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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MBORATION D"UNE METHODE
Ⅱ- ②
영혼은 신성의 광명으로 전적으로 충만되고, 전적으로 그의 창조주로 변화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에게 초자연적으로 그의 존재를 전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신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이며, 신이 가진 것을 갖게 되며 이 양자(영혼과 신)가 가진 것은 이 변화에 의해서 똑같은 사물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또한, 마치 유리가 그것을 밝혀 주고 또한 그것에 침투하는 빛과 별개의 것으로 머물러 있듯이 비록 영혼이 그의 존재를 갖고 있고 그의 존재는 신적인 존재와는 별개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러한 참여에 의해서 영혼이 영혼이기보다 더 신으로 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Montee, Ⅱ, 5장
영혼적이기보다 신에 가까와 보이는 이 영혼은 어떤 바라문에 의해 칭송되는가? 랭보는 말하기를 "나는 하나의 타자(他者)이다" 라 했으며, 그리고 바가다드 지타에서도 우리는 크리슈나가 "나는 모든 존재들의 육체속에 깃들어 있는 영혼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었다.
법열(法悅)을 경험했던 신비적 크리스챤들은 모두가 보편적 원칙과 결합했던 그들의 견해를 피력하는데 다음과 같은 말로 일치한다. "마리 드 발랑스(Marie de Valence)가 말하는 것을 보면, '신(神) 속에서 신을 보는 것, 신 속에 창조물들을 보는 것, 신 속에 자기 자신을 보는 것' 이다.
결국, 이 문제에 관해서는 꽁드랑(Condren) 신부의 한 편지에서 발췌한 하나의 의미심장한 구절을 여기 내놓는다.
"즉 그러나 이와 같은 신령(神靈)이 예수 그리스도의 회원인 인간들(물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회 회원들이기 때문에)을 사로잡는 그런 마귀의 유혹 속에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토록 성스럽고 순수하게 머무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 말씀 안에 그리고 나 자신 안에, 추호도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오지 않고, 예수가 있는 것에 아무것도 더하지도 않고 그가 있는 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빼지도 않고 완벽하게 머무르고 있다. 그것은 예수 자신을 인간들에게 실천함으로써 자기 실천 속에 인간들을 말소하며 이와 같은 그(예수 그리스도)의 실천은 실천 자체를 완성시키기 때문이다. 그토록 실천은 성스러우며, 그토록 이 실천은 창조된 것으로서의 어떤 고통도 받을 수 없고 자기 자체의 순수성밖에 어느 것에도 견디고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Bremond : op. cit, T, Ⅲ. (Lettres, p.104~108, par le Pere Condren)
신비주의 기독교인들은 누구나를 불문하고 금욕과 기도를 통해서 법열에 도달하는데 그 금욕과 기도의 세부적인 것들은 요기(yogi)들이 일체(union)에 도달하기 위해 쓰는 방법과 흡사하다. 기도속에서 똑같은 말들의 반복과 찬미 예식에서 동일한 물체에 대해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 등, 이러한 행위들은 정신이 의식(conscience)에서 해방되는 일종의 실신 상태를 만들게 된다. 그것은 또한 육체가 금욕을 통해서 약해져 갈수록 더욱 용이하게 이루어진다.
어느 시대, 어떤 신앙에 있어서의 신비주의자들도 본능적으로 또는 방법적으로 같은 목적을 위해서 같은 수단을 사용한다. 그래서 그들의 계시는 전반적인 효과를 가져오며, 그래서 종교들간에 놀라운 통일성을 수립하게 된다. 그렇나 계시는 어떤 방법의 실천이나 그들의 타고난 기질에 의해서 이룩되는 하나의 특수한 수용상태에 도달하는 자들에게만 허용된다. 이러한 상태는 그들로 하여금 보통사람이 알지 못하는 실재에 도달하도록 하며, 영감을 받은 자로서 말할 수 있게 한다. 고대 사람들은 신비주의자들의 영감과 시인들의 영감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에 놀라서 이 두 가지 사이에 아무런 차이를 두지 않았으며, 마술사의 주문과 시신의 도움을 받은 자들의 말을 지칭하는데 동일한 낱말을 사용했다.
랭보가 고대 철학과 그리이스의 시(時)들을 연구한 후에 도달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동화(同化)의 세계이다. 그리고 그러하 것을 전혀 이해할 능력이 없는 그의 학우들과의 대화에서 그가 그의 문장 기술(art)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런 것의 목적과 수단을 희미하게밖에 보지 못하고 있어. 새로운 감각들, 말에 의해 전달하기에는 너무 강력한 심정을 말이야. 나는 알아보고 체험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명확하게 말할 수가 없군. 좀더 많이 지각하고, 좀더 많이 체험하자...... 좀더 풍부한 언어의 지식이 도래하면서 청춘은 지나가 버린다. 예민한 감수성은 잠이 들고...... 일깨워라! 자극제를, 무당들이 들이마시는 향로와 독약같은 자극제를 달라!
