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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박사들의 경배
마 2:1-12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마 2:1-12 / [아기를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 예수께서는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을 때는 헤롯의 통치시절이었다. 그때에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와서 물었다. 2)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먼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드리러 왔습니다.' 3) 헤롯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불안해했으며 온 예루살렘 사람들도 이 소문을 듣고 술렁거렸다. 4) 헤롯왕은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을 다 불러모아 놓고 물었다. `예언자들은 메시야가 어디서 탄생한다고 하였는가?' 5) 그들이 대답하였다. `유대 베들레헴입니다. 예언자 ㄴ) 미가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ㄴ. 미5:2) 6)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비록 유다 족속의 작은 마을이지만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나의 사람이 네게서 나올 것이다.' 7) 헤롯은 은밀히 박사들을 불러서 별이 언제 나타났었는가를 물은 뒤에 이렇게 말하였다. 8)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를 찾아보시오. 그리고 아기를 찾아내거든 내게 알려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 9) 박사들은 왕을 만난 뒤에 곧 길을 떠났다. 그런데 그 별이 다시 나타나 그들보다 앞서 가다가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있는 곳에 멈추었다. 10)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하였다. 11) 그들은 아기와 어머니 마리아가 있는 집으로 들어가서 엎드려 아기에게 경배드리고 보물상자를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12)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러 헤롯에게 보고하지 않고 그대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 꿈에 다른 길로 가라고 이르셨기 때문이었다.
본문은 예수의 베들레헴 출생이 성경의 예언이 실현된 것임을 밝혀서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아기 예수가 메시야임을 알아 경배하러 찾아온 동방박사들의 방문까지 더해져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이 더욱 강조됩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1-3) 동방박사는 당시의 최고 지성인들로 철학, 과학, 의학, 천문학 등에 능통한 과학자들이었을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사제로서 정치 지도자들의 고문 역할을 담당하던 인물들로 추측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인 별을 보고 예루살렘의 헤롯 궁에 찾아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그들의 질문은 권력의 이동에 매우 민감한 예루살렘을 큰 혼란에 빠뜨립니다. 하늘은 고요한데, 땅은 시끄럽게 떠들어대며 술렁거립니다. 유대인의 왕을 찾아온 이방인들은 설렘으로 가득한데, 정작 유대인들은 혼돈과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왕도,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도 모두 예수의 탄생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유대 베들레헴이오니(4-6) 메시야가 오신다는 약속과 유대인들이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것을 잘 알던 헤롯 왕은 위기감을 느낍니다. 불안한 그는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을 모아 그리스도의 출생지를 찾아내려 합니다. 곧바로 유대 베들레헴이 지목됩니다. 6절은 마태의 두 번째 구약 인용구로 미가서 5장 2절의 변형된 인용입니다.
내게 고하여(7-8)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를 찾기 위한 헤롯의 노력이 시작됩니다. 아기가 태어난 시간을 알기 위해 동방박사에게 물은 헤롯은 아이가 태어난 곳까지 알기 위해 거짓말을 하여 동방박사를 베들레헴으로 보냅니다.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9-12) 뜻밖의 장소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찾아낸 동방박사들은 크게 기뻐합니다. 그리고 메시야이신 예수께 왕을 만날 때 하는 예법을 갖춰 예물을 드리며 경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헤롯을 만나지 않고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태어나신 예수께 경배한 사람들은 권력자나 메시야가 태어날 곳을 잘 알던 종교인이 아니었습니다. 천한 신분의 목자들(눅 2:15-21)과 본문에 나오는 이방인들(동방박사)이었습니다.
적용: 당신은 지금도 당신의 마음에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 설 교 >
성탄의 날을 가장 기뻐한 사람들
마 2:10-12 / 이만호 목사 뉴욕순복음안디옥교회 담임
현대인이 살면서 가장 중요한 힘의 원천은 기쁨입니다. 성경에서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동방 페르시아에서 천체를 연구하던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이자 메시야이신 예수님의 탄생 장소를 찾게 해준 별을 보고 기쁨이 넘치는 상태의 최상급 표현인 10절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별을 바라보되 메시야 별을 보고
끝까지 따라가되 예수님계신 곳까지 가라”
과연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으며 그들의 꿈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통해 은혜받기 원합니다.
1. 동방박사들은 별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2절)“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9절)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동방박사들은 그 멀리 동방 페르시아 머나먼 길을 오직 별만을 바라보며 왔다는 것입니다. 지도를 보거나 나침반을 보며 온 것이 아니라 별만을 보고 왔다는 것입니다. 땅을 바라보면 떨어진 동전을 주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보면 태양과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볼 수 있습니다.
무수한 별들 가운데 메시야 별 주목
하늘을 바라보는 성도의 영적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삶 살 수 있어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막연히 수를 셀 수 없는 별들을 바라본 것이 아니고 2절을 보면 “그의 별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온다”(민수기 24:17)고 했습니다. 그 한별은 곧 메시야를 지칭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가리켜 “어둠 비추는 샛별”(벧후 1:19) , “광명한 새벽별이 되신다”(요한계시록 22:16)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동방박사들은 메시야 즉 탄생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누가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땅만 바라보지 않고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눈을 더 높이 들어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위를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안드로포스”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진술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악한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을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1-6)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만, 세상 것만 바라보고 살지 말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어둔 밤 하늘을 비추는 새벽별 같은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 가십시다. 거기에 별빛같이 죄용서의 빛, 사랑의 빛, 치료의 빛, 축복의 빛, 영생의 빛, 성령 충만의 빛이 임할 것입니다.
2. 동방박사 세사람(가스팔, 메키올, 발자갈)은 기쁨으로 보배합을 열어 예물을 드렸습니다.
(11절)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황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하나는 마리아는 절대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불원천리 찾아온 것은 메시야이신 별을 바라보고 아기 예수께만 경배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마리아는 위대한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신앙과 덕은 존경받기에 넉넉하지만 경배의 대상은 아닙니다.
또 하나는 동방박사들이 예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박사들이 드린 예물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이었습니다. 황금은 왕되신 예수님께 드린 최고의 예물, 가장 귀한 변치 않는 가치로 쓰임 받는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지방에 있는 나무의 송진으로 만든 향료입니다. 유향은 돌로 만든 향대에 넣고 불을 지피면 그 향기가 집 안팎에 퍼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유향의 향기는 널리 퍼집니다.
내 손의 물질은 '사유재산 가치' 불과
주님께 내놓을 때 '예물가치'로 승화
예물드린 동방박사의 영적자세 본받길
아기 예수께 유향을 드리는 것은 제사장이신 주님께 드린 선물입니다. 몰약은 시체에 바르는 방부제였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몰약 드린 것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위한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보고 그냥 기뻐한 것만은 아닙니다. 의미 있고 귀한 예물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제아무리 귀한 것도 내가 지니고 있으면 사유재산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께 드리면 예물, 성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최고의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귀한 진리는 지금 당장 내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 생애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드립시다.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것을 드립시다. 하나님께 받기만 하지 말고 드리는 사람이 됩시다.
3. 가장 크게 기뻐했던 동방박사들은 다른 길로 그들의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12절)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헤롯은 본래 에돔 사람으로 안티파테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주전 40년 유대의 왕이 되었는데 10명이나 되는 아내를 거느린 불륜의 왕이었습니다. 그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를 보러 왔다는 박사들의 말을 듣고 소동을 벌인 것입니다. 헤롯은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는 이유로 첫 번째 아내 도리스와 아들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기가 있다는 얘기는 청천병력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장 13절에는 아기예수를 죽이려 했고, 16절을 보면 베들레헴 근교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영아들을 모조리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천사가 지시한 다른 길로 돌아간
동박박사의 결단은 생명길 있음을 예시
"생명과 진리의 길인 예수님 만 따라가야"
하나님께서는 박사들에게 헤롯왕을 두 번 다시 만나지 말고 다른 길로 돌아가라는 계시를 주셨고 박사들은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길은 많습니다. 지름길로 가는 길이 있고, 돌아가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외면하면 안되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안가면 정말 큰일 날 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가야만 하고 그 길을 가야만 사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길입니다. 예수님 말씀 하시길 “내가 곧 길이라”고 했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처럼 만나선 안될 헤롯이 있다면 피해서 다른 길로 가야만 삽니다.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경배하고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전도하며 증거해야 합니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우리 예수님입니다. 내 삶의 최고 주인공으로 모시고 살 분은 오직 우리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성탄절은 의미가 없습니다. 동방박사들처럼 별 되신 예수님 만을 바라보십시오. 그분께 예물을 드리고, 길 되신 주님만을 믿고 따라 가는 모든 성도되시길 구원주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세가지 선물의 의미
마태복음 2:9-12 / 김태환 목사
세계 제1차 대전이 유럽에서 한창일 때, 미군과 독일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인지 한 독일군 병사가 참호 밖으로 나와서 미군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미군이 쏜 총에 맞았습니다. 부상을 당한 독일 병사는 다시 자기 쪽 참호로 가려다가 가시철망에 걸려 꼼짝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피가 솟구쳐 나오며 그 독일군 병사는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한 미군 병사가 자기 참호에서 기어나와서 그 독일 병사 쪽으로 다가갔습니다. 순간적으로 양쪽의 군인들은 총을 쏘는 것을 멈추고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을 숨을 죽이고 바라 보았습니다. 갑자기 사방이 조용해진 상황에서 미군 병사는 가시철망에 걸린 독일 병사에게 다가가서 그를 부축해서 독일군 진영(陣營)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군 병사는 미군 진영으로 걸어 왔습니다. 그 때까지 양쪽은 그 광경을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볼 뿐 누구도 총을 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독일군 진영에서 한 병사가 독일말로「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부르는 찬송가는 바람을 타고 미군 진영에 들려왔습니다. 미군 병사들이 그 찬송가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믿을 수 없는 일이 양쪽 진영에서 벌어졌습니다. 양쪽 군인들이 모두 참호 바깥으로 걸어 나온 것입니다. 양쪽 병사들을 가로막고 있는 가시 철망이 걷혀지고 두 나라의 병사들이 어깨를 마주하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불렀습니다. 먹을 것이 떨어진 독일 병사에게 미군들은 가지고 있던 양식을 성탄절 선물이라며 나누어주었고, 미군 군의관들은 부상당한 독일군 병사들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악수를 하고 서로가 반대 방향으로 헤어졌습니다. 그 두 나라의 병사들은 성탄절을 맞아 가장 큰 선물을 주고 받은 것입니다. 참으로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언은 벌써 수 백년 전에 많은 예언자들에 의하여 선포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공부를 많이 한 지식인들과 예언자들, 성경을 많이 읽은 사람들은 메시야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에 초대를 받았던 사람들은 두 종류의 사람들밖에 없었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 시간에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들은 빈민층이었고, 그 사회의 주류계층(主流階層)이 아닌 소외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동방에서 별과 우주를 연구하던 박사들 이었습니다(Magi from the East). 이「동방의 박사들」은 “현자들(賢者, wise men or magi)” 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동방에서 왔는데, 정확하게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습니다. Magi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 Magi라는 말이 예전에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메대(Medes)에 살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Magi들은 당시에 최고의 지성인들로서 철학, 의학, 그리고 자연과학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특히 별을 보고 인간과 세계의 운명을 예측하는 예언자들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이들이 천박한 점성술가들로 전락했지만, 원래 이 Magi들은 선하고 경건한 사람들이었고, 동시에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세기 유대 역사가였던 요세푸스(Josephus)나 2세기 로마의 역사가인 타시투스(Tacitus) 같은 사람들은 그 당시의 세속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이지만 예수 당시 페르시아를 중심한 그 지역의 학자들 사이에 유대나라에 위대한 왕이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강하게 일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세기 대표적 천문학자였던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는 예수님께서 나신 B.C. 6년 봄 경에 두 개의 큰 별 목성(Jupiter)과 토성(Saturn)이 한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계산해 냈습니다.이와 같은 일은 794년마다 한번씩 나타나는 희귀한 현상이라는 것도 밝혀냈습니다.연구 결과 그 당시에 점성학에 탐닉했던 과학자들은 이런 현상과 함께 전대미문의 중요한 사건이 나타날 것을 나름대로 예측했고 이들은 그 시간을 고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알아냈습니다.목성은 우주의 통치자를 상징하는 별이고, 당시 동양에서는 토성을 팔레스틴을 지칭하는 별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그리고 이 두 별이 함께 자리잡고 있는 별의 무리가 물고기처럼 보인다고 해서 물고기 자리라고 부르는데, 물고기는 말세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되어지고 있었습니다.그래서 이들은 말세에 팔레스틴에서 위대한 통치자가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 러트거스(Rutgers)대학 물리학 연구소장을 지냈던 마이클 모나(Michel Molnar) 박사는「 베들레헴의 별 : 동방박사들의 유산」 이라는 그의 책에서 동방박사들에게 보였던 그 별의 밝은 빛은 달과 목성이 일직선으로 겹쳐졌던 현상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었을 것이라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2천년 전 예수 탄생 당시의 천체 상황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재구성한 결과 마태복음 2장 2절에서 언급한 “동방에서(in the East)” 일어난 상황은 양(羊))자리 성좌에서 목성과 달의 겹침이었음을 알아냈습니다. 컴퓨터는 그 현상이 기원전 6년 4월17일에 일어났다고 계산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기 6년에 시리아지역에서 발행된 동전에 푸른 빛이 감도는 반짝이는 별과 양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 사실 역시 그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모나는 당시 점성가들은 유대의 왕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잘 알고 있었으며 하늘을 바라보며 메시아의 강림을 기대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그들은 양자리에서 보여지는 현상을 메시야의 탄생의 신호라고 여겼다고 했습니다. 또한 모나는 동방박사들은 단지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빛을 따라 갔던 것이 아니라 이미 유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특별한 천체현상을 알고 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모나의 베들레헴의 별에 대한 이런 독창적인 연구는 미국의 천문학자들과 기독인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얘기들입니만,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인 윌리암 버클리 목사는 동방박사와 베들레헴의 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시(詩)를 거칠고 생기없는 산문(散文, prose)으로 바꿀 필요가 없다.” 베들레헴의 별과 동방박사 이야기에 담긴 꿈과 낭만과 신비를 애써 설명하려고 함으로써 깨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별과 동방박사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이미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저의 마음에도 소중한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과학(科學)이라는 이름 아래 파 헤쳐지고, 분석되고, 실험되고, 증명되어야 믿는 이 시대에, 꿈과 상상력이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꿈과 상상력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동방박사 이야기는 많는 예술가들에게 영감(靈感)을 주었습니다. 누가 그렸는지 모르지만 갓쓰고 두루마기 입은 한국적 동방박사 그림도 있습니다. 17세기에 활동했던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라는 유명한 네델란드 출신 화가가 있습니다. 그는 드물게도 성경 이야기만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화가였습니다. 그는 주로 빛과 어두움을 그림의 기법(技法)으로 사용했습니다. 렘브란트로 역시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찾아 경배하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을 가만히 보면 두 가지 세계가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동방박사 위에 눈부시도록 밝은 빛이 하늘로부터 비취고 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 뒤에 서 있는 헤롯과 그의 부하들은 짙은 어두움 속에 갇혀 있습니다. 헤롯은 아기 예수를 향해 거만한 자세로 서 있지만 그 마음속에는 걱정과 불안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동방박사가 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 드렸던 예물이 3가지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설에 의하면 동방박사는 본래 캐스파(Caspar) 멜키올(Melchior), 발타잘(Balthasar), 알타반(Altaban) 이렇게 네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옛 성현들의 예언을 상고하고 별을 연구하면서 유대 땅에서 구세주 왕이 곧 태어나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 왕을 찾아 뵙고 경배하기 위해 이들은 페르시아로부터 유대땅을 향해 멀고 먼 길을 함께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사정이 생겨 알타반은 하루 늦게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루 늦은 알타반이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바삐 가는 도중에 길에 쓰러져 있는 병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노상에서 그를 돌보느라 지체하는 바람에 알타반은 일행을 끝내 만나지 못하고 혼자 사막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한 알타반은 어느 집에 들어가 아기를 재우고 있는 여인으로부터 동방에서 세 박사가 와서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고 떠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도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침 그때 밖에서 로마 병정들의 창검소리와 여인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집집마다이 아기를 찾아 죽이는 병정들이 이 집에 닥쳤을 때 알타반은 아기를 살리기 위해 품고 있던 붉은 루비를 병정들에게 내주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알타반은 이 거리 저 거리 아기 왕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넓은 애굽 천지 방방곡곡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굶주린 사람을 만나면 먹을 것을 주었고, 헐벗은 사람에게는 옷을 주었고, 병든 사람을 만나서는 돌보아 주고, 갇힌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검은 머리가 백발이 되었고, 왕을 만나뵙기 위해 집을 떠난지 33년, 어느 덧 그의 나이가 70이 넘었습니다. 왕께 드릴 세가지 예물을 가져왔지만, 루비는 아기를 구하기 위해 썼고, 청옥은 그동안 지내느라고 썼고, 이제 진주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때 그가 찾고 있는 왕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 보니 유월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왠지 우울한 분위기가 예루살렘에 감돌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니 오늘 두 강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데 사람들이 메시야라고 믿어온 예수라는 사람도 같이 십자가에 못박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알타반은 “그 예수라는 사람이 혹시 내가 평생토록 찾던 그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사람들에 밀려 성문 밖 사형장으로 나가다가 알타반은 한 남자에게 끌려가며 울부짖는 어린 소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나 좀 살려주세요. 날 노예 삼을려고 끌고 가요." 알타반은 왕께 드릴 마지막 예물을 꺼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안된다는 생각에 한참 망설였지만 마침내 알타반은 그 소녀를 구하기 위해 진주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 지며 땅이 흔들렸습니다. 지붕 위의 무거운 기왓장이 떨어지면서 늙은 알타반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알타반은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은은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알타반의 힘없는 입술이 움직였습니다. "주님, 그럴수 없습니다. 언제 제가 주께서 배고파하실 때 음식을 대접하였고, 목말라 하실 때 마실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께서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드렸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 보았고 ,병드셨을 때 돌보아 드렸습니까? 저는 주님을 섬기기는 커녕 뵙지도 못했습니다." 알타반은 더 이상 말할 기운이 없었습니다. 그 때 은은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이번에는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들렸습니다. "지극히 적은 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내게 행한 것이니라." 알타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 이야기가 러시아에 민담(民譚)으로 전해 오고 있습니다. 참 감동적인 이야기이지요?
