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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과 여중생의 열애’
“부모님께 여쭤봐요, 순자씨가 다 클 때까지 결혼을 안하고 기다려도 되느냐고….”
이순자 여사는 중2 때부터 “아저씨”라고 불렀던 전두환 생도와 결혼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전 전 대통령이 “고생만 시키게 될 것”이라며 결혼을 주저했기 때문. 두 연인의 사랑은 이 여사가 급성맹장으로 병원에 입원하면서 다시 뜨겁게 이어졌지만 애인에게 주스 한잔 사줄 수 없었던 가난한 전 소위의 갈등은 깊었다.
이 여사는 1959년 1월24일 대구 제일예식장에서 전 전 대통령과 결혼식을 올렸다. 전 전 대통령의 나이는 28살, 이 여사는 20살이었다. 이 여사 쪽에서 일방적으로 날짜를 잡고 장소를 결정한 후 전 전 대통령에게 통보해서 올린 결혼식이다.
첫사랑을 지키기 위해 이 여사는 대학까지 포기하고 결혼을 강행했다. 생활전선에 뛰어든 이 여사는 미용사 자격을 얻어 한때 미장원을 운영했다. 편물기술을 익혀 편물일을 하기도 했다. 생활비를 줄이기 위해 아예 친정에 들어가 살았는데, 11년 후 서울 보광동에 17평짜리 조그만 집을 마련하고 긴 친정살이를 끝냈다. 이 여사의 강한 생활력은 후일 부동산 투기설에 휘말리면서 ‘연희동의 빨간 바지’라는 별명까지 얻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여사는 1939년 3월24일 이규동·이봉년의 1남5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나 집안의 맏딸 구실을 해왔다.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학교를 옮겨다니던 이 여사는 54년 경기여중 3학년에 편입했는데, 이때 이 여사의 별명은 ‘필리핀 공주’였다. ‘가무잡잡하고 예뻤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경기여고 시절에는 연애편지를 들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한다.
전 전 대통령은 1980년 9월1일 11대 대통령으로, 이듬해인 81년 3월3일 1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이 여사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다.
이 여사는 군인의 아내로서 내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남편 부하 부인들한테 얘기할 때 “인생은 짧다. 군인 부인의 인생은 더 짧다. 그 짧은 동안 남편을 집안일로 골치 아프게 하면 안된다”고 충고하곤 했다. 이 여사는 어쩌다 남편이 외출할 짬이 있을 때 지체 없이 따라나설 수 있도록 한복은 한복대로 버선과 속적삼까지, 양장은 양장대로 스타킹까지 각각 벽에 걸어놓고 있었다고 한다. 남편이 즐기는 된장찌개를 필요할 때 바로 먹을 수 있도록 미리 된장을 볶아놓고 끓이기만 하면 되도록 준비해두는 ‘살림’의 지혜도 갖췄다.
그러나 영부인의 역할은 이 여사에게는 커다란 도전이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들의 부인은 전면에 나서지 않았던 시대다. 그러나 군대 시절부터 아내를 동반했던 전 전 대통령은 공식행사장 어디든 이 여사를 대동했다. 80년대는 흑백에서 컬러 텔레비전으로 바뀌는 시대다. 컬러 TV를 통해 드러난 40대 초반의 젊은 영부인의 화려한 의상은 국민들에게 거만하고 사치스럽게 보였다.
취임식 때 신경을 써 입은 당의가 세간의 빈축을 샀고, 해외 순방 때 의상학 교수에게 자문을 받아가며 입은 옷도 역효과가 났다. 그래서 집권 초기 이 여사는 자신의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보고 분석하면서 영부인에 맞는 역할과 처신을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여사는 점차 세간의 비판에 무뎌져갔다고 한다.
이 여사는 영부인 재임 시절 교육문제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김옥길 문교부 장관의 ‘교복 자율화’와 ‘두발 자유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정책이 실시되자 “젊은 세대들이 갇힌 틀에서 벗어나 개성을 살리게 되었다”면서 아주 기뻐했다고 한다.
