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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 시절 예수
눅 2:41-52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눅 2:41-52 / [예수의 소년 시절] 예수께서는 열두 살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유월절 잔치에 참석하러 예루살렘에 가셨다. 43) 그런데 잔치가 끝나고 나사렛으로 돌아갈 때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물러 계셨다. 예수의 부모는 첫날에는 예수를 찾지 않았다. 44) 일행 중에 섞여서 친구들과 같이 오려니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저녁까지도 예수께서 보이지 않자 친척들과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예수의 행방을 물었다. 45) 그러나 아무데서도 찾지 못하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 46-47) 사흘후에야 그들은 예수를 성전 안에서 찾아냈다. 예수께서는 율법교사들과 함께 앉아서 율법 문제를 토론하고 계셨다. 그리고 듣는 사람 모두가 예수의 슬기로운 대답에 경탄하고 있었다. 48) 예수의 부모 역시 그 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니가 예수께 말하였다. `얘야, 왜 이렇게 우리를 애태우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곳곳을 찾아 헤맸단다.' 4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왜 나를 그렇게 찾아 다니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 집인 성전에 있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50) 그러나 부모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
본문은 예수의 유년 시절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일화는 예수 스스로 자신을 신적인 존재인 메시야로 자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편 누가는 여느 인간과 같은 성장 과정을 거친 예수를 소개함으로써 사람의 아들로 오신 예수를 강조합니다. 이처럼 예수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조화롭게 녹아 있습니다.
놀랍게 여기더라(41-47) 열두 살 때 절기의 관례를 따라 부모님과 같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예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부모와 떨어져 혼자가 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유대인의 교육방식대로 선생들 가운데 앉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열두 살 아이 예수와 문답식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던 선생들은 예수의 지혜와 대답을 듣고 깜짝 놀랍니다. 그 안에 신적인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48-51) 뒤늦게 예수를 잃어버린 것을 알고 예수를 찾던 부모는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하고 책망합니다. 그러자 예수는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고 대답하십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생들과의 대화에 이어 부모의 대화에서도 자신이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이 일화는 예수 자신이 메시야라는 걸 이미 자각하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마 11:25; 막 14:36; 눅 22:29; 23:46; 요 5:17).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의 신성이 예수의 확신 있는 언행 속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모들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52)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에 가신 예수는 부모님께 계속 순종하십니다. 누가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신 예수의 말씀이 부모에 대한 불순종이 아니라 예수의 신성을 드러내기 위한 사건이었음을 강조합니다. 나사렛에서 예수는 모든 면이 조화롭게 성장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사람의 아들이셨던 예수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치우치지 않으며 균형 있게 성장하셨습니다.
적용: 당신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각과 확신을 가진 ‘사람의 아들’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많은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나는 하나님과 친밀하고 성숙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안일함과 형식적인 신앙생활 속에서 예수와 함께 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진정으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뜻과 의미를 바르게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로 간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 설 교 >
예수님의 성장
눅 2:40 / 이중표 목사
우리는 모두 어린시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린시절은 한마디로 성장하는 시기입니다. 어린시절은 인생의 전 과정에서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어린시절에 받은 영향으로 우리는 일생을 살아갑니다. 어린시절에 좋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그 영향 때문에 위대한 삶을 성취하고 어렸을 때 상처입고 굴절된 인간으로 형성된 사람들은 평생 거기에 속박 당하면서 자기도 괴롭고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괴롭히면서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어린 아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장하는 어린 아이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입니다. 물론 외형적으로는 성장할 수 있지만 내면적, 정신적,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체 어린 아이와 같은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장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에게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영양이 부족하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둘째, 병들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셋째, 상처 받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깊이 성찰하면 어린 아이와 같이 아직도 성장하지 못한 자아상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현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나 가족들과 원만한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장하지 못한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병든 자아상을 가진 사람들은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합니다. 부부간에 화목하지 못합니다. 소속된 모임이나 삶의 현장을 건설적으로 형성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똑똑한 것과는 다릅니다. 공부 많이 하고 출세하는 것과 다릅니다. 출세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군대에서 장군도 되고, 회사에서 사장도 되고, 공부해서 대학 교수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 성장하지 못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출세해도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속에 성장하지 못한 성인 아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끝내 자라지 못한 체 죽는 사람이 있고 나중에 발견하고 어린 아이를 자라게 해서 성숙된 인격으로 변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장을 두 가지로 생각합니다. 신체적인 성장과 정신적인 성장입니다. 신체적인 성장은 외모가 잘 자라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경제가 성장하면서 아이들의 신체는 옛날에 비해 10cm이상 더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성장은 둔화되었습니다. 학교가 어느 정도 정신적인 성장에는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인격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선생은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어서 정신적 성장에 장애를 줍니다. 그런데 교회는 인격적 성장과 함께 영적 성장에도 도움을 줍니다. 영적 성장은 우리의 인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영성적 성장에 대해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아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어린시절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서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여기에서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라면서 강하여졌다.’ 예수님은 세월이 갈수록 강하여졌습니다. ‘강하여졌다’는 말은 단순한 소년기의 신체적 성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이 견고해지고, 인격적으로 성장하면서 육체까지도 균형잡힌 인간으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지혜가 충족하다.’ 지혜가 날로 풍성해졌다는 말입니다. 지혜는 공부하는 지식과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식을 말합니다. 여자가 공부를 많이 했어도 지혜가 없으면 살림을 못합니다. 기름기 있는 그릇을 닦을 때도 지혜가 없는 여자는 그것을 그냥 물에 담궈서 씻습니다. 기름이 묻은 그릇을 그냥 물로 씻으면 그릇은 안 닦아지고 물만 버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여자는 기름을 휴지로 닦아낸 다음에 물로 씻습니다. 지혜롭지 못한 여자와 지혜로운 여자는 살림하는 규모도 다릅니다. 지혜로운 여자는 백화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도 먹을 만큼만 삽니다. 그런데 지혜롭지 못한 여자는 잔뜩 사다가 냉장고에 쌓아놓기 때문에 나중에는 썩어서 버립니다. 그래서 남자나 여자나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부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예수님처럼 균형있는 건강한 아이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어야 됩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혜롭고, 강하고, 능력있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잘 자라도록 도와주는 대리자로 부모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부모를 잘못 만나서 고생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 가지 만남이 있습니다. 첫째는 불행한 만남, 둘째는 좋은 만남, 셋째는 은혜의 만남입니다. 불행한 만남은 내가 그 부모에게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태어나보니까 아버지가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폭행하고, 폭언하고 인격적으로 정상적인 성장을 하도록 도움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속에 상처를 입고 굴절된 자아상을 형성해서 자존감을 잃고 살아갑니다. 또 어렸을 때 사랑받지 못해서 아이들이 가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비행 청소년들과 함께 어울리다가 타락해서 교도소에 가고 전과자가 되어 일생을 범죄자로 살아가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됩니다. 좋은 만남은 부모가 자녀들을 잘 돌봐주고, 공부하도록 격려해주고, 유학을 보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높은 수준의 만남이 있습니다. 은혜의 만남입니다. 이것은 자녀들이 은혜롭게 자라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가 신앙적으로 믿음을 가졌기에 유아세례 받은 아이들도 있고 모태로부터 신앙을 받아서 ‘나는 모태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신앙적으로는 교회 안에서 일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어린시절부터 지도를 받았지만 그 부모가 내적인 결함을 가지고 아이들을 돌봤기 때문에 상처가 깃든 아이들이 있습니다. 목사의 자녀 가운데 상처입은 자녀들이 많고 교회 중직에 있는 교인의 자녀들이 상처를 입고 ‘나는 우리 부모와 같이 예수 안믿겠다.’ 하면서 부모가 믿는 예수를 등지고 탈선하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속에 성장하지 못한 내적인 자아가 있는 것을 발견해야 됩니다. 자기가 성장하지 못하면 남이 성장하는데 장애를 줍니다. 어른이 되어서 어린 아이를 지도해야 되는데 어린 아이가 그대로 남아서 어린 아이를 지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이 정상적인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됩니다.
자녀들을 인도할 때 몇 가지 예수님이 성장하는 과정을 봐야 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성장했습니다. 사람의 아들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의 성장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장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성장입니다. 대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그러한 의식을 갖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분명한 의식을 길러주어야 되는데 이 의식이 없게 되면 아이들이 열등의식을 갖게 됩니다. 부모를 볼 때 사회적으로 별볼일 없고, 가정 형편도 어렵고, 또 인격적으로도 부모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을 때 아이들이 자존감의 상처를 입고 굴절된 자아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기가 죽습니다. 이 기를 살려주는데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자존감을 심어주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열두 살 무렵입니다.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눅 2:41-42)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이것은 소년기의 시작입니다. 일반적으로 열두 살 이 되면 소년기가 되는데 이때는 신체적인 변화가 옵니다. 몸에서 호르몬이 분비되고 목소리에 변성기가 옵니다. 또 얼굴에는 여드름의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는 홀로 있기를 좋아합니다. 부모에게서 떠나기 때문에 이유기라고 말합니다. 이 때는 부모의 품을 떠납니다. 부모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기 방에서 홀로 있는 것을 좋아하고 이 때부터는 자기 마음에 맞는 걸 프랜드, 보이 프랜드를 만듭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머리를 감고 용모를 다듬기 시작하면서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식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때를 가리켜서 사춘기라고 말합니다.
사춘기는 봄을 맞았다는 것입니다. 봄이 오면 꽃이 핍니다. 그러나 연약한 싹으로 꽃을 피우기 때문에 비바람이 세게 친다든지, 된서리가 내린다든지, 찬바람이 불면 떨어져버립니다. 그리고 그때 병균이 들어가면 그해 농사는 겉모양만 있지 속은 다 병들어버립니다. 이와같이 사춘기 때 그때 이 속에 병든 상처가 깃들면 일생을 그것으로 그 사람은 인격이 형성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열두 살 때의 모습은 건강한 소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부모를 따라서 예루살렘 성전에 갔습니다. 성전에 가서 명절을 잘 지켰습니다. 명절을 잘 지키고 그 부모가 집으로 하룻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가다보니까 예수가 안보이는 것입니다. 대단한 부모들입니다. 어떻게 아들과 함께 하룻길을 가면서 아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를까요. 집으로 빨리 돌아가려는 마음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가다 보니까 아들이 안보여서 아들을 찾기 위해 사흘 동안 예루살렘을 헤매다가 머릿속에 생각합니다. ‘혹시 성전에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성전에 갔더니 예수님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말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이렇게 부모에게 근심을 끼쳤느냐”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어찌 알지 못하였나이까”
예수님은 성장기에 자기 육신의 아버지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를 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갈릴리 나사렛의 목수입니다. 갈릴리 천대받는 지역 출신입니다. 어머니는 목수의 부인입니다. 예루살렘에 오면 랍비들, 높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가 되지 않는 참으로 초라한 부모입니다. 그때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가출할 수가 있습니다. 잘못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잘못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어찌 모르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위대한 존재가 되겠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은 엄청난 자존감입니다. 이런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아들로 성장해야 되고 자녀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해야 됩니다. 성장을 멈추지 마십시오. 육체는 성장을 멈추었지만 정신적인 성장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부를 안하니까 지성도 성장이 멈춥니다. 또한 내적인 자아를 성숙시키려는 노력도 안합니다. 그저 어렸을 때 자라지 못한 그대로 인생을 살면서 나이많은 권위만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끊임없는 성장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보면서 속으로 ‘저 아이는 내 자녀가 아니지 하나님의 자녀지’ 하면서도 겉으로는 자기 자녀인양 윽박지르고 호통칩니다. 나도 옛날에 아들에게 잘못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훗날 제 아들을 붙잡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들아 아버지를 용서해다요. 나는 네게 대리자로서의 아버지가 되지 못했다. 아들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자학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이란다. 나도 어린시절에 성장하지 못한 상처가 있고 자아상이 있지만 이제 나이 들어 이 자아를 성장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네 아버지가 너에게 상처를 주었다든지 아픔을 주어서 너의 성장을 방해했다면 네 아버지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성장해다오.” 진실로 눈물 흘리면서 용서를 빌었고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부모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그 인간됨을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어머니는 자녀 열 여섯명을 기르면서 자녀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너희는 날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 “역사를 창조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켰느냐?” “하나님이 시켰습니다.”
사랑받는 아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
40절에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성장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다시 또 합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 사랑스러워가시더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 자신에게 사랑받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야 됩니다. 여기에서 자기 존재를 성장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이나, 신체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지위를 무한정 성장시킬 수는 없지만 자기 존재를 사랑받는 존재로 만들어가야 됩니다. 어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중요한 인격적 요소가 바로 사랑받는 것입니다. 사랑받는 것이 인격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대학 교수는 되었는데 사랑받지 못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성장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공부는 많이 했는데 가정에 돌아가서 사랑받지 못하는 아내도 있고 며느리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격적으로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부 많이 하고 지위를 높이는 것과 인격의 성장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받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 13:11)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너희가 장성한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서는 안된다. 어린 아이를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고린도 교인들은 신앙적으로 장성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방언을 합니다. 통변을 합니다. 그런데 만나면 남 흉을 봅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신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병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나면 싸웁니다. 어린 아이와 같습니다. ‘너희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를 버렸노라’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는 어떤 존재였느냐?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지금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의 하는 얘기를 못알아 듣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모님을 어떻게 했느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예수님이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것을 어찌 알지 못하였나이까”라고 말하는데도 못알아 듣습니다.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기 부모의 부족한 것을 말하지 않고 받들어 순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정에 돌아가서 남편이 모자란다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을 받들어 주어야 됩니다. 시어머니가 모자라서 상식이 안통해도 받들어주어야 됩니다. 그리고 회사에 가서 윗사람이 모자라도 받들어 주어야 됩니다. 그래야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목표를 향해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장의 놀라운 비밀을 여기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표를 향하여 성장합니다. 자라며 강하여진 목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죽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예수님의 어린시절 얘기는 열두 살 때 한 번 나옵니다. 예수님의 탄생기사가 있고 열두 살 때 얘기가 한번 나오고는 30세로 넘어갑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죽는 목표를 향해서 성장한다는 얘기만 나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사랑받는 사람으로 그 목표를 향해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 3:21-22)
예수가 계속 성장을 해서 30세 되던 해에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데 그 경지가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 기뻐하는 자다.”라는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목표로 향해서 성장해 간 것입니다.
여러분, 성장하십시오. 우리의 자녀도 성장해야 되고 나도 성장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밀레의 “만종”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석양 노을이 짙어갈 무렵 밭에서 이삭을 줍던 부부가 저녁 종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고전적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3대 신성을 담은 그림입니다. 노동의 신성, 부부의 신성, 종교의 신성, 그래서 우리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감동을 받습니다.
밀레에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어린시절에 영향을 준 분이 있습니다. 바로 밀레의 부모입니다. 밀레의 머릿속에는 부모님이 농촌에서 일하고 돌아올 때마다 저녁 종소리가 나면 머리 숙여 기도하는 모습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밀레가 파리로 유학을 떠날 때 할머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밀레야 너는 화가가 되기 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그림을 그리려면 영원을 바라보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그날을 생각하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이런 할머니의 신앙정신이 그런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성장하지 못한 자아상을 가진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녀들을 예수님처럼 성장하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한마디를 말하고 있습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40절)
우리는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자녀를 온전케 할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예수를 가르칠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기도가 있다면 “주여, 주의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아들로 성장해야 합니다. 사랑받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됩니다. 그리스도의 별세의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서 성장해야 됩니다.
주님을 잃어버린 사람들
눅 2:40-45 / 조상호 목사
먼저 한 가정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시작하겠습니다. 어떤 가정의 아내가 식사 준비를 위해 요리를 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실컷 수다를 떨다보니,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얘, 잠깐만 기다려, 가스 불 끄고 올께!”라고 말하고 부엌에 가서 가스 불을 껐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 시간 전에 소금으로 절여 놓았던 김치를 담그었습니다. 한참 동안 김장을 담그다가 갑자기 친구와 통화하던 생각이 나서 전화기를 집어 들었지만, 친구의 전화는 끊어진 후였습니다. 어느 날 이 여자가 은행에 갔습니다. 통장과 도장과 공과금 고지서도 가지고 갔습니다. 이젠 송금만 하면 오래간만에, 정말 아무 일 없이(?) 은행에서 볼 일을 마치게 됩니다. 은행 직원이 이렇게 말합니다. "손님, 송금하시게요? 잘 쓰셨네요.. 아! 그런데 손님, 전화번호를 안 쓰셨네요. 집 전화번호를 써야죠.." 그러나 그 여자는 그날 자기 집 전화번호가 생각이 나지 않아 결국 송금을 못하고 말았습니다. 오랜만에 이 여자가 미장원에 가자, 미장원 주인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이네요.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이 여자는 ”네, 덕분에... 오늘 큰딸 결혼식이 있으니까 머리손질 좀 빨리 해주시겠어요? 시간이 없으니까, 30분 안에는 완성해 주세요." 라고 다그치며 미장원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미장원 주인은 "30분 안에요? 네, 알겠어요.“라고 말하며, 한참 손질을 하다가, "이왕 오신 거.. 머리를 마는 게 어때요? 훨씬 보기 좋을 텐데..."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훨씬 보기 좋다는 말에 솔깃한 이 여자는 "그럼 어디, 간만에 파마나 해볼까."라고 말하고 머리를 말았습니다. 꼭 3시간이 걸렸습니다. 머리를 만 채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온 이 여자는 집안의 공기가 썰렁하고 험악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결국 이 여자는 며칠 후 큰딸의 결혼식을 비디오로 봐야 했습니다. 그 가정의 남편도 아내와 비슷했습니다. 어느 날 이 사람이 계단에서 굴렀습니다. 훌훌 털고 일어났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는지, 내려가고 있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질을 하려고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런데 많지도 않고 달랑 3개 밖에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3개의 칫솔 중에 자기 칫솔이 어떤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느 날은 출근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잊은 것이 있어서 다시 집에 갔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지러 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고민하다가 애꿎은 우산하나를 가지고 출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하루 종일 햇볕이 쨍쨍 내려 쪼이는 바람에 우산이 필요가 없었을 뿐 아니라, 서류를 집에서 가져오지 않아 제대로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또 전화를 걸려고 가방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가방 속에서 나온 것은 핸드폰이 아니라, 집에서 사용하는 무선전화기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주위에서 종종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건망증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건망증 때문에 지금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지금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떤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지금 누구를 데리고 사는지를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잊저버려도 문제가 되지 않는 거라면 괜찮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안 되는 것을 잊으면 큰 문제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님인 ‘요셉과 마리아’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이 열 두 살 되었을 때에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지난주에 절기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 이 세사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유월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유월절은 43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하여 나온 그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이 되면 12살 이상 된 이스라엘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소나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1주일 동안 수 만 마리의 소와 양이 재물로 바쳐지기 때문에, 그 피 냄새가 예루살렘 성의 십 여리 밖에까지 진동하였다고 합니다. 나사렛에 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도 12살 되던 해에 유월절이 되자,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전례대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떠들썩하던 1주일 동안의 유월절 절기가 끝나자,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사람들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무리를 지어서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유월절 절기가 끝나자,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은 유월절 동안에 일어났던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면서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연히 그들과 함께 있어야 할 아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이 친구들이나 친척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 날이 밝아오자, 그들은 친척들과 친구들을 찾아다니면서 예수님의 행방을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어서 가던 길을 멈추고 오던 길을 더듬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잃어버린 예수님을 찾았다는 이야기가 바로 오늘 본문의 줄거리입니다.
