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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우의 아름다운 당신에게<이준형의 보물상자 : 20세기 초중반을 빛낸 이탈리아 테너의 전설들 2>
오늘은 회사의 어쩔수 없는 상황으로 아쉽게도 파바로티만 들었다. 많이 아쉬웠지만 파바로티라도 건져서 다행이다 싶었다.
# 유시 비욜링 (Jussi Björling, 1911~1960)
여러 해 전에 영국의 한 음악 잡지가 유시 비욜링을 '20세기 최고의 테너'로 선정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결과에 놀랐을 것이다. 비욜링이 위대한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의 평가를 받았다는 말인가? 더욱이 비욜링에 대해서는 일부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먼저 비욜링의 생애를 살펴본 다음 그에 대한 찬사와 그렇지 못한 입장을 함께 생각해보겠다.
비욜링은 1911년 2월 스웨덴의 음악가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다비드 비욜링(David Bjöling)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라 보엠》의 로돌포를 부른 적도 있는 유명 테너였고, 모친은 피아니스트였다.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다비드는 자신의 커리어를 접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세 아들(올레(Olle), 괴스타(Göta), 유시(Jussi))과 함께 가족 중창단을 만들어 순회 공연을 다녔다. 유시가 겨우 9세 때 미국도 방문했다. 그러나 소프라노를 부르던 유시에게 변성기가 찾아오자 중창단의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고, 부친이 곧 세상을 떠남으로써 형제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 호구지책을 찾아야 할 상황에 놓였다.
비욜링은 '에릭 오데(Eric Ode)'란 가명으로 가벼운 노래를 부르며 생활비를 벌다가 1928년 스톡홀름 왕립 음악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성악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 스웨덴 왕립 오페라를 맡고 있던 바리톤 욘 포델(John Fordell)이 미성의 이 어린 테너에 주목했다. 그의 배려에 힘입어 비욜링은 불과 만 19세의 나이로 《돈 조반니》의 돈 오타비오를 부르며 화려하게 주역 데뷔 무대에 올랐다. 그 다음 맡은 역이 테너에게 최고의 난역으로 꼽히는 《윌리엄 텔》의 아르놀도였다니 포델이 얼마나 비욜링을 신뢰했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때부터 1935년까지 6년간 스웨덴 왕립 오페라에서 맡은 역이 무려 45개에 이른다고 한다. 거의 한 달 반마다 새로운 레퍼토리를 추가했다는 얘기이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스웨덴어로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오페라를 부르던 비욜링이 국제적 가수로 발돋움한 것은 1936년 빈 국립 가극장의 《아이다》를 통해서였다. 놀랍게도 이 실황은 코흐 슈반(Koch Schwann) 레이블로 발매되어 있다. 당시 지휘자 빅토르 데 사바타(Victor de Sabata, 1892∼1967)가 이 새로운 테너에게 매료됨으로써 유럽 각지의 가극장이 스웨덴의 젊은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이때부터 비욜링은 프라하, 드레스덴, 브뤼셀, 피렌체, 런던, 파리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1937년에는 로렌스 티벳이 타이틀 롤을 부른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으로 시카고에 데뷔했다. 이 역시 공전의 성공을 거두었고 이듬해 드디어 《라 보엠》으로 메트에 입성했다. 성공적 뉴욕 데뷔를 계기로 비욜링은 유럽 무대에 간간이 섰을 뿐 거의 모든 활동을 미국에서 하게 되었다. 특히 세계대전 중 스웨덴 포병으로 복무한 사실과 나치 치하의 빈 국립 가극장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독일어로 부를 것을 요청하자 한마디로 거절한 행동 등은 미국에서의 인기를 더욱 뜨겁게 했다.
너무나 절대적인 비욜링의 인기 탓에 미국에서는 당대 이탈리아의 위대한 테너들조차 빛을 잃을 정도였으며, 비욜링은 비두 사양(Bidu Sayão, 1902∼1999), 징카 밀라노프(Zinka Milanov, 1906∼1989), 리치아 알바네제(Licia Albanese, 1913∼2014), 도로시 커스텐(Dorothy Kirsten, 1910∼1992),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Victoria de Los Angeles, 1923∼2005),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 1922∼2004), 로버타 피터스(Roberta Peters, 1930∼) 등 메트로폴리탄의 영광의 역사를 기록한 수많은 명소프라노들을 상대로 긴 전성기를 구가했다. 비욜링은 출연료를 둘러싸고 메트의 감독 루돌프 빙과 트러블을 빚자 1957년 이 극장을 떠났다.
