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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월만의 평양수복,행주대첩,조명연합군으로 1년만인1593.04.20한성 수복, 선조1593.10.01한양환도
(1592.09.01~1593.10.01)
명나라는 1차로 파견했던 조승훈이 평양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요동으로 철수한 이래 즉시 재 출병을 할 필요성을 절감했으나 재출병을 실천에 옮기는 데에 상당한 시일이 경과했다. 당시 명은 부총병 발배가 영하에서 일으킨 반란 때문에 조선에 대규모 병력을 신속히 파견할 수 없었다. 명나라는 우선 경략 송응창을 먼저 조선으로 보냈는데, 송응창의 선발대는 의주로 건너와 행재소의 경호와 함께 조선군을 훈련시키는 일을 하였다.
파병이 지연되자, 명은 일단 송응창과 함께 건너 와 있던 유격장군(遊擊將軍) 심유경으로 하여금 동정군(東征軍)이 조선에 출병할 때까지 외교적 교섭을 통해 일본군의 북진을 지연시키며 시간을 벌도록 하였다.
심유경은 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고니시와 9월 1일 평양성 북쪽 강복산 밑에서 만나 회담을 성사시켜 9월 1일부터 50일 기한부로 잠정적인 휴전을 성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일본군 역시 월동준비와 길어진 보급로로 인한 보급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전력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명 조정은 그에 앞선 8월 18일 병부우시랑 송응창을 경략비왜군무로 임명하고, 각종 무기와 차량을 제작하는 한편, 군사를 징집하여 조선 출병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8월 26일 경략 송응창이 소주, 밀운, 천진, 영평 4도의 수비 병력을 증강하여 일본의 명 내침에 대비하였다.
9월 3일 명 황제 신종은 설반에게 칙서를 보내어 ‘요양 정병 10만을 보내겠다’고 알려왔다.
10월 16일 신종은 제독(提督) 이여송을 도독군무(都督軍務)로 삼아 동정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11월 10일 명나라측에서 ‘7만 대군이 산해관을 지났다. 압록강까지는 명이 군량을 담당하고 강을 넘어서는 조선이 담당하라’ 고 통고해 왔다.
명은 고니시와의 50일간의 휴전기간이 모자라자, 다시 한 번 심유경을 보내어 고니시와 회담을 벌이면서 시간을 끌도록 하였다. 이 회담에서 심유경은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을 돌려보내고 먼저 군사를 물리라’ 고 주장하였고, 고니시는 명군측의 ‘봉공의 허락’ 과 ‘책봉사의 파견’ 을 요구하여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고 말았으나, 양측이 ‘봉공의 허락’ 을 조건으로 ‘일본군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 라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이듬해인 1593년 1월 15일까지 휴전기간을 50일간 연장함으로써 명나라로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명은 12월 제독 이여송이 요동에 도착하여 경략 송응창과 작전회의를 갖고, 8일에 4만여 명의 동정군을 삼군(三軍)으로 편성하고, 그 지휘부를 정하였다.
도독군무(都督軍務) 제독 이여송, 중협대장(中挾大將) 부총병관(副摠兵官) 이여백, 좌협대장(左挾大將) 부총병관(副摠兵官) 양원, 우협대장(右挾大將) 부총병관(副摠兵官) 장세작 등이다.
명의 동정군은 부총병 왕필적을 선봉장으로 삼아 보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12월 13일에 왕필적 선봉부대가 압록강을 도하한 데에 이어서 그 이튿날인 14일에는 부총병 오유충이 병력 1천 5백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넜다.
12월 25일 동정군의 총대장인 제독 이여송은 그들의 군세가 10만이라고 허장성세하면서 압록강을 건너 의주 용만관으로 진출하였다.
1593년 1월 6일 명의 동정군 총대장 이여송은 평양성 근교까지 진군하여 성을 공격하기 위한 최종적인 태세를 갖추었다. 동정군이 평양성 공격을 준비하자, 조선에서도 5일 평양성 공격에 따른 선후책과 군량 확보 대책을 의논하였다.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은 우 방어사 김응서, 좌 방어사 정희현으로 하여금 8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공격에 참전케 하였고,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 서산대사 유정의 7백 명을 비롯한 총 2천 2백 명의 의승군이 명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할 준비를 하였다.
한편 고니시는 명군 대병력이 평양성을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황해도 봉산에 주둔중인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에게 병력 증원을 긴급히 요청했다. 그러나 6,000여 병력을 가지고 있던 오토모는 고니시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한성 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증원군이 오지 않자 일본군은 사기가 저하되었다. 평양성을 버리고 철수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고니시는 평양성 사수를 결의했다.
