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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의 사명
왕하 9:6-10
6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소년이 그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니
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
8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9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찌라
10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저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왕하 9: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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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많은 일을 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이런 생각에 잠겨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 계시고 무얼 하시고,
날 안 도와준단 말인가?
성경에서 나열하고 있는
그 숱한 하나님의 많은 일을
지금도 하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입에서는
늘 이렇게 불평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딱 나에게 뭔가 해준 것이 있느냐는
식으로 따지지요.
그러면 왜 우리들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눈치를 못 채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일의 기준이
우리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선입감하고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모든 일의 기준은
아름답고 보기에 심히 좋았고
흠도 티도 없었던 그 깨끗한 천지를 창조하신
그 때 그 상태를 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우리 인간들이 가지는 평소의 버릇은
이렇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대충해서 살더라도
그냥 내버려두시기 바랍니다.
못 본 척해 주시고
단지 우리가 필요할 때만
우리 소원이나 들어주세요" 라는 식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세상을 보는 관점도
평소 생활 방식대로
어물쩍 그냥 넘어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단호합니다.
"나는 이런 세상을 만든 적이 없다
그리고 죽어 가는 인간을 만든 적이 없고
80살만 살다가 죽고
90살만 살다가 죽는
이런 인간을 이 하나님은 만든 적이 없다"
라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만든 것은
안 죽는 사람을 만들었지
죽어 가는 사람을 만든
그러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교회가 왜 있습니까?
교회가 사람들을 모으다가
그저 이 땅에서만 잘먹고,
오래 누리고 살게 하려고
교회가 있습니까?
몸이 안 아프기 위해서 있습니까?
몸이 안 아프려면 병원에 가야 됩니다.
병원에 가면 의사가 많이 있습니다.
법적으로 사기 안 당하고 소송에 이기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교회가 그런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까?
그런 것은 법원에 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왜 세우시고
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뛰어 내려왔습니까?
그 이유는 지금 현재 너희들이 속해 있는 이 세상이 너희 인간들이 생각해봐도
아무래도 불편하고
하나님이 생각해도
도저히 올바른 세상이 아니라 말입니다.
비정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너도 비정상 나도 비정상이고,
모두가 다 비정상 인간들이
이 비정상적인 세계에 사니까,
으레 인간이란 살다보면
늙게 마련이고
늙다보면 죽게 마련이고
장례 치르기 마련이고
이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으레 그러는가 보다 하고,
그만 진리와 영생에 대해서
체념을 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너도 그 인생 길을 가고
나도 인생 길을 가니
뭐든지 어물쩍 넘어가고 따지지 말고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 이만하면 됐습니다요.
뭐 죽으면 흙으로 해체시키세요.
이걸로 끝장을 내려고 합니다" 라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흠도 티도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만들어놓으시고
그 새 하늘과 새 땅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곳에 사는 인간도
완전히 새로 만들어
거기에다가 심어 놓으시려고
지금도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흙에 속한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제가 이런 여기까지만 말씀드려도
어떤 이들은
"인간이란 원래 흙에 속한 인간밖에 없지
뭐가 또 있나?"라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더 읽어보면
"하늘에 속한 사람이 있습니다"
라는 말씀도 나옵니다.
그럴 때
어떤 이들은 반발하실 것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
그저 또 사람들을 속이려고" 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계속 읽어보면,
"썩어 죽는 육체가 있는 반면에"
하지만 이 말에 대해서 가만있지 않고
대들고 싶은 것이 우리네 인간들입니다.
"육체란 원래 썩어야 정상이야
안 썩은 육체가 어디있어
말도 않돼,
그러나 성경은 단호합니다.
"썩지 않는 육신도 있습니다."
그러면 또 반발하지요.
거짓말이라구!"
이러한 성경의 말씀과
거기에 대한 알 수 없는 반항심이
늘 우리 마음 속에 교차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영광도 있지만
하늘에 영원히 쇠하지 않는
그런 하늘나라 영광도 있다""고
말입니다.
자 여러분,
왜 성경에서 이런 사실들을 대비시키면서
우리들에게 설명할까요?
그것은 현재 우리가 눈에 보이는
이 육신만을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말란 말입니다.
육신만을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빌고 비는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 잡으신 영원한 것이
우리 코앞에 있으니까
그것을 우리가 모른 채 하고
외면해 버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성경에 보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영원한 것을
이미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만들어 놓으시고
이제 우리가 그곳에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어디에다가 만들었겠냐는 것입니다.
세상에 방주를 만들려면
바닷가에 만들던지
아니면 물이 넘치는 강가에 만들면 되는데 산꼭대기에다가 방주를 만들었다 말입니다.
