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산행(1)
중복이 지난 7월의 마지막 날 아침, 다행히 구름이 폭염을 가려주어 산뜻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남부 터미널에서 시간을 맞추어 나온 여섯 명의 다정한 얼굴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술의 전당을 뒤로하여 우면산 정상을 가볍게 오른 후, 안개로 흐려진 서울의 남쪽을 잠시 스쳐지나 자연생태공원 쪽으로 내려왔다. 우면산에서는 그나마 산다운 모습을 보이는 곳이다. 마을을 조금 지나자 1.3 킬로미터 가량의 산책로가 아담한 공원으로 들어섰다. 아이들이 천연염색체험을 하고 있었다. 모든 색깔을 음양오행과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자연변화에 맞추어 연두색, 붉은 색, 흰색, 노란색으로 디자인했다는 우리선조들의 지혜를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을은 자연의 풍성한 수확을 모두 받아들이는 계절이기 때문에 흰색으로 표현한다는 설명은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 산사의 단청들도 모두 이러한 색깔순서로 되었다고 했다. 단순한 자연의 현상으로 생각하기에는 가을이 노랑으로 칠해지고 겨울이 흰색으로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우리조상들의 생활철학은 참으로 깊은 맛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춥고 긴 겨울의 노란색은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연수는 어떠한가? 아마 흰색의 풍성한 들판을 조금 비켜나서 노란색이 가리키는 쪽으로 벌써 한발을 내디딘 것이 아닐까? 수확의 때인 가을의 시간에 과연 우리는 얼마나 풍성한 인생의 열매를 거두었는지 스스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설령 우리 연수가 겨울의 계절로 들어섰을 지라도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의 낡아지는 육신은 그리 신뢰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돌아갈 고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동구 밖에서 아들의 귀환을 기다리는 다정한 어머니가 아직도 있기 때문이다. 아들의 축 쳐진 어깨를 얼싸안으시며 ‘그동안 얼마나 수고했느냐, 아들아’하며 반기시는 모습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창조주는 때로는 다정한 어머니의 품과도 같이 우리를 위로하시며 권면해주시는 사랑이시기에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수고들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메타세콰이어의 시원한 가로수 길을 따라 시장기를 해결하기 위해 메밀 막 국수집에 들어갔다. 친구가 가져온 1년 반 숙성된 오디술을 한잔씩 음미하며 산행의 결산을 했다. 의외로 여자 친구들의 걸음은 나보다 빨랐다. 다람쥐라고 해야 하는지 물찬 아줌마제비모습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항상 만나면 누가 누구를 좋아했다는 얘기를 화두로 하여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놀라운 사실은 초등학교시절 어떤 여자친구 둘이서 한 남자친구 집을 찾아 갔을 때 그 친구가 들어오지 못하게 돌을 던지더라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친선을 하자는 아름다운 사절단의 제의를 야만스럽게(?) 물리치는 속셈은 무엇이었을까? 정작 그 당사자는 그런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는 세상이다. 우리나이에 건망증은 늘어가는 데 어찌된 일인지 어릴 때의 기억은 그리도 뇌리에서 잊혀 지지 않는 것일 까? 아직도 6.25 사변 때 피난 가던 때가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우리시대의 상처이기 때문일까?
다시 양재천을 따라 걸었다. 양재천변의 간이 수영장에 노니는 아이들과 사람들은 보니 너무 불쌍하게 보였다. 우리는 그래도 낙동강(용두지)에서 마음대로 미역 감고 낚시하느라고 좋은 시절 보냈는데 이들은 그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어찌 알 것인가?
7월의 마지막 태양이 아직 이글거리는 한낮에 다들 그런대로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다음에도 즐겁게 산행에 동참하자는 의기투합으로 헤어졌다. 만날 때 마다 새로운 이야기보따리가 터져 나오니 우리가 함께 한 연수가 제법 오래 된 모양이다. 이제 겨울의 색깔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 모두 어머니를 만날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
-2010. 7-
어떤 산행(2)
데카르트의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말 대신, ‘그리워하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바꾸어 생각을 한 때가 있었다. 뭔가 곧 손에 잡힐 듯하면서도 안개 저편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리움의 대상이 마치 젓 뗀 아이가 찾는 어머니의 젖무덤일 수 있고 여름 해질 무렵 들녘에서 야생화 향기를 따고 있는 소녀의 가녀린 모습일 수도 있으며, 구도자가 찾아나서는 영혼의 고향일 수도 있다. 이제 초로의 문턱에 성큼 들어선 우리에게 아직도 혼자서 간직할 한 움큼의 그리움이 남아 있다면 추수 날의 시원한 냉수와 같이 마지막 폭염의 열기도 식힐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선배시인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이라고 그리움을 노래했다.
