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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조 노부코) 01
琉球のひめゆり(1987 与那城信子) 01
● 류큐의 히메유리. 조 노부코 마틴 지음
Copyright© 1985 by Jo Nobuko Martin
발행소 신일본교육도서주식회사
발행인 후지타 슈지(藤田修司)
〒750-11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기요스에 1328 (0832)82-1312 (도쿄 지점)〒162 도쿄도 신주쿠구 이치야자우치초 11. 좌내사카 하임 203호 (03)267-7408 인쇄·제본 순보사 사진 인쇄 (주)
1985년 7월 21일 초판 발행, 정가, 1,500엔.
Printed in Japan 0093-915087-3383
● 目次
私の子供たちに. 1
序. 2
はじめに. 3
日本版に寄せて. 6
著者紹介. 12
第1部
第一章 二十四時間の監視. 15
第二章 連日連夜の提灯行列. 21
第三章 竹槍と防空訓練. 27
第四章 ああ/対馬丸. 32
第五章 十ㆍ十空襲. 36
第六章 母への追憶(思い出の記) 44
第七章 青い月夜の暗い家. 54
第八章 チルの旅立ち(思い出の記) 59
第Ⅱ部
第一章 壕の中. 75
第二章 夜ごとの訪れ. 83
第三章 腕の太い看護婦. 90
第四章 苦い薬(思い出の記) 99
第五章 中谷軍曹との出会い. 112
第六章 月見(思い出の記) 121
第七章 北岸少尉の威光. 130
第八章 南風原一の嫌われ者. 139
第九章 藤村婦長殿. 147
第十章 ラッキー・ストライキ. 154
第十一章 渡辺軍曹との再会. 163
第十二章 国頭の宴(思い出の記) 167
第十三章 中谷への想い. 186
第十四章 十五銭の保護者会費(思い出の記) 193
第十五章 ほうきと砂糖きび. 205
第十六章 壕内の岩風呂. 213
第十七章 堀川軍曹の頼み. 218
第十八章 がんばれ,信子. (思い出の記) 226
第Ⅲ部
第一章 糸数への羨望. 237
第二章 頭を失った首里. 247
第三章 離別. 251
第四章 静かなる午後の兵隊たち. 257
第五章黒砂糖と地下足袋. 261
第六章 重い荷を担いで. 265
第七章 石の壕. 274
第八章三日目の旅. 281
第九章 洗骨とユタ(思い出の記) 287
第IV部
第一章 村長の家. 303
第二章 渡辺軍曹と山羊汁. 308
第三章 一切れのガーゼ. 313
第四章 田中少尉が帰ってきた. 317
第五章 山羊小屋の歌い手. 320
第六章 中谷との再会. 325
第七章 中谷、糸洲へ移る. 329
第八章 恋敵. 337
第九章 午後の散策. 344
第十章 夜の米. 350
第十一章 地下へ導くトンネル. 356
第十二章 日本刀の霊力. 363
第V部
第一章 熱気と人声. 375
第二章 アダンと珊瑚礁の島. 383
第三章 失敗した斬込み. 389
第四章 赤鬼と緑色の男たち. 401
第五章 お菓子との再会. 411
第六章 偉大なる将軍たち. 417
第七章 捕虜収容所へ向かって. 425
第八章 落ちた偶像. 431
第九章 美人コンテスト. 441
● "류큐의 히메유리" 드디어 번역 완성!!
ㅡ오키나와•전쟁과 평화ㅡ
히메유리대(ひめゆり隊)의 종군 간호사의 한 사람으로 학도 동원, 철의 폭풍을 맞으면서, 간신히 살아남은 죠 노부코 마틴(요나죠 노부코)이 영어로 써서, 홉우드상을 받은 오키나와전(沖縄戦) 소설. "류큐의 프린세스 릴리" 조 노부코 마틴 지음
● 류큐의 히메유리 (목차) 01
내 아이들에게 1
권두언 2
서언 3
● 류큐의 히메유리 02
일본판에 대하여 6
저자 소개. 12
제1부
03 제1장 24시간의 감시 15
04 제2장 연일 연야의 연등 행렬 21
05 제3장 죽창과 방공 훈련 27
06 제4장 아~쓰시마마루 32
07 제5장 10-10 공습 36
08 제6장 어머니에 대한 추억(추억의 기) 44
09 제7장 푸른 달밤의 어두운 집 54
10 제8장 치루의 인생여정(추억의 기) 59
제II부
11 제1장 벙커 속 75
12 제2장 밤마다 찾아옴 83
13 제3장 건장한 간호사 90
14 제4장 쓴 약(추억의 기) 99
15 제5장 나카타니(中谷)중사와의 만남 112
16 제6장 달맞이(추억의 기) 121
17 제7장 기다기시(北岸)소위의 위광 130
18 제8장 기피인물 南風原一 139
19 제9장 후지무라 간호부장님 147
20 제10장 럭키 스트라이크 154
21 제11장 와타나베 중사와의 재회 163
22 제12장 쿠니가미(国頭)의 잔치 167
23 제13장 나카타니에 대한 생각 186
24 제14장 15전 보호자회비(추억의 기) 193
25 제15장 빗자루와 설탕수수 205
26 제16장 벙커내의 바위 목욕탕 213
27 제17장 호리카와(堀川) 중사의 부탁 218
28 제18장 힘내라 노부코 226
III부
29 제1장 이토카즈(糸数)에 대한 선망 237
30 제2장 머리를 잃은 슈리 247
31 제3장 이별 251
32 제4장 고요한 오후의 병사들 257
33 제5장 흑설탕과 지카다비(버선). 261
34 제6장 무거운 짐을 지고 265
35 제7장 돌벙커 274
36 제8장 3일 째의 여행 281
37 제9장 세골과 유타(洗骨とユタ) (추억의 기) 287
제IV부
38 제1장 촌장(村長)의 집 303
39 제2장 와타나베 중사와 염소즙. 308
40 제3장 한 조각의 거즈 313
41 제4장 다나카 소위가 돌아왔다. 317
42 제5장 염소집의 소리꾼 320
43 제6장 나카타니와의 재회. 325
44 제7장 나카타니 이토즈로 옮긴다. 329
45 제8장 연적 337
46 제9장 오후의 산책
47 제10장 밤의 쌀 350
48 제11장 지하로 인도하는 터널
49 제12장 일본도의 영력 363
제V부
59 제1장 열기와 사람소리
51 제2장 아단(アダン)과 산호초의 섬 383
52 제3장 실패한 참수(斬込み) 389
53 제4장 적도깨비(赤鬼)와 녹색 남자들 401
54 제5장 과자와의 재회. 411
55 제6장 위대한 장군들 417
56 제7장 포로 수용소로 향하여 425
57 제8장 떨어진 우상 431
59 제9장 미인 대회 441
● 내 아이들에게
제 작품에 대상을 주신 미시간대학교 홉우드 시상위원회에 감사의 뜻을 올립니다. 특히 전 위원장인 로버트 F. 호우 명예교수(Robert F. Haugh)의 비평과 지도는 작품의 퇴고(推敲)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또한 미시간대학교의 "여성을 위한 평생교육"(Continuing Education for Women)에 종사하고 있는 진 W. 캠벨 부인(Jean W. Campbell) 및 슬라브어과의 호레이스 W. 듀위 교수(Horace W. Dewey)에게는 정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도움을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울러, 교정(校正)에 많은 시간을 내어주신 오리건주 세일럼의 마거릿 링나르다 부인(Margaret Ringnalda) 및 맥스 어스킨(Max Erskine) 씨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항상 격려해 준 제 아이들―제럴드(Gerald), 로버트(Robert), 수잔(Susan)에게도 이 지상을 빌어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조 노부코 마틴
● 추천의 말 (영어판)
마틴 씨는 그녀의 고향인 오키나와에서 1945년 그리고 그 이전에 일어난 일을 쓰고 있습니다.
오키나와는 아름다운 섬입니다. 사람들은 밝고 상냥하지만 그곳은 또한 비극의 섬이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비극은 1945년에 시작된 것은 아니지만, 이 섬이 미국에 의해 침략되어 점령된 1945년 봄과 여름에 비극은 최고조에 달했던 것입니다. 그해 사건은 후세의 기억에 간직해야 합니다. 사실 오키나와에서는 물론, 다소 차이가 있을지라도 본토에서도 오키나와의 비극은 분명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물론 희생자 중에서도 특히 기억되는 것이 "히메유리대(ひめゆり隊)의 소녀들" 입니다. 그녀들은 일본 정부에 의해 징집되어, 많은 학생들이, 자결하거나 총알에 맞는 등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지금 히메유리의 탑은 일종의 성당(聖堂)이 되었습니다. 마틴 씨는 그 히메유리대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그녀 자신 또는 그녀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우아하게, 차분하게, 게다가 감상적이지 않게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녀시대의 에피소드를 회상으로 이야기 사이에 삽입하는 훌륭한 방법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증오를 드러내지 않고 절제된 표현으로 읽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습니다. 히로시마에 대해 쓰여진 훌륭한 소설인 이부시 마스지(*井伏鱒二 1898~1993 소설가)의 "검은 비(黒い雨)"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이 비극을 침략자 쪽 나라 사람들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이 존중할 만한 책의 발행으로 이러한 소람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든스티커
● 서문
오키나와(沖縄)는 일본과 대만 사이에 점재하는 류큐 열도 중 가장 큰 섬입니다. 남북 65마일, 동서 8마일의 작은 섬으로 작은 지도에서는 보일까 말까 한 아주 작은 점으로만 나타나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오키나와란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보면 앞바다에 떠도는 새끼줄 같아요. 앞바다의 새끼줄(*沖の縄)이란 의미의 참으로 잘 지어진 이름인 것입니다.