산꼭대기에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육신에 속하는 인간이
기껏 아이디어를 끄집어내고 생각하고
혹은 하나님에 대해서 나름대로
이러쿵저러쿵 생각하는 이런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물이 차도
산위까지는 물이 넘친적 있던가요?
그런데 노아는
사람의 선입감을 완전히 극복하고
상상하지도 못하는
도저히 상상치도 못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산 꼭대기에다가
방주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따라서 산밑에 있는 그 어떤 인간이든
이 방주가 아니면
어떤 인간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산밑에는 착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악하디 악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산밑에서 부부끼리 재미있게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산밑에서 신장 떼어주고
남을 잘 도와주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운 양심이라든지 착함이
방주의 존재성을 능가할 수는 없잖아요.
산위의 방주를 능가하는 진리 자체는
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아무리 교회 충성하고
봉사하는 것이 많았다 할지라도
방주 없이는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바꾸어 말씀드리자면
만약 방주 있으면
그 다음에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라도 걱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쁨이라는 것을
자기 자신이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가지고 기뻐해야지,
내가 오후 3시에 기뻤던 그 기쁨,
혹은 저녁 8시에 기뻤던 그 기쁨,
그런 것을 가지고
다음에 또 기쁨의 순간을 위하여
또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7시가 되었든
11시가 되었든
새벽 3시가 되었든
변함없이 기뻐할 요소는
지금 우리 머리 위에 진리로서
존재해 있는 것입니다.
복음으로서 말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괴롭고 불편하고 힘든 일도 근심되는 일도
많이 있을 겁니다. 누구나 그렇습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고민하는 이유는
뭔가 빠뜨버린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놓쳤는가 하면
자질구레한 일들을
마치 영원불변한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영원 불변한 것이
이미 마련이 되어있는데
그곳에 우리는 눈을 돌리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그만 변화에도
가슴에 상처를 안고 괴로워하고
때로는 죽어싶은 고민이 들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우리가 잘 모르기때문에 드는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본문에 보면 기름부음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한 사항을
통보만 하는 것을
기름부음이라고 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해야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어"
이것이 바로 기름부음받은 능력인데
이런 기름부음이
교회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까?
우리가 흔히 오해하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에 대해서
말하자면,
교회 나온 교인들이
부담을 느끼는 것 중의 하나는
나는 내가 받은 사명을 감당해야된다는
마음의 압력입니다.
믿음이란 하지말라고 해도 하게 되는 것이지,
강요한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종교생활에 빠지지말고
믿음생활은 포기하지말라고 하면
종교생활은 절대 포기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더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포기해버리고
말씀. 기도 다 포기해버리고 속세로 빠져 버리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 다니는 교인들이
심적인 큰 부담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고 하면,
뭔가 사명을 감당해야된다는
숙제 의식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게되면
우리 구원받은 사람들의 진짜 사명이 뭐냐 하면
내가 완성해야 하는 사명이 아니라
예수님이 완성해 놓으신 그 사명을
자랑하고 증거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우선되지 않고
소위 종교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 자신이 애쓰고 힘들게 살아가는
그런 일상을 남에게 복음으로 증거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혹은 그 어떤 신앙의 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그것부터 성급하게 돌진해 들어가지 마시고
우리가 변변치 못하고
제대로 살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기 사명을 모두 이루어놓으셨나, 어떻게 하나의 흠도 티도 없이
내 구원이 가뿐하게 달성되게 마무리를 다 해놓으셨는가
그것에 대해서 고마워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네 사명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자기 사명을 얼마나 완벽하게 다
해결해 놓으셨기에
우리보고 "네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내가 다 이루었다 나만 믿으라"라는
큰소리를 마음놓고 하실 수 있는지
그것부터 우리가 확실히 다져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예후라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실 일을
앞당겨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약은 다 그러하니까..
예후라는 사람이 한 일을 보면서
예수님이 우리들을 위하여
어떻게 깔끔하게 일을 다 이루셨나
그것을 알자 이 말입니다.
다시금 당부하지만,
신앙생활 오래해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은 다 사라지고
보면 볼수록 세상과 다를바없는 내모습에 실망한다고 하는 교인들을 많이 보입니다.
가령 지금도 이러한 부담감에 빠져 산다면
성경을 다시한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명을
아주 철저하게 남김없이 다 처리하셨다는 점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이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예후가 무슨 일을 했나 봅시다
7절에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이 주어지는데
예후라는 사람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하실 일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의미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후가 착하나 나쁘나
내가 잘하고있나 못하고 있나를 생각지 마시고
예후가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는데
그 일은 무슨 일인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8절에 보니
온 집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이겁니다.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22-25절에 보면,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살이 그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저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잘 들으세요!
