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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완숙 골롬바>
s# 1 (지방)시장언저리(1791년)
-장날의 분주하고 떠들썩한 분위기다. 망건과 갓을 파는 점포에서 도포자락을 날리며 점잖게 망건을 고르는 유생이 보이고. 뭔가를 허겁지겁 입속에 넣으 며 삼키는 배고픈 사람, 땅에 떨어진 과일 하나를 주변 눈치를 보며 얼른 집 어 주머니에 넣는 거지아이...그 시절 사람들의 풍경이다.
-갑자기 흙먼지가 휙 날리며 말울음소리가 들리고, 파발마가 내빼듯 달려나간 다. 말이 달려간 쪽을 바라보던 사람들, 무슨 큰일이 났나하는 표정으로 고개 를 갸웃하다 다시 그들의 볼일을 보는데,
-황소울음소리가 들리며 사람들의 흥분된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인륜을 깬 놈들!", "신주를 불태웠다는구만" "신주를?" "부모를 두 번 죽인 놈 들여!" 거친 비난이 터져나온다. 이어 황소가 끄는 수레에 쑥대머리를 한 죄인 두 명이 피가 엉겨진 몰골을 한 채 지난다. 둘러선 포졸들이 사람드의 접근을 막는데, 흥분하고 경박해진 군중들 중에서 돌이 날아오고, 침을 뱉고 배추꼬 리를 씹던 사람은 먹다남은 걸 죄인을 향해 던진다.
-강완숙, 10살 된 딸 순희와 20 살이 된 청년 필주와 함께 지나다 그들을 지 켜본다. 필주가 돌을 집어 그들을 향해 던지자, 얼떨결에 제어하지 못한 완숙 은 뭔가를 말하려다, 딱히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걸 느낀다.(신앙의 불완전 한 상태)
필주 뭐야, 자기 어머니 신주를 불태우다니.
순희 (두려움에 완숙의 품안으로 숨는다)
완숙 어서 가자(하고 돌아서는데)
-말을 탄 이석이 나졸들을 통솔하며 완숙의 곁을 지난다. 짐을 진 두 나졸이 이석의 곁으로 가서 뭐라고 하자, 이석 고개를 끄덕인다
-두 사람 주막집의 들마루에 짐을 부리고 물을 얻어 마시고 한 그릇을 얻어 죄인들에게로 가져다 준다. 버들고리로 된 궤짝의 틈새로 책이 보인다.
<천주실의>다. 완숙, "천주라?"하며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고 책을 스윽 빼낸다.
-사람들, 죄인을 향한 욕설을 퍼붓느라 완숙의 행동에는 관심이 없다
-말 위에 앉은 이석, 주위를 둘러보다 완숙의 행동을 언뜻 본 것도 같고 아닌 듯도 하여 완숙을 불러세우려 입을 벌리지만, 잘못 본 듯도 하여 입을 다무는 이석...그러나 돌아가는 완숙과 두 자녀의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본다
s# 2 강완숙의 집/방안
-거리에서 본 것을 아버지 홍지영에게 전하는 필주.
-시모, 제사를 폐했다는 말에 박수를 친다. 서자출신 홍지영은 가문의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런 아들을 낳은 시모였기에 양반가의 특권인 제사를 향해 입을 삐죽이며 헐뜯는다.
시모 기일마다 사대봉사 지내주고 명절마다 차례상 차려 드리며 떵떵거리는 지체 높 은 분네들 하는 짓들 내 그러찮아도 눈에 가시였다. (지영을 흘끔 보며) 내 아 들이야말로 홍씨 가문의 씨를 받은 밤톨 같은 사내다. 그런데 어디 기제사를 지낼 수 있나, 시제사에 오라는 기별이 있나. 제사라는 것도 다 양반네들 지들 끼리 나 잘났네 하는 짓거리다
필주 할머니, 제사는 효의 표시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지영 (버럭)제사를 못지내는 중인 이하는 효를 모른다더냐?
시모 (박수를 치며)아버지 말씀 들었지
완숙 (순희와 나란히 앉아 이들을 보며)...
필주 아버지, 저희도 엄연히 양반가문의 자손이건만 왜 사당에 나아가 제사를 못모 십니까?
시모 (냅다)서자아니냐 서자. 서자는 말만 양반이지 종이나 마찬가지다. 다행히 우리 는 어른께서 넉넉히 논밭을 떼어주셔서 이렇게나마 사는거지
필주 (얼굴이 흐려진다)
시모 이놈아, 너도 번듯한 양반집 여자하고 결혼은 못한다.(지영과 완숙을 보며) 다 맞는 짝을 만나야 된다. 서출은 서출끼리 만나야 탈없이 사는데 어떻게 된 게
너는
완숙 어머니, 필주한테 너무 심하십니다.
지영 어머니 다 자기 분수에 맞게 사는 겁니다. 제가 그렇게 타고 났는데 누굴 원망 합니까? 그냥 한 세상 살다가면 그뿐
친구e 어 지영이 지영이 있나. 저 보갑골에 천렵해서 술이나 하세
지영 (일어난다)
완숙 서방님, 그 친구분들하곤 더 이상 관계치 않는 게 좋을듯합니다
지영 무슨 소리요?
완숙 아무리 서자로 태어나 과거도 못보고 울분을 달랠 길이 없다고 하나 술이 그 아 픔을 해결해주지 못합니다.
지영 서자들의 아픔을 해결해주는 게 이 천지간에 있으리라 생각하오(의관을 갖춘 다)
완숙 태어난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사람의 품격은 스스로 만들어 가는 법
시모 너도 양반가의 서녀라 얻어들은 소리가 있나보구나. 허나 그건 허울좋은 말잔 치다. 네 처지를 생각해보렴. 멀쩡한 처녀로서
완숙 (필주와 순희를 돌아보며)어머니, 아이들이 듣습니다
시모 (기어히 토해낸다)아들 가진 서자의 후처로 들어온 게 무슨 조화속이라드냐. 지영 (나선다)
필주 아버지 지금 어머니와 같이 이 얘기를 더 나누셔야
지영 입으로 나라의 법도를 바꿀 수 있다드냐(간다)
순희 (순희에게 기대며)어머니 싸우지 마세요
완숙e (마음이 착잡해진다)가엾은 것
시모 너는 남편이 출타하는데 일어서지도 않는다드냐?
완숙 또 친구들하고 술타령이겠지요.
