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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궁전, Alhambra 宮殿 - 2
사자의 중정 다음에는 왕비가 사용했다는 '두자매의 방'이다.
두 자매의 방(Sala de las Dos Hermanas)
사자의 중정에서 연결되는 두 자매의 방은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똑같은 모양의 대리석 두개가 깔려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두자매의 방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장식은 천장에 있는 벌집모양의 종유석 석회세공이다.
아벤세라헤스 가의 방의 벌집 모양의 둥근 천장을 뒤덮은 무수한 종유석 모양의 장식
이렇게 벌집모양으로 만든 것이 5,000개나 된다고 한다.
모하메드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코란을 받은 신성한 장소를 상징하듯 푸른 빛을 발하고 있다.
두 자매의 방 옆에 있는 ‘아벤세라헤스 방’에는 끔찍한 사연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슬람 왕국에서 큰 힘을 가지고 있던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한 청년이
후궁과 사랑에 빠졌는데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가문에서 이를 왕에게 일러바쳤다.
그러자 왕은 연회를 구실로 아벤세라헤스 가문의 청년 36명을 초대하여 모두 죽여버렸다.
그 때 흘린 피가 사자의 중정까지 넘치고 사자의 분수 입에서까지 흘러나왔다고 한다.
워싱턴 어빙의 이름이 적힌 현판이 붙어있는 방이다. 어빙이 머물며 집필하던 방,
이곳을 지나면 건너편으로 알바이신 지역을 조망할 수 있다.
1860년에 쓴 그의 소설 ‘알함브라 이야기’가 없었다면
알함브라 궁전은 이 도시에 있는 하나의 낡은 성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어빙은 바로 이 방에서 기거하며 ‘알함브라 이야기’를 집필하였다.
알바이신 지구는 옛날 아랍인들의 집들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꼬불꼬불 골목길과 하얀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사이프러스 나무와 건물들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왕의 목욕탕 옆에 있는 찜질 방...
목욕탕에는 온탕과 찜질 사우나 시설이 있고, 자연채광이 되는 유리문이 있어 온도와 습도조절도 된다.
아름다운 문양의 '두 자매의 방'
두 자매의 방에서는 창문을 통하여 아름다운 ‘린다라하’ 중정이 내려다 보인다.
이곳은 아름다운 작은 정원이 내려다 보이는 린다라하의 발코니(The Mirador of Lindaraja)이다.
왕비가 사용하던 두자매의 방 앞에 있는 린다라하 정원. 싸이프러스 나무와 꽃, 시원한 분수가 있는 이 정원은
1526년 찰스1세의 그라나다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물이 귀한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온 이슬람인들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을 낙차를 이용하여
모든 정원에 연못과 분수를 만들고 나무와 꽃을 가꾸는데 사용하였다.
방금 지나온 린다라하 정원이 보이는 발코니
두자매의 방에서 바라본 알바이신 지구
나스르 궁전을 돌아보고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줄
헤네랄리페 정원으로 가는 도중 유리창에 무슨의미인지 모를 동물이 새겨져 있습니다.
나스르 궁전에서 별채로 향하기 직전의 회랑에서 바라본 알바이신 마을 풍경
두 자매의 방을 지나고 왕이 목욕을 하던 방을 거쳐,
워싱턴 어빙이 ‘알함브라 이야기’를 집필했던 방을 지나 밖으로 나오면 파르탈 정원이다.
별채 빠르딸 궁전
알함브라 궁전은 일명 분수정원이라고 합니다.
곳곳에 각각 형태의 분수가 있고 또한 그 분수에서 흐르는
때론 쏟아지는 물줄기의 음률이 너무 아름다워
작곡가 타레가는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불멸의 명곡을 작곡했나 봅니다.
별채인 빠르딸 궁전
건물과 인공연못 그리고 야자나무의 조화가 완벽하다
궁전 내의 정원
3. 카를로스 5세 궁전
16세기에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카롤로스 5세 궁전.