그러니까 지금 예후가 받은 사명이 뭐냐? 하면
장차 오실 예수님이 받은 사명이 무엇이냐? 와
같은 말입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복수하며 살지말라는 것입니다.
복수는 여러분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수란 복수를 해 주시는분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왜 죄를 지었나요.
마귀가 에덴동산까지 침투해 가지고
인간을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지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복수를
누구에게 담당하셨나 하면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에게 담당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약속이며 진리입니다.
하나님이 줄기차게 이루고 싶으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자의 후손이
악마의 머리를 침으로 말미암아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진짜 하나님의 자녀를 생산하겠다 하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 하겠습니다마는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취지를
잘 아셔야 합니다.
여자의 후손이 악마의 머리를 침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들어갈 자기의 백성을 확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제가 방금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이 땅에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
다 남자의 족보에 들어갑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라고 마태복음 1장에 나오잖아요.
모든 인간이 자기 아비가 있어요.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모든 인간은 혈통과 육신에 속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자의 후손만큼은
인간 혈통에 전혀 속하지 않는 분입니다.
어떤 여자가 있는데
희한하게도 남자 없이
아이를 생산하게 될 것이고
남자 없이 태어난 아이가
악마의 머리를 침으로 말미암아
천당 갈 사람을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말이에요.
방금 제가 하는 말에 헌금하자는 이야기가 없지요? 교회 봉사하자는 이야기가 없지요? 전도하자는 이야기가 없지요? 성가대 꼭 참석하라는 이야기나 교회 빠지지 말라는 이야기 나 십일조하자는 이야기가 없지요? 제가 방금 그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방금 제가 언급한 '여자의 후손'이 되시는 분의 사명 때문입니다. 즉 구원은 하나님의 솜씨지 사람이 종교생활해서 구원 얻는다는 것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여자의 후손입니까? 우리는 다 아버지가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은 여자의 후손이 악마를 칠 수 있는 거예요. 남자의 후손 같은 우리가 열심히 해서 마귀가 물러가는 게 아니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보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요구는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인간을 염두에 두신 요구인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눈만 뜨면 생각하잖아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 까 무엇을 마실까 어디서 잠을 잘까라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고 있는 우리들의 이 모습이 과연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작품입니까 아니면 악마의 작품입니까? 마귀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악마에 속했어요. 그것도 염려하는 상태에서 말입니다.
하나님은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라고 했지만 그 하나의 말씀조차도 제대로 못 지킵니다. 그리고서도 우리가 십일조를 한다고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주일 성수 한다고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없지요! 교회 성장한다고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왜 제가 종교생활하지 말고 신앙 생활하라고 말씀드렸는가 하면은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산위의 방주 때문입니다.
물론 산밑에도 착한 사람도 있고 태어날 때부터 머리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등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요. 사람마다 천태만상이며 선택하고 믿는 종교의 종류도 숱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모든 조건을 일체 묻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몇 년 다녔나? 목사나? 집사나? 등등을 묻지를 않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뜻에 무지해서 속으로 자기 사명 감당 못해 지옥에 갈까봐 끙끙댑니까! 왜 우리는 교회 나와서까지 남과 경쟁을 하려고 합니까? 이것이 바로 종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된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죽했으면 그 당시 종교의 도사들인 바리새인들에게 욕했겠습니까? 구약 성경은 이 예수인 나한테 한 것이지 너희들 하는 종교 행세를 보고 한 것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예후가 자기가 아합의 집안과 개인적으로 원한 관계가 있습니까? 빚 진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예후라는 사람은 엉뚱한 사람입니다. 엉뚱한 사람에게 엉뚱한 선지자가 찾아와서 '예후야 이 사명을 감당하라 전에 내가 이 땅에서 악마 짓을 하여 택한 백성을 억울하게 죽게 한 그 아합이라는 집과 이세벨이라는 그 왕후를 너는 죽여야 된다', '예 알겠습니다' 그것뿐입니다.
저는 그런 사람에게 감정 없는데요. 그런 사람 잘 모르는데요. 그 사람이 나한테 해꾸지 하지 않았는데요. 등의 변명은 늘어놓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말씀에 예언된 대로 실시 할 뿐입니다. 약속한 대로 말입니다. 여자의 후손이 악마의 정수리를 치는 약속은 그 어떤 경우라도 방해받지 않고 완성되게끔 되어 있습니다. 산위에다 방주를 짓는 그런 엉뚱한 일을 하셔라도 말입니다.