다른 세 박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가지고 온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가지 예물이 예수님의 사역과 업적(業績)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첫째로, 황금은 왕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황금을 가지지 않고는 누구도 왕에게 나아갈 수 없는 관습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를 영접하고 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애를 그는 통치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시기를 원하시지만 절대로 힘으로 우리를 정복하지 않습니다. 그대신 사랑와 섬김으로 우리의 마음의 왕좌(王座)를 차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왕 앞에서 그러는 것처럼, 사랑과 섬김의 왕이신 그분 앞에서도 우리는 순종과 복종을 드려야 합니다. 나폴레옹과의 해전(海戰)에서 명성을 날린 넬슨(Nelson, 1758-1805) 제독(提督)에 대한 일화가 많습니다. 넬슨이 언제나 패장(敗將)에게 친절과 예의로 관용을 베푼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한번은 한 패장이 넬슨 앞에 인도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넬슨의 소문을 듣고 있었던지라 자기에게도 관용을 베풀 것을 기대하고 먼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습니다. 그 때 넬슨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칼을 먼저 건네고 그 다음에 악수를 청하시오.”
그렇습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하고 그가 내 인생을 다스려 주시기를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무장(武裝)을 해제(解除)해야 합니다. 자기가 믿고 의지하고 있는 것들을 그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으로 예의(禮儀)를 갖추어야 합니다.
둘째로, 유향(incense)은 제사장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성전예배에서 항상 향기가 좋은 유향이 사용되었습니다. 박사들이 유향을 예수님께 드린 것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임무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리를 놓아 준 것입니다. 히브리서 10:20에 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a new and living way)” 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오직 그 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교양으로? 우리의 지식으로? 아니면 다른 종교를 통해서?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은 우리의 중보자(仲保者, mediator)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밖에 없습니다. 차를 몰고 길을 가다가 보면 “막힌 길(dead end)” 이라고 씌어있는 팻말을 볼 수 있습니다. 혹시나 하고 들어가 보면 역시 길이 막혀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 길”이라는 말씀의 뜻이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의 모든 길들은 “막힌 길들” 입니다. 그 길이 맞겠거니 하고 들어갔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나와야 합니다.
셋째로, 몰약(myrrh)은 죽은 자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몰약은 시체를 썩지 않도록 바르는데 사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막 10:45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해 대속물로(as a ransom)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 베드로는 훗날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가 과거의 헛된 삶에서 구원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베드로전서1:18-19).”
교회력(Church calendar)에 의하면 다음 주일(1월6일, 2002년)은 동방박사가 예수님을 방문한 날로 기념합니다. 새해 첫 주일로 이 날을 주현절(主顯節, Epiphany)라고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찾아와 경배를 드렸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유럽에서는 이 날이 되면 "왕관(王冠, La couronne des rois)" 이라는 빵을 사서 먹는다고 합니다. 큰 케이크 속에 왕을 상징하는 마스코트를 숨겨놓고 케이크를 잘라서 먹을 때 그 마스코트가 들어 있는 부분을 먹게 되는 사람이 왕이 되어서 왕관을 쓰는 풍속을 지키면서 동방박사가 이 세상에 오신 왕께 경배한 것을 축하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문 11절에 “박사들은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고 했습니다. NIV 성경에 보니까 이 말씀의 의미(意味)가 보다 분명하게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They opened their treasures and presented him with gifts of gold and of incense and of myrrh.”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보배합을 열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고 부르면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보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생명이라고 부르면서 소유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지혜라고 부르면서 열망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부요하다고 부르면서 추구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영원하다고 부르면서 바라보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신실하다고 부르면서 신뢰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고 부르면서 섬기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영광되다고 부르면서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고,
너희는 나를 공의롭다고 말하면서 두려워하지도 아니하니,
내가 너를 정죄하거든 나를 비난하지 말아라.
정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진정으로 그분을 위해 헌신하지 않는 우리 시대에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던 동방박사 이야기는 계속해서 들려져야 합니다.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마 2:9-12 / 김경년 목사
미국의 보스턴시 옆에 소머빌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성탄을 기념하기 위해서 시 당국에서는 시청 앞 광장에 첫번 성탄절의 모습을 재현시켜 놓았습니다. 작고 초라한 마구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마리아, 그의 남편요셉,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 동방박사들의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첫번 성탄절의 모습은 작은 도시의 새로운 명물이 되어서 시 당국에서는 성탄절 날 성대하고도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가지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성탄절을 며칠 앞둔 어느날 밤에 어떤 장난꾼이 아기 예수를 훔쳐가 버렸습니다. 마리아, 요셉, 양 치던 목동들, 동방박사들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단지 성탄의 주인공인 아기 예수만이 없어진 것입니다. 당황한 시 당국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계속 그 사실을 알리면서 아기 예수를 제 자리에 갖다 놓아줄 것을 호소했습니다.
드디어 그 장난꾼의 마음이 움직여졌는지 아기 예수는 성탄절 이전에 다시 자기 자리에 놓여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모두에게 무언의 귀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무슨 교훈이겠습니까? 아무리 성탄절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지고, 멋진 선물이 있다 할지라도 정작성탄의 주인공이신 아기 예수님이 안 계신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탄절을 앞두고 성탄의 주인공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도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이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먼 길을 떠났습니다.
마태복음 2:1-2절 말씀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여기서 "동방"이란 어디를 말합니까? 바벨론 지역을 말합니다. 바벨론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아라비아 사막을 건너야 합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위험이 있었습니다. 강도의 위험, 질병의 위험, 사막의 위험, 강의 위험, 짐승의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먼 길을 아기 예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는 유일한 목적을 가지고 멀고 먼 길을 나선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모든 어려운 환경도 이겨냈습니다. 예수님 만나는 일이라면 어떤 댓가를 지불하여도 괜찮다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섬긴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를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잘 섬길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했던 사람들은 자기를 포기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도 도심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이 교외로, 혹은 가까운 지역으로 이사를 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이사한 근처에도 교회가 많은데 하필 이 교회까지 나옵니다.
다른 교회에 예수님이 안계시는 것이 아닌데 먼 거리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서 나옵니다. (은평구 불광동, 화정, 일산, 분당, 의정부, 상계동 등등) 이분들을 보면 동방에서 예수님을 찾아 먼 길을 떠났던 동방박사들 같이 여겨집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만나는 심정으로 열심히 나오고 있습니다. 가까이에서 섬기는 분도 복을 받아야 하지만 멀리서 오시는 분은 더 많은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본문 11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동방 박사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부귀와 명예를 소유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지식과 부귀와 명예가 있는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학문적 호기심이나, 정치적 목적, 또는 개인적 욕망을 위해서 아기 예수께 나온 것이 아닌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먼 길을 힘들게 찾아온 것은 오직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면 복을 받는다", "아기 예수를 만나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올라간다, 인정을 받는다, 박사가 된다", "아기 예수를 만나면 명예와 권세가 올라간다."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와서 할 수 있었던 것이 뭐냐?
오직 한 가지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메시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하기 위해서,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 경배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교회에 올 때 ‘나는 아기 예수께 경배하러 간다’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나님께 칭찬받습니다. 우리 신앙은 절대 거래가 아닙니다. 부모와 자녀간에는 거래하면 안되요. 요즘 아이들이 하도 밥을 안먹으니까 ‘밥먹으면 뭐 사 줄게’ 이렇게 거래를 합니다. 안먹으면 가만 두세요. 배고프면 먹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거래하면 안됩니다. 자식이니까,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교육 시켜 주신 부모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효도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거래가 아닌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2절에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 말은 어떤 조건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경배하러 왔노라.
과연 어떤 마음으로 우리가 성탄을 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생각해 봐야 될 것입니다.
원래 "크리스마스"란 어떤 뜻입니까? 이 말은 "그리스도"와 "경배"란 말의 합성어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께 경배한다", "예수님께 경배한다." 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놀고 즐기는 날이 아닙니다. 술 취하고 방탕하게 보내는 날이 아닙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 드리는 날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께 경배드리는 날, 그 아기 예수를 찬양하는 날, 예배드리는 날, 높여드리는 날, 자랑하는 날, 경배하는 날. 이 날이 크리스마스인 것입니다.
제가 전에 지방에서 목회할 때 크리스마스 전야제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해서 발표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 아이가 연습할 때는 참 잘했는데 발표하기 위해 무대위에 올라가서는 몸을 양 옆으로 비꼬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발표가 간신히 끝나갈 무렵 그 아이는 쏜살같이 뛰어 나갔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아이는 소변이 마려웠는데 발표를 망칠까봐 참고 또 참았던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그 마음에 예수님께 드리는 발표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 상반절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여기서 "경배한다"는 것은 뭡니까? "몸을 던져 엎드렸다" 그 말입니다. 지식도 있는 사람이, 부귀도 있는 사람이, 명예도 있는 동방 박사들이,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 아주 어린 아기 예수, 피 덩어리 같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했어요. 아주 절하면서 경배했습니다.
예배가 뭡니까? 경배하는 겁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은 지금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편안하게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몸은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계시지만, 여러분의 마음은, 예배드릴 때의 마음의 자세는 뭡니까? 항상 엎드린 자세, 하나님 앞에 굴복한 자세,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만 높이는 예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릴 때, 그 예배가 주님이 흠양 하시는 예배, 응답하시는 기도가 되는 줄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뭐냐? 예배드리는 마음의 중심이 뭐예요?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교회 나와서 엎드리는 것입니다. 경배는 엎드리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보고 엎드려 아기 예수께 경배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모든 지위와 체면 그리고 자존심을 다 버렸습니다.
아기 예수 앞에 완전히 그들은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경배인 것입니다.
그리고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귀한 예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마태복음 2장 11절 하반절에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세 가지 예물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첫째 드린 것은 황금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상징합니다. 황금은 왕을 상징합니다.
둘째로 드린 것은 "유향"입니다. 이것은 제사 때 사용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실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드린 것은 “몰약”입니다. 이것은 시체 보존을 위해 쓰는 것입니다. 산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모든 죄를 지시고, 나의 죄, 너의 죄,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그렇게 매 맞으시고, 그렇게 가시관 쓰시고, 양손과 양발에 못 박히시고, 죽으실 것을 벌써 알고 몰약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동방 박사들은 예수님을 인류의 구세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제 며칠 후면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성탄절입니다.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성탄절에 주님을 만나는 귀한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탄생하신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는 성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동방박사들처럼 아기 예수님께 귀한 예물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탄 계절에 주님의 복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동방박사들의 경배
마 2:9-12 / 박상훈 목사
뜻깊은 성탄주일을 맞이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성탄을 맞이하는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동방의 박사들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그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아울러 우리는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이며,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이며, 그들이 몇 명이나 왔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들이 어떤 옷을 입었으며, 그들이 무엇을 타고 왔으며, 그들이 어떤 길로 왔으며, 그들이 얼마나 걸려서 왔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이 여기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단지 그들이 동방에서 왔다는 사실과 그들이 박사라는 사실만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왜 성경은 그들에 대해서 이토록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있을까요? 성탄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동방의 박사들은 큰 기쁨으로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엎드려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아서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오늘 우리도 큰 기쁨으로 성탄을 맞이합시다. 우리도 엎드려 우리 구주 예수님께 경배하고, 우리의 보배합을 열어 예물을 드립시다. 그리고 우리도 이제부터는 날마다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으면서 살아갑시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동방 박사들이 보여주었던 큰 기쁨을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드렸던 경배를 살펴보겠습니다. 셋째, 동방 박사들이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간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옛날 메시야의 별은 동방의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에게로 인도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간 우리 구주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 모두를 두루 비추어주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 빛이 우리 모두를 큰 기쁨과 깊은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주기 바랍니다.
첫째로, 동방 박사들의 기쁨입니다(9~10절).
마2: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동방의 박사들은 헤롯 왕의 말을 듣고서, 유대 베들레헴으로 출발했습니다. 헤롯 왕은 그들에게 “유대인의 왕,” 곧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동방의 박사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베들레헴을 향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주로 밤에 여행을 떠났습니다. 뜨거운 햇볕이 내려 쬐는 낮에는 쉬고, 서늘한 밤에 별을 따라 방향을 정하고 여행을 하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습니다. 따라서 그들도 밤에 베들레헴으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곧이어 오늘 본문은 메시야의 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때 동방의 박사들이 보았던 별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헬리 혜성이었다, 목성과 토성이 결합한 것이었다, 또는 그 때 하나의 새로운 별이 나타났다, 등등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야의 별에 대해서 세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그 별은 사라졌다가 “문득” 다시 나타났습니다. 둘째, 그 별은 동방 박사들을 “앞서” 인도했습니다. 셋째, 그 별은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 위에 “머물러” 섰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보통의 별들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가면, 별들도 함께 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면, 별들도 함께 섭니다. 그런데 메시야의 별은 동방 박사들의 발걸음을 앞서 인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별은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 위에서, 그대로 머물러 섰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들을 통해서, 메시야의 별은 하늘에 떠있는 보통의 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메시야의 별은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로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갈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낮에는 구름 기둥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불 기둥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난 광채가 앞서 가면서 그들의 갈 길을 인도해주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을 보면, 들에서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온 빛이 목자들을 두루 비추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때도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밝게 떠올라, 동방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에게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발의 등이요, 우리 길에 빛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늘 하나님의 말씀이 비추어주는 밝은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2: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오늘 본문은 반복해서 동방 박사들의 큰 기쁨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우리는 이 단어들을 통해서, 동방의 박사들이 메시야의 별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서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바야흐로 곧 그들은 여행의 목적지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은 하나님이 친히 그들을 인도해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런데 이와 같은 기쁨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전연 없었습니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들도 기뻐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이방 사람들이었던 동방 박사들보다도 오히려 더 기뻐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연 기뻐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앞에 있는 3절 말씀을 보면, 헤롯 왕과 더불어서 온 예루살렘은 그저 소동만 했을 뿐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의 삶이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돈걱정, 자녀걱정, 사업걱정 등등 세상의 온갖 염려들에 둘러싸여서, 계속해서 한숨만 내쉬고 있지는 않습니까?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가리키는 별만 보고도, 그들은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하물며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최고의 기쁨으로 성탄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내어놓으시고, 낮고 낮은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러,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최대의 기쁨으로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동방 박사들의 경배입니다(11절).
