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youtube.com/watch?v=YkaiDAfwiI8&si=eqKg7dDLmL4w-PSX
파동은 건디르는대로 생성이된다.
물리학자 까를로 로벨리는 자신이 양자 간섭이라는 현상을 처음 관찰했던 실험을 소개합니다. 이 실험에서는 몇 개의 광자로 이뤄진 약한 레이저 광선이 프리즘을 통과해 2갈래로 나눠진 뒤 다시 프리즘을 통과해 하나로 합쳐졌다가 또 다시 프리즘을 통해 나눠져 각각 다른 검출기로 향합니다. 이 별것 아니어 보이는 장치에서 아주 놀라운 일이 발생합니다. 만약 빛이 이동하는 2경로를 모두 열어두면 모든 광자가 하나의 검출기에만 도달합니다. 다른 검출기에는 광자가 하나도 도달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만약 하나의 경로를 막으면 광자의 절반은 위쪽 검출기 나머지 절반은 아래쪽 검출기에 도달합니다. 일단 여기서부터 상식적으론 이해가 잘 안 되긴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이상하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 벌어집니다. 바로 광자가 어느 쪽 경로를 따라가는지 관측할 경우 광자가 2관측기로 고르게 도달한다는 겁니다.
즉 직접적으로 경로를 막는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고 그냥 광자가 위쪽 경로를 따라갔는지 아래쪽 경로를 따라갔는지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로벨리는 대학에서 이런 양자 간섭과 양자 중첩의 현상에 대해서 수도 없이 배웠음에도 직접 이런 현상을 목격하니 너무나 혼란스러웠다고 합니다. 광자는 우리의 상식적인 예측과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이걸 양자역학에서 설명하는 방식은 광자는 경로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이 경로에도 있고 저 경로에도 있는 그런 상태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이런 현상을 양자 중첩이라고 부르죠 그리고 2경로를 모두 열어놨을 때 광자가 한쪽 검출기로 몰리는 이유는 2경로에 모두 존재하는 빛의 파동이 서로 간섭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즉 빛이 2경로에 모두 존재해야만 생길 수 있는 간섭효과가 관찰된다는 거죠. 만약 한쪽 경로를 막으면 이 간섭효과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이렇게 경로가 확정되고 나면 광자는 당연히 그 경로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놀라운 건 광자의 경로를 장애물을 통해서 물리적으로 확정 짓지 않고 그저 관찰을 하는 것만으로도 확정의 효과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광자의 경로를 관찰하는 순간 광자는 놀랍게도 한쪽 경로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 보니 2경로의 간섭효과 또한 일어나지 않죠 즉 만약 우리가 광자를 관찰하지 않는다면 광자는 2경로에 모두 존재합니다. 만약 우리가 관찰하면 광자는 한쪽에만 존재하고요. 이 현상은 슈뢰딩거의 고양이 이야기로 비유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상자에 고양이가 들어있고 그 상자에 독가스가 주입될 확률이 50%라면 우리가 그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 고양이는 죽어있기도 하고 살아 있기도 하다는 건데요. 물론 현실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경험하는 생명체 고양이는 죽은 상태와 살아있는 상태 둘 중 하나겠죠. 고양이의 상태는 분명히 하나로 확정돼 있을 겁니다.
다만 상자를 열어보지 않은 우리는 그저 고양이의 상태를 모를 뿐입니다. 하지만 아주 작은 입자들의 세계까지 들어가면 정말로 우리가 입자들의 행동을 관찰하지 않고 있을 때는 입자들이 서로 다른 2상태로 모두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발견됩니다. 이게 양자역학이 내놓는 아주 놀라운 주장이죠. 위대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아무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로벨리는 혹시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모든 것이 명확해 보인다면 그것은 오히려 내가 얘기를 명확하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즉 양자역학의 결론을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로서 머릿속에 제대로 떠올리는 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양자역학이 말하는 세계는 상식적 논리로 보면 너무나 말이 안 되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양자역학의 이런 비상식적인 결론을 최대한 말이 되게 만들기 위해서 각종 해석을 내놓습니다. 대표적으로 다중세계 이론이 있습니다.