Je n'en suis encore qu'a entrevoir le but et les moyens. Des sensations nouvelles, des sentiments plus forts a communiquer par le verbe. Je percois, j'eprouve, je ne formule pas comme je veux... Percevons, eprouvons davantage... Quand est venue la science d'un langage plus riche, la jeunesse est partie, les vibrantes sensibilites s'endorment... Les reveiller! Des excitants! Des parfums, les poisons aspires par la sibylle!...
에른스트 들라이에 : 'Souvenirs familiers' (메셍, 1955)
랭보는 고통스러운 열정으로, 미지(未知)에 도달하게 될 작업의 탐구를 계속한다. 발전시켜야 할 주체-자기영혼-에 대해서 작용하기 전에 그는 영혼을 찾으려고 애를 쓴다.
시인이 되려고 하는 자의 최초의 연구는 그 자신을 완전히 알아야 하는 일이다. 그는 자기 영혼을 찾아서, 그것을 검토하고 그것을 시험하며, 그것을 이해한다. 그것을 알게 된 즉시 그는 영혼을 가꾸어야 한다.
La premiere etude de l'homme qui veut etrre poete est sa propre connaissance entiere. Il cherche son ame, il l'inspecte, il la tente, l'apprend. Des qu'il la sait, il la doit cultiver.
Rimbaud a Paul Demeny (Charleville, 15 mai 1871)
과연 그는 영혼의 기능(les facultes)들을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영혼을 연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지성이란 영혼이 잠재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그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알아보게 할, 그런 능력이 아니다. 지성이 계시(啓示 revelations)하는 것들은, 다소간 높은 수준이나, 어떤 정신이든지 다 가지고 있는, 이름붙일 수 없는 기능들이다. 그리고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능들보다 기묘하게도 뛰어나게 우월한 능력을 가진 기능들을 발전시킴으로써 랭보가 이르려고 하는 계시들에 비해서는 훨씬 더 빈약하다.
이러한 사고의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 실험심리학에 관한 최근의 업적들이 오늘날의 한 정신의학자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말을 하도록 했다는 것을 여기서 지적해 보는 것도 무익한 일은 아니다.
즉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던 소위 의식적이라고 하는 사고의 양상들 외에도 그리고 최근에야 밝혀진 사고의 잠재 의식적인 양상이라는 것밖에도 인간이란 존재는 '초월적 양상(modalite transcendantale)'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에 관한 조사의 방법과 초월적 양상의 인식 과정, 그리고 그것의 지식의 넓이와 같은 것들이 이제부터 탐구해 가야 할 일이며, 그 반면에 이 초월적 양상은 그것 자체가 불러 일으키는 점복 주체(des sujets metagnomes)의 중매로, 자신에 대한 개인적 생명의 일반적인 방향을 알고 있으며 또한 개인적 생명의 임기웅변적인 진전을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을 표명한다.
예외적으로 그리고 우발적으로, 인식들은 사고의 초월적 양상에서 잠재 의식의 양상(꿈, 히스테리적 상태 등)으로, 의식적인 양태로 넘어가며, 자신에 관한 초규법적인 인식(어렴풋하거나 또는 뚜렷한 예감, 생명에 대해 강렬한 반향을 일으키는 어떤 사건에 관한 뜻밖의 정보 등등) 우연히 일어나는 현상들 중의 하나를 밝힌다. 수많은 그와 같은 일들이 많은 증언에 의해서 수집되고 입증되어 있다.
시인이 인간의 영혼은 자신을 사물의 실재로 인도할 수 있는 인식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을 때, 그에게 남은 일은 오직 이러한 소질들에 열중할 수 있는 발전의 기술을 연구하는 일뿐이다. 한층 더 미묘한 감각을 얻기 위해서 그의 육체적인 감각을 없애 버리는 일이 이후의 그의 목표가 될 것이다.