오랫동안 시멘트 색깔처럼 칙칙한 세상을 살다보니 우리 기억에는 이른 봄의 새싹같이 애틋한 그리움 없이도 그냥 무덤덤하게 세월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우면산자락 쉼터에서 친구가 불렀던 ‘그리운 마음’이란 무반주노래에서 둔탁한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을 느꼈다. 하마 오래 잊었던 내면의 퇴색한 그리움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바람은 불어불어 청산을 가고 냇물은 흘러흘러 천리를 가네. 냇물 따라 가고 싶은 나의 마음은 추억의 꽃잎을 따며 가는 내 마음, 아! 넓은 손수건에 얼룩이 지고 찌들은 내 마음을 옷깃에 감추고 가는 삼월, 발길마다 밟히는 너의 그림자’
그리운 대상을 찾아서라면 멀리 청산이라면 어떠하고 더욱이 천리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구도자의 마음과 같음을 볼 수 있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라고 그분은 진리에 목말라 하는 한 엘리트 관원에게 말씀하셨다. 바람은 자유로움이며 자유는 우리가 추구하는 최상의 가치 중 하나입니다. 물이란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바람과 물이 가는 곳이라면 우리가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아름다운 땅이 아닐까? 결국 우리가 그리워하는 목적지가 이미 정해져 있으면 설령 넓은 손수건이 수고한 땀으로 얼룩이지고 세상일로 찌들은 우리의 마음이라도 낡고 헤어진 옷깃에 살짝 감추고 춘 삼월 봄날 그분의 그림자를 밟으며 가볍게 길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원한 그리운 마음을 뒤로하며 다시 ‘서초 올래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배역 청권사 사이 길로 오르며 아버지 태종과 달리 ‘왕자의 난 없이’ 동생 충령에게 왕위를 사양한 양령과 효령대군 두 형제의 애환을 되새겨 보았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라는 말은 세상의 권세와 온갖 부귀, 영화를 다 누려본 전도자의 회한이다. 왕위에 오른 세종도 가고 이씨조선도 가버리고 남은 것은 청권사라는 효령대군 부부의 사당뿐이니 솔로몬 왕의 지혜가 헛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다행한 것은 터키에서와 같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왕자의 형제들을 살해하지 않는 것이 우리 옛 조상들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서리풀 근린공원 숲길을 따라 걷는 한 여름은 그리 고역이 아니었다. 한 친구가 오디 냉차를 지고 와서 우리의 갈증을 해갈시켰고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 사대부부인 모습으로 틈만 나면 쉬어가자는 여유 자적하는 모습도 보기 싫지 않았다. 누에다리에서 본 남쪽의 예술의 전당과 북쪽의 반포대교를 거쳐 남산으로 이어지는 시원한 사통팔달의 풍경은 강남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신세계에서의 시원한 물냉면은 온몸을 얼어붙게 하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우리 몸이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이다.
2010. 8
어떤 산행(3)
10월, 가을은 저만치 왔는데 아직 나뭇잎은 여름의 풍성한 옷을 입고 있다. 그냥 만나서 좋은 친구들과 주말에 가벼운 산행을 했다. 정직하게는 올레길 산보라고 해야겠지. 그래도 현충원이 보이는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그리 멀지 않는 곳에 한강도 볼 수 있으니 제법 배산 임수의 격을 갖춘 풍경 속으로 오랜만에 가을의 햇빛을 따라 걸을 수 있었다. 동작동 국립 현충원이 자리한 터는 남쪽으로 뻗어서 내려오던 백두대간의 정기가 한강가장자리에 머물러 뭉쳐있는 명당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그래서 이런 기운을 받아 나라를 떨칠 인물이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수 십 년 묵은 아름드리나무들이 지난여름 태풍으로 무자비하게 뿌리를 들어내고 쓸어져 서로 엉키어 있는 모습들이다. 지역주민들이 노력을 동원하여 나무들을 세웠으면 좋았을 터인데, 그냥 베어 버린 것이 못내 아쉬웠다. 나무 한그루를 심고 가꾸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투자되어야 하는 것을 안다면 누군가가 시민의식을 깨우기에 충분한 명분이 설 텐데. 나 스스로도 그러하지 못한 아쉬움과 무력한 부끄러움만 남았다.
