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문화재 제81호 진도다시래기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 강준섭 선생님이 2021년 9월 24일 (금요일) 저녁 영면(永眠) 하셨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은 1933년 전남 진도군 임회면 석교리 대대로 무업(巫業)을 이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당골네 자식”라는 소리가 싫어 초등학교를 마친 열세 살에 무명 세필을 훔쳐 집을 떠나 여수 권번에서 소리를 배우다, 돈이 떨어져 공연을 미끼로 물건을 파는 ‘데끼야’ 유랑단체를 따라갔다. 여기서 판소리 다섯 바탕을 모두 잘하는 전남 곡성 출신 김준섭(1911생)을 만나 소리와 연기를 배웠다. 훗날 ‘진도 다시래기’에서 고인의 최고 장기가 된 심봉사 연기와 여러 배역을 소화해 내는 자산(資産)이 되었다. 1948년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자 진도로 돌아와 굿을 하다, 6·25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인 1951년 3월 입대하여 11월 고성 전투에서 두 손을 다쳐 5급 상이용사 제대를 했다. 1952년 열아홉에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약을 파는 ‘딸달이 유랑극단’을 따라 진도를 떠 이들에게 소리를 배우며 극단을 따라 유랑 했다. 휴전 후 폐허가 복구되며 공장이 세워지고 약, 화장품 등 생활용품이 쏟아져 나오자 제품 홍보를 위해 ‘딸달이 유랑극단’은 호황을 만나 ‘오통무대’라 불리는 4,50명 정도의 거대 조직이 되었다. 조선시대 옷을 입고 출연하여 서민들을 파고들며 ‘이조극’이라 불리는 <흥부전/춘향전/심청전/장화홍련전> 4대 명작을 보여주었다. 소리, 악기, 모두를 잘하는 고인의 인기는 높아갔고 특히 심봉사 역으로 흥행사들에게 선금 받는 연기자로 거듭났다. 서른한 살에 부인 ‘김애선’님을 만나 혼인하고 가시버시 광대로 짝이 되어 보여주던 ‘뺑파막’은 최고의 앙상블로 인기를 누리며 여러 단체 무대에 초대 되었다. 1970년 이후 쇠락하는 여성국극단을 대신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백구 여성농악단’에서 신입단원에게 장단과 연기를 가르치며 단막극에는 부부가 출연하여 인기를 누렸다. 여성농악단 유랑이 퇴보하는 1979년 부산에 머물 때 토종 광대극 ‘진도다시래기’를 복원하자는 전보를 받고 진도에 돌아와 머물며 자신의 모든 재능을 쏟아 주축이 되었다. 부단한 노력과 능력을 인정받아 ‘거사’역으로 1985년 국가문화재 제81호 ‘진도다시래기’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초상이 나면 발인 전날 밤 상가마당에서 슬픔에 빠진 상주와 유족들의 허허롭고 눅눅한 마음을 위로하고, 망자의 황천길 안녕을 빌어주기 위한 신청(神廳) 재비(굿쟁이)들과 상두꾼들이 함께 노는 해학적 풍자 상여놀이판이 ‘진도다시래기’이다. 여럿이 다 함께 즐긴다는 ‘다시락多侍樂’ 다시 낳기, 다시 생산하기, 다시 마음먹기, 등 여러 가지로 풀이하지만 일반적으로 한 생명이 가고 ‘다시 태어나기’로 이야기한다. 고인은 타고난 광대이며 이시대의 마지막 유랑광대이다. 고향 진도로 돌아와 생활 하지 않았다면 넘쳐나는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표 나지 않는 예술인으로 조용히 세상을 하직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창 잘나가던 사십 중반나이에 온갖 유혹과 부귀를 버리고 귀향하여 오직 ‘진도다시래기’를 보존하고 지켜내기 위해 헌신하시다 떠나시니 더욱더 숭고 하다. 우리전통 민속예술이 고인과 같은 분들의 희생과 사랑으로 명맥을 이어가며 우리 생활 속에 함께 한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고인의 아름다운 뜻에 늘 감사하며 명복을 빕시다. 지금까지는 ‘강준섭’이라는 이름을 모르고 지내 왔더라도 이 시간 이후부터는 단 한사람이라도 더 ‘강준섭과 진도다시래기‘ 를 기억하자고 부탁드립니다. 고인도 극락에서 세상이 기억해 주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행복을 누리실 것입니다. 고인의 신에게 합장하여 명복 삼배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