이 여사가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1981년 5월21일 창립된 ‘새세대 육영회’다. 남편도 국가정책으로 뒷받침해주었다. 청와대에 교육문화비서실을 신설했다. 정관 등 조직 골격은 교육문화 특별보좌관이던 이상주씨와 구학봉 문교부 유아교육담당관이 전담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새세대 육영회는 81년 당시 5~6%였던 유아 교육률을 87년 60%까지 끌어올리는 등 유아교육의 양적·질적 발전에 공헌했다고 한다. 새세대 육영회는 2006년 1월1일 ‘아이코리아’로 이름을 바꾸고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영부인의 심장재단
83년 11월 미국 레이건 대통령 부처가 방한 일정을 마치고 귀국할 때 낸시 여사는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 2명의 한국 어린이를 데리고 갔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도 선천성 심장병 어린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새세대 심장재단은 84년 2월 발족되었다. 조기 결혼으로 ‘의사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던 이 여사의 입장에서 볼 때 의미있는 일이었다. 박춘거 심장재단 이사장은 “22년 동안 2만4000명이 넘는 환자의 수술비를 지원했다”고 말했다. 현재 새세대 심장재단은 5000명이 넘는 사람이 매월 2000원, 3000원씩 기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
6공 정부 출범 이후 5공 청산 돌풍이 불었다. 이 여사는 88년 11월 전 전 대통령과 함께 백담사에 머물렀다. 전기도 전화도 들어오지 않고, 텔레비전도 볼 수 없는 강원도의 오지 백담사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 여사는 재임시 죽은 영가들을 천도시키는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그렇게 백담사에서 2년을 보냈다.
문민정부가 출범하자 12·12의 ‘반란 수괴 혐의’와 5·18의 ‘주민 학살 혐의’로 전 전 대통령은 구속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첫번째 백담사 방문으로 모든 것이 정리되는 줄 알았던 이 여사는 집에서 하루 20시간 이상씩 5공 시절 죽은 원혼들에 대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새세대 육영회과 심장재단도 5공화국의 권력형 비리과 관련, 많은 논란에 휩싸였다. 본인이 직접 받은 명예회원들의 기부금이 문제가 된 것이다. 김동연 전 비서관은 비자금 의혹에 대해 “면담 신청을 하면 기업인 혹은 기업인 부인은 나를 통해서 만났고, 내가 직접 영수증을 만들어 주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수차례 검찰 조사를 받았지만 기금 모금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이 여사는 퇴임 이후 백담사 유배 2년에다 남편의 구속과 단식, 그리고 사형선고와 사면이라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걸어왔다. 일생을 통해 이 여사만큼 천당과 지옥을 오간 영부인도 드물 것이다.
■ 이순자 여사 일대기
1939년 3월 24일 만주에서 아버지 이규동 씨와 어머니 이봉년 씨의 6남매 중 둘째딸로 출생
1953년 진해여자중학교 2학년 때 전두환 씨 처음으로 만남
1953년 서울로 올라와 경기여중 3학년에 편입
1954년 경기여고 입학
1957년 경기여고 3학년 때 중위가 된 전두환 씨와 다시 재회
1958년 경기여고 졸업 및 이화여대 의과대학 입학
1958년 학업 중단. 1월 24일(음력 : 12월 16일) 대구 제일예식장에서 전두환 중대장과 결혼
1959년 10월 27일, 첫째 아들 전재국 출산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발발 후 당시 전두환 대위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 비서관으로 임명됨
1962년 3월 19일, 고명딸 전효선 출산
1964년 차남 전재용 출산
1966년 11월 1일 전두환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
보광동 집 팔고 연희1동으로 이사
1967년 3월 2일, 시아버님(70세) 타계
1972년(?) 막내아들 전재만 출산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죽음
12월 12일, 12·12사태 발발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 전국으로 확대, 5·18 광주민주화 운동 무력진압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발족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 공포
1981년 3월 3일, 제12대 대통령 취임
5월 21일, 새세대 육영회 창립, 초대회장에 취임
1982년 9월 15일 강동구 신천동에 새세대 육영회 건물(5층) 준공
1984년 2월 20일, 새세대 심장재단 발족 및 이사장으로 취임
11월 6일, 강동구에 새세대 생활관 개관
장남 재국 씨, 여동생 효선 씨의 친구인 정도경 씨와 결혼
1987년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9 선언 발표
12월 26일,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
12월 29일, 차남 재용 씨가 포철 박태준 회장의 넷째 딸 박경아 씨와 결혼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 취임
광주민주화운동과 5공비리문제로 추궁 당하면서 새세대 육영회와 심장재단에 대한 비리의혹 불거짐
11월 23일,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순자 여사 함께 백담사에 칩거
1990년 1월 6일~5월 16일, ‘국태민안과 영가 천도를 위한’ 100일 기도 올림
1990년 12월 31일 백담사 나옴
1995년 12월 13일, ‘골목성명’ 발표(12월 2일) 후 12·12의 ‘반란 수괴 혐의’와 5·18의 ‘주민학살 혐의’로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
12월 7일, 전두환 전 대통령 구속 후 홀로 백담사 방문, 5일 후 다시 서울로 돌아옴
1996년 4월 17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 사형, 노태우 징역 12년의 항소심 형량 확정
1997년 12월 22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출옥
2004년 5월 11일,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과 관련해 참고인 자격으로 검찰에 소환, 조사과정에서 전씨의 130억 비자금 중 일부 대납의사 밝힘
■ 참고문헌
기사
- <우먼센스> 1996년 1월호
- <여성중앙> 1996년 1월, 8월, 10월호
- <여성동아> 1989년 11월호
- <신동아> 1988년 7월호
- <역대 대통령 및 가족(1977~1789)> 신문 스크랩(경향신문사)
도서
- 대통령가의 사람들(오경환, 도서출판 도리, 2003)
- 한국의 역대 대통령 평가(한국대통령 평가위원회·한국대통령 연구소, 조선일보사, 2002
- 청와대 사람들은 무얼 먹을까 전지영, 현재 2002.