필주 아버지는 너무 하세요
시모 아들이 돼서 아비의 아픔을 모른대서야 쯔즛!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 이 내
가슴엔 수심도 많다. 너는 모른다. 한 평생 첩소리 들으며 살아온 내 가슴에 쌓인 한 을 너는 몰라
-필주에게 완숙 눈짓을 하면 필주가 어린 순희를 데리고 나간다)
완숙 어머니(다가 앉으며, 술을 한잔 따라 들어준다)어머니 마음을 제가 왜 모르겠 어요.
시모 네가 어찌 아냐?
완숙 어머니, 저도 서출 서녀입니다. 제 친정 어머니도 소실,측실로 일생을 손가락 질 받으며 사셨던 분입니다
-필주, 숨어서 완숙을 지켜본다
완숙 (시모의 손을 잡고)어머니, 저를 딸처럼 믿으셔도 됩니다. 저는 어머니를 보면 꼭 저의 친정어머니가 겪으셨을 아픔이 느껴집니다.
시모 진심이냐?
완숙 거짓일 리 있겠어요. 어머니, 서출 서녀에게도 하늘이 심어준 인의예지 네 가 지 양지를 받고 태어납니다. 밝고 맑은 양지가 있음으로 인간은 짐승과 달라지 는 거지, 적자 적손 서자 서손으로 태어나는 거와 무관하게 귀하고 중한 것입 니다
시모 너는 지혜로운 게 박씨전의 별당아씨 박씨부인을 보는듯하구나! 박씨부인은 그 총명으로 나라를 구했다더구나 너는 이 집안을 건사할만하구나.
필주 (숨어서 지켜보다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끼며 순희의 손을 잡고 나간다)
s#3 대궐/편전
-전주 감영으로부터 받은 계문으로 나라의 근간이 무너진듯 흥분에 빠진 조정
계문을 다 읽고 옆에 놓은 정조
-대사간이 아뢴다
대사간 저 권상연과 윤지충은 내력있는 집안의 유학자라는 이름을 지닌 자들입니다. 그 럼에도 요망한 학술을 주장하여 모친의 신부를 붙래우고 시신을 버리는 등 그 외람됨이 가증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삼강오륜을 범한 죄인들로서 하늘과 땅 사 이에 한 순간도 용납해서는 안되는 자들이옵니다.
채제공 세상을 현혹하고 백성을 속이는 듯하오나 이러한 일은 기근과 전염병이 돌고 정치가 문란해지면 늘 있어왔던 일이온지라 전하께서 엄히 다스리면 될듯하옵 니다
대사간 늘 있어온 것이라뇨? 좌상대감 이는 삼강오륜이 무너지는 표징이옵니다. 모르시
겠습니까?
채제공 지난 해 관동지방에서 귀신을 부린다며 술수를 부리던 무리도 있었으나 지금은 조용한 듯하고, 해서지방에서 부처가 나왔다고 떠들썩하던 미륵불 사건도 잠잠해 졌사옵니다. 분명 이들은 그들과는 다른 해괴한 무리이긴 하지만 신이 생각은 호 남의 도백에게 권상연 윤지충 두 적을 엄히 형문하여 실정을 알아내 법에 따라 처단할 것을 신칙하시면 되올듯 합니다.
상궁e 대왕대비마마 드셨사옵니다
정조 (편치 않지만)어서 모시거라
-사람들 조금씩 자리를 물려주고 임금도 일어나 맞는다
-정순왕후, 손에 두 권의 책을 들고 들어온다
정조 어인 일이시옵니까 마마
정순왕후 (가슴에 잠시 손을 대서 진정하고)주상,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공 맹을 읽은 유자가 어미의 신주를 불사르다니 만백성의 어른인 주상께서 밝히 다 스려야 할 줄 압니다. 좌상대감은 이 일을 어찌 생각하시오?
채제공 대왕대비마마, 이단이 폐해는 홍수나 맹수보다 더 심하다는 것을 신도 아옵니다 정조 어리석은 백성이 간악한 무리에 혹하여 저지른 일이고 지방에서 일어난 일이니 더 이상 번지지 않도록 엄히 다스리라는 교서를 내려보내시오
승지 분부대로 처리하겠사옵니다 전하
대사간 전하, 윤지충이란 자는 해남 윤씨로 다산 정약용과는 외사촌인 고로 이들 무리 는 친인척간에 그 교를 전하고 받아들인다 하오니 그 뿌리가 깊고 단단한듯 하 옵니다.
정조 대사간, 무슨 말을 그리 하시오. 이 일이 일파만파 퍼져서 조정에 큰 파란이 일 기를 바라는 거요? 진산에서 일어난 이 무지한 무리가 일으킨 일로 조정의 큰 신하들을 곤경에 빠트릴 셈이요?
대사간 전하 그것이 아니오라, 병이 깊어지기 전에 도려냄이
정조 (버르르)도려내다니 누굴 도려내자는 거요? 듣기 싫소!
대사간 신은 전하께 종사를 그르치는 일을 바로잡기를 권하는 대사간이옵니다. 이 일을 적당히 고하면 나라가 위태롭고 찬찬히 그 외람됨을 고하자면 제 일신상이 해되 는 것을 아옵기에
정조 그 입 다물라!
채제공 어허 전하 앞에서 감히 무슨 말을 하려는 거요
정순왕후 (정조의 눈치를 보다)주상, 이 할미 말을 들어보시오
정조 말씀하시지요
정순왕후 대사간의 말을 곡해하지 마세요. 대사간의 말이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의 신료 들을 곤경에 빠뜨리자는 것이 아닙니다(책을 정조에게 건네며)
이 책이야말로 남인중의 남인 대유학자이신 안정복 대감이 지은 <천학고>와 <천학문답>입니다. 이 할미는 아무도 들여봐주지 않는 뒷방 늙은이인지라 하 고 많은 시간에 서책을 벗삼아 지내느라 주상이나 신료들보다 먼저 읽었지요.
보시지요
정조 (서책을 펴보면)
정순왕후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야소교 무리는 야소의 상을 그려 놓고 제사를 지내는 게 그 교의 본령이라고 합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야소를 모시고 위하면서, 사 람들에게는 신주를 모시는 게, 아무 득이 없는 미신이라고 일컫고 제사를 폐 하라는 명을 내리니, 이것만 보더라도 이 교의 가르침이 거짓인줄 알것입니다 -모두 서책에 관심을 기울이며 넘겨서 훑어본다
정순왕후 (득의에 차서 ...)
s#4 완숙의 방
-술에 취한 지영, 옷매무새가 흩으러진 채, 완숙이 앉아서 서책을 보는 걸 지 켜보며 냉소를 보낸다.
