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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르시스의 촉매로서 문학과 비(雨), 『사랑비』의 경우
문학과 치유 언젠가부터 도처에 치료(healing)라는 말이 난무하고 있다. 음악치료, 미술치료, 독서치료, 요리치료, 놀이치료... ‘치료’ 자 붙여 안 되는 말이 없을 지경이다. 유행에 유난히 민감한 게 한국인인데 용어에도 예외가 아니다. 학계에 ‘인문치료 humanities therapy’라는 말을 도입한 것도 한국이 처음인 것 같다. 인문학적 가치와 방법으로 사람의 심신을 치유하겠다는 것이다. 의학은 어느 때보다 발달했고 세상에는 의사가 넘쳐나는데 인문학이 뭘 치료하겠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세상이 정말 그렇게 전방위로 병이 들었단 말인가? 어떤 병이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나 한 가지 병증은 크게 증가한 게 사실이다. 우울과 자살. 여러 미디어가 다투어 보도하듯이 한국은 자살률에 있어서 지난 8년 동안 OECD 국가 중에 선두를 놓친 적이 한 번도 없다. 2등과도 격차가 크게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특히 청소년의 사망 원인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자살이라는 점은 미래마저 어둡게 한다. 자살이 병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많은 모양이지만 병증의 결과적인 현상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 증상을 통상 우울증이라고 한다. 물론 우울증은 심리적인, 아니면 정신적인 문제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종종 앓는 아픔이다. 문제는 이게 장기화되거나 심화되는 데 있다. 우울증은 대체로 관계부재와 관련이 있는바, 요즘 말로 소통장애가 그 원인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절망)도 다르지 않는 맥락에서 나온 진단이다. 과연 자살에 이르는 병을 치료할 방도가 있을까? 세상에 난무하는 힐링이니 클리닉이니 하는 말은 ‘있다’고 전제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문학도 문학치료라는 간판을 내걸고 한 다리 밀어 넣고 있다. 기실 문학은 치료라는 단어를 붙이기 이전부터, 아니 처음부터 치료기능을 해 왔다. 문학에 치료의 기능이 있다는 것을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세련된 방식으로 설파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서양 문학론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는 『시학』은 비극의 목적을 카타르시스(catharsis)라고 했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자만 카타르시스는 원래 의학용어로 소독이나 세척의 뜻이었다. 통상 정화라고 쓰지만, 구체적으로 ‘씻어내고’ ‘막힌 것을 뚫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문학적 맥락으로 오면 정화의 대상이 몸이 아니라 마음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극의 인물을 통해 연민과 두려움을 자아내어 (그러한) 감정을 정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뭉뚱그려 말하면 카타르시스는 슬픈 드라마를 보고 연민과 아픔을 간접 체험하면서 마음이 순화되고 정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게 좀 더 강화되면 영혼의 정화가 되는데, 카타르시스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영적 체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어쩌면 진정한 치료는 이 단계에서 가능한지도 모른다. 이런 상식적인 이야기가 무슨 대단한 이론이라고 사변적인 학자들은 오랫동안 ‘카타르시스 논쟁’을 펼쳐왔다. 정화의 대상이 연기자냐 관객이냐? 연민과 두려움은 정화의 수단인가 목적인가? 즉, 연민과 두려움을 통해서 무엇을 정화하는가, 아니면 연민과 두려움을 발로시키는 것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 연민(eleos)과 두려움(phobos)이란 게 정말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연민과 두려움이란 감정 맞나? 등등. 이렇듯 소위 문학의 프로들은 카타르시스의 의미를 두고 수백 년 동안 씨름해 왔다. 그럼에도 카타르시스가 ‘씻어내고, 정화하고, 치료하는’ 의료적인 의미라는 데는 큰 차이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병은 몸만의 문제도 아니고 마음만의 문제도 아닌 것이 양쪽에 다 걸려있다는 점이다. 지난해(2012) 내가 일련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드라마가 하나 있으니 『사랑비』란 제목의 TV 연속극이다, 2012년 5월에 방영된 것으로 한국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해외에서는 꽤 관심을 모은, 소위 한류 드라마이다. 물론 나로서는 무엇보다 대명동 캠퍼스가 배경으로 나온다는 점을 주목했다. 계명대를 배경으로 잡은 드라마야 수없이 많지만 『사랑비』만큼 캠퍼스의 전경을 전폭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드라마는 잘 없는 것 같다. 이것이 20회에 이르는 연속극을 끝까지 들여다 본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비』
