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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일주 여행을 다녀와서
기우현
7박 9일간 스페인을 다녀왔다. 정확히 말하면 10월 9일(금)에 출국해서 17일(토)에 귀국했다. 8월 31일 근 40년의 교직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임을 했다. 퇴임하면 으레 하는 연수가 부부가 함께 하는 해외여행이다. 그래서 나도 해외여행을 생각해 보았다. 그 여행이 급한 것은 아니기에 2학기 개학하기 전날에 여행지를 검색했다. 생각은 유럽 쪽에 있었다. 터키는 가봤지만 유럽은 아니지 않는가. 평소에 자주 다녔던 하나투어를 집중적으로 검색했다. 우선 날짜를 10월 달로 잡았다. 9월에는 사전 모임 약속이 몇 군데 있었고 아버님 제사일도 있었다. 우선 우리와 위도가 비슷한 이탈리아나 스페인을 생각했다. 둘 중의 선택은 스페인이었다. 이탈리아가 매력적이었지만 뒤로 남겨 두는 맛이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물론 스페인도 가고 싶었던 나라였기에 차선책은 아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칼을 한 번에 여행하는 패키지도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 일부를 빼고 다녀오는 코스여서 배제했다. 스페인 일주가 딱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적당하고 대한항공 비행기를 한번만 타고 간다는 점이 좋았다. 그런데 12명 인원에 12명 예약이 이미 돼 있었다. 11월을 찾아보았지만 그 역시 차 있었다. 너무 늦게 검색한 탓인가. 하나투어 직원과 상의해서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았다. 9월 1일까지 그간 경위를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런데 24일에 예약 가능하다고 하나투어에서 전화가 왔다. 예약금을 부쳤다. 이제 나머지 돈만 부치면 여행은 하게 되는 것이다. 상품가격은 3,090,000원, 가이드/ 기사 경비 90유로, 선택관광비 120유로를 더하면 근 4백만 원에 달하는 돈이 필요했다. 거기다 상품을 구매하면 총 천만 원의 돈이 드는 여행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전날에 하나투어 직원이 60만원을 더 내면 비즈니스 석을 주겠다고 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어 거절했다. 우선 은행에서 유로화로 환전했다. 90만원이면 적당할 것 같아 그 정도로 환전하고 집에 있는 1달러 10여 장을 준비했다. 짐은 예전 해외여행에 했던 것처럼 쌌다. 특이한 것이 있다면 베개, 물 담은 병, 커피포트 가져간 정도다. 컵라면도 몇 개 챙겼다.
앞으로 내가 다녀올 7박 9일의 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9일 출국 바르셀로나(1) - 발렌시아(1) - 그라나다(1) - 론다, 세비야(1) - 코르도바, 마드리드(1) - 똘레도, 마드리드(1) - 사라고사, 바르셀로나(1) - 몬세라트, 바르셀로나 출국 – 17일 귀국이다. 이 일정대로 견문한 내용을 쓰려고 한다. 정년퇴직한 이후로는 일기를 쓰고 있다. 여행도 하루의 연속이다. 환경만 다를 뿐. 그래서 서두와 결미만 덧붙이고 본문은 일기 쓴 내용을 그대로 실었다. 이번 여행은 특별했던 만큼 사진을 찍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을 싣고 캡션을 달았다. 분량이 꽤 길어질 것 같다.
10월 9일(금)
5시 반에 일어났다. 인천공항에서 가이드를 만날 시간이 8시다. 아침 6시에는 집에서 출발해야 공항버스를 맞춰 탈 수 있었다. 안사람을 재촉했다. 6시 지나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에서 내리고 공항버스 정류장을 가니 마침 공항버스가 온다. 늦었지만 시간에 맞춰 온 것이 다행이었다. 8시 되어서 인천공항에 도착해 김은영 인솔자를 만났다. 인솔자는 우리에게 먼저 출국 수속을 밟으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에게 좌석번호를 전화로 알려 달라고 했다. 줄이 무척 길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계를 이용한 절차를 밟기로 했다. 그래서 안사람은 창가의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다. 짐을 부치는데 이 또한 엄청 줄이 길었다. 오늘이 한글날 공휴일이고 금요일이다. 주말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오늘 출국하는 해외 여행객이 많은 것 같다. 긴 시간을 허비한 끝에 면세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안사람은 친지에게 줄 담배를 샀다. 우리는 아침 대신 어묵으로 요기했다. 그리고 11시 5분 비행기에 탑승했다. 우리가 세 시간 전에 왔음에도 탑승하는 시간에 여유가 없었다. 그만큼 공항은 승객으로 혼잡했다. 기내 좌석은 비좁은 편인데 앞으로 14시간 타야 한다. 안사람은 여행사 직원이 막판에 제안한 60만원을 더 주고서라도 비즈니스 석을 타야 한다고 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몇 시간을 못 참아서 몇 십 만원을 더 낸다는 것은 돈의 낭비라고 생각했다. 기내에서 두 끼 식사를 했다. 비빔밥과 치킨 식사를 했다. 첫 번째 선택 메뉴 중 비빔밥이 좋았다. 기내에서 우리는 폴리코사놀, 오메가3 등 영양보조제를 예약 주문했다. 예약 주문 액수가 400달러가 넘으면 할인혜택이 있다고 해서 이에 맞춰 샀다. 기내에서는 주로 잠으로 시간을 보냈다. 졸다가 깨면 뉴스, 운항정보를 시청하다가 음악을 감상하다가 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아서 영화를 보았다. 내가 시청한 ‘주라기 공원’은 다행히 전에 보지 않은 영화였다. 영화적 재미, 가족적 오락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헐리웃 영화였다. 재미도 있었지만 무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 14시간 비행 시간 끝에 바르셀로나 ‘엘프라트 공항’에 도착했다. 현지 시각으로 6시 27분이었다. 한국과 스페인은 7시간의 시차를 두고 있다. 그래서 안사람은 시차가 맞지 않아 한낮과 한밤중에 약을 먹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보통 공항에 가이드가 나오는데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인솔자와 우선 식사를 했다. ‘가야금 식당’으로 이동해서 한식을 먹었다.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이라고 한다. 한식 식당이 바로셀로나에는 두 군데밖에 없어 사장이 돈을 긁는다고 인솔자는 말했다. 오늘 식당 메뉴는 닭볶음탕과 김치찌개다. 기대수준을 낮춰야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오죽하면 안사람이 밤에 숙소에서 평소에 먹지 않는 컵라면을 먹었을까. 우리는 다시 40분 이동해서 교외에 있는 바르베르 호텔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9시가 넘어 있었다. 호실에는 커피포트는 있었다. 그러나 호실 크기도 작고 냉장고도 없고 재래식 변기에다 텔레비전 크기도 작았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시골 모텔보다 못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나는 얼결에 휴대폰의 새로온 카카오톡 내용을 열어보았다. 그 대가는 1만원이었다. 그 후 데이터를 닫았지만 엎지러진 물이었다. 인솔자는 내일 6시 모닝콜, 7시 식사, 8시 출발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2시 반에 벌써 눈이 떠졌다. 여행 첫날의 설렘인가. 일어난 김에 내일 일정을 체크하고 우리가 지불해야 할 가이드 비와 선택관광비를 챙겼다. 다음날 인솔자는 우리에게 4시에 일어났으면 정상이고, 3시에 일어났으면 나이 드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두시 반에 일어난 나는 무엇인가. 나는 벌써 극노인이 되었단 말인가.