우리 오키나와 사람들은, 푸르고 푸른 아열대의 고향을 몹시 사랑합니다. 키가 큰 가쥬마루(*榕樹,我樹丸: 枝から多数の気根を出す'絞め殺しの木,열대-아열대에 분포하는 뽕나무과의 상록高木)가 검은 큰 가지에서 내려뻗은 수염뿌리를 매달고, 또 웅장한 데이고(*梯梧-열대낙엽高木)는 불타는 듯 붉은 꽃으로 한여름 하늘을 장식합니다. 오키나와의 아이들은 가쥬마루나 데이고 주위에서 놀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교정(校庭)이나 시중(市中), 또 시골 개간지에서는 아이들이 이 나무들의 그늘에서 숨바꼭질이나 줄넘기를 하며 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수다가 두부와 콩깻묵, 아이스크림을 팔러 다니는 행상들의 호객소리와 섞여 들려옵니다. 이러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은 오키나와 이외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습니다. 섬은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어 바다는 매우 아름다워 보라색, 남색, 녹색 등 다양한 색을 띄고 있습니다. 파도는 거품을 일으키며 밀려옵니다.
나하시에서 가장 붐비는 곳은 항구였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나하항에 가서 일본 본토나 대만이나 남쪽 섬들에서 왕래하는 배를 바라보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햇볕에 그을려 새까맣게 된, 웃통을 벗은 항만 하역부들이 짐을 내리고 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몸에 끼는 검은 상의를 착용한 맨발의 인력거꾼(車夫)들이 상륙한 손님을 서로 차지하려 쟁탈전을 벌이던 것도 생각납니다.
시골에서는 베이지색으로 빛나는 사탕 수숫대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며 추수를 기다리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전쟁 전의 오키나와에서는 농가의 뒷마당에서의 설탕 만들기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은 아버지를 도와 사탕수숫대를 절구에 넣고 짛어서 즙을 짭니다. 여자아이들은 어머니와 함께 짜낸 즙을 쇠솥에 넣고 끊여, 검은 베이스트 모양이 될 때까지 졸이는 것입니다. 부근에서는 상반신을 벌거벗은 아이들이 하이비스커스(*仏桑花-ブッソウゲ) 나무숲에서 놀고 있습니다.
잊을 수 없는 향토 풍습 중 하나로 8월 중순 오봉의 날(*추석) 무덤 앞에서의 잔치가 있습니다. 일가를 거느리고 조상의 무덤 앞에 모여, 마시고 먹으며 조상의 영혼을 맞아들여 축하하는 것입니다. 무덤을 감싸안은 완만한 언덕 위에서 볼 수 있는 굽은 소나무의 모습은 매우 우아하고 평화로운 광경의 일부입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회색 거북이 모양의 돌무덤은 지금은 많이 사라졌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오키나와는, 평온하고 태양이 지상 가득 내리쬐고, 특히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잘 울려 퍼지는 평화로운 섬이었습니다. 오키나와는 과거에, 불청객의 침입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가 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재정 위기에 빠져 있던 사쓰마(薩摩)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는 막부로부터 류큐 토벌의 허락을 받고 1609년에 오키나와를 침공했습니다.
슈리성(首里城)은 아주 쉽게 공략되었고, 쇼네이(尚寧)왕은 성을 나와 화해를 청하면서 싸움은 싱겁게 끝났습니다. 무기를 창고에 넣어두고 평화외교 정책을 내세우던 류큐는, 불을 뿜는 신무기인 조총 앞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쓰마의 류큐 입성 때 류큐가 시마즈(島津) 번의 종속국임을 인정하라는 조약문의 연판을 거부하고 참수된 지야나우에카에(謝名親方)에 관한 전설이 있습니다. 그는 물이 펄펄 끓는 큰 가마솥 속에 산 채로 던져지려는 순간, 가마솥 옆에 서 있는 두 사형집행인의 머리채를 잡고 양 겨드랑이로 감싸고, 아우성을 지르는 그들을 저승길동무로 함께 펄펄 끓는 가마솥 속에 몸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적어도 이 전설이, 어머니나 이웃 부인들과 나하의 극장에서 함께 본 멜로드라마 '국난(国難)' 속에서 전개되는 류큐의 입장입니다. 국난이 상연되면 항상 극장은 만원이고, 지야나우에카에(謝名親方)가 솥 앞으로 나아가 적의 사형집행인의 머리채를 잡고 함께 죽는 클라이맥스가 되면 관객들은 모두 흥분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보내는 것입니다.
그 이후의 류큐는, 사쓰마 번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왕이 교체될 때는 중국으로부터도 책봉을 받는 중일(中-日) 양속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이 메이지를 맞이하여 폐번치현이 실시되자, 류큐번 또한 1879년에 오키나와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오키나와는 어쩔 수 없이 점차 일본의 침략 전쟁 속에 휘말려 갔던 것입니다.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오키나와의 가장 성가신 적은 자연이었습니다. 열대성 저기압, 흔히 말하는 태풍은 거의 매년 오키나와를 덮쳐 가옥과 논밭을 파괴해 왔습니다. 태풍은 농가의 작물을 쓸어버리는 것입니다. 기근이 되면 도민들은 소철 등의, 독성이 있는 식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지기까지 했습니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오키나와를 강타했을 때의 나는 십대 소녀였습니다. 그 어떤 태풍도 그때 내습했던 "철의 폭풍"에 비할 바 없습니다. 우리 오키나와에서는 일본 군인과 오키나와 현민을 합쳐 2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미군 또한 1만 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습니다.
전사자 중에는 우리 반 친구들이나 선생님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오키나와를 찾는 관광객들은 먼저 히메유리의 탑을 방문합니다. 두 개의 큰 비석에는 전사한 히메유리의 학도와 선생님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비석들 앞에는 생화가 끊이지 않고 바쳐지고, 또 참배하는 사람들이 피우는 선향(線香)의 냄새가 늘 감돌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쓴 목적은 결코 전쟁의 통계학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오랫동안 전쟁의 기억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지금 그걸 후배분들과 나눠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저는 제 기억 속에 있는 것을 가능한 한 마음 속에 되새기면서 솔직하게 묘사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이 전쟁 체험자이기 때문이며, 다시는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반복해서는 않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어느 세상에서나 알게 모르게 같은 일을 반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을 은폐한 채로는 결코 진실은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쨌든 오키나와전(沖縄戦)에서는 개인 개인이 각각 다른 체험을 해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마다 오키나와전의 인상은 다르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 작품은 적어도 저 자신의 마음속에서 아른거리고 있는 잔상임은 확실하며, 그것은 오키나와전의 일부이기도 한 것입니다.
조 노부코 마틴
琉球のひめゆり(1987 与那城信子) 02
● 일본판에 즈음하여
이 소설은 제가 미시간 대학원에 다닐 때 영어로 쓴 작품입니다. 이 대학의 영문학을 담당하고 있던 로버트 F. 호우(Robert F. Haugh) 교수의 권유도 있어 홉우드(상)에 응모했더니 운 좋게도 1972년도의 상을 받았습니다.
1945년 3월, 저는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의 본과 2년을 마치고, 졸업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3월 24일 다마구스쿠(玉城) 마을 마키가와(巻川) 방면에서 미군의 함포 사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저희 히메유리 학도(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 및 오키나와 현립 제일 고등여학교 학생들)는 학도종군간호요원(学徒従軍看護要員)으로 교직원 등 모두 2,917명이 즉시 하에바루쵸(南風原町)에 있는 육군병원 근무에 투입되었습니다.
저는 제2외과에서 근무했고, 마침내 오키나와 최남단 시마지리반도(島尻半島)의 끝인 기야 다케곶(喜屋武岬)까지 밀리다가 미군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전투는 주로 중부에서 벌어졌고, 슈리 함락 후에는 우리는 그저 남쪽으로 남쪽으로 도주할 뿐이었습니다. 그 좁은 지역에서, 불과 3개월 사이에 미일(美-日) 합해서 20만 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습니다.
오키나와전(沖縄戦)에서는 거의 일방적인 미군의 공격으로 인한 "철폭풍"이 몰아쳐 오키나와 현민들은 비참하기 짝이 없는 싸움을 강요당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오키나와만큼 전화(戦禍)를 입은 곳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오키나와는 "피의 섬(血の島)"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입니다.
그 오키나와전에서, 저는 그 현장을 체험한 히메유리 학도 중 한 명입니다. 육군 병원에 근무한 전체 학생의 약 3분의 2가 오키나와전에서 목숨을 잃었고, 저는 많은 친구와 스승을 잃었습니다. 지금은 영화로 유명해진 "제3외과 벙커의 비극"이나, 또 "낭떠러지에 몰려 운명을 달리한 친구" 등이 그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이 소설을 발표하는 것에 반대하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장면 설정이 하에바루(南風原) 육군병원이라는 사실 속에서, 게다가 제가 전쟁의 체험자인 만큼 아무리 소설이라는 스타일을 취해도 읽는 사람은 모든 것을 실화처럼 받아들인다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일본어로 번역했을 때 일부 사람들이 읽어본 후 "종군의 모습, 병원에서의 일, 벙커 안의 상황, 친구들과의 인간관계 등, 사실에 근거하여 묘사되어 있는 곳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출판을 보류해 달라는 요청도 받았습니다.
오키나와전 체험은 엄숙한 것이며 역사적사실만 후세에 전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의 마음은 저도 같은 전쟁 체험자인 만큼 잘 압니다. 오키나와전 체험자는 누구나 그런 사명감을 적지 않게 가지고 있고, 사실을 만화로도 영화로도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물며 연애소설 같은 것은 당치도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도 맞다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 나름대로의 신념이 있어서 이 작품을 통해 꼭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에 영어로 쓰는 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현재 영어는 만국 공통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 작품을 세계 각국 사람들이 읽도록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외국인이 영어로 소설을 써서 상을 받은 예로는 '롤리타'의 노비코프나 조지프 콘래드가 있는데, 그들의 언어는 영어와 친척 관계에 있습니다. 저는 일본인이었고,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영문학을 공부하여 영어로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보통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책을 쓰고 싶어서 철저하게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저는 전후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건너간 전쟁 신부로 일본인이 전혀 없는 곳에서 생활해 왔습니다. 그 덕분에 영어 습득은 빨라진 것 같아요. 하지만 미국인 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쉽게 영어로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인 대부분이 소설 같은 것은 쓸 수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저의 집념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어로는 도저히 오키나와전에 대해 쓸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영어를 배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전쟁 신부라는 굴욕의 상황이 저를 분발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이 작품의 한 장(一章) 씩을 각각 단편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그 한 편씩은 미시간대(University of Michigan)의 '미국 문학 여행'(A Literary Journey through America)과 윌라멧대학(Willamette University)의 '더 제이슨'(The Jason) 등에 발표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쓴 것은 주로 37세에서 39세 무렵이었습니다.