『사랑비』는 요즘 한국 드라마의 단골 기법인 현재와 과거의 병치법을 쓰고 있다. 일단 때는 70년대 말 어느 봄날, 초록색 담쟁이 넝쿨이 뒤덮인 담장을 따라 생머리에 청초한 여대생이 책을 안고 다소곳이 걸아가고 있다. 7-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에게 익숙한 여대생의 모습이다. 마침 그 옆을 화방 작업복 차림으로 허겁지겁 지나가던 남학생과 부딪힌다. 여학생은 안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고 남학생은 미안하다며 엎드려 책을 주어준다. 일어나 눈을 든 순간 여학생과 눈이 마주친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가슴이 쿵쾅거린다. 말 한 번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감정이란 게 얼마나 원초적이면서도 관념적인가. 뒤에 남학생은 이때 3초 만에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우연히 부딪힌 조우에서 여자의 이름을 물어볼 수도 없고 돌아서는 여학생의 뒷모습만 넋 나간 듯 바라본다. 안타까움에 답답해하며 돌아서는데, 덤불 사이에 노란 책이 하나 떨어져 있다. 열어보니 그 여학생의 일기장이다. 다시 만날 수 있는 운명의 끈이 떨어져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 끈을 실제로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늘에서 내리는 비(雨)이다. 드라마의 제목이 괜히 『사랑비』이겠는가. 인하라는 이 남학생은 일기장을 뒤적이며 그 주인공을 오매불망 그리워하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하다. 70년대이니, 남녀유별의 도덕률이 꽤 작동하던 때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인하가 도서관을 나오는데 멀쩡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린다. 남자가 비 좀 맞는 게 무슨 대수이겠나마는 문득 현관기둥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여학생 한 명이 눈에 들어온다. 비 때문에 못 가고 있는 것이다. 맙소사, 바로 그 여자다. 본능적으로 천우신조라고 상황파악을 한 인하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인사한 후 도서관 안으로 달려간다. 구석구석을 뒤지면 우산 수색에 돌입한다. 그에게 우산의 발견은 우주의 발견이나 다름없다. 온 열람실을 헤매다가 지하 창고에서 다 찌그러진 우산 하나를 발견한다. 병아리 색의 작고 유치한 우산이다. 이렇게 두 남녀가 찌그러진 우산 하나 받쳐 쓰고 도서관을 나서는데서 운명적인 러브스토리의 서막이 열린다. 비가 아무리 줄기차게 쏟아진다 하여도 우산 속에서 나란히 걸을 수 있다면 사랑은 시작된 것입니다 발목과 어깨를 축축히 적셔온다 하여도 비를 의식하기보다 서로의 호흡을 느끼며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르익어 간다면 사랑은 시작된 것입니다 빗소리보다 때로는 작게 빗소리보다 때로는 크게 서로의 목소리를 조절하며 웃을 수 있다면 사랑은 시작된 것입니다 「우산 속의 두 사람」 - 용혜원
우산 속의 여학생은 가정대 소속 김윤희, 남학생은 미대의 서인하. 시대가 시대인 만큼 요즘처럼 진도가 빨리 나가지는 못한다. 어차피 갈등 없는 러브스토리란 앙꼬 없는 찐빵아니겠나. 그런데 연애가 막 시작되는 시점인데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두 명의 이방인이 뛰어든다. 드라마답게 갈등을 준비해 놓았다. 한 쪽에서는 윤희를 좋아하는 제 2의 남학생이 등장하는 바, 공교롭게도 인하의 친구이다. 다른 쪽에서는 전부터 인하를 따라다니던 여학생이 노골적으로 다가오는데, 다름 아닌 윤희와 같은 과 학생이다. 이들의 얽히고설킨 스토리가 바로 대명동 캠퍼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큐피드의 화살에 맞은 인하와 윤희의 숨길 수 없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둘 다 내성적인 데다 시대적 한계도 있어 쉽게 가시적인 진척을 보이지는 못한다. 아, 드디어 결정적인 기회가 다가온다. 인하는 윤희의 일기장 갈피에서 은행잎을 하나 발견하는데, 거기에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이게 『사랑비』의 핵심 화두이기도 한데, 당시 선남선녀의 가슴을 휩쓸었던 『Love Story』에 나오는 대사이다. 