10월 10일(토)
6시에 기상했다. 준비하고 7시 식사하기 전에 가볍게 호텔 앞을 산책했다. 아직 어두웠다. 그믐달이 나뭇잎새 사이로 보인다. 서울도 그랬었나. 평소 일찍 일어나지 않은 습관을 가진 나는 이도 색다르게 느껴졌다. 예정대로 7시에 식사하고 8시에 출발했다. 이번 여행객은 15분이었다. 처음에 예약인원이 12명이라고 했는데. 30대 부부 4명을 제외하고 50대에서 70대까지의 여행객이다. 남자는 나를 포함하여 세 명뿐이었다. 50대 이상은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있어 그렇다 치고 젊은 부부는 어디서 그런 여유가 있나 하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나 물어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조심스레 행동하는 것이 엿보였다. 가이드 전선하 씨를 소개받았다. 바르셀로나 전담 해설사다. 나는 버스 속에서 인솔자에게 어제 준비한 비용을 건네주었다. 그런데 인솔자가 80유로를 돌려주었다. 전산기로 계산을 해 보이면서. 이번에 내가 지불해야 할 경비는 기사 팁비가 90유로, 플라멩코 관람비 70유로, 바로셀로나 야간투어비 50유로였다. 합산하여 210유로로 총 420유로를 지불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500유로를 건네준 것이었다. 돌려받은 것은 다행이지만 가벼운 산수 문제인데 왜 이를 헷갈려 했는지 나도 이해가 안 돼 한참 되새겨 생각해 보았다. 먼저 찾아간 곳은 ‘성가족 성당’이었다. 천재 건축가로 알려진 가우디의 건축물이다. 아직도 공사 중이었다. 네 개의 기념비적인 종탑(4대 복음서 저자에 하나씩)이 눈에 확 뜨인다. 공원 앞 호수 공원에 비친 성당의 모습도 환상적이었다. 나는 연신 외관 사진을 찍었다. 성가족성당은 3개의 전면으로 설계되었다. 즉 탄생 – 열정 – 그리고 죽음과 부활에 헌정된 건물이다. 우리는 이동하여 ‘탄생의 문’ 중앙 입구에 섰다. 가이드는 끊임없이 설명을 하는데 나는 그 조각에 압도되어 소리가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성당 지하실에 들어갔다. 수많은 높다란 열주와 높이 17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돔이 나를 압도했다. 땅과 하늘, 신과 인간이 만나는 접점인 수직성의 놀라운 감각은 보여 주고 있었다. 모자이크 창문도 아름다웠다. 지하실은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빌라’가 착공하고 1885년에 ‘가우디’가 완공했다고 한다. 죽음의 문 쪽에는 수많은 언어로 주기도문이 쓰여 있었다. 그 중 한글이 눈에 띄어 반가웠다. 비록 작은 글씨이지만, 중앙 하단 양쪽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성경 글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건축은 십자가 형식으로 되어 있는 구조물이었다. 우리는 ‘부활의 문’으로 나왔다. 예수님 상이 조각돼 있고 왼쪽 하단에 가우디 조각도 새겨 있었다. 성가족성당을 돌아오는데 이 건축물이 ‘1882’년에 착공되었다는 표지 기둥도 볼 수 있었다. 가이드는 우리를 기념품 매점으로 인도했다. 매점에는 세계 각지의 수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안사람은 성당 모양의 작은 조각품을 샀고, 나는 ‘바로셀로나에 대한 모든 것’이라는 한글판 책자를 11.5유로를 주고 샀다. 우리는 버스로 이동하여 ‘구엘 공원’으로 갔다. 돌다리 길을 지나 구엘 부속 건물 앞에 모였다. 건축물들이 아름답다. 우선 정문과 계단 양식이 눈에 아름답게 비쳤다. 이 또한 가우디 건축물이다. 우리는 정문 계단 쪽으로 오르지 않고 오른쪽으로 포르티코 돌길로 돌아 올라갔다. 기둥엔 ‘물동이를 인 여인상’도 조각돼 있었지만 기둥 끝부분이 화분으로 구성돼 있었다. 위로 올라가니 대광장이 보이고 가장자리에 독창적인 파동형 벤치가 설치돼 있었다. 사람들이 그곳에서 많이 휴식하고 있었다. 우리도 그 자리에 앉아 보았다. 우리는 광장에서 내려와 아까 정면 계단에서 보았던 방에 가보았다. 100개의 기둥이 있는 방 – 실제로는 84개- 이 있었다. 전에 지역시장이 들어 서 있던 곳이었다. 도리아식 기둥이 작은 구 모양의 돔을 지지하고 있다. 대 광장은 그 위에 서있는 것이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 중앙에는 거대한 용이 조각돼 있어 방으로 오르는 길을 환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그 계단으로 내려왔다. 뒤편에 사람들이 줄을 서있다. 알고 보니 ‘가우디 하우스 – 박물관’으로 가는 통로였다. 그러나 가이드는 우리를 그곳으로는 인도하지 않았다. 우리는 버스로 이동하여 ‘올림픽 항구’로 갔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리기 전까지 오늘날처럼 개발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요트가 늘어서 있는 화려한 항구였다. 한편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해수욕장에서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버스에 놓고 내려 항구 모습을 찍지는 못했다. 우리는 식당으로 가서 이곳에서 유명한 빠에야를 먹었다. 빠에야는 ‘사쿠라니’라는 노랑색 향료를 넣어 색깔이 노란 쌀밥에 새우, 홍합 등 해산물을 넣어 만든 음식이다. 기름지다. 나는 그다지 맛을 못 느껴 먹다 남겼다. 식사 후 가볍게 해변을 둘러보았다. 바닷물이 그냥 푸르다는 말은 적절치 않다. 감색에 가까운 빛깔이다. 날씨도 청명해 넓고 푸른 하늘과 바다가 내 눈에 시원함을 더해 주었다. 이제 우리는 발렌시아로 간다. 가이드와 헤어졌다. 1시 반에 출발해서 6시 반까지 이동했다. 발렌시아는 우리가 관광으로 갔다기보다는 그라나다를 가기 위한 중간 정착지라고 할 수 있었다. 발렌시아에서는 숙박만 했을 뿐이었다. 가는 도중에 인솔자는 당대 3대 성악가인 호세 카레라스, 플라시도 도밍고, 파바로티가 ‘갈라카 롬’에서 공연한 음악을 들려주었다. 파바로티는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호세 카레라스와 플라시도 도밍고는 스페인 사람이다. 그런데 도밍고는 마드리드 출신이고 카레라스는 바르셀로나 사람이다. 이 두 지역은 지방색 이상의 갈등이 있어 이 두 성악가는 같은 무대에 서지 않았다고 한다. 나중에 카레라스가 백혈병에 걸리고 치유 과정에 도밍고 재단의 도움이 있어 두 성악가가 지역색을 뛰어넘어 화합할 수 있었고 이렇게 같은 무대에 설 수 있었다는 해설도 덧붙였다. 저녁은 카마레나 호텔에 투숙했다. 숙소가 이전 호텔보다는 나았다. 냉장고도 있고 호실도 컸다. 이곳에서는 세트메뉴 식사를 했다. 먼저 파스타가 나오고 치킨이 나왔다. 식사 후 가볍게 산책했다. 외곽이어서 특별히 공장 외 볼 것은 없었다. 와이파이로 카카오톡을 했다. 여기는 8시지만 서울 새벽 3시가 될 것이다. 사진을 전송한 후 바르셀로나에서 사온 책자를 읽어 보았다. 실망이었다. 스페인어 책자를 직역한 번역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본 것은 바르셀로나의 아주 작은 일부였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일은 혹 비 내릴지도 모른다는 예보다. 그 외 텔레비전에서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텔레비전은 프로그램이 다양하고 오락성도 풍부하다고 할 수 있다. 배낭에 우산을 챙기고 수면을 취했다.