그런데요,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3일 동안 예수님을 잃어버렸던 요셉과 마리아와 같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처럼 예수님과의 사귐이 끊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우리 주위에 보면 예수님을 영접하여 주님의 자녀가 되기는 했지만, 날마다의 삶 속에서 주님과의 진정한 교제와 사귐이 끊어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는 있기는 하지만, 주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 안일함(Indolence)
첫째로 안일함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 안일함이 있었습니다. 43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막연히 ‘친구들과 함께 따라 오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딘가에 있겠지, 설마 무슨 일이 있을라구?’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보면, 이처럼 안일하게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려운 일보다 평안한 일만 추구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될 수 있으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미국 감리교회의 알렌 목사는 자기 교인을 조사한 후, 그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교인으로 등록은 했지만 20%는 주일예배에 출석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전체 교인들 중 25%는 기도를 하지 않고 있으며, 35%는 성경을 읽지 않고 있으며, 40%는 일정한 헌금을 드리지 않고 있으며, 60%는 기독교 서적을 읽지 않고 있으며, 85%는 단 한 사람도 전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100%의 교인들이 천당 가는 것을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현대 교인들의 신앙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입니다.
교회 안에 안일함이 깊숙이 침투해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지, 남들에게 공격을 당하면서까지 앞장 설 필요가 있나? 봉사하다가 괜히 어려움 당하지 말고 조용히 신앙 생활하는 것이 좋아”라고 말하며 안일하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서 안일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현실에 안주하려는 안일한 신앙자세는 잘못하면 예수님과의 교제를 끊어지게 만듭니다. 엄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고, 어려서는 주일학교를 다니고, 침례도 받고, 교회에서 집사, 권사, 장로의 직분을 받았다 할지라도, 저절로 주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서도 주님과의 사귐이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잘 압니다. 교회의 여러 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주님을 잃어버린 채, 주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하루 동안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대충 대충 믿으려고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현실에 안주하여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안일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불쌍한 종교인만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마리아와 요셉처럼 자신의 앞길만 신경 쓰다가,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분이 이 자리에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안일한 신앙생활에 빠져 1년이 가도, 5년이 가도, 10년이 가도, 믿음이 항상 제자리걸음만 하는 분들이 한 분도 없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분주함(Busy) 때문에
둘째로 분주함 때문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종교행사로 바빴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추억을 생각하느라 바빴습니다. 1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하루 동안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그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바쁩니다. 마치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마르다처럼 굉장히 분주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부엌에서 굉장히 바삐 움직였습니다. 그러나 동생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부엌에서 음식 준비에 바쁜 언니와 달리,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옆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께 뭐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제가 누가복음 10장 40절을 읽겠습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우리 말 성경에는 젊잖게 표현되어 있지만, 원래 이 말씀은 매우 거친 표현입니다. “주님, 도대체 이게 뭡니까? 주님께서는 저에게 관심이라도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부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지금 한가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저 마리아를 보면, 쟤는 꼭 정신이 어떻게 된 아이 같습니다. 주님, 지금 마리아에게 빨리 나를 도와주라고 말씀해주세요.” 그 때 주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눅10:41~42) 마르다가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 분명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주님을 잘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마르다는 분주함 때문에 오히려 주님을 잊어버렸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된 특징은 마르다와 같은 분주함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분주함을 ‘도덕적인 게으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바쁘고 분주하다보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뜻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현대인들이 분주하게 사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렇게라도 해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남들의 눈에 부러워할 만한 이미지를 보이게 위해서 바쁘게 삽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질문할 때 대개는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가 하는 일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님 앞에서 주님과 함께 함으로써 주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민감해서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까?
영국 런던에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이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캠벨 몰간이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의 인생의 커다란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매일 오후 저녁 무렵 사랑하는 딸의 손을 잡고 런던의 하이드 파크를 산책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진 어느 날, 갑자기 딸이 며칠 동안은 이유는 묻지 말라고 하면서, 아버지와 공원 산책을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서운했겠습니까? 그러나 몰간 목사님은 그 이유는 성탄절 아침에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크리스마스 선물로 아버지께 드릴 슬리퍼를 만드느라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아침 이 선물을 받으면서 몰간 목사님은 사랑하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너무너무 고맙다. 참 고맙다. 이것을 만드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니?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이 아빠는 슬리퍼 선물보다 네가 나와 함께 더불어 손 잡고 산책하는 것이 좋단다.” 지난 주 시드니에서 있었던 오세아니아총회 기간 중에 성령께서 저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조목사야! 선물은 고맙지만, 나는 이 선물보다 너와 함께 있기를 원했고, 너와 대화하기 원한단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나를 위한 Ministry는 고맙지만, 나를 위한 Ministry보다 나는 너와 함께 대화하기 원한단다.” 사역을 하다보면, 목회자로서 주님의 사역에 분주한 것이 꼭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이번 총회 기간 중에 깨달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위한 사역보다, 당신과 함께 교제하는 것을 더 원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마리아와 요셉과 마르다 처럼 분주함 때문에, 주님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바쁜 생활 때문에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보다 주님의 일을 더 소중하게 여기지 말고, 주님의 일보다 주님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을 보면 주님을 잃어버린 마리아와 요셉은 사흘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48절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고 나서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근심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을 아십니까?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밤잠을 자지 못하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납니다. 사업이나 직장도 그만 둡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잃어버리면 바로 그러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고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속에 걱정과 근심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를 잃어버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복을 누리며 살지 못합니다. 오히려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자식에게서 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세상의 그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도 결코 복된 삶을 살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랐고, 엄청난 권력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결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배우지 못했다 할지라도, 아무리 돈이 없다 할지라도, 아무리 지위가 낮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만 의지하며 산다면 그 사람은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지난 주 시드니에 있었던 오세아니아총회 기간 중 몇 사람과 교제하면서 그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이야기를 꼭 우리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 성도님들에게 소개해주겠다는 결심을 할 만큼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화요일 오전에 저와 더니든의 김목사님, 인버카고의 이목사님이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에 마중 나오신 분이 시드니순복음교회의 김모집사님입니다. 그 집사님은 개인적으로 제가 잘 알고 있는 분이셨습니다. 제가 1987년 호주 시드니에 처음 도착하여 영어학교를 갔는데, 같은 반에 그 분이 계셨습니다. 당시 그 분은 오전에는 영어학교를 다니면서 비자 연장을 하고, 오후에는 어느 Take Away 식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하는 분이었습니다. 아마 한국에 계셨을 때 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도 못하고 어릴 때부터 중국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음식 솜씨가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영어를 너무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질문하면 영어로 대답하는 대신, “미스터 조,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하면서 저에게 묻곤 했습니다. 또 오후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다보니 피곤해서 공부시간에 공부하는 시간보다 아예 책상에 엎드려 자는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도 선생님이 그 분이 고생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처음 아내와 두 자녀는 한국에 놓아두고 혼자 시드니에 와서 영주권도 없이 나중에는 불법체류자가 되어 1주일에 50불 하는 독신자 플랫에서 다른 사람들과 살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던 분이 저를 마중나오셨습니다. 공항에서 교회까지 가면서 교제를 하고, 또 마지막 날 금요철야예배 겸 오세아니아총회의 밤이 끝난 새벽 1시에 시드니 시내 차이나 타운의 고급 중국 레스토랑에 가서 야식을 먹으면서 교제를 하면서 그 분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제가 토요일 새벽 3시까지 야식을 들면서 이야기를 듣다가 그 분에게 “집사님, 제가 우리 교회에 가서 집사님 이야기를 소개해도 괜찮겠습니까?”라는 제안에 그 분이 흔쾌히 동의해주셔서 그 분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입니다.
현재 그 분은 Hand Car Wash(자동차 손세차장)을 다섯 곳이나 운영하고 있는데, 얼마나 잘 되는지 파라마타라는 동네에 있는 세차장에서는 하루 매출이 무려 10만 불이나 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제 머리로 몇 대를 세차해주고, 몇 대를 고쳐주어야만 그 금액이 나올 수 있을까 지금도 계산이 되지 않음). 또 호주에서 한국사람 최초로 ’오폐수 처리 라이선스‘를 취득하여 세차장, 자동차 정비공장, 병원, 우체국 등을 2주에 한 번씩 돌면서 청소해주는 사업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소자본을 가지고 오세아니아 전 지역에 있는 Westfield Shopping Cetre나 오피스 빌딩, 등에 프랜차이즈 식으로 한 업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현재 그 분은 이스트우드라는 좋은 동네에 있는 고급 주택에서 살고 있으면서, 시드니공항 근처 바닷가에 200만 불 짜리 주택을 하나 더 장만했습니다. 또 화요일 오전 공항에서 교회까지는 ‘4-Wheel Drive’로, 금요일 저녁 교회에서 차이나타운의 중국집까지는 최신형 벤츠 ‘S 500‘로 섬겨주셔서 알게 되었지만, 그 분이 타고 다니는 두 대의 자동차만 해도 몇 십만 불은 주어야 할 만큼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물질축복을 받았습니다. 또 그 분의 따님은 시드니 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곧 있으면 변호사가 될 예정으로, 자녀들도 다 잘되었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그 분은 비록 불법체류자 신분이었지만, 한국에서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분이셨지만, 영어도 잘 하지 못하는 분이셨지만, 믿음으로 사셨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주님을 가까이 하려고 했습니다. 또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함으로 영주권을 신청하여 결국에는 기적적으로 호주 영주권을 얻었습니다. 그 후 북쪽에 있는 이스트우드라는 동네에 중국집을 시작하여 장사가 잘 되었지만, 몸이 너무 피곤하여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그 사업장을 처분했습니다. 또 부흥회나 집회 등을 인도하러 오시는 분들을 공항에서 픽업하고 꼭 차이나타운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대접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또 교회에서 남선교회 회장이나 선교위원회 직분 등 교회에서 주시는 직분을 거절하지 않고 순종하며 감당했습니다. 항상 주님을 가까이 하려고 했고, 주님의 기쁨을 위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지혜를 주셔서 새로운 사업을 할 수 있게 해주시고, 돕는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복을 받았고, 또 앞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짧은 4일 동안 시드니 체류 기간 동안 분명하게 목격했습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만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저는 주님을 믿고 주님만 의지하며 사는 것이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인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의 나침반이 되시기에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이 땅에서 복된 인생을 살아가는 비결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것은 다 놓쳐도 주님만은 놓치지 말기를 바랍니다. 다른 것은 다 잃어버려도 주님만은 잃어버리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제 전에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 아메리카 어느 인디언 부족의 성년식 이야기를 소개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 부족에서는 성년이 된 소년, 소녀에게 바구니를 들고 옥수수 밭을 걷게 합니다. 긴 밭고랑을 걸으며 ‘가장 크고 탐스러운 옥수수 딱 하나’ 만을 골라 바구니에 담는 것입니다. 단, 이때 이미 지나온 길로는 절대로 되돌아갈 수 없으며, 이미 딴 옥수수를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정말 마음에 든 옥수수 딱 하나만을 골라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년, 소녀들이 어떤 옥수수를 골랐는지 아십니까? 그들의 바구니는 비어 있거나, 맨 마지막에 급하게 딴 초라한 옥수수 하나가 담겨 있기 일쑤였습니다. 좋은 것을 다른 것과 끊임없이 비교하다가, 결국에는 놓치고만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흔들리고 사람은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주님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마리와 요셉처럼 안일함과 분주함 때문에 주님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믿음으로 주님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린 예수
눅 2:40-52 / 오정호 목사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자랑이며,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우뚝 서 있던 뉴욕의 세계무역센터(World Trade Center)가 테러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건물만 테러에 의해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가정도 ‘테러’를 당하고 있습니다. 가정폭력, 재정문제, 건강문제, 외도, 미움과 다툼 때문에 무너지는 가정들이 너무 많습니다.
⊙강릉의 14살 이모양의 사연
아빠가 학원에 술 먹고 와서 나를 발로 차고 얼굴을 때렸다.
난 잘못도 안 했는데, 너무 창피하고 내가 너무 불쌍하다.
아빠가 술 먹으면 가슴이 뛰어서 살 수가 없다.
아빠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세상 살기가 힘들다.
⊙강원도 원주 가정 성폭력상담소 4/20일자 상담사례 분석결과 발표
(10년 2900여건)
상담자의 97%가 가정폭력 발생원인은 부부갈등
가해자는 40대가 45%차지
피해자는 30대가 43%차지
자녀와 함께 폭력에 시달리다 43%
가정폭력의 절반 가량이 술취한 40대 배우자에 의해 발생
∴미성년 자녀들은 가정폭력에 무방비 노출되고 있음
그 가정을 우리가 붙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4복음서 중 누가복음만 예수님의 어린 시절(hidden years)을 아주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41절).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떤 가정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라셨는지 몇 가지 살펴 볼 수 있습니다.
① 예수님의 가정은 부모가 함께 자녀교육에 힘쓰는 가정이었습니다.
“그 부모가 ...”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인 마리아와 요셉은 함께, 한마음으로 교육에 힘썼습니다. 자녀교육은 부모가 함께 손을 잡아야 합니다. 부모가 함께 뜻을 세우고 힘을 모아야 합니다.
아무리 집이 부유해도 부모가 한마음이 되지 않고 갈등이 생기면 자녀들은 정신과 인격에 분열이 생깁니다. 부모가 합심해서 주님 앞에서 자녀를 양육하게 될 때에 그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② 예수님의 가정은 반복교육에 힘쓰는 가정이었습니다.
“해마다”는 반복교육을 말합니다(41절). 집안에 위기가 닥쳤을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 일관성 있게 교육을 해야합니다.
③ 예수님의 가정은 체험중심의 교육을 행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유월절(逾越節)을 당하면...”(41절). 절기 중심적으로 교육을 했다는 것은 체험중심의 교육을 의미합니다.
④ 예수님의 가정은 교회중심의 교육을 행하는 가정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더니”(41절). 요즘말로 표현하면 교회중심의 가정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사업 중심의 가정, 취미 중심의 가정, 아내나 남편중심의 가정, 자녀중심의 가정들이 있습니다. 신앙 교육은 교회중심의 교육이 되어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 가정도, 직장생활도 힘을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적 사역(Official Ministry)을 감당하기 전에 가정에서부터 반듯하게 교육을 받으셨습니다. 가정 중심의 교육에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과 어머니인 마리아가 서로 합의하고 일체감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본문 말씀에 나타난 ‘아이 예수’의 성장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녀 교육의 지혜를 몇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아이도 균형 잡힌 성장을 할 수 있음을 확신해야합니다(40, 52절).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 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40절).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 주님께서는 네 가지 면에서 균형 잡히게 성장하심으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균형 잡힌 성장은 다음의 네 가지를 의미합니다.
① 정신적인 성장을 해야 합니다(Mentally).
“아이가... 지혜가 충족하며”(40절a). 예수님은 지혜가 자랐습니다. 몸만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커지고 정신이 커져야 합니다. 속 사람의 성장 없는 겉 사람의 성장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② 육체적인 성장을 해야 합니다(Physically).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40절a). 예수님은 튼튼하게 자라셨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기독교는 영혼의 문제를 강조하지만 결코 몸을 학대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그릇이라고 불리우는 몸의 건강과 성장 역시 모든 그리스도인의 축복된 체험 영역입니다.
③ 사회적인 성장을 해야 합니다(Socially).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b). 사회적인 성장은 인간관계(人間關係)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아름다운 만남이 있고 형제끼리 우애 있게 자라야 합니다. 사회생활의 최소단위인 가정에서의 인간관계에 승리하지 못하면 다른 사회공동체에서 승리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가정에서 반듯하게 자라야 사회에서 쓸모 있는 인재로 쓰임 받습니다.
④ 영적인 성장을 해야 합니다(Spiritually).
“하나님과...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52절b). 자녀가 정신적이고, 육체적이고, 사회적인 성장에 그친다면 일반 가정과 동일합니다. 우리의 아이는 믿음의 성장 즉 하나님 앞에서의 성장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밀함의 증진, 하나님의 진리로 자신을 세워 가는 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탁과 헌신으로 채워진 삶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둘째, 아이가 건강한 자아(自我)상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4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49절). 예수님의 부모가 유월절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가운데 예수님을 잃어버려 그 부모가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 영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12살 때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인식을 가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속에 세상이 흔들 수 없는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해야 합니다. 어릴 때부터 믿음의 세계에 눈이 열리면 오히려 어른들보다 더 분명한 자기 가치를 세울 수 있습니다. 비록 나이가 어려도 교회의 진리교육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히 안다면 그 아이들은 나중에 분명히 큰 몫을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나이를 초월하여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하도록 부모는 자녀를 돕고, 인도해야합니다.
셋째, 아이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51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51절a). 예수님께서는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실 때까지 얼마나 성실하게 부모님을 모셨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요셉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집안의 경제를 예수님이 책임 지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을때도 효도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늙으신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는 모습이 전개됩니다.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19:26-27)
어머니 마리아의 노후를 걱정하는 효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자기 가족 특히 부모님에 대한 의무 소홀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악행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님의 교훈을 계승하여 그리스도인의 성숙한 가정생활을 강력하게 주문하였습니다.(디모데전서 5:8)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효도교육을 못시키면 결정적인 순간에 아이들이 잘못됩니다. 우리는 자녀들의 인생의 너무나 소중한 순간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언 22:6). 이것은 제자도(弟子道/Discipleship)를 의미하며 가정의 자녀들에게 도리를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은 힘이 없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충성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정말로 마음을 담아서 신실하게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배운다면 나이가 들수록 빛이 나고 세월이 흐를수록 존귀한 자로 보배처럼 쓰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로남 믿음의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가정을 소중하게 지켜 나갑시다.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 속에 아이 예수님처럼 정신적, 육체적, 사회적, 영적인 면에서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음을 확신합시다.
우리의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믿음의 세계에 눈이 열려 세상이 흔들 수 없는 건강한 자아상을 확립하도록 도웁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효도교육을 포함하여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님께 존귀한 자로 보배처럼 쓰임 받는 복된 아이들로 자라게 합시다.
우리 가정을 우리시대 아름답고 성숙한 가정의 전범(典範)과 역할모범(Role Model)로 제시합시다.
우리교회가 건강한 가족의 대명사로 쓰임 받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시다.