인하는 윤희가 이 영화를 몹시 보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채고 영화 보러 갈 계획을 수립한다. 윤희도 기꺼이 응한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큐피드의 심술인지, 날을 잡아놓으니 서울에는 막 상연이 끝났다고 한다. 인하는 지방에는 계속 상연하는 영화관이 있을 테니 알아보겠다고 전의를 불태우지만 일단 부풀었던 기대는 물거품이 된다. 마음만 끓이고 진척이 없는 두 사람 사이에 매사에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갑부의 아들 동욱이 치고 들어와 일사천리로 앞서간다. 인하의 친구이기도 한 그는 며칠 만에 윤희를 자신의 애인으로 선포하는 돈키호테식 저돌성을 발휘한다. 인하의 절친이지만 인하와 윤희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인하는 윤희도 동욱이를 좋아하는 줄 오해하고 마음 아파하다가 느닷없이 입대를 선언한다. 지금이나 예나 군대는 모든 남자들이 기피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많은 남자들의 이상적인 도피처이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대학생들이 실연, 진로, 가정불화 같은 문제상황 앞에서 입대 카드를 커냈던가. 인하는 입대 전 마지막 야외 스케치라며 보따리 싸들고 고향이 있는 춘천으로 떠난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윤희가 수업도 포기하고 무작정 춘천행 기차에 몸을 던진다. 스케치 장소로 찾아가보지만 인하의 그림자는 없다. 정처 없이 타지의 거리를 헤매던 중 어떤 영화관 앞에 발길을 멈춘다. 거기에 바로 『Love Story』가 걸려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인하와 같이 보려다 못 본 영화 아닌가. 영화 같이 한 번 보는 게 사건이었던 시대다. 그때는 여름이었는데 지금은 가을이다. 때마침 비가 내린다. 빗물을 피해 영화관 처마 밑으로 들어간다. 비가 내립니다 그대가 비 오듯 그립습니다 한 방울의 비가 아프게 그대 얼굴입니다 한 방울의 비가 황홀하게 그대 노래입니다 유리창에 방울 방울 비가 흩어집니다 그대 유리창에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집니다 흩어진 그대 번개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흩어진 그대 천둥 속으로 숨어버립니다 내 눈과 귀, 작달비가 등 떠밀고 간 저 먼 산처럼 멀고 또 멉니다 그리하여 빗속을 젖은 바람으로 휘몰아쳐가도 그대 너무 멀게 있습니다 그대 너무 멀어서 이 세상, 물밀듯 비가 내립니다 비가 내립니다 그대가 빗발치게 그립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비가」- 유하
그렇게 윤희가 영화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영화가 끝나 사람들이 밖으로 몰려나온다. 그 끝자락에 인하가 힘없이 기어나오고 있다. 반갑고 놀란 인하가 어떻게 여기엘 왔느냐고 묻는다. “보고 싶어서요.” 인하가 보고 싶다는 건지, 영화가 보고 싶다는 건지? 뭐, 그게 그거 아니겠는가. 인하는 윤희를 데리고 다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간다. 올리버와 제니의 비극적인 사랑에 깊이 감정이입 된 윤희가 하염없이 눈시울을 적시는 동안 인하의 손은 안타깝게 윤희의 손을 노리지만 끝내 잡지는 못한다. 두 사람이 영화관을 나와 역으로 갔을 때는 이미 막차는 떠나고 없다. 한국 멜로의 한 공식이다. 썰렁한 역 대합실에서 망연히 앉아 있던 두 사람은 불현 듯 동해로 가는 심야열차를 탄다. 바다로 향하는 심야의 기차 안, 이보다 더 낭만적인 시추에이션이 어디 있겠는가.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글씨도 쓰고 삶은 계란도 사먹고, 졸음에 겨운 여자를 앞에 두고 스케치도 하고. 기차에서 내리니 황량한 바닷가에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같이 쓰고 있던 우산은 바람에 날아가고 남자는 외투를 벗어 여자에게 걸쳐준다. 이 상황에서 진도 나가지 않을 사랑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인하는 전부터 구상해오던 「사랑비」라는 노래를 윤희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다. 비오는 저녁 그녀 모습 보았죠 오래전 부터 보고 싶던 그녀를 우산이 없는 그녀에게 말했죠 내 우산속으로 그대 들어오세요 살랑살랑살랑 들려오는 빗소리 두근 두근두근두근 떨려오는 내가슴 살랑살랑살랑 두근두근두근 우산소리 빗소리 내가슴 소리 사랑비가 내려오네요 비오는 거리 우린 둘이 걸었죠 조그만 우산 내 어깨는 젖었죠 그녀는 내게 수줍은 듯 말했죠 조금더 가까이 그대 들어오세요 난 사랑에 빠졌네 우산소리 빗소리 내가슴 소리 사랑비가 내려오네요 I love rain.. I love you 이게 『사랑비』의 주제곡이다. 바닷가에서의 데이트 이후 인하와 윤희의 관계는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주변 친구들도 다 인정하는 CC가 된다. 반면에 인하를 짝사랑하는 혜정의 질투는 더욱 거칠어진다. 