이전에는 증정에서 투우등이 개최되었지만
현재는 매년여름에 개최되는 그라나다 국제음악 무용제의 대회장으로 이용된다
알함브라는 아랍어로 "횃불을 비추면 붉게 빛나는 성벽"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4개 지구로 나누어진 구역중 이곳은 카를로스 궁전의 입구인 "정의의 문"입니다.
"정의의 문" 상단에는 다섯손가락을 나타내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는 이슬람의 5계인 "신앙, 자비, 기도, 금식, 메카순례"를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그리스식의 석주가 늘어선 원형의 회랑
카를로스 5세 궁전안의 원형광장 중앙에 서서 작은소리로 얘기를 해도
공명현상으로 먼발치에서도 또렷히 들립니다.
4. 헤네랄리페 정원
알함브라 궁전(나자리궁)에서 동쪽으로 도보 10여분 거리인 태양의 언덕에 위치해 있는
헤네랄리페 정원은 알함브라 여름 별궁으로 14세기 초에 만들어 졌다.
1302년에서 1309년 사이 무하마드 3세 시대에 건축되었다.
건축당시 시설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수로를 이용한 정원의 모습이 이채롭고 아릅답다.
왕의 여름 별궁, 또는 왕실가족의 휴식과 음식제공을 위해 사용되던
밭으로 둘러싸인 전원주택,왕실농장이라 할수 있다.
정원이 가까워 지면서 곧게 뻗은 싸이프러스 나무가 에워싸고 있는데,
이 나무는 죽음을 뜻하는 동시에 영원한 삶을 의미하는 나무이다.
정원이 시작되는 입구에는 잔인하게 보일 만큼 깎은 측백나무들로 이루어진 정원이 있는데,
이곳을 사랑의 미로라 부른다.
바닥에 석류를 새겨놓은 길을 따라가면 헤네랄리페 정원으로 들어간다.
그라나다가 석류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이 도시에는 석류나무가 많다.
헤네랄리페 정원은 뒤편에 있는 시에라 네바다 산맥에서 흘러내려오는
눈 녹은 물을 끌어와 곳곳에 수로와 분수를 만들어 물의 정원이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헤네랄리페 정원은 나무에 둘러싸여 뻗어 있는
통로와 물을 이용하여 정원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헤네랄리페 정원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이 여름별궁의 안쪽에 있는 ‘아세키아(수로를 뜻함) 중정’이다.
아세키아 중정은 꽃과 분수를 잘 조화시켜 만든 정원으로 유명하다.
이 중정의 중앙에는 길이 50여 미터의 좁고 긴 수로를 설치하였고,
수로 양편에서는 작은 분수들이 물을 뿜어 대고 있다.
그리고 수로를 따라 좌우 양쪽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1년 내내 지지 않고 피어 있도록 화단을 조성하였다.
빠르딸 궁전을 지나면 멀리로 여름 별궁인 "헤네랄리페 정원" 외관이 보입니다.
알함브라에서 성벽 위의 길을 따라 10여분 걸으면
사이프러스 나무가 시원스럽게 뻗어있는 헤네랄리페 정원입구에 이른다.
헤네랄리페(Generalife) 정원 입구입니다.
스페인어는 알파벳 "G"도 "ㅎ"발음으로 읽는다고 합니다.
이곳은 싸이프러스 나무 (우리나라에서는 "측백나무"라고 하나요?)를
평평하고 각지게 조경한 것이 특징인데 그 아름다움이 정말 멋있습니다.
담장처럼 보이는 곳에서 옆으로 들어가면, 측백나무로 만든 미로와 같은 정원이 있다.
측백나무를 깎아서 입구처럼 만들었다.
처음에 만나는 수로를 이용한 정원인데, 좌우에 있는 측백나무가 마치 담장과 같은 모습이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측백나무로 만들어 놓은 사랑의 미로를 지나면 여름별궁으로 들어간다.
