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장갑 따위는 별 것 도 아니라는 듯 추위는 내 손을 따라 으슬하게 온 몸으로 퍼져 나갔다.
뭐야, 이게, 난 나름대로 되게 무장하고 나온건데
실망스럽게도 꽁꽁 싸맨 양말로도 부족해서 신은 어그부츠를 따라서도 한기는 점점 더 퍼져나가고만 있었다.
약속시간은 분명 2시였다.
분명히 말이다.
나쁜 자식, 지금은 2시 30분이라구, 날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참이야?
폰도 없이 비루하게 사는 나는 혹시나 그녀석이 늦게나마라도 올까 근처 카페에 조차도 들어가질 못하겠다.
벌써 31분, 32분... 시간은 계속 흘렀고 추위를 따라 내 입에선 얕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나.. 감기걸린건가?
에이씽, 근데 뭔가 이대로 가기는 아쉬운 기분..
내 짐작대로라면 그 녀석은 적어도 지금부터 10분 까지는 날 기다리게 만들 작정인 것 같았다.
터져나오는 기침은 마땅히 치료하는 것이 정석이었으니, 난 근처 편의점에서 따끈히 데워진 유자차를 사기로 결심했다.
편의점은 횡단보도를 건너면 바로 있으니, 그녀석이 와도 유리를 통해 쉽게 볼 수 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에잉 나쁜자식"
아직도 그녀석이 올생각을 안했다. 울컥-하는 마음에 깃든 건 오직 분노와 실망, 배신감 등등
날 바람맞힐 수 있는 녀석이 지구상에 존재.. 하지, 아무렴 많지 그래
내가 잘나지 않았단 것 쯤은 나도 알지만,
그래도 지가 잡은 약속은 지켜야될거아니야
콜록- 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내 입에서 터져나왔다.
진짜 춥잖아.. 나쁜 자식
아이씨... 나쁜 자식 하나에 울면 안돼는데
어이없게도 주인의 명령에 반항하겠다는 듯 내 눈물샘은 지독히도 외로운 눈물을 쉴새없이 흘려내리게 하고만 있었다.
아, 왜이래, 난 진짜 추녀같이 생겨선 왜이렇게 추녀처럼만 행동하는지
공들여 해놓은 눈화장이 한순간에 지워지는게 눈에 선했다.
젠장, 난 워터프루프도 안쓴단 말이야
손수건.. 손수건... 가방에..?
"누구세요?"
예쁜 미소를 짓는 남자는 내게 손수건을 건네었다.
적개심 가득한 얼굴로 난 망설였지만 그는 내 손에 따뜻한 손수건을 쥐어주곤 말없이 걸어나갔다.
그리고 난 그날,
무지 행복했다.
"재영아........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날 바람맞힌 나쁜놈은 뭔가 불안해보이는 표정으로 뻔뻔스럽게도 다시 내게 말을 붙였다.
난 이미 댁한테 관심 끊었는데요, 고작 한달 만나곤 날 바람맞혀?
난 뾰로통한 표정으로 다시 겨우 얻어낸 핸드폰으로 첫 문자를 개시하는 데에 집중을 기울였다.
"미안해!! 재영아!"
얘가 왜이래, 사람들 보잖니!
나쁜놈은 무릎을 꿇더니 내게 소리를 질렀다. 됐다니까 그래, 그냥 침묵으로 일관한 나는 다시 침묵하려고 노력했다.
말섞기가 싫다, 나 어제 감기몸살 나서 하루종일 앓았다구, 바로 너때문에
그래, 사실 말섞기가 싫은 것보다도 목이 부어서 목소리가 안나와 이 나쁜자식아
맘같아선 몇대 때려주고 싶기도 하지만 사실 고마운걸
"재영아! 나 사랑하는 사람생겼어!"
응? 난 문자에서 시선을 떼내었다. 뭐라고? 니주제에? 딴년이 생겼다구?
나쁜놈은 용서를 구하는지 허락을 구하는지, 계속 내게 무릎을 꿇고선 빌고만 앉아있었다.
그래, 드디어 이몸이 나설 차례가 된거겠지,
포옥-하는 한숨을 쉬며 나는 그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나오지도 않는 쉬어버린 목소리를 짜내며 내 고마움을 최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고..마워, 다른 애랑 잘해봐"
멈칫 하는 그 애를 뒤로하곤 다시 내 첫 문자 답장을 뚫어지게 보곤 미소지었다.
난 내 운명을 찾은것 같거든, 네 덕분에, 멍청아
'음... 7시 쯤에 블루에서 만나기로 하죠, 근데 그 손수건 진짜 안돌려주셔도 괜찮은데..'
히힛, 고마워, 나의 ex여!
by. 후루루룸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