어떻게 알았는지 인하가 윤희의 일기장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작업을 했다고 폭로한다. 사라진 일기장의 소재를 알게 된 윤희는 그간의 일이 운명이 아닌 인하의 계획이었다고 오해를 하고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집에서 일기장 안에 꼽힌 인하의 편지를 읽고 오해를 푼다. 인하는 윤희를 찾아와 창 밑에서 비를 맞으며 사과를 한다. 그러나 윤희는 창문을 열지 못한다. 화가 안 풀려서가 아니라 그때 마침 피를 토하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다음날 윤희는 폐결핵 진단을 받는다. 국내에서는 치료가 어렵단다. 몰래 휴학을 하고 인하도 모르게 미국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떠난다. 사라져 버린 윤희를 그리워하던 인하는 도피성 입대를 한다. 입영열차를 타는데 동욱이가 윤희의 편지를 전한다. 그동안 행복하고 고마웠다는 내용이다. 미안하다는 말이 없다는 사실에 인하는 재회의 희망을 품는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미국의 윤희에겐 소식이 없다. 추적해 보아도 허사다. 한참 뒤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생의 추동력을 잃은 인하는 따라다니던 혜정과 애정도 없으면서 결혼을 한다. 아들까지 하나 낳고 나름대로 애를 쓰지만 인하의 마음은 끝내 사랑으로 업그레이드되지 못한다. 꽤 유명한 화가가 된 인하는 원만하지 못한 가정생활을 힘겹게 끌고 가다가 결국 이혼한다. 그렇게 32년의 세월이 흘러 2010년이 된다. 어느 날 인하는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준)을 만나러 시내를 걸어가는데 찌뿌둥하던 하늘에서 비가 내린다. 옷깃을 세우고 신호등을 건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여자가 노란 우산을 받쳐 들고 지나간다. 길을 건넌 뒤 불현듯 뒤통수가 당겨 돌아보니 섬광처럼 그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쏟아지는 비속을 헤치고 여인의 뒤를 쫓아간다. 노란 우산 앞에 마주선 인하, 그리고 우산을 젖히는 여인. 비에 젖은 안경을 벗고 바라보니 역시 윤희다. 윤희는 마치 어제 본 사람처럼 말없이 우산을 인하의 머리 위로 옮긴다. 32년 만의 재회, 죽은 줄만 알았던 첫사랑의 여인. 무슨 말을 하겠는가? “오늘도 비가 오네요. 우리가 만날 때는 언제나 비가 오네요.” 여자의 첫 멘트다.
우산도 받지 않은 쓸쓸한 사랑이 문 밖에 울고 있다 누구의 설움이 비 되어 오나 피해도 젖어오는 무수한 빗방울 땅 위에 떨어지는 구름의 선물로 죄를 씻고 싶은 비오는 날은 젖은 사랑
수많은 나의 너와 젖은 손 악수하며 이 세상 큰 거리를 한없이 쏘다니리 우산을 펴주고 싶어 누구에게나 우산이 되리 모두를 위해 「우산이 되어」 - 이해인 윤희의 스토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수술하러 미국에 간 그녀는 거기서 20년을 살다가 10년 전부터 한국에 와 수목원 일을 하며 살고 있다. 대학생 딸(하나)이 하나 있지만 남편과는 오래 전에 헤어져 혼자다. 역시 인하의 그림자가 너무 짙었던 모양이다. 인하는 30년 전의 열정이 되살아나고 끊어졌던 연애를 다시 이어간다. 마침내 결혼 날짜까지 잡는다. 하지만 문제가 발생한다. 인하의 아들(준)과 윤희의 딸(하나)이 죽고 못 사는 연인 관계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부모와는 달리 일본 설산에서 맺어진 인연이다. 사실 『사랑비』의 절반은 이 2세들의 사랑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70년대와 2010년대 두 시대를 넘나들며 사랑의 보편성과 시대적 색상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2세들의 2010년대식 사랑은 생략하겠지만, 양자의 차이는 한 마디로 눈과 비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하와 윤희는 비오는 날 만나 사랑의 싹을 틔우는 반면 준과 하나는 일본의 눈 속에서 처음 만나 사랑의 싹을 틔운다. 전자는 시대적으로나(민주화 대모가 중요한 배경) 개인적으로 축축한 우수가 내재되어 있지만 후자는 눈꽃처럼 밝고 천진난만한 분위기이다. 이제 문제는 이루지 못한 부모 세대의 사랑을 뒤늦게라도 완성할 것이냐, 그 자식들의 새로운 사랑에 길을 터주느냐 하는 것이다. 신구 세대의 두 쌍은 자신들의 비밀도 모른 체 그리고 알고 난 후에도 한참동안 갈등 상황을 이어간다. 갈등이 정리되는 사건이 하나 터진다. 그동안 악화되어 오던 윤희의 눈이 실명의 위기에 이르렀다는 진단이 떨어진다. 수술하기 위해 입원한 윤희를 간호하기 위해 인하는 만사를 제치고 병원을 출입한다. 윤희가 실명을 하면 자신이 평생 윤희의 두 눈이 되어주겠다고 맹세한다. 이러한 모습을 본 아들은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아버지에게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미국으로 촬영연수를 계획한다. 거의 같은 시점에 아들의 상황을 알게 된 인하도 윤희와의 결혼을 포기한다.