한 두어 시간을 걸은 후 우리는 산등성이에 마련한 런치 테이블에 앉아 먹고 마시며 정겨운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서로 미처 몰랐던 가족사도 나오고 애완견 키우던 이야기, 아직도 금연을 하지 못한 파트너에서부터 그동안 살아왔던 회한의 시간들을 스스럼없이 끌러 놓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삶이 결코 평탄하기만 한 것이 아님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젊은 날, 그 아름답던 하얀 손들이 이제 주름이 들어 꺼칠하게 변해버렸다. 그 손들은 단지 보여주기 위한 장식용이 아니었고 생활 자체였기 때문에 삶의 역사가 녹아 묻어있는 증거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손으로 만든 음식은 누구에게나 아직도 별미가 될 수 있는 즐거움을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대의 그 손은 지금껏 가족에게 베푼 헌신과 봉사의 표상이기도 하고 훈장이기도 한 것이다.
나이가 들기 전에 그리고 아직 두 다리로 건강하게 걸을 수 있을 동안 부지런히 자연과 풍경을 즐기는 여행도 하고 산행을 하자는 제의에 서로 머리를 꺼덕였다. 이제 가야할 남은 시간이 우리가 걸어온 시간보다 짧을 것이기 때문에 한 뼘쯤 초추의 양광이 비치는 동안 열심히 살아야 하지 않을 까. 우리 중에 더러는 가족으로 인해 또한 세상일로 고통당하는 친구들이 있지만 다행이 믿음으로 잘 견디어 내고 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수고하는 모든 무거운 짐들을 그분께 내려놓을 때 까지 선한 싸움을 이기도록 기도할 뿐이다.
가을이 있고 고향친구들이 있어 마시면 기분은 좋지만 혹 그들에게 누(累)가 되지 않았는지 항상 염려스럽다. 우리는 예로부터 가무음주를 즐기는 민족이라고 위지동이전에 쓰였다고 한다.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는 유전자가 우리 핏속에 여태 흐르는 모양이다. 산등성이에서 부른 그의 가곡도 멋이 있었지만 노래방에서의 실력도 모두들 대단했다.
역시 오늘의 압권은 그녀가 준비한 막걸리와 도토리묵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했다. 단 그가 가져온 오디술을 함께 마시지 않았다면 정신도 상쾌하게 즐겼을 텐데.
다음 산행은 서해의 무이도 섬이라고 한다. 그 바다와 그 섬에 바로 달려가고 싶다.
더 이상 풍경에 사람에 술에 그리 많이 취하지 않고 온전하게 즐기게 되기를 바라며.
그날 저녁 모두들 잘 들어갔는지?
2010.10
어떤 산행(4)
오늘 그의 노래는 바다였다. 무의도 산등성 양지바른 쉼터에 둘러 앉아 ‘먼 산타 루치아’를 불렀고, 실미도 해안 가 높은 바위에서 제법 차가운 초겨울 바람을 맞으며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바다 저 편 너머까지 들리게 했다. 마지막으로 카페리를 타기 전 약간의 기다리는 시간에 점진도선착장 부근 바닷가 정자에서 함께 ‘산타 루치아’화음으로 오늘의 여정을 정리하였다.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는 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홀로 거니는 섬과 같아서 옷을 입지 않아도 전혀 실례가 되지 않는 제한지대로 가볍게 생각도 해보았으나, 무의도(舞衣島)란 이름은 이곳 섬 전체가 마치 장군 복을 두른 것 같이 바다 물결에 맞춰 춤추듯 한 모습을 보여주어 붙여졌다고 한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 같은 산들이 있고 낙조가 아름다워서 ‘서해의 알프스’로 불린다고도 한다.