1월 6일 동정군은 평양성 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성 밖에 녹각책자(鹿角冊子)를 설치하고 성벽에는 조총 사격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온갖 장애물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구축해 놓았다. 성의 북쪽 모란봉에는 일본군 2천여 조총병이 배치되어 있고, 봉우리 또한 높이 솟아 형세가 매우 험난하였다.
조명연합군은 평양성 서쪽 외성에서 공격을 실시하여 모란봉, 칠성문, 보통문을 공격하고, 이일, 김응서의 조선군은 함구문을 공격하도록 배치를 완료했다. 명군 부총병 오유충 군사와 조선 의승병 부대가 처음으로 공격해 들어 갔으나 거짓으로 패한 척 후퇴하자 일본군은 기세를 올리며 추격해 왔다. 그러자 후퇴하던 명군이 일제히 돌아서서 일본군을 포위하여 맹공을 가하여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조선군 8천 명이 성의 남쪽 함구문을 공격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접근하다가 일본군의 매복에 걸려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새벽 일본군 3천여 명이 명의 양원, 이여백, 장세작 등의 진영 세 곳에 대한 야습을 감행하였으나, 명 군은 장수 둘의 지휘에 따라 일본군의 기습을 물리쳤다.
7일 조명연합군은 본진을 보통문 앞으로 전진 배치하고 조선의 정희현과 김응서로 하여금 경 기병대를 이끌고 적을 유인하도록 하였으나 일본군은 속지 않았다. 조명연합군은 이틀간의 탐색전으로 일본군의 전력을 파악하고 총공세로 돌입했다.
8일 아침부터 성 주변 요소에 포 진지를 구축하고 각종 화포를 성문 부근에 방렬시켰다. 대장군포, 위원포, 자모포, 연주포, 불랑기포 등 명군의 대포가 일제히 성벽과 성문에 집중사격을 퍼부은 다음, 외성의 서남쪽 함구문은 명군 부총병 조승훈 군과 조선의 이일 김응서 군 8천 명이, 우협대장 장세작 군은 칠성문으로, 좌협대장 양 원 군은 보통문으로, 모란봉은 부총병 오유충 군과 조선 의승군장 유정의 승병 2,200 명이 공격에 나섰다. 쌍방간의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유격 대장 오유충은 적이 쏜 탄환에 가슴을 맞으면서도 큰 소리로 병사들을 독려하며 전투를 하였고, 말을 타고 전투를 지휘하던 이여송 또한 타고 있던 말이 총탄을 맞아 쓰러지자 다른 말로 갈아타고 군사들을 독전하자 군사들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동정군과 조선군은 외성과 읍성을 점령하고 중성으로 돌입하여 일본군을 만수대와 을밀대 쪽으로 압박했다. 일본군은 풍월정 아래에 토굴을 파고 그 속에 들어가 숨은 후 조선 백성들을 방패로 내세우며 최후의 발버둥을 쳤다. 평양성 함락은 시간문제인 것처럼 보였다. 조명 연합군의 각종 화포와 일본군의 조총이 빗발치며 피아간의 사상자가 늘어갔다. 이날 피아간 사상자가 1만여 명에 달했고, 백병전 중에 목이 잘린 일본군이 1,264명이었다.
피아간의 사상자가 늘어나자 이여송은 여기에서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병력을 성 밖으로 철수시켰다. 그리고는 고니시에게 서한을 보내 평양성에서 철군하도록 종용했다. 위기에 처한 고니시는 이여송으로부터 퇴로를 차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이날 밤에 평양성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명군 참장 이령 군 3천여 병력이 추격에 나서 358명을, 조선군에서도 추격에 나선 방어사 이시언이 60명, 황주 판관 정화가 120명의 일본군을 죽였다.
이리하여 고니시군에게 점령당했던 평양성은 7개월만인 1593년 1월 9일에 조명연합군에 의해 수복되었다. 평양성을 빼앗긴 일본군은 봉산→용천→배천을 경유하여 한성으로 철수하였으나 그 병력은 당초 18,700 명에서 6,600명으로 격감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평양성 전투 이후 전투에서 큰 역할을 한 명군의 남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남병들이 성 위를 제일 먼저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된 은5천냥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여송은 후방 의주에서 남군 1,300여 명을 유인하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황해도 방어사 이시언은 자기 휘하의 군사들이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구경만 했다고 해서 굶주려 낙오한 자와 병들고 허약한 병사 60여 명을 가려내어 죽여버렸다.
선조는 평양성의 탈환을 보고 받고 1월 18일 의주를 떠나 남하를 시작했다.