한편 윤희는 수술하기 하루 전날 영원히 실명할 수도 있으니 그전에 꼭 봐 둘 게 있다며 어딘가를 서둘러 간다. 바로 첫 사랑의 캠퍼스이다. 슬로우 모션으로 대명동 캠퍼스의 전경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윤희는 32년 전의 일을 회상하며 캠퍼스 구석구석을 걷는다. 30년 전의 추억이 오우버랩된다. 병원을 찾은 인하는 윤희의 외출 이야기를 듣고 직감적으로 캠퍼스로 달려온다. 그렇게 두 사람은 32년 전의 첫사랑 무대에 다시 선다. 아는 대로 무대배경에 큰 변화는 없다. 다만 빨간 벽돌에 담쟁이덩굴이 더 짙어졌고 수많은 발자취가 명멸해 간 돌담길이 고색창연하다. 마치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듯이 50대의 남녀가 모교의 캠퍼스에서 첫사랑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병원으로 돌아온 윤희는 인하가 하나를 두고 미국으로 간다는 말을 듣는다. 몰래 병원을 나온 윤희는 간단하게 가방을 싸서 단호히 미국으로 사라진다. 인하가 결혼선물로 마련한 우산 모양의 목걸이를 걸고. 딸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윤희의 출국 소식을 들은 인하는 강의도 전시회도 다 포기하고 윤희가 있은 미국으로 떠난다. 윤희와 결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돌보기 위해서란다. 자신들은 영원히 친구로 남아 있을 테니 아들에겐 걱정하지 말고 하나와 결혼하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사랑을 두고 고조되던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 상호 양보로 갑자기 해소된다. 말하자면 비극적 갈등이 희극적 화해로 전환되어 버린다. 좀 싱거운가? 이러한 결말은 전형적인 한국식 갈등처리 방식이다. 서양의 비극은 철저한 파국을 통해 카타르시스의 강도를 높이는데 한국의 정서는 그러한 파국을 피하는 상생의 카타르시스를 지향한다. 천둥소리에 귀먹고 번개 불빛에 눈멀어 밤새 몸부림치던 마음이 해아침 마당귀에서 나팔꽃을 본다 한 허리 다치지 않고 막 피어나는 애기 살웃음을 달고 흙담을 타고 오른다
폭우가 네 거친 숨결 속에 돌아 꽃잎 속에 비이슬이 되었구나 「폭우」 - 박영근
천둥과 폭우의 거친 숨결이 파괴와 파국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흙담의 나팔꽃을 피운다. 조동일의 말에 의하면 서양의 비극은 일종의 이원론으로 투쟁의 논리를 따른다면 한국은 상생相生의 귀결을 선호한다. 부모세대와 자식의 세대가 갈등을 일으키지만 한 쪽이 끝내 쓰러지는 파국으로 가지 않고 양쪽 다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 인하와 윤희는 부부의 결합을 피하고 대신 영혼의 동반자를 선택한다. 부부됨의 사랑은 자식들에게 양보한다. 물론 이것은 희생이나 포기는 아니다. 인하는 뒤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3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은 우리의 첫사랑을 회복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식들의 사랑을 위해서인 것 같다.’ 실제로 이들이 미국에서 친구로 지내는 동안(최소한 형식적으론) 한국에서 준과 하나는 아무 장애 없이 결혼에 골인 한다. 이렇게 되면 자식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연장 혹은 부활된 셈이다. 상극상생, 서로 극복하여 같이 사는 방식이다. 비와 카타르시스 인류문명은 정착생활을 시작한 농경시대부터 크게 발전했다. 정착 공간의 제일 조건은 물이다. 배산임수란 풍수의 공식이 나오기 훨씬 전부터 인간은 집을 짓고 사는데 물이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농사를 지으려면 지상의 물만으로는 안 된다. 때맞춰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 한다. 비는 그러니까, 가장 생물학적인 근거이면서 동시에 매우 형이상학적인 관념이다. 땅을 일구어 뭘 가꾸려면(cultivation) 비가 내려야 하는데, 비는 하늘의 하나님이 관장하는 것이었다. 비가 안 오면 하늘을 우러러 제사를 지내야(cultus) 했고 비가 오면 감사를 드려야 했다. 독일어로 비라는 단어는 Regen인데, 이게 동사가 되면(regen) ‘자극하다’, ‘일깨우다’는 뜻이 된다. 즉, 비는 땅만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여 일깨운다. T.S.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둔감한 뿌리를 일깨우는 봄비(stirring dull roots with spring rain)'라고 했을 때, 둔감한 뿌리는 식물만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비는 기실 문학의 기능과 유사하다. 