작품을 응모할 때 대학 선생님과 상의하여 "추억의 회상기(思い出の記)"를 추가했습니다. 이것에는 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덧붙인 이유는 첫째로 전쟁과 평화를 대조적으로 다룸으로써 전쟁의 우울에서 벗어나는 구원투수로 만든 것입니다. 둘째, 미국인에게 오키나와의 풍습 등을 알리고자 하는 생각으로 에피소드로 했습니다. 셋째, 주인공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독자의 흥미를 이어줄 목적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수상 후, 저는 집안일과 세 아이들에게 시간을 빼앗겨 집필에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성장하여 장남·차남에 이어 셋째 장녀가 제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딸에게 오키나와를 보여준 후, 저는 미국으로 돌아가 이 작품을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1983년, 저는 오키나와를 방문하여 이 작품을 영어로 한 권의 책으로 만들도록 동생들과 상담했습니다. 물론 본토 출판사 사람들과도 만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쿄에서 신일본 교육도서(新日本教育図書)의 후지타 슈지(藤田修司) 사장을 뵌 것입니다. 그는 일본어로 번역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저로서는 영어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만, 출판사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드디어 일본어로 번역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작품에서 전쟁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이 아닙니다. 전쟁 수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소설로 문학으로 임한 것입니다.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다만 배경이 전쟁인 만큼 결국 인간이 전쟁이라는 환경에 던져졌을 때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전쟁은 물론 도덕적인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뻔한 일이기 때문에 전쟁의 비극을 강조할 생각은 없습니다. 최대한 냉정하게 바라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전쟁의 가혹한 장면이 연속되는 것이기 때문에,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로서는 그래도 괞찮다고 생각하지만 강한 선입견은 바라지 않아요. 저는 인간을 그린 것이지 전쟁을 쓴 것이 아니니까요.
"프린세스 릴리(姫百合-히메유리)"는 픽션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은 실존 인물이 아닙니다. 나 자신이 모델 중 한 명이며 공상의 인물 중 한 명입니다. 제가 소설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 두겠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오키나와전 체험자의 한 사람으로서 전쟁을 강하게 혐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놓였을 때, 도대체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를 좀 더 정확하게 적어두고 싶은 열망이 엄습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목적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어쨌든 작품의 판단은 독자에게 맡기겠습니다. 작품을 어떻게 파악할지는 읽는 사람의권리이니까요...
일본어로 번역함에 있어서, 저의 일본문이 구식이거나, 단어의 선택이 부적합하기 때문에 뉘앙스가 현저하게 다르거나, 영어적인 감각이 드러나 있거나 해서, 히메유리 동창생 여러분에게는 여러가지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 의견을 바탕으로 군데군데 일본문을 다시 썼습니다.
제가 미국에 체류하고 있기도 해서 뒷받침 조사는 모두 출판사에 부탁하여, 약 2년에 걸쳐 조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3월 초 후지타 사장님이 오리건까지 와 주셔서 마지막 미팅을 하고 겨우 출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추천의 말을 써 주신 사이든 스티커 선생님께는 감사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그 외, 일본판 출판에 이르게 될 때까지 협력해 주신 관계 제씨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985년 6월 6일
조 노부코 마틴
● 저자 소개
조 노부코 마틴(옛 이름 요나조 노부코)은 오키나와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전쟁 신부로 미국으로 건너가 오스틴 텍사스대 및 미시간대에서 공부했다. 미시간 대학에서는 러시아어, 러시아 문학의 B.A.(문학사)와 일본어, 일본 문학의 M.A.(문학박사) 및 ph D.(철학박사)의 3개의 학위를 취득했다.
미시간대에 다닐 때 쓴 그의 소설은 1972년 Hopwood Creative Writing Contest에서 Major Prize를 수상했다. 그녀의 소설과 논문은 지금까지 잡지에 발표되어 왔다. 2남 1녀의 어머니. 미시간주 거주.
琉球のひめゆり(1987 与那城信子) 03
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노부코) 03
● 제1장 24시간 감시
나는 오키나와 남부의 이토만(糸満)이라는 작은 어촌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우리 가족은 이토만을 떠나 중심지인 나하시로 이주했다. 세월이 흘러 열다섯 살을 맞이하자 나는 나하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히메유리 여학교(오키나와 현립 제일 고등 여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여학교 교장 선생님은 쇼(尚)라는 여성분으로 류큐왕부(琉球王府)시대의 왕가 직계의 후손이었다.
왕족의 핏줄을 이어받아서인지, 쇼 선생님에게는 범상치 않은 면이 있었고, 그 처신은 매우 우아했다. 히메유리 학생들에 대해서도 항상 자랑스러운 이상을 내세우도록 지도하고 있었다. 남색 교복 가슴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배지(校票)가 히메유리여학교의 정신과 목표을 드러내고 있었다.
제일고녀의 배지에는 ‘시라유리(白百合-흰백합)’가, 사범부(師範部)의 배지에는 ‘오토히메(乙姫-공주)’가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이제 막 피어나려는 흰백합(白百合)과 젊은 공주(乙姫)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학도 중반의 젊은 여성이었지만, 가슴의 상징에는 ‘히메유리(姫百合)’들이 졸업하고 세상에 나온 뒤 활짝 핀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덧붙여서, 히메유리는 영어로 "프린세스 릴리" 라고 한다. '맑고, 바르고, 아름답게'라는 것이 학교의 모토였다. 다이아몬드 형태는 우리의 덕이 세상을 향해 눈부시게 빛나기를 바라며 디자인된 것이었다.
학교 분위기는 참으로 부드러웠고, 우리 학도들은 매일 즐거운 학교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쇼교장은 자상한 분으로 선생님 자신의 자상함을 우리에게도 이어가도록 항상 마음의 여유로운 배려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쇼 교장선생님은 곧 퇴직하게 되었고, 대신 마사오카라는 새 교장이 본토에서 오셨다.
마사오카 교장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침을 학원에 들여왔다. 나는 새 교장 선생님이 신임 인사를 위해 연단에 섰을 때의 일을 잊을 수 없다. 마사오카 교장은 뚱뚱하고 짧은 다리에 신장은 긴 타입의 사람으로, 나에게는 매우 몸집이 큰 사람으로 보였다. 얼굴 폭이 넓고 코는 납작하며 입술은 두껍고 치아는 누런색을 띠고 있었다. 처음 마사오카 선생님을 보았을 때, 인류 역사에서 배운 원시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사오카 선생님을 보고 모두가 놀랐다. 새 교장은, 전임의 쇼(尙)선생님의 교육 방침을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착하고 여성스럽고 인간답다는 생각을 철저히 부인했다. "우리는 봉건적인 여성교육을 그만둬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여 주장하며, 자신의 생각으로는, 이상적인 여성은 군인처럼 정신무장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학교의 교과목은 마사오카 교장의 방침에 따라 재편되어, 학교는 학도대(学徒隊)로서의 훈련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마사오카 선생님은 "여성이라도 군인과 같은 훈련을 해야 한다. 너희들은 아직 기합이 부족하다. 하루 24시간 훈련이 필요하다.”며 강한 어조로 자기 주장을 역설했다.
우선 첫 번째로 마사오카 교장은 육상부를 현 내에서 제일로 하는 데 힘썼다. 선생님은 "왜 히메유리 팀은 북부 구니가미(国頭)의 촌놈들에게 계속 지고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전교생 중에서 육상부 선수를 엄선하여, 수업 후 뿐만 아니라, 여름방학을 반납하고 훈련에 임하게 했다.
교장의 모토는 "필승"이라는 두 글자였다. 맹렬한 훈련은 점차 효과를 가져왔다. 가을 경기대회에서는 구니가미(国頭) 선수들을 쉽게 물리쳤고, 히메유리 처녀들은 우승기를 든 것이었다. 마사오카 교장의 다음 계획은 학교 수영장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수영장 조성은 10년 전에 시작되었는데 예산이 부족했기 때문에 좀처럼 완성에는 이르지 못했다. 교장이 어떻게 돈을 조달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영장은 완공되었다. 그것은 오키나와에서 단 하나의 정식 수영장이었다. 마사오카 선생님이 있는 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사오카 교장의 그 다음 계획은 "십칠리행군
(*68km)"이었다. (*1리는 4km) 그것은 학생 천 명이 참가하는 장대한 훈련이었다. 학교에서 오키나와 중부 동쪽 끝까지 처녀들의 행군은 사람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마사오카 교장이 인기를 얻기 위해 학생들을 이용해 자신의 평판을 올릴 생각이 아니냐는 등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또 양가(良家)의 연약한 딸들을 선머슴처럼 대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불평하는 사람도 있었다. 반면 젊은 처녀들을 십칠 리나 걷게 하는 것은 역사적 의의가 있는 획기적인 영단이라고 감탄하는 사람도 있었다.
십칠리 행군은 완전히 성공한 듯했으나 행군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한 학생이 피로 때문에 죽고 마는 사태가 발생했다. 마사오카 교장은 그 일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건은 선생님의 평판을 손상시키지 않은 채 처리된 것이었다.
마사오카 교장은 또 유명인과의 교제를 매우 좋아했다. 난감하게도 선생님의 사교생활이 극렬하여 학교 일에 지장을 주게 되기까지 했다.
일본 본토에서 군대가 오키나와에 주둔하자 군 관계의 사람들과 열심히 교제를 시작하였다. 지위가 높은 장교들을 집으로 초대해 진수성찬을 준비하여 성대하게 대접했다. 그럴 때마다 젊고 고운 마에자토(前里)라는 체육 미인 교사가 늘 함께했다.