25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이 말씀에 보면 분명히 '예언'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나봇에 밭에 던지라는 말은 열왕기상 20장에 보니 이세벨과 아합이 하나님의 족보에 속한 진짜 백성인 그 나봇의 밭을 탐을 내가지고 포도원 안 준다고 나봇을 때려 죽였잖아요. 때려죽이니 피가 토하지요. 그 토해진 피를 누가 받느냐 하나님이 보시고 그 피를 보시고 그 피 값을 하나님이 복수를 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 같은 땅에서 악마적인 행세를 할 때 그 악마적인 행세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보복과 복수로 실시함으로서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은 절대로 변함없고 차질 없이 잘 진행 중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통보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누가 감당하느냐? 누가 하나님의 일을 누가 하느냐하면, 오늘 본문에 보면 기름부음이 있다 라고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기름부음이라는 것은 메시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 무슨 일을 한다? 하나님이 미리 예언한대로 철저하게 약속을 성취시킴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서 택한 백성은 무사히 천국으로 간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보다도 더 높은데 마음을 두고 눈을 두고 살아야지요. .
제가 예를 들겠습니다. 집안에 돈이 없으니 교회 가서 예수한테 빌면 돈이 생기지가 않을까 라고 교회 왔는데 다행스럽게도 빌어서 돈이 안 주어지면 '그래 맞아 내가 성경에 보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에 뿌리라고 했는데 내가 잘못 기도했구나' 라고 좋은 기회가 되는데 그런데 이 순간에 비극적인 경우가 바로 교회 올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돈이 쏟아지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됐을 때 그때부터 그 사람은 교회 올 때마다 어디에 매이느냐하면 방주라는 높은 마음이 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돈, 돈을 의식하게 됩니다. "하나님 이번 주에는 교회를 두 번씩이나 나왔습니다. 돈을 주시더라도 곱빼기로 주실 거죠?"라고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식으로 돈. 돈. 돈. 돈에 얽매이는 불쌍한 인간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몸이 아프다 예수한테 빌면 건강 주겠지. 라고 교회 나왔는데, 병원비보다도 교회 헌금이 싸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이 성령을 은혜로 받아서 "아, 내가 그 보혈의 피를 육신의 건강을 위해 동원시키려 하다니 예수님은 죽으셨는데 죽은 자의 피를 발라 가지고 내 몸이나 건강 하려고 들다니 나는 정말 나쁜 도둑이다. 염치없는 놈이다. 아, 이토록 평소에도 나는 죄인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천만다행인데 그것이 아니라 빌었더니만 몸이 건강했다. 그 다음에는 아플 때마다 교회 나오지요. 그러니까 교회가 그 사람을 망치는 것입니다. 가짜 예수가 그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많겠지요.
이것이 바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악마의 테두리를 못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이 아니라 악마의 작품으로서 하나님에게 뭔가 달라는 식으로 종교 생활을 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욕심들 때문에 우리는 누구마저 불필요하다고 죽이고 거부하게 되느냐 하며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죽은 예수님이 부활 하셔서 자기 사명을 감당해서 우리가 이런 뭔가 잘못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서 우리를 새 하늘과 새 땅에 넣어 주시려고 구원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성찬식 때문에 설교를 일찍 끝내겠습니다만, 예후가 해야 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은 한마디로 복수입니다. 누가 누구를 복수하느냐. 기름 부은 자가 현재 우리 인간을 지배하는 악마에 대해서 복수를 감행하지요. 반드시 말씀대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뿐 입니다. 기름부음 입은 자이기 때문에 자기 뜻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만 이루어지기를 위하여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런 취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명 내가 뭘 해야되느냐 자꾸 이것부터 생각하지 말고 정말 우리가 증거할 것은 오직 주님이 완수하신 사명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내가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되면 스스로 자기 만족에 차지 못하고 좀 소홀하다 싶으면 벌받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젖어듭니다. 아이고~ 사명 감당 안 했더니만 수입이 줄어들었고 아이도 아프고 성경을 안 보았더니만 벌받았구나 성경 보아야지 이런 아주 수준 낮은 염려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다 이루었다했는데 그 다 이룬 것을 믿지 못하고 또 자기 주님의 사명을 믿지 못하고 기껏 자기 사명을 믿으려고 하는 이 어리석음은 곧장 악마의 종이 되어 가는 흔적입니다.
우리가 지난 날 10년을 믿었든 20년을 믿었든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눈을 높은데 두세요. 높은 산 위에 방주 만드는 소리 툭닥툭닥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우리는 무학산 밑 박사동에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높은 산위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걸쳐놓은 그 놀라운 의미, 그 깊은 의미를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뭐 잘했다 뭐 못했다 뭐 소홀했다 이런 아래쪽에서 이야기하는 자질구레한 것은 털어 버리고 이래도 구원해 주시고 저래도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 그 복음을 믿음으로 우리가 자녀가 된 것 이 사실을 확정짓는 저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