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유익이라 말하는 사람들
요즘 근무시간에 유기성목사의 설교를 반복 청취하고 있다. 설교는 굳이 영상이 아니어도 음성만 들어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유기성목사가 운퇴하기전 자신이 시무하는 교회에서 신자들을 향해 역설한 설교들은 한결같이 예수동행이다.
유기성목사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자신이 죽고 예수로만 살기로 결심하는 과정을 경험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이 이 땅에 사는동안 온전히 신앙을 지키는 길은 오직 예수동행 뿐이라고 굳게 믿고 이러한 운동을 전세계에 확산하기 위해 무리하게 조기은퇴를 결심했다고 하였다.
중생이라는 믿음의 과정은 개인과 하나님의 1:1만남이다. 중생은 제아무리 교육을 해도 성립할 수 없다. 오로지 체험으로만 가능하다. 흔히들 과거에 바닷가 동네 출신들이 수영을 배울 때 수영은 이론이 아니라고 말한다. 바닷물 속에서 놀다가 죽을 고비를 한번씩 경험해야 비로소 수영이 가능해 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내수영장이 도처에 널려있는 현재에 그러한 논리는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교육받은 전문 강사들의 지도를 통해 누구나 수영을 안전하게 배울수 있다. 하지만 한사람의 인간이 오로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중생의 과정은 교육으로만 가능하지 않다. 한때 한국교회에 제자훈련 바람이 휩쓸고 간 시대가 있었다. 두가지 목적이 있었다. 신자가 훈련되면 목사가 도움이 된다. 그리고 교회도 발전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론과 달리 한국교회는 정반대로 쇄락의 길을 걷고 있다. 목회자가 시범을 보이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유기성목사는 자신이 체험한 예수동행이라는 과정을 교육을 통해 모든 신자들에게 알리기 원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개인적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한계가 있다. 요즘 새벽마다 시편을 묵상중이다. 성경에서 가장 완젹한 인간을 꼽는다면 다윗일 것이다. 하지만 다윗역시 완벽하지 못했다. 성경은 다윗이 두번의 실수를 했다고 기록한다. 실수를 밥먹듯 하는 범부들에 비한다면 두번의 실수는 실수도 못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다르다.
다윗같은 사람도 실수를 한다면 나는 말할것도 없다. 흔한말로 명함도 못 내민다. 과연 예수동행이 가능한가? 유기성목사는 자신이 완전히 죽었다는 체험을 통해 예수를 만났고 그 뒤의 삶은 예수로만 동행하는 삶이었다고 고백한다. 결코 거짓일 수 없다.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신자가 그러한 체험을 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다윗은 시편을 가록하며 자신의 일생을 돌아볼 때 고난이 유익아었다고 회상한다.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직후부터 그는 사울왕의 시기를 받아 늘 죽움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하나님은 사울왕을 즉시 폐기하지 않았다. 10년 이상의 긴 세월동안 사울과 다윗은 쫒고 쫒기는 애증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바로 그 시간이 다윗을 더욱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완벽한 인간으로 다듬어준 시간이었다.
다윗의 실수는 고난받는 기간에 발생하지 않았다. 그가 왕이된 후에 발생했다. 만일 그가 계속 고난 속에 살았다면 그는 쥭는 날까지 단 한번의 실수도 범하지 않았을 것이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나는 매일 출근하여 하루 4시간씩 일을 한다. 금년에 배정된 업무는 복지관 주차관리이다. 복지관 주차장에 차단기가 없다보니 물밀듯 밀려들어오는 외부 차량의 주차를 막는 업무이다. 결코 선하지 못한 일이다. 어떻게든 주차하려는 사람들은 결코 만만히 물러나지 않는다. 어떻게든 주차를 하겠다는 사람과 어떻게든 그들을 쫒아내야 하는 업무는 영혼을 피폐하게 만든다. 결코 줄겁지 못하다.
때때로 내가 이 일을 꼭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느냐는 질문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떻게든 년말 까지는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만일 내가 처음에 취업한 직장에서 정년을 맞았다면 결코 현재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드물지만 간혹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렀던 현재의 상태가 고난이라면 그 고난이라는 현실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 마치 다윗이 통일된 왕국의 왕이 아니라 계속 사울의 집안과 쫒고 쫒기는 관계를 이어갔다면 실수하지 않았을 것처럼 말이다.
고난은 유익이다. 고난은 아무나 겪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만 고난이라는 경험을 하게 하신다. 그래야지만 그가 예수와 동행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고난의 삶을 살게하시는 하나님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신뢰하지 못하도록 하는 나의 모습이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