군인 접대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지면서 교육 관련 일은 교감들이 대신하여 하게 되었다. 이들 선생님들은 고지식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24시간의 정신 훈련은 기묘한 효과를 가져왔다.
마사오카 선생은 제일고녀와 여자사범 교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그 후 학교 제도가 바뀌어 사범학교는 남자부와 여자부가 병합되었기 때문에 여자부 부장 겸 제일고녀의 교장이 되었다. 내가 여자 사범에 입학했을 때 사범학교는 현립에서 국립으로 변경됨과 맞물려 학생들은 24시간 훈련에 완전히 휘말려 있었다.
사범학교 규칙에서는 선도(先徒)들은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어 있었고, 24시간 훈련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 기숙사에서의 우리는 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교대로 기숙사에 숙박하며 마치 망보는 파수견처럼 변해 있었다. 히메유리 학교의 생활은 점호로 시작해 점호로 저물어가는 나날이었다. 아침에는 다섯 시 반에 일어나야 했다.
6시에 점호가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6시 15분부터 7시까지는 방 청소와 정리를 하고 7시에 또 점호가 있었고, 그 뒤가 아침 식사였다. 8시부터 12시까지 수업이 있었고 점심시간은 12시부터 1시까지였으며 점심시간 후에는 다시 3시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3시부터 5시까지 노동하고, 그로부터 겨우 잠깐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는데, 6시에 또 저녁 점호가 있었고, 자습 시간은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로 정해져 있었다.
그 후 취침 전 점호가 있었고, 열 시 소등으로 하루가 끝나는데 우리는 도대체 얼마나 숙면을 취할 수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국가 비상시 수면은 사치스러웠기 때문이다. 때로는 새벽 2시에 벨이 울려 퍼졌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라!" 라는 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히메유리 학교의 소녀들은 잠자리에서 굴러나와 한밤중 공기에 떨면서 잠옷 차림 그대로 운동장에 줄을 서서 몸을 단련한다는 명목으로 운동장을 뛰어 돌아야 하는 것이었다. 몇 바퀴로 끝나느냐 하는 것은 선생님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왜냐하면 한밤중 훈련은 사감 선생의 마음대로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점호가 있은 후 기숙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한밤중의 점호는 빠진 사람이 없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혹시 학생 중 한 명이라도 운동장 한가운데 쓰러져 있으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밤 우리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그 이유는 누군가가 너무 피곤해서 화장실 가는 도중에다 실례를 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괘씸한 일이 있느냐" 고 당번 선생님이 격분해 "일본 여성의 체면에 관계되는 치욕" 이라고 아우성쳤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누가 실례를 해 두었는지 선생님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우리 모두를 한밤중에 잠을 깨운 것이었다. 마사오카 선생 밑에서는 이러한 24시간의 감시가 다반사처럼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琉球のひめゆり(1987 与那城信子) 04
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노부코) 04
● 제2장 연일 연야의 연등 행렬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격 소식을 우리에게 가장 먼저 알린 것은 마사오카(正岡) 교장선생님이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역사 수업 중이었고, 나는 우치야마(内山) 선생님의 강의를 이해하러고 애쓰고 있었다. 역사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었는데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그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선생님은 본토의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히메유리 학교에 부임해 오신 분이었기 때문에 너무 젊어서인지 말투가 답답할 정도로 단조롭고 듣는 쪽이 피곤해 할 정도로 힘을 주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종종 의미 없는 미소를 짓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어쩌면 내심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내 시선은 선생님의 반짝반짝 빛나는 금니에서 벗어나 창밖의 푸른 하늘로 옮겨갔다. 그날은 겨울에는 보기 드물게 맑은 아침이었다. 따뜻한 햇빛이 유리창을 통해 내리쬐고 있었다.
"그림그리기에는 안성맞춤인 날씨"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붓을 들고 캔버스를 앞에 두고 종달새 언덕에 앉아 있으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창밖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학교의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비상소집입니다. 수업은 이것으로 마칩니다. 서둘러 강당으로 모여주세요"라며 우치야마 선생은 수업을 중단했다. 우리가 강당에 모이자 체조담당의 시마부쿠로(島袋) 선생님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비상소집의 경우 전원이 몇 분 안에 모이는가 하는 것을 조사하는 것은 언제나 시마부쿠로 선생님의 담당이었기 때문이다.
"전원 집합시간 5분 12초. 지난번보다 5초 빠르다. 그럼 출석결과를 보고하라!" 선생님은 주먹 크기의 커다란 스톱워치를 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갑조 50명, 전원 출석” “을조 출석 48명, 결석 2명” “병조---” 그때 교감 선생님이 옆문을 열고 나타나 체조 선생님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오늘 출석결과보고 그만해도 좋다!" 하고 체조 선생님은 보고를 중지시켰다.
평소와 달라, 무슨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불안해하면서 호기심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마사오카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보이자 우리의 관심은 점점 더 커졌다. 대본영 발표가 있다고 선생님이 말문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있어서다. 나는 방금 고마쓰 대령과 면담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고는 다소 사이를 두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 제국은 미영(美-英)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조용한 강당에 서늘한 공기가 흘렀다. 모두는 곧바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며 속삭이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학생도 있었다. 전쟁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있었지만 서구 국가들과 전쟁을 한다는 것은 생각치도 못했다. 미국인이나 영국인이 어떤 사람일지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19세기 중엽 페리가 오키나와에 온 이후 서양인들이 오키나와를 찾는 일은 그리 빈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옆문이 열렸다. 소사(小使)가 들어와 종이쪽지 한 장을 교감 선생님에게 건넸다. 선생님이 그것을 훑어보고 마사오카 교장선생님에게 건네는 것을 우리는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은 방금 라디오에서 막 방송된 뉴스다. 우리 제국의 폭격기는 진주만의 미국 함대를 전멸시켰다는..."라고 선생님이 발표했다.
강당은 터질듯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평소에는 두려위하던 마사오카 선생님 앞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정을 드러내고 손뼉을 치며 춤을 추며 기뻐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마사오카 선생님은 여전히 계속 이야기하려 했지만 그 목소리는 박수와 함성에 지워져 전혀 들리지 않게 됐다. "조용히하지 못하나!"
교장선생님은 두 손으로 귀를 가렸지만, 자기 자신이 기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리는 전보다 더 시끄럽게 계속 손뼉을 치며 함성을 질렀다. "됐어, 그만해!" 라고 선생님이 말했다. "조용히 해!" 하고 체조 선생님이 큰소리로 외치차 간신히 강당은 원래의 고요를 되찾았다.
"첫 전투에서 이긴 것은 기뻐할 일이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한시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 이번 전쟁이 최대의 난적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아두었으면 한다.” 마사오카 교장 선생님은 침을 삼키고, 연단에서 몸을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군대는 아직 시나(支那-중국)에서도 싸우고 있을 뿐 아니라, 이번 적은 물자가 풍부하다. 우리 제국은 전에 없던 비상시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일본인은 한 몸으로 이 전쟁에 임해야 한다. 다행히 우리 군대의 승리는 이미 결정된 일이긴 하지만..."
그 후 마사오카 선생은 일본군의 중국(支那)에서의 문제나 장래 전쟁의 어려움 등에 대해 30분 정도 계속 이야기하고, "최후의 승리의 여신은 우리 황군 편에 서 있다는 것만은 잊지 말라." 고 거듭 강조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전승(戦勝)을 축하하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 제국 육해군은 동남아시아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제국(帝国)의 병사들이 행운을 누릴 수 있도록 황실에 대하여 기도를 드려야 한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의 후손이신 천황과 황족 분들의 건승을 기원하며 지금부터 황궁을 향해 요배(遥拝)를 한다."
마사오카 선생의 눈에는 눈물이 빛나는 것 같았다. "차렷!" 체조 선생님이 구령을 걸었다. "오른쪽으로 돌아섯! 최경례!" 우리는 일본 본토의 궁성이 있는 동쪽 방향을 향해 최경례
(*最敬礼: 허리를 크게굽혀 하는 인사)를 했다. 우리의 가슴속은 승리의 감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일(美-日) 개전에서의 첫 전투 승리는 우리를 전쟁에 끌어들기에 충분한 소식이었다.
그 후 3주는 정말 수선스러운 나날이었다. 바쁘면서도 참으로 유쾌한 나날이 이어졌다. 라디오는 필리핀, 말레이, 남양 제도 상륙 전황을 반복하고 있었다. 전과가 올라갈 때마다 자정까지 연등 행렬이 이어졌다. 악대가 승리의 행진곡을 연주하는 뒤를 모두가 일장기를 그린 연등을 손에 들고 따랐다. 연등 행렬 때문에 수천-수만 개의 촛불이 태워졌다.
지자체, 익찬회(翼賛会-よくさんかい)지부, 국방부인회, 경방단(警防団), 재향군인, 초중학생 등 수천 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연등 행렬은 파상궁(波上宮-なみのうえぐう)을 향해 행진했다. 전쟁에서 이긴 답례로 다음 싸움에서도 이기기를 기도한 뒤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大政翼賛会(たいせいよくさんかい): 1940年10月12日から1945年6月13日まで存在した日本の政治結社.公事結社(公益のみを目的とする結社. 後述のように,日本独自の概念である)として扱われる."大政"は,天下国家の政治,"天皇陛下のなさる政治"という意味の美称."翼賛"は,力を添えて(天子を)たすけること.] [波上宮 (なみのうえぐう): 沖縄県那覇市にある神社. 那覇港と那覇泊港の間,海岸沿いの断崖上に立つ琉球八社の一つで,最上位に位置する. 近代社格制度では官幣小社に列格され,現在では神社本庁の別表神社に指定されている.]