여름별궁에 있는 작은 중정, 이곳에도 오렌지 나무가 심어져 있다.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아세키아 중정'
헤네랄리페 정원은 왕의 여름별궁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포물선을 그리며 쏟아지는 분수와 연못,
잘 다듬어진 조각같은 나무들의 형상, 여러가지 다양한 색채의 조화를 이룬 화단,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건물과 조망 등 왕의 여름별궁답게 잘 꾸며져 있습니다.
헤네랄리페 정원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아세키아 중정은
쉬지 않고 물을 뿜어대는 중앙 수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1년 내내 꽃이 지지 않도록 화단을 만들었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눈 녹은 물 때문인지, 정면의 여름 별궁이 더욱 시원해 보인다.
다른 방향에서 본 정원의 모습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 사막에서 건너온 이슬람인들은 시원하고 풍부한 물을 마음껏 이용하였다.
정원에서 보이는 알함브라궁전 전경
오른쪽 아치 밖으로는 알함브라 궁전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헤네랄리페 정원에서 바라본 알카사바 성채(왼편)와 알함브라 궁전(중앙), 그리고 카를로스 5세 궁전(중앙 뒷편)
역시 조망이 아름다웠습니다.
본인도 그 옛날 이슬람 왕처럼 천천히 회랑을 거닐며 조망을 즐겼습니다.
잘 가꾸어진 아름다운 정원에 죽은 고목이라니...??? 그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깊은 사연을 지니고 있는 고목나무에 얽힌 사연을 알아보기로 하지요.
나무 아래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 있다고 합니다.
이 나무 아래에서 근위대 귀족이 후궁과 사랑에 빠져
밤이면 몰래 키스를 나누며 사랑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이를 알게된 왕이 노하여 귀족을 즉시 처형시켰습니다.
이들에게 장소를 제공한 나무도 무사할수 없었고,
왕은 잘려진 귀족의 머리를 이 나무에 매달고
나무도 뿌리를 잘라 고사시켰다고 합니다
이 나무를 만지면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그 후로 너무 많은 관람객이 이 나무를 만지며
진실한 사랑을 이루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되어
지금은 통제되어 만질수가 없습니다.
헤네랄리페 정원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
Tárrega, Recuerdos de la Alhambra
타레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Francisco Tárrega
1852-1909
영화 <금지된 장난>의 ‘로망스’(Romance d‘Amour)와 함께
가장 많이 연주되는 클래식 기타 연주곡입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물결 가운데 스페인의 음악계는 일종의 섬과 같았고,
20세기 접어들 무렵에야 비로소 지난 19세기의 축소판으로나마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거장의 시대인 19세기에 대해 스페인은 그다지 커다란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천재 작곡가 후안 크리소스토모 데 아리아가(Juan Chrisostomo de Arriaga, 1806-1826)가
교향곡과 현악 4중주, <스타마트 마테르>를 작곡하여 놀라운 천재성과 개성을 보여주었는데,
만약 그가 요절하지만 않았다면 스페인의 19세기 음악사를 바꾸어놓았을 것이라는
역사의 가정형만이 아쉽게 남아 있다.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스페인의 민족주의 음악 운동
작곡에서는 아리아가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은 채
19세기 후반의 스페인은 여전히 암흑기를 걷고 있었지만,
기악 연주 부문에서는 몇몇 괄목할 만한 인물들이 등장하며
스페인 음악계의 새로운 여명기를 탄생시키고 있었다.