랭보는 이러한 것의 탐구 속에서 모든 신비주의자들이 다 그랬듯이 암암리에 금욕주의(ascetisme)를 묵상(Meditation)과 구별한다. 즉
"시인은 오랜 시간을 통해서 방대하고 철저하게 계산된 모든 감각의 착란(錯卵, dereglement)으로 자신을 견자로 만든다"
Le Poete se fait voyant par un long, immense et raisonne dereglement de tous les sens
고 우선 말한다. 그 다음으로, 그는
"온갖 모습의 사랑과 고뇌와 광증을 그는 자기 자신 속에서 탐구하며 자신 속에 있는 일체의 독소들을 소진해서, 그 정수만을 남겨 갖는 것이다"
Toutes les formes d'amour, de souffrance, de folie ; il cherche en lui-meme, il epuise en lui tous les poisons pour n'en garder que la quitessence
라고 말한다.
이러한 장대한 초탈의 노력에 있어서, 시인은 진실로 이 세상에서 소위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의 암살자가 된다.
말할 수 없는 고역, 거기에서 그는 모든 신념과 모든 초인간적인 힘이 필요하며, 거기에서 그는 무엇보다도 위대한 중환자, 위대한 범죄자, 위대한 저주받은 자 - 드디어는 궁극의 식자(識者)가 되는 것이다! - 왜냐하면 그는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Ineffable torture, ou il a besoin de toute la foi, de toute la force surhumaine, ou il devient entre tous le grand malade, le grand criminel, le grand maudit - et la Supreme savant! - car il arrive a l'inconnu!
(Rimbaud a Paul Demeny, 15 mai 1871)
아르덴느 숲에서의 그의 고독한 명상, 샤를르빌에서 빠리로의 그 지긋지긋한 도보 여행, 굶주림, 갈증 등이 그의 육체에 시련을 가했으며, 그의 정신을 해탈시켰다. 여기에 관해서, 그의 매부가 빠리에서의 랭보의 생활에 관한 놀랍도록 상세한 내력을 전해 주었다.
이 젊은이가 살아간 생활은...... 대체로, 도움을 청하기에는 너무나 자존심이 강하고, 사소한 좀도둑질을 저지르기에는 너무나 정직한 그런 가난한 자들의 그 지긋지긋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그가 괴상한 속도로 성장하였고, 그 때의 육체적 상태가 과다한 양의 영양을 필요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히 며칠동안이고 계속해서 조금도 먹지 않고 지내곤 했습니다. 설사 그가 먹는다 해도, 그것은 거의 항상 길에서 주워 모든 빵껍질이나 시장 바닥의 쓰레기들이었습니다.
Paterne Berrichon : A Rimbaud, le poete (Mercure de France), p.154
그래서 그의 생활은 그가 실천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금욕주의를 강화하는 일을 맡아 보는 것이었다. 오래 계속되는 단식은 모든 금욕의 법칙들 중의 하나이다. 이 금욕은 정신에게 기묘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 같다. 즉 심리적 활동은 몇 갑절 증가되고, 그래서 의식은 어리둥절하니 순수하게 객관적인 근원에서 그에게 나타나는 계시들을 기억에 담는 것이다.
자진해서 했거나 외부 사정으로 강제당했거나, 랭보가 겪었던 단식 외에 그의 청춘시절의 대부분을 통해서 거의 완전하게 지킨 동정(童貞)과 잠을 안 자고 지낸 수많은 밤들을 여기 첨언해 둘 수 있다. 이 마지막의 예(오랜 철야)에 관해서는, 들라이에에게 보낸 그 유명한 편지가 의미심장하다.
지금 내가 일하는 것은 밤에의 일이다. 자정부터 아침 5시까지 지난 달, 무슈 르 프랭스(Monsieur-le-Prince) 거리* 에 있는 내 방은 생 루이(Saint-Louis) 고등학교의 교정에 면하고 있었다. 나의 조그만 창문 아래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있었지. 새벽 3시에 촛불은 희미해지고, 수많은 새들이 동시에 나무들 사이에서 지저귀기 시작한다. 이제는 끝장이다. 그 이상 더 일을 할 수 없다. 형용할 수 없는 이 시간, 이 새아침 첫 시간에 사로잡혀 마냥 나무들을, 하늘을 쳐다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완전한 정적에 싸인 고등학교 기숙사를 바라보곤 했지. 그러면 거리에는 이미 단속적으로 소리내는 또렷또렷한, 그러나 달콤한 무개화차의 소리가 큰거리에서 들려왔다. 나는 망치처럼 생긴 파이프를 피웠었다. 지붕 위에서 침을 뱉았었다. 왜냐하면 내 방은 다락방이기 때문이다. 다섯시에 나는 약간의 빵을 사러 내려갔었다. 시간이 되었다. 노동자들이 도처에서 행진하고 있다.