마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집에 들어가.” 눅2:16을 보면, 들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은 마구간의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님을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동방의 박사들이 마구간(stable)이 아니라, 아기 예수님이 계시는 “집”(house)에 들어갔다고 기록합니다.
말하자면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여러 날이 지난 후에, 동방의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이 때는 호적을 마친 사람들이 각자의 마을로 돌아가고 난 뒤였습니다. 그러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여관에 있을 곳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집에 머물고 있을 때, 동방의 박사들이 그들을 찾아왔습니다. 따라서 짐승들이 있는 마구간에서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리며, 그 옆에서 목자들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그림은 성경적으로는 정확하지 못합니다.
아무튼 그 때 동방의 박사들은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이 그의 어머니 마리아의 품안에 안겨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즉시 동방의 박사들은 엎드렸습니다. 이 때 그들은 무릎만 꿇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서, 아울러 그들의 머리를 땅에 대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서 경배라는 단어는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사용됩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경배하고자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자기도 사람이기에 경배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사도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에게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하라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또한 천사도 경배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경배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동방의 박사들은 헤롯 왕에게도, 요셉에게도, 마리아에게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코 경배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에게 경배하지 않고, 마리아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일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며, 우리와 똑같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결코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오직 아기 예수님에게만 경배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엎드려 예수님에게 경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세세토록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말씀하기를, 동방의 박사들이 보배합을 열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길을 떠나기 전에, 미리 보배합을 준비해서 왔습니다. 그들은 즉흥적으로 자기들의 지갑에서 몇 푼 끄집어내어서, 아기 예수님에게 던져준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뵈러 나올 때는 준비해야 합니다. 아니 사람을 만나러 나갈 때는 준비하면서, 왜 예수님께 경배하러 나올 때는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습니까? 성경책도 준비하고, 헌금도 준비하고, 몸가짐과 마음가짐도 미리미리 준비해야만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미리 준비한 보배합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아기 예수님에게 예물로 드렸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드린 예물들은 매우 귀하고도 값진 것들이었습니다. 아울러 이 예물들은 상징적인 의미도 갖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 불렀던 찬송가 116장은 이와 같이 노래합니다. “베들레헴 임금께 나는 황금 드리네 영원토록 모든 백성 다스려 주소서.”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합니다. 말하자면 황금은 왕이신 예수님에게 드려진 것입니다.
“거룩하신 구주께 나는 유향 드리네 만국 백성 찬송 드려 만유 주 섬기세.” 출30:37 말씀을 보면, 본시 유향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말하자면 유향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드려진 것입니다.
“주의 죽을 몸 위해 나는 몰약 드리네 세상 모든 죄인 위해 십자가 지셨네.” 요19:39 말씀을 보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하여 몰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몰약은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합니다. 그러니까 몰약은 사람이신 예수님에게 드려진 것입니다.
물론 동방의 박사들은 그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드린 예물의 상징적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그들은 아기 예수님에게 매우 적절하고도 상징적인 의미가 담긴 귀한 예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예물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뒤에 헤롯 왕의 박해를 피해서, 아기 예수님의 가족은 애굽으로 피난을 가셔야만 했습니다. 아마도 그 때 이 예물들은 매우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대상16:29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제물을 들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여기서의 제물은 예물을 의미합니다. 예물을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한 요소입니다. 빠져서는 안 될 요소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이 시간 우리도 엎드려 예수님께 경배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보배합을 열어서, 정성이 담긴 예물을 예수님에게 드립시다.
만일 우리가 대통령에게 줄 선물을 마련한다면, 우리는 온갖 정성을 다해서 그것을 잘 준비할 것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어찌 우리가 아무런 정성도 없이 되는 대로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은 새 돈이 들어오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고 모아 두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새 돈이 없으면, 헌 돈을 깨끗이 다림질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께 정성을 다해서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고후8:8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고자 함이로라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하나님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드렸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 교회에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써,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진실함이 증명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쏟으셨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우리도 엎드려 예수님에게 경배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정성이 담긴 예물을 드림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실함을 증명해 보입시다.
셋째로, 동방 박사들의 귀국입니다(12절).
마2:12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 당시 사람들은 주로 밤에 여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도 밤에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들은 이른바 메시야의 별을 보면서, 그 별이 인도하는 대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불과 8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걸어가더라도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게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은 이른 밤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서 경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여행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평안한 심정으로 잠자리에 들었을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받은 계시의 내용은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은 동방 박사들에게 아기를 찾거든 그에게 돌아와서 고하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자기도 아기에게 경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속셈은 아기를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동방의 박사들은 헤롯 왕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헤롯의 속셈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방 박사들의 꿈에 나타나셔서,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고 그들에게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해서, 동방의 박사들은 다른 길로 자기들의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서, 헤롯에게로 돌아갔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 길은 사망의 길이며, 멸망의 길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왔던 길, 우리가 잘 아는 길로 되돌아가는 것이 쉽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길이라고 방심할 때, 쉬운 길이라고 자만할 때, 그리고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길을 우리가 고집부리면서 걸어갈 때, 그 길에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동방의 박사들에게 지시하신 길은 생소한 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더딜 수도 있었고, 가기에 힘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셔서, 분명 그들은 자기들의 고국에 무사히 되돌아갔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원하는 길을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길을 막으시고, 우리를 다른 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아쉬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길이 더 좋은 길이며, 우리에게 최상의 길입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의의 길로, 바른 길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떠한 길로 인도하시든지, 우리는 늘 순종하면서 감사함으로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합니다.
아울러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길이라면, 우리는 즉시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대로, 다른 길로 가야만 합니다. 그리하면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발걸음을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행여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다른 길로 돌아서야 합니다. 뜻깊은 성탄주일을 맞이하여, 과거의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다른 길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동방의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했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그들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며 귀한 예물을 드렸습니다. 셋째,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우리도 큰 기쁨으로 성탄을 맞이합시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우리도 엎드려 예수님에게 경배하며, 정성을 다한 귀한 예물을 드립시다. 동방의 박사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는 다른 길을 걸으며,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삽시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분명 동방의 박사들은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서 메시야의 탄생을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으로 전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성탄의 소식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온 누리에 힘써 전파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성탄의 기쁨과 함께 이 한 해를 잘 마무리합시다. 그리고 새해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기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탄에 드릴 예물
마 2:9-11 / 백장흠 목사
왜 성탄절이 되면 선물을 기다리고 또 선물을 주고 받습니까? 그 이유는 성경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독생자 예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계산 할 수 없는 엄청난 선물을 하나님에게로부터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도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동방박사들이 가장 먼저 예물을 드렸습니다. 이들은 성탄을 기다렸고 성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찾아 갔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께 엎드려 경배하며 보배합을 열어 예물을 드렸습니다. 우리도 마음을 열어 주님께 예물을 드리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동방박사는 무엇으로 예물을 드렸습니까?
1. 황금을 드렸습니다.
금은 귀한 것입니다. 금은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습니다. 동방박사는 황금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요? 황금보다 귀한 것을 드려야 합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사람 사이에 신용을 잃으면 큰 손실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는 “믿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와도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황금(물질)만능이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믿음만능>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주님도 ‘네 믿음대로 될 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축복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기도하여 응답을 받는 것도 곧 믿음으로 기도할 때 응답받는 것입니다. 죄악에서 무엇으로 구원 받는가요? 바로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황금보다 귀한 믿음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2. 유향을 드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향기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유향”은 상당히 가치있는 것으로 흔한 것이 아닙니다. 동방박사가 유향을 드렸다는 것은 보통 가치있는 것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황금을 믿음이라고 표현한다면 유향은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비싼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구약시대에는 제사할 때 항상 향이 있어야 했습니다. 성막을 건축할때도 향이 있어야 했습니다. 악취가 나면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향이 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기에 너무 분주하여 교회 안에 향기가 없는 것은 아닌가?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께 사랑이라는 유향을 예물로 드리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몰약을 드렸습니다.
몰약은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용된 방부제입니다. 그러나 매우 귀한 신분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귀한 물품입니다. 몰약은 악취도 없애고, 악마를 제거한다고 생각하여 각종 종교행사에 사용되었습니다. 황금이 믿음이고 유향이 사랑이라면 몰약은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몰약은 원래 ‘쓰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인생의 실패라는 쓴맛을 보아야 우리들에게 소망을 주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태어났을때 동방박사는 몰약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주님이 곧 우리의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예수님께 최고의 예물을 드리는 복된 성탄을 맞이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황금을 드립시다. 오래도록 우리를 감동하게 하는 유향의 사랑을 드립시다. 그리고 영원한 소망을 드리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배합을 열어
마 2:7-12 / 김춘섭 목사
오늘은 새해 첫 주일입니다. 세상의 달력은 1월1일부터 시작을 하지만, 교회력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인 11월 마지막 주부터 시작합니다. 대강절 4주간이 끝나 성탄절기를 거쳐서 1월6일이면 주님께서 이 땅에 모습을 나타내신 주현절이 됩니다. 내일이 바로 주현절입니다. 이날은 예수님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경배, 예수님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특별히 이방인들에게도 주님이 나타나심을 기념합니다.
다시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수님께 드린 동방박사들이 경배드리는 그림을 생각해 봅니다. 마구간은 누추한 곳이기보다는 꽃으로 아름답게 장식이 되어 있으며, 사람들의 모습은 화려해 보이기까지 하며, 하늘에서는 별빛이 서명하게 비치고 있습니다.
이 새해의 첫 주일에, 이 아름다운 그림처럼 먼길을 찾아와 보배합을 열어서 귀한 예물을 드리며 경배한 동방박사들의 모습처럼 이 한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와 아름다운 헌신의 삶을 살고자 합니다.
1.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2절)
동방박사들은 밤을 밝히던 사람이었습니다. 남이 잠든 시간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세상의 징조를 구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위대한 이의 탄생을 알리는 별을 보았고, 그 별을 따라 동방 먼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그 목적은 오직 한 가지 경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것은 세 사람의 박사들과 낙타를 타고 길을 떠나는 그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 사람이라는 기록은 성경에 없으며 낙타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 세 가지 예물을 드렸다는 점과 당시의 교통 수단이 낙타였다는 점에서 유래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세 사람이었던지 낙타를 탔던지 보다 중요한 문제는 오직 경배만을 위해 먼길을 떠났고 경배를 마치자,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간 그들의 자세에서 귀한 교훈을 얻습니다.
그들은 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갔고, 거기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자신들의 목적을 밝힙니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고 합니다. 그들은 경배하기 위해서 그 먼길을 온 것입니다.
오늘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오직 그분께 경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정확하고 순수한 목적입니다. 먼저 이 목적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정성이 있는 예배가 있는 생활과 그렇지 않은 생활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니 달라야 합니다. 옛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정성어린 마음으로 부모님 방문 앞에서 아침 인사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의 일과는 다른 사람들의 일과와는 무언가 다릅니다. 하물며 하나님과는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예배를 귀중하게 여기는 한 해로 만드십시다.
2.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10절)
그들은 황금과 유향과 몰약 곧 당시의 가장 귀중한 보배들을 가지고 경배의 길을 떠났습니다. 황금은 이 세상에서 귀한 보물입니다. 유향은 좋은 향을 풍겨 제사에 사용되었으며, 몰약은 향료의 재료와 매장에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이 세상의 구세주는 가장 귀한 것을 받으셔야 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보배들을 들고 경배하기 위해서 기쁨으로 길을 떠나 별을 따라 갔습니다.
경배하는 자는 기쁨으로 나아갑니다. 그들은 경배 드리기 전에 이미 별을 보고 기쁨을 얻었습니다. 기대를 안고 출발하였다가 경배의 장소를 찾게 되자 기뻐했습니다. 오늘 교회의 십자가를 보고 기쁨을 얻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시의 밤은 온통 빨간 십자가로 수놓고 있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보고 평화와 기쁨의 상징으로 여기지 않고, 분열과 아집과 독선의 표시로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온전한 경배의 자세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경배만이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경배드릴 아기 있는 곳 위에 별이 머물렀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10절)"
우리가 예배를 통하여 만나는 주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입니다. 예배는 기대를 안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 기대로 마음이 설렙니다. 연애 시절이 생각나십니까? 만나기 전에 가슴에 벅찬 기대가 있었지 않습니까? 살아보니 그 사람도 별 볼일 없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 되어 그런 감격이 다 살아져버렸는지 모르지만, 일생을 연애하듯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계속하는 사람들은 기대 속에서 기쁨으로 준비하고 경배하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억지로 우리 얼굴을 펼 수야 없지만, 예배의 바람직한 자세가 사라지면, 예배도 제대로 드릴 수 없고, 성도의 교제도 멈추어지게 됩니다.
3.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11절)
그들은 그 먼길을 와서 엎드려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절대 경배의 자세를 표시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절대 경배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기쁨을 얻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기뻐하시도록 하여야 합니다. 엎드려 경배하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는 저들의 모습에서 경배자의 모범을 볼 수 있습니다. 봉헌을 하는 자의 자세는 겸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귀한 헌금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달 수입 전체를 하나님께 봉헌한 것입니다. 십일조를 떼고 나머지를 감사헌금으로 다 드린 것입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그 청년의 마음자세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의 근면하고 절약하는 마음 자세를 보아서 2,300불은 대단한 돈입니다. 그는 무언가를 더 받기 위해 조건을 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대학을 마치고 사회에 발을 디디고,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쓰임 받기를 위하여 조건 없이 감사하고 또한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과부의 두 렙돈>에 대한 설교를 한 적이 있었는데, 모든 것을 다 드리는 행위로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지를 표현하였고, 이미 그의 삶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넉넉하였던지라 예수님께서도 귀하게 보셨던 것이었습니다.
새해 첫 주일부터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여 여러분의 마음을 무겁게 하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철저하게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드릴 것이 없습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다 자기의 형편에서 귀한 것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황금과 유향과 몰약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가장 귀중한 예물로 그것을 준비한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서도 있듯이 메시야의 때에 "세상 나라들이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사60:6)"이라는 기대의 성취입니다. 온 세상으로부터 경배를 받으실 분이십니다. 그 분께 우리는 경배를 드리는 귀한 은혜의 기회를 부여받고 있는 것입니다.
경배하는 자의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는 스스로 판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 그분께 예배하는 자의 태도는 우리의 내면과 외면에 정성 있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교회 다니기 전의 지극한 정성으로 불공드리기 위해 멀리 있던 절을 찾으셨던 어머니를 기억합니다. 가시면서 땀을 흘리실 것이 분명하지만, 목욕재개를 하고 머리에 쌀을 이었습니다. 보리밥에 질려서 하얀 쌀밥이나 실컷 먹어보았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기도 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는 엎드려 어떤 보배합을 열어서 주님께 경배하는 신앙과 삶을 사시겠습니까? 우리가 가진 무엇을 드리면 그런 귀한 경배가 되겠습니까?
4.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12절)
경배자의 자세에서 중요한 것은 드리고 난 이후입니다. 잘못하면 드리고 난 후에 성취감과 교만이 자리잡아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귀한 것을 드리며 하나님께 경배하였다는 것으로 어떤 특권의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더욱 주님을 향하여 겸손하고 철저한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돌아간 길은 험한 길이었습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12절)"는 천사의 지시를 받아 온 길과는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는 더욱 험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배하러 갈 때의 기쁨보다 더 어려운 결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물을 드리며 기쁨으로 경배한 그들에게 돌아가는 길은 은혜의 길입니다. 아름다운 예배가 있으면 우리의 삶은 새로워집니다.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는 삶이 이 한해에 계속되도록 하십시다. 예배는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한 해도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 예배합시다.
