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안 에릭슨과 인생의 아홉 단계
조안 에릭슨(1903=1997)은 발달 심리학자로 유명한 에릭 에릭슨(1902-1994)의 부인이다. 부부는 둘 다 90이 넘도록 살았다. 에릭 에릭슨은 1994년에 92세로, 조안 에릭슨은 1997년에 94세로 죽었다.
에릭슨은 생의 발달 단계를 연구하여 1950년에 ‘아동기와 사회’를 발표하였다. 이때 발표한 심리학이 ‘발달 심리학’으로, 인생을 여덟 단계로 나눈 유명한 학설이 되었다.
에릭슨 부부는 90이 넘도록 함께 살면서 자신들이 발표한 발달 심리학의 마지막 단계가 그들이 경험한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조안 에릭슨이 쓴 글에 의하면 자신이 생애 주기에서 지금 어느 단계를 지나고 있는지를 전확하게 알기가 어렵더라고 하였다. 내가 어제와 오늘이 어떻게 다른지를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세월은 너무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노년기는 빠른 세월에 섞여서 나에게 찾아왔다. 노년기는 너무 조용히 찾아옴으로, 내가 노년기라는 사살을 이해하는 일도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조안 에릭슨에 의하면 자신들은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어서 내리막길을 걸어가고 있었지만 바쁘게 사느라 체감으로는 느끼지 못 하였다. 그때이 나이가 80세 쯤이었다. 80세 이후에는 자신들이 노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노인이기 때문에 삶에서 어려움에 부딪힌 것은 아니었다.
에릭슨 부부가 90세가 되자 자신들의 삶 모든 것이 달라졌다. 미래를 바라보는 시야는 좁아졌고, 불투명하였다. 에릭 에릭슨이 91세가 되던 해는 결혼 64주년이었다. 남편은 고관절을 수술한 후는 은퇴하여 집에 머물고 있었다. 남편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우울해하지도 않았고, 혼란스러워하지도 않았다. 간병인 아주머니에게는 조용한 말소리로 감사하다고도 했다. 조안은 남편의 이런 태도를 자신의 노년기를 조용하고 품위있게 받아들이는 태도로 보았다.
조안 자신이 93세가 되었을 때는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서 피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받아들이는 길 밖에 없고, 조용히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예전에 자신들이 삶을 여덟 단계로 나눈 중에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에 대해서 잘못 기술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인생의 마무리 단계를 고쳐서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조안에 의하면 에릭 에릭슨이 죽기 전에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고쳐 쓰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그들이 인생을 여덟 단계로 나누었을 때는 인간 수명이 여든을 넘기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주 많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였던 연령군이 새롭게 나타나면서, 인간 발달의 마지막 단계로 보았던 여덟 번 째 단계의 이후에도 인생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에릭 에릭슨이 죽고 난 후에 조안은 인생의 아홉 번 째 단계를 기술하기 위하여 에릭 에릭슨이 남긴 자료들을 뒤적거렸다. 그가 남긴 책에는 여러 문장에 빨간색, 검은색, 파란색으로 밑줄을 긋고, 주석을 달아 놓았다. 즉 자신의 글을 수정해 두었다. 조안은 이 자료를 가지고 인생의 마지막 단계를 적었다. 이 단계를 아홉 번 째 단계라고 하였다.
조안 에릭슨이 쓴 글을 짧게 소개하자면, 그들이 주장한 8단계 째 였던 70대에는 남아 있는 미래에 대해서 새로운 삶을 가지고 싶지만 너무 짧은 시간 때문에 절망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80대나 90대에서는 절망도 할 수 없는 시기이다. 하루하루 탈 없이 지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죽는 상실의 경험을 수없이 한다.
90세 이상의 나이가 되면 이러한 어려움과 맞서도록 하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온 기본적 신뢰이다. 우리는 지금껏 기본적 신뢰를 안고 긴 인생을 버텨냈다. 그리고 지금도 기본적 신뢰가 나의 삶을 지탱해준다. 따라서 내 삶의 여러 요소들을 모두 수용하게 되면 9단계의 삶도 겪어낼 수 있다고 했다.
에릭슨이 인생의 마지막 단계라는 9단계는 80-90대부터이다. 기력이 없어지고, 주변의 변호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다. 그렇더라도 노인이라서면서 눈감아 준다. 배려를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노인들은 내가 쓸모가 없어졌구나 하는 생각에 절망한다. 이것이 에릭 에리슨이 말하는 9단계의 절망이다.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을 안내해주는 것은 자아완성이고, 지혜이다. 자아완성을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일관성’과 ‘완전함’에 대한 의식이다. 9단계의 노인들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경험의 기억에 일관성이 점차 사라진다. 책임감도 줄어든다. 경험, 기억이 분산되는 것을 하나로 모울 수 있는 힘이 완전성이다. 우리가 노년기의 절망에 맞설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완전성이다. 완전성은 노인의 지혜로부터 온다.
어떤 먼에서 노인들은 어린아이 같이 된다. 이럴 때의 중요한 요점은 지혜를 품은 어린아이처럼 되는 것이다.
결국 자아를 완성한다는 것은 한 개인이 가진 탁월한 특질인 동시에 삶을 통합하는 방식을 스로 아는 것이다. 노인이 일생을 살아온 자기의 방식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린 유년기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살아 온 자신의 방식을 스스로 아는 것이 자아완성이다. 이것이 희망이고, 절망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다.
노인들이 건강하게 살려면 어떻게, 어떻게 살아라는 지침서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공허하게 들리 때가 많다. 사회는 노인에게 따뜻하지 않고, 오히려 비웃음과 경멸, 심지어는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극복하는 방법은 자신이 찾아야 한다면서, 인생의 아홉 번 째 단계를 설정하였다.
에릭 에릭슨은 죽었지만 에릭과 조안의 공동저자로 하여 책을 출판하였다. 우리나라에 번역판도 나와 있다.
(인생의 아홉단계. 에릭 에릭슨, 조안 에릭슨 지음, 송재훈 번역. 출판사 교양인,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