조 · 명연합군의 평양성 공격으로 패퇴한 고니시 군은 개성에 주둔하고 있던 고바야카와 군과 함께 한성으로 들어갔다. 한성에 머물고 있던 우키다는 평안도, 황해도에서 철수한 병력과 기존의 한성 주둔 병력을 재편성하여 조명연합군을 한성 외각에서 저지할 계획을 세웠다.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은 황주까지 남하하여 중협대장 이여백과 우협대장 장세작에게 일본군에 대한 추격을 명령하고 자신은 다시 평양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이여백과 장세작군은 평양에서 겨우 4백여 리밖에 안 떨어진 개성까지 무려 9일이라는 시간을 소요하면서 완만한 속도로 남진을 하였다. 이에 조선측에서 명군측에 적극적인 추격작전을 전개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자, 이여송은 1월 18일에 좌협대장 양원과 함께 조선군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서 재차 남하를 개시했다.
황주로부터 조명연합군의 선두부대가 남진해 오고 있던 중협대장 이여백은 19일에야 개성에 입성하여 선봉장인 부총병 사대수와 경기방어사 고언백을 한성 방면으로 보내 적정을 탐지하면서 남진을 지연시켰다.
1월 25일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의 본군과 조선 기병 3천 기가 개성에 당도했다. 이여송은 여기에서 친위병 3천 기와 부총병 손수염, 조승훈, 참장 이녕의 기병을 거느리고 임진강을 도하하여 오산(한성 북쪽 80리)에 포진했다. 얼었던 길이 녹아 기병의 기동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린 것이다.
27일 일본군 수색대의 활동으로 이같은 명군의 동향이 서울에 보고되고 곧 고바야카와 타카가게를 선봉장으로 한 일본군 주력 2만여 명을 임진강 쪽으로 급히 전진시켰다. 3천 명을 거느린 다치바나 무네토라가 제1대로 선두에 섰고, 8천 명을 거느린 타케가게가 제2대로 뒤따랐으며, 고바야카와 히데케아네의 제3대가 5천 명, 키카와 히로이에의 제4대가 4천 명을 이끌고 후미를 받쳤다.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5대 5천 명, 이시다 미쓰나리의 제6대가 5천 명, 가토 미쯔야스의 제7대가 3천 명, 우키다 히데이에의 제8대 8천 명, 모두 2만 1천 명으로 구성된 본군은 총사령관 히데이에 지휘하여 한성에서 출동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바야카와는 25일 여석령(한성 서북쪽 30리 지점)으로 전진하여 조명연합군과 접전을 벌일 태세를 갖추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7일 아침 사대수와 경기 방아서 고언백의 기병 3천여 기가 여석령에 포진하고 있던 고바야카와 군 제1대인 다치바나(立花銃虎) 군의 방어진을 공격하였다. 그런데 조명 연합군의 기병은 지형이 협소하고 땅이 질어서 제대로 기동을 못하고 고전하였다. 마침 망객현 부근에서 이녕 군 7천 명이 증원됨으로써 겨우 열세를 만회했다.
이렇게 접전이 계속되는 동안 오산에 있던 이여송은 일본군을 쉽게 격멸할 수 있을 것으로 자만하고 호위 기병 수십 기와 부장 몇 명을 거느리고 벽제관을 지나 격전장으로 달려 갔다. 그러나 이여송은 망객현을 지나 주막리 일대에서 고바야카와군의 기습을 받아 일거에 궤멸되고 말았다. 이여송은 간신히 포위망을 탈출하여 파주로 퇴각했다.
한편 여석령에서는 고바야카와 군과 조명 연합군과의 접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동안 우키다의 본대는 주말리 서쪽으로 우회하여 조명연합군의 우측방을 공격하기로 했다. 이에 동정군 좌협대장 양원이 대형을 회전하여 이에 대항했다. 날이 저물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명연합군도 더 이상 일본군을 추격하지 못하고 파주로 철수했다.
이리하여 한성탈환을 경솔하게 생각했던 이여송은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위축되고 말았다.
● 행주 대첩
일본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을 격퇴시키고 있을 무렵, 독성산성에서 일본군을 물리쳤던 전라감사 권율이 의병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은밀히 행주산성을 점거했다. 권율은 전라병사 선거이로 하여금 4천여 명을 거느리고 한성 남쪽의 광교산에 포진하여 일본군의 배후를 위협하게 한 다음, 승장 처영의 승병 2천여 명과 함께 행주산성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 무렵 조명연합군은 명군 제독 이여송이 주력을 거느리고 개성에 있었고,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은 순변사 이빈과 함께 평안도 군사를 거느리고 명나라 부총병 사대수의 명군과 함께 파주에 주둔해 있었고, 전라도 의병장 창의사 김천일 의병군은 강화에, 충청도 순찰사 허욱은 문수산성에 각각 주둔해 있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상황에서 권율이 행주산성에 포진한 것을 알고 상당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권율은 제6군 사령관 타카가게에게 웅치와 이치전의 패전을 안겨 주어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좌절시켰고, 독성산성에서도 일본군을 물리친 적 있는 만큼 일본군으로선 여간 껄끄러운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서울 턱 밑에 있는 행주산성에 있다는 것은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비수를 뒷통수에 들이댄 것이나 다름없었다.