예물을 드리지 않는 것
마 2:9-11 / 김명혁 목사
송명희 시인이 쓴 시 중에 “하나님께 드릴 때” 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의 마음을 드릴 때 나의 마음을 보시고, 하님께 나의 눈길을 드릴 때 나에게 하나님의 눈길을 주시네. 하나님께 입술의 말을 드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고, 하나님께 나의 사랑을 드릴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시네. 하나님께 내 모든 것 드릴 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주시네.” 프랜시스 하버갈 이라는 사람은 이런 찬송시를 썼습니다. “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손과 발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나의 음성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소서.”
이천년 전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들의 왕으로 우리들의 목자로 우리들의 구주로 베들레헴에 아기로 탄생했을 때 아기 예수에게 예물을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0년이 지난 후 어른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반면에 아기 예수에게 아무 것도 드리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고 어른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드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아무 예물도 드리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오늘 아침 예물을 드린 사람들과 예물을 드리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예물을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에게 예물을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동방 박사 세 사람이 귀한 예물 가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별을 따라 베들레헴 구유에 가서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들에서 양치던 목자들이 천사가 전해 준 말을 듣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고 무릎을 꿇고 경배하며 몸과 마음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어른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자기의 생애와 생명을 희생의 예물로 드렸습니다. 요한과 안드레와 베드로와 빌립과 야고보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자기들의 전 생애를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한 아이는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에게 저녁식사 예물로 드렸습니다. 죄인인 한 여인은 옥합의 향유와 가슴의 눈물을 주님께 사랑의 예물로 드렸습니다.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는 자기의 집과 음식과 지극히 비싼 향유를 주님께 사랑의 예물로 드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는 자기들의 소유를 주님께 사랑의 예물로 드렸고,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의 모든 것을 몽땅 주님께 사랑의 예물로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에 살던 어떤 사람은 나귀를 주님께 예물로 드렸고 또 다른 사람은 큰 다락방을 최후의 만찬 장소로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을 주님께 마지막 장사의 예물로 드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갖가지 예물들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둘째 예물을 드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 왕 헤롯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아기에게 아무 예물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왕의 자리도 제사장의 자리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들의 죄였습니다. 베들레헴 여관 주인들도 아무 예물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의 여관 방들도 자기들의 마음도 아무 것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들의 죄였습니다. 세례 요한과 사도 요한과 안드레와 베드로와 빌립과 야고보가 자기들의 생애를 예물로 드릴 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자기들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박대하며 자기들의 시간도 물질도 마음도 아무 것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들의 죄였습니다. 한 아이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에게 예물로 드릴 때 5천 여명의 다른 사람들은 아무 것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들의 죄였습니다. 죄인인 한 여인이 옥합의 향유와 가슴의 눈물을 사랑의 예물로 주님께 드릴 때 집 주인 시몬은 발 씻을 물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시몬은 여자를 정죄했고 예수님에게는 냉정했습니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느니라.” 시몬은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시몬의 죄였습니다.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의 집과 음식을 예수님께 예물로 드릴 때,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가 자기들의 소유와 생애를 예수님께 예물로 드릴 때,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아무 것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들의 죄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노라.” 예루살렘에 살던 어떤 사람이 나귀를 드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이 큰 다락방을 예수님에게 예물로 드릴 때에도 대부분의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은 아무 것도 드리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의 생명을 빼앗았고 겉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을 찾아 오신 아기 예수와 어른 예수님에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저들의 죄였습니다.
셋째 2003년 성탄을 맞는 강변교회의 교우들은 무슨 예물을 주님께 드리겠습니까?
김선애 집사님은 시간을 드리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백혜란 집사님은 마음을 드리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박영희 집사님은 전도의 열매를 드리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김홍영 집사님은 주일과 새벽을 드리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서정걸 군은 평생을 드리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김혜은 양은 목소리와 영혼을 드리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이제 한 사람씩 나와서 “내가 주님께 드리고 싶은 것”이란 제목의 글들을 읽겠습니다.
김선애 집사님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 무엇을 예물로 드릴 수 있을까요? 부족한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하나, 둘, 세어봅니다.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넘치도록 많이 가지고 있음을 감사 드립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일까?’ ‘시간’ 시간, 세월, 삶이 제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주를 위해 일까지라도 줄여라’ 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이 귓가에 맴돕니다. 저만을 위해 사용하던 시간을 앞으로는 예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던 시간들이 주님의 것임을 깨닫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주님의 시간을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께 돌려 드립니다.
첫째, 늘 행복하고 기쁨이 넘치는 마음을 준비하여 노숙자이신 주님께서 평안히 거하시며 저를 깨닫게 하시고 주장하시는 삶의 시간을 드립니다. 나로 기뻐 울게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며 기쁨을 나누는 많은 시간을 드립니다. 받아 주세요!!!
둘째, 눈물로 기도하는 시간을 드립니다. 주여! 제 입술을 열어 주소서. 연약하고 지친 지체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시간을 드립니다. 가슴이 저려오는 통증을 느끼는 아픔을 공유하며 그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의 가슴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신음 소리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열납 되어지는 기도 시간을 드립니다. 받아 주세요!!!
셋째, 헌신과 봉사의 시간을 드립니다. 어쩌면 패배자로 끝났을 저의 삶을 새 옷으로 갈아 입고 헌신과 봉사의 삶으로 드립니다. 연약하고 병들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교회를 중심으로 주의 일에 헌신하며 외로운 이웃, 병든 이웃, 소외된 이웃들을 찾아 함께 울고 웃으며 서로 위로하며 행복을 찾는 봉사의 시간을 드립니다. 받아 주세요!!! 주님!!! 저의 시간을 드리오니 저의 남은 평생에 주를 찬송케 하소서!”
백혜란 집사님의 고백입니다. “세상의 모든 은, 금의 소유주이신 부요하신 주님이 소년의 오병이어와 과부의 동전 두 닢에 감격하셨습니다. 천군 천사들을 부리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주님이 소년 리빙스턴의 작은 발을 통해 주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앉은뱅이를 일으키신 주님이 스데반의 죽음과 송명희 시인의 뒤틀린 몸을 통해 생명과 위로를 전하고 계십니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으시며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으신 주님께 제가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요? 성가대원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도, 도르가의 바느질 솜씨도, 안나 할머니의 기도의 삶도, 할렐루야 팀 축구 선수들의 강한 체력도, 장기려 박사님의 전문지식도 제겐 없습니다. 또 저의 생명과 시간과 물질도 처음부터 제 것이 아닌 주님의 것이기에 드린다고 생색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드릴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겠지요. 저는 제게 있는 것, 제 마음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 마음을 받으시고 주님의 뜻대로 사용해 주시길 원합니다. 봉사자가 필요하실 때 제 손과 발을 달라 하시고, 헌물이 필요한 곳에 헌금하게 하시고, 기도의 동역자가 필요할 때에 기도하게 하소서. 구원할 영혼들이 제 곁에 있을 때 전도하게 하시며 위로할 이웃들이 있다면 위로의 말을 전하게 하십시요. 그러나 비록 제 마음이지만 제가 다루기가 참 어렵습니다. 주님께서 늘 은혜 가운데 붙들어 순종하게 하소서. 주님께 드릴 것이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박영희 집사님의 고백입니다. “아기 예수님께 무엇을 드릴까요? 저희 전도부를 통해서 주님을 전할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주님께 먼저 저희 마음을 예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슬비 전도편지를 쓰고 작은 예쁜 선물을 만들며 김치를 담그게 하신 저희 손들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담근 김치를 가지고 이 집 저 집을 찾아가게 하신 저희 발들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부족한 전도를 통해서 주님 앞으로 나온 전도의 열매들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고 싶습니다. 그 중에 아주 예쁜 정춘화라는 분은 편지와 만남을 통해 강변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학습과 세례를 받고 지금은 남편의 구원과 아이들이 주님께 더 가까이 오기를 기도하는 새 신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저는 전도의 열매 정춘화씨를 주님께 예물로 드립니다.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죽음이 있는 곳에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비를 내리시고 자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아름다운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많이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전도의 열매를 많이 맺어 주님께 예물로 드리게 해 주세요. 다시 한번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 드리고 감사 드리고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홍일 집사님의 고백입니다. “이 순간도 하늘이 보이고 양털 같이 하얀 벽이 때묻은 나의 몸과 마음을 감싸주는 아름다운 성전에서 강변 성도님들과 함께 성탄 주일을 맞아 아기 예수께 경배하며 예배 드릴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올 한해를 돌이켜 보면, 별과 같이 빛나는 사람들! 죄란 무엇인가! 나그네! 아프카니스탄을 보며 한국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감사! 송명희 시인!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님이 지금의 노숙자 같다 하시며 목사님의 목메인 기도! 등 많은 말씀과 은혜를 받아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성전을 벗어나면 땅의 도성으로 달려 갔음을 고백합니다. 년초에 많은 것을 주님과 약속했지만 행함이 없는 삶을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속고 또 속고 속으셨건만 그리고 다시 속으실 것을 아시면서도 나를 사랑하시어 또 이렇게 불러주셨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속이고 있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새해에는 주일과 새벽을 주님에게 드리겠습니다. 주일을 온전히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새벽을 최소한 한 주에 5일 드리겠습니다, 제1 남 전도회 모임을 위한 시간과 봉사를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수요일 저녁을 최소한 한 달에 2회 이상 드리겠습니다. 직장 신우 예배를 위한 시간과 정성을 드리겠습니다. 존경하고, 사랑스럽고 함께 하고픈 목사님 그리고 성도님 제가 이와 같은 주님과의 약속을 잘 지킬 수 있도록 기도 부탁 드립니다.”
서정걸 군의 고백입니다. “나는 예수님에게 정성어린 나의 평생을 드리고 싶습니다. 값비싼 예물, 한 순간의 헌신 보다는 나의 평생에 주님께서 쓰시고자 하실 때, 내가 가진 무언가를 필요로 하실 때, 망설이지 않고 헌신된 나의 삶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나의 목소리가 필요하시다면 목소리를 드리고, 시간이 필요하시다면 시간을 드리고, 내 작은 헌금이 필요하시다면 정말 조금밖에 없을지라도 아까워하지 않고 드리기를 원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예수님을 진지하게 묵상하며 성탄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며 경건하게 보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가장 좋은 목소리로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며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또한 내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돌아보는 성탄절이 되기를 원합니다. 올 한해는 더 깊은 기쁨과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찬양 드린 것이 주님께 드린 가장 좋은 예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별을 따라 먼 길을 찾아와 주님께 가장 귀한 예물을 드렸던 것처럼 나도 가장 좋은 나의 목소리와 나의 평생을 주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 서정걸, 김혜은 등 청년들이 나와서 “북 치는 소년”이란 성탄 캐럴을 부르겠습니다. 가난한 한 소년이 새로 태어난 왕께 드릴 것이 없어서 북을 쳐서 드리겠다는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아름다운 노래였고 아름다운 고백들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너무 기뻐하실 것입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드리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무엇이 은혜요 축복입니까? 주님께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우한 이웃에게 예물을 전하는 것도 주님에게 예물을 드리는 것과 꼭 같다고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알타반이란 박사가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릴 예물 세 가지를 준비해 가지고 다른 박사 세 사람들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죽어가는 병자를 만나 그를 돕기 위해 보물 하나는 써 버리고 말았습니다.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세 박사들은 아기에게 예물을 드리고 돌아간 뒤였습니다. 바로 그때 군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아기 하나를 살리기 위해 또 하나의 보물을 군인에게 주고 말았습니다. 그후 알타반 박사는 애굽으로 여러 곳으로 헤매며 다녔지만 메시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33년 후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을 죽이기 위해 그를 끌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그를 죽이면 안된다고 소리를 지르며 왕을 만나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뛰어 올라라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노예로 붙잡혀 가는 소녀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 소녀는 “할아버지 저를 좀 살려주세요”라고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한 개의 보물을 그 소녀에게 몸 값으로 주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때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졌습니다. 알타반 박사는 죽어가면서 하늘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하나님, 용서하시옵소서.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바로 그때 하늘로부터 고요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네가 왕을 만났느니라. 네가 왕에게 예물을 드렸느니라" 알타반은 너무 놀랐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제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셨을 때 음식을 대접한 일이 있습니까? 언제 주님이 병들었을 때 제가 치료해드린 일이 있습니까? 주님, 제가 아닙니다. 언제 주님이 팔려갈 때 제가 구해 드린 일이 있습니까? 33년 동안 저는 나의 왕 되시는 주님을 찾았지만 저는 당신의 얼굴을 뵈온 적도 없고 당신을 섬긴 일도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다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알타반아! 알타반아!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 너는 나를 만났고 나를 도와 주었고 나를 섬겼노라." 알타반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의 빛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마지막 긴 평안의 숨을 쉬고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왕을 위해서 준비된 그의 보물들은 왕 그 분에 의해서 기쁘게 열납되었습니다. 알타반은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왕을 만났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왕께 아무 예물도 드리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불우한 이웃에게 아무 예물도 전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무엇이 은혜요 축복입니까? 왕께 예물을 드리는 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갇힌 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사도 바울을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4:7).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중에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생명을 버리신 우리 주님께 무엇을 드리겠습니까? 오늘 아침 여러분들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시간을 드리고 우리의 마음을 드리고 전도의 열매를 드리고 주일과 새벽을 드리고 우리의 평생과 목소리와 영혼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따듯한 사랑의 예물들은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드린 예물이 하늘에서 보석처럼 빛나기를 바랍니다.
주께 드리네
마 2:9-11
1 주님께 예물을 드린 사람들(1)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 구유에 탄생했을 때 제일 먼저 예물을 드린 사람은 동방에서 온 세 박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아니 온 인류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황금은 왕께 드린 예물이었고 유향은 선지자에게 드린 예물이었고 몰약은 제사장에게 드린 예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아기 예수께 예물을 드린 사람은 들에서 양 치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가지고 온 예물은 없었지만 천사들의 노래 소리로 가득한 찬양의 마음을 예물로 드렸고 아기 예수에 대한 경배의 무릎을 예물로 드렸고 천사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입술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네 번째 박사였던 알타반 박사는 자기가 준비한 사파이어와 루비와 진주를 아기 예수님께 직접 예물로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병들어 죽어가는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사파이어를 사용했고 헤롯의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려던 한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 루비를 사용했고 노예로 팔려가는 한 여인을 구하기 위해서 진주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알타반 박사는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서 병자와 아기와 한 여인을 위해서 사용했던 자기의 예물들이 바로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 드려진 예물이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돌이켜 보면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린 사람들이 여기 저기 나타납니다. 이름 모르는 한 소년은 예수님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물로 드렸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는 예수님에게 자기들의 소유를 예물로 드렸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인인 한 여인은 예수님에게 향유와 눈물과 입맞춤을 사랑의 예물로 드렸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사를 위하여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물로 드렸습니다. 그 예물은 예수님의 마음에 큰 감동과 기쁨을 가져 다 주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의 새 무덤을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에게 예물로 드렸습니다. 베드로는 디베랴 바다에서 부활하신 주님에게 회개의 눈물과 사랑의 가슴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다음 120명 제자들은 10일 동안 회개의 눈물과 헌신의 몸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몸과 피와 삶과 죽음을 모두 산 제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루디아는 자기의 집과 재물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자기의 집과 아울러 자기들의 목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에바브로디는 자기의 목숨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드려진 예물들은 주님 자신에게 드려진 것과 같았습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빌2:30).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극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로 주님께 드렸습니다.