우리 각자의 수고와 희생으로 우리가 속해있는 가정이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 땅에 두신 목적을 이루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전인교육
눅 2:40-52 / 훙문수 목사
오늘은 어린이 주일! 우리 자녀들과 이 땅의 자녀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위하여 기도하는 주일입니다. 특별히 우리 가정과 자녀들이 더욱 복되게 변화되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무자식 상팔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등의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자녀를 키우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과정은 정말 어렵고 힘도 많이 듭니다. 마음먹는 대로 잘 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분명 우리 인생의 보배요, 자녀를 교육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신성한 사명입니다. 요즘 공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학생들 중 70% 이상이 사교육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도 대학 가기 어렵고, 대학 나오면 또 취직하기 어렵고, 세상 살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 정말 우리 자녀들의 장래가 몹시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사교육을 하지 않고는 불안해서 견딜 수 없는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해봅니다. 교육에 대한 문제의 핵심은 ‘왜곡된 교육관’입니다. 요즘에는 자녀 교육이라는 게 주로 지식 위주, 입시 위주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녀 교육의 성패를 세칭 일류 대학에 입학 시켰나 못 시켰나 하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학교나 선생님들에게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아무 대학에 몇 명씩 입학시킨 실적으로 등급을 매깁니다. 물론 대학 가는 데 중요하죠.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일류 대학 가면 좋지 나쁠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됩니다.
이런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 모두들 애를 쓰지만 도달한 사람들은 도달한 사람들대로,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대로 적잖은 부작용을 겪게 됩니다. 이런 세태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야 할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모든 기준이 하나님의 기준, 성경의 기준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치관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교육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올바른 교육관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그 기준에 비추어 오늘 우리들의 자녀교육을 점검해 보고 교정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자녀들이 행복해지고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런 취지를 이해하면서 오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그래서 올바른 자녀 교육관을 재정립함으로 복된 자녀들, 보람 있는 부모들, 교사들, 어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짧지만,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을 함축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이런 시절의 기록은 유일하게 누가복음에만 나와 있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인간을 대속하기 위해서 동일한 인간의 모습(죄만 없는)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하자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고 계신 것입니다. 참 하나님이시요, 참 인간이십니다. 이런 특징을 가리켜 신인양성(神人兩性, God-Man)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 수 있고, 동시에 참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기록은 참 인간의 모습이 과연 어때야 되는지, 참 인간의 모델을 제시해 줍니다.
본문 40절은 예수님의 유아 시절의 모습을 설명해 줍니다. 육체적 성장, 정신적 성장, 그리고 영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41절~51절은 예수님이 12세 때 부모와 함께 성전에 갔을 때의 에피소드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귀가하는 길에 예수님이 눈에 뜨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되짚어 가보니까 아직 성전에 남아서 율법 선생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소년 예수의 말을 듣던 선생들이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따로 떨어진 것을 나무라자 아버지 집에 있을 줄 몰랐느냐고 오히려 반문합니다. 이런 모습은 소년 예수가 모든 면에서 균형 있게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먼 길을 순례할 정도 육체적으로 건강했고, 탁월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었으면,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인격과 사회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식하며 하나님과 영적으로 깊은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다시 한번 설명해 주는 구절이 52절입니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육체적 성장, 정신적 성장, 사회적 상장, 영적 성장 등 네 방면으로 균형 있는 성장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인간관, 성경적인 교육관을 배우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 자신보다 인간을 더 잘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대하신 인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참 교육이란 모든 인간을 이런 모습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런 교육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의 전인교육’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대로 모든 면에서 균형 있게 골고루 발달되어야 참 인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럴 때 행복한 인생이 되며, 그것이 곧 성공의 올바른 기준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것은, 예를 들어 지식 위주로 치우친 것은 참 교육이 아닙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가 참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매년 공부 때문에,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입시 때문에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매년 수십 명의 학생들이 목숨을 끊습니다. 지식 위주, 입시 위주의 교육이 얼마나 우리 자녀들을 불행하게 만드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요즘 고2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고민이 많습니다. 입시제도가 또 바뀌어서 이중고, 삼중고를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 비춰보면서 나 자신의 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행복한 인생인가? 성공한 인생인가? 평가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을 얼마나 잘 교육시키고 있는가? 평가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우리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방향이 잘못되어 있다면 달라져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 자신이 추구할 ‘하나님의 전인 교육’은 어떤 것인가?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니다.
[1] 육체적 성장 : 건강 관리
인간의 생명의 본질은 영혼에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 역시 존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고, 특히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고전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육체를 최대한 튼튼하게 하고 건강관리를 잘 하는 게 중요합니다. 아무리 공부를 잘 하고 여러 가지 재능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만일 육체가 건강하지 못하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여러분 모두가 당연히 공감하시고 잘 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2] 정신적 성장 : 지성 계발
많은 사람들이 지식 위주의 교육을 추구합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육의 전부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지식이나 학문을 무조건 열심히 공부한다고 지성이 계발되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학문이나 지식은 인간과 세계, 우주만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제외해 놓고 아무리 공부를 한들 그게 제대로 된 지식일 수 없습니다. 절름발이 지식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잠1:7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 ”
그러므로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세상의 지식이나 학문 이전에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인간의 지혜가 터집니다. 지식이 많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부족하면 그 지식이 죽은 지식이 되고, 인생에 유익하게 쓰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에 지성이 잘 연마됩니다. 그 증거가 유대인입니다. 유대인은 세계에서 가장 지성이 발달된 민족입니다. 그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불과 1,450만 명에 불과합니다. 남한의 3분지 1에 불과합니다. 그 중에서 680만 명이 미국에 거주합니다. 놀라운 것은 세계적으로 노벨상 수상자가 지금까지 300여명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100여명이 유대인입니다. 미국의 대학교수 중 25%가 유대인입니다. 그 외에도 각계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유명 인사들 중에 유대인들이 월등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지적으로 발달된 민족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학자들에 의하면 선천적인 결과가 아니라는 겁니다. 말하자면 두뇌 자체가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분히 후천적입니다. 한 마디로 탁월한 교육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쉐마 교육’ 즉 하나님의 말씀 교육입니다. 쉐마는 신6:4~9 말씀을 중심으로 한 구약의 율법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이 “이스라엘이 들으라!”(히브리어로 쉐마 이스라엘)는 말로 시작하는 데서 유래하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자녀들에게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르칩니다. 얼마나 철저한가 하면 아이가 겨우 사물을 분간할 무렵에 성경책을 주고, 그 겉표지에 꿀을 발라놓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이가 성경책(구약)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이가 알아듣든 알아듣지 못하든 성경을 읽어줍니다. 커가면서 그 말씀을 공부하고 암송하고 삶에서 실천하다 보면 그들의 지성이 계발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한번은 교계 신문에서 한 여학생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단에 전국성경고사대회가 있는데, 평소 주일학교 공과공부 한 것을 노회에서 성경고사대회를 통해 선발된 대표들이 전국적으로 모여서 고사를 치르는 대회입니다. 그 대회를 준비하려면 평소에 공과공부와 성경공부를 착실하게 해야 됨은 물론이고, 특별히 시간을 갖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고3 때까지 12년간 계속 참가하면서 성경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학생이 서울대에 당당하게 합격한 것입니다. 그것이 화제가 됐습니다. 기자가 만나서 입시 준비에 방해가 되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성경고사대회를 준비하면서 암기력, 집중력, 지구력 등이 향상되었고, 특히 암송해 두었던 성경 요절들이 힘겨운 수험 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 학생은 장차 외교관이 되어서 세계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겠다는 포부도 밝혔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서 얼마나 좋던지!
그러므로 여러분!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 공부 많이 시키시되, 그 중심에 성경 교육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신앙 교육은 물론이고 지적인 계발에 큰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3] 인격적 성장 : 사회성 계발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Social Being)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곧 인격적 성장이며 사회성의 계발입니다. 만일 이런 훈련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지적으로 훌륭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결코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지 못하고 남의 밑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는 사람으로 머물러야 할 겁니다. 아니, 그 이전에 사회성이 결여되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극단적인 예가 될지 모릅니다만, 수년 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앞이 창창한 사람이었습니다. 외국 유학을 마쳤고, 학위를 몇 개 취득했으며, 외국어는 5개 국어나 구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실력이 아주 좋으니까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부 고위직에 특채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황당한 것은 무단 횡단하다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정해진 횡단보도를 건너고, 신호등을 보면서 서고 지나가고 하는 것은 유치원 때 다 배운 겁니다. 아주 간단한 시회 질서를 지키지 않아서 젊은 엘리트가 귀중한 목숨을 잃고 인생을 접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수직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수평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고.(마22:37~40) 그러므로 항상 다른 사람들 배려하고,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태도를 길러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교육입니다. 그럴 때 또한 성공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이랜드에서 대형 할인 마트인 까르푸를 인수했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경쟁 관계였던 대기업들을 제치고 인수하는 쾌거를 이뤄 화제가 된 것입니다. 이랜드 박성수 회장은 교회 장로님이신데, 작은 옷가게를 연지 26년 만에 연간 매출액이 3조원이라고 하니 정말 대단하죠? 그렇게 돈을 크게 번 비결이 무엇인지 그분 스스로 밝혔습니다. 그 비결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배운 원칙을 지킨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원칙은 다름 아닌 성경 말씀(마7:12) 그대로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보다 저렴한 가격에 보다 좋은 품질로 고객을 섬기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게 자신의 성공 비결이라는 겁니다. 얼마나 단순합니까? 지적인 실력보다 오히려 인격적인 한 가지 모습이 그를 그렇게 큰 기업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입니다.
강영우 박사(미국 부시 행정부 국가장애인위원회 정책차관보)의 책(강영우, 『도전과 기회 - 3C 혁명』생명의말씀사)을 읽으면서 비슷한 원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 보면 부시 대통령의 가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강 박사는 교육학자로 교육적인 측면에서 그 가문을 분석해놓았습니다. 수년 전 미국에서 출간된 『부시 왕조』라는 책에 나온 내용을 분석한 것인데, 거기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시 가문에 ‘왕조’라는 비유를 쓸 정도로 4대에 걸쳐 미국의 정치계와 경제계를 주름잡고 있는데, 그 비결이 바로 인격 계발, 사회성 계발이라는 겁니다. 그 가문에서는 아이들에게 독방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 부대끼면서 남의 아픔도 이해하고 사회성을 기르라는 겁니다. 그리고 학교를 보낼 때도 사회성을 고려합니다. 부시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부모님이 일부러 시골 학교를 보냈다고 합니다. 텍사스의 시골 동네에서 히스패닉 등 서민층, 그리고 중산층 아이들과 어울리면서 지내게 한 것입니다. 지도자가 되려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다 겪어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엘리트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필립스 아카데미와 예일 대에 보냈습니다. 크게 공감이 가는 교육방법입니다.
우리 한국 부모들은 대개 자기 아이만 잘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다른 아이들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럴 때 아이들이 큰 사람이 되고 지도자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자녀들을 큰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면 이런 점을 십분 이해하고 사회성 계발을 위해 많이 노력해야 될 겁니다.
[4] 영적인 성장 : 영성의 계발
인간은 육체만 갖고 있지 않습니다. 영혼이 중요합니다. 영혼으로 하나님을 만납니다.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야 영생을 얻습니다. 천국에 갑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출세하고 잘 나가도 구원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대통령이면 뭐 하고, 재벌 회장이면 뭐하는 겁니까?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마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러분, 자녀들을 일류로 키우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짜 일류를 추구하십시오. 세상의 일류는 별 볼 일이 없습니다. 일류라도 신앙이 빠지면 삼류보다 못한 일류가 됩니다. 반대로 삼류라도 신앙이 겸비되면 세상의 일류보다 나은 삼류가 됩니다. 물론 일류에다 신앙까지 갖춰지면 더 좋습니다. 초일류가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신앙을 심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영혼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신앙은 말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의 영혼을 터치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겁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말씀도 잘 가르쳐야 되지만, 결정적인 것은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자녀들의 영혼을 만져주시고 만나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육체적 성장, 지적인 성장, 인격적 성장 모두 중요하지만 영적 성장이 가장 중요합니다.
만일 영혼이 변화되지 않으면 다른 것들이 좋아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에게 신앙을 물려주고 영적 성장을 도와주는 게 제일 큰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조금 주는 것이다. 공부 시키는 것은 조금 더 주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을 물려주는 것은 전부를 주는 것이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얼마나 책임지고 돌봐줄 수 있겠습니까? 하루 24시간, 1년 열두 달 그들 곁에 있을 수 있나요? 그리고 우리가 천 년 만 년 살 수 있나요? 불가능합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책임져주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자녀들의 영혼이
성장하고, 하나님을 만나며 의지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는 게 가장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링컨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연구한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만한 그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두 가지를 주셨다. 하나는 가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어머니였다.” 한번은 링컨이 자기의 가장 절친한 친구 빌리 헌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나는 어려서 글을 잘 모를 때부터 어머니가 성경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지금도 내 마음 속에서 통나무 집에서 어머니가 성경 읽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가 울리고 있다. 오늘 나에 게 속한 모든 것은 천사 같은 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온전한 모습입니까? 우리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전인 교육으로 교육시키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기면서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한 인생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전인교육으로 아름답게 세워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에 하나님의 선한 역사가 나타나기를 축원합니다.
규형잡힌 교회교육, 교사
눅 2:40-52 / 지태일 목사
가정의 달 5월은 참 좋은 달입니다. 어린이 주일로, 어버이 주일로, 오늘은 스승의 주일로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니 참 좋은 달입니다. 우리가 축하하고 감사하는 어린이나 어버이나 청소년들이나 가정이나 가르치는 교사나 모두 하나님이 내시고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니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세상에서의 학교만이 아니라 교회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사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역에 수종드는 모든 교역자들, 그 분들의 노고를 기억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가르치는 사역을 바르게 감당할 것인가? 이 시간을 맞이하여 먼저,
1)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먼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가운데 어린 영혼들을 가르치며, 양육할 수 있는 주일학교를 위시해서 여러 교육기관을 세우게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2) 또한 교사들, 교역자들께 감사를 드림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주님의 지상 대명령을 따라 미래교회를 준비하며 교회의 성숙을 위하여 끊임없이 사랑하며 섬기는 모든 교사들과 교역자들께 감사를 드림니다.
3)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림니다.
교회의 가르치는 사명을 위하여 늘 기도하며 모든 주의 종들과 물질적으로, 마음적으로, 은사적으로 합심협력하는 모든 성도들에게도 감사를 드림니다.
미국의 지미 카터가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말하기를, "내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더 잘하기 위함이었지,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나에게 임시직이지만, 교회학교 교사직은 나의 평생직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존 워너메이커도, 대통령으로부터 체신부장관직을 제의 받았을 때, "나는 교회학교 교사라는 일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 장관직을 맡아서 내 아이들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나는 절대로 장관직을 맡지 않겠습니다"라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교회학교 교사직을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고, 그제서야 그는 장관직을 수락했는데, 그는 매주 토요일이면 자기 본 교회 교회학교 교사직을 수행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필라델피아까지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워너메이커는 말하길, "교회학교 교사직은 내가 평생동안 해야할 본업이고, 체신부 장관직은 한두 해 하다가 그만 둘 부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지미 카터 전대통령이나 백화점 왕 워너 메이커나 모두 사회적으로 지위나 명성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모두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사직을 평생의 본업으로 알고 대통령직이나 장관직은 부업으로 여긴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고 있는 교사의 직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 일에 대한 긍지가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워하는 교사상이 무엇일까요?어떤 교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사는 어떤 교사일까요?
우리가 맡은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 교회교육의 긍극적 목표가 무엇입니까? 성도들을, 우리 자녀들을, 주일학교 모든 생명들을 어떤 균형 잡힌 하나님의 자녀들로 가르치겠습니까? 어떻게 가르쳐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 본문을 가지고 오늘 스승의 주일에는 가르치는 교사들을 중심으로, 다음주에는 청소년들의 신앙 어떻게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마지막 주일 온 가족 주일에 모두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같은 본문을 가지고 3번 다른 대상으로 말씀을 증거하려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말씀으로 유일(唯一)한 말씀입니다. 마태, 마가, 요한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없습니다.
40절에 나오는 말씀은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예수님의 아기 시절 성장 과정에 대한 말씀이고, 41절부터 말씀은 예수님이 12살 때 있었던 한토막 이야기(incident)입니다.
12살 때 성전에 올라 갈 때 52절을 보면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말씀합니다.
40절과 52절의 말씀은 중요한 두 가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참 사람으로 몸도 건강하게 자라나셨다는 것과 지혜도 자라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키와 지혜만 자라가심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람과 하나님앞에 더 사랑스러워 가셨습니까?
특별히 12살 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가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귀한 일이었습니다. 또 성전에서 랍비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며 질문도 하셨다는 것 역시 하나님을 매우 기쁘시게 하는 모습입니다.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내려 가서도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하였으며 지혜를 익혀가며 준비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날마다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배우는 일은 매우 귀하고 중요한 일이며 장차 메시야로서 사역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어느 날 갑자기 되심이 아니고 급격히 신앙형성 성장이 아니고 점진적으로 성장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종교 심리학자들도 신앙형성에서 급격한 회심보다 점진적인 성장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뭐가 되는 아님을 보여 줍니다. 우리 교회가, 모든 교사들은 성도들을 양육하는데 있어서 인위적이고 강압적이고 순간적인 특별한 체험보다 날마다의 성장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큰 은혜를 받기보다 매일 매일 주님 은혜안에 자라나는 그런 교육이어야 합니다.
냄비신앙은 빨리는 끓지만 쉬 식습니다. 그러나 가마솥 신앙은 좀 느린 것 같지만 오래 갑니다. 공부를 해도 평소에 열심히 꾸준히 해야지 벼락치기 하듯이 하는 것은 실력도 아니고 오래 못감니다. 신앙도, 신앙교육도 점차적으로, 계속적으로 꾸준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짐승은 1년 정도만 키우면 새끼도 낳고 일도 제대로 합니다만 사람은 1년 정도 키워서 말이나 제대로 한 마디 합니까? 학교 교육도 20여년간 매일같이 다니며 배우는 것이 사람 아님니까? 신앙의 은혜생활도 아이들을 양육하듯이 꾸준히 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교회를 통하여 가르치는 사역에서 꾸준히 중점을 두고 해야 할 긍극적 교육 목표가 무엇입니까?
1. 먼저는 신체적인 성장입니다.
“아기가 자라 강하여지고, 그 키가 자라나셨다” 말씀합니다. 아기 예수님은 자라면서 강해졌다(grew and became strong)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도 신체적(physically)으로 성장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정상적인 아이와 같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음을 말합니다. 정상적인 아기나 어린이들의 특빙은 모두 자라면서 강해집니다.
또한 '키'(헬리키아)는 '키'(stature, NIV) 또는 '나이'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신체 연령에 맞게 성장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도 아이들을 신체적으로도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몸에 맞게, 나이에 맞게 건강한 모습으로 자라도록 도우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체육시간도 있는 것이고 운동을 시키는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무시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몸이 건강해야 그 삶도 건강해집니다. 건강한 몸에서야말로 건강한 정신이 나오는 법입니다. 누가 말합니다. 돈을 잃으면 약간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조금 더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 했습니다. 맞습니다.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이, 자녀들이 육신적으로 먼저 건강하게 자라가도록 돕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입니다.