10/11(일)
오늘은 6시 기상, 40분 식사, 8시 출발이다. 오늘은 화려한 이슬람 문화와 가톨릭 문화가 뒤섞인 도시인 그라나다로 이동한다. 거기서 스페인 1급 관광지인 알함브라 궁전을 관람하게 된다. 그라나다까지는 5시간 이상의 거리다. 도중에 인솔자는 헝가리 무도곡 등 집시 음악을 들려주었다. 또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1492년’의 영화를 틀어 주었다. 1492년은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해다. 점심은 휴게소 식당에서 식사했다. 야채샐러드에 치킨이 나왔다. 점심시간이 1시간 20분이나 되었다. 이렇게 여유를 부린 것은 알함브라 궁전 관람이 내일 아침으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긴 여정 동안 차창으로 바깥 풍경을 관람했지만 무미건조했다. 낮은 구릉과 간혹 보이는 산성 요새 그리고 끝없이 펼쳐지는 올리브 나무뿐이었다. 비가 오지 않아 메마른 구릉의 연속으로 풍경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스페인에서 전 세계 올리브유의 40% 이상을 생산한다고 한다. 그럴 만했다. 올리브 나무는 뜨거운 날씨에다 척박한 땅에 알맞은 수종이다. 오후 3시 20분에 드디어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여기서 해설자 정창욱 씨를 만났다. 개인적으로 물어보니 그는 마드리드에 살고 있는데 여기까지 5시간 걸려 왔다고 했다. 알함브라 궁전 견학이 내일로 미뤄지니 오늘 여기까지 온 것 외에는 특별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해설자는 도심의 분수대 앞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알함브라 맥주를 소개한 뒤 한 시간의 여유를 주고 사라졌다. 우리는 아이스크림도 사먹다가 벤치에서 쉬기도 하고 좀 거닐기도 했다. 분수대 주위에 잠시 서있는 동안에도 세계에서 온 수많은 단체 관광객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1시간 뒤에 우리는 해설자와 함께 버스를 타고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는 ‘알바이신 지구’로 이동했다. 거기서는 그라나다 시 지역이 한 눈에 다 보였다. 알함브라 궁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에 좋은 언덕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호텔 빌라 블랑카로 이동했다. 해변가에 있었다. 우리가 묵었던 호텔 중에서 가장 시설이 좋았다. 프런트는 4층에 있고 우리 숙소는 0층에 있었다. 바다가 바로 보이는 호실이었다. 짐을 옮겨 놓고 호실 밖으로 나와 일몰 풍경을 감상했다. 바다 전망이 시원하고 일몰은 화려했다. 오늘 알함브라 궁전을 가지 않아 내일은 알함브라 궁전 견학을 하고 투우의 고장 론다를 들르고 목적지 세비야를 가게 된다. 가이드는 내일이 바쁜 하루가 될 것을 예고했다. 그래서 내일은 5시 반 기상, 6시 반 식사, 7시 반 출발한다고 했다. 비가 예정돼 있다. 오늘 특별히 본 것은 없었지만 긴 여정으로 피곤해서 카톡을 하고 잤다.
10/12(월)
오늘은 월요일이지만 스페인은 휴일이었다. 콜럼버스가 1492년 10월 12일에 서인도제도를 발견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발견으로 유럽의 세계 영향력이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스페인으로서도 중남미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삼고 막대한 금은보화를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 이 날을 기념일로 삼을만하겠다. 우리가 때마침 그 날에 스페인에서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그 나름 뜻이 있었다. 우리는 7시 반에 탑승하고 알함브라 궁전으로 갔다.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 1급 관광지로 매일 6,000명 이상 관람하는 곳이다. 하루 표를 8,200장 이상 팔지도 않는다고 한다. 또 이곳은 문화재를 소중히 여겨 관광객이 길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그로 인한 문화재 훼손을 우려하여 넘어지지 말라고 강조하는 곳이기도 하다. 정문에서 검표를 하고 짐 검사를 받았지만 두 곳이나 더 검표 작업을 거쳐야 했다. 수많은 관람객이 쏟아져 들어온다. 우리가 자리를 선점해야 사진도 제대로 찍을 수 있다고 가이드는 빠르게 설명하고 빨리빨리 이동했다. 나는 이에 적응하지 못해 사진을 찍다가 뛰어서 따라갔다. 설명을 잘 듣지 못한 곳도 있었다. 나중에 알함브라 궁전을 설명하는 책자를 사려고 했지만 파는 장소는 없었다. 귀국해서 책자를 찾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먼저 이슬람왕국 여름 별궁이었던 ‘헤네렐리페’를 관람했다. 건조한 지역이지만 ‘네바다’ 설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관개를 통해 설계된 정원이었다. 수로에 물이 흐르고 붉은 꽃과 푸른 잎의 나무로 조경해서 아름다웠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수로와 분수는 시원한 모습을 연출했다. 사막에서 살았던 무어인들에게는 천국인 사막의 오아시스였을 것이다. 우리는 다리를 지나 ‘아세키아 지역(ACEQUIA REAL)’으로 갔다. 곳곳에서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아랍 양식의 알함브라 궁전을 견학했다. ‘알카즈바’ 요새 벽을 지나 두 공주의 방에 입장했다. 금으로 칠한 듯 치장 벽토 기술이 대단하다. 바닥은 석류 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벽은 아라베스크 문양이 다양하며 천정은 수천 개의 벌집 조각으로 화려하다. 정 중앙은 유일신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 있다. 아랍인들은 기둥은 납을 써서 충격을 완화하는 효과를 냈다고 한다. 우리는 후궁들이 살았던 ‘사자의 정원’으로 갔다. 그 중앙에서 말을 하면 온 방에 그 소리가 들리게 설계된 원형 정원이었다. 그 자리에 서 보았다. 알함브라 궁전도 아름답지만 물길에 비친 궁전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인도의 타지마할이 연상되었다. 환상적이라고 할밖에.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하며 알함브라 궁전에서 나왔다. 10시 50분이었다. 이번에는 투우의 고장 론다로 갔다. 1시 10분에 론다에 도착했다. 2시간 이상의 거리였다. 비가 내리고 있다. 큰비는 아니었으나 이슬비는 줄곧 내렸다. 투우 창시자 동상을 지나 투우장으로 갔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외관만 사진을 찍었다. 지나는 중 투우를 사랑했던 소설가 헤밍웨이 기념상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구 시가지와 신 시가지를 연결한 ‘누에보 다리’로 갔다. 100미터 깊은 계곡 아래 ‘따호 강’ 위에 세워진 다리였다. 빗줄기는 더욱 세졌다. 우리는 다리를 건너지는 않고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고산 지대에서인지 큰 고산 감자 반쪽에 돼지 등심이 나왔다. 2시 20분에 론다에서 출발해서 3시 50분에 세비야에 도착했다. 세비야는 오페라 ‘세빌리아의 이발사’로 널리 알려진 지역이다. 스페인어로는 ‘세비야’로 읽는다. 세비야는 ‘과달키비르 강’ 어귀에 있는 내륙 항구도시다. 