2 주님께 예물을 드린 사람들(2)
앗시시의 성자 프랜시스는 자기가 물려받은 유산과 자기가 입던 옷과 자기가 자던 침대와 자기가 누리던 모든 생의 평안함을 모두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드려진 예물은 주님 자신에게 드려진 것과 같았습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은 어린 소년 시절 주님께 귀한 예물을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이 없어서 어느날 헌금 바구니 위에 두 발을 얹고 자기 몸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결국 그는 한 평생을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의 삶과 죽음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우리 교회의 청년 서문욱 군을 만났는데 서문욱 군이 몇 주전 설교 말씀을 듣고 도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한 평생의 1년 또는 몇 년이라도 주님을 위해 바칠 마음과 생각이 없느냐는 말씀에 도전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년에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할까 또는 직장에 들어가서 일을 할까 생각을 하다가 내년 한 해를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시간을 바치기로 맘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시간과 몸을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 할 일들을 하나하나 보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주 만물을 다 소유하고 계시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시지만 우리들의 보잘 것 없는 예물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예물들을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오병 이어를 귀하게 사용하셔서 오천명을 먹이고도 남았다고 했습니다. 양영자 선수나 이영무 선수가 스포츠의 재능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더니 주님은 그것을 아주 귀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정근모 장로님이 과학적 재능을 주님께 예물로 드렸더니 주님은 그것을 아주 귀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김동수 장로님과 이의숙 권사님이 자기의 사업을 주님께 드렸더니 주님께서 한국도자기 사업을 귀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며칠 전 티비를 통해서 80이 지난 어느 할머니가 수년동안 매일 이대병원에 가서 환자들을 위한 자원 봉사의 일을 즐겁게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남은 생애를 환자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시간을 봉사의 예물로 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바로 어제 아침 MBC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봉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부산에 있는 어느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일을 하고 있는 어느 여선생님의 이야기였습니다. 선생님의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걷지 못하는 성호라는 장애 어린이가 선생님의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MBC 방송국에 감사의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성호라는 어린이는 선생님을 가리켜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너무 아름답고 착한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다음 토요일 호산나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선생님의 결혼식을 진심으로 축한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여선생님이 기독교 신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안도와 감사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박진경 선생은 김승연씨와 잠시 대화를 하면서 장애아들을 가르치며 돌보는 일이 너무 좋다고 소박하게 말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주님께 드려지는 삶은 아름답습니다.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호산나 교회에 다음과 같은 축하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성호가 선생님을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박진경 선생님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강변교회 김명혁 목사"
3 무엇을 드릴까요?
우리는 만왕의 왕으로 구유에 탄생하신 우리 주님께 무엇인가를 예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예물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무엇을 드려야 하겠습니까? "북 치는 작은 소년"이라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를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그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 보자고 그들이 말을 했어요. 새로 태어난 왕을 보러 가자고 말을 했어요. 가장 좋은 선물을 가지고 가서 왕 앞에 드리며 그분을 경배하자고 말을 했어요. 우리는 가서 어린 아기를 뵈었어요. 나는 가난한 어린 아이 여서 아무 것도 드릴 것이 없었어요. 파럼 펌펌펌 파럼 펌펌펌. 그래그래 그것이 내가 왕께 드릴 가장 좋은 선물이야. 파럼 펌펌펌 파럼 펌펌펌. 새로 태어난 왕이시여, 내가 왕을 위해 북을 쳐 드릴까요? 파럼 펌펌펌. 그때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소와 양들도 그렇다고 장단을 맞추었어요. 나는 왕을 위해서 북을 쳤어요. 파럼 펌펌펌 파럼 펌펌펌. 나는 최고의 기술을 발휘해서 북을 쳤어요. 파럼 펌펌펌 파럼 펌펌펌. 그때 아기 왕께서 나를 보고 미소를 지으셨어요. 나와 내 북을 보고 미소를 지으셨어요. 파럼 펌펌펌 파럼 펌펌펌" 북 치는 작은 소년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북을 쳐서 멋진 북 소리를 아기 왕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예물로 드리겠습니까?
첫째 우리의 마음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장이나 외모를 보시지 않고 우리의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했습니다(삼상16:7). 우리 마음이 어떠한지 우리 마음을 살펴 보신다고 말씀했습니다(신8:2).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높이는 우리의 마음과 주님을 순종하는 우리의 마음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마음과 영혼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겉 모습 보다는 마음과 영혼의 움직임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오래 전부터 그것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니까? 외모와 겉 모습이 아닌 여러분들의 간절한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간절한 마음과 뜨거운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니까?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죄 많은 여인처럼 여러분들의 가슴이 주님을 향한 사랑의 눈물로 뜨거워져 있습니까? 혹시 바리새인처럼 냉랭한 마음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디베랴 바다가의 베드로처럼 여러분들의 가슴이 주님을 향한 회개와 사랑의 눈물로 뜨거워져 있습니까? 주님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예물로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둘째 우리의 몸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함께 우리의 몸을 예물로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 몸은 구체적인 삶을 의미합니다. 몸은 우리의 시간과 재능을 의미하고 우리의 삶과 죽음을 의미합니다. 양영자 선수와 이영무 선수가 시간과 재능을 드리는 것이 바로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서문욱 군이 일년의 시간과 재능을 봉사의 도구로 드리는 것이 바로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김정숙 어머니 정삼례 어머니 김병원 어머니 등이 매일매일의 새벽을 기도의 시간으로 드리는 것이 바로 몸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구제부원들이 거의 매주마다 지체 장애인들을 찾아가서 그들의 몸을 씼어 주며 돌보는 것이 바로 몸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드려진 예물은 바로 주님 자신에게 드려진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시간과 재능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시기를 원하십니까? 여기 재능은 노래는 하는 목소리를 가리킬 수도 있고 피아노나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손을 가리킬 수도 있고 그림을 그리는 손을 가리킬 수도 있고 운동을 하는 손과 발을 가리킬 수도 있고 장애아들의 몸을 씻기는 손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저의 남은 시간과 재능을 어떻게 하면 모두 주님께 온전한 예물로 드릴 수 있을까를 요사이 거의 날마다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의 몸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실제로 몸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너무너무 기뻐하실 것입니다.
셋째 우리의 재물을 예물로 드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함께 우리의 재물을 예물로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기 재물은 돈과 집과 밭과 음식물과 의약품과 금은보석 등 모든 종류의 재산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에 재물을 주님께 예물로 드린 사람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한 소년은 오병이어를 주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기의 소유와 재산을 예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예물로 드렸습니다. 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지극히 기름과 포도주와 짐승과 치료비를 강도 만난 사람에게 예물로 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 드려진 예물과 같았습니다. 바나바는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께 드려진 예물과 같았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극한 가난 중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하여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구제했고 사도 바울의 선교를 도왔는데 그것은 바로 주님과 하나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예물이었습니다.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빌4:18).
여러분들도 주님께 재물을 예물로 드리시기를 원하십니까? 재물을 드리지 못하는 사람은 사실 마음도 드릴 수 없습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마6:21). 재물을 드릴 때 반드시 많은 액수를 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재물과 수입이 없는 가난한 사람은 자기의 형편에 따라서 드리면 됩니다. 한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헌금 궤에 넣었는데 주님은 그 헌금을 너무나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 구유에 탄생하셨습니다.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우리들을 다스를 우리의 왕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동방 박사들과 목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아기 예수께 무엇인가를 예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시겠습니까? 무엇을 예물로 드리시겠습니까? 먼저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을 주님께 예물로 드리십시다. 주님을 행한 간절한 회개와 사랑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몸과 재물을 주님께 드리십시다. 이제 우리교회의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어우러져서 부른 소망이란 제목의 찬양을 들으신 다음 찬송가 71장을 다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성탄의 주님을 만납시다
마 2:8-12 / 백장흠 목사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지만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납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나를 비참하게도 할 수 있고 삶에 위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한 소년이 수영하다가 물 속에 빠져 죽기 직전에 한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생명의 은인이 된 그 농부의 아들을 찾아가 무엇이 소원이냐고 물었습니다. 자기는 공부하고 싶은 것 하나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청년의 부모는 그를 공부시켰습니다. 농부의 아들은 의학공부를 하여 페니실린이라는 약을 발견하고 후에 노벨상까지 받았습니다. 물에서 건짐 받은 청년은 대정치가가 되었습니다. 제2차 대전 중 그는 폐렴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농부의 아들이 개발한 페니실린 덕분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치가는 윈스턴 처칠이고, 농부의 아들은 알렉산더 플레밍이었습니다.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0:30~35절에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잘못 만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강도를 만났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옷을 벗겼습니다. 인격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많이 때렸다고 했습니다. 맞았습니다. 상처를 입혔다는 말입니다. 버림받았습니다.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이 그대로 지나칩니다. 만남이 필요한데 만나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레위 사람도 그대로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자기를 치유하여 주었습니다. 살려주었습니다. 사랑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예수 만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을 지나쳐 버리는 게 아니라 탄생하신 예수를 만나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탄의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1. 기쁨이 넘쳤습니다.
(1) 기쁨은 행복입니다.
복과 행복은 다릅니다. 부요 하고 자녀가 잘되는 것은 복입니다. 복은 있는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보아도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잘사는 나라 사람이 아닌 방글라데시아입니다. 우리가 보면 그들은 생활이 어렵고 가난한 나라로 알고 있는데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복 받는 사람이란 얼마나 많은 소유가 있는가? 집이 얼마나 좋은 집인가? 그것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얼마나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가? 에 있습니다. 행복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항상 즐겁게 살고 만족하게 살면 행복한 것입니다. 이상적인 남녀가 부부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볼 때에 이들은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학벌이 좋습니다. 소유가 넉넉합니다. 그런데 기쁨은 없습니다. 서로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남과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이들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진 것이 부족합니다. 세상적인 권세나 명예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는 늘 기뻐합니다. 서로가 좋아합니다. 그러면 이 집은 행복한 것입니다.
(2) 기쁨은 삶의 에너지입니다. 힘입니다.
힘이 있어야 승리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이기는 비결은 기술, 힘 그리고 전략이라고 합니다. 힘이 없으면 기술이 있어도 견디지 못합니다. 힘은 무기입니다. 영국의 ‘버트란드 럿셀’이라는 사람은 “힘의 추구는 인간의 본능이며 무한한 욕구”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힘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1) 물리적인 힘이 있습니다. 폭력, 탄압, 군사력이 여기에 속합니다.
(2) 경제적인 힘이 있습니다. 수입과 지출 이해 관계에서 행사되는 힘입니다.
(3) 영향력으로 교육과 종교의 힘을 말합니다. 진정한 힘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삶에 기쁨이 넘치면 절망을 극복합니다. 왜 자살합니까? 힘들어서 일이 안돼서 자살하는 게 아닙니다. 삶에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카드 빚 때문에 압박을 받아 견디지 못하여 자살했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기쁨이 없기에 그런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신변과 경제와 환경에서 오는 비관이 자살을 불러오는 원인입니다. 기쁨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쁨은 힘입니다.
(4) 기쁨은 건강의 근원입니다.
사람들이 왜 병에 걸리는가? 병균 때문에 생기는 예도 있습니다만 마음에서부터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화가 나는 일이 생긴다든지 지나친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병이 생기고 심하면 자살도 하게 된 답니다. 우울증의 증세가 이러 합니다. ᄀ)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쓰이고 걱정거리가 많아집니다. ᄂ) 쉽게 피곤함을 느낍니다. ᄃ) 즐거운 일이 없고 세상일에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ᄅ) 매사가 비관스럽고 절망스럽습니다. ᄆ) 내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불필요한 죄의식에 사로잡힙니다. ᄇ) 죽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듭니다. 이런 증세가 있으면 우울증입니다. 한 마디로 기쁨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쁨을 얻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면 기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1~10절을 보면 세리장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자기 집에 모셔들임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기쁨이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뇌에서 신비한 성분을 생성해내는데 무려18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게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엔돌핀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아드레날린입니다. 웃거나 노래 부르거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는 엔돌핀이 나와서 암의 균도 죽이는 결과가 나타난답니다. 중환자가 치유 받으려면 자꾸 웃고 기뻐하면 된답니다. 그래서 뇌졸증 환자가 울면 안됩니다.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일들이 생기면 병균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쉽게 중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성탄의 주님을 만납시다. 그리하면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확신이 생겼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릅니다. 물건도 듣고 사지 않습니다. 보아야 삽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니 그분은 메시아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듣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불확실합니다. 예수를 만나고 믿어야 합니다. 즉 경험, 체험하여야 합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확신이 생겼습니다. 예수의 제자 도마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들었는데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문은 들었어도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목숨을 걸고 증인의 사역을 하였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고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고 확신 있는 신앙 생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만납시다. 이번 성탄절에는 예수를 만나는 기회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성탄의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1. 기다려야 합니다.
소위 동방의 박사들도 기다렸습니다. 목자들도 기다렸습니다. 누가복음 2:26절을 보면 시므온이라는 이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인내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은 기다릴 줄 모른다는 말을 듣습니다. 기다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시어머니가 밥하려는 며느리에게 뉘를 가리는 일을 하라고 시켰는데 시어머니는 일부러 뉘 한 줌을 쌀에 섞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며느리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라 잡념을 없애 주려는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친정 생각하지 말고 시집살이 잘하라는 그런 뜻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됩시다. 그 분을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 땅에 우리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 죽으려고 오시는 예수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초림 때에도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만난 것 같이 재림의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바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기다림도 없습니다. 애인이 군대에 갔습니다. 여인은 기다립니다. 남자는 제대 날짜를 기다리고 여자도 남자가 제대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은 보기 좋은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것이 없는 사람이 절망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를 대망한 것입니다. 메시아 대망사상이 이스라엘의 혼입니다. 지금은 고생이 있고 시련이 있어도 그 날이 있다는 미래에 보장을 받고 사는 삶이 행복한 것입니다. 기다리는데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우리는 초림의 주님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재림의 주님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재림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는 진짜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준비합시다. 이미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준비 없으면 그 날에 주님 만나지 못합니다. 예복을 준비하여야 합니다.(마 22:11-13) 삶의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믿었느냐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았느냐? 가 더 중요합니다. 행위의 옷이 예복입니다. 준비해야 합니다.(마 25:10-13)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을 만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말세 성도들은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영적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그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날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분 예수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리던 그분이 오셨습니다. 첫 번째 이 땅에 오셨던 주님 그분이 메시아이십니다. 그것이 성탄입니다. 우리는 다시 기다립니다. 그분이 바로 재림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2. 찾아간 사람이 만났습니다.
동방에는 별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즉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에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이 교회에 나오시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의사 선생하시는 말씀이 저는 목사님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무엇이 부러운가? 물었더니 여러 사람을 보면서 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전하시면서 사시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날마다 눈만 뜨면 남의 목구멍만 바라보고 삽니다. 이런 일을 일생동안 한다고 하는 게 힘듭니다. 그럽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삽니까? 예수를 찾아간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것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이는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자는 강력한 권면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고 사는 이들입니다. 한 눈 팔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위에 계신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가 가신 길을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시고 걸어가신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라보다가 별을 보고 따라갔습니다. 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보고 세상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별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린 현대교회가 아닙니까? 무엇을 따릅니까? 신학을 따릅니다. 유행을 따릅니다. 신앙인은 실천적이고 행동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교회를 비판하기를 믿음은 좋은데 생활이 결여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다고 아멘은 잘하는데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실천하여 살겠다고 하는데 예수를 따르지 아니하면 도덕종교에 불과합니다. 착하게 살아라. 자선을 베풀어라. 이는 종교행위에 불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믿음 안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부부가 사랑합니다. 어른을 공경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화목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아갑시다. 순종으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시절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요구만 하면 다 사줍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에 무엇을 달하고 요구하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하면 요구하는 게 많아집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자꾸 달라고 기도할 줄 압니다. 부모도 어린아이에게는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장하면 공부해라 부지런해라 부탁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신앙이 어릴 때에는 언급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장성하면 시키는 게 많습니다. 우리는 성장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제 하라는 게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유 없이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별을 따라가다가 성탄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순종 잘해서 손해 본 이는 없습니다.