일본군 총대장 우키다는 조명연합군이 접근하기 전에 먼저 행주산성의 의병을 격멸시키기로 하고 한성의 3만여 병력을 모아 7개 부대로 편성하여 차례로 공격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이시다 미쓰나리, 고바야카와 타케가게 등 군 사령관 및 모리 모토야스, 키카와 히로이에,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등 부장급 장령들이 총 동원되었다.
행주산성은 해발 120m 쯤의 야산으로 남쪽에는 한강이 연해 있어 방어하기에 유리한 지형이었으나 기존의 방어시설은 전혀 없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의 책임하에 이중으로 목책을 설치하게 하고, 그 주위에 참호를 파서 몸을 은폐시킬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수차석포라는 돌맹이 발사기와 화차를 적의 예상 접근로를 향해 다수 배치해 놓았다. 또한 근접전에 대비하여 모든 군사에게 재 주머니를 차게 하고, 끓는 물을 퍼부을 수 있도록 가마솥을 여러 개 준비해 두었다.
2월 12일 오전 6시 경, 일본군 제1대가 성책에 접근해 왔다. 권율은 화살을 아끼면서 최대의 효과를 얻기 위해 일본군이 30보 이내에 접근할 때까지 최대한 사격을 자제하고 기다렸다. 적이 최대한 접근을 했다고 판단한 권율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참호 속에서 숨어있던 조선군이 일제히 총통과 활을 퍼 부었다. 각종 총통과 화차, 수차석포의 불과 돌과 화살 사례에 제1대가 궤멸되자, 미쓰나리가 지휘하는 제2대가 밀려왔다. 제2대 역시 앞과 같은 방법으로 궤멸되고 연이어 후속 부대가 몰려 들었다.
높은 누대 위에서 수십 명의 일본군 조총수가 사격을 가해 왔으나 곧 조선군의 총통 사격으로 조용해졌다. 마침내 총사령관 우키다가 제4대를 직접 지휘하여 돌진해 왔다. 제1 목책을 돌파하여 제2 목책에까지 접근한 그는 그 쪽을 향해 화력을 집중시킨 조선군이 쏜 화차의 파편을 맞고 부상을 입고 물러났다.
제4대가 무너지고 히로이에가 지휘하는 제5대가 성책에 불을 지르면서 올라왔으나 권율 군은 준비한 방화수로 곧 진화하고 히로이에가 중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지자 곧 무너졌다. 제6대인 모토야스와 히데카나의 부대가 제1 목책을 뛰어넘어 제2목책에 접근하였으나 조선군이 일제히 재 주머니를 던져 눈을 뜨지 못하는 사이 끊는 물과 화살을 퍼부어 격퇴시켰다. 최후의 제7대로 타카가게 부대가 서북쪽의 승병 방어 지역으로 집중 공격해 왔다. 백병전이 한참 벌어지고 있던 때 경기 수사 이빈이 통진에서 2척의 배에 화살을 가득 싣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권율 군에게 준 뒤 적 후방으로 상륙할 기세를 보이자 마침내 일본군이 총퇴각을 시작했다.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파상 공격을 계속하였던 일본군은 결국 행주 산성 공격을 포기하고 한성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기병 수십 기가 이들을 추격하여 130여 명을 사살하고 돌아왔다. 일본군 대병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권율 군의 사기는 더욱 고양되었다. 이 전투에서 권율군은 727점의 무기를 노획하고 수천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전사자 수가 얼마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총사령관 우키다 디에이에를 비롯한 장성급 장군만 3명이 부상을 입는 등 매우 큰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산 현감 신경회가 조정에 승전 보고를 올렸고, 명나라 병부상서 석성이 신종황제의 훈상을 보내왔다.
일본군은 개전초의 승승장구가 무색하게 바다에 이어 육지에서마저 연패를 당하자 사기가 저하되어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2월 29일 함경도의 제2군 가토 기요마사 군이 서울로 철수해 왔다. 함경도로 진출한 가토군은 현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불순분자들의 협력으로 이 지역을 용이하게 장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함경북도 병마평사 정문부가 경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종성부사 정현룡, 경원부사 오응태 등과 더불어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쟁을 전개했다. 이어서 북도의병대장에 추대된 정문부는 1592년 9월 중순에 경성을 수복하고 회령, 명천 지역의 반란자들을 처단함으로써 길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우익을 제거하였다.