비르투오소 연주자로 국제적으로 활약한 최초인 인물인 페르난도 소르와
연주자로서 헤수스 데모나스테리오, 엔리케 아르보스, 파블로 데 사라사테 등과 같은
소수의 인물들, 그리고 첼리스트인 파블로 카잘스와
기타리스트 안드레스 세고비아 등의 젊은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페라는 이탈리아에게, 교향곡은 독일에게 지배당하고 있을 무렵,
르네상스 시대의 영화로움을 되살리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부흥 운동이
19세기 중엽부터 여러 지방을 중심으로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탈루냐에서 안젤모 클라베(Anselmo Clavè)에 의해 근로자합창협회가 조직되었고,
이러한 운동은 이후 스페인 음악학 연구의 창시자인
펠리페 페드렐(Felipe Pedrell, 1841-1922)에 의해 계승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스페인 작곡가인 빅토리아의 작품으로부터
각 지방의 민요들까지를 모두 연구하여 스페인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그의 노력은
제자인 그라나도스, 데 파야, 알베니스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고,
이러한 민족주의적 음악운동의 반대편에는 카탈루냐에서 한동안 지낸 바 있던
뱅상 댕디(Vincent D'Indy)와 같은 프랑스-바그네리안들 덕분에
바그너라는 막대한 영향력 또한 스페인에 공존하게 되었다.
스페인의 영혼을 되살린 타레가
프란시스코 타레가는 19세기 후반의 스페인을 대표하는 기타 작곡가이자
20세기적인 의미에서 현대적인 연주법을 완성한 위대한 연주가이기도 하다.
그는 시대를 대표하는 비르투오소로서 경이적인 테크닉과 낭만적인 연주 스타일 덕분에
일명 ‘기타의 사라사테’로 불리기도 했는데,
실제로 그는 기타라는 악기를 통해 세계적인 인지도를 한 몸에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랜 동안 다른 악기에 밀려 사라질 운명에 놓였던 기타의 가능성을 새롭게 발견해냈다.
특히 그는 신체적인 문제 때문에 생의 마지막 9년 동안은
손톱이 아닌 손끝의 살로만 현을 튕기는 새로운 주법에 매진하기도 했다.
한편 작곡가로서 그는 1880년대부터 1903년에 이르는 20여 년 동안
베토벤과 쇼팽, 멘델스존, 베르디, 바흐와 같은 거장들의 음악을
기타로 편곡하거나 현대적인 테크닉을 완성하기 위한 연습곡을 작곡하여
이전과는 다른 혁신적인 테크닉과 확장된 표현력, 새로운 음향을 이끌어냈다.
연주가로서 기타 소리를 더욱 맑게 울려 퍼지게 하고 풍부한 울림을 이끌어냈던 것이
고스란히 작품에 반영된 타레가의 작품들은, 20세기의 위대한 기타리스트로 칭송받는
나르시소 예페스의 말대로 동시대 및 후대의 기타 거장들과
현격하게 구분되는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이와 더불어 그의 많은 편곡 작품들 덕분에 기타 레퍼토리 또한
급격히 넓어지게 되었다는 점 또한 그의 선구자적인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단순히 악기 자체에 쏠려 있지만은 않았다.
그의 친구인 알베니스의 영향으로 스페인의 민속적 요소들을
낭만주의적인 감수성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 ‘호타’와 같은 스페인 고유의 무곡을 주제로 한
많은 기타 작품과 알베니스의 피아노 작품 편곡들을 꼽을 수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서 낭만주의 음악의 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 서있다.
붉은 궁전 알함브라에 드리워진 추억
타레가가 발전시킨 트레몰로 주법이 그 신비로움과 애절함을 더하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그가 그라나다를 방문했을 때 알함브라 궁전을 보고 받은 감동을 기타로 옮긴 것이다.
이 궁전은 스페인에 존재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중반에 세우기 시작했으며 증축과 개보수를 거쳐 완성된 것으로서,
현재 남아 있는 궁전의 모습은 대부분 14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특유의 인공미는 물론이려니와 자연과의 조화 또한 일품으로 이슬람 문화의 결정체로
일컬어지는 알함브라 궁전은 그 아름다움만큼이나 비극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그 해,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2세의 공격을 막지 못한 그라나다 왕국 나스르 왕조의
마지막 왕 보아브딜은 이 궁전을 평화적으로 내주고 아프리카로 떠난 것이다.