3.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성탄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2:8~14 사람들이 착각을 합니다. 일하지 아니하고 노는 것이 행복인 것으로 압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일거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일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일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무엇입니까? 일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터를 잃은 사람을 실업자라 합니다. 실업자 일거리가 없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한때 크게 일하던 분들 중에 은퇴를 하신 분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할 때가 좋은 때라는 걸 알아야 돼 일 자체가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일 하는 데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 노동 일이건 정신노동 일이건 차별이 없습니다. 후진국일수록 직업에 대한 열등의식이 강합니다. 기독교 전통을 가진 선진국일수록 직업에 대하여 자존심을 갖고 있습니다. 너 무슨 일 하고 있어? 나 페인터야 페인트칠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나 자동차 정비공이야 나 청소부하고 있어 환경미화원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무슨 일을 하던지 자랑스럽게 일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놀고 있는 게 부끄러운 것입니다. 첫 번 성탄절에 예수를 만난 사람은 들에서 양을 지키는 목자들입니다. 다 잠을 자는데 목자들은 잠을 자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일꾼이 필요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일꾼입니다. 신령한 일꾼이 됩시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하는 게 행복이라고 느껴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귀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일주일 거의 교회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음악으로 봉사하기 위해 연습하는 화요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수요일과 일요일 성경공부하면서 말씀사역을 준비하는 목요일, 깊은 영적인 기도와 구역 식구들을 돌보는 금요일,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새벽시간 쉴 시간이 없습니다. 이걸 본 동네 사람이 묻기를 월급은 얼마나 받느냐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주일 중에 주일예배 한 시간 드리는데 바쁘다고 축도도 받지 못하고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마귀들도 쉬지 않고 일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들의 목자들같이 일하는 사람이 초림의 주님을 만남같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재림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쉽게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복되게 하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할 게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성탄의 주님을 만나서 기쁨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다가 그분을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세요. 주님을 따라가세요. 그리고 일하다가 주님을 만나서 잘했다 라고 칭찬과 상급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성탄예배
마 2:7-12 / 이수영 목사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지만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납니다. 그런데 그 만남이 나를 비참하게도 할 수 있고 삶에 위대한 승리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한 소년이 수영하다가 물 속에 빠져 죽기 직전에 한 농부의 아들이 그를 구해주었습니다. 생명의 은인이 된 그 농부의 아들을 찾아가 무엇이 소원이냐고 물었습니다. 자기는 공부하고 싶은 것 하나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청년의 부모는 그를 공부시켰습니다. 농부의 아들은 의학공부를 하여 페니실린이라는 약을 발견하고 후에 노벨상까지 받았습니다. 물에서 건짐 받은 청년은 대정치가가 되었습니다. 제2차 대전 중 그는 폐렴에 걸려 죽음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농부의 아들이 개발한 페니실린 덕분에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정치가는 윈스턴 처칠이고, 농부의 아들은 알렉산더 플레밍이었습니다.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0:30~35절에 예수님의 비유 중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잘못 만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바로 강도를 만났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옷을 벗겼습니다. 인격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많이 때렸다고 했습니다. 맞았습니다. 상처를 입혔다는 말입니다. 버림받았습니다.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제사장이 그대로 지나칩니다. 만남이 필요한데 만나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레위 사람도 그대로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가 자기를 치유하여 주었습니다. 살려주었습니다. 사랑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예수 만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성탄절을 지나쳐 버리는 게 아니라 탄생하신 예수를 만나는 기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탄의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1. 기쁨이 넘쳤습니다.
(1) 기쁨은 행복입니다.
복과 행복은 다릅니다. 부요 하고 자녀가 잘되는 것은 복입니다. 복은 있는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보아도 세계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는 잘사는 나라 사람이 아닌 방글라데시아입니다. 우리가 보면 그들은 생활이 어렵고 가난한 나라로 알고 있는데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복 받는 사람이란 얼마나 많은 소유가 있는가? 집이 얼마나 좋은 집인가? 그것으로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얼마나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가? 에 있습니다. 행복은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항상 즐겁게 살고 만족하게 살면 행복한 것입니다. 이상적인 남녀가 부부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볼 때에 이들은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학벌이 좋습니다. 소유가 넉넉합니다. 그런데 기쁨은 없습니다. 서로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만남과 삶에 기쁨이 없습니다. 이들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가진 것이 부족합니다. 세상적인 권세나 명예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들 부부는 늘 기뻐합니다. 서로가 좋아합니다. 그러면 이 집은 행복한 것입니다.
(2) 기쁨은 삶의 에너지입니다. 힘입니다.
힘이 있어야 승리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이기는 비결은 기술, 힘 그리고 전략이라고 합니다. 힘이 없으면 기술이 있어도 견디지 못합니다. 힘은 무기입니다. 영국의 ‘버트란드 럿셀’이라는 사람은 “힘의 추구는 인간의 본능이며 무한한 욕구”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힘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1) 물리적인 힘이 있습니다. 폭력, 탄압, 군사력이 여기에 속합니다.
(2) 경제적인 힘이 있습니다. 수입과 지출 이해 관계에서 행사되는 힘입니다.
(3) 영향력으로 교육과 종교의 힘을 말합니다. 진정한 힘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삶에 기쁨이 넘치면 절망을 극복합니다. 왜 자살합니까? 힘들어서 일이 안돼서 자살하는 게 아닙니다. 삶에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근자에 카드 빚 때문에 압박을 받아 견디지 못하여 자살했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기쁨이 없기에 그런 결과를 가져 온 것입니다 신변과 경제와 환경에서 오는 비관이 자살을 불러오는 원인입니다. 기쁨이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자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쁨은 힘입니다.
(4) 기쁨은 건강의 근원입니다.
사람들이 왜 병에 걸리는가? 병균 때문에 생기는 예도 있습니다만 마음에서부터 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부터 화가 나는 일이 생긴다든지 지나친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울증 때문에 병이 생기고 심하면 자살도 하게 된 답니다. 우울증의 증세가 이러 합니다. ᄀ) 사소한 일에도 신경이 쓰이고 걱정거리가 많아집니다. ᄂ) 쉽게 피곤함을 느낍니다. ᄃ) 즐거운 일이 없고 세상일에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ᄅ) 매사가 비관스럽고 절망스럽습니다. ᄆ) 내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불필요한 죄의식에 사로잡힙니다. ᄇ) 죽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듭니다. 이런 증세가 있으면 우울증입니다. 한 마디로 기쁨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쁨을 얻고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만나면 기쁨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9:1~10절을 보면 세리장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자기 집에 모셔들임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기쁨이 있었습니다. 기쁨이 사람들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뇌에서 신비한 성분을 생성해내는데 무려18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게 두 가지 인데 하나는 엔돌핀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아드레날린입니다. 웃거나 노래 부르거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에는 엔돌핀이 나와서 암의 균도 죽이는 결과가 나타난답니다. 중환자가 치유 받으려면 자꾸 웃고 기뻐하면 된답니다. 그래서 뇌졸증 환자가 울면 안됩니다.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일들이 생기면 병균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쉽게 중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성탄의 주님을 만납시다. 그리하면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2. 확신이 생겼습니다.
듣는 것과 보는 것은 다릅니다. 물건도 듣고 사지 않습니다. 보아야 삽니다. 예수를 만나고 나니 그분은 메시아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듣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믿음은 불확실합니다. 예수를 만나고 믿어야 합니다. 즉 경험, 체험하여야 합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은 확신이 생겼습니다. 예수의 제자 도마가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들었는데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문은 들었어도 의심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에는 목숨을 걸고 증인의 사역을 하였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고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고 확신 있는 신앙 생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만납시다. 이번 성탄절에는 예수를 만나는 기회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성탄의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1. 기다려야 합니다.
소위 동방의 박사들도 기다렸습니다. 목자들도 기다렸습니다. 누가복음 2:26절을 보면 시므온이라는 이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인내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사람들은 기다릴 줄 모른다는 말을 듣습니다. 기다리는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시어머니가 밥하려는 며느리에게 뉘를 가리는 일을 하라고 시켰는데 시어머니는 일부러 뉘 한 줌을 쌀에 섞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며느리 골탕 먹이려는 게 아니라 잡념을 없애 주려는 의도였다는 것입니다. 친정 생각하지 말고 시집살이 잘하라는 그런 뜻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우리는 기다릴 줄 아는 성도가 됩시다. 그 분을 기다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 땅에 우리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 죽으려고 오시는 예수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초림 때에도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만난 것 같이 재림의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바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기다린다는 말은 사모한다는 말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기다림도 없습니다. 애인이 군대에 갔습니다. 여인은 기다립니다. 남자는 제대 날짜를 기다리고 여자도 남자가 제대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이 기다림은 보기 좋은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것이 없는 사람이 절망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를 대망한 것입니다. 메시아 대망사상이 이스라엘의 혼입니다. 지금은 고생이 있고 시련이 있어도 그 날이 있다는 미래에 보장을 받고 사는 삶이 행복한 것입니다. 기다리는데 그냥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준비하고 기다립니다. 우리는 초림의 주님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재림의 주님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재림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이는 진짜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준비합시다. 이미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준비 없으면 그 날에 주님 만나지 못합니다. 예복을 준비하여야 합니다.(마 22:11-13) 삶의 행위를 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믿었느냐도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어떻게 살았느냐? 가 더 중요합니다. 행위의 옷이 예복입니다. 준비해야 합니다.(마 25:10-13) 예비하였던 자들은 신랑을 만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말세 성도들은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영적 지혜가 있는 사람들은 그분을 기다렸습니다. 그날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분 예수를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다리던 그분이 오셨습니다. 첫 번째 이 땅에 오셨던 주님 그분이 메시아이십니다. 그것이 성탄입니다. 우리는 다시 기다립니다. 그분이 바로 재림의 주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2. 찾아간 사람이 만났습니다.
동방에는 별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즉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에 이비인후과 의사선생님이 교회에 나오시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갔습니다. 의사 선생하시는 말씀이 저는 목사님이 참으로 부럽습니다. 무엇이 부러운가? 물었더니 여러 사람을 보면서 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다 전하시면서 사시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날마다 눈만 뜨면 남의 목구멍만 바라보고 삽니다. 이런 일을 일생동안 한다고 하는 게 힘듭니다. 그럽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삽니까? 예수를 찾아간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것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영적인 세계를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 기자는 말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 12:2) 이는 예수님께 눈을 고정시키자는 강력한 권면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고 사는 이들입니다. 한 눈 팔지 않아야 합니다. 오직 위에 계신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가 가신 길을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시고 걸어가신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라보다가 별을 보고 따라갔습니다. 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보고 세상을 따라가려고 합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별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를 잃어버린 현대교회가 아닙니까? 무엇을 따릅니까? 신학을 따릅니다. 유행을 따릅니다. 신앙인은 실천적이고 행동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를 바라보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교회를 비판하기를 믿음은 좋은데 생활이 결여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다고 아멘은 잘하는데 그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실천하여 살겠다고 하는데 예수를 따르지 아니하면 도덕종교에 불과합니다. 착하게 살아라. 자선을 베풀어라. 이는 종교행위에 불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믿음 안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합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부부가 사랑합니다. 어른을 공경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화목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찾아갑시다. 순종으로 따라 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시절에는 없는 게 없습니다. 요구만 하면 다 사줍니다. 아이가 태어날 때에 무엇을 달하고 요구하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나 장성하면 요구하는 게 많아집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면 자꾸 달라고 기도할 줄 압니다. 부모도 어린아이에게는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장하면 공부해라 부지런해라 부탁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신앙이 어릴 때에는 언급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장성하면 시키는 게 많습니다. 우리는 성장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제 하라는 게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유 없이 순종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별을 따라가다가 성탄의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순종 잘해서 손해 본 이는 없습니다.
3. 들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성탄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누가복음 2:8~14 사람들이 착각을 합니다. 일하지 아니하고 노는 것이 행복인 것으로 압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축복하시기 위해서 일거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일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일 자체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무엇입니까? 일터가 없다는 것입니다. 일터를 잃은 사람을 실업자라 합니다. 실업자 일거리가 없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한때 크게 일하던 분들 중에 은퇴를 하신 분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일할 때가 좋은 때라는 걸 알아야 돼 일 자체가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일 하는 데는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 노동 일이건 정신노동 일이건 차별이 없습니다. 후진국일수록 직업에 대한 열등의식이 강합니다. 기독교 전통을 가진 선진국일수록 직업에 대하여 자존심을 갖고 있습니다. 너 무슨 일 하고 있어? 나 페인터야 페인트칠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나 자동차 정비공이야 나 청소부하고 있어 환경미화원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입니까? 무슨 일을 하던지 자랑스럽게 일하고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놀고 있는 게 부끄러운 것입니다. 첫 번 성탄절에 예수를 만난 사람은 들에서 양을 지키는 목자들입니다. 다 잠을 자는데 목자들은 잠을 자지 않습니다. 수고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일꾼이 필요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일꾼입니다. 신령한 일꾼이 됩시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하는 게 행복이라고 느껴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귀한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일주일 거의 교회에서 시간을 보냅니다. 음악으로 봉사하기 위해 연습하는 화요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수요일과 일요일 성경공부하면서 말씀사역을 준비하는 목요일, 깊은 영적인 기도와 구역 식구들을 돌보는 금요일,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새벽시간 쉴 시간이 없습니다. 이걸 본 동네 사람이 묻기를 월급은 얼마나 받느냐고 할 정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일주일 중에 주일예배 한 시간 드리는데 바쁘다고 축도도 받지 못하고 예배당을 빠져나가는 사람과는 다릅니다. 마귀들도 쉬지 않고 일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들의 목자들같이 일하는 사람이 초림의 주님을 만남같이 주의 일을 열심히 하는 분들이 재림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쉽게 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복되게 하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할 게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성탄의 주님을 만나서 기쁨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다가 그분을 찾아서 만나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세요. 주님을 따라가세요. 그리고 일하다가 주님을 만나서 잘했다 라고 칭찬과 상급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는 복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 멘
다른 길로 간 사람들
마 2:1 / 이필재 목사
오늘 1절 말씀에 헤롯 왕이 등장합니다. 헤롯 왕가와 예수님은 악연의 관계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먼저 헤롯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 이 사람은 매우 정치적이고 잔인하고 처세에 밝은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유대인으로서 로마에 충성해서 출세한 사람입니다. 유대 나라 역사를 보면 헤롯 왕가가 끼친 영향이 대단히 큽니다. 우리나라 역사로 말하면 친일파가 되어서 출세한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의 로마 반대 세력이 일어났을 때 결정적 진압을 한 공로가 있어서 갈릴리 지역에 총독으로 임명이 되었다가 나중에 유대나라 왕으로 승진한 사람입니다. B.C 37년에서 A.D 70년까지 약 100년 동안 아버지와 아들들이 왕을 지낸 왕조가 됩니다. 예수님 탄생하실 때 아버지 헤롯의 나이가 70세였습니다. 예수님 출생 후 3년에서 4년 정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 후에 그의 아들 아켈라오와 안티바스와 빌립 세 아들이 나라를 삼등분해서 한 지역씩 맡아 정치한 분봉 왕을 지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헤롯 때 태어나셔서 아들 헤롯 때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의 잔인성은 성경에 자세합니다. 오늘 말씀에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물은 말 한마디가 큰 불행을 가져왔습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에게 질문을 할 때 차라리 “메시야가 어디서 나셨습니까?”라고 물었더라면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이렇게 물은 것이 헤롯 왕의 신경과민 반응을 일으킵니다. 옛날의 왕들은 누구나 똑같은 예민성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 왕권을 넘보는 놈이 없나 하는 것이 제일 큰 걱정거리였습니다. 역사에 보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아들도 있습니다. 형이나 동생이 처형당한 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윗 왕도 아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하마터면 아들에게 죽을 뻔 했습니다. 우리 역사에 고려, 조선 역사 천년 항상 그러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네팔에 선교 때문에 갔을 때 온 국민이 술렁술렁하고 어떤 사람이 왕가에 8명을 다 총으로 쏴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가까운 친족이 왕위에 올랐는데 결국 그 사람이 죽인 거였습니다. 이런 일은 역사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왕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는 “노쇠하셨습니다.”입니다. 그 소리는 물러나라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아주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 동방박사들은 왕한테 와서 왕이 될 사람이 나셨다고 하니까, 더군다나 구체적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자기가 왕인데 또 왕 될 사람이 태어나셨다 하니까 신경이 아주 예민해 졌습니다. 가득이나 살인적 광기를 가지고 있는 헤롯에게 심장을 찌르는 충격파를 던졌기 때문에 인류 역사에 가장 참혹스러운 살인극이 벌어지게 됩니다. 베들레헴 중심에서 그 근방의 모든 사내아이들은 2살 이하 다 죽이라 해서 다 죽였습니다.