억새의 군락이 바닷바람에 나부끼는 산길을 따라 실미도로 향하였다. 역시 바닷가에는 해송의 숲이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실미도와 제법 길 다란 사구로 연결된 길은 ‘모세의 길’이라고 한다. 그 때 북파공작원들이 마치 홍해를 가르듯 그 길을 따라 서울로 향하는 분노는 해방자인 모세와 같은 심경이었을까? 서해 외딴 섬에서 그 길 밖에는 출구가 없이 단절된 채로 극한상황을 보냈던 그들은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지금은 바다주위로 인천 대교도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고 인천국제공항에서 비상하는 여객기들도 볼 수 있는 자유가 있으나, 그때는 차마 볼 수는 있으나 갈수가 없는 고난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인고의 이야기가 오늘에는 관광스토리로 명소가 되었으니 그들의 죽음은 아마 그리 헛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너무 가벼운 생각인가? 무릇 관광명소가 되려면 수려한 풍광으로만 족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가 탄탄한 배경이 되어야 한다. 노르웨이 피욜드 해안의 ‘솔베이지’ 노래나 라인 강변의 로렐라이 언덕의 전설처럼 그리고 가까이는 우리 고향 부근의 삼강주막의 주모이야기처럼 슬픈 감동을 주어야 한다.
이제 우리들의 연수는 가을 추수가 끝난 들녘에 서있는 조금 외로운 나그네의 모습이 되어 해질 무렵이면 초가집 지붕위로 모락모락 저녁연기가 그리운 시간이 되었다. 만날 때 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우리가 보낸 지난 세월이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더러는 배우자로 인해 그리고 자녀들로 인해 상한 마음이 기도와 눈물로 회복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으로 그대는 장한 우리의 친구라고 훈장이라도 달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도 다행하고 고마운 것은 아직 유모어 감각을 잃지 않고 구김살 없이 즐겁게 사는 모습이다. 그중에도 약간의 장난기 있는 진한 우스갯소리를 스스럼없이 할 때이다. 이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피차에 자극을 주지 않는 고향친구들이기 때문일까? 그들만이 알고 있는 지난날의 러브스토리도 과감 없이 공개하는 여유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오늘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남태평양의 어느 한적한 섬으로 여행을 한 기분이다. 아침부터 김포공항에서 만나 인천국제공항으로, 그리고 버스를 타고 선착장으로, 카페리를 타고 건너편 무이도로 그리고 산으로 바다로 다양하게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약간 섭섭한 것은 그녀와 그가 막걸리와 오디술을 가져오지 않은 것이다. 그 덕분에 초겨울의 쌉쌀한 날씨처럼 머리가 맑은 채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이 우연은 아침에 나올 때 집사람이 제발 술 마시지 말라는 바가지가 주효한 것일까 아니면 기도 빨 덕분인가?
차창 밖 밤바다에는 어둠이 밀려오고 도심 멀리에는 불들이 밝혀지는 시간이 되었다. 문득 느린 도시의 가로등에 불을 지피는 점등사(點燈使)가 생각이 났다. 우리도 이제 이런 슬로우 타운에서 서로에 불을 밝혀주며 늙어 가면 어떨까? 오늘 그들의 빨간 등산 자켓이 무척 선명하였다. 밝은 색이 따뜻한데 왜 난 어울리지 않지?-2010.11
어떤 산행(5)
오늘은 해가 바뀐 후 오랜만의 산행 이였다. 사실은 산행이라기보다는 서울성곽을 거니는 문화유적답사가 더 어울릴 것이다. 2월의 눈 섞인 바람이 아직은 겨울임을 알렸다. 경복궁지하철역에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는 혹 차가운 바람이 오늘의 산행을 방해하지 않을까하는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계단을 따라 밖으로 나오니 아침햇살이 포근하게 우리를 맞이해주어 한결 마음이 푸근하였다. 창의문까지 걸어서 가기로 하였다. 겨우 내내 움츠리고 있었던 사지의 근육들을 한꺼번에 훈련시키는 고통의 순간이었다. 창의문에서 사뭇 계단을 따라 펼쳐지는 인왕산풍경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숨을 헐떡이며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올라갔다. 빈틈없는 규격의 돌로 쌓은 성곽과 함께 너무 깔끔하게 정제된 모습의 계단 길은 조금 지루할 정도다.
500년의 도읍을 지탱한 돌과 나무와 풀 한포기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 성곽을 쌓는 노역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의 민초들이 얼마나 땀을 흘렸을까? 새로운 제국의 건설과 그 위용은 난공불낙의 축성으로 시작되고 보여 질 것이다. 그 성 안에서 그리고 궁궐에서 일어났던 권력의 부침과 민초들의 희로애락의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을 느꼈다.