2. 정신적, 지적 성장입니다.
눅2:40절에는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했다(was filled with wisdom)”고 했습니다. 52절에는 “그 지혜가 자라났다”고 했습니다. 즉 정신적인 깨우침, 지적인 성장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교육도 역시 아이들을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더 나아가 종교적으로 깨우치고 알아야 할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참 교육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중요한 것이 바로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깨우칠 것을 깨우치게, 알아야 할 것을 알게 가르치는 것이 참 교육입니다. 지혜와 정신이 그 나이에 비해 충족하게 알도록, 채워지도록(filled) 해야 합니다. 육체 연령과 정신 연령이 잘 맞게 교육 목표나 방법을 조절해 나가야 합니다.
그 예가 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잃었던 예수님을 사흘 후에 성전에서 찾아 만나게 될 때 보여지잖습니까?
예수님을 잃어 버렸을 예수님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셨습니다.(눅2:46) 이것은 지혜로 충만했다(40절)는 사실을 보여 준 증거입니다. 또한 그 지혜를 증가시키기 위해 정신적으로 지식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관계를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역시 이런 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자녀들이나 어린이들을 12세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라도 지식을 추구하고 자기들에게 교훈을 줄 만한 사람을 사귀게 하여야 합니다. 만나게 해야 합니다. 듣기도 하며 묻기도 하고 답하기도 해야 합니다. 이런 가운데 하나님의 교훈을 바라게 함이 더욱 희망적이고 약속 있는 일인 줄 믿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이 떠들기도 하고 노는데 정신이 없는데 예수님은 "성전의 학자들"과 더불어 앉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또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 성경박사들이 물으면 그들에게 "대답"을 했습니다. 47절을 보면 그 대답은 매우 놀랍고 만족한 내용이었습니다.
질문에서 뿐만 아니라 대답에서도 지혜와 "총명"이 드러났으므로, 듣는 모든 자들이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어린 사람에게서, 아니 아무리 위대한 학자들에게서라도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모든 선생보다 총명이 뛰어났습니다. 아니 노인들보다도 승했습니다(시119:99, 100).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로서 자신의 영광의 빛줄기를 다소 보인 셈입니다. "그들에게 맛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성한 지혜와 지식을 맛보여 주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이나 아이들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잠언9:10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했습니다. 전도자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전12:13)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 가운데서 바른 인생관도 형성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녀들이나 학생들을 하나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정신적으로, 지혜가, 도덕적으로 깨우침이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우리 교육의 목표입니다.
3. 사회적인 성장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사람들에게, 이웃에게 사랑, 칭찬받게함이 바로 교육의 목표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사랑받는데는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잃어버린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만나 찾고 난 다음에 예수님은 나사렛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의무를 다하고 복종해야 함을 본으로 보이셨습니다. 육신을 가지고 여자에게서 난 사람이시기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 아래서 나심도 사실입니다. 그러하시기에 육신의 부모님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심령이 강하고... 지혜로 충만해" 있었고,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었지만, 육신을 입으셨기에 육신의 부모님에게도 순종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이웃을 아끼며 도와주는 주님의 생활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칭송은 후에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받았던 칭송으로 이어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오늘 우리는 자녀들이나 학생들을 사람앞에 사랑스러운 자녀로 양육해야 합니다. 칭찬받는 자녀로, 학생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사람앞에 인정받는 것, 사회생활, 인간관계를 잘 세워 주는 것이 바로 교육의 목표입니다.
능력있고,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패쇄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만 아는 그런 사람이 아님니다. 누구에게나 가치있고 의미있고 열린 사람으로 키워 나가야 합니다.
특별히 모든 사람에게 온유한 사람으로 가르치기를 바람니다. 무엇을 좀 배웠다고, 가졌다고, 안다고 남을 무시하고 없이 여기는 그런 자기망상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님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한 마음이십니다. 실수한 제자들을 향해, 때로는 무지한 제자들이었지만 끝까지 사랑함으로 그들을 변화시켜 그리스도의 제자로 다 만드심니다. 오만과 독선과 아집이 아니, 세상을, 어떤 사람도 리드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로 양욱함이 우리 교회교육의 목표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떤 곳에 성자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의 생활은 깨끗하고 덕이 되어서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천사들까지 이 성자의 생활에 감동을 받아서 땅으로 그를 찾아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활을 잘 살펴보니 과연 성자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은 그에게 은혜를 더 주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을 잘 하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그대가 기도하기만 하면 무슨 병이나 다 낫고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있는 권세를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자 성자는 잠시 생각하더니 “감사합니다마는 저는 그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인간의 병을 다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셔야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는 그 은혜를 사양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럼 그대가 말만 하면 어떤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권세를 드리려는 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성자는 똑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그 은혜도 받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러시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니 성령께서 하셔야 할 일이지 어찌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까?”
천사들은“그렇다면 그대는 무슨 은혜를 원하시오?”라고 물었습니다. 성자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예, 한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어떻든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되 그 선을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천사들은 의논 끝에 그 성자에게 그의 그림자 뒤로 비칠 때 그 그림자에 들어가는 모든 병자와 죄인들이 고침을 받고 새 사람이 되게 하는 은혜를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 여러 가지 은혜를 다 사모해야 합니다. 꼭 받을 능력도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제일 귀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에 받는 일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그 마음을 받는 일입니다.(빌2:4-7)
이런 은혜를 받은 이가 모인 가정은 언제나 화평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이들이 모인 교회는 언제나 한 마음 한 뜻으로 일하게 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영적 성장입니다.
40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52절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점점 더 사랑스러워 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도록 해주는 모든 은총이 더해 갔다는 말씀입니다. 영적 성장이 잇었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에게 사랑스러워지셨음은 그가 유년 시대에도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을 하셨기 때문입니다.(요8:29). 그 구체적인 모습이 48절 이하에 나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버려 근심하며 찾으며 고생했다는 사실을 걱정스럽게 이야기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여기서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아버지 하나님되심을, 그 정체성(identity)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관계가 바로 하나님과 그 아들의 관계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최고의 관심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내가 나의 아버지의 집, 즉 성전이었습니다.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함을 일로 알았고, 그리고 내 아버지의 일에 참여해야 함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아버지의 일에 관여해야만(must) 한다는 것, 최고의 정신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조동사 may적인 신앙이 아님니다. 이미 나를 신앙의 사업에 바쳤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 몸입니다." 이런 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최고의 관계를 아는 것, 최고의 관심을 가지는 것,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최고의 정신을 소유함이 바로 하나님께 사랑 받는 요소가 되신 줄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셨는데 이 사랑은 한 번 사랑받은게 아닙니다. 일회적 사랑으로 끝난 게 아닙니다. 계속해서, 점점 더, 날이 갈수록 그 은총이 더 커지고, 더 넓어지고, 더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성공한 인생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있고 남다른 명예가 있어도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한다면 그건 실패한 인생일 뿐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할 것인가에 대한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가르치고 양육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으로 양육되어져야 합니다. 이게 바로 우리 인생의 목표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교회교육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중요한 목표를 너무도 소홀히 여깁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에 눈멀어 참으로 중요한 이 인생의 목표를 잃고 사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 은혜, 역사와 별 관계없이 그저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 합니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을 좋게 하랴 하나님을 좋게 하랴 만일 내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우리는 주님의 기쁨을 크게 구하시기 바람니다.
특별히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더 입어가는 사람으로 양육함이 바로 부모에게 있음을 성경은 보여 줍니다. 모든 어린 아이의 교육이 그렇지만 아이의 신앙 발달도 자기 부모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부모에게서 경건한 아이가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도 아이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습니만, 특별히 어머니의 역할이 항상 중요합니다. 찬송가에도 보면 늘 어머니 찬송입니다. ♬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님이 들려 주시던.... ♬ 나 집에 돌아 갑니다 어머니 기도 못잊어.....
오늘 본문 성경에도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어떻게 길렀을까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날 밤중에 목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습니다(But Mary treasured up all these things and pondered them in her heart. 눅2:19).”
그리고 오늘 본문 51절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But his mother treasured all these things in her heart.)”
영어 성경에 보면 “but”이라는 전치사를 썼습니다. 저에게는 이 말씀이 그렇게 생각됩니다. 목자가 찾아 온 것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부모에게 잘 순종하면서 자란 것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별로 보고 그냥 지나쳤지만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에게서 일어나는 일들 하나 하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마음에 깊이 생각했습니다. 마음에 담아 두었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그러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그 꿈 이야기를 할 때 다른 형제들은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했지만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꾼 꿈을 마음에 두었다(창37:11)고 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나 아이들이나 학생들의 이야기, 꿈, 신앙, 말들을 그냥 흘러 보내지 말고 마음에 두시고 그 아이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 은사들을 생각하며 마음에 두고 많은 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녀들이 어떻게 자라느냐 하는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습니다. 특히 우리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어떻게 자라느냐 하는 문제, 우리 자녀들이 영적으로 어떻게 성장하느냐 하는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일차적인 책임은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모에게 있습니다.
부모는 가정의 자녀들에게 1차적인 교사요, 제사장입니다. 목자입니다. 책임적인 부모가 되시기를 바라고 우리 교회도 선생님들도 교역자들도 책임을 가지고 가르쳐야 할 것립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가정의 어린이나 자녀들이, 우리 교회 주일학교 모든 어린이 학생들이, 성도들이 신체적으로는 키도 잘 자라나고, 정신적으로는 지혜롭고, 사회적으로는 사람들에게 사랑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는 그런 사람들로 가르치며 양육해야 할 것입니다.
자녀들이나 가르치는 어린이 학생들 모두 예수님처럼 육체적으로도 잘 자라나고 정신적으로 지혜가 자라나야 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사랑 받으며 자라나는 어린들이나 학생들이나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 바람니다. 이런 목표를 가지고 가르치고 양육하시기 바람니다. 이런 목표들이 쏠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균형잡히게 양육하며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교회 모두 균형있는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균형있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나 가정의 자녀들의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영적 으로 잘 성장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큰 영광스러운 존재들로 드러나기를 바람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사들이, 모든 성도들이 가르치는 지도자들이 먼저 영적으로 육적으로 균형잡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잘 감당함으로 인해 귀한 일군들을 많이 양육할 수 있는 그런 역사가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핵심을 놓치지 않아야
눅 2:40-51 / 조상호 목사
한 때 뉴욕 타임스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밀레니엄 리더 1위’로 꼽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시중에 ‘위대한 CEO, 엘리자베스 1세’라는 책이 출간될 정도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따라하기 열풍이 분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녀가 앵글로색슨의 르네상스를 열었고, 세계의 변방에 있는 영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는 탁월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이루기 위해 나라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훌륭한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특별히 그녀는 왕위에 즉위하자마자 “해상권 확보 없이는 무역권을 유지할 수 없다. 바다를 정복하는 나라가 세계를 정복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통찰력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16세기의 중세시대에 이미 ‘바다’가 핵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1세는 모든 돈과 인적자원들을 이 핵심에 쏟아 부었습니다. 왕족들이나 귀족들의 최고 엘리트들을 해군으로 입대시켰습니다. 모든 자원을 동원해서 성능 좋은 배를 만들어 다른 것은 몰라도, 해군만큼은 세계 최고로 만들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이런 노력의 결과, 1688년 영국 해군은 당시 세계최고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해상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는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별명이 생길만큼 영국은 세계 곳곳을 정복하여 수많은 식민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사는 뉴질랜드나 이웃하고 있는 호주 같은 나라가 18세기와 19세기에 영국식민지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영국의 역사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핵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핵심을 놓치지 않고 핵심을 잘 잡는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에서 뿐 아니라, 개인이나 가정이나, 회사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예를 들어 공부하는 학생에게 있어 핵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과 공부 못하는 학생의 차이는 핵심을 잡았느냐, 핵심을 놓쳤느냐에 있습니다. 공부 잘 하는 학생을 보면,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핵심을 놓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남들이 보기에는 별로 공부를 많이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성적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학생은 수업 시간에 딴 짓 하다가 선생님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부분은 놓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리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곳을 죽자 살자 공부하다보니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책상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는데도 성적이 형편없이 나옵니다. 핵심을 놓치지 않는 학생이 공부 잘하는 학생입니다. 지난주에 오셔서 귀한 은혜와 도전을 끼쳐주신 김순권장로님의 간증을 통해서 많은 것들을 들었지만, 저는 그 분이 핵심을 놓치지 않고 핵심을 잘 붙잡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김장로님께서는 하와이 대학에 유학을 가셨을 때 <옥수수>라는 핵심을 붙잡았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세계에서 가장 인정받는 <옥수수 박사>가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옥수수와 교제하며 옥수수와 사랑을 나누며 옥수수와 함께 생활할 정도로 정말로 열심히 옥수수를 연구하셨습니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옥수수 박사님이 되셔서 아프리카와 북한, 등지를 방문하며 세계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귀한 일들을 감당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처럼 국가나 회사나 가정이나 개인이나 핵심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크리스챤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핵심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핵심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 크리스챤들에 있어서 핵심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리 크리스챤들이 놓쳐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핵심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크리스챤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시는 예수님을 놓친 사람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정작 예수님을 놓친 경우를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열 두 살 되던 해 유월절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 등 세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 중에 이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다가 출애굽하여 나온 날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가장 큰 절기입니다. 유월절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리는 일주일 동안에는 수 만 마리의 소와 양이 제물로 바쳐지기 때문에 피 냄새가 십 여리 밖에까지 진동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부터 100리 안에 살고 있는 열두 살 이상의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일주일 동안 예배와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열두 살이 되면 성인으로 인정받을 뿐 아니라, 율법을 지킬 의무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통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100만이 넘는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당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살고 계시던 예수님께서도 12살 되던 해에 처음으로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육신의 부모님인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걸어서 혹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까지 오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쁘고 즐거운 유월절 축제를 보냈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1주일 동안 계속된 유월절 절기를 모두 마치고,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고향인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사렛까지 가는 도중, 날이 어두워져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문제가 생겼습니다. 당연히 함께 동행하고 있어야 할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버지 요셉은 마리아에게,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에게 서로 물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둘 다 알지 못했습니다. 함께 동행하던 친척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밤을 뜬눈으로 보내고, 아침이 되자마자 오던 길을 다시 더듬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는 온 예루살렘 시내를 뒤지다가, 잃어버린 지 사흘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렇게도 애타게 찾던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으로 요셉은 예수님의 아버지였고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였지만, 그들은 하루 종일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있었던 것입니다. 하룻길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들과 같이 동행하고 있는지 조차 확인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는 것으로 당연하게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3일 동안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과 한 가족이라는 육신적인 관계를 맺고는 있었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떠한 상태일까요? 지금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는 어떠한 상태일까요? 혹시 우리들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시는 예수님을 놓친 사람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했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지만, 혹시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망각한 채 나홀로 걸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과의 관계는 맺었지만, 주님과의 사귐이 끊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오래 전에 한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길을 가다가 집 대문에 교회 교패를 보고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그러자 안에서 집을 지키던 새댁이 밖으로 나온 것을 본 그 목사님은 그 새댁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지나가던 OO교회 목사입니다. 대문에 교패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반가워서 벨을 눌렀습니다. 그런데 이 댁에 주님이 계십니까?” 그 질문을 받은 새댁은 퉁명스럽게 “저는 OO교회 집사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계속해서 “아, 그러세요. 그래서 이 댁에 주님이 계십니까?”라고 다시 묻자, 그 새댁은 계속해서 '우리 시아버님은 누구이며, 우리 아버님은 누구이며, 자기 남편은 누구이며' 구구절절 이야기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은 계속해서 “아, 그러세요. 그래서 이 댁에 주님이 계십니까?”라고 다시 묻자, 그 새댁은 우물쭈물하며 끝내 그에 대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새댁 남편은 장로님의 아들이었고, 그 새댁은 목사님의 딸로서, 모 교회의 집사였고,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성가대원이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새댁은 주님을 자신의 삶 속에 모시고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착각이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속에 예수님이 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교회 제직이 되었기 때문에, 성경책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족 중에 기도를 열심히 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에, 부모님이 열심히 믿는 분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 속에 예수님이 있을 것이라는 착각을 합니다. 또 교회에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이고, 교회 재정도 넉넉하기 때문에, 당연히 그 교회에는 예수님이 계실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고 나서도, 얼마든지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구제를 많이 하고 선교를 많이 하고 여러 가지 행사를 많이 행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잃어버렸던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잃어버린 교회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러한 불행한 모습이 우리들에게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망각한 채 나홀로 길을 걸어가던 요셉과 마리아와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맺을 뿐 아니라,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어떻게 하면 주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 방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무지한 생활(無知, Ignorant Life)을 피하라
첫째로,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려면 무지한 생활을 피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주님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행하시려는지 몰랐습니다. 43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사들과 토론하고 있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4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을 향하여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무지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인생을 자기 주관대로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주관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삶의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몇 년 전에 이런 유머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이 학원에서 영어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영어단어를 말하면 받아 적는 받아쓰기(Dictation)시험이었는데, 선생님이 시험지를 채점하다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질문은 '미스터리(Mystery)’라는 문제였는데, 한 여학생의 답안지엔 'Mr. Lee'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국어 시험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로 안에 적당한 말을 넣는 시험이었는데, 선생님이 시험지를 채점하다 또 다시 뒤집어지고 말았습니다. “찐 달걀을 먹을 때는 ( )을 치며 먹어야 한다.”라는 문제로써, 가로 안에 ‘소금’을 치며 먹어야 한다고 답을 써야 하는데 그 학생이 뭐라고 쓴 줄 아십니까? “찐 달걀을 먹을 때는 (가슴)을 치며 먹어야 한다.”고 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복된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인생의 채점자이신 하나님의 정답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산다면, 우리의 인생은 실패하는 살 수밖에 없습니다. 죠지 트루엣이라는 사람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업적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의 주관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의 의도를 따라 사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빗나간 열심은 달려갈수록 손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주님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안일한 생활(安逸, Indolent Life)을 피하라