이 이론에서는 실제로 우리가 관찰할 때마다 세계가 갈라져서 새로운 실제적인 세계들이 생겨난다고 봅니다. 비유를 들자면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를 열었을 때 고양이가 살아있다고 한다면, 그건 우리의 세계가 그렇게 진행된 것이고. 그 관찰의 순간 고양이가 죽어있는 세계가 갈라져 나와서 또 다른 흐름으로 이어진다는 거죠. 이렇게 따지면 각 사람들이 이렇게 다양한 사물을 관찰하고 경험하는 매순간 각각 새로운 우주가 갈라져 나가겠죠. 그래서 실제 세계는 셀 수 없이 많은 무한한 다중우주로 이뤄져 있을 겁니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이 우주는 그 중 하나일 뿐이고요. 양자역학을 해석하는 또 다른 이론에로 휴비즘이라는 이론이 있습니다. 이 이론에서는 양자역학이 그저 인간의 정보에 불과하지 실제 세계 구조를 나타내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양자역학은 세계의 실제 모습을 기술하는 게 아니라 그저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그 정보를 담고 있을 뿐이라는 거죠. 이런 생각에 따르면 양자역학의 관찰이 훨씬 덜 이상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양자 중첩은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는 현상일 뿐이지 실제 세계의 모습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미술에서 큐비즘은 서로 다른 여러 관점에서 포착된 사물의 상충하는 이미지를 중첩시켜서 제시합니다. 그래서 상식적인 관점에서는 모순적이어 보이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죠 그렇다고 해서 큐비즘 화가들이 대상이 실제로 그렇게 생겼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은 우리에게 서로 중첩된 채로 보이는 상충하는 현상을 제시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가 정말로 그렇게 이뤄져 있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라는 거죠. 하지만 로벨리는 이런 다중우주론이나 큐비즘 같은 해석에 모두 반대합니다. 그는 그보다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이라고 불리는 것을 지지합니다. 지금부터 이걸 전달 드리려고 하는데요. 자 한번 세계 각 대상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죠. 무언가 존재한다는 건 언제나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걸 뜻합니다.
예를 들어서 의자가 하나 있을 때 갈색일 수도 있고 회색일 수도 있고 50센치미터일 수도 있고 1미터일 수도 있겠죠. 의자는 항상 어떤 속성을 가진 채로 존재합니다. 아무런 속성이 없이 그냥 의자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그런 의자는 없습니다.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의자는 언제나 속성이 있죠. 그런데 속성은 항상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져 있습니다. 의자가 어떤 색깔을 갖는다는 건 의자 표면에서 반사된 빛의 진동수가 이 눈에 망막의 특정 수용체와 만나야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시각 체계와 다른 시각 체계를 가진 많은 동물은 의자를 다른 색깔로 보죠. 하지만 크기나 길이 같은 속성은 이런 관찰자의 입장과 상관없이 절대적인 게 아닐까요? 강아지가 경험하든 인간이 경험하든 50센치미터 높이의 의자는 똑같이 50센치미터 아닌가요 하지만 사정은 이렇게 명확하지 않습니다. 의자라는 사물은 우리가 앉으려는 목적을 위해 만든 사물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그 형태와 경계가 너무나 명확하게 인식되죠. 다리의 밑바닥부터 등받이의 끝 부분까지가 의자의 높이입니다. 그 경계 밑으로 넘어가면 거기서부터는 땅바닥이고 그 경계 위로 올라가면 거기서부터는 허공이죠. 하지만 인간의 입장을 벗어나면 의자의 경계는 유동적일 수 있습니다. 사실 의자라는 사물을 항상 하나의 사물로써 명확하게 파악하는 건 인간밖에 없죠 예를 들어서 의자에 판판한 부분에 둥지를 튼 새 입장에서는 옆에 등받이는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상일 수 있습니다. 판판한 부분과 등받이를 하나의 사물로 파악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새에게는 의자의 높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의미에선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런 상대성은 현대 물리학의 주요 주제이기도 합니다. 관찰자가 얼마나 빠르게 이동하고 있느냐에 따라 속도는 상대적이며 공간과 시간 모두 다 근본적으로 관계의 상대적이라는 게 상대성 이론이 말해주고 있는 바죠 세계는 결코 독자적인 속성을 가진 독립적인 실체들로 이뤄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세계가 어떤 최종적인 실질적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하며 세계를 깊이 파헤치려는 많은 과학자나 철학자는 그런 확실한 경계를 가진 최종적 요소를 발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로벨리는 그런 요소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세상의 실제는 확정적인 물질이 아닌 불특정한 것들 사이의 관계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관계에 기초해서 사과하는 데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해 보이는 거구요. 양자의 또 다른 신비한 현상으로 얽힘이 있습니다. 서로 얽혀있는 두 광자는 서로 연관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유를 들자면 한쪽이 빨간색이면 다른 쪽도 빨간색이고 한쪽이 파란색이면 다른 쪽도 파란색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 놀라운 현상이 벌어집니다. 중첩 상태에 있는 두 광자가 서로 얽혀있다고 해보죠. 즉 이 둘은 빨간색과 파란색 모두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관찰하는 순간 색이 하나로 정해지겠죠.