완숙 취하셨어요
지영 취했소
완숙 언제까지 그런 친구들 하고 어울려 취해 지내 실 겁니까?
지영 그럼 내가 뭘 할 수 있겠소? 사서삼경을 읽어 과거를 보겠소? 길이 막혀 있는 데.
완숙 이 나라 정조대왕께서는 서얼출신을 안쓰러이 여기시고 그 재주를 아끼신다고 들었습니다.
지영 부인은 서책을 늘 곁에 두어서 그런지 듣는 것도 많은 것 같구료. 허나 그 반 대의 소리는 못듣나보구료. 이 나라는 정조대왕 혼자서 이끌어가는 게 아닙니 다. 양반입네들이 자기들 벼슬자리도 모자라 서로 싸우는 마당인데 우리 같은 서출한테 내줄 자리가 있겠소.
완숙 실제로 많은 서자들이 관직에 나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영 서출들은 소털같이 많은데, 임금의 총애를 입어 벼슬자리를 얻은 자는 소뿔처럼 적으니 그게 문제지요 그게
완숙 (냉혹하게)그렇다고 어린 아이들이 아비를 보고 자라는데 이렇게 사실 작정이십 니까?
지영 그럼 나보고 어쩌란 말이요?! 부인도 쓸데없는 짓 마시오. 여자가 더구나 서녀 로 태어난 주제에 과거라도 볼 셈이오?(책상을 뒤엎고 서책들을 집어던지다 끌 어 안고 나온다)
완숙 (놀라서 망연자실 보며)...
s#5 마당/부엌
-지영, 맨발로 책들을 끌어안고 달려나와 벌건 아궁이에 서책을 던져 넣는다.
-시모와 필주, 각자 떨어져 서서 그 광경을 본다. 어린 순희가 분위기에 질려 칭칭거린다
-완숙, 마루에 서서 가슴을 쓸어내리다, 부엌으로. 남편을 제어하며 아궁이에 서 <천주실의>를 꺼낸다. 아궁이에 팔뚝이 이글이글 탄다.
지영 당신도 나도 첩의 소생이라 상궤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오(자포자기). 서책이 중 하오, 당신 그 몸이 귀하오? (그까짓 서책 하나를 두고 요란스럽기는)
완숙 서방님은 서자로 태어난 것만 원망하며 글을 읽지 않아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책 속에는 세상에 보이지 않는, 감춰진 길이 있지요. 저는 그 길을 찾아 그 길을 갈 겁니다. 서방님처럼 살지는 않을겁니다.
-참혹해지는 두 사람. 필주가 찬물을 들고 와 완숙의 팔에 부어준다.
-완숙 방으로 들어가, 자신의 사주단자, 결혼예물 등을 들고 나와 아궁이에 던져 버린다
s# 6 낭떠러지
-백척간두에 선 강완숙. 치맛자락과 옷고름이 바람에 펄럭이는 게 아슬아슬하다
-한쪽 팔은 데인 상처로 천으로 칭칭 감았다
완숙e 천지신명 천주시여, 제게 목숨을 내어주시어 살 자리를 내신 건 무슨 뜻으로 그 리하신 것인지요? 왜 저를 첩의 소생 서녀로 태어나, 처녀로서 아들 가진 서자 의 후처로 보내셨습니까? ... 숨을 할딱이며 살고자 하는 이 목숨을 내신 듯이 무엇이옵니까? 알고 싶습니다. 이 세상 마음껏 살아보고 싶습니다. 차라리 죽 어 소멸되고 싶습니다(흐느낌 없이) 어찌 저에게는 어미만 있지, 모진 세상에 바람박이가 되어주시는 아버지는 저를 몰라라 하시는겁니까? 본부인은 뭐고 소실, 첩의 자리는 무엇이며, 적자로 태어나는 건 뭐고 서녀로 태어나 살 자리 를 갖지 못하는 건 무슨 까닭이옵니까? 이 세상은 무엇이고 사람은 무엇이옵니 까? 이 모진 세상은 당신이 뜻이 그러한 것입니까, 사람의 잘못입니까?
왜 사람은 죽어도 그 혼백은 남아 왜 떠도는지요?"
내가 사는 길은 한발을 내딛어야 되는 것입니까, 한 발 뒤로 물러나야 되는 것 이옵니까?"
-덜어질듯 말뜻 위태위태한데
-돌아보니 근처에 우람한 잘생긴 낙락장송 한 그루가 서 있다. 백척간두에 선 완숙처럼.
-완숙과 낙락장송이 마주본다.
-위태하게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큰나무가 되어 세상을 내려다보는 게 늙은 노승같다.
-완숙의 숨소리가 고르게 진정된다. 낙락장송이 보여주듯 죽음이 바로 발 아 래 놓인 경계에 서는 것이, 사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자각이 들며 평온해진다
s#7 홍필주의 방
-필주가 타다만 책들을 가위로 잘라내고 한지로 붙여가며 공들여 매만진다.
s# 8 강완숙의 방(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책들을 보고 완숙, 절로 미소가 배여나온다
남자e 지영이 지영이 날세 이존창
s# 9 지영의 방
-긴 여행을 한듯한 이존창이 지영과 앉아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는데
완숙이 식혜 두 그릇을 들고 들어온다.
-이존창 얼른 일어나 절할 태세를 갖추면, 완숙도 식혜를 놓고
둘이 맞절을 한다
완숙 어디 한양에라도 다녀오시는 길이십니까?
이존창 (싱글벙글)양근의 권대감댁을 찾아갔다 귀한 목숨을 주고라도 배우고픈 도를 듣 고 왔습니다.
지영 지난 번에 황해도 해주땅에서 미륵이 환생했다고 떠들썩하다 얼마전에 삼남지방 에서 또 무슨 교가 들고 나서서 사람을 홀리지 않았소?
이존창 (미소)이건 다르네. 양근이 권철신 대감이 청나라를 통해 구해온 서책들을 곰 꼼히 읽고 받아들인 교일세.
완숙 양근의 권철신 대감을 통해 들은 도리라면 여부가 있겠습니까? 귀한 도리를 서 방님과 제게도 들려주십시오.
지영 (마시고)이 사람은 유식한 여인네 여자선비일세. 둘이 얘기 나누시게(일어난다)
이존창 나원 참 사람도
지영 이 자리를 보게. 이 나라법에는 사촌부터 남녀의 유별이 있건만 여인네가 어디 라고. 남편손님한테 댓거리를 하나
완숙 귀한 도를 얻었다 하길래...