농경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문학에 비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황순원의 『소나기』가 현대 서정문학의 대명사처럼 거론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드라마 『사랑비』에서 비는 최소한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운명의 기제(mechanism)로 작동하는가 하면 카타르시스로 작용한다. 즉, 비는 정서표현을 넘어 플롯에 결정적인 변화를 준다. 우연을 운명으로 전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인하와 윤희가 도서관 앞에서 마주친 것은 우연이지만 그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비이다. 즉, 인하는 갑자기 내린 비로 인해 발이 묶인 윤희에게 우산 하나 구해 같이 쓰면서 예상치 못한 스킨십까지 성공한다. 여기서 우산은 일종의 이동 연애공간(locus amoenus)이 된다. 이후에도 비는 두 사람의 관계를 밀착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춘천 영화관 앞에서 우연히 만나 「Love Story」를 같이 보게 된 것은 순전히 비 때문에 생긴 일다. 비로 인해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인하와 윤희는 헤어진 뒤에도 평생 비만 오면 추억에 잠긴다. 비를 좋아하는 윤희의 성정은 딸에게 그대로 전이되어 하나도 비를 좋아한다. 인하와 윤희가 32년 뒤 길에서 우연히 만날 때도 비오는 날이다. 말하자면 비는 과거 회상적인 서정성을 유발한다. 추억의 행복과 우수가 뒤섞여 있다. 이에 반해 눈(雪)은 현재 몰입적인 서사성과 관련이 있다. 즉흥적이고 천진난만하다. 일찍이 쉴러는 문학을 소박문학과 감상문학으로 나누었는데 (On the naive and sentimental in literature), 나는 전자는 눈의 정서에 가깝고 후자는 비의 정서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물론 비를 좋아하는 서정적 유형이라고 해서 다 과거 지향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비가 눈보다는 사색적이고 비극적 깊이를 담아내는 데 적합한 것은 사실이다. 비의 정화기능은 이중적이다. 물리적인 씻음의 정화가 있고 마음의 정화가 있다. 저 소나기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가랑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가는 것을 보라 저 봄비가 나뭇잎을 닦아주고 기뻐하는 것을 보라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가 고이고이 잠드는 것을 보라 우리가 나뭇잎에 얹은 먼지를 닦는 일은 우리 스스로 나뭇잎이 되는 일이다 우리 스스로 푸른 하늘이 되는 일이다 나뭇잎에 앉은 먼지 한번 닦아주지 못하고 사람이 죽는다면 사람은 그 얼마나 쓸쓸한 것이냐 「나뭇잎을 닦다」 - 정호승
계명대 캠퍼스가 영화나 드라마에 단골 배경으로 나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이유가 뭘까? 건물과 어우러진 자연의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에 대리석 기둥, 건물을 덮고 있는 담쟁이덩굴, 수많은 나무와 화초. 영화나 드라마가 서정성을 매개로 카타르시스를 추구한다고 할 때, 자연만큼 서정성을 유발하는 것은 없다. 말없는 자연이 인간의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생명의 원초적 형상을 띈 자연은 사람의 정신을 순화시킨다. 이는 의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다. 사람의 뇌에서는 대략 다섯 가지의 뇌파(Welle)가 나오는데 가장 안정적이면서 혈액순환이 활발할 때 나오는 파가 알파(α)파다. 그런데 이 알파파가 자연에서 많이 나온다고 한다. 사람이 왜 자연을 좋아하는지 의학적으로 증명된 셈이다. 특히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찾는다. 자연의 순정함과 서정성에 동질성을 얻고 그 배경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비는 자연의 가장 원초적인 요인으로 강도 높은 정화작용을 동반한다. 만물의 근원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무엇보다 수시로 오염되는 대기를 정화시켜준다. 그렇게 정화된 대기뿐만 아니라 정화의 주체인 비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비는 또 눈물의 메커니즘을 닮았다. 눈물의 치유력은 잘 알려져 있다. 심신의학(mind-body medicine)에 의하면 마음에 쌓인 감정의 독소가 많을 경우 암세포를 떼어내도 별 효과가 없다고 한다. 그런데 마음의 독소를 빼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것이 눈물이라고 한다. 암수술의 대가 이병욱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눈물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치료를 가능하게 하는 신이 내린 자연치유제이다. 