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영 포구
“청자빛 하늘이 / 육모정 탑 위에 그린 듯이 곱고 / 연못 창포잎에 / 여인네 맵시 위에 / 감미로운 첫여름이 흐른다. / 라일락 숲에 /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는 정오 / 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 / 내가 웬 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 / 밀물처럼 가슴속으로 몰려드는 향수를 / 어찌하는 수 없어 / 눈은 먼 데 하늘을 본다. / 긴 담을 끼고 외딴 길을 걸으며 걸으며 …”
앞 단락은 노천명의 ‘푸른 오월’ 전반부다. 바야흐로 오월 중순이다. ‘계절의 여왕’은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더 낯익은 노천명이 남긴 시구다. 시인의 친일과 좌익 활동은 역사에 맡기련다. 우리는 시인에게 허락을 받지 않음에도 해마다 오월이 오면 누구나 ‘계절의 여왕’이란 이름을 빌려 쓰고 있다. 이 명구는 지적소유권을 벗어나 보통명사화 되다시피 했다.
신록이 한층 더 싱그러운 오월 중순이다. 낮은 구름이 드리운 둘째 월요일 퇴근 후였다. 학교에서 이른 저녁을 때우기보다 날이 어두워오기 전 내가 사는 동네 근처로 발길을 나서고 싶었다. 연사마을 앞 버스 정류소로 나가 연초삼거리를 지나 어딘가로 가는 버스를 물색했다. 내가 사는 연초에선 거제의 동북부로 가는 옥포와 장승포 하청과 장목 버스가 모두 거쳐 지난다.
나는 그새 웬만한 곳으로 다녀와 아직 발길이 닿지 않은 구영 포구를 택했다. 구영은 31번 버스 종점인 장목 끄트머리다. 고현을 출발해 십여 분 후 연사마을에 닿은 31번 버스를 타고 연초삼거리에서 북쪽으로 돌아갔다. 다공에서 덕치를 넘으니 하청이었다. 하청 일대 산자락은 그곳 특유의 식생이 두드러졌다. 하청은 맹종죽 곳곳에 퍼져 자라 대나무 숲이 눈에 확 띄었다.
호수 같은 바다 저편 칠천도는 연륙교가 없었다면 섬이 아닌 뭍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실전삼거리에서 장문포왜성 표지판을 돌아가니 장목이었다. 차창 밖 산기슭 오동나무가 보라색 꽃을 피워 눈길을 끌었다. 해변에는 면소재지답게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회센터 건물과 초등학교와 중학교도 있었다. 옥포와 외포로 가는 갈림길을 스쳐 지나 관포로 가는 길목을 들었다.
관포고개를 넘으니 거가대교로 통하는 도로를 지하 통로로 지났다. 관포는 외포에서 농소로 가는 중간 포구였다. 조망이 좋은 자리엔 펜션이 몇 채 들어서 있었다. 울타리엔 넝쿨장미가 줄기를 뻗쳐 가면서 빨간 꽃을 달았다. 그 곁 언덕에는 토종 장미라 할 수 있는 하얀 찔레꽃이 무더기로 피어났다. 장미꽃과 찔레꽃을 동시에 보니 피자와 파전으로 대비된 생각이 떠올랐다.
농소는 몽돌해수욕장이었다. 그곳 역시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자리에 리조트가 들어서 있었다. 거가대교를 건너 가까운 곳이었다. 내가 탄 시내버스는 농소에서 산마루를 돌라 하유로 갔다. 연륙교가 스쳐 지나는 저도가 저만치 보였다. 저도는 행정구역이 장목면 유호리로 하유에서 빤히 보였다. 하유와 이어진 상유까지는 내가 어느 날 비가 오던 새벽에 다녀간 바 있는 포구다.
상유를 거친 버스는 포구를 되돌아 나와 예각으로 크게 틀어 고갯마루를 넘어 구영으로 갔다. 구영은 거제 최북단 포구로 진해와 마주한 곳이었다. 날이 아직 저물지 않았지만 날씨가 흐리고 옅은 해무가 끼어 진해 시가지와 안민고개 능선과 시루봉이 훤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해군사관학교와 해군기지도 가깝다. 태양광 발전 시설로 둘러친 명동 해양솔라파크가 어렴풋이 보였다.
구영 종점에서 십여 분 머문 버스는 장목 한 바퀴 돌았다. 상유고개를 넘어 다시 포구로 내려갔다. 폐교가 된 초등학교도 있는 제법 큰 마을은 황포였다. 건너편 뭍은 마산 구산으로 지척이었다. 장목으로 향하는 연안을 돌아가니 해수욕장이 나오고 이름이 특이한 ‘답답고개’를 넘었다. 장목 못 미쳐 어딘가 골프장이 있는 듯했다. 아까 왔던 길을 되짚어 연초삼거리로 나갔다. 19.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