이슬람교도들이 스페인을 지배했을 때 수도였고, 스페인의 신세계 탐험의 중심지로서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곳이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귀항한 것은 바르셀로나가 맞지만 출항한 곳은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중 세비야가 유력한 후보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비야 대성당’을 먼저 견학했다. 대성당 옆에는 ‘히랄다 탑’이 있다. 예전에는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었으나 지금은 종루가 돼 있다. 망루에서 세비야 전경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외관만 보고 올라 가보지는 않았다. 세비야 대성당 입구에는 악어 등 여러 동물과 수렵 기구 등이 걸려 있다. 세비야가 무역 집산지였음을 알려 주는 곳이지만 종교 시설 입구에 있다는 것이 특이했다. 입구에 들어서면 수많은 열주와 너른 공간이 웅장하고 모자이크 창문의 아름다움과 천정 돔의 화려한 모습에 압도된다. 고개를 들지 않아도 천정을 감상할 수 있는 거울 시설물이 마루에 설치돼 있었다. 수많은 방이 있고 그곳에는 성화가 걸려 있다. 종교 시설이지만 특이하게도 콜럼버스의 관이 설치돼 있다. 네 명이 관을 어깨에 메고 있다. 오늘이 콜럼버스의 날인지라 관 앞에 화환이 놓여 있었다. 대성당을 나와서 과달키비르 강가를 지킨 망루인 ‘황금의 탑’까지 걸어갔다. 옛 이슬람 국이 이 강을 통과하는 배를 검문하기 위해 세운 탑이라고 하는데 명칭만 황금의 탑이다. 지금은 해양박물관으로 쓰인다고 한다. 이번에는 ‘세비야 광장’으로 갔다. 이 광장은 내가 본 광장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광장 주변에는 정부청사와 교회 등 건물이 반원의 형태로 둘러 싸있고 광장 중앙에는 큰 분수대가 놓여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광장 안에 강물을 끌어 들인 수로로 둘러 싸여 있는 점이었다. 다리가 몇 개 세워져 있고 다리 아래로 시민들이 보트를 타며 즐기고 있었다. 벽면에는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하고 그곳의 원주민을 만나는 장면 등 스페인 58개 도시의 역사적 사건을 채색 타일로 장식돼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머물렀다. 이제 저녁 시간이 되었지만 오늘은 플라멩코 관람이 예정돼 있다. 플라멩코 극장에 갔다. 7시에서 8시 반까지 1시간 반 동안 관람했다. 플라멩고가 맞는지 플라멩코인지 헷갈렸으나 스페인어로는 플라멩코로 쓰여 있었다. 플라멩코는 집시, 안달루시아인, 아랍인, 유대계 스페인인 민요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19세기에 집시들이 직업적으로 추게 되면서 집시의 음악과 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우리가 보통 플라멩코 소개 프로그램을 접할 때 자주 보게 되는 여성이 출연했다. 춤을 출 때 여성은 섬세한 손놀림, 남성은 현란한 발동작을 보게 된다. 춤사위는 강렬한 표정으로 인상을 쓰며 점점 동작을 빠르게 하다가 마무리는 자신감에 넘치는 모습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이는 집시 내면의 슬픔과 절망을 가슴 깊이 감추고 있다가 폭발하는 듯한 열정을 드러내는 표현인 듯하다. 이런 점이 집시의 슬픔과 스페인의 열정을 합쳐 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공연을 보고 오늘 숙소인 아바데스 호텔에 도착하니 10시가 되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오늘은 스페인 관광한 날 중 많이 보느라 가장 바쁜 날이었다. 주중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겠다.
10월 13일(화)
오늘은 어제 피로를 고려하여 6시 반 기상, 7시 반 식사, 8시 반 출발했다. 2시간 걸려 코르도바에 도착했다. 우리가 먼저 접한 것은 수차였다. 그리고 화강암으로 과달키비르 강 위에 세워진 코바인 다리였다. 다리를 넘어가 보지는 않았다. 개선문을 지나 마치 도시 성벽을 세워 놓은 듯한 거대한 교회 담 벽을 접하게 된다. 세비야 대성당 문으로 들어가면 웅장한 교회 내부가 보인다. 거대한 제단이 있다. 한편으론 성당 벽면 한쪽엔 메카를 알리는 구조물도 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혼재된 모습이었다. 제단 앞에서 한 연주자가 오르간을 연주하고 있었다. 우리는 나와서 꽃으로 장식한 유대인 거리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에서 보이는 교회의 종탑도 아름다웠다. 거리로 다시 나와 종탑을 다시 찍었다. 종탑 모습이 잘 찍혔다. 사실 성당 안에서 휴대폰에 저장 공간이 부족하다는 사인이 나오더니 사진이 찍히지 않았다. 그래서 세비야 성당 내부의 사진이 부족하다. 젊은이에게 이의 해결 방법을 물어보니 불필요한 사진을 삭제하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더 이상 사진을 찍지 못하고 틈만 나면 중복되거나 없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진을 삭제했다. 이 작업은 며칠을 걸쳐 계속 이루어졌다. 중식을 하고 이번에는 마드리드로 갔다. 가는 도중에 휴게소 식당에서 가이드가 커피 코르타도를 추천해서 마셔 보았다. 괜찮았다. 이후 우리는 코르타도만 시켜 먹었다. 가이드는 버스 속에서 ‘모로코’라는 프로그램을 틀어 주었다. 모로코 지역과 스페인 그라나다를 소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알함브라 궁전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5시 반이 되어서야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먼저 면세점 쇼핑을 했다. 주로 가죽 제품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거기서 안사람은 벨트, 지갑, 구두, 가방, 캐리어, 선글라스를 구입했다. 거기서 나는 이탈리아제 소가죽 지갑이 얇고 맘에 들어 샀고 안사람에게는 선글라스를 사라고 독려했다. 구두는 신어보니 편했다. ‘24HR’ 상표의 구두였다. 우리나라 돈으로 십여만 원 되는 가격이었다. 안사람의 권에 의해서 그날 이후로 나는 신고 갔던 운동화를 벗어버리고 구두를 신고 다녔다. 구두 신는 불편함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광고에 맨발로 다니는 듯한 착용감이 있다고 쓰여 있기는 하였지만. 만약에 누가 스페인에서 쓸 만한 상품을 추천하라고 하면 나는 이 구두를 추천하겠다. 그 정도로 편했다. 면세점으로 11% 가격 할인을 해 주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물건을 더 사면 12% 할인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조금 더 샀다. 여기서 필요한 물건은 다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후 우리는 여행 가방 외에 또 하나의 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다. 저녁은 한식으로 육개장과 불고기를 먹었다. 이 역시 별로였다. 아이다 호텔로 이동해 숙박했다. 이 호텔은 내일도 숙박하는 곳이다. 짐을 갖고 다니는 부담이 없어 좋았다. 저녁에 집에서 가져 온 컵라면을 먹었다. 호실에서는 와이파이가 안 되었다. 그래서 밤에 로비로 나와 카톡을 하고 들어가 취침했다.