삼청공원을 따라 내려와 북촌 한옥마을을 들렀다. 과거로 거슬러 가는 시간여행이 골목골목으로 이어졌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멋과 여유가 어울려진 공간이 아직 우리 주위에 가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궁궐과 지척에서 임금을 모시는 관리들의 기품 있는 거동을 지척에서 보는 것 같다. 더러는 권력의 쟁취의 암투가 사랑방 깊숙이에서 모의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리던 자도 빼앗긴 자도 하나 둘 시간의 냉혹함 앞에서 사라져버리지 않았던가. 한때는 지고(至高)요 최선이었던 것들이 모두 다 박물관의 유산으로 남아 후세에게 문화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을 뿐이다.
그의 오늘의 노래는 ‘소나무’였다. 그 소나무 큰 몸통은 총알 자국으로 분단의 아픔을 보여주고 있다. 1.21 사태에 그들이 쏜 총알의 흔적이라고 한다. 그들의 총부리는 서해에서 그리고 연평도에서도 작열하였다. 참으로 슬픈 이 나라의 운명이다.
산 정상 양지바른 곳에서의 점심은 성찬이었다. 송구할 정도로 정성스레 준비한 그녀들의 솜씨는 일품이었다. 찰밥에 배추 부침과 도토리묵은 고향집 어머니의 손맛을 자아내었고, 복분자와 매취주 그리고 오디술로 곁들여진 산상식사는 더 할 나위 없는 사치였다. 산이 있고 다정한 친구들과 향기 나는 술이 있는데 행복이 어디 별 것인가. 또한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은 그녀의 미워할 수 없는 유머였다. 울음이 나올 정도로 웃게 하는 말솜씨와 몸짓은 정말 믿음직스러운 친구의 모습이다. 어느 듯 60 중반에 들어선 나이들이 아직 마음은 젊은이와 같아서 부부의 이야기와 사랑의 이야기도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발설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싫지 않았다. 그래 그게 다 고향친구란 이름으로 아름다운 연륜이 쌓였기 때문일 거야. 북촌 찻집 따뜻한 사랑방에서 발을 뻗고 마신 쌍화차는 오늘의 산행을 결산하는 향기였다. 예로부터 동이족은 가무음주를 좋아하는 민족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는 여유와 멋은 다정한 친구들의 만남에는 더 할 수 없는 즐거움이지. 겨울의 해는 쉬 지고 벌써 땅거미가 우리의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야 할 집이,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것 역시 우리의 축복이지.
그런데 오늘의 빅 에피소드는 산책길에 해우소가 없었기 때문에 한 친구가 너무 어려움을 당한 일이야. 임기응변으로 위기는 모면했지만 얼마나 당황하고 황당하였을까. 도중의 해우소 설치는 관계기관에 꼭 건의해야 할 사안이다. 다시 만날 기약을 하며 종종 걸음으로 모두들 전철에 올랐다. 3호선 역이 하나 둘씩 지나갈 때 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 제갈 길로 흩어졌다. 즐거운 하루였다. 2011.2
어떤 산행(6)
사람들의 울음은 언제, 어디서가 합당한 것일까?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잔치 사절단으로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로 들어갈 때, 광활하게 펼쳐지는 만주벌판을 보고 참으로 울기 좋은 장소라고 하며 이곳에서 실컷 울어보고 싶다고 했다.(好哭場 可以好矣) 아마 연암의 눈에는 중원대륙을 달렸던 고구려의 기상과 영광이 스쳐지나가고 다물(고토회복)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울음은 인간의 칠정이 극에 달하면 나온다고 열하일기에서 설명했다. 이는 영웅의 울음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감격이 북한산에 올랐을 때도 가슴 뭉클하게 아파온다. 연암은 어렸을 때부터 북한산에서 실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는 북한산, 묘향산, 구월산, 백두산, 개마고원과 금강산 등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양반의 옷을 벗어버린 채 자연과 서민의 생활에서 이런 울음을 체험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금강산보다 북한산이 더 아름답다는 북한산 예찬론자였다.
