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대결이 정점에 이르렀던 1972년 세계 최초로 생중계돼 '세기의 대결'이라 불린 세계 체스선수권 대결에서 바비 피셔(미국)에 패배했던 옛 소련의 체스 그랜드마스터 보리스 스파스키가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AFP 통신이 27일(현지시간) 러시아체스연맹을 인용해 전했다. 연맹은 여러 세대의 체스 선수들이 그의 경기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며 그의 죽음이 " 이 나라에 커다란 손실"이라고 밝혔다.다만 사망 일시와 원인은 밝히지 않았다.
고인을 추모하는 글을 발빠르게 올린 이들 가운데 현재 그랜드마스터 아나톨리 카르포프도 있었는데 국영 타스 통신에 "그는 늘 내 아이돌 중 한 명이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고인과 피셔의 대결은 서구와 동구의 자존심 다툼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소련의 체스 거인이었던 그는 당대 최고 선수들과 최고 수준의 충돌과 가상의 실종 기간을 오가며 체크 판 위의 인생을 살았다.
1937년 레닌그라드(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고인은 일찍부터 신동이라 불리며 주니어 세계챔피언을 거쳐 열여덟 살에 역대 최연소 그랜드마스터로 기록됐다. 나치를 피해 가족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탈출해 (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고아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다섯 살 때 처음 체스를 배웠다고 했다. 종전 후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격적인 스타일이 동료들에게 소문이 나면서 소련 정부 차원에서 훈련에 집중하도록 그에게 장학금을 주고 코치를 붙여줬다. 그 뒤 '리가(라트비아 수도)의 마법사' 미하일 탈의 등장으로 그늘에 가려진다는 것을 깨닫고 체스계를 떠나 레닌그라드 대학에서 언론학 공부에 전념했다.
1961년 고인은 다시 체스계로 돌아와 소련 선수권을 거머쥐었다. 티그란 페트로시안에게 처음 도전했으나 세계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실패했다. 1969년 두 번째 도전 끝에 페트로시안을 간발의 차로 물리치고 세계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는 2016년 "난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해 본 적이 없다. 모든 것이 자체적으로 굴러갔다. 일이 급속히 진전됐다(leaps and bounds)"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스파스키는 타이틀을 딱 3년만 지켜낼 수 있었다. 세기의 대결은 아이슬란드에서 치러졌다. 그에겐 스물아홉 살의 신동 피셔를 꺾어 커리어를 확고히 다질 기회였다. 소련은 1948년 이후 체스 왕좌를 내준 적이 없어서 스파스키에게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압박했다. 더욱이 피셔는 공공연히 소련 체스 선수들을 비난했다.
초반은 스파스키가 편안하게 앞서 갔는데 피셔가 갑자기 전세를 뒤집어 소련 선수들의 무패 연속 기록을 박살냈다. 모스크바는 뺨을 때려맞았다고 울분을 토로했지만, 스파스키는 "부수적인 책임"을 면하게 돼 안도했다.
거의 40년이 흐른 뒤 고인은 "피셔가 내게서 타이틀을 빼앗은 뒤 내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여러분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난 엄청 무거운 부담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며 자유로운 숨을 내뱉었다"고 돌아봤다.
이 대결은 수많은 책과 다큐멘터리, 영화로 다뤄졌다. 가장 유명한 것이 월터 테비스의 소설 '퀸스 갬빗'을 바탕으로 각색해 제작된 2020년 넷플릭스 시리즈가 이 일에 영감을 제공받았다. 스파스키는 이 패배 뒤 내리막길을 걸었다.
4년 뒤 1976년에 그는 러시아에 뿌리를 둔 프랑스 가문의 여인과 결혼하며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는 1978년 프랑스 영주권을 얻었다. 그 뒤 몇 년 동안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다가 1992년 유고슬라비아에서 피셔과 비공식 설욕전에 나섰다.
고인의 말년은 나빠진 건강, 의문의 가족 갈등으로 얼룩졌다. 두 차례 뇌졸중을 일으킨 그는 2012년 부인과 누이의 조언을 뿌리치고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로 돌아갔다. 귀국 후 그는 러시아 TV 인터뷰를 통해 "난 스크래치를 극복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두렵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2008년 피셔가 세상을 떠나 묻힌 아이슬란드의 한 작은 공동묘지를 찾았다. 당시 스파스키는 수행하던 취재진에게 "이웃한 곳을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스파스키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었으며 친척들이 러시아체스연맹에 그의 죽음을 알렸다고 알렉산데르 차체프 사무총장이 RIA 노보스티 통신에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