이듬해인 1958년, 비욜링은 스웨덴 공연을 갖던 중 건강상 심각한 이상을 발견했다. 《토스카》 3막을 부르다 갑자기 소리가 나지 않은 것이다. 심각한 경고였지만 자존심이 강한 비욜링은 연주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다행히 1959년에는 별 특이 사항 없이 지나갔고 도리어 비욜링의 가장 찬란한 해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저명한 오페라 평론가 존 스틴은 자신의 책에 1960년 3월 《라 보엠》 공연에서 비욜링의 병색이 깃든 모습, 그리고 눈에 띄게 작아진 성량을 기록했다. 그런데도 3막은 전성기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열창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다음달 영국 여왕 엘리자베트가 임석한 가운데 코벤트 가든에서 《라 보엠》이 공연되었다. 이때 비욜링이 2막에서 심장 발작을 일으켜 정신을 잃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바로 3월에 비욜링의 메트 동료이기도 했던 미국 최고의 바리톤 레너드 워렌이 공연 중에 사망한 사건이 있었기에 모두가 비욜링의 건강을 염려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목소리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여름에는 폭우 가운데 야외 리사이틀을 갖는가 하면 새로운 레코딩 계획도 잡아놓았다. 그러나 이미 비욜링의 건강 상태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1960년 9월 9일 집에서 수면 도중에 심장 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만 50세에도 이르지 못한 안타까운 나이였다.
2. 조르주 비제 (1838~1875)
오페라 <진주조개잡이> 중 '신성한 사원에서(Au fond du temple saint)'
- 유시 비욜링(테너), 로베트 메릴(바리톤), 레나토 첼리니(지휘), RCA 빅터 심포니 오케스트라
(4:38)
# 주세페 디 스테파노 (Giuseppe Di Stefano, 1921~2008)
3. 에르네스토 탈리아페리 (1889~1937)
'정열(Passione)'
- 주세페 디 스테파노(테너), 디노 올리비에리(지휘), 오케스트라
(4:39)
디 스테파노의 매력은 무엇일까? 유례없이 아름다운 미성?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전체적으로 20세기 전반기의 테너들은 요즘 테너들보다 리리코의 자질이 풍부했다. 티토 스키파, 존 맥코맥은 물론 디 스테파노보다 8년 선배인 페루치오 탈리아비니도 아주 가벼운 리리코 레제로의 최고 경지에 올라 있었으므로 여기에 익숙한 청중들에게 미성만으로 어필하기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어떤 특별함이 있었던 것일까? 후배 테너들이 디 스테파노에게 배울 점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하는 것은 바로 '씹어뱉듯이 명확하면서도 유려한 아티큘레이션(articulation)'이다. 그는 공개적으로 "음표를 따라하지 말고 오페라의 가사가 지닌 의미를 표현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라."고 주장했다. 주변에서는 그러다 보면 성악의 원칙에 어긋나 목소리를 해칠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그는 발성이란 혼자 깨우치는 것이며 교과서적 발성이란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주목하고 싶은 바는 이처럼 성악적 훈련에 연연하지 않았던 디 스테파노의 음성이 지닌 아마추어적 순결함이다. 그가 소리내는 방식은 다른 리릭 테너와 확실히 다르다. 벨칸토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으며 특히 고음에서 성악적으로 덜 훈련되어 정통적 발성과는 어긋난 모습이 확연하다. 이탈리아 테너들은 별 볼일 없는 가수라도 고음에서 멋진 한방을 들려줄 수 있도록 훈련받는다. 앞에서 부진했더라도 그 한방으로 깨끗이 사면받는 것이다. 하지만 디 스테파노는 반대다. 그의 소리는 실제음보다 높게 들리지만, 높은 A음만 올라가도 위태롭고 높은 C음에는 그야말로 젖 먹던 힘을 다해야 한다. 한마디로 그 결과는 항상 힘겨운 헐떡거림에 가깝다. 이것이 바로 그의 치명적 약점인 동시에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묘미를 보여주는 매력이기도 했다. 같은 리릭 테너라도 언제나 명료한 딕션을 포기하지 않던 디 스테파노의 이 같은 방식이 청중에게 한층 해맑은 인상을 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 카를로 베르곤치 (Carlo Bergonzi, 1924~2014)
바리톤에서 전향한 가장 우아한 테너
베르곤치는 1924년에 이탈리아의 비달렌초(Vidalenzo)에서 태어났다. 베르디의 고향 부세토(Busseto), 그리고 주세피나 스트레포니(Giuseppina Strepponi)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영위한 산타가타(Sant'Agata)의 빌라와도 가까운 곳이니 처음부터 베르디와의 인연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까. 오페라광이었던 부친의 손에 이끌려 6세 때 《일 트로바토레》를 구경하고는 단번에 부친과 취미를 공유하게 되었단다. 다음날 아침 칼 대신 파스타용 기구를 쥐고는 〈저 타오르는 불꽃을 보라〉를 기억해 열창했다니 말이다.