겨울의 끝자락, 올 들어 가장 춥다는 토요일아침에 구파발에서 만나 북한산을 가기로 했다. 그들은 초행이었고 어떤 코스로 가는지도 모른 채 추위걱정과 조금의 설렘으로 나왔다. 실은 서로 취소를 바랐지만 가을부터 미루어오던 산행이라 차마 전화를 먼저 걸지 못한 것이다. 다행이 추위는 누그러졌고 삽상한 바람이 묻어오는 공기는 상쾌했다.
송추부근의 여성봉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난해와는 달리 둘레길이 새롭게 단장되어 조금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오랜만에 오르는 길이라 모두들 힘든 모양이다. 쉬어가자는 성화에도 중턱 마당바위까지 올랐다. 간식을 즐기며 시원하게 펼쳐지는 풍경을 모두 좋아하였다. 이게 점입가경의 시작이니 더욱 기대를 해도 좋다고 했다. 드디어 입구까지 다 달았다. 그곳을 밟기 전에,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했다. 이 전도유망한 이스라엘 청년은 예수에게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는 것이냐고 물었다. 다시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야 되는 것인지? 그리하여 거듭날 수 있다면 정말 어머니 자궁 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다. 그래서 이곳을 택했는지 모른다. 마치 고대의 제천의식이나 종교의식같이 비옥하고 풍성한 여인의 신성한곳으로 통과하는 순례자의 모습이라고 할까? 출입금지를 알리는 표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곳을 밟으며 사진을 찍는 등 아우성이다.
여성봉정상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은 압권이다.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멀리 오른 쪽에는 인수봉이 머리만을 내밀고 우이봉이 등고선을 낮게 그리고 왼 쪽으로는 오봉의 행렬이 이어지고 더 멀리는 도봉산 정상이 그리고 사패산의 마당바위가 들어온다. 병풍을 펼쳐놓은 듯 장엄하고 경외로운 풍경에 아마도 연암 박지원은 이곳에서 수차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석양에 그림자를 던지는 오봉은 참으로 아름답다. 미시령 꼭대기에서 지는 해를 보면 눈물이 절로 나온다는 친구의 생각이 난다. 몇몇 친구들이 고소공포증이 있어 가장 편하고 전망이 좋은 바위 쪽으로 가지 못했다. 아늑한 양지쪽에서 성찬을 즐겼다. 연이나 후덕한 친구는 배추전과 도토리묵을 준비했다. 오디술도 있고 컵라면도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이 작은 우주와 자연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드신 분에게 감사드리는 김 권사의 기도는 언제나 푸근했다. 오늘은 그의 독창이 없어서 서운했다. 추웠고 주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다가오는 시간에도 가능하면 산행을 할 수 있는 건강을 허락해주시도록 기도해야지. 하늘나라에 먼저 간 그가 그립다. 그와 같이 전망 좋은 바위에서 찍은 사진을 꺼내 보았다. 겨울이고 다정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혼자 여행을 떠난다. 언젠가는 나도 그 길에서 그들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본다. 이와 같을 때엔 눈물이 나와도 합당한 것인가? 오늘은 개마고원을 넘어 저 멀리 파미르고원 고조선의 고토를 찾는 다물(多勿)의 땅에 가고 싶은 날이다. 다시 아름다운 땅으로 돌아갈 때 까지 우리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야지. 2011.
어떤 산행(7) :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세상에 만만한 길이 있을까? 우리 나이에 히말라야 고원이나 북한산 숨은 벽 바위를 기어오르는 것이 부담이 된다면, 산허리를 돌아가며 유유자적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간혹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를 한 때는 무시로 넘나들었다는 사실을 훈장처럼 확인할 수도 있으니깐. 그 둘레 길의 하나인 불광동에서 시작되는 ‘구름정원’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마치 바빌론의 느브가넷살 왕이 메디아 출신의 왕비인 아뮈티스를 위해 만들었다는 ‘공중정원’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혹 아름다운 왕비를 어느 호젓한 길에서 만나는 행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져도 좋다.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많은 길을 만들었다. 길은 인간의 역사이고 문명이었다. 로마인들은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점령지에 먼저 도로부터 닦는다고 했다. 그 길은 대체로 군대의 이동통로와 상품이 교환되는 교역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런가 하면 버드나무 가로수 사이로 시원하게 뻗은 신작로는 도시를 동경하는 시골어린이들의 꿈이었다. 길은 본향을 찾는 나그네의 여정이고 길 위에서도 사람들은 길을 묻는다. 왜 그럴까? ‘산티아고로 가는 순례자의 좁은 길’도 있고 ‘천산북로의 실크로드와 차마고도’와 같은 험난한 길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각기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때로는 온종일 메마른 땅을 가다 지친 여행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날 수 있는가 하면 강도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 우리가 가는 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길을 찾기 위해 묻는 것이다. 그 길에 동행이 있으면 좋을 것이고 그와 목적지가 같으면 더 더욱 좋을 것이다. 그가 혹 아름다운 고향의 노래를 불러주면 더 없이 행복하겠지. 그리고 그 길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서로 떡과 포도주를 나누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거야.
