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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생명 말씀( 2013. 2.24일 ) 말씀/ 마가복음 8:34
자기 십자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34
오늘은 특별히 고난에 대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 참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편안히 살고 어떤 사람은 고난 중에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고난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런 고난 저런 고난 사람은 고난 중에 태어나서 고난 중에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단지 고난을 피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고난의 의미를 새기고 적극적으로 지고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라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을 주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제들에게 아무던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8:34을 보시기 바랍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자기 고난을 적극 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를 나태내고 싶고 편하게 살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를 따라오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본래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 틀입니다. 죄수 중에서도 가장 흉악한 죄수를 매달아 피를 말려 죽이는 고통의 형틀입니다. 양손 양발에 못을 박아 세워 놓으면 바로 죽지도 않고 수없이 까무러치며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갑니다. 아주 참혹합니다. 예수님도 거기서 우리를 위해 거기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심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루셨지만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지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을 보면 예수님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또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까?
여기서 ‘십자가’란 예수님처럼 죄와 죽음의 고통을 짊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미 죄와 사망의 짐은 예수님이 다 짊어지셨습니다. 다 이루셨습니다. 더 이상 죄 값을 치를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어야 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이는 진리를 따르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댓가를 말합니다. 제자의 길을 바르게 가기 위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연단의 댓가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사람들은 고난 걱정 없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어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이 고난의 구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8: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지만 다시 여름 가을 겨울이 옵니다. 계속 반복이고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하나가 지나면 또 하나가 그 다음...어느 누구도 이 고난의 구조를 피하여 살 수 없습니다. no cross no crown이란 말이 있듯이 고난 없이는 평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있는가 의문을 가기 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살이도 성공하고 승리하기까지는 반드시 고난의 과정이 있듯이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해서 승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 영광의 길을 가기 위해서도 ‘자기 십자가’는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주교가 꿈을 꾸었습니다. 사람들이 아침부터 제각기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먼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다들 자기가 짊어진 십자가가 무거워 힘들어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꾀를 내어 점심 때 쯤 톱으로 자기 집자가를 잘라내었습니다. “아이고, 이제 좀 가벼워졌네. 진작 잘라낼 것을 그랬어” 그 사람은 십자가가 한결 가벼워졌다고 좋아하면서 빠른 걸음으로 남들보다 앞질러갔습니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도 톱으로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묵묵히 인내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어느덧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모두 종착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엔 뛰어넘을 수 없는 큭 도랑이 하나 흐르고 있었습니다. 도랑 건너편에는 예수가 미소를 띠고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기쁜 얼굴로 예수를 향해 각자 지고온 십자가를 도랑위에 걸치고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자른 이들은 그 길이가 짧아서 도랑을 건널 수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현재 나의 십자가가 장차 영광이 된다는 것을 믿습니까? 십자가는 단지 고난이 아닙니다. 십자가 잠시 고난이 따르고 힘들기도 하지만 자신을 성숙하게 하고, 자신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고난의 십자가 자를 수 있겠습니까?
한 번은 어떤 부부가 사순절에 예수 수난극을 관람했습니다. 연극을 감동 있게 보고 나서 이 분들은 예수님 역을 한 배우와 사진을 찍고 싶어서 무대 뒤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자 남편은 그 십자가를 지고 사진을 찍고 싶었습니다. 아내에게 사진기를 주고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려고 보니 생각보다 엄청 무거웠습니다. 속이 텅빈 줄 알았는데 너무 무거워서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우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왜 십자가가 이렇게 무겁지요? 그러자 배우가 대답했습니다. “만일 무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 연기를 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길면 긴대로 의미가 있고 무거우면 무거운대로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난이란 단지 아픔이 아니라 의미라는 것입니다. 배우가 십자가가 아주 무거웠기 때문에 예수님의 연기를 잘 할 수 있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만한 크기 그만한 무게 다 의미가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탈무드에는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검은 부분을 통해서 사물을 보도록 만들었을까? 그 답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인생은 어두운 것을 통해서 밝은 곳을 바라보아야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물을 정확하게 보는 원리라는 것입니다. 부자는 가난을 모릅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부요함이 무엇인지 압니다. 건강한 사람은 고통을 모릅니다. 그러나 아픈 사람은 건강의 축복이 무엇인지 압니다. 강한 사람은 약자의 심정을 모릅니다. 그러나 약한 사람은 어떻게 강한 자가 되어야 하는가를 압니다. 어두운 것을 통해서 보아야 빛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을 고난의 풀무불로 인도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그 사실을 잘 압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입니다.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애굽에서 400년 노예생활을 하였습니다. 출애굽을 한 후에는 뱀과 전갈이 우굴 거리고 목마른 광야에서 40년을 유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그렇게 광야의 길을 걷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풀무 속에서 이들을 연단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고 그 백성을 통해서 구속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만일에 그런 고난이 없었다면 그들은 불평 불만에 감사도 하지 않고 노예근성에 절어 쓸모 없는 존재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고난의 길을 걸은 후에 이들은 마침내 복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고난은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동시에 필요조건입니다. 그 후에도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 70년 유배생활을 하였고, 그 후에는 암흑시대를 거쳤고, 그 후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면 그 후에는 히틀러에 의해서 수 백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곤통을 겪었습니다.