이에 마천령 이남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고립상태에 있는 길주성을 지원하기 위해 수차에 걸쳐 증원군을 파견하였으나 그때마다 정문부의 의병부대가 중도에서 이를 격멸시켰다. 이와 같이 정문부군의 포위로 고립된 일본군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나머지 1593년 1월 19일에 길주성 남문으로 결사대 1백 명을 출격시켜 활로를 뚫고자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단천군수 강찬이 단천의 일본군을 격퇴시키기 위해 정문부군의 지원을 요청하자, 정문부는 1월 23일부터 기병 2백 기로 단천의 일본군을 협공하여 2백여 명의 일본군을 격멸하였다.
당시 안변에 주둔하고 있던 가토는 1593년 1월 초에 평양의 고니시군이 조명연합군에게 쫓겨 한성으로 패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한성 - 안변간의 통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고 있던 중 한성의 본영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았다. 이에 가토는 철군에 앞서 길주성에 고립되어 있는 그들의 별군을 구출하기 위해 ‘가토의 본대가 직접 길주를 구원한다’ 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 길주성에 증원군 일개 부대를 파견했다.
정문부는 단천을 공격하던 병력을 철수시켜 28일에 임명 북쪽 백탑교에서 일본군을 요격하여 대접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막대한 타격을 입고 간신히 길주성에 들어가 길주에 고립되어 있던 부대를 구출하여 야음을 틈 타 안변으로 철수하였다. 그 후 길주 이남의 가토군은 2월 20일까지 함흥에 집결을 완료한 후, 전군이 안변부를 거쳐 한성으로 후퇴했다.
대부분의 군사가 허기와 질병, 추위로 쇠약해져 있었고, 상당수가 부상당해 있었다. 제2군에 종군한 일본 군승(軍僧)의 기록에 의하면 ‘콩과 콩 삶은 물만 먹었다. 하늘과 땅은 온통 빙한의 세계였다. 2월 11일 함흥을 떠나 서울로 향하는데 눈이 무릎까지 빠져 전진할 수가 없었다. 금강산을 지나는데 산인진 눈인지 알 수 없었고, 사람과 말이 모두 얼어죽었다’ 라며 당시의 비참한 상황을 적어 놓고 있다.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의 병력을 점호한 총사령과 우키다 히데이아는 북진할 때의 군사 절반 이상이 살아돌아오지 못한 것을 알자 경악했다.
가장 많은 손실을 입은 부대는 선봉으로 평양까지 진격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이었다. 조선에 상륙했을 때 1만 8,700명이었던 병력이 지금은 6,629명뿐이었다. 무려 1만 2,071명이 전사한 것이다.
다음으로 손실이 큰 부대는 서울에 주둔했던 우키다 히데이에의 제8군이었다. 서울 주둔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실이 큰 이유는 독성산성과 행주산성 등의 패배로 인한 것이다. 1만 명의 병력 중 4,648 명을 잃고 5,352명이 살아 남았다.
함경도로 진격했던 제2군 가토 기요마사 군은 원래의 2만 2천 명 가운데 8,864명을 잃고 1만 3,136명이 돌아왔다. 임진강 전투와 함경도에서 크고 작은 전투 손실과 함께 혹독한 추위로 얼어 죽은 동사 손실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군은 1만 1천명 가운데 3,679명을 잃고 7,321 명 만이 살아남았다.
전라도 진격에 실패했던 제6군 고바야카와 타카가게도 1만 5,700 명 가운데 6,148명을 잃고, 9,552명이 살아남았다. 주로 전라도 진격 때 입은 피해와 벽제관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큰 것 같다.
이로서 1593년 3월 20일 서울에 집결한 일본군 총 병력은 소규모 부대를 포함하여 5만 3천 명이었고, 주력 부대의 절반 정도가 전사한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곤경을 돌파하기 위하여 명군 측과의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일본군측에서는 ‘명나라가 일본에 강화사를 파견하고 요동으로 철수하면, 일본군도 조선 왕자를 송환하고 4월 8일부로 한성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뜻을 명군측에 전달하였다.
명군측에서도 이 전쟁을 조기에 종결짓기 위하여 가능한 한 일본군측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군측은 일본군과의 강화를 반대하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에 명의 경략 송응창은 심유경에게 일본에 가서 도요토미의 항서(降書)를 받아오도록 지시하는 한편, 위계(位階)를 써서라도 일본측과의 강화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그 결과 사용재와 서일관을 명 조정의 강화사로 위장시켜 한성의 일본군 진영에 보내어 일본군측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도록 하는 방법을 안출해 냈던 것이다.