둘째로,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려면 안일한 생활을 피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안일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44절을 보겠습니다.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요셉과 마리아가 어떻게 생각했다고 합니까? 예수님은 아직도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데도,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들 두 사람은 막연히 ‘친척들과 함께 따라오겠지’, ‘친구들과 함께 어딘가에 있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뒤를 따라오려니 생각하고 안일하게 자기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 두 사람이 얼마나 안일하게 생각했는지, 그들은 최소한 하룻길을 가는 동안 예수님이 자신들의 일행 속에 없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 일찍 예루살렘을 출발했다면 저녁이 된 시간까지 무려 12시간 동안, 만약 오전 10시에 예루살렘을 출발했다면 8~9시간 동안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저녁이 되어 잠을 자려다가 예수님이 자시들과 동행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은 안일한 생각으로 인해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본래 사람들에게는 안일함을 추구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합니다. 사회학자들이 넓은 운동장에 한 사람의 눈을 가리고, 눈을 가리기 전에 보아 두었던 목표지점을 향해 똑바로 걸어가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백이면 백, 반듯이 가지 않고 다 구부러지더랍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가게 했더니 그 구부러지는 선이 나중에는 동그란 원을 그리더랍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실험입니까? 사람들은 가능하면 제 자리에 있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힘든 길보다 쉬운 길을, 모험적인 삶보다 안일한 삶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3절에서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여러분! 우리의 안일한 신앙생활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과 같은 안일함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학업이나 돈벌이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를 잘 믿을 수 있을까’하는 문제 때문에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관계의 문제 때문에 잠 못 이루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영적전쟁 중에 있습니다. 악한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헤매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안일함을 벗어버리고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저 대충 대충 믿으려는 안일한 신앙생활 가운데 있을 때 마귀는 우리를 공격해 옵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들이 요셉과 마리아처럼 안일함에 빠져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항상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분주한 생활(奔走, Industrious Life)을 피하라
셋째로, 예수를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살려면 바쁜 생활을 피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방문한 요셉과 마리아는 유월절이라는 종교행사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도 그들은 세상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나사렛으로 돌아가면서도 예루살렘에 있었던 유월절 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1년 만에 방문한 예루살렘에 대한 방문 소감을 이야기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러한 세상적인 분주함이 예수님을 잃어버리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너무 바쁩니다. 너무 바쁘다보니 예수님께 관심을 가질 시간조차 없습니다. 너무 분주하다보니 예수님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한국 국회의원들의 성적표’라는 제목의 유머가 나왔습니다. 한국의 국회의원들이 성적표를 받았는데, 유일하게 ‘수’를 받은 과목이 수학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봉급을 비롯해서 검은 돈을 계산하는 능력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우’를 받은 과목은 국어인데, 국회의원들이 말하기, 읽기, 쓰기, 다 잘하는데, 듣기가 잘 안되기 때문이랍니다. ‘미’를 받은 과목은 외국어인데 외국 여행은 잘 다녀도 외국어를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양’을 받은 과목은 사회입니다. 워낙 사회봉사를 안 하는데다가 지역구에는 명절에 한 번 얼굴 내밀기 때문이랍니다. ‘가’를 받은 과목은 윤리인데, 국회의원들이 거짓말, 싸움, 욕설 등에 능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아예 점수가 안 나온 과목도 있습니다. 점수가 나오지 않은 과목이 무슨 과목일까요? 체육과목이랍니다. 그 중에서도 달리기 점수는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뜻과 엉뚱하게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리는 까닭에 점수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유머가 방향을 잃은 국회를 풍자한 유머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는 이 유머를 통해 ‘빨리’, ‘열심히’, ‘많이’ 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빨리 달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방향입니다. 방향이 잘못된 속도는 대단히 위험 합니다.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속도라면 더욱 위험합니다.타이타닉호의 비극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달렸다는 것입니다.인간은 방향이 잘못될수록 더 빨리 달리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내면의 불안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빨리 가고 있느냐보다, 우리가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많은 일을 하고 있느냐보다,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고 있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방문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집에 자주 가셨는데,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면 늘 일을 하는데 굉장히 바빴습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섬기기를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반면에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기 집에 오시자, 마르다는 열심히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너무 분주해서 마음이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0장 40절을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아니 주님, 도대체 이게 뭡니까? 나는 이렇게 죽도록 일하고 있는데 째는 지금 한가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쟤가 아무래도 정신 나간 사람 같습니다. 지금 빨리 마리아에게 나를 도우라고 말씀해주세요.”라고 불평했습니다. 마르다의 불평 앞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1~42) 물론 마르다가 주님을 대접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 아닙니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더구나 주님을 섬기는 일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르다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분주함입니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주님을 섬기려다가 오히려 주님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마르다처럼 분주함으로 인해 주님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주님을 위해 봉사한다고 정작 주님을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물론 우리에게 봉사와 섬김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위해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사역도 예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봉사나 섬김이나 전도나 사역들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빨리’, ‘더 열심히’, ‘더 많이’를 외치기보다는 “오직 주님!”만을 외쳐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마르다처럼 분주한 인생을 살지 말고, 마리아처럼 오직 주님께 관심을 쏟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께 대한 무지함 때문에, 안일한 생각 때문에, 분주함 때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주님을 잃어버린 요셉과 마리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흘 동안 고생을 했습니다. 후에 예수님을 찾고 나서 마리아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48절하) 마리아는 근심했다는 것입니다. 고생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바로 요셉과 마리아처럼 고생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 나홀로 살아가면 마음속에 근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셉과 마리아는 친척과 군종들 속에서 주님을 찾았으나 주님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곳은 어디입니까? 46절을 보겠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그들이 어디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까? 성전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말씀의 집입니다. 그들은 이 기도의 집, 말씀의 집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주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기 원하신다면, 교회 중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잃어버렸던 신앙의 감격을 회복하기 원하신다면, 예배 중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의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날마다 예수님과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일함과 분주함을 멀리하고 예수님과의 교제를 여러분들의 삶의 최우선순위에 놓음으로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인의 보편적 착각
눅 2:41-51 / 김동호 목사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정의한 철학자가 있습니다. 두고두고 생각 할수록 옳은 말입니다. 절망과 낙망의 끝은 포기이고 그 삶의 포기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불행한 것은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절망적인 상황이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절망적인 상황은 왜 생겨나게 되는 것일까요? 절망적인 상황의 원인은 우리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참으로 지혜롭고 강하고 능력이 있다면 우리에게 절망적인 상황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자신의 한계와 나약함 그리고 무능력을 잊고 살지만, 인간은 누구나 다 연약하고 약한 존재입니다. 한계가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한계에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이 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한계가 있고,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다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다 죽고 망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사망과 실패 필연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다 정말 필연적으로 사망하고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필연을 극복하고 구원을 얻으며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절망적인 사망과 실패로부터 구원을 얻고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는 원동력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은 한계가 없으시고, 우리 인간은 나약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강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한계가 있고 나약한 인간이 무한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게 될 때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은 극복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됨으로 소망을 갖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시고 구원의 소망이십니다. 이 단순한 진리를 마음에 확신 하실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붙드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절망적인 상황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나 절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의 원인은 우리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절망의 원인은 불신앙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죽고 망하는 것은 절망 때문이지 절망적인 상황 때문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의 근원이시고 구원의 소망이십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구원과 그 구원의 뿌리가 되는 소망은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면 나갈수록 우리의 삶은 밝아지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면 멀어지게 될 수록 우리의 삶은 점점 어두워지게 되고 절망적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삶의 성패는 하나님과의 거리와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우리는 그 두 사람에게 어떤 사이냐는 질문을 합니다.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관계와 사이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전여 모르는 사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알기는 알지만 거의 관계가 없는 사이가 있습니다. 그 보다는 조금 더 잘 아는 사이이어서 서로에 대한 어느 정도의 상식적인 지식이 있고 점심 정도 나눌 수 있고 기쁜 일이 있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축의금과 부의금을 낼 수 있는 정도의 관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죽고 못 사는 관계가 있습니다. 뗄 레야 뗄 수 없는 그런 사이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이와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입니다. 그와 같은 사이와 관계는 축의금과 부의금 정도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관계입니다. 물질은 물론이고 생명을 나눌 수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하나님과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다. 과연 여러분과 하나님은 어떤 사이이십니까? 어떤 관계이십니까? 그냥 좀 알고 지내는 사이이십니까? 그보다 좀더 친하게 지내시는 사이이십니까? 아니면 가족과 같이 뗄 레야 뗄 수 없는, 내 것과 네 것의 구분과 구별이 있을 수 없는 그런 관계와 사이이십니까? 저는 그 관계와 사이의 차이에 따라 우리 삶의 명암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이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거리는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사랑하십니다. 말씀으로만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위하여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가까이 올 수 없는 거리와 사이로 닥아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기 위하여 때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기도 하시고 성령의 모습으로 존재하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랑은 one way가 아니라 two way 입니다. 사이와 관계는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과 소망이 되는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와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다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만 하나님을 선택하면 됩니다. 구원과 소망과 축복은 그러므로 이제 전적으로 우리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 전쟁 때 남군의 지도자는 리 장군이었고, 북군의 지도자는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리 장군과 링컨 대통령은 다 훌륭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리 장군보다 링컨 대통령이 더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사랑하였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집무 중에 기도를 많이 한 대통령으로 유명합니다. 때때로 그의 사무실 앞에는 ‘기도 중’이라는 팻말이 붙곤 했습니다. 그는 하루에도 몇 시간 씩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북군에 속한 교회의 목사님들이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이 우리 북군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합니다.’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였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대답을 통하여 링컨이 얼마나 믿음이 좋았던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대부분은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 달라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만 한다는 것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구원과 소망은 하나님과의 사이와 관계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와 사이이냐에 따라 구원과 소망의 명암이 바뀝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과연 어떤 사이이십니까? 그냥 좀 아는 사이이십니까? 아니면 내 것과 네 것이 없는 죽고 못 사는 관계와 사이이십니까?
큰 아이가 작년에 결혼을 하였습니다. 대전 가까이 있는 계룡대라고 하는 곳에 장교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결혼 전에 저희 부부가 미리 그곳에 내려가 전셋집을 하나 계약해 주었습니다. 그 전세금은 3천 만 원이었습니다. 물론 그 돈은 제가 내었습니다. 3천 만 원은 작은 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돈을 내는데 조금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우리 아들 며느리와 저는 그런 사이입니다.
저와 여러분 사이도 제법 가까운 사이입니다. 여러분은 높은 뜻 숭의교회 교인이시고 저는 그 교회의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여러분의 사이는 3천 만 원을 쉽게 아무부담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사이와 관계는 아닙니다.
몇 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다시 반복하려고 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과 재산이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내 돈은 그 중에 1/6 뿐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가족은 6명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벌었다고,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고 그것을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주장한다면 가족은 이미 가족이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하다가 제 계산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돈과 재산을 1/6이 아닌 1/7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기도를 할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음으로 당연히 하나님에게 가족의 몫을 드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 때도 매달 수입의 1/7 이상은 최소한 하나님을 위하여 쓰고 있었지만 저는 그 때 처음 재산의 1/7도 최소한 하나님의 몫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하나님을 돈과 재산을 함께 나누고 쓰는 가족으로 영접했습니다.
누가 저에게 하나님과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돈과 재산을 함께 나누고 쓸 수 있는 가족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말고 저 자신만을 놓고 생각할 때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이 넘치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제가 그와 같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으며 살게 된 이유를 저는 압니다. 언제부터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저는 압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제가 하나님을 돈과 재산을 함께 쓰고 나눌 수 있는 가족으로 영접하고 받아 들였을 때부터였습니다. 저는 아직 ‘주여 삼창’(?)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리 질러 기도하는 사람 못지 않게, 솔직히 말하면 그보다 더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이는 소리로 결정되는 것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조금 미신적이지 않은가 싶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그와 같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제가 그와 같은 위험성(오해를 받는)을 무릅쓰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려고 하는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여러분이 저와 같은, 아니 저보다 더 큰 복을 받으시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위하여 중요한 헌금을 작정 할 때 언제나 가족의 입장에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제 가족이기 때문에 축의금 내듯이, 조금 많은 축의금을 내듯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 전세금 지불하는 수준과 마음으로 결정합니다. 저는 우리 아이에게 필요하다면 전세금 보다 더 크고 많은 것도 지불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여기서 전세금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그냥 전세금만큼의 돈으로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승동교회에서 건축헌금을 작정 할 때 그것이 기뻤습니다. 우리 아이 전세금 지불하고 집을 얻어주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승동교회에서 건축헌금을 작정하게 되었을 때 정말 거의 그런 마음으로 기뻤습니다. 진심으로 잘 하고 싶었고 많이 하고 싶었습니다. 가지고 있는 돈이 얼마 되지 않아 은행에서 빚을 얻었습니다. 2년 동안은 정말 경제적으로 쪼들릴 각오를 할 만큼의 빚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빚은 일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갚았습니다. 아주 쉽게 갚았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35인가 36인가 였는데 참으로 많은 강의 청탁을 받았습니다. 흠이 될 이야기 일 수도 있으나 그 많은 강의에서 받은 강사료로 일년도 되지 않아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로 우리나라에서 제법 알아주는 유명강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그와 같은 사람이 되게 된 이유가 승동교회 건축헌금에 담긴 제 믿음의 마음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영락교회에서도 건축헌금을 하여야 했습니다. 퇴직금을 포함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헌금을 하고 동안교회로 왔습니다. 동안교회는 예배당이 좁아서 예배당 건축을 생각하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제가 동안교회로 부임하려고 할 때 어떤 목사님이 왜 힘들게 건축하려는 교회로 가려고 하느냐며 이왕이면 건축이 끝난 교회로 가는 것이 좋다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마음에 새기지 않았습니다.
그때도 몇 년 동안 경제적으로 쪼들린 생각을 하고 헌금을 작정하였습니다. 3년을 생각하였었는데 결국 6년 동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액수가 그렇게 적은 액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헌금을 하는 동안에는 우리 자신을 위한 저금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헌금을 하면서 매우 놀라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건축헌금 한 만큼, 꼭 그만큼 저축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안교회 건축헌금을 할 때 지금 제가 주로 책을 출판하고 있는 규장문화사에서 출판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그런 출판 제의를 해 주는 것이 고마웠지만, 제 책이 팔려서 인세를 받게 되리라고는 정말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 생각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20여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고 적지 않는 인세를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승동교회 건축헌금을 하면서 유명강사가 되었고, 동안교회 건축헌금을 하면서 유명작가가 되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런 식의 말을 특히 설교를 하는 것이 제게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만,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여러분들도 그 같은 복을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동안 늘 장지갑을 이용하곤 하였습니다. 절반으로 접는 지갑으로는 넣기가 좀 불편할 만큼의 돈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접는 지갑을 가지고 다닙니다. 접는 지갑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작정한 건축헌금 때문입니다. 3년 정도 접는 지갑을 가지고 다닐 각오(?)를 하고 있습니다.
첫 주일 이삭줍기 헌금을 내는 것이 빠듯합니다. 이삭줍기 헌금 낼 정도의 현금은 언제나 장지갑에 있었는데, 이제는 신경을 쓰고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첫 주에 못 내고 다음 주에 내는 일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매달 23일은 제 통장에서 선교비가 빠져나가는 날입니다. 전에도 여유 만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23일에 대하여 조금 신경은 써야만 했었지만, 이제는 많이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장지갑을 가지고 다닐 때도 좋았습니다. 웬만한 지출은 큰 부담 없이 언제나 할 수 있는 때가 좋았습니다. 지금 절반짜리 지갑을 가지고 다니는 것도 좋습니다. 여유 없이 좀 빠듯하게 사는 것도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여유 있을 때도 좋았지만, 하나님 때문에 좀 여유 없는 요즘도 아주 좋습니다. 저와 하나님은 어떤 사이냐고 누가 물으신다면 저는 하나님 때문에 조금 여유 없이 사는 것이 기쁘고 감사한 사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와 예수님과 함께 성전에 올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만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성전에 남아 계셨는데 저들은 예수님이 자기들과 함께 동행 하는 줄로 착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일년에 한번 씩 성전에 가는 길을 마음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 여행이었기 때문에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일행 중에 함께 있는 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착각했다는 것이 것입니다. 다행이 그 착각이 하루였기 때문에 사흘 정도의 고생을 한 후 다시 예수님을 찾을 수 있었지만, 그 착각이 좀 더 길어졌다면 더 많은 고생을 하여야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겠지만 평생을 착각하며 살았다면 평생 예수님을 잃어버린 채 살았겠지요.
그와 같은 착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와 같은 착각은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는 아주 보편적인 착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잃어버리고서도 자신이 늘 하나님과 함께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 별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자신은 하나님과 사이가 좋을 줄로 대부분 착각하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축의금 좀 넉넉하게 드릴 수 있는 관계이면서 말입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저 자신을 위하여서는 어리석은 설교를 오늘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오늘 이런 식으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저를 흉보고 비판할는지 압니다. 그것도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구원과 승리와 성공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이, 거리에 그 구원과 승리와 성공 그리고 축복과 은혜의 명암이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지만, 때로는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이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을 가까이 하시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평생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나님을 따라 다니는 삶을 청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저와 여러분의 축복임을 제발 깨달아 아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어려서도 아버지집, 늙어서도 아버지집
눅 2:41-51 / 김삼환 목사
누가복음 2:41-51
미국이나 캐나다를 여행할 떄 참 좋은 것은 처음 간 사람일지라도 지도만 있으면 전역을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또 자동차를 직접 가지고 다녀도 어디든지 찾아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찾아가기가 참 어렵고 늘 다니던 길도 잃어버리기가 아주 쉬운데 미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어를 조금만 하면 미국 어디든지 지도 한 장 가지고 다 찾아갈 수 있다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미국보다 더 넓고 험한 세상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지도 한 장으로 찾아가기에는 너무나 어렵고 복잡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귀한 은혜의 집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믿음의 지도 하나만 잘 가지고 다니면 평생동안 길을 잃지 않고 방황하지 않고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길 잃어버린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는 잃어버린 길도 찾아 주는 곳입니다. 모든 잃어버린 분실물들을 찾아 줄뿐만 아니라 에덴 동산에서 우리 인간이 잃어버렸던 원래의 축복을 교회를 통하여 다시 받게 하시고 회복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집이 가지고 있는 비밀인 것입니다. 교회는 참으로 귀한 하나님의 집입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나오면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를 다 영접하여 주십니다. 내 영혼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일 년 사시사철 영원히 주의 집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목요일 12:30분 임진각에서 P.P.P 십자가 대행진에 설교하러 갔습니다. 카터 대통령이 그 행사에 참여하셔서 저는 카터 대통령 내외분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생각지도 않은 은혜를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대통령께서 저희 교회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많은 간증을 하여 주셨습니다. 그 하나 하나의 간증이 너무 아름답고 혼자 듣기에는 너무 소중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저는 카터 대통령에 관한 전기도 많이 읽어보았습니다. 그 분에 대한 많은 자료를 갖고 있었지만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5살 때부터 주일 학교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다녔을 뿐만 아니라 매주일 5센트씩 헌금을 드렸다고 합니다. 시골입니다. 농민의 아들입니다. 땅콩 밭에서 일하는 이 소년이 교회를 다니면서 이 돈도 그냥 헌금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 복음 전하고 중국 선교를 위해서 헌금을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개인적으로도 이 소년의 길을 인도하셔서 주지사가 되게 하시고 미국의 대통령이 되고 하셨습니다. 교회를 통해 카터 대통령에게 주어진 은혜도 한량없었지만 중국을 위한 큰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중국과 미국의 국교를 열고 등소평을 만나서 세 가지의 특별한 약속을 받아 내게 하셨습니다.
첫째, 50년 동안 하나님을 믿지 않던 나라에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전 중국 땅에 자유롭게 반포하도록 해달라.
둘째, 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수 있게 해달라. 지하에 은밀한 곳에서도 어느 곳에서도 예배를 드릴 수 없는데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
셋째, 선교사를 받아 달라. 그래서 자유롭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게 해달라.
