.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
자녀들이 속상하게 할 때 부모님들이 "그렇게 말을 듣지 않으려면 차라리 집에서 나가라" 한다고 해서 부모의 본심이 정말 집을 나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고난을 받을 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고생시키길 원한다, 하나님 나를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닙니다. 그분의 본심은 우리를 사랑하여 미래에 희망을 주고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당하는 것, 고생하는 것, 매 맞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책망하는 것 채찍질하는 것도 본심이 아닙니다. 괴롭게 하시고 징계하시는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매맞고 바로 서라는 것입니다. 먼저 영혼이 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후에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를 때리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더 아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때리는 대신에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때리시고 우리를 복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복 주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우리가 기뻐하는 것. 행복해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복주시고 지키시고 은헤 베푸시기를 평강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민수기 6장 26절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하늘 보고 웃으며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 본심이 아니시지요?
제삼장 고난 중에 우리의 행위를 조사해보아야합니다.
“○ 40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유다는 이미 진노를 당하고 있습니다. 이미 매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시련 속에 있는 자는 무엇해야하는가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에게 지나온 길을 돌이켜 살펴보라고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의 책임을 내가 집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인정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잘못되어 징계를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필요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본심이 아닙니다. 우리를 복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알고 행위를 살펴보아야합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아이성을 공격하다가 패하였습니다. 여러 사람이 죽습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가 묻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너희를 살펴서 너희 속에 죄지은 아간을 제하라고 합니다. 스스로 정결케 하고 내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스스로 행위를 조사한다는 것은 한번 테스트해보는 것입니다. 조사해보면 옳은 것이 아닙니다. 사업해서 돈을 벌었는가, 했는데 조사해보니 적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온 관습을 조사해보고 살펴보아야합니다.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 조사해 보아야합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은가 조사해 보아야합니다. 어떤 장로님이 예배드리다가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그는 거의 죽음을 앞두고 이대로 죽으면 천당 못 간다고 합니다. 스스로 살펴서 오늘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도 좋게 해야 합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목표를 알아야합니다. 우리 모두 주께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손을 들어서 기도하자고 합니다. 손을 드는 것은 항복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합니다. 하나님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42. 우리의 범죄 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43.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유다는 주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고, 주께서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의 종이 회개의 메시지를 전해도 회개하지 않자 주님께서 몹시 노하셔서, 그들을 쫓으시고, 사정없이 죽이셨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고 포로로 잡혀간 것은 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44.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45.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46.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주님께서 구름을 두르셔서, 유다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죄를 회개하지 않으므로 하나님은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죄가 하나님의 귀를 막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를 막았습니다. 주님께서 유다를 뭇 민족 가운데서 쓰레기와 오물 더미로 만드셨습니다. 유다의 모든 대적이 유다를 보고서 입을 열어 놀려댔습니다.
“47.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유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폐허뿐입니다. 유다 백성의 도성 예루살렘이 파멸되니, 예레미야의 눈에서 눈물이 냇물처럼 흐릅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쉬지 않고 쏟아집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살피고 회개합니다.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갑니다. 이제 주님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립니다. 예수님은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하십니다.(눅 23:28)
제사장 예레미야는 고난 중에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51.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 52. 나의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예레미야는 예루사렘 도성에 사는 모든 여자가 겪은 일을 보니, 내 마음은 슬픔을 달랠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인권이 유린되었습니다. 까닭없이 예레미야의 대적이 된 자들이 새를 사냥하듯 예레미야를 쫓습니다.
“53.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54.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대적들이 예레미야를 산 채로 구덩이에 처넣고, 돌로 막아서 못 나오게 하였습니다. 물이 예레미야의 머리 위로 넘쳤으므로, ''나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습니다.
“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 하셨나이다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예레미야는 그 깊디깊은 구덩이 밑바닥에서 주님! 하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못들은 체 하지 마시고, 건져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미 예레미야의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를 구하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 원한을 풀어 주시고, 내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그의 모든 죄를 사하여주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웅덩이 속에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두려워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레미야는 고난을 아직도 당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에게 고난은 이제 저주가 아닙니다. 고난은 그에게 주신 축복합니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어 감사합니다. 나를 강하고 순수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나를 새롭고 거룩하게 하는 고난입니다. 미래가 있고 약속이 있는 고난입니다. 그는 많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들었습니다. 주님께서 예레미야가 당한 억울한 일을 보셨으니, 그에게 바른 판결을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60.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61.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치려는 그들의 적개심과 음모를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예레미야를 두고 하는 모든 야유와 음모를 들으셨습니다. 예레미야의 원수들이 온종일 그를 헐뜯고 모함합니다.
“63.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64.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예레미야의 원수들이 앉으나 서나, 늘 예레미야를 비난합니다. 예레미야는 이제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죄로 인하여 고난당한다고 합니다. 죄로 인하여 벌받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저주합니다. 예수님의 죄 때문에 저주받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래하며 조롱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음성을 들었습니다. 두려워말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주님이 그의 원수를 갚아주실 것을 믿습니다.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그들이 저지른 일을 그대로 갚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돌같이 하시고, 저주를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진노로 그들을 뒤쫓아, 주의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예레미야는 고난을 참고 견딥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고난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해야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이 우리를 복 주시고자 하는 마음을 알아야합니다. 고난을 통하여 자신이 변화되기에 힘을 써야합니다. 아멘!
출처: 천안 오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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