이존창 이보게 지영이 우리 가르침에선 남녀의 유별보다 남녀가 서로 한 가지로 귀하고 중한 거라네. 실학하시는 양반선비들도 그런 말씀을 더러 하시는 걸로 아네
지영 어허, 그리고 이보게 반쪽자리지만 나는 양반이네. 자네는 상민이고. 내가 자리 를 내주니 너무 하는 거 아닌가
완숙 그럼 저는(하며 남편의 불편한 마음을 읽고 나간다)
이존창 다치셨습니까?
s#10 문밖/거리
-필주에게 작은 음식보따리를 들려주는 완숙. 이존창은 조금 앞서 있고
이존창 같이 가시지요. 필주도 있고 하니 내외법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을겁니다. 저 뚝방 길을 가며 권대감 댁에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드립지요
완숙 네(따라 나선다)
s#11 뚝방길
-별이 쏟아지고 밤새가 우는 아름답고 포근한 밤길이다
이존창 성리학자들이 일생을 두고 공부하고 논하지만 그 근원과 끝을 알지 못하는 건 그 모든 것이 사람의 생각으로만 이루어진 유학이기에 그러합니다. 인간은 털 썩 세상에 던져진 존재입니다. 그러므로서 세상은 무엇이고 나는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지요. 이 몸에 마음을 담아 세상에 던진 그를 알아야만 인간은 자신이 무언지 어디서 왔는지 이 세상이 무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필주 어머니, 아저씨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완숙 그렇구나.
이존창 인간을 지어내 마음을 담은 이가 바로 천주이옵니다. 이 세상을 지은 이가 바 로 천주시지요.
완숙 아주버니, 우리 부부도 그렇고 필주와 여식 순희도 마찬가지.
저희는 이 공맹의 하늘 아래서는 사람답게 살 수 없는 서출들, 종이나 마찬가 지 신세입니다. 상민이라면 농사짓고 고기 잡으며 차라리 떳떳하겠습니다만. 양반도 아니고 상민도 아니고 종인 노비나 마찬가지지만 핏줄 한 쪽에 양반피 가 흐르니 아무거나 마음대로 하지도 못합니다. 매어놓은 짐승이요, 갇힌 목숨 입니다
이존창 천주님의 섭리는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이보시오 아주머니, 천주는 세상 이 버린 사람들을 더욱 아끼시어 그분의 뜻을 펴는 데 긴요히 쓰십니다 -그 말들이 하늘의 별처럼 가슴에 박히는 완숙과 필주
필주 아저씨, 이거 어머니가 만드신 백설기입니다. 가시다 시장하시면 어디 약수터 에 쉬시면서 드시고 가십시오
이존창 필주야 어른들 잘 모시고 지내거라. 도 보자꾸나.
필주 네 아저씨, 밤길 조심하십시오
완숙 아주버니, 공자님은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하셨고 부처님도 보 시중에 으뜸은 법보시라고 했습니다.
이존창 아주머니 우리 집안에 오셔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지영이야 이미 뜻이 굳은 어 른이니 어쩌겠습니까? 필주를 잘 부탁드립니다.
완숙 아주버니 말씀 듣다보니 숨이 트이고 마음이 훤해집니다
-인사하고 헤여지는 세 사람
-떠나가는 이존창, 돌아서 오는 필주와 완숙...영혼이 도약하는, 성숙해지는 밤 길이다.
완숙 필주야, 한양에 가면 서책도 더 많이 구해볼 수 있고 천주학모임도 있다더구나.
필주 저도 이 고향을 떠나고 싶습니다. 한양에 가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 고 싶어요. 내 출신을 아는 고향마을에서는 옴쭉달쭉 못하고 아버지처럼 일생 을 망칠 것만 같아서 불안합니다.
s#12 지영의 방/완숙의 방(낮)
-여자를 하나 데려와, 그녀가 따라주는 술을 마시는 지영.
-지영이, "노들강변의 봄버들, 휘이 늘어진 가지에다가 무정세월 한 허리를 칭 칭 동여서 매여나 볼까" 여자가 같이 다라 한다. "에헤요~"
완숙 (나갔다 들어오며 그 풍경을 보면)
지영 어쩌겠소. 나는 이 산에서 뻐꾹뻐국 하는데 부인은 저 산에서 뜸북뜸북하니 우 리가 부부라고 하겠소.(여자를 향해)뻐꾹뻐꾹
여자 뻑뻐꾹뻑국!
완숙 한 번 뿐인 인생, 서방님이 그리 사시겠다면 어쩌겠습니까? 부탁입니다. 여기 는 어머니가 사시고 아이들이 크는 집입니다. 나가서
지영 이보게 이런 성인군자를 모시고 살려니 내가 고달프지 않겠나.
여자 (버럭 메기는 소리를 지르며)날좀보소! 날좀보소!
s#13 서울행(산속)
-천주교도들이 포졸들의 추격을 피해 산속에서 달아나고 있다. 아이를 업은 순녀도 그 속에서 정신없이 달아나고
-어느 순간, 순녀의 등에는 아이는 업고 빈 포대기만 남는다.
-육모방망이와 오랏줄을 든 포졸들이 이석(=사도 바오로의 사울시절쯤)의 의 지휘를 받으며 달려간다
-등짐을 지고 보따리를 들기도 한 강완숙 일행, 멀찍이서 이들을 지켜본다
s#14 동장소
-황일광이 개를 끌고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조금 떨어져 양반들이 시회를 열고 있다.
-황일광도 잠시 천주학쟁이들과 포졸들을 지켜본다. 산속을 울리도록 짓어대 는 개소리
-개를 끄슬려 태우는 황일광
-자리를 옮겨 개고기에 술을 마시는 양반들. 그들의 시중을 드는 황일광
큼직한 고깃덩이를 하나 건져 먹고 또 하나 건져 양반들의 눈치를 보다 꿀꺽
-양반들이 지어내는 시에 토를 달아가며 웃어대는 황일광(먹고 살기가 편하 니까 별 씨알머리없는 소릴 다하는구나 흠. 얼씨구 뭣도 모르는 놈이! 등등)
-어디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귀를 기울이는 황일광
s#15 서울 강완숙의 집
-넓고 꽤 괜찮은 집이다. 강완숙이 경제적으로는 늘 부족함 없이 살았음을 보 여준다. 시모는 여기저기 다니며 들여다 보며...