3월의 어느 주말, 아직 꽃샘추위가 떠나지 않은 시간에 우리는 그 길 위에서 지나온 발걸음들을 반추해보았다. 더러는 회한의 일그러진 모습으로도 보인 때도 있었지만 다행히 아직도 건강을 잃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감사했다. 고향친구로 남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간혹 서로에게 안부를 묻고 등을 두드려 줄 수 있는 사이가 참으로 푸근하고 넉넉하다. 언제 어떻게 목적지에 다 달을지 알 수 없지만 이 길 위에서 서로에게 건강하고 밝은 동행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늘 그러했듯이 푸짐한 먹거리를 준비한 그의 따뜻한 손에게 감사드린다. 그 좋은 안주에 술 한 잔 없어도 그리 서운하지 않았다. 그가 부른 노래가 흥겨웠기 때문이다. 오늘 산행은 구름정원을 거니는 이른 봄의 풍경으로 제목을 붙일까? 다가오는 4월 산 골짜기 마다 지천으로 꽃이 필 무렵 무릉도원으로 다시 가야지. 그 때는 신선이 될 테니까 썩은 도끼도 가져가고 진달래 향기 같은 술잔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듯 진관사까지 왔고 여승의 독경이 정신을 맑게 한다. 그녀는 과연 해탈의 길을 찾았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 독경소리는 얼마나 공허한 울림일까? 하루하루 그 분의 은혜를 받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길을 가야지. 설령 그 길이 걷기 힘든 메마른 땅일지라도 때를 따라 내려주시는 이른 비 늦은 비를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고향에서 본향까지 동향인이어서 그 길 위에서 서로에게 넉넉한 동행자가 될 수 있을 거야. 고도를 기다리는 봄 길에서.
-2012.3
어떤 산행(8)
오늘은 음력 4월 초파일 이른 여름 날씨로 주위가 화창하다. 오랜만에 북한산행으로 모였다. 부처님 오신 날이라서 그런지 구파발 버스정류장의 북한산 행 등산객들의 길 다란 행렬에 조급증이 생겨 택시를 타기로 했다. 타고 보니 총알택시였다. 신호무시, 중앙선 침범해서 앞지르기 등 곡예로 가슴이 화들짝 놀랐다. 다행히 효자비에서 무사히 내려 숨은 벽 쪽으로 행군했다. 밤골 방향으로 갔으면 완만하게 올라갔을 터인데 백운대를 향해 가다보니 제법 가파른 산을 몇 개 넘었다. 친구들은 무심히 따라왔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혹 계곡이 빨리 나타나지 않으면 여유롭게 쉴만한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북한산의 매력에 빠져 이 봉우리 저 계곡으로 찾아보았지만 숨은 벽 앞에 서게 되었을 때의 흥분은 실로 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인수봉과 백운대 정상을 향해 북쪽에서 내달아 올라가 거대한 몸짓으로 꿈틀거리며 하늘로 비상하려는 용과도 같은 기개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후 계절을 따라 수차례 오를 때마다 경외감 마저 자아내는 창조주의 걸작 품에 감탄할 따름이다.
감기 걸린 친구를 배려도 해야 하고 친구들의 고소공포증 핑계도 있어서 오늘은 숨은 벽 언덕, 비상하는 용의 등까지 강행군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 계곡에서 자리를 깔았다. 그냥 오늘은 낮은 물가에서 평범한 신선놀음이나 해야지. 아직 가물어서인지 계곡의 물소리는 그리 청량감을 주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들이 있어서 그냥 마음 푸근히 쉴 수가 있었다. 온 산을 물 드리는 화사한 꽃의 계절은 아니더라도 푸르른 물이 금방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숲의 나무가 정상 솟아오른 바위 색깔과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팥죽을 마련한 손길 덕분에 푸짐한 오찬을 나누게 되었다. 막걸리 두 병이 너무 많다고 하던 염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노래가 계곡 아래로 잔잔히 흘러갔다. 젊은 날의 회한과 환희를 서로 교환하는 우리는 이미 60의 중턱을 너머 가고 있다. 아직 기력이 남아 있는 한 아름다운 자연과 교감하는 어떤 산행들을 계속해야지. 향기로운 기품을 지니며 늙어가야지. 그렇지 친구들아 !