그리하여 스페인은 비로소 근대국가로의 이행을 걷게 되었지만,
알함브라 궁전은 이전 800여 년간 내려온 이슬람 문화의 찬연함을 간직한 채
홀로 오롯이 서 있게 된 것이다.
트레몰로 주법이 자아내는 그 애잔한 분위기와 낭만성 넘치는 멜로디 라인은
이러한 알함브라 궁전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음악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일설에 따르면 작곡가의 개인적인 사건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1896년 타레가는 그의 제자인 콘차 부인을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타레가의 사랑을 거부했고 실의에 빠진 타레가는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알함브라 궁전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는 달빛이 드리워진 궁전의 아름다움을 따라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며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작곡했다고 한다.
이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영화 <킬링필드>의 주제가로 사용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이 아름다운 명곡을 들으며 자신의 추억이나 옛사랑을 떠올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몹시 메마른 가슴을 가진 사람임이 분명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만큼
낭만적인 작품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추천음반
이 곡은 기타리스트라면 반드시 도전해야 하는 필수 레퍼토리이다.
가장 유명한 연주는 단연 세고비아의 연주(DG)를 추천한다.
모노럴부터 스테레오에 걸쳐 수차례 녹음을 남겼는데
어느 하나 그의 색채감과 낭만적 정서가 황홀하게 피어나지 않은 연주가 없다.
줄리안 브림(RCA) 또한 기타 울림과 테크닉을 절묘하게 결합한 독특한 분위기로 사랑 받아왔다.
현대적 세련미와 테크닉으로 승부하는 데이비드 러셀의 연주(SONY)도 훌륭한 해석으로 손꼽을 만하며,
10현 기타로 유명한 나르시소 예페스(DG)의 감수성 풍부한 연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세고비아 사후 한 신문에 실린 만평입니다.
“얘들아, 이제 하프는 그만 연주해도 돼. 세고비아를 스카우트해 왔거든.”
Francisco Tarrega Eixea
Recuerdos De La Alhambra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Duermen tus recuerdos 흥망의 역사를
de ebano y perfume 품안에 고스란히
en tus aposentos, 간직한 채
llenos de ternura, 온화함을 머금고 서있는
mi querida Alhambra. 나의 소중한 알함브라여.
Viste mil amores 네 안에선 많은 사랑이
nacer en tus entranas, 피어나고
luces que acarician 창가에 스미는 달빛만이
desde tus ventanas, 어루만져주고 있는
despechada Alhambra. 가여운 알함브라여.
Brillan tus ensuenos 밤하늘의 수 많은 별들 속에
en un mar de estrellas 너의 꿈은 빛나고 달빛만이
y la luna canta 너를 위해 노래하고 있구나
tu silencio, Alhambra. 말없는 알함브라여.
Lagrimas de yedra 망국민을 위해
lloran los vencidos, 설움의 눈물을 흘리며
Entre espada y rosa 사랑과 죽음 속에 어느덧
crecen tus olivos, 평화의 싹을 틔우고 있구나
mi querida Alhambra. 사랑스런 알함브라여.
Guardo en mi recuerdo 오래 전 보았던 달빛에 대한
tu sabor a luna, 기억을 떠올리며 언덕위에
brillas sobre el pueblo 태양처럼 빛나고 있구나
como el sol, Alhambra. 알함브라여
Sueno con Alhambra, 사랑스런 알함브라여
mi querida Alhambra. 나는 너를 꿈꾸노라
Francisco Tarrega-Eixea (1852∼1909)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Recuerdos de la Alhambra
Andres Segovia (1893~1987)Guitar
타레가는 근대 기타의 아버지로서 현대 기타 발전의 터전을 닦아놓은 은인이었다.
그는 필연성에 의한 작곡만을 했으므로, 모든 작품이 기타의 명곡으로 꼽히고 있다.