길가에는 전쟁터에 나가 있는 병사의 어머니·처·자매들이 천인침(*千人針-せんにんばり)의 천을 들고 여기저기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나가던 여자들은 다가가 붉은 실이 달린 바늘 한 뜸을 꿰기 위한 순서를 기다리고리 있었다. 천 명이 바늘을 꿰면 천 명의 여자의 영혼이 깃들고 그것을 복대에 매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가정부인들은 부엌을 떠나 부인회에 모여, 성금을 모금하여 병사 가족들을 도우기도 했다. 또 전쟁터로 위문봉투를 보내기도 하고 군수공장으로 보낼 쇠붙이 수집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흰 나무 상자에 유골로 돌아온 용사의 영결식에도 참석했다. 이미 일본 병사의 전사자가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도조총리(東條首相)는 라디오를 통해 전 국민을 향한 방송에서, 이 전쟁은 남쪽 섬들에서 연전연승을 계속하고 있으며, 전쟁은 3개월이면 종결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진주만 공격의 성공으로 적 해군은 전멸에 처해 있으며, 더 이상 적은 해군 없이는 싸움을 계속할 수 없다는 힘찬 말을 듣고, 우리는 도조 총리를 숭배했다. 우리에게 도조 총리는 그야말로 신처럼 보였던 것이다.
琉球のひめゆり(1987 与那城信子) 05
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노부코) 05
● 제3장 죽창과 방공훈련
도조 총리는 전쟁이 끝나는 것은 3개월이라고 선언했다. 국민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당시 도조 씨는 야마토 정신을 북돋아 주는 충군 애국의 상징으로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국민은 모두 총리의 말을 믿었다. 그 예언대로 첫 3개월 동안 일본은 계속 이겼다. 하지만 최종 승리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1942년 8월, 예상치 못한 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민의 낙관적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아 버린 것이다. 솔로몬 전투에서는 이기기는 했지만 놀랍게도 많은 전사자를 냈다. 학교와 사무실과 국방부인회 사람들이 전사한 병사들의 유골을 거두기 위해 이틀 간격으로 나하항을 찾아 줄을 설 정도였다. 너무 많은 전사자가 나왔기 때문에 더 이상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으로 뼈아픈 타격을 입은 이후 태평양 전투의 풍향이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솔로몬 섬으로 미군이 돌아와 일본군에 대해 반격을 개시한 것이다. 과달카날의 패전은 특히 국민의 불안을 키웠다.
하지만 우리는 승리를 의심할 수 없었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배반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날이 갈수록 도조 총리가 어떤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지가 분명해졌다. 미군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삼기 위해, 오키나와에 쳐들어올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점차 현실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43년이 되자, 그런 불안이 현실이 되었다. 더 이상 연등 행렬이나 파상궁에서의 전승 예배는 없어졌다. 일본 본토로의 진격 도중 미군은 어디를 지나갈까. 혹시 오키나와를 그냥 지나치지 않을까. 미군의 목적지는 일본 본토이기 때문에, 이런 작은 오키나와 등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정확한 사정을 알아 보려고 우리는 이웃 조의 조장에게 몰려 갔다.
"적이 올까요?" "꼭 온다." "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해져 있잖아. 군대와 함께 싸워야지." "어떻게 싸울 거예요? 우리는 군인도 아니고 싸울 줄도 몰라요." "정신으로 싸우면 돼. 몸으로 당할 수 없다면 야마토 정신으로 나가면 돼."
"야마토정신도 좋지만, 무기가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총이 있으면 좋겠는데 저희한테는 총이 배급되지 않아요. 게다가 철도 구리도 금속류는 모두 공출해 버렸어요. 바느질용 바늘까지 공출해 버렸어요. 도대체 우리는 무엇으로 싸워야 합니까?"
이웃 조의 조장은 죽창 전술을 전개하라고 지시했다. 더 이상 금속 무기는 바랄 수 없었지만 대나무는 시골에 가면 풍부하고 집 마당에도 얼마간 자라고 있었다. 대나무는 가볍고 부드러우면서도 훌륭한 창이 되는 것이었다. 끝을 뾰족하게 해서 불에 구워 굳히니 철제 진짜 창 같은 효력이 있었다.
창술(槍術)은 학교의 교과목 중 하나로 도입되어 있었다. 처칠이나 루즈벨트의 얼굴 모양을 한, 짚 인형을 만들어, 우리는 그것을 향해 창을 찔렀다. "창끝에 증오를 담아 찔러라!"
군사 교련 선생님은 엄하게 지도했다. 미영에 대해 증오를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강한 병사로 만들 목적으로, "창을 힘껏잡아 당긴 후 빠르게 찔러라. 창술의 요령은 이 한 가지에 있다”고 하며 질타와 격려를 했다.
일반 시민들 또한 학교 운동장으로 불러 모아 창 훈련을 받게 했다. 유사시를 대비해 우리는 육체를 단련해 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훈련은 노인들에게도 강요했다. 훈련을 거부하는 자에게는 국가의 적이라는 오명을 씌우는 등, 훈련에 나가지 않는 자는 호되게 당했다.
눈에 거슬리는 광태(狂態)가 곳곳에서 연출됐다. 젊은이들은 우월감에 빠지고, 노인의 행동을 비웃는 풍조가 생겼다. "저 할머니, 요령이 없어요. 오른손과 오른발을 동시에 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라는 등 구경꾼들 사이에서 조롱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었다.
성실하게 훈련에 임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재미삼아 참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거의 모든 사람이 허리와 어깨를 주무르며 피곤한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쨌든 나라를 위한다는 대의명분이 국민의 마음 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습 훈련도 있었다. 모든 시민은 빠짐없이 참여해야 했다. 참여하지 않으면 식량 배급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공훈련은 동트기 전에 시작돼 일하러 나가기 전까지 계속됐다.
"소이탄!" 이라고 외치며 훈련대장이 짧은 통나무 토막 하나를 땅위에 던지면, 물을 적신 돗자리를 들고, 불타고 있다고 가정한 통나무를 끄기 위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제히 뛰쳐나가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근처 우물까지 사람들이 일렬로 늘어서 양동이 담당이 양동이에 물을 부으면 그것을 다음 사람에게 건네주는 훈련이 거듭되었다.
"서둘러, 서둘러!" 소이탄이 꺼질까 말까 하는사이에, 경방단(警防団)과 이웃 조 훈련대장이 또 하나의 통나무 조각을 내던진다. 이번에는 통나무가 지붕 위로 떨어진다. 상황경계조가 사다리를 안고 달려가, 불이 붙은 것으로 가정한 지붕에 사다리를 세우자, "조심해, 머리 날아간다!" 라고 훈련대장이 외치는 것이었다.
"바보야, 이번 건 폭탄이야!" 모두가 놀라 얼굴을 마주보는 식이었다. 웃는 사람도 있었고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 사람도 있었다. "폭발한다! 엎드려! 모두들 빨리, 빨리!" 모두는 서둘러 땅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어쨌든 오키나와는 아열대지역이기 때문에 비가 자주 와서 땅이 마를 틈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진흙투성이가 되지 않아도 될까" 라고 생각하면서도, 폭발물의 경우는, 바로 그 자리에서 몸을 엎드려야 한다는 규칙에 사람들은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면 "너희는 옷이 더러워지는 것과 내 목숨 중 어느 쪽이 중요하냐" 고 꾸중을 듣기 마련이었다.
나하시의 지도자는 방공 훈련을 언제나 폭우가 내린 바로 뒤에 실행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 같다. 비 온 직후 훈련에서는, 진흙투성이가 된 것만큼 칭찬을 받았고, 관심도 많이 모았지만, 동시에 또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진흙투성이가된 인기인은, 누구에게나 대접받은 것이다.
琉球のひめゆり(1987 与那城信子) 06
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조 노부코) 06
● 제4장 아! 쓰시마마루
1943년이 되자 본토로의 소개(疎開)가 시작되었다. 우선적으로 소개한 사람들은 내지에서 오키나와로 온 사람들이었다. 내지 사람은 나하 시민의 대략 5퍼센트였는데, 지위가 높은 정부 관리, 교육자, 사업가, 그리고 그 가족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진하여 내지로 돌아갔지만 오키나와 태생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별로 소개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었고, 또 토지와 재산을 잃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군의 활동에 장애가 되는 걸림돌은 적은 편이 좋고, 인명 안전을 생각하면 역시 아이들의 소개는 불가피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소개를 싫어하는 사람들에 대해 현청은 학교 선생님을 통해 한시라도 빨리 본토로 소개시키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장래는 아이들에 의해 지켜나가야 하니 이 아이들을 이 섬에서 내보내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하고, 우리나라가 이겨내기 위한 국책으로 결정한 소개작전이다. 부디 동참해 주기 비란다." 는 방침이 발표됐다.
학동 소개(学童疎開)가 시작되기 전부터, 본토와 오키나와를 잇는 해역은 미국 잠수함이 출몰하는 극히 위험한 수역으로 변해 있었다. 이미 여러 척의 일본배가 적의 어뢰공격에 의해 침몰되어 수천 명의 고귀한 생명을 빼앗기고 있었지만, 그것은 공공연한 비밀로 여겨지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보면 미군 잠수함이 오키나와에서 일본 본토까지 하나로 연결돼 바닷속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러한 전황하에서 소개학동(疎開学童)의 제1진은 잠수모함(潜水母艦: 잠수함 지원함) 진케이(迅鯨)호를 타고 가고시마에 무사히 상륙했다. 제2진 또한 사고 없이 가고시마로 보내졌다. 현청에서는 학생들의 옷 가슴에 이름표를 꿰매라고 명령했는데, 그것은 소개선이 조난당했을 때 아이의 유해 판별이 된다는 이유가 담겨 있었다. (*潜水母艦: 潜水艦に補給をおこなう補給艦の一種である。 前進根拠地や泊地などにおいて潜水艦を接舷させ、食料、燃料、魚雷その他物資の補給を行う.)
오키나와에서 가고시마까지의 해역은 적함의 습격을 언제 받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마의 바다로 여겨졌기 때문에 소개담당관리의 입장에서는 해상에서의 어린이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여동생 야스코(泰子)는 일곱 살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야스코를 소개시키고 싶어 했다.