-순녀가 누워서 묵주를 손에서 떼놓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소리없는 기도 를 올린다(아기가 무사히 살아주길). 포대기를 끌어안은 채
-완숙은 순녀를 친동생마냥 돌본다. 죽을 끓여 가져다 주나 먹지 않고 눈만 꿈먹꿈먹. 너무 큰 충격으로 말도 안하고 조금 아둔해졌다. 말도 안하고
s#16 순녀의 방(밤)
-순녀, 혼자 일어나 젖이 불어 가슴이 축축해지는 걸 보며, 아들을 부르며 운 다.
순녀 아가?! 어딨니? 내 아들, 어미 여기 있다. 아들아(가슴이 타들어가는듯 붙잡고, 실신해 가며 아들을 부른다)
완숙 (잠옷바람으로 건너온다)새댁, 진정해. 내일 다시 나가서 찾아보자구 음 새댁
순녀 우리 아가는 안죽어요. 제가 제 목숨으로 우리 아기를 구할거예요. 돌도 안지났어요. 우리 얘기
완숙 (잠자리로 이끌며 손에서 묵주를 받아 놓으려는데, 거칠게 반항하며 손에 꼭 쥔다)
-순녀의 젖가슴이 더 젖어간다
s#17 강완숙의 집(아침)
-외출준비를 하고 나오는 완숙과 순녀 그리고 필주
s#18 김흥년의 움막
-거적떼기로 덮은 움막이 볼성사납게 버티고 있다. 세 사람이나오자, 왠 남자가 빤히 쳐다본다. 긴 담뱃대를 물고, 병색이 짙은 몰골을 하고서.
-기침을 해대는 남자, 돌아보지도 않고 가는 필주와 완숙
s#19 최필공의 약방
-대를 이어 약방을 해온 고색창연한 느낌이 도는 집이다. 약재창고와 환자들이 누워 있는 곳 등이 허름하지만 규모와 연륜이 느껴진다
-순녀가 누워 있고 완숙이 지켜본다. 최필공 진맥을 마치고는
최필공 (한지에 약재를 쓰며)심신이 허한 관계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마음이 불안한데 불면증이 오고 숨이 가빠졌어요(하며 순녀를 본다. 응답이 없자 완숙을 본다)
완숙 알맞은 보약좀 처방하여 주세요
최필공 귀비탕을 쓰시지요. 당귀, 용안육, 산조인, 인삼으로 기운을 볻돋아줍니다
완숙 (한 발 다가 앉는다)
최필공 (한 발 뒤로 물러나 당혹스럽게 보면)
완숙 붓좀 빌려주십시오
최필공 (종이와 붓을 내준다)
완숙 (한자로 "천주")를 쓴다
최필공 (놀라서 보면)
완숙 듣는 귀가 많아서
최필공 많이 들어야 되는 이름이고 크게 외쳐야 되는 이름이지요.(하며 종이에 모임장 소와 일시를 써준다)
완숙 그럼(일어선다)
최필공 (약재목록을 내주려고 찾으나 아무도 없다)
완숙 (필주를 보며)필주야 이 약방문을 약재창고에 주고 오너라
필주 (약방문을 받으며)네 어머니(나간다)
완숙 스무 살이 됐건만 아직 이렇다할 직을 갖지 못하였으니 의원님이 저 아이를 의 원으로 키워보시면 어떨런지요. 의원직이야말로 하늘을 받드는 가장 지엄한 직 분인지 모르겠습니다
최필공 평양감사도 저 하기 싫으면 못하는 법인데
완숙 (미소)그럼 부탁드립니다
s#20 움막/강완숙의 집
-흥년남편이 흘끔흘끔보며
흥년남편 이사 오셨수?
완숙 (같잖아서 대답도 안한다)
흥년남편 (흘끔흘끔)담배가 떨어져서 빈 걸 빨고 있지 않수(콜록콜록)
완숙 (가면)
흥년남편 돈좀 꿔주슈. 속이 허한 게 어디 가서 선지국 한 그릇만 먹었음 소원이 없겟네. 남편은 없수?
완숙 (돈을 한 푼 던져 준다)
흥년남편 사는 게 실팍하니 넉넉해 보이우. 저 여자는 누구요?
완숙 상관치 마시요(순녀를 데리고 들어온다)
흥년남편 (돈을 들고 간다. 한잔 하러)
s#21 밤길
-햔양의 밤 거리를 주위를 둘러봐가며 조심스럽게 걸어가는 강완숙. 손에 등불을 들고 있다
-다른 거리, 등불 든 일행과 만나는 강완숙
s#22 최인길의 집
-정약종이 주도하는 미사가 집전중이다. 뭔가 어설프고 빠진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해 뭔가를 희구하는 사람들...
-여자들, 꼬질꼬질한 머릿수건을 쓰고 뒤편에 앉고 남자들은 앞쪽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후기, 새로운 (평등)사상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상징하는듯 창밖에 서 매달리며 듣는 무리가 있다. 여종들 및 허름한 하층민들이 그들을 구원해 줄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천주학에 마음을 기대여 오는 모습이다
정약종 (<성경직해>를 읽는다.)사람들을 경계하시오. 그들이 여러분을 법정으로 넘길 것이요. 그들의 법정에서 여러분에게 채찍질할 겁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을 넘 겨 줄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말할까 걱정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그 시간에 일러주실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이 말하는 게 아니라 아버 지의 영이 여러분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주어 죽 게 하고, 아비도 자식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이야말 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성호를 긋고, 강론을 한다)
정약종 여러분 여기에 아들 낳기를 빌려고 오셨습니까? 아니면 당주께서 벼슬길이 막 히어 벼슬길이 뚫리길 소원하여 오셨나요? 굶주림에 지쳐서 밥을 얻어먹을까 하여 오셨습니까?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출세하여 벼슬길에 나가서 부모의 끼 니를 봉양하는 하며 한 평생을 살아간다면, 이 세상도 과히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벼슬길이 곧 유배길이요, 목숨을 내놔야 되는 길이 되기도 합니다. 아 들을 낳고자 하나 번번히 딸을 낳고 우는 여인네들이 많습니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기도 어렵지만 설령 그걸 다 누리며 산대도 여기엔 커다란 흠이 있습니다. 봄날 꾸는 꿈처럼 한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일장춘몽, 이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여러분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 천주님이 이 고 단한 삶을 우리에게 주신 게 아닙니다. 우리 삶을 고단하게 만든 이는 다로 있 습니다.(하고는 한지에 쓴 십이자 흉언을 펼쳐 보인다. <국유대구군야, 가유대 구부야>, 몇 사람 글을 해석한 듯 우려의 얼굴이 되고 많은 이는 고개를 갸웃 한다)
정약종 국유대구군야요 가유대구부야라. 나라에 큰 원수가 있으니 바로 임금이요. 가 정 안에 큰 원수가 있으니 바로 아버지라.