그런데 만약 이 둘을 엄청나게 먼 거리 가령 하나는 베이징에 하나는 빈에 떨어뜨려 놔도 둘은 관찰 시 같은 색으로 나타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요? 완전히 동시에 관찰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때문에 약간의 오차를 고려하더라도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한쪽의 정보가 다른 쪽으로 전달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즉 한 강좌가 다른 강좌의 정보를 받고 그것에 따라 색깔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이 알쏭달쏭한 양자 얽힘 현상에 대해 로벨리는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제시합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베이징에서 관찰된 광자는 베이징의 관찰자에 대해서 특정 속성을 갖습니다. 아무런 관찰자와의 관계가 없이 독자적으로 어떤 속성을 갖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관찰자와의 관계에서 그 속성을 갖는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빈에서 관찰된 광자는 빈의 관찰자에 대해서 그 속성을 갖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2관찰자들이 서로의 관찰 결과를 통신을 통해 나눌 때 그때 비로소 반대편에 있는 광자의 속성은 이쪽 편에서 현실이 됩니다. 베이징의 관찰 결과가 빈에 도착하기 전까지 빈의 관찰자에게 베이징의 광자의 상태는 여전히 결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습니다. 즉 베이징의 광자와 빈의 광자가 서로 동시에 특정한 속성을 가진 것으로 결정되는 일은 현실 세계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속성은 항상 어떤 대상과 관계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견해를 철저하게 받아들인다면 말이죠. 한 시점 티에서 하나의 광자는 오직 그 관찰자에게만 어떤 속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정보가 멀리 떨어진 다른 관찰자에게까지 전달되려면 이미 시간은 흘러가 버리고 티는 더이상 현재가 아니게 됩니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우주에 대해서 생각할 때 주로 전지전능한 신의 관점 같은 걸 생각하고 한 지점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와 멀리 떨어진 다른 지점의 일과 동시에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멀리 떨어진 2광자가 어떻게 동시에 똑같은 속성으로 결정되는 건지 신기해 하는 거죠. 하지만 이런 동시성은 우리의 선입견에 기초한 환상에 불과합니다. 관계론적 관점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대상은 다른 어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속성을 가질 뿐입니다. 그 관계를 넘어서면 동시성은 무력화됩니다. 관계는 단순히 관찰자와 대상 사이에만 성립하는 게 아닙니다. 관계는 관찰 능력이 없는 대상과 대상 사이에도 성립합니다. 광자는 다른 광자에 대해서 어떤 속성을 갖는 것이고. 고양이는 먹이에 대해서 냉장고는 음식에 대해서 카펫은 바닥에 대해서 어떤 속성을 갖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얽힘은 독특한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상당히 흔한 현상이라고 로벨리는 말합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나비 1마리를 봤다고 해보죠.