어머니는 미군이 오키나와에 상륙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면 섬에 남은 사람은 모두 죽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머니는 일본은 큰 나라이고 내지에 가기만 하면 야스코의 생명은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또한 바다가 위험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위험을 극복해야 야스코는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었다.
야스코를 소개시키면 적어도 가족 중 한 명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어머니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야스코를 일본 본토로 소개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아이들이 일본에 도착한 뒤 돌봐주겠다는 소개 담당 관리의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돌봐줄 수 있는 것은 가족뿐이라고 강조했다.
게다가 적이 오키나와에 상륙한다는 소문은 단순한 소문에 그칠지도 모른다고도 주장했다. 오키나와에 남았다고 해도 반드시 죽게 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도 설득했다. 어쨌든 일단은 아버지의 의견이 관철되어 야스코는 오키나와에 남게 된 것이다.
여름의 한낮, 나는 초등학교 돌담을 따라 걷고 있었다. 그때 여동생 야스코와 동갑내기쯤 되는 어린 여자아이가 저쪽에서 걸어오는 것을 만났다. 그 아이는 한여름의 뜨거움에 숨을 헐떡이며 걷고 있었다. "그렇게 서둘러 어디로 가?" 라고 나는 물었다. 나하항. 그녀는 웃으며 가슴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보여줬다. 히토히가 료코(人比嘉良子), 7세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 돌담 너머로 학교 시간을 알리는 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가야지"라고 말하고 료코는 달리기 시작했다. 돌담 너머에서 초등학생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에게는 기쁜 날이었다. 앞으로 두세 시간 후면 아이들은 작은 섬을 떠나 책으로 읽거나 선생님에게 물어봐야만 아는 본토로 향할 것이다.
일본의 높은 산이나 깊은 골짜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봄에는 벚꽃구경을 하고 가을에는 단풍을 감상하며 겨울에는 눈과 얼음을 볼 수 있을 터였다. 료코가 싱글벙글하고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의 부모님이 야스코의 소개 계획을 중지했을 때 야스코가 울음을 터뜨렸는데, 그것은 너무 당연할 정도의 행동이었다.
그날 학동(学童) 2천3백여 명을 포함한 4천5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쓰시마마루 외 두 척, 모두 세 척의 배로 오키나와를 출발했다. 1944년 8월 22일 오후 10시 15분, 아이들이 겨우 잠들었을 무렵, 쓰시마마루는 어뢰에 맞고 약 10분 후에 침몰한 것이다.
다른 두 척은 무사히 일본에 도착했는데, 쓰시마마루에 탑승한 약 800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1,484명의 사람들이 배와 함께 바닷속 깊이 가라앉아 버란 것이다. 구조된 117명 중 학동은 불과 59명이었다.
琉球のひめゆり(1987 与那城信子) 07
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조 노부코) 07
● 5장 10•10 공습
적의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전화(戦火)는 점점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1944년이 되자, 온 일본이 절망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었다. 라디오 음악까지 바뀌었다.
전쟁에서 이기던 시기에는 위세 좋은 군함 행진곡이나, 웅장하고 열광적인 곡이 많이 연주되었는데, 이윽고 ‘가달카날의 최후’, ‘사이판의 옥쇄’가 보도되자 장중한 장송곡 멜로디가 슬프게 라디오 가게에서 흘러나오게 되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음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그리고 오키나와의 남성이라는 남성을 한사람도 남겨두지 않으려는 듯 각지에서 출정식이 빈번하게 열리게 되었다. 일본 군정부는 오키나와를 지키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지원을 하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3월 말에야 겨우 와타나베군사령관(渡部軍司令官)과 미나가와참모장(皆川参謀長)참모장이 파견돼 왔다.
하지만 두 장교를 수행해 온 병력은 턱없이 적었고 오키나와 방면 수비군이라는 이름뿐인, 불과 몇 개의 비행장 설치대원과 작전 수뇌진뿐이었다. 와타나베군 사령관은 마음 약한 타입으로 오키나와에 거의 병비(兵備)다운 병비가 없어 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사령관의 언행은 현민들에게 미덥지 않게 비춰지고 있었다. 어느 날 임시 거처인 군사령부에서 신문기자를 상대로 회견하던 중 갑자기 옆 창문으로 달려가 상체를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기자들은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의아해 하였다.
그러자 사령관은 비행기가 아군의 것이었음을 확인한 듯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아냐, 요즘은 우군 비행기만 있는 게 아니니까”라고 변명해 기자들을 놀라게 했다. 와타나베 군사령관은 연일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었다.
"만약 적이 오키나와에 상륙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라고, 한 시민이 걱정스럽게 묻자, "적은 반드시 이 섬에 상륙한다. 그러면 오키나와는 제2의 사이판이 된다. 적이 상륙하면 현민의 목숨은 없다. 나도 죽는다. 다 죽는다. 현민들은 군과 운명을 함께해 옥쇄의 각오를 하기 바란다. 이 섬의 고사포나 탱크를 봐요. 모두가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비행장 건설은 지지부진하고 필요한 비행기가 없다." 라며 사령관은 눈물을 보이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너무 감정이 고조된 탓인지 눈에는 눈물이 번쩍였다.
청중은 매우 당황하고, 민망해지고, 강연회 분위기는 완전히 어색해져 버리는 것이다. 사령관은 스스로 동분서주했다. 미나가와 참모장도 시민과 병사들과 함께 삼태기를 잡고 흙을 날랐다. 도구라고는 곡괭이와 삽뿐이었다. 그것도 농가에서 징수해 온 허술한 것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손으로 해." 작업감독 군인이 명령했다. 말한 대로 우리는 맨손으로 땅을 파서 흙을 날랐다. 잡초를 제거하고 비행장을 만들었다. 언덕에 다이너마이트를 사용하여 개인용참호와 방공호를 만들었다. 막사가 골짜기와 언덕 중턱에 들어섰다. 우리 교실도 군인막사로 바뀌었다.
군사 작업은 매일 밤낮 계속되었다. 우리는 열심히 돌관작업을 했지만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와타나베 사령관은 신경쇠약이 되어 대만으로 전임이 되었다. 미나가와 참모장도 사령관과 동행했다. 그 며칠 뒤 우시지마(
牛島司令官)과 쵸참모장(長参謀長)이 오키나와에 도착했다.
둘 다 이름난 장군이었다. 두 사람은 "위대한 우지마와 쵸" 로 불렸다. 이윽고 본격적이 될 적의 내습에 대해 참으로 믿음직한 지도자를 얻었다고 모두가 믿었다. 오키나와전은 두 사람의 지휘 아래 치러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무기가 오지 않는 것으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7월이 되면서 갑자기 다양한 군수물자가 본토에서 운반되어 왔다. 나하항은 수송선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은 탱크나 고사포나 트럭 등이 아스팔트를 부수며 줄지어 나아가는 것을 보고 감격했다. 은날개 비행기가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늘 높이 날아다니게 되었다.
카키색 옷을 입은 군인들이 젊은 처녀들과 길거리 한켠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는 등, 오키나와는 군사색 일색으로 칠해졌다. 우리의 작은 섬은 태평양 제일의 멋진 요새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틀림없는 사실이 오키나와 현민들에게 자부심을 갖게 하는 동시에 걱정도 가져왔다.
사실 현민 대부분은 끔찍한 전쟁에서 벗어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이 강행하는 전쟁을 누구 하나 거스르지 못하고 50만 오키나와 현민은 다가오는 오키나와 결전이라는 도축장에 끌려들어 갔던 것이다.
와타나베 군사령관이 오키나와에 부임해 있던 1944년 6월경에는 미군기는 아직 오키나와 하늘을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었지만, 미군 폭격기는 이미 후쿠오카의 군수공장을 덮치고 있었으므로 공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현민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오키나와에서 후쿠오카까지는 비행기로 세 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여서, 집 가까이의 방공호에 대피해 있을 때면, 후쿠오카에서의 공포가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10월 10일, 오키나와에서의 첫 공습이 생각지도 못한 때 찾아왔다. 그것은 아침 일찍 일어난 일이었다. 나하 시민들은 잇따른 방공훈련, 죽창훈련, 군사작업 등으로 녹초가 되어있었다. 시민들은 깊은 잠에서 겨우 깨어나려는 참이었다.
기종 불명의 비행기가 그림자처럼 남쪽 하늘에 작게 나타났고, 그것은 점차 형태를 드러내며 나하시로 다가왔다. 한 편대가 지나가고 또 한 편대가 그 뒤를 이었다.
아침 일찍 비행기가 뜨는 것은 별로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날 아침 비행기는 조금 이상했다. 사람들은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로, 너무 심한 소음에 놀라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비행기는 그때까지 들어 본 적이 없는 금속적인 울림의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얇은 철판이 떨리는 듯한 소리였다. 그것은 뱃속에 깊이 울려 퍼지는 듯한 일본 비행기 소리와는 달랐다. 게다가 그날 아침만 해도 비행기는 너무 많았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공습 경계 경보의 사이렌은 울리지 않았다.
집집마다 창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다보았을 때, 차츰 날이 밝아 가고 있었다. 하얀 비행운들이 교외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보라색 하늘이 은은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하얀 비행운들로 가득 찼다. 그 비행운들은 한동안 하늘에 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야, 고사포 소리가 들린다. 아무래도 연습 사격인 것 같군." 사람들이 잠옷을 입은 채 거리로 나왔다. 다가가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고, 상황을 좀 더 잘 보려고 지붕 위에 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 무렵에야,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거침없이 적의 비행기가 급강하해 기관총탄을 여기저기 흩뿌리며 덮쳐왔다. 큰일이 났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은신처를 찾아 도망쳤다.
