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희만(31회)
나도 춘고인
동문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오늘 인사 드리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어디서부터 무엇으로 시작할지 망설여집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도 춘고인 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80대 중반에 접어들어 고향으로 돌아와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생활권의 요직에 우리 동문들이 맡고 있어 더욱 더 긍지를 느끼고 있습니다.
잠시 제 자신을 소개할까 합니다.
1980년도 후반부터 1990년도 초반까지 본 동창회 간사직을 맡고 있었습니다.
재직 시 큰일을 해냈습니다.
하나는 본회의 사무실 자금과 현재 사용하고 있는 동창회 사무실을 직접 마련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본회 사무실 현황을 말씀드리면 종로 소재 고려대학교동창회 건물의 4층을 본회 동창회 사무실로 임차료 없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장덕진(26회) 전임 회장님께서 고려대학교동창회 회장에 계셨으며 동시에 본회 회장으로 계셨기에 가능하였으며, 또한 허천구(31회) 감사도 고려대학교동창회 감사와 본회 감사를 맡고 있었기에 이러한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려대학교동창회가 안암골로 이전하게 되었습니다.
본회도 사무실 이전문제로 큰 기로에 놓였으며 새로운 사무실 마련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이상근(25회) 회장의 제안으로 동문들의 작품으로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습니다.
우선 유성준(21회) 선배의 의견을 타진한바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시었으며, 많은 원로 동문들도 동참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박영춘(31회) 동문 자택도 방문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도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1990년 9월 9일(일)부터 12일(수)까지 “춘고인 서화 작품전시회”를 세종문화회관 제1 전시실에서 열어 목표 자금 1억을 달성하게 되어 현 충정로2가에 위치한 골든타워에 본회 사무실을 1991년에 계약하게 되었습니다.
1차 목표가 달성됨에 따라 2차 목표는 모교 재학생 장학금을 마련이었습니다.
그 당시 장학금 현황은 정기예금 이자로 충당하였으나 이율이 낮아 원금이 다 소진하게 되었습니다. 1차 작품을 출제하신 동문들의 의견을 들어 도자기 작품(도자기에 동문들의 글씨와 그림)을 전시하기로 하여 조선일보사 전시장에서 전시한바 1억원의 장학기금을 다시 조성하였습니다.
계속 동문들의 협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또 한가지 추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재경춘천시민회의 탄생이었습니다. 우리 동문의 주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강원도 각 시,군이 재경 시,군민회가 있었으나 재경 춘천시민회가 없었습니다. 그 때 한승수(27회) 전 국무총리님께 말씀드렸더니 재경 춘천시민회를 출범할 것을 승인하고 준비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협의회는 빠고다가구공예점 대표 박재승(8회) 사무실에서 열렸으며,
김익수(24회), 신홍균(29회), 이정하 강원일보 서울지사장 등이 참석했습니다.
본인은 재경 춘천시민회 회칙을 만들었습니다.
회원의 자격은 재경 춘천고등학교동창회 회원, 재경 춘천농업고등학교 회원, 재경 춘천여자고등학교 회원, 재경 성수고등학교 회원 그 외에 춘천시 출신을 망라하였습니다.
1회 회장으로 김익수(24회), 사무총장엔 신홍균(29회) 동문이 맡았으며 사무실은 종로경찰청 옆건물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춘천시 시장이었던 배계섭(26회) 동문의 협조로 운영비를 지원받았습니다.
이상 자랑을 하였습니다. 나도 춘고인 자격이 있겠죠?
앞으로 본동창회의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며 동문 여러분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깃들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