10/14(수)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했다. 오늘은 똘레도를 거쳐 마드리드로 간다. 8시에 출발하여 9시 40분에 똘레도에 도착했다. 가이드가 버스 속에서 아르간 오일을 소개하고 판매했다. 아르곤 오일의 효능에 대해서는 어제 본 ‘모르코’라는 프로그램에서 설명을 들은 바라 몇 개 구입했다. 똘레도는 여러 차례 종교회의가 이루어졌던 종교도시다. 또한 강이 도시를 둘러싸 천연 해자를 이룬 전형적인 중세도시였다. 우리는 성채 앞을 지나 마을로 들어갔다. 골목으로 똘레도 성당의 모습이 보였다. 거리에는 칼을 팔고 있는 매점이 많았다. 이윽고 ‘똘레도 대성당’ 앞에 도착했다. 용변을 보고 잠깐 쉬는 사이에 나는 매점에서 ‘똘레도 –마드리드’라는 한국판 책자를 8유로를 주고 구입했다. 이 책을 구입하면서 나는 똘레도와 마드리드에 대한 이해를 보다 많이 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산 것은 나에게는 큰 만족이었다. 똘레도 대성당은 이슬람 왕국 시절에는 회교사원이 있던 곳이었다. 1086년 알폰소 6세가 똘레도를 수복한 후 가톨릭 성당으로 개조한 것이다. 대성당 정면 중앙에는 ‘용서의 문’, 오른쪽에는 ‘심판의 문’, 왼쪽에는 ‘지옥의 문’ 등 세 개의 문이 있다. 계단이 없는 문은 사자의 기둥이 세워지면서 ‘사자의 문’으로 불린다. 똘레도 대성당은 주교가 있는 성당이어서인지 성당 내부가 웅장하다. 길이 120미터, 넓이 60미터에 달한다. 수많은 보석, 장신구, 그림, 고문서, 오르간과 조각품으로 화려하다. 대제단의 제단병풍에는 가로로 7열의 조각물이 세로로 나열돼 있다. 중앙 열에는 하단부터 성모상, 성체현시대, 예수의 탄생, 성모 승천을 보여 주는 내용이 조각돼 있고 중앙 상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이 차례로 조각돼 있다. 예수님 좌우 축에는 성모상과 요한 성인이 새겨져 있고 바깥쪽에는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혔던 두 명의 도적이 조각돼 있다. 주변의 줄에는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을 묘사하고 있었다. 제단의 뒤쪽의 예배실은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좌우에 금색으로 장식한 섬광 조각과 네 명의 대천사 조각이 있다. 천정에는 최후의 만찬을 상징하는 회색의 대리석 조각물이 있고 그 둥근 원형에서 빛이 들어온다. 그 빛이 조각에 비치도록 설계되어 환상적인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성물실에 들어갔다. 실내 천정에 대형 천정화가 그려져 있다. 정면 대리석 제단에는 엘 그레코의 ‘엘 엑스폴리오’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벽면 양쪽에는 많은 그림이 걸려 있다. 그 중 십자가에 매달린 그림 사진을 찍었다. 우리는 나와서 성가대 실로 갔다. 상부 좌석 중앙에는 주교석이 있고 그 위편에 예수의 변모상이 조각돼 있다. 그 상단에는 메달형의 ‘영원의 아버지’ 조각상이 보였다. 성가대실 외벽에는 수많은 대리석 기둥이 벽 속에 박혀 있었다. 이어 보물실로 갔다. 내부 천정은 종유석 모양의 장식이 현란하다. 중앙 진열장에는 성체 현시대가 화려하다. 현시대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 온 18킬로그램의 순금에 금으로 된 나사로 조립해서 만들어졌다. 나사만도 만 이천 개가 들어가 있다고 한다. 우측 진열장에는 세 권의 성경책이 있다. 양피지로 만들었는데 각 페이지마다 성경을 나타내는 금박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세 권의 책 중 나는 한 권의 책 사진만을 찍었다. 좌측 진열장에는 똘레도 수호성인의 황제관이 있었다. 이사벨 여왕이 쓰던 왕관을 변조시켜서 제작한 관이라고 하였다. 가이드가 설명하고 자유 시간을 주었다. 우리는 시간을 더 달라고 하였으나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를 먼저 사진을 찍어야 할지 선택해야 했다. 안사람이 성물실 오른쪽 벽 쪽에 작은 방이 있다고 들어가 보자고 했다. 들어가 보니 흥미로운 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다. 사실 미술관에서는 사진을 못 찍게 하는데 여기서는 마음대로 찍을 수 있어 좋았다. 조각품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화가인 반다이크, 벨라스께스, 리베라, 루벤스, 구이도 레니 등의 그림이 전시돼 있었다. 이렇듯 놀라운 광경을 보고나니 스페인을 정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시간이 없어 차분히 감상할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우리는 똘레도 대성당에서 나와 ‘산또 또메’ 성당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엘 그레코가 그린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이라는 작품이 걸려 있었다. 오르가스 백작은 똘레도 시민 귀족으로 성당과 소외된 이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다. 사후에도 그 재산을 이에 사용할 수 있도록 유언했다고 한다. 장례식 날 하늘에서 ‘어거스틴 성인’과 ‘스테반 성인’이 내려와 시신을 친히 매장하였으며 ‘하나님과 성인을 잘 섬기는 이는 이처럼 포상을 받느니라.’라는 말을 확실히 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그림은 이분되어 있다. 아래는 장례식장의 사람들을 그렸고 위에는 영의 세계가 그려져 있다. 죽은 이의 영혼을 팔로 감싸면서 위로 올려주는 모습이 보인다. 위 그림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앙으로 성모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삼각 구도로 하여 그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림 하단 왼쪽의 미소년이 엘 그레코의 아들이고 성인의 머리 수직선상에 있는 이가 화가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유대인 거리를 지나 ‘올리브 갈라리아’라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에 갔다. 거기서 우리는 설명 듣고 올리브유와 식초를 구입했다.