오래전 독일에 갔을 때 네덜란드를 들려 안네의 집에 가보았습니다. 당시 안내와 가족들이 숨막히며 숨어지내다가 한 사람씩 잡혀가던 그 집의 구석구석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곳에서~~" 그 들이 살았던 모습은 한 사람의 안네의 가족 이야기가 아니라 고난 받으며 지내온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 이었습니다. 책장으로 문을 가리고, 창문을 막아 불이 새지 않고 하고 숨소리를 죽여서 소리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며 살았지마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 양식을 구하러 나갔다가 잡혀 죽고 마지막 생존자인 안내가 남아서 그 이야기를 책으로 냈습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들이 오늘날 말살되었나요? 말 살이 아니라 오히려 오랜 세월의 고난 속에서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세계 인구의 0.2%. 미국 2%) 금융, 군사, 교육 분야에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교수만으로도 (하바드 30%, 예일대 20%). 그리고 한 나라에 한명 나오기도 어려운 노벨상만도 전체 22% 경제분야는 만으로는 40%입니다. 미국이란 거대한 나라를 움직이는 핵은 바로 유대인들이지요. 상상이 안 되는 일입니다.
나무나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강해진다고 합니다. 늘상 풍상에 시달리며 크는 넓은 바닷 속 섬의 소나무는 크지 않지만 그 강인함과 아름다움은 보는 이들로 감탄을 하게 합니다. 고난의 풍상으로 빗어진 아름다움은 미풍 속에 큰 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이 뿐 아니라 그런 나무는 태풍에도 끄덕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에 단련이 안 된 사람은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힘들어 포기하고 작은 말 한 마디에도 상처를 받고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상실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삶에는 감사도 없고 불평과 불만뿐이며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과 탓과 책임전가만 있을 뿐이지만, 큰 고난에 연단을 받은 사람은 작은 고난은 더이상 고난이 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거친 말에도 그런가 보다 하고 가볍게 받아 넘길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은 바람이 불 때 써핑보드를 즐기는 것처럼 그렇게 고난의 바람을 등지며 인생을 즐겁게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기의 고난을 피하려하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구약에 다윗은 바로 그런 고난 속에서 연단되어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된 사람입니다. 시편 시 119:71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존경받는 왕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고난을 많이 받은 자였습니다. 사울 아래 있을 때는 사울로 인해서 수없이 죽음의 고비를 만났고, 왕이 된 후에는 죄로 인해서 고난을 받기도 하였고,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수치와 고난을 받으며 좇기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그 때 그는 사망과 나 사이가 한 걸음 뿐이라고 고백하였으며, 이방 왕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미친척 연기를 해야했고, 죄로 인한 고통을 인해서는 뼈에 진액이 쇠하는 고통을 토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그의 고백은 모든 고난에 나에게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고난을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사랑받는 마음이 합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것은 내가 받는 고난이 주는 유익 때문입니다. 저 천국에서는 고난이 없지만 여기 세상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유익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이를 인정하며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습니다. 그 자세로 날마다 나는 죽노라는 고백을 하며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고난이 그로 하여금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고 위대한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게 한 것입니다.
사람이 고난이 없고 태평하기만 하면 사람은 곧 나태해집니다. 안일해지고 무력해집니다. 어떤 사람은 돈 많이 벌고 성공하면 복음을 전하겠다고 합니다. 그 때가 되면 안일해지고 나태해져서 돈이 있어도 복음을 전하지 못합니다. 이리민둥 저리 빈둥 먹고살아가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17세기 말, 인도양의 한 섬에는 도도라는 새가 살았습니다. 그 곳은 새들이 살아가기에 낙원과 같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협하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새들의 천국이었습니다. 그 새들은 그 땅에 둥지를 틀고 땅에 널려 풍성한 먹이들을 먹고 살았으므로 굳이 날개를 이용하여 창공을 날아오르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섬에 사람들이 들어가 목격하게 된, 그 도도 새는 키는 고니 정도로 큰 기에, 몸집은 굵고 몸무게는 약 25kg, 부리는 약 23cm나 되었으며, 심각한 것은 날개가 아주 짧아져서 하늘을 전혀 날지 못했다고 합니다. 많은 세월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날개는 어느새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여 거추장스러운 장식품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도도 새는 스스로의 안락함에 빠져 본래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사람들에게 잡혀 식용으로 먹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고난이 주는 유익은 어떤 것이 있는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고난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잘 못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은 자신의 깊은 내면의 죄까지 돌아보고 회개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고난은 사람을 연단시켜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난을 통해서 연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하였습니다. 또 로마서 8: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현재 고난은 장차 나타날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풀무불 속에서 정금이 나오는 것처럼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빚어지고 성숙한 인격의 사람으로 빚어진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고난은 우리로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로 만들어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라 하면서 ,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신 다음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20.21). 특별한 잘 못이 그리스도를 닮아서 받는 고난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그리스도의 길을 걷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제자의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럽누 들에게 현재 ‘자기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저는 때로 혼자 있는 것이 자기 십자가입니다. 날마다 혼자 식생활하는 것도 십자가입니다. 의미를 잃어버리면 고난이 되지만 의미를 새기면 자유와 깊은 성숙으로 가는 영광의 길입니다. 고난도 의미 알면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는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지고가야 할 고난의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기꺼이 지고자 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 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 내가 지고 가야할 자기 십자가가 무엇인가 생각하고 그 의미를 새기며 영광의 길을 하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김기임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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