그가 죽고 그 아들이 또 왕이 되었는데 안티바스 이 사람도 아버지를 닮았습니다. 왕이라는 사람이 자기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살아서 세례 요한이 지적을 했더니 세례 요한을 지금 감옥에 가둔 상태입니다. 헤롯의 생일날은 국경일입니다. 국가 공로자들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살로메의 춤을 보고 흥분하지 않습니까? 헤로디아는 헤롯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자기 딸 살로메를 로마의 춤 유학을 보냈다가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생일날 춤을 추게 했는데 이 헤롯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관능미가 넘치는 춤을 보고 완전 흥분을 해서 소원을 물었습니다. “네 소원을 말하라. 뭐든지 들어주겠노라. 나라의 절반까지도 네게 주겠노라.” 그런데 결국 “감옥에 있는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서 내게 주소서.” 그대로 했습니다. 그렇게 좋은 왕의 생일잔치에 그렇게 큰 국가 인물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행하다니 누가 보아도 헤롯 가문의 피는 살인적 잔인성이 흐르는 마귀 계열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도 그 헤롯의 재판으로 빌라도에게 넘겨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대로 로마 사람인 빌라도는 예수님을 무죄 석방하기 위해서 많은 애를 썼던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헤롯 정부에서 죽이라 하는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에게 출생 장소를 정확히 알려준 사람들은 서기관들이었습니다. 그 미가서 5장 2절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났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도 가보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과 붙어 있습니다. 산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됩니다. 궁금해서라도 가보면 될 텐데 아무도 가보지 아니하고 오직 아기 예수를 축하한 사람은 베들레헴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밖에 없었음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아기 예수 탄생에 관계된 사람들의 모습을 대강절에 조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예수를 만난다는 것은 생명적 위험 부담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난 이 동방박사들은 그 동방이 도대체 어디인가? 페르시아입니다. 성경에는 파사라고 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 땅입니다. 이란에 가면 성경의 인물들 무덤이 많이 있습니다. 에스더, 모르드개도 다 거기 묻혔습니다. 베들레헴에 관광지로 예수님 출생하신 출생 장소에 커다란 예배당을 하나 지어놨는데, 옛날 페르시아 군대들이 유대 땅 점령할 때 닥치는 대로 다 불살랐습니다. 베들레헴 예수님 출생하신 장소로 진격했을 때 그 기념교회도 불질러버리려고 불을 들었을 때 베들레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여보시오! 이 건물은 절대 여러분들이 상하게 하면 안 됩니다. 이 건물은 메시야가 탄생하셨을 때 바로 당신네 나라 박사들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나 경배 드린 거룩한 장소입니다. 이것은 유대 나라 유적지가 아니라 페르시아 당신네 나라 유적지입니다. 그래도 불 지르겠습니까?” 그래서 보존되었습니다. 페르시아 수도권에서 유적지까지 거리를 계산해 보십시오. 비행기 여행 거리입니다. 차를 타고 가기도 힘든 사막입니다. 사막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낙타를 탔는데 낙타의 걸음걸이는 빠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느라고 이 박사들은 생명을 걸고 찾아온 것입니다. 알타반 박사의 이야기를 우리는 전설같이 다 들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떨어져서 예수님을 찾는데 33년 걸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다가 숨이 차서 죽었다고 했습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찾아오신 동방박사들의 성탄 축하 행사였습니다. 이들이 드린 이 예물의 본질성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황금은 왕권 상징입니다. 유대인의 왕이 아닌 만왕의 왕이 되시고 하늘나라 왕권 상징입니다. 세 개 모든 나라의 문화가 있습니다. 왕관은 금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절대 권위자로서 영원히 변함없다.” 그런 뜻으로 왕관을 썼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다시 올 때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보리라.” 그런데 이 왕권에 대해서 생긴 오해가 열두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야 사역의 이 왕권을 유대 나라 왕권으로 생각했습니다. 헤롯도 그렇게 생각해서 죄 없는 어린 아기들만 죽여 버리는 역사의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이 황금은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의 왕권 상징에 대한 신앙 고백적 예물이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유향은 제사 용품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이 됩니다. 대제사장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백성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영적 권위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떤 죄를 지었을 때 자생 능력으로 죄를 사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킨 대로 해야만 속죄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는 제사장들이 그 역할을 감당해서 짐승이 대신 인간의 죄를 위해서 희생됨으로 말미암아 죄를 속죄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다 했고, 대속죄인이 되면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들어가서 하나님과 중보기도를 해서 온 백성이 지은 죄를 그날에 다 속죄해서 속죄 선언을 하는 제사 방법이 있었습니다. 그때 향을 피워야 합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드린 이 유향은 그러한 예수님의 대제사장권을 상징하는 예물입니다. 그 다음 몰약은 선지자, 예언자 상징입니다. 몰약이라고 하는 물질은 일종의 방부제 역할입니다. 썩는 물건에 대한 예방입니다. 이 선지자와 예언자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심령의 상함을 방지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몰약을 받으신 것은 선지자와 예언자가 되시는 상징입니다. 이들은 아기 예수 경배라고 하는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까지 와서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큰 문제 하나가 발생합니다. 헤롯 왕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헤롯은 아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기를 찾거든 자신에게 알려주는 조건으로 보내주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에게 알리면 아기 예수는 즉시 살해됩니다. “그들은 꿈에 헤롯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지금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헤롯을 거역하는 일이 쉽게 생각되는지 모르지만 그때 상황은 생명적 위험을 감수해야 됩니다. 헤롯 대왕이 누군데 감히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이 달린 문제입니다. 낙타를 타고 천천히 이동을 해야 되는 낯선 외국인들은 금방 노출됩니다. 헤롯의 군대가 그것을 못 찾을 리가 없습니다. 지금과 같이 사건 일으키고 자동차로 한 시간에 200리 밖을 도망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헤롯 대왕을 거역할 수 있었을까요? 이들은 이때 생명을 건 것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 우리가 목표하는 아기 예수 경배는 이제 그 목적을 성취했으니까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리고 헤롯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른 길로 자기들의 갈 길을 갔습니다. 우리 기독교 진리 수행에 있어서 반드시 따라오는 과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어느 때인가는 십자가를 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찬송을 부릅니다.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 만 따라가오리다.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예수님 자신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예수를 만나는 자는 처음부터 생명 위험적 각오를 가지고 따르는 것임을 예수의 탄생 과정에서부터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과정에 쓰임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다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절대적 협조자들 사역이 있었는데 마리아와 요셉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의사 결정이 아닌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예수 탄생 협조자들이 됩니다. 이러한 선택을 불이익적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 위험이 찾아오는 선택입니다. 나사렛 동네에 가면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동네는 이웃집입니다. 그러니까 동네 이웃집 처녀 총각이 결혼 약속을 하고 지금 준비 상태에 있습니다. 아마 그들을 그냥 두었다면,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았다면 결혼해서 행복하게 소시민으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의사 결정이 전혀 아닌 하나님의 결정에 의해서 생명적 위험을 그들이 감수해야 됩니다. 여러분은 구약 성경이나 신약 성경에 나타난 유대인의 율법적 성윤리를 알고 계십니다. 창세기 38장에 보십시오. 다말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혼자 되어 살고 있는 며느리 다말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그 시아버지가 들었을 때 당장 하는 말 “끌어다 불살라 버리라.” 수없이 많은 여인들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이게 유대인들의 성윤리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십시오. 간음하던 여인 끌어다가 돌로 쳐 죽이라 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여인들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이러한 성윤리적 상황에서 마리아가 처녀 출산을 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불살라 죽여야 합니다. 임신 발견 즉시 처참한 죽음을 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자신의 그 순결성에 대한 항변을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마리아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참혹한 죽임을 당하는 여인들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에는 다행이도 이슬람교가 많이 전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처녀를 살해하는 일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이슬람 전통 국가에서는 그런 일이 지금도 끝없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연애를 하다가 혼전 동침이 발견되면 자기 딸을 아버지가 무참하게 죽여 버립니다. 이것을 명예살인이라고 합니다. 신문에 난 것을 보십시오. 파키스탄에서는 1년에 1,200명의 처녀들이 아버지에 의해서 살해되었습니다. 이슬람 국가에서는 해마다 있는 일입니다. 어느 나라나 수백 명씩 있습니다. 보통 아버지나 오빠, 같은 친족들이 죽여 버립니다. 자기 가족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그래서 요셉의 보호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요셉이 결혼 전 정혼한 상태에서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 보호함으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것은 성령으로 된 것이니라.” 요셉도 마리아도 지금 생명적 위험에서 예수 탄생을 협조하고 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된 일을 위해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렇게 생명적 위험을 각오해야 되었던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이런 성경들이 기록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는 열두 명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의사 결정이 아닙니다. 갈릴리 해변을 지나가시다가 베드로, 안드레, 요한을 보고 너희들 나를 따르라고 예수님이 불러주셔서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를 보고 너도 나를 따르라고 해서 그가 예수님을 따라서 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사람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 순교 당해 죽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기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기독교를 이렇게 이해하셔야 합니다. 한쪽에서는 항상 피 흘림의 역사가 계속 됩니다. 그런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 대가를 놀랍도록 누리는 그런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죄 없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지 않습니까? 그 결과 우리들에게 놀라운 혜택이 생겼습니다. 온 세계 누구나 예수만 믿으면 영생이 주어지는 하나님 자녀의 특권이 그로 인하여 생겼지 않습니까? 예수님 제자들의 순교의 피는 기독교회의 기초가 되었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정착되는데 밑거름이 되었단 말입니다. 거룩한 희생이 되었지 않습니까? 청교도는 고통스러웠지만 그 후손들은 엄청난 후광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누군가는 피 흘려야 누군가 그 혜택을 받는 상대적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정말 축복하시는 사람은 누군가? 혜택자보다도 피 흘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입니다. 인간적이고 세상 기준적인 것으로 평가를 한다면 매우 불쌍하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희생되고 피 흘리는 사람이 가장 큰 하나님의 축복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 중 가장 비중이 큰 산상 보훈을 보십시오. 마지막 부분에 뭐라고 합니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이 다 이렇게 살았느니라. 오히려 피 흘림과 핍박의 자리가 더 큰 하나님의 복자라. 그래서 기독교는 패러독스 진리다.” “핍박 받고 죽는데 그게 어떻게 복이 되느냐?” “복이다.” 이렇게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영적 자부심이 있습니다. 어떠한 박해나 불이익이 와도 그 박해나 불이익을 하나님의 상급으로 받아들입니다. 요셉은 불쌍한 사람이었는가? 마리아는 불쌍했는가? 페르시아의 지식인 동방박사들이 무엇 때문에 생명을 걸고 거기까지 왔다가 인생을 어렵게 만들었는가? “그게 복이다. 순교가 다 복이다. 아기 예수를 만나는 한 가지 소박한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 페르시아에서 베들레헴까지, 이란에서 이스라엘까지 그 멀고도 먼 사막의 길을 이동수단으로 그 느린 낙타를 타고 얼마나 많이 걸어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달성했지 않습니까? 생명을 무릅쓰고 헤롯의 명령을 거역한 채 “이제는 됐어! 천사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돼. 헤롯의 명령은 거역이다.” 다른 길을 선택해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슨 뜻이 있습니까? 예수를 만난 자는 그 시간부터 다른 가치관의 길을 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위험스러운 일이 있다 하여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왔다는 이 기록들은 가장 큰 위엄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보편주의입니다. 유대 나라에도 박사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유대 나라에 더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유대 땅 베들레헴에 가득한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 멀고도 먼 페르시아의 동방박사들을 거기까지 오게 하셨습니까? 메시야는 유대인만을 위한 탄생이 아니라는 구원 사역의 보편주의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헤롯이 아기 예수를 죽이려 하니까 하나님은 애굽으로 피신시키셨습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은 죽이려 하고 애굽은 살려주는 의미가 되었습니다. 메시야 탄생은 애굽인에게 구원의 빛이 됨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구약의 요나서를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그토록 미워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요나를 보내지 않습니까? 그래서 12만 명의 니느웨 시민이 하나님께 돌아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하나님 구원의 보편주의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유대니즘에 사로잡히고 내셔널리즘, 국수주의가 가득해서 “구원의 백성은 아브라함의 혈통적 후손뿐이다.” 이것을 다 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 이게 뭡니까? “내가 전한 이 복음의 역사는 구원의 보편주의다. 온 세계 누구나 다 똑같이 구원을 받는 길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예루살렘뿐이 아니고 유대와 사마리아, 저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의 빛은 보편주의로 나타나는 것이다. 가라!”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나라의 지구 정 반대편에 있는 우리 한국 사람도 이렇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 시작을 동방박사들이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대강절이라서 아기 예수 탄생을 우리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데 이라크 전쟁 때 미국에서는 온 나라 전체가 노란색 리본을 다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집에도 대문에 노란 리본을 달고, 은행이고 마켓이고 할 것 없이 정부 기관이나 사설 단체나 다 리본을 달고 교회도 십자가에 노란 리본을 달고 사람들도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출근을 하고 온 나라가 다 노란색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빙고라고 하는 청년이 죄를 짓고 뉴욕 감옥에 갇혔습니다. 집에서는 부인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이 끊기고 편지가 안 오는 겁니다. 아무리 보내도 아내에게서 편지가 끊겼습니다. 그래서 빙고는 마음의 결정을 하고 ‘아! 마음이 변한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이렇게 죄를 짓고 감옥에 있으니 나를 기다릴 이유가 없을 것이다.’ 이제 몇 년이 지나고 석방이 가까웠을 때 그는 마지막 편지 한통을 자기 아내에게 보냈습니다. 『내가 이제 몇 월 며칟날 석방이 되어서 집으로 갑니다. 만약 당신이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준다면 마당에 있는 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시오. 그 리본이 달려있으면 당신이 나를 용서한 것으로 알고 문을 노크할 것이오. 만약 달려있지 않으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앞에서 돌아서서 내 갈 길을 외로이 가겠소.』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졸이면서 석방되는 날 자기 집 앞을 도달했을 때 자기가 도달한 마당에 있는 그 나무에 노란 리본이 100개가 걸려 있었습니다. 너무 기뻐서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아주 행복하게 살게 된 역사가 있습니다.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해서 “이라크 시민들의 자유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몸을 바치러 간 미군의 아들들이여! 우리는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무사히 돌아오라.” 노란 리본을 모두 다 달았던 것입니다. 지금 온 세계는 크리스마스 불빛으로 반짝이는데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여! 우리 집에도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오시고 이 나라에도 찾아오시고 어디에나 예수 그리스도여! 오시옵소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강절입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껍데기 성탄절은 가라!
마태복음 2:1-12 / 류공석 목사
전에 예루살렘에 살 때, 우리집 욕실 한켠에 책장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책장 중간 단쯤에 전동칫솔이 고정되어 있었고요. 그런데 칫솔을 꺼낼 때마다 눈에 띄는 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옆에 꽃혀 있어서 그렇기도 하고 책제목이 상당히 강렬합니다. 책 제목이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입니다.
한국에서도 많이 알려진 영성신학자 유진 피터슨이 다른 사람과 공저한 책인데, 제 개인적으로 유진 피터슨의 책을 좋아하기도 하고 목회신학에 대한 책이라 구입을 했었지요. 그런데 하루는 한국에서 목회할 때 아내가 그 책 제목을 보더니 저에게 힐긋 이러더군요. "하림아빠,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데?"
'기가 막혀서... 마누라가 이제는 못하는 말이 없구만... 주여, 속히 오시옵소서!'
속으로 생각하면서 못 들은 척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가까이 와서 제 얼굴을 빤히 보면서 "여보, 있잖아,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는데?" 하는 거예요.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고? 이 껍데기 사모야!" 그랬어요.