중국은 이 세 가지를 다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어렸을 꿈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대통령이 되게 하셔서 50년 동안 닫혔던 이 중국에 선교의 문을 열고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카터 대통령은 이렇게 중국 땅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해 내는데 크게 공헌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어린 소년이 적은 돈을 감사함으로 주일마다 드리는 그 헌금을 받으시고 그의 소원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땅에 있는 우리의 삶을 눈동자 같이 살피시며 어떤 눈보다 더 밝은 눈으로 우리의 모든 행함을 벌거벗은 것 같이 다 보시면서 내 소원을 이루어 주시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중국을 보는 미국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거대한 중국이 군사 강대국으로 남아서는 온 세계에 평화가 없기 때문에 중국을 예수 믿는 나라로 이끌어 낼 때 예수를 믿는 것만큼 ,신앙의 눈을 뜨는 것만큼, 교회의 문이 열리는 것만큼 자연스럽게 민주주의가 열리게 되어 있고, 자본주의가 열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나라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 예수를 믿을 때만이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평화가 교회를 통하여서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의 지도자들의 생각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개인이든 어느 민족이든 어려서부터 신앙의 꿈을 가지고 교회에 다니는 길만이 개인과 국가가 다같이 잘 되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도 12살 때 이미 성전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셨습니다. 사흘동안 집으로 오지 않아 예수님의 부모님이 찾았습니다.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얼마나 당연합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를 왜 찾으셨나이까?" 만 왕의 왕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아버지 집이 얼마나 귀하지를, 우리 인간이 길을 잃지 않고 방황하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된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아버지 집에 가는 것이 최고의 영광이요 그 집에 머물고 그 집에 사는 것이 우리의 주소입니다. 우리의 뿌리인 것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이 내 주소도 없고 내 위치도 없고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철학적으로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방황하고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아버지 집을 떠났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인간은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국가도 개인도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계의 평화는 아버지 집으로 주어집니다. 인간은 아버지 집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우리와 함께 할 때만이 힘있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아버지의 집을 지으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성전을 지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듯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나무로 지은 집이 아닌 피 흘려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고 우리를 부르시고 주의 집으로, 아버지 집으로 우리를 나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부르십니까? 아버지 집에서 부르십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갈 때 회개의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 나 집에 돌아갑니다. 어머니 기도 못 잊어 새 사람 되어 살려고 나 집에 돌아갑니다. ♬
새 사람 되는 길이 아버지 집입니다. 어머니 기도가 아버지 집이에요. 아버지 집을 떠난 자식은 그 어머니의 기도의 눈물입니다. 아버지 집에 나갔으면 부모의 소원이요 기도의 제목입니다. 왜? 아버지 집에 가야만이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것이니라"(히4:16)
은혜를 받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길이, 은혜 받은 성도들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나와서 은혜를 받아 사는 길이 바로 성전에서 우리 성도들이 받아야 할 은혜입니다. 우리가 뭘 받아야 되요? 은혜를 받아야 되요.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뚝 덜어진 생명은 가정이라고 하는 집에서 먹고 마시고 잠자고 쉼을 얻고 사랑을 받으며 가정에서 자라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되는 거예요. 영적으로도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는 아버지 집에서 말씀을 들으며 은혜를 받으며 양육을 받으며 사랑을 받으며 보호를 받으며 살게 되어져 있는 거예요. 어려서부터 죽는 날까지 영원토록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는 거예요.
♬ 주 날개 밑 낸가 편안히 쉬네 거기서 영원히 거하리라.
아버지께서는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즐거워라 그 사랑 끊은 자 뉘뇨.
주 날개 밑 내 쉬는 영혼 영원히 영원히 거기서 살리 ♬
어디서? 아버지 집이에요. 예수님처럼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되요. 우리가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물을 다스리고 갈고 일구고 보존하고, 온 세계와 우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로 자라나는 곳이 아버지 집, 바로 교회입니다. 곡식은 밭이, 물고기는 바다가, 우리 성도는 아버지 집이 운동장입니다. 아버지 집은 은혜의 바다예요. 찬송가도 있잖아요. '은혜의 바다에서 네 마음껏 저어가라'고 했어요. 교회는 마음껏 저어갈 수 있는 은혜의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건강한 정신, 훌륭한 인격, 깨끗한 양심,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 세계를 이끌어 가는 지혜와 용기,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믿음, 행복한 가정, 너와 내가 다같이 살아가는 좋은 사회, 좋은 국가를 만드는 이 모든 은혜가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도 보십시오. 4000년 동안 그렇게도 무지(無知)하던 이 나라가, 귀신을 따라가며 우상 숭배하던 이 민족이 이렇게 위대한 문화인이 되고 지성인이 되고 경제적으로 짧은 시간에 이렇게 잘 살게 되고 민주주의를 하게 된 것,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교회를 통하여 왔습니다. 이 땅 위에 주의 교회가 방방곡곡에 세워지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셨어요. 교회는 은혜 받는 집이에요.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집이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집이에요. 유럽은 교회가 참 많은 나라들입니다. 온 나라가 천 년, 적어도 오 백 년 이상 산간 벽촌에까지 대나무 숲처럼 십자가로 덮여 있어요. 그러다가 소련은 지금부터 한 90년 전에 공산주의가 들어왔습니다. 십자가를 떼어내고 교회를 욕하고 비판하였습니다. 잘 사는 사람과 교회에 돌을 던졌습니다. 결국은 교회의 문을 닫았습니다. 하나님 없는, 교회 없는, 은혜 없는 땅이 되면서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고 그 땅은 에덴 동산처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나와 너와의 관계는 증오와 미움으로 가득 차서 경제도 죽고 문화도 죽고 교육도 죽고 정치도 죽고 다 죽어버리는 저주의 땅이 되었어요. 지금 보십시오. 우리 나라도 소련에서 온 윤락 여성이 9000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 세계의 미인인 그 땅의 여인들이 여기 와서 몸을 팔고 살아가는 불행한 국가가 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사람들이 다 처녀도 아니래요. 오죽하면 가정 주부들도 다 여기 와서 윤락녀로 살아가겠습니까? 교회를 떠나는 것은 이렇게 잠깐인데도 비극이 주어지는 것을 우리가 보아야 합니다.
요사이 교회 부흥하는 것을 비판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를 가야합니까? 룸살롱으로 가야합니까?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PC방으로 가란 말입니까?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이 민족의 정신과 이 민족의 앞날이 이 민족의 살 길이 어디에서 온단 말입니까? 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가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이 나라의 문제가 해결되는 길이, 모든 계층 모든 분야가 문제 투성이인 이 사회를 치료하는 길이 바로 아버지 집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영적 부흥 운동이 1907년 대부흥운동처럼 일어나야 됩니다. 이 땅에 1910년에 백만인 구령운동이 일어난 것처럼 다시 한 번 4000만 구령운동이 일어나 이 민족이 아버지 집으로 나아갈 때만 소망이 있고 길이 열리고 힘있는 민족이 되어 남에게 잡혀먹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수 백년 동안 잡혀 먹혔던 민족이고 지금 그 위기가 다시 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알지 않습니까? 지금 8월은 8.15 광복절이 있는 달입니다. 우리는 해방 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다시 강한 민족으로 등장했습니다. 우리를 침략했던 모든 과거를 전부 다 지워버리고 새로운 음모를 꿈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본과 제일 가까이 있지만 일본을 제일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나라입니다.
미국은 일본을 연구하기 위해 인류학자인 루스 베네딕트라고 하는 학자를 통해 1944년 6월에 일본에 관한 연구를 하게 하였습니다.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을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국화와 칼'이라는 책이 내놓았습니다. 며칠 전 TV에도 소개가 되었어요. 저는 일본에 관한 책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지은 책이 가장 일본에 대해서 잘 표현하고 설명하고 있어요. 일본의 마음, 일본의 문화, 일본의 정신, 일본의 전체적인 것을 이해하는데 가장 잘 표현한 것이 국화와 칼이에요. 국화는 일본 사람들이 두 개의 꽃을 좋아하는데 하나는 벚꽃이고 하나는 국화예요. 일본 천황이 있는 곳에도 국화를 가져다가 전 궁궐을 두르는 것이 일본 사람들이에요. 일본 사람들은 벚꽃보다 국화를 더 좋아한답니다. 왜냐하면 국화는 아주 청아하고, 고결하고, 깨끗하고, 신선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일본의 예절바름, 친절함, 상냥함과 깨끗한 이미지가 국화와 너무 닮았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말하는 것이나 생활하는 것이 전부 국화와 같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모든 의복이나 하는 일들이 국화꽃처럼 청아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일본은 국화꽃 뒤에 칼이 있습니다. 국화와 칼이에요. 무서운 민족입니다. 일본은 한번도 물러서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죽어도 끝까지 싸우는 민족이 일본입니다. 아무리 강해도, 자기들보다 10배 강해도 도전하는 게 일본이에요. 우리 나라는 아예 그냥 짓밟아 버렸고요 중국을 점령하잖아요. 뱀이 큰 독수리도 삼키듯이 중국을 삼키고 소련을 삼킬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달려드는 거예요. 자기들보다 힘이 백 배나 강한 미국에게도 그렇게 친절하게 하다가 한 순간 진주만에 폭탄을 퍼부어서 점령하려고 하는 것이 일본이에요. 일본은 언제나 칼이에요. 겉으로는 '아리가또' 그래도 뒤에는 무서운 칼이 있어요. 일본 사람들은 죽어도 목매어 죽지 않고요 농약 먹지 않고요 꼭 할복 자살을 해요. 집집마다 갖고 있는 것이 일본도(日本刀)입니다. 일본도 모르세요? 방안에도 진열해 놓습니다. 일본은 칼이 있는 것을 알아야 되요. 지금 일본은 칼이 너무 많아 겉잡을 수 없어서 모든 것을 각오하고 하는 거예요. 교과서를 변조하는 것이 그냥 편안히 하는 게 아니에요. 각오하고 다 하는 거예요. 일본은 칼을 가지고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거예요. 전부 날이 서게 다 갈아 놓았어요. 온 나라가 다 군대예요. 여러분, 우리가 반세기 동안 일본 하나에게만 위협을 느끼며 살아왔지만 지금 일본만이 아닙니다. 중국이 잠을 깬지가 얼마 안됩니다. 미국이 돕고, 일본이 돕고 또 우리가 수십 억불 도와준 초등학교 1학년 같던 이 나라가 지금 세계를 향해 태풍같이 경제대국으로, 군사대국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섭고 엄청난 힘이 북으로부터 등장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거대한 힘으로 우리 곁에서 1시간 거리의 저 중국이 힘있는 나라로 지금 등장하고 있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북한이 저렇게 다 굶어 죽는 것 같지만 북한이 우리를 알기를 어떻게 아는지 아십니까? 절대로 우리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미군만 물러가면 우리를 간단하게 보는 거예요. 이번에도 항상 부시를 대상으로 하지 우리를 대상으로 하지 않아요. '너! 동생들은 가만히 있어.'라는 거예요. 미사일을 만들어서 미국을 향해 총을 쏘려고 하는 거지 너희들은 가만히 있으라는 거예요. 우리가 "한번만 서울 다녀가시지요, 한번만!" 사정하는 거예요. 대답도 안 해줍니다. 약속 10번 했다가도 그냥 장난으로 아는 거예요. 까불지 말라는 거예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강한 북한과 저렇게 어마어마한 중국과 일본 사이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힘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지금 정신적으로는 타락할 대로 타락했고, 어린아이로부터 노인까지 모든 계층이 다 썩어서 어떤 목표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의식화되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우리 현실을 아는 것도 아니에요. 세계를 향하여 우리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이 민족이 살 수 있는지 여기에 대해서 전혀 볼 수가 없어요. 메시지가 없어요. 방향이 없는 시대예요. "제멋대로! 막 놀라!"고 하는 이 문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썩을 대로 썩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일본도 물론 우방은 우방이지만 칼이 있는 우방임을 알아야 합니다. 입을 맞추면서도 한 손은 칼을 가지고 찌르려고 하는 무서운 손이 뒤에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북한이나 중국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해이하여 질대로 해이하여 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주여, 이 민족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고 우리 모두가 정신 차리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장 나라가 되고 힘있는 나라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다시 한번 기도의 불을 붙이고 주님 앞에 꿇어 엎드려야 할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개인이든 누구든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부르십니다. 누구든지 나아오는 사람을 주님은 사랑하십니다. 받아 주십니다. 집을 나간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께서 기다리십니다. 아버지 집에서 우리의 부족함이 채워집니다. 주름을 펴주십니다.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평안히 쉬리로다♬
어제 친구 목사님이 오셔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은 해병대로 백령도에서 군목으로 근무를 했대요. 백령도는 배로 14시간이 걸린 대요. 태풍 불면 들어가지고 못하고, 일주일에 한번 배가 뜬 대요. 그래서 늘 다니며 사병들을 위로해 주는데 보초를 서던 초소장이 있는데 소위래요. 다 환영해 주는데 이 초소장이 목사님을 받아 주지도 않고 이야기도 들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인사도 안하고 그래서 "왜 그러느냐? 무슨 어려움이 있느냐? 내게 무슨 감정이 있느냐?"고 물었대요. 그랬더니 자기가 그곳에 와서 일년이 넘었는데도 휴가도 안 보내 주니까 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죽고 싶다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님이 "내가 높은 분에게 이야기해서 휴가 보내줄 테니까 교회에 나오겠냐? 석 달만 나와 보라. 그리고 싫으면 그만 둬."라고 그랬더니 나가겠다고 하더래요. "그러면 사인을 해라." 사인을 받고 단장님께 말했대요. "꼭 좀 휴가를 보내 주십시오."라고 그랬더니 "안됩니다. 초소장은 나갈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해주가 얼마나 가까운지 개가 짖으면 들린답니다. 세상에 그렇게 가까우니까 휴가를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 "아닙니다. 꼭 보내야 합니다.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갔는데 태풍이 일어나서 48일만에 왔다는 거예요. 태풍이 일어서 갔다 왔는데 시무룩해 하더라는 거예요. "갔다 왔으면 좋아해야지 왜 그러냐?"고 했더니 휴가를 가서 친구들과 명동에 몇 번 갔는데 전부 쏴 죽이고 싶더라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전방에서 고생을 하는데 인간들도 아니라는 거예요. 다음에 갈 때는 수류탄을 갖고 가서 다 죽여버린다고 하더라는 거예요. "그러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사람되어 그런 사람들을 위해 봉사해야 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신앙생활 잘 해라." 그 사람이 서울 법대를 나왔대요. 정말 주의 종의 말을 듣고…. 주의 종 말을 들으면 수지 맞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를 했대요. 목사님은 2년을 마치고 나오고, 그 사람도 ROTC 2년을 마치고 제대를 했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성남에서 개척을 했어요. 몇 년 지나고 교회가 부흥을 하는데 교회 버스가 돌다가 여자아이 하나를 치었어요. 얼마나 그 어머니가 악하게 하는지 집안의 사람들이 다 와서 죽은 아이를 교회에다 갖다 놓고 합의도 하지 않고 돈도 어마어마하게 요구하고 무조건 살려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당해 낼 길이 없는 거예요. 검찰에 불려 갔어요. 그곳에 가니까 너무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검사와 만나는 순간! 그 검사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전도를 한 그 ROTC 소위가 검사가 되어 첫 초임지로 성남을 온 거예요. "목사님, 웬일입니까?" "우리 집사님이 사고를 내서 지금 교회가 걷잡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 이것을 제게 맡기십시오. " 그래서 아이 엄마를 불러서 "예배를 방해하면 그 죄 값이 몇 년인지 아십니까? 건널목도 아닌 곳에서 아이가 지나가고 법규를 지키지 않고 그렇게 하면 됩니까?" 그래서 돈도 들이지 않고 합의가 되었어요. 목사님이 너무 안타까워 그 장례를 화장터에 가셔서 잘 해주었대요. 그런데 화장할 때까지 보지도 않더니 예배를 다 드리고 나니까 그 어머니와 할머니가 와서 우려 회개하더라는 거예요. "목사님, 사실 나도 집사입니다. 그런데 남편과 이혼한 다음에 딸 하나 데리고 살길이 막막해서 내가 술장사를 했습니다. 교회도 못 나가고, 생각해 보니 내가 하나님의 집을 떠나서 벌을 받았습니다." 이 하나에 답이 얼마나 나오는지 아세요? 목사님은 교회로 인도하여 덕을 보고, 교회로 인도 받은 그 분은 고시에 붙어 복을 받고, 교회를 떠나면 안 된다는 아주머니의 고백과 함께 받고, 아버지 집은 떠나면 안되고 오면 되고, 전도하면 전도하는 분도 잘 되고 오는 분도 잘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잡고, 꿩 먹고 알 먹고, 이것이 아버지 집이라는 거예요. 할렐루야.
미국은 역대 대통령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아버지 집을 떠난 분이 없습니다. 지금 43대까지 모두가 신앙의 경주자들입니다. 모든 어려움이 있으면 다 기도로 신앙으로 해결했어요. 대통령 가운데 안 믿는 분은 하나도 없었어요. 카톨릭이 하나 있어요. 케네디 대통령. 그 외는 다 개신교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은 유세도 신앙의 경주입니다. 지난번 부시와 고어가 나올 때도 부시는 기도하고 자기가 새 사람된 이야기를 간증하고 고어는 "나는 새로 태어나도 그리스도인으로 살겠다."고 유세를 하였습니다. 교회, 하나님의 성전을 이렇게 귀히 여기고 대통령이 되어도 끝까지 성전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였습니다. 아버지 집입니다. 아버지 집에 살 길이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시골에서 공부도 못하였습니다. 런던에 가서 그는 처음에 이름 없는 배우로 길거리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고전도 번역하며 1592년부터 극본을 썼는데 35편의 걸작을 썼어요. 다 어디에서 얻었느냐? 한번도 주일을 거르지 않고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니니까 무식한 분에게도 지혜가 생기고, 아이디어가 생기고, 작품에 대한 놀라운 구상이 생겨서 그의 작품 하나하나가 성경을 비켜 가는 것은 없어요. 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와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근거해서 작품이 나왔어요. 우리가 어디에서 살아야 합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불행해도 아버지 집에만 나오면 길이 열립니다. 할렐루야! 민족이 삽니다. 가정이 삽니다. 기업이 일어납니다. 모든 새 힘이 아버지를 통해 주어지는 줄 믿습니다.
