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모르지만, 난 고등학교 졸업식에 못 갔다. 이유는 마지막 공납금을 못 내어서다.
그 후 미국회사에 취직하려니 졸업장이 필요했다. 그래서 공납금을 마련하여 학교를 방문했더니, 안동 미남! 홍대식 선생님이 "조정래, 니가 언젠가는 올 줄 알고 내가 니 졸업장 울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참 고마운 담임선생님이셨다.
그 이후 캐나다 밸리,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그리고 유럽 벨기에 남부 행정도시 나뮈르에 파견 갔다가, 프랑스 북부 도시 릴에서 근무하고, 다시 미국 포트워스로… 이렇게 외국서 왔다리 갔다리 근무하다 보니, 그리운 14회 동창들 소식도 다 끊어지고 말았다.
그 후 귀국하여 어느 날, 안동 역전 작은 술집을 들어서는데, 어? 14회 동창 강경원이가 동료 선생님들과 구석자리에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 당시 영양 산골에서 초등교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게 반갑게 우연히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서, "워낙 산골 학교라서 외롭지만, 시간 날 때 짝대기 하나 들고 학교 앞 개울에 가면 꺽지는 잘 잡힌다.”고, 꺽지 이야기로 술을 퍼 마시고 헤어졌는데...
얼마 안 지나서, 서울에 그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냥 잠잠히 ‘간암’이란다. 놀랐다. 몇 개월 지나 소식이 왔는데, 몸이 더 안 좋아서 수술 포기하고 그냥 집에서 쉰단다.
그 소식 듣고 바로 안동 내려가서, 방안에서 이불 덮고 어두운 얼굴로 히죽이 웃으면서 반기는 그를 무조건 차에 태웠다. 어쩜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아서... 청량산 쪽으로 차를 몰았다. 허만수도 같이 갔다. 와룡고개를 넘으면서 뒷좌석에 앉은 강경원이를 백미러로 힐끔 보니, 옆구리가 아픈지 자꾸 옆으로 비스듬히 쓰러지면서 힘들어했다.
청량산 가는 길은 아라리 고개보다 더 굽이굽이 이어진다. 온혜 산고개를 넘는데, 도산서원 쪽으로 길게 누운 강물 따라 저만치 흑황새가 나는 듯하여, 자세히 다시 보니 검은 까마귀들이었다.
비포장 국도에 한 시골 할머니가 다래끼에 마늘쫑을 가득 담고 신작로를 걷는데, 그 뒤에는 부실한 똥강아지 한 마리가 따라가면서 울 듯한 표정으로 우리 차를 힐끔힐끔 쳐다보고 지났다.
다시 백미러로 보니, 경원이는 아예 옆으로 몸을 기대어 눕다시피 힘들어했다. ‘그래 친구야, 미안타, 미안타, 조금만 참아라! 마지막 여행이니 조금만 참아라...’ 속으로 말하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감성으로, 정선 아라리 곡조에 퇴계 선생 시를 붙여서 부르기 시작했다.
"청량산~~ 육육~~ 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 마시라 못 믿을 손~~ 도화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렇게 그와 마지막 동창 여행을 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서 그 친구는 밥 숟가락을 놓았다. 너무도 일찍이 놓았다.
다시 안동으로 내려가서, 그 친구가 초등교사 발령 받고 자주 지나다녔다는 국도 옆 산자락에, 14회 허만수와 이중형과 함께 천년 흙집을 지어 주고, "주변에 진달래 꽃나무들이 무성하니, 해마다 친구 찾아오지 않아도 봄이면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두견새도 울고 며느리쪽박새도 울고 머슴새도 쭉쭉거리니 외롭진 않겠구나!" 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물론 14회 동창 중에는 그 친구보다 더 일찍이 떠난 친구들도 있었다. 한창 피다가 진 꽃이라서 더욱 먼저 간 동창들이 그립다.
권태호의 노래가 경안고 교실에 울리면, 아카시아 향기 가득한 청라언덕의 꿈이 펴지고 아름다운 우리들의 젊은 추억을 만들었던 경안고등학교!!
꽃다운 나이에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난 동창들이, 우리가 늙어 가면서 문득문득 새삼 눈물로 떠오르는 것은, 이제 우리도 그들처럼 이별의 일기를 써야 할 날이 다가온다는 뜻이 아닐까...
퇴계 선생의 시 종장은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주자 만날까 하노라”다.
이제 다들 70 넘은 늙은 어주자 동창들이 되었는데, 도화가 봄바람에 청량 석벽에 떨어진들 무엇하며, 인생 쪽배를 탄 어주자가 강물에서 도화 꽃을 보고 슬퍼한들 이 풍진 세월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겠는가!
2023년 정초에 탁료 한 잔 취해 단숨에 써 내려간,
14회 동창별곡 글.
14회 쪼데기 조정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