Rimbaud a Ernest DELAHAYE, Parmerde, Junphe 1872)
그런데 대부분의 전기 작가들은 랭보가 가끔은 술과 하시슈(hachi-sch : 마약의 일종)아 아편 등을 사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낭만적인 세목은 내가 보기에 별로 확실한 것 같지가 않다. 어쨌거나, 설사 그가 이렇듯 용이한 방법에 호기심을 가졌었다 할지라도 그는 곧 그러한 것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은 확실하다. 「갈증의 희극」(Le Comedie de soif, 랭보의 시)이 그것을 충분하게 입증해 준다.
법열을 얻으려는 이러한 고통스런 수련을 통해서 그 시인이 추구했던 목표는 육에와 의식에서 유래하는 모든 우연성에서 벗어나서, 순수 인식에 도달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야심은 관념들의 파생체(derives) 그 너머에 있는 관념들(이데아)을 되찾으며 특수한 성질의 다양성들이 그 위에 접목되어 있는 전형적 현상들을 어찌보면 격리 시키려고 애쓰는 철학자들의 야심과 혼동된다. 현실의 다양성을 넘어서 '절대'를 관조한다는 일은 시적(時的)인 계시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러므로 시(時)란 모든 인식들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직접적인 형태이다. 오직 '시'만이 행동성의 가소로운 양태들을 통해서 인간이 추구하는 해방으로 향하여 인간을 전진시켜야만 한다. 랭보의 말을 들어보자.
시인은 자기가 사는 시대에 보편적 영혼 속에서(견자가 되기 위해) 잠깨어나는 미지의 양(量)을 결정할 것이다. 그는 그의 사고의 형식보다 더한 것, '발전으로의 전진' 의 알림보다 더한 것을 내놓을 것이다. 탈규범(脫規範, 즉 엄청난 일)이 모든 사람들이 골몰하는 규범(즉 정상적인 일)이 되며, 시인은 진실로 발전을 몇 곱으로 키워내는 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더 한층 시인들이 시인들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시는 해동에 리듬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앞서 나갈 것이다.
Le Poete definirait la quantite d'inconnu s'eveillant en son temps dans l'ame universelle : il donnerait plus que la formule de sa pensee, que l'annonciation de "sa marche au Progres." Enormite devenant norme absorbee par tous, il serait vraiment un multiplicateur de Progres! Et encore : L'art eternel aurait ses fonctions comme les Poetes sont citoyens. La Poesie ne rythmera plus l'action, elle sera enavant.
폴 드므니에게 보낸 (1871. 3. 15) '견자의 편지' 에서
그의 과업을 이와 같이 규정하고 난 다음, 그는 그 시대의, 시의 상황에 일별(一瞥)을 던진다. 바로 이 시대에 초기의 낭만주의자들은 그들의 걸작들을 써냈다. 랭보는 라마르띤느나 위고의 작품에서 그가 조금 전에 그것에 대해 대충 설명한 바의 견자적인 환시(幻視)의 흔적을 밝혀낸다. 그러나 설사 그들이 견자들이었다 해도, 자기들이 그렇다는 것을 아주 잘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 의하면 라마르띤느는 헐어빠진 형식에 사로잡혀 그의 모든 환시를 해독하지 못했고, 위고는 젊은 랭보가 고발하는 그 거대한 인품, 자기 자신의 개성의 숭앙, 이 옹고집스런 측면이 너무나 자주 이 위대한 선배에게서 "아르덴느의 시인이 하나의 타자(他者)임을 밝혀낸 '나'의 목소리" 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박탈해 버렸던 것이다. 위고의 만년의 작품들에서 점점 드러나는 그의 환상적 감각은 랭보의 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랭보는 이 두 위대한 낭만주의자들이 자신들도 미처 깨닫지 못한 어느 한 목표로 향하는 진전의 과정에서 다만 우연과 모색만을 볼 뿐이다.
"그들의 영혼의 배양은 우연하게 시작되었다. 즉, 버려진 기관차와 같은 것인데, 그러나 언젠가는 철로 위로 구르려고 불을 때고 있는 기관차이다."