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알깐다라’ 다리로 이동했다. 타호 강의 가장 좁은 협곡에 세워진 다리인데 똘레도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시대 건축물이다. 우리는 다리 건너편으로 건너가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다리 건너편에 있는 탑에는 가톨릭 국왕 부처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다시 돌아오는 다리 건너편 ‘세르반테스 언덕’에 육중한 건물이 서있는 것이 보인다. ‘알게사르’라고 불리는 왕성이다. 버스는 ‘산마르틴’ 다리라고 불리는 곳을 지나고 언덕길을 지났다. 고갯길을 지나면서 똘레도 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버스를 세우고 똘레도 시가를 찍었다. 아름다웠다. 똘레도가 강으로 둘러싸인 중세도시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마드리드로 들어왔다. 우선 ‘프라도 미술관’에 들어왔다. 건물 앞에는 고야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미술관 안의 실내 광장에선 전시된 조각상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의 그림은 찍을 수 없어 아쉬웠다. 여기 그림은 책자에 소개된 그림을 촬영한 것이다.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 중에는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고야, 루벤스 등 걸출한 화가의 그림이 많았다. 내가 본, 그리고 설명 들은 내용과 책자 내용을 종합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엘 그레코의 작품은 ‘베드로의 눈물’을 포함하여 30여 작품이 전시돼 있다. 종교적인 작품이 많았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50여 작품이 전시돼 있다. ‘삼위일체’, ‘목자들의 경내’라는 작품이 있다. 그의 대표작에는 ‘시녀들’이 있다. 이 작품을 처음 볼 때 나는 이게 무슨 대단한 작품인가 했다. 아랫부분은 공주와 시녀들이 확실하게 표현이 되어 있으나 위 부분은 까맣게 채색되어 있어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내가 점점 그림에서 멀어질수록 윗부분이 입체감이 살아나면서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다. 이런 수법을 그림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신비할 뿐이었다. 실제로 피카소가 이 그림을 좋아하여 입체파적 관점에서 다시 그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외에 그가 그린 다수 귀족의 초상화도 볼 수 있었다. 재정적 후원을 받은 귀족들의 초상화라고 했다. 고야의 작품도 감상할 수 있었다. 멍청한 왕이라고 불리는 까를로스 왕의 가족을 그린 ‘까를로스 4세의 가족’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화가 자신을 빼고 왕가 가족 수는 13명이었다. 13은 서양에서는 불길한 숫자다. 은연 중 그림 속에 왕족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 것이다. 이 당시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으면서 나폴레옹 군대의 만행을 그린 ‘몽끌로아의 총살’을 볼 수 있었다. 또 말년에 그린 검은 색 톤의 검은 그림이 한 방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 그림에는 당대의 사회적 모순, 음모, 잔인함을 고발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무엇보다 눈에 띠는 것은 고야가 그린 ‘마야부인’이었다. 한 실에 두 편의 그림이 나란히 걸려 있어 비교할 수 있게 전시돼 있었다.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왼편에, 옷을 벗은 아름다운 여인이 오른편에 있었다. 옷을 벗은 여인 그림의 예술성보다는 외설성이 문제가 되어 종교 재판에 넘겨졌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그린 그림이 옷을 입은 여인의 그림이라고 한다. 내 눈에도 확실히 옷을 벗은 여인의 모습이 선의 굴곡이나 표정에서 훨씬 나아 보였다. 그 외에 로저 벤 웨이드의 ‘십자가에서 내려오심’과 루벤스의 유명한 ‘미의 세 여신’ 그림도 보았다. 우리는 약속된 시간이 되어 전시실에서 나왔다. 나는 주어진 자유 시간에 한국어판 소개 책자가 있으면 사려고 매점을 찾아갔다. 영어판은 물론이고 일본어판, 중국어판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판은 없었다. 우리나라 문화 수준이 그 정도까지 올라가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우리는 커피 한 잔 마시고 쉬다가 미술관을 빠져 나왔다. 이번에는 버스를 타고 ‘스페인 광장’으로 갔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의 조각상이 서있다. 아래엔 소설 주인공 돈키호테와 산쵸빤사 동상이 있다. 탑의 좀 위쪽에는 세르반테스 석상이 있고 맨 위쪽에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지구를 이고 돈키호테 소설 읽기에 열중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가이드가 세계에서 성경 다음으로 팔리는 책이 ‘돈키호테’라고 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우리는 다시 ‘마요르 광장’을 구경했다. 퍼포먼스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광장을 가로질러 식당으로 향했다. 석식은 중식이었다. 외지에서는 차라리 한식보다는 중식이 더 나은 것 같다. 이제 마드리드 전문 가이드 정창욱 씨와는 이별이다. 우리는 다시 어제 묵었던 아이다 호텔에 다시 왔다. 나는 오늘 받은 감동을 책자에서 다시 확인하려고 했다. 책자를 정말 잘 구입했다는 생각이 또 들었다. 오늘 보았던, 그리고 사진을 찍었던 곳이 어디인지를 책자 속에서 확인했다. 커피와 차를 마시며 쉬고 카톡을 보내고 했다. 이제 내일 하루 밤만 자면 스페인과 이별이다. 시간이 그렇게 빠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을 청했다.