4월 17일 명의 심유경과 위장강화사인 사용재와 서일관이 한성에 도착하자 일본군측에서는 이튿날인 18일부터 한성에서 철수를 개시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당초의 약속과는 달리 조선의 두 왕자와 대신들을 석방하지 않고, 명군 측에서 교섭차 파견한 심유경, 사용재, 서일관 일행까지 인질로 삼은 채 경상도로 남하하였다.
일본군이 한성을 철수하는 과정에서 명군은 일본군에 대해서 추격을 가하지 않았다. 도리어 4월 20일에 파주에서 한성에 입성한 권율군이 일본군을 추격하려 하자, 노량진의 선박을 통제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추격작전을 방해했다. 이에 따라 조선의 수도 한성을 벗어난 일본군은 죽산→충주→조령의 경로를 따라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경상도로 철수할 수 있었다.
1593년 4월 20일, 조명연합군의 입성으로 한성은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지 1년 만에 수복되었다. 이어서 4월 24일에 조정 중 중신들이 입성하여 국왕의 환도에 대비한 제반의 조치를 취하고 10월 초에 선조가 환도를 하자 비로서 도성은 안정을 되찾았다.
1593년 4월 18일에 조선의 수도 한성에서 철수한 일본군은 4월 29일에 경상도에 이르러 상주, 선산, 인동, 대구 등지에 분산하여 주둔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때까지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한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었으므로 송응창은 뒤늦게서야 이여송에게 추격을 명령하여 명군이 1월 초에 한강을 도하하여 남하를 개시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은 5월 10일부터 15일까지 밀양부 이남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로부터 명군의 도독 이여송은 송응창과 함께 한성에 주둔하면서 그 휘하 병력을 다음과 같이 배치하였다.
조선군측에서는 하삼도(충청, 전라, 경상) 일대의 각 부대에 공격명령을 하달하는 한편,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적의 해상 탈출을 철저히 봉쇄하라’ 는 명령을 내려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한성에서 철수한 후 그들이 경상도 해안지역 일대에 축조한 여러 왜성(倭成)에 분산하여 장기적으로 주둔할 태세에 들어갔다.
1592년 10월의 진주 대첩에서 패배함으로써 전라도 진출계획에 중대한 차질을 빚은 일본군은 일본 본국의 히데요시로부터 진주성 공격에 대한 작전명령을 통보받고, 1593년 6월 초부터 진주성 공격 준비에 착수했다. 히데요시는 임진전쟁 기간 중에 진주성과 전라도 침공이 저지된 것이 못내 분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철수중인 일본군에게 다섯 차례에 걸쳐 진주성 공격과 전라도 공격을 명령했다.
다섯 차례에 걸친 명령서 중 마지막으로 보낸 5월 20일자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서에는 ‘5개 제대 93,000명으로 공격부대를 편성하고 23,000 명으로 부산, 김해, 거제 등을 지키며 수군은 가덕도에서 조선 수군에 대비하라’ 는 내용이었다.
성 하나를 공격하는데 무려 십만 명에 가까운 대병력을 동원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히데요시의 진주성에 대한 집착은 광적인 것이었고, 특히 진주성이 함락되면 성 안의 ‘조선 사람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도살하라’ 는 명령은 이미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러한 일본군의 초강경 작전에 조명 연합군은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버렸고 진주성에 대한 지원을 포기해 버리기에 이르렀다. 명나라 부총병 유정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편지를 보내어 ‘진주성을 공격하면 백만 대군으로 일본군을 전멸시키겠다’ 고 협박하였고,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있던 심유경 역시 공격 중지를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고니시는 ‘대항하지 말고 성을 비워 놓는 것이 상책’이라고 대답하였고, 심유경은 이 말을 도원수 김명원과 경상좌도 순찰사 한효순에게 전달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진주성 공격군이 6월 14일까지 속속 창원에 집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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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번대 가토 군은 진주성 북면, 제2번대 고니시 군은 서면, 제3번대 우키다 군은 동면, 제4, 제5번대는 예비대로 진주성 북쪽 고지 일대에 포진하고, 성의 남쪽 남강쪽에는 따로 제6번대 기카와 히로이에가 약간의 병력을 거느리고 지켰다. 이밖에 수군 8,250명이 동원되었다.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 계획이 알려지자 진주 목사 서예원과 판관 성수경이 명군을 접대하기 위해 상주에 머물고 있다가 급거 진주성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상식을 뛰어넘은 엄청난 대군 앞에서 조명 연합군의 수뇌부는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경상우도 의병장 성주 목사 곽재우도 순변사 이빈의 진주성 방어전 참전 명령에 불복하고 정암진 방어를 고집하였다. 적군의 규모가 너무 커 진주성 방어는 어차피 불가능하고 애꿎은 부하군사만 희생시킨다는 것이었다.