저희 부부 이렇게 삽니다. 서로 농담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 당시 저의 상태가 그리 썩 좋지 않아서 상당히 찔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목사이고 사역이 있으니까 주어진 일은 했지만 교회내의 안좋은 일들로 그 교회에 대한 회의가 들었던 때였고 '이 교회에 계속 있어야 하나'하는 갈등이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니까 주어진 일들은 어찌어찌 했는데 그 이상은 하지 않았던 겁니다. 그러다보니 목사로서의 영성도 눈에 띄게 흐트러진 것이 사실이었고요. 아내가 그걸 모를리가 없지요. 책 제목을 보고 장난끼있게 그런 말을 한 것인데, 저에게는 상당히 강한 질책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얼마전에 그 책 제목을 보면서 성탄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하누카죠? 우리가 하누카라는 이스라엘 절기 가운데 있지만, 교회력으로 보면 지금이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는 대강절 둘째 주일이고, 이제 얼마 있으면 성탄절 아닙니까?
이 책을 보면서 그는 생각이 '아, 맞다! 성탄절도 껍데기 성탄절일 수 있겠구나!'생각을 했습니다. 성탄절을 성탄절 되게 하는 것이 없다면 그것은 껍데기뿐인 성탄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세상을 보십시오. 진정한 성탄절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한국에 있을 때를 기억해보면 해마다 12월이 되면 백화점을 중심으로 화려한 장식도 하고 캐럴도 들을 수 있는데, 정작 예수님과는 별로 상관없는 성탄절, 오히려 산타클로스가 주인인 것으로 여겨지고, 그저 하나의 휴일정도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을 떠나 이스라엘에 와보니까 분명 이 땅은 성탄의 현장인데, 전혀 성탄과는 관계없이 이 계절이 지나가더군요. 다만 하누카란 절기가 성탄절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쟁중'이라고 합니다. 즉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탄절은 특정 종교의 교주가 태어난 날이므로 교주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것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름을 크리스마스 대신에 'happy holiday'로 부르자고 주장하는데, 지금 백화점이나 많은 마켓들, 심지어 인터넷 마켓까지도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반면 이들과 이에 맞서 크리스마스의 이름을 지키기 위한 기독교인들이 있어서 이들간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겁니다. 청교도들이 목숨을 걸고 세운 나라, 청교도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미국이 지금 그 모양이니 다른 나라들은 말할 것도 없겠지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탄의 현장인 이스라엘에서도, 청교도들의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미국에서도, 천만 기독교인들이 있다고 자랑하는 한국에서도 성탄의 참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지고 그저 즐기거나 하루밤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보내는 휴일 정도로 여겨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 그러니까 첫번째 성탄절 때도 이러한 현상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한 구절이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 :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의 헤롯을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다른 헤롯들, 사실은 그의 아들들인데, 그들과 구별하기 위해 '대헤롯'(Great Herod)이라고 부릅니다. 헤롯가문이 신약성경에 등장하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 안티파테르 덕분입니다.
안티파테르는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 출신, 즉 에돔 출신이었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왕조였던 하스모니안 왕가 내의 권력다툼에서 줄서기를 잘 해서 권력을 쥐게 됩니다.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차남 헤롯에게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도록 해줍니다. 그리고 얼마후 아버지가 정적에 독살되고, 얼마 후에는 대규모의 파르시안 유목민들이 쳐들어 오면서 헤롯의 형까지 살해 당하게 되고, 헤롯만 가족을 이끌고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헤롯은 가족들을 사해 변에 있는 천해의 요새 마사다에 남겨놓고 자신은 이집트로 갑니다. 당시 이집트의 통치자 클레오파트라의 주선으로 로마로 가게 되고, 당시 로마의 권력을 두고 경쟁을 했던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두 사람의 눈에 들어 원로원의 결정으로 유대지방의 왕으로 임명이 됩니다.
유대인도 아니고 땅도 없었지만 로마는 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해주었고, 2년후에 그는 이 땅에 들어와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며 마침내 유대의 왕이 되고 맙니다. 권력을 잡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이겨냈고 정적들과의 전쟁을 치뤘던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잡은 정권이고, 유대인이 아니기에 항상 자신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던 차에, 느닷없이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 헤롯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해서 차지하고 어떻게 지켜온 자리인데... 그 자리를 뺏을 아기가 태어났다니' 이건 너무나도 당황스럽고 위협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이러한 말로 헤롯 뿐만 아니라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헤롯이 유대인의 왕으로 있었지만, 그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합법적인 왕의 후손도 아니었고, 더욱이 유대인이 아닌 외국인이었습니다.
그러던차에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하고 술렁 거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소동하고 그 이후에 아무런 행동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헤롯은 그렇다치고, 헤롯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라면 적어도 그 진위를 알기 위해서라도 박사들을 만나거나 박사들을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 봐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저 술렁거리고 그저 당황하고 그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의 소문으로, 하나의 흥미있는 가십거리로 끝나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헤롯과 그의 무리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원하는대로 했지요.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인 싹을 제거하는 것, 그것이었습니다. 말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아기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8절)고 했지만 실상 그들이 원했던 것은 경배가 아니라 제거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아기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남자 아기들을 죽이는 죄악을 범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성탄절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물론 첫번째 성탄절 때 이런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아는 것처럼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귀한 예물을 가지고 예수님을 경배했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천군천사들로부터 주 나신 소식을 듣고 달려가 경배했습니다.
또한 얘수님께서 태어나신 지 팔일만에 율법에 따라 할례를 받으시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을 때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은 평생을 기다려온 메시아를 보고 경배하게 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첫번째 성탄절에는 두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 더 보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지요.
이것은 지난 2천여년 동안 2천번이 넘게 맞이한 성탄절을 통해 동일하게 있었던 일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 때쯤 되면 소동하는데, 뭔가 있는 듯이 술렁이고 바쁜 것은 같은데, 속을 보면 전혀 예수님과 상관없는 술렁임이고 소동입니다. 또한 이천년 전처럼 전혀 무관심한 이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켠에서는 조용하지만 성탄의 참 의미를 되새기며 인류의 구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다리며 경배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절기상으로는 대강절 둘째 주이고, 이제 보름쯤 후면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날입니다. 성탄을 맞이하는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술렁입니까? 술렁인다면 어떤 술렁임입니까? 조용하고 차분합니까? 그렇다면 어떤 조용함 차분함입니까?
아니, 조금 더 직설적으로 물어서, 여러분들에게는 성탄이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참 의미를 아는 그래서 기다려지고 주님께 기쁨과 감사로 경배하는 절기입니까? 아니면 매년 연말에 다가오는 휴일, happy holiday로 다가오거나, 이스라엘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보내듯이 여러분들도 그러하십니까?
결국 성탄은 우리의 자세에 따라, 우리의 마음에 따라 참된 성탄절로 다가올 수도 있고, 껍데기 성탄절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된 의미의 성탄입니까? 이것을 이스라엘의 절기인 하누카(חנוכה)와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주전 2세기 중반에 시라아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렸던 셀류쿠스 왕가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치세 때였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을 헬라화하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이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헬라화된 유대인들(헬라파 유대인)과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유대인들(민족주의 유대인)간의 대립과 갈등이 일어나는데, 이로인해서 야기된 사건이 바로 성전을 더럽힌 사건입니다. 그 과정에 대해서는 생략 하겠고, 에피파네스가 최후의 조치로 내린 칙령들이 있었습니다.
에피파네스는 자신의 헬라화 정책을 거부하며 저항하는 유대인들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그들의 종교에 있다고 판단을 한 겁니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가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특혜들을 폐지하고 사실상 유대교 관습을 금하는 칙령을 공포하게 됩니다.
구약 외경 중에 하나인 마카비 1서 1장 후반부터와 2서 6장에 따르면 에피파네스는 유대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칙령들을 내렸습니다. 정기적인 희생제사는 물론이고 안식일과 전통적인 절기를 지키는 것도 금지했고, 율법의 사본들을 파기하라고 명령했고, 어린이들의 할례를 금지했고, 이런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지키지 않으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교 제단들이 유대 땅 곳곳에 세워졌고, 그 제단들에서 부정한 짐승들이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고기를 먹도록 강요당했고, 먹지 않으면 사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이 그 끝을 보게 되는데, 바로 주전 167년 12월에 제우스 신의 제사가 예루살렘 성전에 도입되게 되는 것입니다. 제우스를 위한 제단과 신상이 성전 안에 세워졌고, 그 제단 위에서 돼지고기가 제물로 바쳐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니엘서 11:31에서 말하고 있는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 "이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이러한 조치들을 통해 유대인들을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습니다. 곧바로 온 유대는 무장 봉기로 들끓게 됩니다. 그중 가장 주도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다 마카비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유다 마카비는 예루살렘에 개선하여 더렵혀진 성전의 정화작업을 착수하게 됩니다. 제우스 제의에 씌였던 기구들은 모두 철거되었고, 더렵혀진 제단도 부수워 버렸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제단이 세워졌습니다.
성전이 모독된 날로부터 꼭 3년이 되는 주전 164년 12월, 정확하게는 유대력으로 키슬레브 월(12월에 해당) 25일에 축제의 큰 기쁨 가운데 성전은 다시 봉헌되었습니다. 그렇게 성전을 재봉헌했다는 의미가 바로 '하누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때는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 구별되어 거룩하게 세워진 성전이라도 할지라도 그것이 더렵혀지고,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들을 섬기는 곳으로 사용될 때 그곳은 더 이상이 성전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르켜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께서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영과 그분의 말씀이 거하시기에 우리는 성전입니다.
그런데, 정말 성전입니까? 정말 성전으로서 합당한 모습이냐 그 말입니다. 아니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때처럼, 성전이 성전이 아니었던 그 때처럼, 더렵혀진 성전으로 있지는 않습니까?
성전은 정결하게 유지되어야하고 구별되어 거룩함으로 유지되어야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성전이 더렵혀지면, 성전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아닌 다른 더러움이나 음란이나 우상으로 채워진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구절을 대할 때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기도합니다. 이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내 생각이 나의 무지함이나 교만으로 인한 착각은 아닌지, 행여 내가 성전으로서의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라면 긍휼히 여기사 나를 정결케 해주시고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유다 마카비가 예루살렘을 탈환한 후 성전을 정화했을 때 일어났던 일을 우리는 압니다. 성전을 정화할 때 성전을 밝히기위해 따로 준비된 오염되지 않은 기름, 올리브 유가 하루치밖에 없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답니다. 하루치의 기름으로 여드레 동안, 팔일 동안 불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누카 때는 촛대를 칠지 촛대인 '메노라'를 쓰지 않고 특별히 아홉개의 줄기가 있는 촛대를 쓰고 그것을 '하누키야'라고 합니다. 이것을 기념해서 지금도 하누카는 팔일 동안 지키는데 날마다 불을 밝히게됩니다. 그래서 하누카를 다른 말로는 "빛의 절기", 혹은 "광명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하루치 기름으로 팔일 동안 불을 밝혔는데 왜 촛대의 줄기가 아홉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의미를 아실 겁니다. 보통 가운데에 있는 줄기인데, 제일 깁니다. 그 가운데 있는 촛대의 이름을 "샤마쉬(שמש)"라고 하는데 그 뜻이 "종,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 촛대를 제일 먼저 밝히고 그 촛대로부터 차례 차례 점화되어 절기가 끝나기 전에 모두 점화됩니다.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촛대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누카가 성탄절과 얼마나 유사한 지를 알게 됩니다. 이 두 절기는 모두 이 땅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두 절기 모두 같은 날짜입니다. 비록 하누카가 음력인 유대력으로 지켜지기 때문에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습니다만 유대력에 따르면 성탄절과 같은 날짜입니다.
또한 이 날에는 특별한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는 성탄 캐럴을 부르고 유대인들은 하누카와 관련된 노래를 부릅니다. 두 사건 모두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놓은 역사적인 사건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두 절기에는 모두 빛이 밝혀집니다.
또한 두 절기에는 '종'(servant)이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데, 하누카 때는 중앙에 있는 촛대인 "샤마쉬"가(종을 의미), 그리고 성탄절 때는 고난의 종이신 메시야, 예수님께서 중심에 계십니다.
결국 하누카는 성탄절을 상징적이고 예표적으로 보여준 절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유대교 랍비들이 모르고 있거나 알더라도 거부하고 있을 뿐이지요.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의미는 바로 '빛'이라는 겁니다.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기 위해 팔일 동안 빛이 비추었다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큽니다. 하누키야에 있는 제일 긴 중앙의 촛대인 '샤마쉬'는 여호와 하나님의 종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8:1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누가복음 2:32에서는 예수님을 가르켜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누카의 촛대 하누키야의 중앙 줄기인 "샤마쉬"가 다른 모든 줄기를 점화시키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 즉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나 영접하여 믿는 모든 사람에게 빛으로 들어오실뿐만 아니라 빛을 부여해 주십니다.
빛이 무엇입니까? 빛은 어두움을 내어쫓습니다. 빛은 더러움을 밝히 드러내줍니다. 그래서 그 더러움을 보게하고 부끄럽게 하고 그것을 쫓아냅니다. 빛은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해줍니다. 빛은 생명을 주고 정화시키며 치유해줍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빛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 일을 하셨고, 지금도 행하시고 계십니다.
더렵혀진 성전이 다시 성전으로 회복되는데 빛이 필요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 역시 성전으로 회복되고, 성전으로 살아가고 성전으로 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빛되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이 필요하고 그분의 능력있는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변화시키고 거룩하게 하는 능력으로 살아계셔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목사이고 집사이고 성도라고 하는데, 정작 우리 안에 빛되신 예수님이 없고, 그분의 말씀이 없고, 그분의 영이 없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려고 하는 삶의 모습이 없다면 우리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성전이라고 하기에는 부끄럽고,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절 역시 껍데기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껍데기 성탄절이 아닌 참된 성탄절로 맞이 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참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지금의 흐트러지고, 더렵혀지고, 메말라버리고, 미지근하며 아무런 감동도 의미도 없는 모습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무감각해지고 변화되지 못한 그런 모습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우리 안에 다시금 빛되신 예수님을 모시어 그분의 빛으로 우리의 더러움과 어두움을 내어쫓아내어야 합니다. 그분의 빛으로 우리 안에 있는 영적 무감각과 모든 죄악을 쫓아내고 치유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성전으로 회복될 수 있고, 참된 성탄의 의미를 알아 기쁨과 감사로 예수님을 맞이하며 경배할 수 있습니다.
설교 서두에 껍데기 목회자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반대말인 알맹이 목회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목회자로서 있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로서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좋은 임지, 좋은 사례, 교회가 커지고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그런 것. 속된 말로 뜨는 것? 아니죠.
목회자로서 있어야 할 것은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확고한 소명의식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확고한 소명의식만 있다면 임지가 않좋아도, 사례가 안좋아도, 세상적으로 주목받지 못해도, 뜨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내가 예수님의 종이라는 소명의식만 확고히 살아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참된 목회자로서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자리에 올라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은 주인의 뜻을 헤아려 그 뜻을 행함으로써 주인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의 기쁨이 곧 종의 기쁨입니다. 종은 주인의 양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합니다. 종은 주인의 집을 목숨을 다해 관리하고 이끌어갑니다. 왭니까? 주인이 종을 사랑하고 있고, 종도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목회자로 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껍데기 목회자로 서고 싶지 않습니다. 어떤 곳에서 어떤 목회를 하던 주님의 종으로 묵묵히 맡겨주신 사명들을 감당하는 알맹이 목회자, 예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참된 목회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러한 바램은 모든 성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름뿐인 성도, 그 안에 빛도 없고 말씀도 없고 순종의 삶도 없는 성도는 껍데기 성도에 불과합니다. 알맹이 성도, 참된 성도라고 할 때는 그 안에 무엇이 있어야 하고 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아실겁니다.
우리가 껍데기가 아닌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빛되시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셔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시고, 그 빛으로 우리를 깨끗게 하시고, 우리를 치유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빛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빛을 비추게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그리할 때 우리는 껍데기가 아닌 참된 성도로 거듭날 수 있고,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절도 참된 성탄절이 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참된 성탄절의 의미가 사라진 세상에서, 그리고 성탄의 현장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빛되신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 60:1-3)
이 말씀이 우리에게 성육신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에게 빛을 주신 예수님의 그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고, 특별히 이 땅에 덮혀 있는 어두움의 장막을 겉어내어 예수께서 바로 온 세상의 왕이요, 또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심을 유대인들이 알고 주님께 경배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