눈물은 하나님이 주신 천연 항암제이다.” 98.5%의 물과 얼마간의 염분, 단백질, 무기질로 된 눈물의 미스터리가 여기에 있다. 게다가 눈물은 카테콜아민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을 배출시키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한다. 눈물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1997년 다이애나의 죽음으로 영국 국민들은 집단적으로 눈물을 흘렸는데 그 후 한동안 영국의 심리상담소를 찾는 환자들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문학의 감동과 비극(Tragedy)의 존재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아름다운 서정의 계명대 캠퍼스에 빗물까지 동원한 『사랑비』는 카타르시를 추동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자연의 서정성과 비에 대한 친연성은 한국이 좀 특별한 것 같다. 비오는 장면은 『사랑비』 외에도 한국의 각종 드라마에 단골 이미지로 등장한다. 오래된 농경문화의 영향으로 한국인들의 DNA에는 비에 대한 정서가 골 깊이 새겨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주역에 "구름이 움직이고 비가 베풀어져 모든 물건이 제각기 꼴을 갖춘다(雲行雨施 品物流形)"고 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최소한 현실에서는 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화장이 지워지고 머리 스타일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이제 너무 인공화되어버린 몸이 자연과 코드를 맞출 수 없게 된 것이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햇볕이나 비 같은 자연과의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다. 주말에 강가에 가보면 젊은이들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자연이 주는 카타르시스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계명대 캠퍼스는 자연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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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리! 문학을 하고 있는게오!
연애학을 하고 있는게오?
문학의 치유기능으로서의 카타르시스는
결국 열정이며 진리며 사랑이로구나..!
그런.. 대학시절때 생각을 덕분에 다시 해보게 되오.
여전하시니.
반갑구..(^^)
그려!
만남이 만남이 아니지..
가슴에 비로서
흐르는게 만남이다!
언제나,,
영원한 젊음속에
나날이기를!~ ^!^
덕분에
시공간을 넘어
비가 올려고 하네.
그 어디에선가!
아, 오랜만이네요 산주 선배님! 반갑습니다. 그쪽 근황은 어떤지요? 저야 문학이라기보다는 남의 밭에 이삭줍는 정도지요. '나'는 없고 여전히 '누구에 대해서' 아니면 '뭐에 관해서'나 주절거리고 있잖아요. 게다가 늙어가니 문학적 액션이란 게 죽은 아이 불알 만지듯이 추억이나 만지작거리게 되네요. 그래도 동창끼리 가끔 지난날의 청춘을 추회해 본다고 나쁠 건 없겠지요. 이 시대의 정서가 자꾸만 삭막해져가니 더욱 그런 것 같애요. 요즘 도회지 아이들, 봄비가 내려도 서정이란 게 안 생기나 봐요. 화장 지워진다고, 하이 힐이 미끄럽다고 인상 찌그러지는 게 다반사지요. 지리산에 보내 한 일주일 치유라도 시킬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족: 지리산주는 智異山主가 아니고 智異山朱, 즉 지리산 주인이 아닌 지리산에 살고 있는 주윤창이란 뜻이랍디다... ㅎ
智異山主나 智理山朱나 아직도 뭐가 뭐시 그게 다르고 중요하요??...~
지리산은 누구며! 나는 또 누구인가! 뭐 그런 거나 물어보소!.. ㅎ
이쪽 근황이라 해봐야.. 나 물먹고 물마시는..부루스리 근황하고 별게 다를게 없을테고,!
'남'은 누구며.. '이삭'은 또 뭔가?? 묻고 싶소.ㅎ
본시 '나'는 없는게 정답일테고..'누구에 대해서'는 모두가 나에 대한 이야기며.. 뭐에 대해서는.. 만물물상이 동근동생이라..그 또한.. 죽은 아이 불알일테지!..'사랑비' 그 이후에 찾아보니..예전의 그 비슷한 외국 영화있었더라고..거기에다 그 비슷한 드라마 각본을 대입한 정도의 가치가 있더구만!.. 자신이 다녔던 대학 갬퍼스가 배경으로 나오니 호기심이 더 드는 정도였다오.. 사람은 변하나, 사랑과 비의 테마는 "예술은 길다"처럼 영원하겠지.
우리는 그속을 다녀가는 주인손님이구.
아, 재훈이 선배님 오랫만이네요. 잘 계시지요? 그러니까 리산의 주인이 아니라 지리산에 사는 주씨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상당히 겸손한 표현이 되네요. 한문으로 안 쓰면 대체로 전자로 오해할 것 같은데, 그런 오해를 애써 풀려고 하는 않는 것은 은근히 즐기는 것일까요, 오해조차 개의치 않는 대범함일까요? 하여간 재훈이 선배님, 온에서라도 더러 보입시더.