성악은 브레시아에서 개인 레슨을 받으며 시작했고 처음엔 테너가 아닌 바리톤이었다. 반나치 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2년간 허송세월을 보내기도 했지만 전쟁 후에는 파르마의 이토 음악원에 정식 등록해 레나타 테발디를 가르친 에토레 캄포갈리아니(Ettore Campogagliani)에게 배웠다. 그 역시 베르곤치를 바리톤이라고 생각했고, 라 스칼라 극장의 오디션에서 베르곤치를 만난 대지휘자 툴리오 세라핀마저 이를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데뷔는 1948년 《세비야의 이발사》의 피가로 역으로 했다. 하지만 자신의 고음 구사 능력을 믿은 베르곤치는 3년 만에 바리톤 생활을 청산하고 테너로 전환하기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그가 택한 방법은 위대한 이탈리아 선배 테너들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그 방법이란 엔리코 카루소, 베냐미노 질리, 티토 스키파, 아우렐리오 페르틸레 네 사람을 선정해 그들의 레코드를 계속 들으면서 거의 독학으로 스스로 깨우치는 것이었다. 현명하게도 베르곤치는 그들의 음성을 모방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연구한 것은 테크닉이었다. 즉 카루소는 어떻게 기름지고 강한 소리를 지탱할 수 있었는지, 질리의 '메차 보체'는 어떤 포지션으로 가능한 것인지, 페르틸레는 어떻게 한 패시지 안에서 '피아노'에서 '포르테'로 전환할 수 있었는지 등이 그가 파고든 과제였다. 베르곤치 스스로가 밝힌 바에 따르면 가장 많은 깨달음을 준 가수는 스키파였다고 한다. 고음에서도 밝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법, 흉성과 두성을 함께 사용하는 방법 등을 선배 스키파의 레코드를 통해 깨우친 것이었다.
성공적인 음역 전환이 이루어지자 베르곤치는 조르다노의 《안드레아 셰니에》로 테너 데뷔를 했다. 1955년에는 미국의 시카고 리릭 오페라에서 베리즈모 오페라의 명작인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외투》, 몬테메치의 《세 왕의 사랑》에 연속 출연함으로써 성공의 발판을 마련했다. 다음 시즌에는 메트에서 《일 트로바토레》와 《아이다》를 노래하게 되었는데 이때의 경력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베르디 테너라는 명성에 기폭제로 작용했다.
베르곤치는 역대 어느 테너보다도 베르디에 어울리는 명가수로 칭송받는다. 베르곤치의 격찬에 앞장선 대표적 인물이 이탈리아의 유명한 오페라학자 로돌포 첼레티(Rodolfo Celetti)인데 그는 "베르곤치가 입을 열어 베르디 한 소절만 불러도 마치 베르디가 다시 살아나 내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감동을 받는다."면서 "지난 40년 동안 테너는 물론 바리톤과 베이스 중에서도 베르곤치만큼 권위 있는 베르디를 들어보지 못했다."고 추켜올렸다. 베르디 오페라 중에서 베르곤치가 피한 작품은 《오텔로》가 유일하다. 그 역에는 짙은 음영을 드리운 정통 드라미티코가 제격이었기 때문에 베르곤치 스스로 사양했던 것이다.
첼레티가 전하는 베르디 가수로서 베르곤치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테크닉인데 첼레티는 그 중에서도 호흡의 테크닉을 강조한다. 베르디의 악구는 불규칙한 부분이 많고 적절한 호흡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경우도 있는데, 베르곤치는 리듬의 흐름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호흡하는 법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객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감쪽같이 호흡하는 기술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첼레티는 베르곤치의 부드러우면서도 정제된 음색, 포르테와 피아노를 쉽게 넘나드는 능력, 밝지만 우수를 머금은 표현력에 이르기까지 그 근원을 호흡의 테크닉에서 찾고 있다.
둘째는 프레이징이다. 베르디는 오페라 작곡가 중 악구의 뉘앙스를 가장 세밀하게 다루고 그 변화를 다양하게 구사하기로 유명한데, 베르곤치는 작곡가가 요구한 세세한 프레이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사실 힘으로 밀어붙이는 테너에게 베르곤치 스타일의 프레이징은 절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베르곤치의 프레이징이 부드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아이다》의 라다메스를 부른 것을 들어보면 상당한 파워가 뒷받침되고 있어 칼날 같은 정신력이 살아 있는 장군으로 간단히 변신하고 만다.