알함브라궁전의 회상은
타레가가 그라나다 교외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한 후 작곡했다.
제자인 콘차부인과 같이 갔던 그날 밤 그는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인지,
궁전의 아름다움을 트레몰로 주법으로 그려놓았다.
곡은 전반 가단조와 후반 가장조로 반복된다.
코다에서는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을 인상깊게 새기며 끝난다.
이 곡은 원래 <알함브라풍으로>라고 이름짓고
<기도>라는 부제를 덧붙여 놓았는데,
출판사에서는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이라 고쳤다 한다.
전곡을 은구슬 뿌리듯 관통하고 있는 트레몰로는 매혹적인 이미지를 준다.
더욱이 우수적인 멜로디는 콘차부인과 실연의 아쉬움을 더해주는 듯한 느낌도 든다.
지금 흐르는 곡이 바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으로
아마 이곡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19세기 무렵 그랜드 피아노 개발과 화려한 오케스트라가 등장하면서
기타는 집시나 거리악사들이 연주하는 천한 악기로 전락했다.
이렇게 천대받던 기타를 다시 품격높은 악기로 바꾼 이가 바로 기타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란시스코 타레가(Francisco Tarrega / 1852.11.21~1909.12.15)”이다.
스페인의 한 가난한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타레가는 어린시절 개울에서 놀다가 빠지면서
오른쪽 눈을 크게 다쳤으나 돈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못 받아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말았다.
한쪽 눈의 실명은 여덟 살의 소년 ‘타레가’에게 너무나 큰 마음의 상처였다.
열등감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는 아들이 걱정된 아버지는
당시 이름있는 맹인 기타리스트인 '미누엘 곤잘레스'에게 기타를 배우게 했다
다행히 기타를 배우면서 타레가는 열등감에서 벗어 날 수 있었고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소년 티를 막 벗어난 타레가는 아버지의 격려와 충고를 마음 속 깊이 새기며 더욱 더
열심히 기타 연습을 하면서 나름대로 독창적인 연주법을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
타레가는 키타 실력이 워낙 출중하여 무대에 설 것을 주위 사람들이 권유했지만
화려한 무대보다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들여 연주하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항상 연주할 때 혼신의 힘을 다하는 타레가를 보며
친구들은 그를 위해 당시 최고로 치는 토레스 기타'를 사 주기로 의견을 모았다.
1869년 17살 때 타레가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던 갑부 까네사는
타레가의 친구들이 토레스 기타를 사주고 싶다는 말을 듣자
타레가와 그의 친구들을 데리고 토레스기 공장을 찿아 갔다.
이때 토레스 사장은 변변치 않은 손님들로 여기고 값이 싼 싸구려 기타를 내 놓았다.
타레가가 기타를 받아들고 시험 연주를 시작했다.
기타는 싸구려이지만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선율에
그만 토레스 사장은 할말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감명받은 연주는 처음이다'라고 칭찬하면서
깊숙이 감춰 두었던 최고급 기타를 내놓는 것이었다.
“이 기타 임자가 바로 당신입니다”
타레가는 기타 연주로 손톱이 자꾸 상하자 손끝의 살로 연주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손끝에 군살이 박혀 뭉툭해 질 정도로 연습에 몰두했다.
촉각의 신경과 직결된 맨 살로 연주하는 것이 연주자의 감정을 실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가 개발한 왼손의 운지법, 오른손의 탄주법 및 음량 변화와 화음 확장 등 20세기
새로운 기타의 르네상스를 열며 기타를 바이올린과 같은 품격 놓은 악기로 격상시켰다.
말년에는 혈전병으로 오른쪽 손에 마비가 왔으나 이를 극복하고 1909년 57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그는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고 끊임없는 연습과 작곡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대표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제자였던 미망인 콘차 부인과 함께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을 구경한 뒤 깊은 감명을 받고 작곡한 트레몰로 연주곡이었으며
콘차 부인과 끝내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의 한을 담은 연주곡이라고 한다.