10월 15일((목)
6시 기상, 7시 15분 식사, 8시 출발했다. 오늘은 해설자 없이 사라고사를 지나 바르셀로나를 가게 된다. 사라고사까지는 5시간 거리인데, 거리가 혼잡하여 전체적으로 1시간 반 더 걸렸다. 인솔자는 ‘더 웨이’라는 영화 비디오를 틀어주었다. 간단히 내용을 소개하면, 아들과 불화가 있었던 안과의사는 아들이 산티아고 순례 중 자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는 산티아고를 찾아가 자식을 화장하고 그 유골을 안고 아들이 가고자 했던 순례길을 떠난다. 그 과정 속에서 치유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대학 동문인 이대욱이 산티아고를 가겠다는 말을 전에 들었다. 영화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알고 싶어 호기심으로 시청했다. 성모 발현도시로 유명한 사라고사에 도착했다. 사라고사는 기독교를 처음 받아들인 도시로 알려진 종교 도시이고 한때 아라곤 왕국의 주도였던 역사 도시다. 스페인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라고 한다. 우리가 찾아가는 곳은 야곱이 마리아에게서 받은 옷 기둥을 전시한 ‘필라르 성모 성당’이다. 필라르는 기둥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축제 중인 듯 꽃 전시 행사가 있고 광장에 사람들로 북적였다. 필라르 성모 성당은 스페인 내전 시 두 개의 폭탄이 떨어졌지만 불발탄의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곳은 고야의 고향으로 성당 안에는 고야가 그린 천정화가 네 개가 있다. 성당 안에서 인솔자가 해설을 하는데 안내원이 제지를 했다. 이 성당 안에서는 사진도 찍을 수도 없고 해설도 잘 들을 수 없어 답답했다. 성당 밖으로 나와 중식 식사를 마치고 자유 시간이었을 때 안사람과 함께 다시 성당으로 들어갔다. 안사람은 기도를 했고 나는 성당 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관광객 몇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레 찍었지만 차츰 내가 찍고 싶은 사진을 찍었다. 다시 탑승하고 4시간 반 걸려 바르셀로나로 갔다. 인솔자는 이번에 영화 ‘고야의 유령’을 틀어주었다. 암울한 시대상을 그린 작품이라 그 시대상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자막 글씨도 작아 잘 안 보이고 내용도 무거워 나는 화면만 가끔 쳐다보기만 했다. 6시 40분이 되어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식당에서 바르셀로나 전문 가이드 전선하 씨를 만났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예정된 야간투어가 시작된다. 야간투어에서는 장시간 운전한 관계로 기사와 차가 다 바뀌었다. 그래서 야간투어 비용을 더 낸 것이리라. 먼저 고딕 대성당을 갔다. 야간이라 대성당엔 들어가 보지 못했다. 대성당 안에는 바르톨로메 베르메조 작품의 ‘피에타’가 유명한데 아쉽게 되었다. 우리는 길을 걸어가며 가장 오래된 건물의 대문도 찍었다. 이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와 그를 후원한 이사벨 여왕을 만났던 궁전을 지나 ‘산 하우메 광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카탈루냐 자치정부 궁전과 의회건물인 ‘타운홀’이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이어서 ‘카탈루냐 광장’으로 들어갔다. 가우디가 만든 램프(1879)를 촬영했다. 광장엔 분수대도 있었지만 어두워 모습이 잘 나오지 않아 사진을 삭제했다. 이어서 ‘람블라스 거리’를 걸었다. 가이드는 내일 낮 자유 시간에 이 거리를 따라 콜럼버스기념동상을 찾아보라고 했다. 이어서 가우디가 건축한 ‘구엘 궁전’을 찾아갔다. 대문 앞의 세운 철물 구조물은 그의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황영조가 뛰었던 몬주익 언덕으로 갔다. 카페에서 바르셀로나 도시의 야경을 보며 차 한 잔 했다. 그리고 몬주익 올림픽 경기장으로 내려왔다. 경기장 앞에는 황영조 마라톤 우승을 기념하는 비가 서있었다. 사진을 찍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몬주익 거리를 내려왔다. 몬주익 거리를 내려와 몬주익 분수 쇼를 관람했다. 먼저 ‘레이나 마리아 크리스티나’ 거리에 늘어선 분수 사진을 찍었다. 장관이었다. 이어 ‘까를로스 부이가스’가 설계한 분수대의 분수 쇼를 감상했다. 음악과 함께 형형 색색으로 변하는 분수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의 ‘아그바르 타워’를 찍었다. 우리나라 수원공사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숙소에서 오늘 마지막 짐을 쌌다. 짐 정리를 마치고 카톡을 하고 잤다.
10월 16일(금)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했다. 짐 다 싸들고 탑승했다. 오늘은 1236미터의 몬세라트 산에 올라간다. 바르셀로나 북서쪽에 있다. 그 동안 차창 밖으로 본 스페인의 모습은 멀리 보이는 설산 말고는 낮은 구릉의 연속이었다. 몬세라트 산은 스페인 첫 국립공원이다. 로마인은 이 산을 ‘몬세라투스’, 즉 톱니모양의 산이라고 불렀고 여기 카탈루냐인은 이 산을 ‘몬트사그라트’, 즉 신성한 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걸려 산 정상 가까이 도착했다. 봉우리가 뾰족하고 기괴하여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괜히 애썼나 싶다. 산 정상 부근에 내려서는 산 모습을 편하게 찍을 수 있었으니까. 이 산을 올라오는 방법은 다양했다. 걸어 올라올 수도 있지만 버스도 있고 전철도 있고 케이블카도 있다. 우리는 넓은 길을 걸어 올라갔다. 가이드는 저 멀리 말로 계곡의 가장자리에 있는 수도원이 있으니 시간 있을 때 다녀올 분은 다녀오라고 했다. 가는 데 4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먼저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사람을 따라 눈이 움직이는 석상을 보았다. 그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검은 성모상’이라는 오래된 성모자의 목조상이 있다.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는 들어준다는 기적의 성모상이라고 한다. 우리는 순서를 기다려 하나씩 기도하고 내려왔다. 돌아 나오는 길 벽 쪽에 그리고 동굴 벽쪽에 무수한 촛불이 켜있는 것을 보았다. 나와서 가이드에게 수도원 가는 길을 물었다. 그리고 안사람과 같이 길을 나섰다. 처음에는 내려가는 길이었다. 이따가 올라올 때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철 간이역을 지나고 좁다랗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지났다. 내려다보는 풍광과 저 멀리 있는 수도원 쪽의 풍광이 아름답다. 갈림길에 들어섰다. 우리는 수도원 쪽인 오른쪽으로 내려갔다. 다시 전철 간이역이 보였다. 수도원을 가려면 협곡 길을 돌아돌아서 가야 한다. 안사람은 발목이 아픈지 혼자 갔다 오라고 했다. 그래서 혼자 나섰다. 가다가 보니 가는 길마다 예수 상이 조각돼 있다. 사진을 찍으며 올라갔다. 일행 중 나 말고 수도원에 가는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중년 여성 세 분이 이미 갔다가 내려오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올라가면 되었다. 이내 수도원이 보였다. 그런데 수도원은 들어갈 수 없게 철문이 닫혀 있었다. 이제 하산해야 한다. 안사람이 안 가 본 길을 볼 수 있게 내려오면서 길도 찍고 아래 풍광도 찍고 아까 놓친 조각상도 찍었다. 처음 맞이했던 간이역 가까운 곳에 안사람이 다른 일행 분과 같이 있었다. 가이드 말대로 사진 찍으며 갔다 왔더니 1시간 반은 걸린 것 같다. 오랜 만에 풍광 좋고 공기 좋은 산길을 걸었고 수도원을 다녀 온 성취감에 기분이 좋았다. 버스를 탑승하고 이번에는 반대편 산길을 따라 내려왔다. 또 다른 맛이다. 내려와 점심 식사를 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시내가 혼잡하여 약속 시간을 정하고 람블라스 거리를 걸었다. 시민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으로 혼잡하다. 길거리에는 꽃 가게, 음료수와 음식물을 파는 가게, 기념품을 파는 가게에다 퍼포먼스 하는 사람과 개인적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들도 많았다. 잠시 구경도 했지만 관광객들로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콜럼버스기념동상으로 가는 길이 멀게 느껴져 우리가 가는 방향이 맞나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콜럼버스기념동상이 보였다. 동상 앞에도 물건 파는 잡상인으로 가득했다. 우리는 거기서 기념조각을 몇 개 샀다. 콜럼버스기념동상의 규모는 굉장했다. 80미터 이상의 주철 기둥에 7미터 높이의 콜럼버스 조각상이 서있다. 워낙 높다보니 콜럼버스 상이 작게 보였다. 기념동상 주위에는 사자상이 둘러 싸여 있었다. 돌아오다가 ‘보케리아 시장’ 사진을 찍었다. 섬세한 먹거리로 유명하고 아름답고 활발한 시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간 관계상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우리는 시간에 맞춰 탑승할 수 있었다. 이제 공항으로 간다. 가는 도중에 카탈루냐 광장 외관과 가우디 작품인 아마틀리 저택, 바틀로 저택을 찍었다. 지나가는 버스 속에서 찍은 것이라 아마틀리 저택은 제대로 찍지 못했다. 또한 가우디 작품인 까사 밀라 저택도 찍었다. 이는 제대로 찍었다. 차가 우회전해서 다시 돌아와 또 한 번 옆면을 찍었다. 공항에 도착했다. 세 시간 전에 왔지만 공항 직원은 보이지 않았다. 한참 기다린 후에 탑승 절차를 밟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가이드와 작별했다. 보안검색대에서 무엇에 걸렸는지 보안원이 내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면세점에서 먹을거리인 과자와 초콜릿을 샀다. 안사람은 선물로 양주를 샀다. 그리고 비행기를 탔다. 돌아오는 시간은 12시간, 출국 때보다 두 시간 짧다. 왠지 모르겠으나 기내 간격이 전번보다 넓은 것 같다. 이제 밤중이어서 잘 시간이다. 시종 졸면서 돌아왔다. 그래도 기내에서 밥 두 끼는 잘 먹었다.