La culture de leurs ames s'est commencee aux accidents : locomotives abandonnes, mais brulantes que prennent quelque temps les rails
라고 말한다. 그들의 작품에서는 환시(幻示)를 획득해서 발전시겨 나갈 목적으로 정신의 능력을 조직적 연마로 가꾸어 간다든가, 금욕의 수련으로 가꾸어 가는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뮈세(Musset)로 말하면, 우리의 이 이론가(랭보)는 그의 선배들이 가졌던 속성인 프랑스적 절도와 경박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 낭만파 시인의 바로 그 유형을 뮈세에게서 발견한다. 고대의 문학 체제는 시(時)를 하나의 인식 수단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시인을 사제의 부류에 속하게 했던 반면에 현대 사회는 시귀(時句)를 예술 속에서, 인습적이고 세련된 장난으로만 보아 오는 무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나간 3세기 동안 이론의 여지없이 유럽에서 최상위를 유감없이 차지했던 프랑스 문학은 대중의 정신 속에 프랑스적 특성과 불가분의 관계로 남아있고 뮈세가 그의 낭만주의 운동 참가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상속자로 보여지는 이성과 절제라는 무미건조한 개념을 심어 넣었다. 영국과 독일이 바로 불가사의와 망상적인 의의(意義)와 아울러 비의(秘義)의 종교에 지배되는 환각적이고 신비적인 그리이스의 발견에 의거하는 인간 오성(悟性)의 한계를 철폐하려는 의지가, 바로 그 참신성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메시지를 인류의 유산에 가져올 때에, 프랑스는 17,8 세기의 작가들이 시에 관해 만들어 놓은 개념으로부터 망설이는 태도로 밖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니에와 마찬가지로 라신느에 잇어서, 그들 자신들을 표본이라고 주장했던 그리이스는, 현실적이라기보다, 더 망상적인 마음 속의 그리이스였으며 일종의 이상적 프랑스로서, 그 입법자와 논리학자(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을 빗대어 말함)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 프랑스 천재들이 당연히 만들어내야 할 그러한 종류의 그리이스로 미리 정해 버렸던 것이다.
이와같이 '견자의 편지'는, 랭보의 말 그대로 따르면, 그것은 그리이스로부터 낭만주의 시기까지 시의 변화과정을 서술하는 것인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이스적 메시지에 대한 어떤 그릇된 개념을 타파하는 것과 거기에서 진정한 의미를 다시 솟아나도록 하는 일에 집착한다. 랭보의 말에 따르면 초기의 낭만주의자들은 인습에서 벗어나 그들의 영혼을 되찾으려고 주력했으나 이와 같은 노력에 대한 최초의 결실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그들 다음에 이어지는 세대들을 참조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 다음 세대를 구성하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정녕 동양적 예지를 궁극적으로 맡아 가지고 있는 최후의 보유자인 고대의 그리이스로 눈을 돌리고 있으나 거기서 하나의 조소적(彫塑的) 완벽성밖에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 조소적 완벽성에서 박진력의 선(線)들을 결정하려고 애쓰지 않고, 아직도 양식이라는 말의 동의어로서 이성이란 말을 쓰고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불가시(不可視)를 보고 불가청(不可聽)을 듣는 일은 죽어 버린 사물들의 정신을 다시 들추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일이므로, 보들레르는 최초의 견자이며, 시인들의 왕이며, 진정한 신이다.
Et inspecter l'invisible et entendre l'inoui etant autre chose que reprendre l'esprit des choses mortes, Baudelaire est le premier voyant, roi des poetes, un vrai dieu.
Rimbaud a Paule Demeny, 15 mai 1871 'Lettre du voyant'
보들레르의 플라톤적 이상주의, 스웨덴보르그에 의해 쇄신된 만물조응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법칙이 어렴풋이 보여 주는 유일한 실재를 감각세계의 양상 이면에서 찾아보려는 그의 노력, 인식의 방법으로서의 유추에 관한 신앙 등은 그가 고대 그리이스의 정신으로 빛나는 진정한 예지의 전승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랭보가 보들레르를 '한 진정한 신(神)' 이라 칭했을 때, 단지 그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터져나온 감탄이 아니라, 진정 그는 동양인들이 위대한 몽상의 충만성 속에 들어간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식으로 보들레르를 진정한 신으로 본다. 다시 그의 경지에 이르려고 시도하기 위해서는 '환각에 사로잡힌' 우리 세대들이 어렴풋이 그 맹렬한 힘과 그 위대성을 느끼고 있는, 흔히 잊혀졌으나 결코 연맥이 끊어진 일이 없는 저 위대한 형이상학적 전통과 다시 인연을 맺는 것이 마땅하다. 인간의 영혼은 자기가 영혼이라는 것보다도 더, 자기에게 신(神)을 알아볼 수 있다는 확신이, 이 확신의 피어남에 요구되는 노력에 뒤이어, 랭보를 우리가 이제부터 엿볼 수 있는 야심을 갖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 소르본느 대학(현, 파리 4대학) 정문을 마주하고 있는 생 루이 고등학교 뒷골목에 있는 거리
- 완결 -
:: 이 자료는 이준오 님 번역의 Rolland de Reneville 의 <見者랭보>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p.59~111, 문학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