셋째는 아첸토(accento)로, 영어의 어택(attack)과 아티큘레이션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베르디의 오페라에는 노래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랑의 노래에서조차 담대하고 신랄한 어택이 필요한데, 페르틸레와 라우리-볼피 이래 끊어졌던 베르디 어택의 전통이 베르곤치에 의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어택과 아티큘레이션의 뉘앙스는 이탈리아인이 아닌 우리로서는 감지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하지만 베르곤치의 노래를 많이 듣다 보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을 수 있다. 그냥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음절의 강약과 템포의 조절이 다른 가수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런 어택과 아티큘레이션의 유창함 때문에 한층 리드미컬하면서도 노래의 굴곡이 잘 살아난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내 판단으론 루치아노 파바로티도 아첸토에 아주 뛰어난 가수지만 자신의 스타일과 맞지 않는 작품에서는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베르곤치는 고르게 안정된 실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넷째는 스타일이다. 극히 정제되고 귀족적인 광채를 뿜는 베르곤치 특유의 개성을 일컫는 것이다. 나는 베르곤치보다 아름다운 음성의 테너를 들어본 적은 있어도 그보다 더 우아한 테너는 알지 못한다. 심지어 베르곤치가 《리골레토》의 만토바 백작을 부르면 마치 여성의 미를 찬미하여 많은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세련된 남자로 느껴진다. 베르곤치는 고음마저도 우아하다. 하이 C를 노래할 때도 완전히 개방된 발성으로 시원스럽게 내뿜기보다는 호흡의 테크닉을 기초로 하여 지극히 단정한 소리를 낸다. 통렬한 맛은 없지만 베르곤치의 발성이라면 실제 공연에서 하이 C를 실패할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들 것이다.
너무 베르디와 관련된 얘기만 했는데, 사실 그의 레퍼토리는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 대부분을 포함한다. 비록 벨칸토 작곡가 중 로시니와 벨리니는 아닌 듯 보이지만 베르디의 직접적 선구가 되는 도니체티의 일부 작품에도 어울리는 스타일이다. 또한 베르디 이후의 폰키엘리, 푸치니, 그리고 베리즈모의 거의 모든 작품도 베르곤치의 영역에 들어온다.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에서 베르곤치는 베르디 오페라만큼이나 출중한 수준이며,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라든가 칠레아의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를 듣고 있으면 정말 잘 부른다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명백히 드라마틱 테너의 영역으로 알려진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는 어떠한가? 지휘자(카라얀)를 잘 만난 덕에 탁월한 레코딩(DG)을 남길 수 있었는데, 델 모나코나 코렐리의 격정적 비극 대신 면밀하게 설계된 심리극으로 새로운 차원의 해석을 펼쳤다고 할 것이다.
4. 주세페 베르디 (1813~1901)
< 리골레토> 중 4중창 '아름다운 아가씨여(Bella figlia dell'amore)'
- 카를로 베르곤치(테너), 레나타 스코토(질다), 피오렌차 코소토(메조),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바리톤), 라파엘 쿠벨리크(지휘), 라 스칼라 극장 오케스트라
(4:29)
# 체사레 발레티 (Cesare Valletti, 1922~2000)
알바와 같은 시기에 활약한 리릭 테너의 인기 스타이다. 감미로운 미성과 능란한 아질리타 창법은 지금도 여전히 매력적이다. ≪돈 조반니≫에서의 뛰어나게 품위 있는 돈 오타비오라든가 ≪라 트라비아타≫에서의 알프레도의 싱싱한 정열, 그리고 ≪사랑의 묘약≫에서의 감상적이고 우아한 청년 네모리노 등의 연기에서 호감을 준다.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에서는 칼라스를 상대로 명쾌한 콜로라투라를 선보이고 있다.(이키 구니오)
5. 프란체스코 칠레아 (1866~1950)
< 아를의 여인> 중 '페데리코의 탄식(Lamento di Federico)'
- 체사레 발레티(테너), 레오 토브먼(피아노)
(4:03)
# 루치아노 파바로티 (Luciano Pavarotti, 1935~2007)
6. 가에타노 도니제티 (1797~1848)
< 사랑의 묘약> 중 '남 몰래 흘리는 눈물(Una furtiva lagrima)'
- 루치아노 파바로티(테너), 리처드 보닝(지휘),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
(6:42)
# 프랑코 보니솔리 (Franco Bonisolli, 1938~2003)
작곡가 메노티에게 인정받아 데뷔했으며, 1963년 스폴레도 음악제에서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 중 왕자를 불러 주목받았다. 68년 빈 국립 오페라 극장, 70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출연 외에도 밀라노 스칼라 극장과 그밖의 오페라하우스에 초청되었고, 70년대에 일약 세계적인 인기 테너가 되었다. 주위를 개의치 않고 목청을 높이는 테너로서 열광적인 팬을 갖고 있다.(호리우치 오사무)
7. 루제로 레온카발로 (1857~1919)
'아침(Mattinata)'
- 프랑코 보니솔리(테너), 엘비오 몬티(지휘), 오케스트라 델루니오네 무지치스테 디 로마
(2:26)
첫댓글 좋은정보 얻어갑니다
예 감사합니다. 아침에 93.9MHZ는 정말 좋습니다. 물론 JOY4U도 좋고요.(표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