-사람들 술렁술렁
정약종 놀라지 마십시오. 공자님도 말씀하시길, 백성은 적은 것을 탓하는 게 아니라 고르지 못함을 원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을 고르게 기쁘고 소박하게 살아 가는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나라의 임금을 필두로 한 양반무리이고 한 가정 안에서는 아비가 유약한 아내와 자식들을 억압합니다. 천주학은 죽어 천당을
가는 길이기도 하지만 이 세상을 천당으로 만들어가는 힘입니다. 여러분, 여 러분은 모두가 귀한 천주의 자녀들입니다. 만물을 내신 분이 천주시니 그 분 은 여러분의 모친이기도 합니다.
황일광 (창틈으로 들여다보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s#23 대문가
-황사영이 신자들을 배웅한다.
-한 마디씩 강론에 토를 달며 나오는 사람들
신자1 (자신이 턱을 치며)아직도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는구만요
황사영 저의 스승님은 주자가례에 의한 예학을 통해서 유지되는 조선왕조의 통치질서 와 가정윤리를 모두 거부하십니다.(작은 아이가 지나자 그 아이를 품어 안으 며)나라의 임금님이나 이 아이나 모두가 천주의 자녀로서 평등하다고 하십니 다. 천주학의 세상은 이런 것입니다.
신자2 (배가 불룩한 여신자)그려도 여자하고 남자야 하늘과 땅이지요. 누가 딸을 낳 고 싶어하남요
황사영 예수님을 낳은 성모마리아도 딸이었고 여자였습니다
문영인 (조용히 지나며 고개로만 인사한다)
s#24 최인길의 방
-정약종과 황사영 최인길 최필공을 중심으로 사목회의가 진행중이다. 조금 떨어 져 강완숙과 필주가 귀기울여 듣는다.
황사영 스승님이 만천 이승훈 베드로신부님을 통해 신부님 직분을 받으시어 미사를 집 전하시지만, 교리책을 꼼꼼히 살펴보니 신부는 독신으로 혼인하지 않은 사람이 어야 한다는 구절이 있고, 주교로부터 신품성사를 받아야 제단에 오를 수 잇다 하였으니, 지금 우리가 행하는 미사는 교리에서 벗어난 것이옵니다
정약종 (눈을 감고 끄덕이며)나도 그것을 염려하고 있네. 이대로 밀고 나가면 천주께 죄를 짓는 일이야.
최필공 그럼 어서 신부님을 모셔와야지요
황사영 그럴려면 북경의 천주당에 계신 주교님께 다녀와야 하는데, 사사로이 국경을 넘 는 일이 국법으로 금하는 거라
최인길 국법보다 중요한 게 천주의 법 우리 가슴에 심어진 마음법이라 하셨으니 저희가 따라야 하는 건 천주이 법이라고 사려됩니다. 그걸 믿으시기에 어른께서도 오늘 국유대구군야요 가유대구부야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정약종 나는 이미 각오하고 나선 몸, 어린 자네들을 보면 자꾸 마음이 약해지네
강완숙 한 말씀 드립니다.
-사람들 모두 강완숙을 향하는데
강완숙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학을 하기로 마음이 굳어진 이상, 저도 그렇고 여기 모인 분들은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입니다. 여기서 머뭇거린다면 그도 위험하 고 어리석은 일, 미사를 드리고 고백성사를 보려면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님을 모셔야 하는 건 우리 교의 필연인 것 같습니다. 이 자리에서 신부님을 모시기 위해 북경의 천주당에 가기로 정해진다면, 돌아보며 무람되지 않다면 그 소용되 는 비용은 제가 마련할까 합니다
-사람들 놀라고 반갑고 하여 당황스러운데...
정약종 남정네인 우리도 왈가왈부 말잔치만 벌이는데, 어느 댁 아씨인지 이렇게 저희를 이끌어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하며, 앉은 자리에서 절하듯 인사를 건넨다)
강완숙 (맞절하듯 인사를 받는다. 고풍스런 인사나누기다)
필주e (가만히 완숙의 결단에 가슴이 섬칫함을 느낀다)어머닌 보통 분이 아니시구나. 어찌 이리 담력이 사내대장부를 넘어서실 수 있단 말인가...
-이때, 남장을 한 윤점혜를 데리고 윤유일이 들어온다
윤유일 여흥에서 오는 길이라 늦었습니다. 사촌 여동생 윤점혜입니다.
윤점혜 (곱게 절한다)
-사람들, 그 절에 맞게 곱게 맞절하며...
윤유일 혼사가 결정되었건만, 동생이 데레사 성녀의 전기를 읽고부터는 동정녀로 살고 픈 소망을 품고 있어 저히 집으로 도망을 하였기에 오늘 동행을 했습니다만
정약종 산사의 여승이 되지 않는한 이 조선 땅에서는 어찌 여자가 혼인하지 않고 살 길이 있겠소?
최필공 사내인 이 놈도 혼자 살기가 고달픈데 어찌 여린 처자가
윤점혜 천주는 어디든 계시는 법, 데레사 성녀가 사시는 그 땅에서 동정녀로 사는 길 을 주셨는데, 조선 땅에서는 안된단 법이 있겠습니까?
강완숙 실은 제가 일손이 하나 필요한 참이었는데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지요?
윤점혜 (보며 끄덕인다)
s#25 경모궁 -사도세자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정조대왕이 향을 피우고 삼배한다. 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아버지 사도세 자를 생각하면 저절로 눈물이 흐른다)
정조 (밖으로 나오며)과인이 오늘 답답하니 박제가의 사가를 들려서 가겠다. 채비하 라.
-금위영의 대장과 나졸들이 정조를 모신다
s#26 박제가의 집/방안
-담박한,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집이다. 마당에 잘 자란 소나무 한 그루 가 보인다. 정조대왕이 그 나무를 만지며
정조 조선사람은 소나무를 보면 그 조상을 만난듯 소회가 남다르구나.
박제가 마침 경모궁을 들려오시는 길이라 들었사옵니다. 망극하옵니다
정조 그대에게도 아들이 있고 부친이 있을 터.