그럼 나비와 저는 일종의 얽힌 상태가 됩니다. 저는 나비와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는 아니라 나비가 멀리 날아가 버렸어도 그걸 기억하고 누군가 나비의 색을 묻는다면 올바른 대답을 내놓을 수가 있습니다. 제 시각적 판단에 오류가 없다면 흰나비에 대해서 저는 흰색이라고 대답을 하겠죠. 나비가 흰색인데 빨간색이라고 대답을 하지는 않을 겁니다. 말하자면, 나비와 저 사이에는 얽힌 관계가 성립한 거죠. 이렇게 사물들 사이에는 언제나 얽힘이 이뤄집니다. 식물은 햇빛을 받아 자라고 바위는 물살에 깎여 나갑니다. 그리고 이런 얽힌 관계들이 서로 복잡하게 매듭을 이루고 있는 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계라는 게 관계론의 입장입니다. 양자역학이 이상하게 보이는 건 결국 양자역학에 따르면 아무리 정밀하게 관찰해도 확정지을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아무리 발전해도 슈뢰딩거의 고양이 상자를 열어보기 전까지는 고양이의 생사를 알 수가 없다는 게 양자역학의 주장입니다.
고양이와 상자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알고 우주의 모든 근본적인 물리 법칙을 알아도 고양이의 생사를 정확하게 확정 지을 수는 없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불확정성은 모든 것에 속성이 항상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견해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문제될 만한 게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정보는 그 시점에서 내가 어떤 대상과 맺는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유효합니다. 내가 그 대상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 맺으려 하면 그 이전의 관계에서 유효했던 정보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죠. 로벨리는 처음에 말씀드렸던 물리학 실험의 기묘한 결과를 이 구도에서 설명합니다. 만약에 광자가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위치를 확정적으로 알고 싶으면 우리는 광자가 최종적으로 어느 검출기에 도달하는지 관찰하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맺는 순간 광자가 어떤 경로를 따라 이동하는 건지 관찰하는 관계를 맺을 수는 없게 되죠. 그래서 이 경우 광자의 경로는 불확정적으로 남아있습니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광자의 경로를 관찰하는 관계를 맺으면 그 순간 광자가 어디에 도달하는지를 관찰하는 관계는 무효화됩니다. 그래서 경로를 확정하는 순간 광자는 불확정적으로 양쪽 검출기에 분산되어 나타나죠. 물론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여러 관계를 동시에 맺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와 라이벌이면서 동시에 친구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부모이면서 고용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로벨리가 주장하는 것은 아주 작은 입자들의 세계까지 들어가면 하나의 관계를 맺기 위해 다른 관계는 포기해야 하는 지점이 생긴다는 겁니다. 더 이상 대상을 기술하는 정확도를 높이는 것이 불가능해서 특정한 하나의 관계에서 정확도를 최대한으로 높일 경우 다른 관계에서의 정확도는 포기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양자의 속도에 대해서 최대한 정확하게 알려면 양자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포기해야 합니다. 반대로 양자의 위치를 최대한으로 정확하게 알기 위해선 양자의 속도의 정확도를 포기해야 하죠.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 우주를 그때그때 변화하는 맥락 속에서 특정한 관계의 한계 안에서만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른 것을 알고자 그 관계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 이전에 가졌던 지식은 무효화되죠. 그런데 로벨리는 자신의 주장이 관념론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관념론적인 시각에 따르면 이 세계는 주체인 내가 만들어내는 환상 같은 것입니다. 그냥 나한테 그렇게 보이는 것이 세계일 뿐이라는 거죠. 반면, 로벨리는 관계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봅니다. 즉 이 세상에 정말로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존재한다고 믿는 실체적인 대상들도 아니고 내가 굳건하게 믿는 나라는 주체도 아니며 오직 불확정적이고 경계가 불분명한 대상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라는 겁니다. 이 우주는 우리가 보통 실제적인 대상들이라고 믿는 물질들로 가득 차 있는 공간이 아니라 관계들이 뒤 얽혀있는 장이라는 거죠.
이 양자역학의 관계론적 해석에 따르면 무엇이 존재하는지 존재한다는 게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아예 근본적으로 바꿔야 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