6월 6일 조선 조정은 도원수 김명원을 공조판서로 돌리고 후임으로 권율을 임명했다. 권율은 5천여 병력을 이끌고 함안에 진출해 있었다. 명군 제독 이여송도 명군을 동원하여 진주성 응원을 명령하였으나, 휘하 장수들이 적의 규모가 너무 막강하다며 구례 이남으로는 이동하지 않았다. 대신 명군 경략 송응창이 고니시에게 편지를 보내어 진주성 공격 중지를 설득하였으나, 고니시는 관백(도요토미)의 명령이 너무 절대적이라서 어쩔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
이렇듯 조명연합군이 뒤로 빼고 있을 때 창의사 김천일, 복수(復讐) 의병장 고종후, 이계련, 민여운 등이 각각 휘하 의병 수백 명을 거느리고 진주성으로 들어왔으며, 경상 우병사 최경회, 충청 병사 황진, 거제 현령 김준민, 김해 부사 이종인, 사천 현감 장윤 등도 병력을 거느리고 진주성 방어에 참여하기 위해 들어왔다.
김천일과 최경회가 성을 둘러보니 성벽이 높고 군량도 넉넉하였다. ‘성은 높고 군량이 족하고, 화기가 많으니 죽어도 보람이 있는 곳이로다’ 라며 결사항전의 뜻을 나타냈다.
당시 진주성의 병력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현재 정설로 남아 있는 기록은 대부분 후대에 가필되거나 조작된 흔적이 현저하다. 여러 가지 정황을 살펴보건데, 이때 외부에서 지원을 온 의병군의 숫자는 많아야 몇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진주본군사가 제외된 체 설명하고 있으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리고 당시 진주 목사였던 서예원에 대한 평이 현재 극단적으로 엇갈리고 있어서 더욱 주력군과 군사의 수를 파악하기 힘든 상황이다.
일본군은 6월 15일 창원을 출발하여 진주성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은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권율, 순변사 이빈, 전라 병사 선거이 군을 차례로 격파하고, 16일 함안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함안에서 병력을 양분하여 1대는 18일에 정암진의 곽재우군을 격파한 뒤 의령으로 진출하였고, 다른 1대는 반성을 거쳐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19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와 홍계남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사태를 보고는,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가서 훗날을 기약하자’ 고 하자, 김천일 등이 거부하자, 선거이와 홍계남 등은 성을 나가 운봉(雲峰)에 진을 쳤다. 이날 상주 주둔 명군 부총병 왕필적과 목사 정기룡도 성으로 들어와 명군 선봉이 함안에 왔다며 응원할 뜻을 전하고 돌아갔다.
20일에 적 2백여 기(騎)가 동북 마현봉에 출몰하였고, 성 안에서는 의병부장 이체와 오유가 적진을 정찰하고 돌아오며 일본군의 목을 베어왔다.
21일 일본군은 성을 세 겹으로 포위하고 성 서북쪽의 해자를 파내어 물을 빼고서 다 마른 뒤에 흙을 운반해다가 해자를 메워 큰 길을 만들었다.
22일 아침 일본군 5백여 기가 북산(北山)에 진을 치고 세력을 과시하였으나, 성 안에서 출동하지 않자 일본군은 부대를 둘로 나누어 일대는 개경원(開慶院)의 산 허리에 진을 치고, 다른 일대는 향교(鄕校) 앞길에 진을 쳤다.
제1파가 공격을 시작하여 하루 종일 공방전을 벌였으나, 성 안에서 일본군 30명을 쏘아 맞히자 일본군이 부대를 거두어 물러갔다. 초저녁에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고, 새벽 12시 무렵 제2파가 물러가고 제3파가 다시 밀려와 밤 새도록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23일에도 전투가 계속되어 일본군은 부대를 나누어 계속해서 공격을 하여 낮에 세 차례 공격해 온 것을 세 번 물리쳤고, 밤에 또 네 차례 공격해 온 것을 네 번 물리쳤다.
24일에 적의 증원군(增援軍) 5∼6천 명이 와서 마현(馬峴)에 진을 치고 또 5∼6백 명의 증원군이 와서 동편에 진을 쳤다.
25일에 적이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망루를 세워 성안을 내려다보고서 조총사격을 가해왔다. 그러자 충청 병사 황진도 성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황진이 전복(戰服)과 전립(戰笠)을 벗고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나르며, 축조를 서둘러 하룻밤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현자 총통(玄字銃筒)을 쏘아 일본군의 망루를 파괴하였으나 일본군은 즉시 수리하였다. 이날 역시 치열한 공방전을 낮에 세 차례, 밤에 네 차례나 되풀이하였다.