박제가 전하, 전하의 아픔 앞에서 감히 드리기 어려운 말씀이오나 저희 서얼들에겐 사 실 부친을 일컫기엔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정조 서얼허통절목으로 서얼들이 관직에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놓고 있긴 하다만
그건 빙산이 일각이 누리는 혜택일뿐. 과인도 마음을 쓰고는 있다.(끄덕이고)
어떠냐? 과인이 등극한 이후로 닫히고 굳은 제도를 개혁하고 문호를 열었다.
허나, 이런 일들이 곤궁한 백성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차를 끓여 올려드리며
박제가 전하, 이 나라 팔도의 백성중에 하루 세 끼 끼니를 다 먹는 백성은 극히 드뭅니 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가난이옵니다. 그리고 그 가난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가 난에서 벗어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백성들의 어린 마음입니다
정조 어찌해야 과인이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겠느냐?
박제가 전하, 청나라와 문물거래를 트십시오. 동지사나 사행사를 따라 책문에서 열리 는 개시에서 얻어지는 이문만으론 너무 약소합니다. 이 나라의 인삼과 소금등 을 더 많이 청나라의 선진문물과 거래하게 하시어 이문을 높이셔야 하옵니다. 여기에 더하여 그들의 수레나 벽돌 굽는 법을 배워와 백성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시옵소서.
정조 과인도 그리 생각하나, 허다한 선비들이 청나라 오랑캐의 소산을 업신여기니 그 것이 문제가 아니드냐.
박제가 전하, 아뢰옵기 정되긴 하옵니다만, 명나라 신종조에는 이마두라는 서학의 승려 가 흠천감의 머리가 되어 책력을 만들었고 우리도 그 책력을 쓰고 있사옵니다.
정조 그렇구나
박제가 조선도 북경에 세워진 천주당의 서학 승려 중 한 병을 청하여 관상감을 맡기고 그를 통하여 서학을 배워봄도
정조 서학, 그 사학무리들은 제사를 폐하지 않았느냐. 상례와 제례는 예학의 근본
강상의 근본이거늘, 그대도 너무 많이 멀리 치우치지 말거라. 그대를 잃을까 염려되는구나
박제가 전하, 그들의 물건들이 기이하고 또 물리에 맞는 걸 아신다면 그 물건들을 만 들어낸 그들의 정신인 서학도 청해서 배워야 할 것이라고 사려되옵니다
정조 (어두운 얼굴이 된다)그들이 제사를 폐한 걸 그대도 알지 않느냐
박제가 하오나, 제사를 폐한 건 근간의 일이옵고 그 전엔 그러하지 않은듯하옵니다
서학의 무리도 여러 파벌이 있어 합치를 이루지 못한 탓이라고 들었습니다.
정조 음(차를 들며)... 그대는 노론의 선비들과 교유하는 줄 알고 있거늘 남인의 시 파들이 주장하는 서학을 거들다니...음 그대의 생각에는 진심이 담긴 건 사실 이겠구나
박제가 전하의 어진 마음이 살펴주시는 은혜 갚을 길이 없사옵니다
s#27 강완숙의 집 마당/방안
-윤점혜와 문영인, 순녀와 정임 그리고 복점...윤점혜가 이들을 이끈다
-시모가 완숙이 보던 책을 가져다, 넘겨본다. 거꾸로... 이제 시모는 조금씩 며느리가 추구하는 가치 쪽으로 기울어진다.
-우물가에서 정임이 배추와 파를 다듬고, 복점이 절구통에서 고추를 찧고 있 다. 정임, 더러워지는 손을 불만스레 보다 건너다 보면, 윤점혜와 문영인 서책 을 등사하고 있다.
-윤점혜, 등사된 책을 들고 가며
윤점혜 아씨 교리책이 다 되었어요
s#28 방안
-넓다란 방안에 죽 둘러앉아 교리를 배운다
복점 아씨, 지는 검은 것은 글자요, 허연 것은 종이라. 뭐가뭔지 통 모르것지만 글자 모양새는 하나같이 이쁘장한 게 좋네요 호호
완숙 영인이 동생이 궁중에서 배운 필체라 어여쁘구나
문영인 (빙그레 웃고)
윤점혜 저희가 소설책을 빌어다 등사하여 거리에 나가 팔아볼까 합니다. 생계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영인을 보며)동생이 등사하면 제가 나가서 팔아볼까 해요.
완숙 그도 좋은 일 같구나(하곤 강한 첫박을 치며 천주공경가를 부른다)
(사이)
완숙 어와세상 벗님네야 이내말씀 들어보소
여성공동체 (받아서)집안에는 어른있고 나라에는 임금있네
완숙 (이어서)내몸에는 영혼있고 하늘에는 천주있네
여성공동체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는 충성하네
완숙 삼강오륜 지켜가자 천주공경 으뜸일세
여성공동체 이내몸은 죽어져도 영혼남아 무궁하리
완숙 인륜도덕 천주공경 영혼불멸 모르면은
여성공동체 살아서는 목석이요 죽어서는 지옥이라
완숙 아비없는 자식봤나 양지없는 음지있나
여성공동체 임금용안 못뵈었다 나라백성 아니런가
완숙 천당지옥 가보았나 세상사람 시비마소
여성공동체 있는천당 모른선비 천당없다 어이아노
완숙 시비마소 천주공경 믿어보고 깨달으면
여성공동체 영원무궁 영광일세 영원무궁 영광일세
-순녀의 가슴이 젖이 불어 축축해진다. 순녀 벌떡 일어나, "아가 , 내 아들아!" 를 외치며 뛰어 나간다. 이어 윤점혜가 맨발로 쫓아나간다... .
-다른 여성공동체 사람들, 성호를 그으며 중얼중얼 순녀와 아이를 위해 기도한 다.
s#29 산속
-순녀가 뛰어가며 아이를 부른다.(사이) 윤점혜가 "동생", "순녀, 어딨어?" "동생"을 불러가며 찾는다.
-순녀의 발에서 피가 나오고, 옷이 다 흐트러졌다.
(사이)
-윤점혜의 발과 옷도 피가 나고 찢어졌다
-두 명의 험상궂은 남자들이 순녀를 낚아채 입을 막는다.