이 곡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으며
듣는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Recuerdos De La Alhambra - Narciso Yepes
클래식 기타리스트 [Narciso Yepes(나르시스 예페스)]는
1927년 11월 14일 스페인의 무르시아 근교 로르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한적한 시골의 가난한 마을에서 태어난 그 였지만
아버지는 자식이 농사꾼 이외의 일을 하기를 바랐다고 한다.
어린시절 마당에서 지팡이를 가지고 기타를 치는 시늉을 하며 놀고 있는 것을 본 [Narciso Yepes]의 아버지는
힘든 살림이었지만 아들을 위해 마을의 시장에서 장난감 기타를 사와서는 아들에게 선물로 안겨 주었는데
그 기타가 훗날 [Narciso Yepes]라는 거장의 첫 기타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Narciso Yepes]는 점차 음악적인 재능을 나타내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두말않고 아들의 학비를 지원해 주었고
1940년 명문 발렌시아 음악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음악원 재학시절 작곡가 [Manuel Palau(마뉴엘 파올로 )],
기타리스트 [Marco Garcia De La Rosa(마르코 가르시아 드 라 로사)],
지휘자 [Lamonte De Grignon(라몬테 드 그리곤)]등에게 작곡법과 기타 연주법 등을 사사받았다.
1946년 발렌시아 음악원을 졸업한 그는 수도 마드리드에 정착하여 음악활동을 준비하던 중
지휘자 [Ataulfo Argenta(아타울포 아르헨타)]에게 로드리고의 명작 아랑훼즈 협주곡의
마드리드 초연을 제의받게 된다.
이 연주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Narciso Yepes]라는 기타리스트의 이름은
이를 계기로 스페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페인에서의 성공 이후
스위스, 이탈리아를 거쳐 빠리로 넘어가 당대 최고의 음악교육자 [Nadia Boulanger(나디아 불랑제)],
작곡가 [George Enesco(죠르쥬 에네스코)],[Walter Gieseking(발터 기제킹)]등에게서
지도를 받아 음악 실력을 쌓았다.
그의 국제적인 데뷔 연주회는 [Salle Gaveau(살 가보)]에서 행해졌으며
기타가 제대로 소개되지 않던 프랑스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소르본느 대학에서 계속 공부를 하며 연주활동을 벌이던 1952년 [Narciso Yepes]는
영화감독 [Rene Clement(르네 끌레망)]의 방문을 받고
그가 만들고 있는 영화의 음악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게 된다.
그 영화는 다름아닌 지금은 고금의 명작으로 전해지는 [Jeux interdits(금지된 장난)] 이었다.
영화는 엄청난 성공를 거두었고 이 명작에서 사용된 [Narciso Yepes] 연주의
애잔한 [Romace(로망스)]의 선율은 전세계인의 가슴에 큰 감동을 심어 주었다.
세고비아라는 큰 그늘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추구하던 그는
심지어 의학부에도 진학하여 인간의 손의 구조를 해부학 실습을 참관하며 탐구하는 등
그야말로 진지하고 아카데믹한 음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병적으로 세고비아류의 루바토와 음악적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고전물들의 애매한 해석을 참지못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연구자세를
자신에 대한 반기를 드는 모습이라고 생각한 세고비아는 동향 후배임에도
[Narciso Yepes]를 죽는 날까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다.
그는 만년에 한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공연을 가진바 있으며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첫댓글 트레몰로 주법이 여기서 소개되는군요.
두루두루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헤네랄리페 정원의 사이프러스 나무
제가 좋아 하는 나무랍니다
이태리 가서 인상깊게 본후로
저런 화려한문양의 궁전 천정들 정말 멋지네요
그러시군요
우리나라에선 별로 볼 수 없지요
대단한 알함브라 궁전입니다
이슬람의 전성기때 지은 건물
대단했던 이슬람입니다
인도의 타지마할도 그렇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