일분도 채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폭탄이 떨어질 때마다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가 났고, 한동안은 다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폭탄 소리가 잠시 멈추자 다시 고사포 소리가 들려왔다. 폭탄과 고사포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먹하여, 유리창 부서지는 소리도, 집이 불 타는 소리도, 일체의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일출에 시작된 공습은 일몰까지 이어졌다. 우리 히메유리 학도들은 나하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시키나(識名)의 방공호에 숨어 있었다. 해가 지고 공습의 위험이 없어진 후 우리는 방공호에서 기어 나와 종달새 언덕으로 올라가 서쪽의 나하 시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하의 거리는 잿더미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몰의 노을이, 불탄 들판으로 변한 나하 시내 너머에서 붉게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나하의 도시 자체에 불을 붙이고 있는 것 같았다.
불탄 들판이 된 나하 시내를 보면서, 우리는 진짜 공습에서는, 양동이의 물이나 젖은 멍석이나 사다리 등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훈련 중에, 진짜 공습이 되면 "소이탄!" "폭탄!" "엎드려! 너희들 알았냐!" 등 소꿉놀이 같은 일을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일은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었다.
10•10 공습 후 어머니는 동생들을 데리고 소개선을 타기 위해 나하항에 가게 됐다. 그곳에는 소개선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참으로 미덥지 못한 허름한 배로, 마치 죽어가는 늙은이 같은 배였다. 낡아서 쓸모없게 되어, 이번이 마지막 항해가 되기라도 하는 듯 초라하게 항구에 떠 있었다. 수명이 다되어 보이는 낡고 작은 배였다.
목무 부분은 썩어가고, 해초와 조개류가 여기저기 붙어 있고, 작은 벌레가 기어다녔다. 선체가 두껍고 거무스름했다. 철제 부분은 녹슬어 금방이라도 녹이 떨어질 것 같았고, 바닥은 걸을 때마다 삐걱거렸다. 하지만 선원들은 젊고 건강해 보였다. 젊은 뱃사람들을 보며 우리 부모님은 다소 안심한 듯했다. 사람들은 처음 그 배를 보고, 절망적인 기분이 빠질 뻔했지만, 일단은 마음을 달래듯 농담을 주고받았다.
"배는 낡고 작은 편이 좋아. 적의 잠수함에게도 들키지 않고, 들켜도 쫓아오지 않으니까” “쏴도 어뢰는 맞지 않는다. 이 배는 물에 얕게만 떠서 그래.” 태양이 쨍쨍 내리쬐고 있었지만 모두가 날씨가 좋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늘이 맑은 날은 공습받기 쉽기 때문이다.
나하항은 10•10공습으로 이미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그곳에는 한 채의 건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만약 미국 폭격기가 나타났다면 어디에도 숨을 곳이 없었다. 아이들도 어른들의 걱정은 알았는지 내 동생들도 짐이 배에 실리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작은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다들 저렇게 많은 짐을 들고 왔네요. 나는 짐은 두 개만 가능하다고 들어서, 집에 많이 두고 왔는데..." 라며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의 짐꾸러미들을 보고 못마땅해 하셨다. "너무 많이 가져가면 힘들어요. 어린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가는데, 본토에 도착해 혼자서 짐 옮기기도 힘들어요." 라고 같이 떠나지 못하는 아버지가 위로의 말을 했다.
"본토 관리가 짐을 옮기는 것은 도와줄 테니 걱정 없다고 하더라고요. 여자나 아이만으로는 힘든 일을 할 수 없으니까요.” “운을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어요.” “가족 사진을 몇 장 가져가고 싶은데....” “사진은 여기에서 잘 보관해 둘 테니 안 가져가도 돼요. 걱정할 필요 없어요."
뱃고동이 울렸다. 배를 탈 시간이 왔다. 배웅 온 가족은 아주 잠깐 선내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여자아이나 짐으로 붐비는 선실에 들어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막내 여동생 케이코(敬子)의 손을 잡고 배의 계단을 따라 배 안으로 내려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아버지와 나는 잠자코 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버지와 내가 배 쪽에서 부두로 돌아오자 배웅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위험하다고 생각해 모두 서둘러 돌아갔을 것이다. 이별은 참으로 허망한 것이었다. 이별의 음악도 오색테이프도 없고 눈물 흘릴 틈조차 없는 "작별"이었다. 빈약하고 믿음이 가지 않는 배는 가여운 여자들을 태우고 천천히 항구를 떠났다.
아버지와 나는 파도에 휩쓸릴 듯 수평선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선체를 잠시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들과 살아서 만날 일은 이제 없을 것 같다."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말씀은 운명의 장난을 자초하는 것 같아 나는 입을 다문 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부디 어머니와 동생들을 지켜주세요. 부디 배를 지켜주세요." 배가 떠나간 뒤의 부두는 보잘것없고 지저분해 보였다. 바닷물은 기름으로 더러워져 있고 물가에는 쓰레기가 떠돌고 있었다. 콘크리트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해상을 스치듯 날아다니며 육지로 향하는 바닷새 울음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琉球のひめゆり(1987 与那城信子) 08
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조 노부코) 08
● 제6장 어머니에 대한 추억 (추억의 장)
나에게는 그리운 어머니의 추억이 있다. 하지만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당시의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머니는 류큐 열도 중 하나인 야에야마(*八重山列島: 타이완 동쪽에 위치) 지방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어릴 때 부모님을 여의고 작은 논밭밖에 가진 것이 없는 삼촌과 숙모의 손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나하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그 사람은 어머니에게 결혼 상대를 소개했다. 신랑이 될 사람은 높은 교육을 받았고, 자산가의 대를 이를 사람이었다. 중매쟁이는 보자기를 펼치고 그 안에서 신랑이 될 사람의 사진을 꺼내 어머니에게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수줍게 사진을 들여다보더니 곧바로 "네" 라고 답하며 결혼을 승낙했다고 한다.
삼촌 집은 가난했지만 어떻게든 이불 두 장과 기모노 원단 두세 벌, 거기에 경대를 갖추어 주었다. 어머니는 셀룰로이드로 만든 분홍색 헤어핀을 양철통에 넣고 혼수에 추가했다. 내가 여섯 살이 되었을 때 헤어핀이 유행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내 장난감이 되었다.
나하의 부자의 대를 이을 사람이 어쩌다 시골에서 자란 고아와 결혼하게 되었는지 누구 하나 나에게 이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다. 어쨌든 어머니는 곧 사진으로 한 번밖에 본 적이 없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배를 타고 오키나와 본섬으로 향했다.
결혼식이 끝나자 두 사람은 이토만(糸満)에 집을 마련하고 재산을 물려받을 때까지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큰 병으로 누워 있었고,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이토만의 집을 잘 기억하고 있다. 마당에는 시큼한 씨가 든 석류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그 나무 밖엔 없었지만 늘 밝은 햇살이 정원에 가득 차있었다. 매일 아침 어머니는 나를 안고 마당으로 나가 일하러 나가는 아버지를 배웅하는 것이 일과 중 하나였다.
아버지가 돌담 너머로 돌아 가슴 위만 보이게 되면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두 번째 "다녀오세요"를 말씀하셨다. 이에 화답해 아버지는 하얀 파나마 모자를 손에 들고 흔드는 것이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잘 웃었다.
내가 네 살 때, 기차(汽車)를 타고 나하에 갔던 기억이 있다. 나하에 도착하자 우리는 높이 솟은 두툼한 목조 문이 있는 큰 집으로 갔다. 넓은 마당에는 석등과 조각물, 그리고 큰 화분과 금붕어가 헤엄치는 석조 사각 연못이 있었다.
[*沖縄県営鉄道-1914年(大正3年)12月に与那原線の那覇-与那原間が開業.その後,大正末期までに嘉手納へ向かう嘉手納線や糸満に延びる糸満線も開業した.太平洋戦争末期の1945年(昭和20年)3月には運行を停止し,戦後は復旧することなくそのまま消滅]
그날, 그집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작은 소리로 말하고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용히 걷고 있었지만, 부엌에서는 음식장만의 큰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종 치는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누군가 죽으면 종을 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사람들이 긴 행렬을 지어 문을 지나 길거리로 나섰다.
길 양쪽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비슷한 복장을 한 네 사람이 작은 신을 모신 가마 같은 것을 어깨에 메고 행렬에 앞장서고 있었다. "저 안에 누가 있어요?" 라고 나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란다"라고 어머니는 대답했다.
그 뒤를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따라갔다. 그 행렬 속엔 검은 옷을 입은 아버지가 있었다. 큰 소리로 울부짖는 여자들 뒤를 많은 사람이 이어졌다. "엄마, 봐봐, 우는 사람 속에 웃는 사람이 있어."
제가 말하자, 어머니는 "쉿!" 하고 내 손을 움켜쥐었다. 울고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의 가족으로부터 고용된 우는 여자들이었다. 어머니와 남동생 야스(康)와 나 셋은 장례식 행렬에는 참가하지 않고 다른 어린 아이를 동반한 어머니들과 그곳에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어머니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곧 이 큰 집으로 옮겨올 거야"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근처에 지장보살상이 있는 작은 집으로 옮겼고, 큰 집으로는 모르는 사람들이 이주했다. 우리가 작은 집으로 옮긴 후 우리 부모님은 가끔 아이들 앞에서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일까, 아버지는 예전만큼 웃지 않게 되었다.
어느 여름날의 일이었다. 친구가 같이 수영하러 가자고 한 적이 있었다. 파상궁(波上宮) 부근 해안은 수영하기에 좋은 곳이었지만, 우리 아버지는 어른이 함께하지 않으면 결코 바다로 보내주지 않았다. 그 오후 아버지는 일 때문에 집에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어머니에게 바다로 가게 허락해 달라고 말해 보았다.
그때 어머니는 손님을 맞고 있는 중이었다. 손님은 몸이 큰 뚱뚱한 여자였고 얼굴에는 검은 점이 있었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그 여자는 금니가 보일 만큼 입을 크게 벌리고 나를 보고 웃었다. 나는 평소에 훈육받은 대로 인사를 하었다.