뉴욕 타임지에 나온 클린턴 대통령에 관한 것도 보았습니다. 클린턴이 어려서 아버지가 교통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이혼을 다섯 번이나 했어요. 그러니 그가 얼마나 상처가 많았겠어요. 결국 어머니와 못 살고 할아버지와 살게 되었어요. 할아버지께서 신앙이 있으셔서 그를 주일학교로 인도했어요. 그는 신앙생활을 잘 했고 10살 때 세례를 받았어요. 1956년에 세례를 받고 결정적인 것은 11살에 은혜를 받았어요. 빌리 그레함 목사가 부흥회를 하는데 40마일밖에 있는 그곳을 담임 선생님을 졸라서 가고 거기서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클린턴은 지금까지 교회 중심이에요. 주지사가 되어도 성가대를 놓친 일이 한번도 없고, 17년을 성가대를 했고, 대통령이 되어도 교회에 안 나가는 날이 하루도 없이 반드시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리면서 그는 대통령을 두 번이나 했고, 여론 조사에 의하면 미국 국민들은 지금도 법만 바뀌어지면 클린턴은 4번이라도 대통령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미국 경제만 일으킨 것이 아니라 세계의 경제를 클린턴이 일으켰어요. 좀 끼가 있어서 그렇지 그 이외에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디를 가야 합니까? 사람은 다 부족합니다. 부족함을 채워 주는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사람은 다 피곤합니다. 쉬는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사람은 갈 길을 알지 못합니다. 길을 어디서, 누가 인도해 주신다고 생각합니까? 가정, 국가, 개인 할 것 없이 아버지 집에 나아가는 길이 열려질 때 다른 길도 시온의 대로처럼 열려질 줄 믿습니다.
예수를 잃지 말자
눅 2:41-51 / 손상률 목사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나누어 져서는 안 되는 불가분리의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부부의 관계, 부모와 자식의 관계, 형제 또는 친구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경우는 모두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써 우리가 쉽게 이해하거나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한편 보이지 아니하는 관계이지만 보이는 것 이상으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절대적인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입니다. 요한복음 15:5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므로 진액을 공급받아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또한 무성한 잎과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어야 참 생명을 공급받으며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라고 하였습니다(행 17:25). 또 그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행 17:27-28).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서 그것이 불행인줄 모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모시지 못하고 사는 것이 하나님을 멀리한 증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치유해 주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요 3:16). 예수를 믿고 그 마음 속에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요 1:12). 그러나 예수가 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게 되는 특권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예수를 잃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가 열두 살 된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그들은 며칠 동안 고생하던 끝에 예수님을 만나고 같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수 없이 길을 가던 그들이 늦게나마 예수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예수가 있으므로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Ⅰ. 예수를 잃은 경위
간혹 텔레비전에서 잃은 가족을 찾는 프로그램을 보게됩니다. 오랜 세월동안 헤어진 가족들이 한 맺힌 사연을 가지고 목메이게 찾는 장면을 볼 때마다 모든 사람이 아픈 마음을 공감하곤 합니다.
그런데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전쟁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지중에 헤어져서 오래도록 찾지 못한 채 안타까워한다는 점입니다. 누가 계획적으로 헤어지고자 시도하지 않았고 여느 때처럼 별일 없이 지낼 것으로 생각하다가 어느 순간 잠깐 헤어진 것이 오랜 생이별로 굳혀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평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큰 불행을 자초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를 잃은 경위도 그와 비슷합니다. 본문 말씀 41-43에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고 하였습니다.
(1)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최대 명절입니다. 이 절기가 되면 세계도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기 때문에 그 도성은 사람들로 붐비며 매우 복잡해집니다(요 2:13-16). 짧은 기간에 지정된 장소에서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며 절기 행사에 참여하다보니 예수님을 챙길 겨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현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도 무슨 일에 쫓기는지 매우 분주하고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세상일에 바쁘기도 하지만 대부분 육신의 욕망을 위하는 일에 시간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소중한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1:28에는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셨다”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2:16-17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2) 방심하다가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절기 행사를 마치고 돌아갈 때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물고 계셨는데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 부모들이 예수를 챙겨야 될 그들의 임무를 망각한 채 방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자기의 임무에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나시기 전 마리아는 임신한 몸으로 나사렛에서 요셉의 고향인 베들레헴까지 가게되었고 그곳의 어느 집 외양간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 때부터 요셉과 마리아는 국경을 넘어 피난길에 올랐을 때나 나사렛 마을에 돌아왔을 때도 예수님을 챙기며 돌보는 일에 심혈을 쏟았습니다. 이처럼 평소에 잘하던 사람도 한순간 소홀히 여기다가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Ⅱ. 예수를 잃은 결과
요셉과 마리아 부부는 예수가 저희 일행 중에 없는 것을 알고는 매우 당황해 하며 찾았습니다. 그것도 하룻길을 간 다음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눈앞이 캄캄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와서 성전에 계시는 예수를 발견하고는 기쁨과 놀라움의 감정을 표현하였습니다. 48절에 보면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하였습니다.
(1) 근심에 쌓였습니다.
예수를 잃은 그 부모는 당장 아이가 없어졌다는 충격과 함께 그 마음에 불안과 공포가 밀려왔을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 나이 열두 살이었으니 사고를 만난 것은 아닌지, 누구에게 붙잡혀 갔거나 감금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못된 데로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닌지, 부모를 잃고 얼마나 당황하며 울고 있는지, 온갖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마음에 안정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 근심을 하였다는 것은 평안이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예수를 잃은 사람은 그 마음에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 그들은 왔던 그 길로 가고 있고, 주위에 친지들과 이웃이 같이 있으며, 어느 것도 그들에게 근심을 줄만한 요소가 없었으나 오직 예수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 몸도 건강하고 가정도 행복해 보이고 사업도 잘하고 친구들도 많이 있고 세상살이에 아무런 불편이 없을 것 같은데, 그 마음 속에는 전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수가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도 평안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참 평안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는 예수님의 이름을 「평강의 왕」이라고 하였습니다(사 9:6).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요 14:27).
(2) 고통이 따랐습니다.
마음의 근심은 육체의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솔로몬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 17:22). 사람이 자기 마음 속에 여러 가지 불안과 공포를 지니고 있으면 얼마 못 가서 육신의 건강도 잃게 되며 결국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상실하고 맙니다.
여기 요셉과 마리아는 아이 예수가 없어졌다는 충격으로 큰 근심에 짓눌리면서 정신 없이 예수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밥맛을 잃었을 것이고 편한 잠을 잘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예수를 만날 때까지 그들은 죽을 맛이 되어 허둥대고 다녔을 것이니 그 고통이 오죽 하였겠습니까? 예수를 잃을 때는 하루 길이었다고 했으나 찾는데는 사흘 길이라고 하였으니 몇 배나 더 긴 시간에 걸쳐 많은 고생을 해야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그들은 예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찾고 예수와 함께 할 때 비로소 모든 것이 제자리에 돌아오는 법입니다.
Ⅲ. 예수를 찾은 경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그들과 같이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허겁지겁 찾으며 돌아다녔습니다.
주변 사람에게 수소문 해 봤을 것이고 또 혹시 도중에 같은 또래 아이들과 놀고 있을 만한 곳이 있는가 찾아보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예루살렘까지 오게 되었고 드디어 성전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1) 아는 자 중에 찾았으나 못 만났습니다.
44절에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당장 예수님을 찾아야 된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찾아야 만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하여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친족과 아는 사람들 사이를 들락거리며 그들 속에 있어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순전히 자기들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서 취하여진 행동입니다. 평소 예수님과 헤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또 예루살렘에 상경하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미리 예수님과 약속이 되어 있었더라면 쉽게 찾았겠지만 예상 밖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더욱 막막한 지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저들이 평소 예수님의 의중을 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의 생각에 따라 판단을 내립니다. 또 친족과 아는 사람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대부분의 인간 종교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계시 종교인 기독교는 하나님의 의중을 먼저 분별하게 되므로 정확하게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그 부모가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하였습니다(48절).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49절).
성전을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성전의 주인이 되십니다. 예수를 찾는 사람은 하나님의 집 곧 교회로 나아와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쉽게 찾을 수 있는 길을 두고 자기가 아는 곳을 먼저 갑니다. 자기의 지식에 따라 인맥을 동원하고 권력에 의존하고 재물이나 명예나 또는 예술과 문화와 같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데서 예수를 만나려고 애를 씁니다. 예수의 부모는 자기 아는데서 만나지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나아오면 됩니다. 사도행전 17:27에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고 하였습니다.
(3) 말씀 중에서 만났습니다.
본문 말씀 46-47에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생들’은 율법에 정통한 학자들을 뜻합니다. 유대인의 랍비들은 오랜 기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사람들에게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나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지도자입니다.
그런데 나이 어린 예수님께서 그들과 마주 앉아 율법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그들의 질문에 대답도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말씀의 당사자요 주인공임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14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집인 교회로 나와서 성경 말씀을 듣기도 하고 읽기도 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고 하였습니다(요 5:39).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를 잃지 말아야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최상의 복이 됩니다. 본문 말씀 51절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같이 가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가장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자들입니다.
어린이여 예수님처럼 자라가라
눅 2:41-52 / 성흥모 목사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요즈음 어린이들이 어린이날에 받고 싶은 선물이 무엇이냐 하면 게임기, 핸드폰, 애완동물 인라인스케이트 순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받고 싶은 선물 중에 안마기가 들어 있었습니다. 어른도 아닌 어린 아이가 무슨 안마기라고 참 의아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에 공부할 책과 과제물, 그리고 학원으로 가서 공부할 교제와 과제물, 학원도 두 세 곳을 다니려 하니 아이들이 어깨가 무거워지게 되었습니다. 하도 어깨가 결리고 아파서 안마기를 선물로 받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요즈음 아이들 불쌍하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먼저 부모된 사람으로 큰 책임감을 느낄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저들 중에는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갈 위대한 사상가도 나오고, 정치가도 나올 것이기 때문에 어린이들을 귀하게 대우하고, 소중하게 받들어야겠습니다.
독일의 아이제나흐에는 아주 유명한 선생님으로, 요한 트레보니우스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까르멜 수도원의 원장이시면서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셨습니다. 선생님은 교문에 나와서 등교하는 어린이들에게 깍듯이 인사하면서 맞이하였습니다. 수업을 할 때면 언제나 모자를 벗고, 인사를 드리고는 수업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교장 선생님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하는 말은 우리 학교에서 배출될 학생이 장차 총독이나, 각료, 그리고 학자와 선생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에 먼저 존경을 표하기 위하여 그런 행동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이런 그의 행동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는데, 이 학교, 그의 제자들 중에서 유명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나왔습니다. 어떤 총독보다, 대신이나 학자들보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종교개혁자가 그의 제자였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우리들 중에 자라는 어린이는 장차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잘된 위대한 인물들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도 아이가 지나가면 장차 훌륭한 학자가 지나간다고 먼저 인사합시다.
예수회 신부이며, 선교사인 프란시스 사비에르(F. Xavier 1506-1552)는 며칠 밤낮 봉사하는 중에 너무나 지쳐서 그의 수종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젠 좀 자야겠네. 그렇지 않으면 피곤해서 쓰러질 지경이야. 누가 오더라도, 어떤 사람이 찾아와도 나를 깨우지 말게" 그리고는 그의 거처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충직한 수종자는 신부의 말을 듣고 누구도 들여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리면서, 사비에르 신부가 나오더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잠깐 내가 말을 실수하였네, 혹시 어린이가 찾아오거든 나를 깨워주게"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른들은 만나지 않아도 어린이들은 만나주고, 그를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의지라고 봅니다. 어린이는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갈 미래의 주인공이기에 무한 가능성이 열려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희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할 때에 성경에 오른손을 얹고 대통령의 선서를 해야 하는데, 다 낡은 조그만 성경책을 들고 나와 그 성경을 들고 선서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성경책은 "어머니가 내게 주신 이 성경책으로 인하여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성경책은 아주 적은 성경책이었고, 그 성경책이 아브라함 링컨으로 하여금 대통령이 되게 하였다고 하는데, 한 가지 놀라만한 사실은 아브라함 링컨의 어머니는 두 번째 어머니, 계모였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어린 자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려고 힘을 기울였으며, 계모가 링컨의 나이 14살 때에 돌아가셨지만, 그 여인은 가장 훌륭한 어머니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링컨의 전기를 쓰는 한 자가는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링컨에게는 위대한 사람이 될만한 조건은 한 가지도 주시지 않으셨다. 다만 그에게는 가난과 훌륭한 신앙의 어머니만을 주셨을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링컨의 본래 어머니 낸시 행크스 여사와 두 번째 어머니 사라부시 존스턴여사는 모두다 훌륭한 여성들이었습니다.
영국의 문학가 벤슨이라는 분은 링컨은 "미국에서 가장 정직한 변호사"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링컨이 이런 칭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하신 어머니들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기록한 것으로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 주일을 지키고 있지만, 성경에서 절기로 지키라는 명령이 있어 지키는 절기는 아닙니다. 교회력에 들어갈 수 있는 주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오면서 어린이의 중요함은 강조할 필요도 없을 만큼 중요하게 대두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어린이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하여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린이 주일를 지키거나, 어린이날을 지키는 것보다,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어린이는 어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불안전하며, 그들의 행동이 어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의 행동만 보고, 나무라고 꾸짖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제자들도 그러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설교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어린이들을 꾸짖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런 어린이들을 끌어 안아주고, 머리에 손을 얹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면서 몇 가지 말씀을 일러주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마18:3-6)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한 것처럼 18세기는 민중을 발견한 세기, 19세는 여자를 발견하였고, 20세기는 어린이를 발견한 세기라고 봅니다. 우리 주님은 이미 2천년 전에 사람의 수에도 들어가지 못하던 어린이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셨습니다. 과거 로마제국에서는 부모는 자식을 죽일 수 있었고, 마음대로 버릴 수도 있었고, 어려우면 노예로 팔아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BC1세기의 한 군인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만일 당신이 낳을 아이가 사내아이라면 기르고, 계집아이라면 버리시오"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봅니다. 로마제국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약하거나 못 생긴 아이는 버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서는 어린이는 사람의 수에도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명" 이런 표현을 보면 여성과 아이들은 숫자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 주님은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막10:14)고 하셨습니다. 아이를 무시하고 학대하는 가정은 복을 받을 수 없고, 어린이를 소홀히 여기는 교회는 부흥하지 못하고, 어린이를 무시고, 업신여기는 국가나 민족은 발전하거나 번영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이 예수님처럼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 대한 기록으로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보아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어린 시절이 있었고, 자라나셨으며, 때로는 부모님에게 속을 썩이기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었다는 말이 아니라, 부모님의 염려와 보살핌을 받으면서 성장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들은 절기를 잘 지켰습니다. 그렇게 절기를 귀중하게 여기고, 성실하게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절기를 지키고, 제물을 드리고, 함께 예배드리기 위하여 올라갔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본래는 남자들만 절기를 지키려고 올라가라고 하였으나 교법사 힐렐이라는 랍비가 여성들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하여 허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인 마리아도 올라가고, 어린 예수님도 함께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12살 부터는 율법의 아들이라고 하여 율법을 지키고, 성전에 올라가고, 금식에 참여할 수 있게 되는 나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6세부터 쉐마라는 말씀을 암송하기 시작하여, 10세가 되면 율법의 해석책인 미쉬나를 배우게 되었고, 12살부터는 율법의 아들이라고 하여 본격적으로 율법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12살 되는 해에도 그들 가정은 절기관습에 따라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절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 소년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고, 그의 부모들은 그것도 모르고 갈릴리 나사렛을 향하여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육신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어린 예수가 갈릴리로 내려오는 일행 중에 있으려니 하고 하룻길을 간 후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중에서 아들을 찾아보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유월절이란 절기는 민족 최대의 명절이었기에 약 100만 명의 인파가 함께 몰렸습니다. 인산인해를 이루니 미아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2살 되는 사내아이를 잊어버리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12살의 아들이라면 의도적으로 일으킨 일이요, 부모님으로는 아들이 애를 먹인 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님을 근심시킨 일이었지만, 엄청난 불순종으로 보지는 말아야 합니다. 오던 길을 다시 거슬러가면서 사흘 후에 성전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 예수는 성전의 선생님들과 함께 앉아서 말씀을 듣기도 하고, 그들 선생들에게 묻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예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예수가 슬기롭게 말하고 대답하는 것을 보면서 경탄하였습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를 보고는 "얘야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 그 때에 예수는 부모에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 이런 말이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그들 부모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에 내려가셔서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시면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두 가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들 부모님들이 아들 예수를 왜 잃어버린 것입니까? 막연하게 친척들과 함께 내려오겠지,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무관심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요즈음도 자식에 대하여 무관심하면 잃어버립니다. 아이들의 장래를 망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자식의 영혼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자식의 장래를 위한다면 그들과 함께 있어주어야 하고,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과 함께 있어주고, 함께 이야기꽃을 피운다면 탈선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잃어버린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들 자식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면 함께 성전에 나아가고 성전에서 만날 때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아버지가 찾고 있는데, 자신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여 받들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았고, 부모님이 원하시는 일을 받들고 순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한 마디로 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성장하지 않고, 하늘에서 뚝 무엇이 떨어진 것으로 알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같은 아픔과 고뇌를 가지고 성장하셨기에 우리의 육신의 허물과 죄도 함께 지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는 전인적인 성장이 이루어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가 자라가고, 키도 자라가고 종교성이 있었고, 사회성이 있었습니다.
현용수 교수가 지은 "성경적 유대인의 자녀교육" {IQ는 아버지, EQ는 어머니 몫이다}라는 책을 보면 아주 흥미있는 이야기로 가득차 있습니다.
1969년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세계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샤리트 사건입니다. 사건의 주제는 "누가 유대인의 자녀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건의 당사자는 베냐민 샤리트라는 이스라엘 해군 소령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해군 사관학교 졸업생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수재였습니다. 그는 영국 유학 중에 기독교인 영국 여인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둔 가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두 아이가 다니고 있는 유대인 국민학교에서 가정 환경조사서를 보내왔습니다. 조사서에는 종교난에 두 가지를 표시하게 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어느 민족인가? 둘째는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샤리트 소령은 거침없이 어느 민족인가? "유대인"이라고 적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시당국의 교육위원회에서는 그 환경조사서를 가정으로 돌려보내면서 유대인이라고 쓰지 말고, 기타란에 기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당국의 주장은 이것이었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하지 아니한 이교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유대인이라고 불린 자격이 없다는 해석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만이 유대교도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샤리트 사건은 이스라엘 국회에서도 논란이 많았고, 법원에서는 정통파 유대인 랍비들의 주장대로 샤리트의 아이들은 유대인이 아닌 이스라엘인으로 등록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유대인과 이스라엘인은 전혀 다른 입장이었습니다. 탈무드에는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유대인이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선민은 어머니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있어 부인은 세 명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사라, 하갈, 그두라가 있는데, 아버지 아브라함이 선민이라고 다 선민이 된 것이 아니라, 사라를 통하여 낳은 아들만 선민이 되었습니다.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 먼저 태어났어도 선민이 아니요, 사라가 세상을 떠난 후 그두라가 들어와서 많은 자식을 낳았어도 본부인 사라의 후손만 선민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무조건 선민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야 하지만, 사라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선민은 이삭의 가정에서도 이삭이 선택한 아들 '에서'가 선민이 아니라, 어머니 리브가가 선택한 '야곱'이 선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소년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보는 눈이 달랐고, 어머니의 기도 속에 아들 예수님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에릭프롬이라는 기독교심리학자가 있는데, 그는 그의 저서 사랑의 기교에서 어머니는 약속의 땅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땅은 항상 어머니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생명을 주는 땅이었습니다.