내자신 치유도 자연을 봐야 아는 정도니..아이는 사절이요..일년이면 모를까!@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즐김이나 겸손, 대범이 다 들어간다고 봐야 옳겠지..나를 뭐에 하나 딱히 구속시키는 것은
싫다오.ㅎㅎ 글여 자주봄세..우리는 같은 얼굴을 지녔으니..다르다면 하는 수 없고..그나 나나,, 여나 그나..
나보면 너보는 격일터.
산주께서 삶과 세상에 대해서 여전히 달관 내지는 초월하고 있는 것 같아 놀랍네요. 혼자 살면서 피터팬 신드롬에 젖어있는 저 같은 인간도 세파에 물들고 시달려 오만상이 되는데, 수 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험악한 세상과 마주해야하는 가장으로서 젊은 날의 언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니 말입다. 산속이라 에어나 물이 달라서 그런 모양이네요. 그래도 거기서 외국 영화도 보고 문명세상을 멀리하기만 하지는 않는 모양이네요. 늙으면 얼굴이야 대동소이하게 되지만 어떤 아우라를 발하느냐는 편차가 심한 것 같네요. 죽어도 영혼의 사리 하나 남지 않을, 그저 그렇고 그런 인생이 될 것 같아 한 여름인데도 좀 쓸쓸하다고나 할까요.
천태상 스스로 얻은 피터팬 신드롬일테고..그 속에서야 이미 초월이나 달관도 그 색이 무색할터!
에어나 물이 다르긴 다를테지만, 그 마시는 사람이 젊고 늙기야 하더랴 ㅎㅎ
여기가 거기니 외국문화가 내국문화고 문명이 문화고 정신또한 육체일세.
거기서 발하는 아우라에는 달리 죽고 달고 할 무엇조차 없으니,,
브루스리(!)라는 걸출한 생사리를 남긴 우리들의 아버지가 그리울 뿐이로세.ㅎ
늘 건안하시오~ ^!^
생사리? ㅋㅋㅋ. 세속의 한 복판에 오십이 넘도록 살면서 살의 보시 한 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남자, 그의 하부에 메마르게 핀 곰팡이, 그게 혹 사리로 변할 가능성이 있을까요? 그리고 그 아부지 못 뵙기는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저도 마찬가지랍니다. 전생에 바삐 살기로 운명과 약조한 듯 하루를 분 단위로 움직이시는 데다, 내리 사랑만한 오르막 사랑은 없는지라 힘써 찾지 않는 제자의 무심과 불충 때문이지요. 혹 도력 깊은 산주께서 하산하면 막걸리 타임 내 주실지 모르지요. 날이 나날이 더워지네요. 산 속이라고는 하나 여름은 여름, 이번 무더위도 우짜든지 잘 넘겨봅시다.
사리가 심지어 여름으로 조차 걸어다니니, 썩든 피든 이미 생사리임에야 도리가 있겠소.
돌력에야 내리막도, 오르막고, 무심도, 불충도 없는게고.
그것이야말로, 너나나, 생사, 그리고 다 알 수 없는 일들과
알고도 당하는 생물학적 욕구위에 선 진정한 도력일 것임에 공감하시지요.
그래서 아버지와 스승이 매양 일초마다 소용투성이외다
당연 여름이니 더워야 맛이고, 여긴 산이라 하나, 아랫 집이 코 앞이요.
게다가 간혹 대나무베러 대나무밭에 들어갈 땐, 모기찜질까지 기꺼이 즐겨 헌혈 보시한다오.ㅎ
아, 그러고 보니 모기의 계절이 돌아왔네요. 제가 여름을 싫어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되는데 그 중에 모기가 상당히 상위에 랭크되어 있지요. 도시고 시골이고 한옥이고 아파트고 피 있는 곳에 모기가 있으니! 그런데 피를 먹고 사는 모스기도가 어찌 에오라지 청정한 대나무 밭에 있지요? 혹 청정한 척 대나무 밭을 찾는 칙칙한 인간들의 피를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닌가요? 그러고 보면 역시 미물의 감각이란 게 탁월한 것 같네요. 아무리 입고 발라도 그 밑에 흐르는 피의 먹잇감을 바로 찍어내니 말이에요. 인간의 기술이 나노까지 이르고 있다지만 한 갓 미물의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니 어찌 인생허망을 감출 수 있겠어요.
모기, 모스기도, 미물에도 섭리가 있나니.ㅎㅎ
청정한 대나무밭이 실은 모기 살기 좋은 곳이라!
그렇다고, 들랴쿨라일리는 없고.
貪,嗔,痴 음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이 바로 도라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하것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