10월 17일(토)
인천공항에 돌아오니 예정시간보다 20분 빠른 오후 세 시였다. 이제 휴대폰 데이터를 풀었다. 역시 긴 행렬이다. 짐을 찾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안사람이 호삼에게 전화해서 롯데호텔 앞에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공항버스를 기다려 탔다. 롯데호텔 앞에 오니 이미 시간은 6시가 되었다. 호삼 내외가 대기하고 있었다. 같이 짐을 싣고 집에 돌아왔다. 7박 9일간의 스페인 일정이 짧아 아쉬움이 느껴졌다. 11박 12일쯤 되어야 너무 길지도 않고 찬찬히 감상도 하고 간 김에 투우도 보고 축구 경기도 관람할 수 있었겠다. 그러면 지금보다 더 많은 여행비를 내야겠지.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스페인에서 받은 감명을 잃지 않기 위해 우선 여행 첫날인 10월 9일 일기를 썼다.
스페인은 다녀 온 사람이 또 가고 싶은 나라라고 했다. 나 역시 그런 기분이었다. 누가 나에게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인지 세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가우디의 성가족성당, 몬주익의 분수쇼, 푸라다 미술관에서의 명화 감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성가족성당의 기발한 천재성과 분수쇼의 환상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명화의 예술적 가치에 감명을 받아서다. 혹자에 따라서는 투우, 아니면 축구 관람을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투어에서 그것은 내가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내가 이해한 스페인은 다음의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스페인은 도시와 자연이 아름답게 조화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은 우리나라보다 다섯 배나 큰, 드넓은 땅을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낯선 이국 땅이 어떤 모습인지 차창 밖을 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흥미를 잃어버렸다. 낮은 구릉의 척박한 땅에 올리브 나무만 줄을 맞춰 심어진 모습뿐이었다. 양떼나 소떼가 푸른 초원에 풀을 뜯는 모습은 오히려 예외적인 것이었다. 마치 우리나라 고속도로를 달릴 때 차창 밖 풍경의 무미건조함을 느끼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나는 스페인에서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은 거의 느껴 볼 수 없었다. 구릉이 있고 산이 있고 물줄기가 흐르는 계곡 등 아기자기한 면에서는 우리나라가 훨씬 낫다. 그러나 도시에 당도했을 때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나라같이 아파트 일색이 아니다. 물이 있고 나무가 있고 도시 건축이 있다. 이들이 획일성에서 벗어나 아름답게 조화된 모습을 느껴 볼 수 있었다. 아직도 중세 도시의 모습을 띤 도시로부터 성당, 왕궁, 성곽, 광장, 다리, 분수 등 한결같이 보석을 가공해서 만든 것처럼 아름다웠다. 골목길 주택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을 느꼈다.
둘째 스페인은 기독교 문화가 뿌리 내린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번 투어에서는 성당 순례라고 할 만큼 성당을 찾아다녔다. 가우디 가족 성당, 세비야 대성당, 코르도바 대성당, 똘레도 대성당, 필라르 성모 성당, 바르셀로나 고딕 성당 등이다. 한결같이 이 성당은 도시의 중심에 지어진 종교와 문화의 산실이었다. 그곳에 .건축 예술이 있고 명화가 있고 아름다운 모자이크 예술이 있었다. 거기에 이슬람 문화가 가미되어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 정신에 투철하면서도 이슬람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보존했다. 그래서 스페인이 특색있는 나라가 되지 않았나 싶다. 북부 유럽 사람들은 스페인에 아시아의 자취가 강렬히 남아있다고 본다. 이는 스페인에 남아 있는 이슬람 문화 영향일 것이다. 이는 교회 건물에서도 알함브라 궁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이슬람 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은 다양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인종 차별 없이 공존하여 살고 있다. 이런 모습에서도 기독교와 이슬람교 문화의 공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 스페인은 예술을 사랑하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성당 안에서 볼 수 있는 각종 예술, 이를 테면 건축, 조각, 병풍, 모자이크, 성화, 성물, 장식은 한결같이 그들의 신앙심을 대변하지만 또한 장인이 만든 예술품이라는 것이다. 스페인은 천재 건축가 가우디뿐만 아니라 엘 그레코, 고야, 벨라스케스, 루벤스 그리고 피카소에 이르기까지 세게적인 화가를 배출했고,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등 세계적인 성악가를 배출했다. 집시 예술도 그들의 일부로 받아 들여 플라멩코가 세계적인 예술이 되지 않았는가. 비단 그것이 옛 시대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도시에는 세계적인 명건축이 즐비하다. 그들은 그 예술을 사랑하고 있고 잘 보존하고 있고 분수쇼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 어찌 스페인이 예술을 사랑하는 나라라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7박 9일의 짧은 투어로 스페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스페인에 가서 그들의 문화와 예술을 더 보고 사랑하고 느껴 보고 싶은 것이다. 스페인이 3만 달러의 소득 국가라고는 하지만 그들 생활에서 사치스러운 모습을 느껴 보지 못했다. 검소한 나라라고 느꼈다. 스페인에는 이렇듯 높은 문화 수준을 누리면서도 검소한 삶을 사는 시민 의식이 있었다. 비록 시에스타도 있고 하루도 다섯 끼 식사를 하는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어 우리나라 문화와는 상당히 다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친절함과 소박함이 묻어났다. 인간의 본성은 언제 어디서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소박한 진실을 다시 확인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10월 20일 기록)
첫댓글 여행 내용을 상세히 기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페인 도시 중 한 곳이라면 바르셀로나 . 추가한다면 똘레도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