- 영부인론(함성득, 나남출판, 2001)
좌담회
여성신문·연구공간 여성과 정책 공동주최 좌담회: ‘내가 만난 이순자 여사’(참석자: 김동연 전 비서관, 신동식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이기옥 한양대 행정학과 명예교수, 이은화 전 이화여대 교수,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장명수 한국일보 이사, 박춘거 심장재단 이사장 )
인터넷
- 새세대 육영회(현 아이코리아), www.aicorea.org
- 이순자 회고록(<신동아> 1991년 1월호) www.donga.com/docs
[내가 본 이순자] 좌담회에서 드러난 이 여사의 스타일
생각은 자유분방 · 행동은 보수주의 사적 인연보다 능력중시 인사 ‘의외’ 교육개혁 애정…솔직담백 현모양처형 |
▲ 영부인 시절 이순자 여사 관련 좌담회엔 김동연 전 비서관, 신동식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이기옥 한양대 행정학과 명예교수, 이은화 전 이화여대 유아교육학과 교수,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 장명수 한국일보 이사, 박춘거 심장재단 이사장 등 그를 직간접적으로 지켜본 전문가들이 참석했다. 진행은 조은희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 여성신문 정대웅 기자 새세대 육영재단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 이은화 전 이화여대 교수(유아교육)는 “이 여사는 유아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면서 “정치와 상관없이 평생 해야 할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참여했다”고 말했다. 이 여사에게 ‘러시아 혁명사’를 강의했던 이인호 명지대 석좌교수는 “이 여사는 청와대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교육개혁을 올바른 방향으로 하려고 노력했다”면서 “인간적으로 상당히 솔직한 편이었고, 개인적으로 받은 인상은 ‘노력하는 현모양처형’이었다”고 평했다. 83년 새세대 육영회 2기 감사를 맡았던 장명수 한국일보 이사는 “이 여사는 지금까지 본 대통령 부인들 중에서 굉장히 총명한 분으로 군인의 아내로서 최선을 다했고, 대통령의 아내로서도 최선을 다했다”고 평가한 뒤, “적어도 새세대 육영회, 심장재단에 한해서는 비자금의 세계는 없다”는 의견이다. 박춘거 심장재단 이사장은 84년 초 유한양행 사장으로 있던 중 ‘좋은 경영인’으로 신문에 보도된 것이 계기가 되어 발탁된 케이스로 새세대 심장재단 감사를 거쳐 이사장이 되었다. 그는 “80년대 초는 흉곽외과의 수술능력이 별로 없었는데 이 부분의 의료기술이 발전하게 된 데도 이 여사의 공이 있다”고 평가했다. 심장재단에 관여했던 신동식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은 “혈연이나 학연, 지연에 구애받지 않고 김 전 비서관처럼 잡음이 안 나오는, 제대로 된 참모를 선택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똑똑한 영부인이라는 사례”라고 말했다. 이기옥 한양대 행정학과 명예교수는 이 여사의 절친한 친구였지만 영부인 시절에는 일부러 이 여사와는 한번도 연락하지 않고 지내다 백담사 시절부터 다시 만나기 시작한 경기여고 단짝 친구였다. 이 교수는 “여학교 때 이 여사는 이야기를 아주 맛나게 잘했다”면서 “부부간에 자상하고, 재미있고, 금실을 유지하며 사는 게 저만한 사람들도 없다”고 평했다. 919호 [특집] (2007-03-02)
조은희 / 대통령 배우자 연구소 소장,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연구공간, 여성과 정책’대표 (gracecho@hot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