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부쳐
안삼환(서울대 독문과 명예교수)
한국의 작가 한강이 2024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다.
일본의 신문들을 보자면, 1994년에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30년 만에 다시 일본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3의 일본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리라는 큰 기대가 무산된 것을 몹시 아쉬워하는 표제어를 단 다음, 한국의 작가 한강이 금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부제로 전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일본인들의 기대가 자못 컸던 모양이다. 주지하다시피, 하루키의 문학세계는 전후부터 현금까지 대체로 평화로웠던 일본 사회를 배경으로, 식도락, 음악 감상, 바에서 술 마시기, 교양 여행 등 일본 교양인의 일상을 섬세하고도 유려한 필치로 그려냄으로써, 마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에 나오는 이런 일본인들의 정서가 아시아적 심미안을 대표하는 듯했다.
잠시, 1895년 1월, 조선의 나주로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일본군은 조선의 서남해안에서 패잔병으로 귀가하던 동학 농민들을 체포, 문초, 살해하여 나주 초토영(招討營) 맞은 편의 야산에 680구의 시체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았다. “근처에는 악취가 심하고 땅은 시체에서 나오는 기름이 얼어붙어서 마치 백은(白銀)과 같았다”라는 어느 일본병사의 「종군일지」 기록에서 보듯이, 일본은 을사늑약 10년 전에 이미 남의 나라 국민들을 함부로 도륙했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오늘날에도 메이지시대(1868-1912)의 ‘영광’과 ‘무오류’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에 대한 반성은 없이, 그들만의 평화시대를 구가해 온 것이었다. 동학농민군 살육 말고도, 을사늑약과 한일 강제합병이 일본인에겐 다 ‘영광스럽고’ ‘오류가 절대 있을 수 없는’ 메이지시대의 일이다.
아무튼, 이 일제강점기가 끝나자 한국은 분단과 좌우 갈등, 그리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었으며, 연이은 독재자들의 억압에 항거하다가 수많은 희생자가 생겨났다. 일본 현대 문학이 평화시대를 구가하며 아시아적 정서를 대표하는 우아한 교양인의 문학으로 성숙하는 동안, 한국문학은 연속되는 민족적 비극의 늪에서 헤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한강의 최근작에서는 4.3항쟁 때 제주도에서 희생된 영혼들을 해원(解冤)해 줄 수 없어 그들과 ‘작별이 불가능한’ 인선과 경하의 극심한 고통이 다루어지고 있다. 이 인물들의 고통을 드러내고자 그들과 한 몸이 되어 슬피 울고 몸부림친 작가 한강의 초인적 감정이입과 분투는 독자 누구나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아프고 눈물겹다.
설령 위의 한·일 두 작가의 문체가 다소 환상적인 데서 비슷한 점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그들 작품의 긴박성과 심도를 비교해 볼 때, 비단 스웨덴 한림원 노벨위원회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강의 처절한 작품을 인류문명사적으로 볼 때 더 가치있게 평가할 것은 자명하다.
이번에 스웨덴 한림원의 노벨위원회가 피땀 어린 한반도, 이 비극의 토양에서 작품을 거두어 낸 작가 한강에게 2024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것은 그동안 다소 실추했던 노벨문학상의 권위를 오랜만에 회복해 낸 훌륭한 선정으로 판단되며, 한일 관계로 좁혀 볼 때는 비극적 우리 역사의 행복한 문학적 대반전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비단 작가 한강 개인의 영예일 뿐만 아니라, 고난의 길을 걸어온 한국문학 전반에도 승리와 영광을 안겨주면서, 결국 우리 한국인 모두에게 자긍심을 되돌려 주었다.
“한국의 딸 한강이여, 스웨덴 한림원 노벨위원회가 드디어 알아본 한국문학의 연꽃이여, 그대는 승리하였다. 결코 무라카미 하루키와의 경쟁에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그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마침내 우리 한국 문학에다, 아니, 우리 한국민 전체에게 승리의 월계관을 선사했다! 장하다, 위대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영광의 승리로 체현해 낸 한국의 딸이여! 우리 한국 국민은 그대의 분투에 감사하며, 환희의 축하를 보낸다. 소월이여, 육사여, 박경리 님, 김수영 님, 최인훈 님, 이청준 님, 지하에서 기뻐하소서! 우리의 딸 한강이 드디어 이겼나이다! 때를 만나지 못한 고은 시인이여, 황석영 작가여, 두 분도 이 상을 타실 만했지만, 아마도 아직 때가 되지 않았던 듯합니다. 이제 후배인 한강이 수상자가 되었으니, 함께 기뻐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에 가려 서구인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던 우리 한국문학 100년이 이루어 놓은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거대한 산이 드디어 세계인들의 눈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배들의 고투가 쌓이고 쌓인 위에 마침내 세계인들의 주목과 인정을 받게 된 작가 한강! 앞으로 세계인들은 이 한강이라는 ‘빛나는 등대’를 보고서 한국, 한국인, 한국문화라는 ‘항구’로 대거 찾아들 것이다.
“한강이여, 우리는 그대가 우리 한국문학을 대표하고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대가 우리 한국문화를 상징할 것이라는 사실이 더욱 더 기쁘다. 왜냐하면, 그대는 이 땅의 모든 억울한 희생자들의 영혼 안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슬피 울고 몸부림친 나머지 자신에게 무슨 흠결 같은 걸 만들 겨를조차도 없었을 듯하니 말이다. 앞으로도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지 않고서 늘 약한 자의 편에 설 것이라는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의 이번 수상이 더욱 빛나고, 우리는 더욱 기쁘다. 하지만, 조금 찬찬히 생각해 보자니, 그대도 작가이기 이전에 행복할 권리가 있는 한 개인이니만큼,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부디 그 극단적 고통에의 감정이입에서는 조금 벗어나, 그대의 아들의 아들이나 딸이 그대의 품 안으로 안겨들 때, 손주를 정답고 여유있게 안아주는 그런 ‘고운 할머니’가 되시기를 충심으로 소망하게 되는구나! 그렇게 되자면, 이제 문화대국으로 접어든 이 나라에서 유독 홀로 절뚝거리며 뒤따라오고 있는 저 못난 정치만 좀 제대로 됐으면 좋으련만!”
(2024년 10월 23일 자, 교수신문에 실림. 원고를 다시 읽고 조금 고쳐 페북에 포스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