-윤점혜가 부르는 소리만 산속을 맴돈다.
s#30 강완숙의 집앞/움막(밤)
-흐트러진 몸으로 지쳐서 흐느끼며 돌아오는 윤점혜, 등불을 들고 기다리는 완숙. 혼자 돌아오는 걸 확인하며 가슴을 진정시키는 완숙(순녀가 잘못되었구 나)
-완숙과 점혜 얼싸안고 말없이 흐느낀다
-움막 앞에서 긴 담뱃대를 물고 쪼그려 앉은 김흥년의 남편이 기침을 해대 며 아내 김흥년이 잔치집에서 먹을 걸 얻어오길 기다리는 중이다
흥년남편e 저것들이 사람여 여우여!? 왠 여편네들이 팥바구리 쥐 들락거리든 허는거여
수상혀. 여염집은 아녀. 서방놈들은 한 놈도 안보이고. 왼통 기집들만 드나드는 구만.
흥년남편 아이구 이틀동안 아무것도 안먹었더니 속도 쓰리고 눈도 돌아가네. 국밥좀 사 먹게 돈좀(하며 숨넘어가듯 기침한다)
완숙 (버럭)댁은 인두껍을 둘러쓴 짐승이오? 사람의 처지를 봐가며 돈이고 밥이고 말 을 하시오.
흥년남편 초상이라도 났수?(울어대게)
점혜 아씨, 상대하지 말고 들어가요.
흥년남편 (멀거니 보다, 빈담뱃대만 빨아댄다)...(뱃속에서 꼬르륵)...(완숙의 대문을 밀고 들어간다)
S#31 완숙의 집 마당/부엌
-복점으로부터 떡 한 덩어리를 받고 돈도 한 푼 얻는 흥년남편
-방에서 물수건을 들고 나오다, 이를 보는 완숙
완숙 뭘 주는 것이요?
복점 백설기 남은 거 한 덩어리여유(많이 안줬어요)
완숙 (남자에게 다가서며)이보시오, 배가 고파도 염치라는 게 있지 아까 대문 밖에서 도 말하지 않았소. 사람이면 사람답게 염치를 아시오. 더구나 사내가(흘겨보고 돌아선다)
-이때 김흥년이 지나다 대문 틈으로 이를 보고 득달같이 달려든다. 남편의 손에 서 백설기를 뺏고 자신이 가져온 음식을 건네준다.
-한편으로 가서 잡채가락을 손가락으로 집어먹는 남자
-공동체 여자들이 모두 나와서 본다
김흥년 (백설기를 들이대며)얻어먹는 거리라도 남자는 남자, 어디 기집년이 떡덩어리 하 나로 남의 서방한테 욕질여! 이 년아 고깃점이라도 먹여줬으면 목이라도 비틀겠 다.
복점 이보셔 말이 지나쳐 이 년이라니
김흥년 보아하니 돈이나 있지 지체는 별 거 없는 년이구만. 내가 장안의 안다녀본 집이 없어. 혼인집, 상가집 다 다니며 설거지해주고 얻어먹는다. 얻어먹어도 일해주고 얻어먹어. 어디서 남의 하늘 같은 서방을 우세시켜. 같잖은 떡덩어리 하나 가지 고.
-흥년남편, 허겁지겁 먹느라 잡채가닥이 볼에 붙었다.
-두 사람을 보며, 혀를 차는 완숙
완숙 돌아가시오. 댁은 떳떳하게 사는지 모르겠으나 댁의 서방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소.
복점 아씨 저 사람이(남자 가리키며) 배가 고파서 우리 형편 생각지 않고 실수를 한 것 같소. 그만 덮어주시오
완숙 배고프다고 사람 상한 집에 와서 밥 달라고 해요?
-윤점혜와 문영인 등이 고개를 끄덕이며 완숙을 지지하는데
복점 초상이 나도 먹어야 송장을 치우는 법이라우(하며 부엌으로)
흥년남편 (먹다 캑캑캑 죽을듯이 기침하며)
김흥년 (분해서 떡덩이를 발로 으깨고 침을 뱉으며 남편을 데리고 떠난다)
시모 (바가지에 소금을 들고 와 뿌린다)
s#32 강완숙의 대문앞(밤)
-등불을 들고 나오는 강완숙과 윤점혜 문영인(집회에 나가는 중이다)
-갑자기 터지는 김흥년의 절규!
s#33 김흥년의 움막
-강완숙의 등불 아래서 남자가 죽어 넘어진 게 보인다. 피를 토했고 사지 가 널브러져 험악하다.
-약봉지를 들고 절규하는
김흥년 약이나 먹고 죽지. 아파도 약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가다니. 약 먹고 죽어
-윤점혜와 문영인 피하듯 뒤로 물러나며...
김흥년 토사곽란인지 초저녁부터 토하고 쏟고 하더니, 여보 일어나서 약 먹어!
S#34 강완숙의 회상
-가난하여 음식에 탐했던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입가에 국수가닥이 붙 었던 모습. 비굴하게 돈을 꿔달라던 모습
S#35 동장소(현실)
-강완숙, 시신을 어루만지며 눈을 감겨주고 피를 자신의 치마로 닦아준다
강완숙e 내가 죽였어. 내가. 그까짓 떡 한 덩이에 내 울화를 다 퍼부었으니 체하고 얹 히지, 순하게 삭혀졌을라고...내가 죄인이구나 천하에 내가 죄인이야
-완숙, 널브러진 시신을 묶어놓으려 끈을 찾으나 없다. 자신의 속치마를 찢 어 시신을 가지런히 묶어준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든다. 눈시울을 적시고, 코끝이 찡해진 여자 하나가 돌아 서서 앞치마에 코를 행! 풀고...완숙의 모습에 혀를 내두르는 아낙네들...
동네여자1 (나즉이)"치마만 둘렀지, 여자가 아녀. 장부여 장부!"
-남자 하나가 다 떨어진 멍석 하나를 들어다 밀어준다
김흥년 (멍석을 내치며)내가 몸을 팔아서라도 관을 사서 묻어줄거요. 관도 없이 보내 진 않을거고만요.
-완숙, 윤점혜를 불러 귀에 대고 소곤소곤. 윤점혜가 고개를 끄덕이고 문영인 을 데리고 나간다
s#36 동장소
-복점과 정임이 팥죽과 콩나물국이 든 동이를 이고 와서 내려놓는다.
-이어 윤점혜와 문영인이 관을 떼매고 들어온다.
-강완숙의 옷가지에 시신의 피가 묻어있다. 김흥년, 완숙의 품에 기대며 흐느 낀다. 가만히 다독여주는 완숙...
-시신은 하얀 천으로 덮여 있고...
* 이 극본을 준비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극본 속에 강완숙 골롬바 성녀의 입교동기, 여성공동체형성과정이 잘 드러났는지 조언좀 주세요
부탁해요^^
(극본은 초고이고 아직 반만 완성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