2012.5
어떤 산행(9)
온 하늘을 찾아보아도 구름 한 점 없는 뜨거운 날씨는 오늘의 산행을 암시하였다. 한동안 청계산을 찾지 않았던 탓이어서인지 만나기로 한 양재역 7번 출구는 11번으로 바뀌었다. 다행이 그가 먼저 확인전화를 걸어와서 연락이 되었다. 하마터면 쓸데없는 고생을 할 뻔하였다. 출발은 네 명으로 단출하였다.
옛골 종점에서 이수봉 쪽으로 올라갔다. 역시 쉽지가 않았다. 1994년 여름 은행직원의 안내로 처음 매봉을 올라갔을 때의 힘들었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 후 이런 기회와 저런 이유로 편하게 찾았던 조강지처와 같은 산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날씨 탓인지 처음 대하는 상대와도 같이 어려웠다.
걱정스러웠던 것은 그녀의 상기한 얼굴빛과 가방무게였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무게가 문득 생각났다. 그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는 푸짐한 산상의 오찬을 즐길 수 있었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 구레네 사람 시몬이 그랬듯이 잠시 그녀의 가방을 바꾸어 메었다. 내려올 때 까지 그러하지 못했던 것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흔히는 이수봉을 지나 맑은 날에는 인천 바다와 개성까지 보인다는 전망대 아래 아늑한 곳에서 짐을 풀고 식사를 했으나, 오늘은 중턱 나무그늘 아래에서 시작했다. 놀라운 것은 한 끼의 준비가 제왕의 식단이었다. 마치 가족과 나들이를 나선 어머니의 모습으로 이것저것 챙긴 선한 마음에 감사를 드릴 따름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가져준다는 진솔한 이치를 확인하였다. 너무 더워서인지 가져간 막걸리도 청량감이 떨어졌다.
오르막 내리막길에서 그가 부른 오늘의 노래는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와 ‘섬 집 아기’였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우리는 이 시를 감정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굳이 평론가가 현미경으로 바라보듯 쪼개어 난해한 ’배산임수‘의 배경과 시각과 청각의 미학으로 이론화하는 거추장스러움을 벗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 다음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달려옵니다.‘라는 ’섬 집 아기‘는 슬픈 노래이다. 민초들의 한과 힘없는 여인의 눈물이 그려져 있다. 우리 인생은 슬픈 것이지만 우리들 아이에게는 엄마와 누나가 영원한 고향으로 남아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을 그리워하는 것이 우리의 소박한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르만 헷세는 ’지성과 사랑‘(골드문트와 나르씨스)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지 않고 어떻게 죽을 수 있느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스로 잠이 든다‘는 우리들 아기는 17세기 서양아기들에 비하면 무척이나 행복한 셈이다. 그들은 아이를 포대기로 꽁꽁 싸서 옴짝달싹할 수 없게 만들어서 짐짝 취급을 하듯 여기저기로 끌고 다니기도 하고, 심지어는 벽걸이에 맥없이 매달아서 어른들의 관심에서 벗어날 때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는 최소한 아이들에게는 야만인이 아니었다.
내려오는 길은 계곡 쪽을 택했다. 경사가 급한 깔딱 고개를 김 권사는 청년처럼 날았다. 그녀의 날쌘 하산 모습을 보며 지금 시집을 가도 되겠다고 그는 감탄했다. 계곡은 말라서 바닥을 다 내어보였다. 큰일이다.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는 현상은 마지막 조짐이라고 성서에 기록되어있다. 한 줄기 소나기라도 퍼부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온몸을 비에 적셔도 시원할 것이다. 목이 말라서인지 오는 길에 막걸리 한 주전자를 시켜도 과하지 않았다. 애당초 여름산행은 무리다. 어디라도 차를 타고 가서 계곡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는 것이 좋지 않을까? 2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