에릭 프롬에 따르면 어머니 마음 속의 선과 악은 자녀에게 그대로 전염된다고 말합니다. 악한 어머니는 자녀에게 젖을 먹이면서 악한 마음도 넣어준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신경질적으로 젖을 먹이면 아이는 설사한다고 합니다. 아이의 성격에 있어서 가정의 영향이 92%이고, 나머지 8%가 교회나 학교, 친구들이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부모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한양대학교 원목을 지내셨던 전재동 목사님이 쓰신 글을 보았는데, 하루는 병원정신과 있는 의사선생님이 목사님을 급히 찾았다고 합니다. 정신과 병동에 한 50대 여인이 입원을 하였는데, 도저히 다룰 수 없을 정도로 난폭해졌다고 합니다. 여인은 하루종일 머리를 치고, 가슴을 치면서 통곡하고 있었답니다. 의사 선생님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목사님이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에게 다가가서 친절하게 웃으면서 마음을 열게 하고, 말문을 열게 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자식을 죽인 사람입니다." "아니 아주머니가 어떻게 자식을 죽였다는 말씀입니까?" 그 여인은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제 아들이 얼마 전에 사형 당하였습니다. 탈영병으로 못된 짓을 많이 하다가 결국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애가 교도소에서 저를 만나자고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엄마를 보고싶다고 하였고, 저 역시 사랑하는 자식을 마지막으로라도 보고 싶어 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제가 국민학교 4학년 때 집으로 돌아오다가 길가에 있는 무밭에 들어가서 무 하나를 뽑아온 적이 있지요?' '그래, 그 때 우리는 참 맛있게 무국을 끓어 먹었지' 이렇게 대답하였더니, 그 애는 제 손을 잡으며, '엄마 왜 그 때 저를 꾸짖지 않았습니까? 왜 좀 나무라지 않았습니까? 한 마디 꾸중도 없이 그 무를 가지고 국을 끓여 먹었습니까? 그 후부터 연필을 훔치고, 노트를 훔치고, 중학교 때는 남의 담을 넘어가서 돈을 훔치고, 온갖 나쁜 짓 하다가 결국은 탈영하고 살인강도로 죽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고 탄식하며 후회하였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은 사랑하며 그들이 예수님처럼 전인격적으로,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나도록 함께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지혜가 자라고, 건강하게 키가 자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신앙과 사람에게 사랑받는 사회성에 있어 성장하여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크리스마스를 잃어버린 사람들
눅 2:41-52 / 이종윤 목사
크리스마스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헤롯 왕, 여관집 주인 그리고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좋은 기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천한 목자들, 늙은 과부 안나, 예수를 안고 기뻐한 시몬, 별 따라 온 동방박사들은 예수를 찾고 만난 이들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을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있지 못하면서 만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I. 누구나, 언제나(Any body, Any place)
우리는 누구나 주님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부모로서 누구보다도 예수님께 집중할 수 있었던 마리아와 요셉조차도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크고 작은 직분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 역시 어떻게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싶겠지만, 이렇게 있을 법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마리아와 요셉은 있을 법하지 않은 장소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할 성도들이, 그리고 예수님을 꼭 모시고 있어야 할 교회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일까요?
II. 우리 자신의 이해(Our own understanding)
말씀에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이 동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나옵니다. 가정은 사실과 다를 수 있는데 그것을 동일시 한 것이 큰 실패를 가져온 것입니다. 성경을 떠나서 예수님을 추측하고 상상하는 것은 예수님을 떠난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your own understanding)을 의지하지 말라"고 분명히 나옵니다. 자신의 생각과 이해를 의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 요셉과 마리아는 자신의 부주의 때문에 이런 안타까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성장을 보면서 기뻐하기만 했지 예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이라는 기쁜 날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슬픈 날에는 예수님을 찾지만, 기쁜 날에는 예수님을 잊기 쉽습니다. 이 아름다운 축복의 계절에, 우리는 들뜬 마음으로 가정과 이웃을 만나면서 자칫 예수님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다는 것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III. 예수께로 돌아가라(Back to Jesus)
자신의 추측과 부주의로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면, 마리아와 요셉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듯이 다시 예수님께 돌아와야 그 분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 생활이 무너짐으로써 예수님을 잃어버리는데, 다시 기도에 대한 열심을 내먼서 예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어떤 이는 죄 가운데서 예수님을 잃어버리는데, 예수님은 절대 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버림으로써 예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어떤 이는 성경 읽기와 연구를 열심히 하기로 결심하고서 몇 달 못 가 시들해지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없이는 강하게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덮는 순간부터 우리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이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일을 겪고 있다면 죄를 버리고 기도와 말씀으로 예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어쩌면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랜 시간 멀리 떠나왔을 지도 모릅니다. 혼자 달려왔으면서 예수님과 동행했다고 추측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주님을 찾고 만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숨어 계신 분도 아니요, 우리를 피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다 내게로 오라고 오늘도 팔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이 다시 구원의 기쁨을 회복해야 할 존재라면 주님께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성탄절에만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닌, 매년 매시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고 평생 주님과 동행하게 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청소년(예수님)의 신앙생활
눅 2:41-52 / 지태이 목사
오늘은 5월 가정의 달 네번째 주일인 청소년주일입니다. 내일의 가정과 교회의 일꾼이 될 청소년들, 중고등부들을 생각하면서, 우리 기성세대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그리고 우리 청소년들은 어떻게 우리의 인생을 아름답게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자식 농사를 일반 농사와 비교하여 종종 말합니다. 농사짓기가 어려우듯이 자식 농사 또한 어렵다는 것을 느낌니다.
농사짓는다는 것 어렵습니다. 힘이 듭니다. 가믈거나 일조량이 부족하고 태풍이 불고 홍수가 심하면 더 더욱 농사짓기가 어렵습니다. 지난 여름에 태풍 피해가 너무 커 가을에 낱알 한 톨 거두지 못한 농가도 많았습니다. 과일 나무에서 과일을 얻지 못한 농가도 많았습니다.
자식 농사도 보면 영유아, 유치, 초등학교 때는 그런대로 자식을 키우는 재미가 있고 잘 양육되어 가는데 중고등학생의 부모 노릇하기란 매우 힘이 듭니다.
부모의 마음은 한결같이 자녀들을 잘 키우고 싶은데 신앙문제나 잘못된 친구문제나, 돈 문제나 공부문제나, 가정에 문제가 터질 때마다 청소년 자녀를 가르치기란 정말 힘이 듭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잘 키우려면 무엇보다도 자녀에게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공부합니다. 확고한 믿음이 있어야 스스로 자정 능력을 가지고 끊을 것은 끊고, 정리할 것은 정리하고, 한눈 팔지 않고 집중해서 공부합니다. 그래서 훗날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이는 확실한 믿음을 가진 부모와 확실한 믿음을 가진 자녀가 이루어 내는 열매입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의 비젼을 이루기 위해서 집중해서 공부에 매진합니다.공부를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성장과 발전에 으뜸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열심히 공부한다고 다 되는 것 아님니다.
공부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공부인지, 또 얼마나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모르고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고 점수만 좋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님니다. 점수가 문제 아니고 어느 대학이 문제가 아님니다.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은 먼저 자신이 좋아하고 즐거워 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음악, 문학, 운동, 과학...) 다음으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 하는가입니다. 좋아해도 잘하지 못하면, 재능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좋아하고 너 참 잘한다 그렇게 인정하는가?입니다. 나는 좋아서 즐거워서 노래 열심히 부르는데 귀를 막는다거나 귀따겁다고 안들으면 소용없습니다. 네 번째는 때로는 돈을 안받고도 즐겁게 그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만 좋아하고 재능대로 하는 것 아님니다. 마지막으로는 그것이 하나님 기뻐하시고 다른 사람들에게 덕이 되는가?입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해야 합니까? 이를 위해 우리 부모는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까? 오늘 이 시간 부모와 자녀 관계를 중심으로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할 것인가? 우리 청소년들은 누구를 본받을 것인가를 살펴보면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1. 먼저는 부모님의 무관심과 이해 못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십대를 말할 때, 일반적으로 teen-ager라 하는데 바로 13세-19세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좋은 꿈이 있는 시기이고 또 가장 어려운 질풍노도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춘기를 맞이한다는 것이고, 신체적으로,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발달이 급격히 이루어지는 때이므로 부모의 안내와 교훈이 계속적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세대 차이가 많이 나지만 이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어느 때보다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그들의 성숙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에 부모들의 무관심과 이해 못함이 나오잖습니까?
예수님은 12살 되던 해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러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명절이 끝난 다음 동행중에 있는 줄 알았는데 보니 예수님이 없었습니다.(44절) 12세가 된 예수님이 없자, 부모님들은 몹시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오던 길을 다시 올라갔는데 사흘 만에 성전에서 찾았습니다.(46절)
무슨 연고인지는 바빠서 그랬는지, 어쨋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잃어버린지 하루가 지나서 알았고, 3일만에 성전에 찾았습니다. 얼마나 무관심했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의 부모들은 소년 예수님의 영적인 성숙을, 하시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50절)
50절에 보면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성전에 계신 예수님이 육신의 부모(earthly father)와 하늘의 부모(heavenly father)를 구별해서 불렀지만, 요셉과 마리아는 그 뜻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예수님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즉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이 말의 뜻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는 더더구나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이미 영적으로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그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정신을 의식했고, 성경에 대하여 깊은 이해와 통찰력을 갖고 있음에도 부모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청소년들, 자녀들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이해 못하는 무지함은 없습니까? 그들이 하는 말을, 행동을, 관심을, 신앙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을 합니까? 사춘기에 있는 청소년들을 어느 누구보다 이해하고 관심을 깊이 가질 수 있기를 바람니다.
내일의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교회와 가정을 짊어지고 나갈 청소년들, 청년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넓은 이해와 관심을 갖고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세대를 차이를 좁히기 위해서 우리의 눈높이를 좀 그들에게 맞추어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대차이를 극복하며 나갈 때 하나님이 크게 함께 하실 것입니다.
2. 그러면 예수님의 청소년 시절은 어떠했습니까?
1) 육신의 부모만 아닌, 진정한 하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49절을 보면 사흘만에 마리아가 가까스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성경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예수님의 자기 발견(self-awaremenss)의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때 이미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임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정확히 알았습니다.
주님이 그러했듯이 십대 청소년들을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아버지로 발견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부모된 성도들이, 더나아가 우리 기성세대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자녀의 참 아버지이심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나의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며 발견하도록 도와주고 기도해야 합니다. 부모야말로 자녀에게 최초의 그리고 영원한 스승이요, 가정은 자녀의 최초의 그리고 영원한 학교입니다.
그래서 부모 되긴 쉬워도, 부모 노릇하긴 어렵다는 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자녀에게 자신이 누구인줄을 알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3:7-9에 바울은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기 위하여 그의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다 해로 여겼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 때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생의 사명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한 고귀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자기를 발견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발견하십시오. 자녀들로 하여금 발견하도록 도우시기 바람니다. 청소년들이여!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시기 바람니다.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는 시간 되시기 바람니다.
청소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육신의 부모 아버지만이 아니라, 참 아버지이신 하늘의 하나님께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인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됩니다. 참 아버지,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그들로 만나게 해서 고백케 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성전중심의 삶에 앞서서 먼저 부모된 요셉과 마리아가 성전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말씀이 41-4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 갔다가...”, “전례를 좇아”라는 말은 영어로는 “according to the custom”이란 말입니다. 한자로는 “앞 전(前) 자” “법식 예(例) 자”를 씁니다. “앞에서 하던 식대로”라는 뜻입니다.
율법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남자들은 적어도 일년에 3번씩, 즉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는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리도록 규정했습니다(신명기16:16). 13살이면 성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12살이었으니까 이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예루살렘에, 즉 성전에 데려 갔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요즘 말로 ”Sunday Christian, Sunday Man, Fresh Man“이 아니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에서 정해 놓은 대로 모든 율법의 규정들을 성실하게 지키는 참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경건한 부모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성전을 오르는 그런 부모 밑에서 성장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무엇보다, 어떤 곳보다 성전으로, 교회로 인도하시기 바람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성전에서 영적인 기쁨과 즐거움 속에 푹빠져 있었습니다.
43절을 보면 “예수는 예루살렘에, 즉 성전에 머무셨더라” 했습니다. 요세푸스라는 역사학자는 유월절만 되면 2000년 전 그 작은 도시 예루살렘에 200만 명 이상의 흩어진 디아스포라, 즉 흩어진 유대인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다 제 갈길로 돌아가지만 예수님은 성전에 더 오래 머믈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계속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49절에 예수님은 교회를 내 아버지 집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예수님의 몸입니다. 그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입니다.(행20:28)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엡1:23, 골1:24)
그러므로 교회는 소중한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만큼 소중한 곳은 없습니다. 교회가 있기에 구원의 복음이 전파됩니다. 교회가 있으므로 양떼들이 양육을 받습니다.(딤전3:15) 교회가 있으므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 세상에 화려한 것들이 많지만 교회보다 소중하지는 않습니다. 사도들은 교회를 사수(死守)하기 위해 순교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있기까지 초대교회부터 수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희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소중한 교회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자주 찾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자꾸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멀더라도 찾아 갑니다. 좋아하기 때문에 자주 가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소중한 것은 자주 보고 싶어집니다.(삼상2:18) 자꾸 만나고 싶어집니다.
이렇듯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교회를 자주 찾게 됩니다.(시84:10) 일주일 내내 교회에 오지 않고도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면 생각해 볼 일입니다.
둘째,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물건은 잘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사람 만나러 가는데 그냥 갑니까? 아름답게 하여 갑니다. 소중한 것 일수록 관리를 잘 합니다. 하찮은 화분이나 가구도 관리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집을 외면하고 소홀히 할 수 있습니까? 내 집은 먼지가 안 나게 쓸고 닦으면서 교회는 먼지투성이가 된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고, 교회에 많은 사람이 모임으로 언제나 아름답고, 깨끗해야 합니다. 교회 건물이 되었든, 성구가 되었든, 성도들, 지체들이든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교회를 사랑합시다.
오늘날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청소년들이 무엇보다도 교회중심의 삶을 살도록 교회와 기성세대는 최대한의 배려를 해야 합니다. 교회에 올 테면 오고, 말테면 말라식이 아님니다. 교회를 중심해서 살아 가도록 본을 보이고, 교회를 꾸미고 아릅답게, 멋지게 활동할 수 있도록 시설도, 도구도 많이 준비해야 합니다. 투자 좀 해야 합니다. 예산도 좀 많아서 써야 할 곳에 꼭 쓰여지도록 헌금생활도 힘쓰고, 이런 일들 때문에 사업도 직장도 복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자녀들을 교회 주일학교에 잘 보내십니까? 잘 보내시기 바람니다. 교회중심의 자녀들로! 청소년들로 세워 나가시기 바람니다.
3) 예수님은 영적 지혜와 지식인 성경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46-47절)
46-47절을 보면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예수님은 성전에서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고 물음에 대답도 하심니다. 그것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 기이함으로 인해 놀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상당히 깊은 지식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교회에 와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고 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고 또 배워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한다고 했습니까? 주의 말씀으로 삼갈 것이니이다(시119:9) 했습니다. 성경에 도전되어 지도록 생명의 꼴을 많이 먹고 들려 주시기 바람니다. 말씀의 깊은 곳을 먼저 지나야 합니다.
유대 학자들에 말에 의하면, 열두 살 된 어린이는 때때로 금식하는 것을 시작하여, 속죄일에 금식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13세가 되면 어린이는 "계명의 아들"이 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즉 교회 어른들의 의무를 감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이미 유아기 때부터 할례에 의하여 "계약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유대인의 어린이 양육법을 보면 어린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날을 잡아 부모가 아이를 이른 새벽에 깨워 깨끗하게 목욕시키고,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 입히고 음식을 맛있게 먹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아이 손을 잡고 회당으로 데리고 가서 10계명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자도 빼지 않고 또박또박 어린아이에게 읽어준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아이의 손을 끌고 랍비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갑니다. 그러면 랍비(선생)는 일찍부터 아이를 기다리고 있다가 아이가 오면 할 수 있는 최대의 성의를 다하여 그 아이를 환영해 줍니다. 어린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그 아이를 품에 안아줍니다. 얼굴에 입맞춤을 해줍니다. 그리고 랍비는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서 간단하게 교육을 시킵니다. 물론 교과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간단하게 교육하고 나면 과자 하나를 선물로 줍니다. 그것은 꿀로 만든 아주 달콤하고 맛있는 과자입니다. 이 과자에는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에게 그 과자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을 따라 핥아먹으라고 지시합니다. "단맛을 보라"는 뜻입니다. 꿀로 만든 맛있고 아름다운 과자는 어린아이들에게는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랍비는 그 아이를 보면서 "애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것은 이 과자를 먹는 것보다 더 달콤한 것이란다.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우기만 한다면 앞으로 너의 삶은 이 과자보다도 훨씬 더 달콤해 질것이다"고 말합니다. 어린 아이가 알아듣든지 알아듣지 못하든지 랍비는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심어줍니다. 그러면 그 아이는 생전 처음 먹는 그 달콤한 과자 맛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이 마음속에 깊이 새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아이들은 과연 나쁜 것이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선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갈 수 없으니 경건하게 자라게 됩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대인들이 뛰어난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바로 성경을 일찍이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녀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6:6-7)라 하신 말씀에 의해서 양육했습니다.
예수님도 그 부모가 어린이 때부터 성전에 데리고 갔고,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먼저 충만함으로 양육되어 바로 메시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신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순종하여 받드시는 삶을 살았습니다.(51절)
51절 이하에 보면 이 일이 있은 후에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순종하며 받드는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에게 절대 순종해야 하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둘째는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간된 도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자식의 자식된 도리는 부모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두 절대적 순종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가 상반되는 경우는 먼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엡6:1절 이하에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를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와 내 부모님을 창조해 주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부모님을 축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순종할 줄 알고, 하나님을 높일 줄 아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순종을 잘하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이 땅에 없습니다. 짐승 중에도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짐승은 사랑받습니다.
동물원에 가보면 새나 물고기들, 물개, 말, 돌고래 모두 훈련되어 말을 잘 듣습니다. 공놀이도 하고 뛰어 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묘기를 잘 부림니다. 이처럼 동물들도 사람 말을 잘 듣는 동물은 사랑받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합니다. 말을 듣지 않는 기계는 버리듯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버림받습니다. 이스라엘의 사울이 바로 그런 왕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 필요하시면 자기 목숨까지도 드릴 수 있는 데까지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최고로 받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인정받은 것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했을 때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이 순종하여 받드는 생활이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줄 알고, 교회 통치에 순복하는 사람, 주의 종의 말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일생을 책임지십니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려면, 크게 쓰임받는 존재가 되려면 순종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사람으로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마3:17, 빌2:6-8) 아버지여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십자가의 죽으심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아 내놓아 죽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에 대해서도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를 다 구원하셨습니다.
청소년 여러분! 위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시기 바람니다. 아래로는 육신의 부모님께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높이 들어 쓰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