26일 일본군의 신무기가 등장하였다. 나무로 궤짝을 만들어 생가죽을 씌워 그 안에 타고 전진하는 귀갑차(龜甲車)였다. 일본군은 귀갑차를 타고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와서 성벽을 허물려고 했다. 조선군측에서는 곧장 큰돌을 밑으로 떨어뜨리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서 귀갑차를 파괴시켰다.
일본군은 다시 방법을 바뀌어서 또 동문 밖에 큰 나무 두 개를 세워 그 위에 망루를 만들어 놓고는 그 위에서 불화살을 성안으로 쏘아대 성 안의 초가집이 불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성 안 가득히 퍼졌다. 때마침 비가 쏟아지면서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그 틈으로 일본군이 난입하자 김준민이 나가 격퇴하였으나, 혼전 중에 김준민이 전사하였다.
27일에 적이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흙산을 만들고 그 위에 대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뒤에서 성안을 내려다보고 조총을 발사하여 성안에 죽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귀갑차로 성을 공격하자 수비군은 마른 섶에 기름을 묻힌 뒤 불을 붙여 던지자 귀갑차들이 불에 타고 일본군이 무더기로 타 죽었다.
초저녁에 일본군이 다시 신북문(新北門)으로 공격해 왔는데, 김해 부사 이종인이 부하들과 더불어 적군을 격퇴시켰다. 이날 전투에서 순천 의병부장 강희복, 희열 형제가 전사하였다.
28일 새벽에 이종인이 지키던 성비로 돌아가 보니 전날 밤에 서예원이 야간 경비를 소홀하게 하여 일본군이 몰래 와서 성을 뚫었으므로 성이 무너지려 하였다. 이종인이 크게 노하여 서예원을 꾸짖었다. 일본군이 성 밑까지 바싹 다가 왔는데 성 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힘을 다해 싸워 격퇴시켰다.
황진이 성 안을 굽어보며 ‘오늘 싸움에서 죽은 적이 1천여 명은 충분히 될 것이다’ 고 말하고 있는데, 성밑에 잠복하고 있던 적이 위로 대고 조총을 쏘았다. 그 철환이 목판(木板)에 비껴 맞고 퉁겨 나와서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이때 황진과 장윤(張潤)의 역전(力戰)이 장수들 중에서 으뜸이라고 칭해졌기 때문에 온 성안이 그에 의지하여 중히 여겼으므로 황진이 탄환을 맞고 죽자 수비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29일에 진주성 최후의 날이 왔다. 전날 죽은 황진 대신 장윤을 순성장(巡城將)에 임명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장윤도 조총에 피격되어 전사하였다. 오후 1시경에 비로 인하여 동문 쪽의 성벽이 무너져서 일본군이 총공격을 가하였다. 일본군이 몰려오자 이종인이 병사들과 함께 활을 놓아두고 창과 칼을 들고서 육박전을 전개하여 일본군의 공격을 막고 있었을 때, 서북문에서도 일본군이 몰려오자 김천일의 군사가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진 병사들 중 일부가 촉석루에 모였는데, 주위 사람들이 김천일에게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김천일은 좌우를 돌아보며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더불어 서로 끌어안고서 남강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최경일, 고종후 등 의병장들이 부하들과 함께 뒤따라 남강에 몸을 던져 투신자살하였고, 이종인, 오유, 이체, 서예원 등의 장수들은 일본군과 백병전 끝에 전사하였다.
9만여 명의 일본군을 상대로 10여 일간 항전하던 3천여 명의 군사와 6만여 명의 주민들은 진주성 함락과 함께 전멸되고 말았다. 진주성을 격파한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명령대로 진주성민을 철저하게 살육하였고 부근 마을들까지도 돌아다며 분탕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일본군은 최경회와 서예원의 목을 나고야의 히데요시에게 보내 교토에 효시했다.
진주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전라도를 향해 진군하여 선봉군이 7월 2일 구례의 석주관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10여 일에 걸친 진주성 혈전에서 많은 피해를 입어 전력이 많이 약화되었고, 바다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이 견내량을 봉쇄하자 일본 수군도 더 이상의 진격이 힘들어졌다.
결국 7월 14일 진주성의 일본군은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수축하고 방어진을 구축한 채 장기주둔체재로 전환하였다.
7월 23일 임해, 순화 두 왕자와 그들을 수행했던 황정옥, 황혁, 이영 등이 포로생활 1년 여 만에 부산에서 석방되었다.
평양에 머무르고 있던 선조는 8월 18일 해주로 옮겼다가 9월 22일 해주를 떠나 10월 1일 한양으로 환도했다. 한양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지 1년 4개월 만이었다. 이로써 2년에 걸친 임진전쟁은 일단락되었고, 길고 지루한 강화회담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