그러자 "어머나, 따님이군요." 뚱뚱한 여자는 인사를 받으면서 말했다. 어머니는 입을 다문 채 그 여자와 마주 앉아 있었지만 시종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무릎에 어린 남동생 에이(栄)를 안고 오른손으로 에이의 머리를 받치고 있었는데 왼손은 초조한듯이 다다미의 이음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엄마" 하고, 나는 엄마에게 말을 걸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뚱뚱한 여자는 부채를 사용하는 한편 여러가지 표정을 지으면서 동생 에이를 웃기려 하고 있었다. 에이는 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엄마" 하고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엄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 눈은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나는 슬픈 기분이 되어 "나... 나... 친구들과 수영하러 가고 싶은데..." 간신히 그말만 입에서 나왔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눈을 아래로 내려 깔았다. 나는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나 밖에서 기다리는 친구에게 갔는데, 어머니가 너무 쉽게 허락해주신 것에 이상한 느낌을 가졌다. 아버지는, 퇴근한 후 내가 어른을 동반하지 않고 바다에 다녀온 사실을 알고 격분해 어머니를 꾸짖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옆방으로 가서 아버지를 부른 후 맹장지문을 왈칵 닫았다. 맹장지문은 한동안 열리지 않았다. 우리는 부모님이 서로 격렬하게 다투는 모습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어머니는 아이들의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잠시 방에서 나왔지만 이내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아버지와의 말다툼은 계속되는 것 같았지만 더 이상 큰 소리로 다투는 일은 없었다. 부모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와 동생 야스는 마당에 나가 놀았다. 여름밤은 시원하고 주변에 온통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는 바람에 우리는 반딧불이를 잡고 떠들며 놀았다.
당시 오키나와에서는 고방 속의 쌀가마니 수로 그 집 재산의 다과를 알 수 있다고 하였는데, 우리 집에는 많은 쌀가마니가 있었다. 가난한 사람이 쌀가마니를 집에 두는 것은 매우 어려운 시대였으므로 우리집은 그만한 자산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뚱뚱한 여자가 온 다음 날 나는 고방 속의 쌀가마니가 완전히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 어두워지고 나서 어머니는 나에게 대나무 소쿠리를 건네주고 쌀을 사오라 말했던 것이다. "돈을 떨어뜨리면 안 돼. 도야마(当山)의 아주머니 가게에 가서 이 소쿠리에 쌀을 한 소쿠리 달라고 하고 사와.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어머니는 내게 오십전짜리 동전을 건네며 "그럼, 다녀오라" 고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뒷길로 이용해 다녀다오라"고 했다. 내가 가게에 들어갔을 때 도야마의 아주머니는 여자 손님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가 말했다.
“아니 그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부잣집 아가씨가 밤중에 쌀을 사러 오다니.” 도야마의 아주머니는 돈과 소쿠리를 내게서 받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나는 잠자코 있었다.
"어디 아가씨?"라고 여자 손님이 물었다.
아주머니는 그 사람의 귓가에서 뭔가 속삭였다. 여자는 나에게 다가와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나는 네 할아버지를 알고 있어" 라고 잠시 후 말했다.
도야마 아주머니가 소쿠리에 쌀을 담아 가져온 후 "소쿠리를 이렇게 머리에 얹어라" 며 작게 접은 천을 내 머리에 올려놓고 그 위에 소쿠리를 얹어 주었다. "소쿠리 양 끝을 양손으로 잡으면 돼. 고개를 숙이거나 머리를 돌리면 흘러내리니까. 그래, 그래,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 해. 어두운 곳으로 가면 위험해."
내가 가게를 나설 때 두 사람은 뭔가 흥분한 듯 말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말대로 어두운 뒷길을 통해 돌아왔다. 아래를 보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도록 조심했기 때문에 쌀을 조금도 흘리지 않았다.
여섯 살 무렵, 나는 친구 중 한 명이 꽈리를 부는 것을 보고 그것을 해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꽈리를 앞니와 아랫입술 사이에 끼고 불면, 불 때마다 개구리가 우는 듯한 소리가 난다. 친구가 꽈리를 불며 노는 것을 보고 나도 그런 것을 갖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래서 엄마에게 꽈리를 살 한 푼짜리 동전을 달라고 졸랐다. 엄마는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실망했다. 나와 어머니는 지붕 아래 빗물을 받는 커다란 물항아리 옆에 서 있었는데 나는 두 팔로 물항아리 목 주위를 껴안고 땅을 차며 "엄마, 돈 일전만 줘"라고 졸랐다.
어머니는 조금도 응할 기미가 없이, "안 돼" 라고 계속 말했다. 나도 계속 조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집 안으로 들어가 바느질을 시작했다. 그리고 바느질을 하면서 고개도 들지 않고 "안 돼"라고 계속 말했다. 그러다 나는 물항아리 속의 빗물에 정신을 빼앗겼다.
물항아리 안에는 장구벌레가 가득 떠 있었다. 손가락을 대자 장구벌레가 흩어졌다 모였다 하고 있다. 나는 한동안 장구벌레에게 정신이 팔려 꽈리 생각을 잊고 있었다. 하지만 또 꽈리 생각나서 다시 조르기 시작했다.
"엄마, 돈 일전만 줘, 지금 당장 줘" "안 돼" "안 주면 항아리 물을 더럽힐 꺼야" "더럽히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물에 빠져 버릴거야" "빠지고 싶으면 빠져" 나는 끝내 돈을 받지 못했다.
옆집에 이상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아이들이 다가오면 코를 잡아당기는 버릇이 있었다. 코가 아팠던 건 아니지만 갑자기 코를 잡히는 게 싫었고, 그 할아버지의 눈빛은 조금 이상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 할아버지를 미친 사람 처럼 대하며 되도록 가까이 가지 않고 있었다. 할아버지에게는 이웃에 사귈 사람이 없는 것 같았다.
그 집 마당에는 닭장이 있었다. 가끔 할아버지는 닭장의 문을 열고 마당에 닭을 풀어 놓고 있었는데, 어느 날 닭 한 마리가 우리 집으로 들어와 고방 속에서 알을 낳았다. 나는 달걀을 발견하자 아직 따뜻할 때 엄마에게 가져갔다.
"할아버지한테 말하면 안 돼. 알았지." 어머니는 기쁜 듯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는 어머니가 꽈리값 일전을 주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나는 그 때의 어머니가 얄미운 생각이 들어, 서운함을 되갚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고방 속의 달걀에 대해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할아버지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어머니는 나에게 계란을 건네며 할아버지에게 돌려주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인상을 찌푸리고 계란을 받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보복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보복은 결코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에게 달걀을 건넸을 때 어머니의 얼굴은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 슬픈 얼굴이었다. 나는 마음이 침울해졌다. 나는 하루 종일 엄마의 행동을 주시하며 엄마가 마음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만 하고 있었다.
혼내주면 기분이 풀릴 텐데,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피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별다른 내색도 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평소와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여느 어머니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혼내주면 내 마음도 편해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른 척하는 게 더 괴로웠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부엌에서 나를 등 뒤에 두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어머니에게, 나는 힘껏 주먹으로 어머니의 등을 내려쳤다. "아, 아파. 왜 때리는 거야?" "나, 엄마, 아주 미워" 라고 나는 큰 소리로 외쳤다.
금방이라도 엄마가 때릴까 봐 내 엉덩이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아주 잠깐이긴 했지만 어쩌면 너무 세게 쳐서 어머니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노래를 흥얼거리며 일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는 부엌을 나와 햇볕이 드는 길가로 나왔다. 한참을 걷자 국수 공장 뒤 뽕밭이 나왔다. 나무 아래 앉아 문득 올려다보니 보라색 뽕나무 열매가 열려 있었다. 둘러보니 모든 뽕나무에, 녹색 잎에 섞여 보라색 열매가 가득 차 있었다. 펄쩍 뛰며 나는 오디를 따서 서둘러 주머니에 넣었다. 서둘다 보니 열매가 어깨져, 내 하얀 앞치마는 보라색으로 물들고 말았다.
나는 주머니가 가득 차자, 집으로 달려가서, "엄마, 손 좀 내밀어."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뭐야?" 일하는 어머니는 귀찮은듯이 젖은 두 손을 수건으로 닦아 내밀었다. 나는 서둘러 주머니 속의 오디를 어머니 손안에 건냈다. "이게 뭐야?" 라고 어머니가 물었다.
"엄마에게 주는 거야"라고 나는 대답했다. "나한테... 왜?" "그냥..." "글쎄 왜?" "오디가 맛있으니까..." "아니야, 맛 없어. 엄마는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너도 이런 거 먹으면 안 돼.” 어머니는 두 손 안의 뽕나무 열매를 어디에 버릴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너는 히가(比嘉) 씨의 뽕밭에 갔군. 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다음부터 히가 씨의 밭에 들어가면 안 돼. 너가 히가씨에게 들켜서 꾸중을 듣는 일이 있으면, 아버지도 어머니도 매우 입장이 곤란하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뭐야, 그 앞치마. 지금 막 씻었는데. 완전 보라색으로 물들었잖아. 그 색깔 이제 안 지워져. 정말 난감한 아이네, 너는....”
그때 나는 엄마가 울음을 터뜨리지나 않을까 하고 마음조려했다. 어머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린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琉球のひめゆり(1987 与那城信子) 09
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조 노부코) 09
● 제7장 푸른 달빛 속의 어두운 집
1945년 3월 23일 오키나와 전투의 불길이 치솟기 시작했다 미국 전함들은 오키나와 근해에 접근, 우선 남부의 미나토가와(港川)에 함포를 퍼붓기 시작했다. 이에 맞추어 폭격기가 내습해 비 오듯 폭탄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미군의 상륙작전이 개시된 것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적군 상륙의 경우, 히메유리 학생들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육군 병원에 간호사로 종군하기로 되어 있었다. 적 상륙 소문과 동시에 우리 기숙사 학생들은 집으로 돌아가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하고 오라는 선생님들의 지시를 받았다. 나는 달밤에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갔다.
나하의 우리집은 10월 10일 공습으로 돌담의 일부가 허물어지고, 문은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닫히지 않게 되어 있었지만 집 자체는 화마를 피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백 년 전에 지어진 집이었는데, 이를 지은 목수는 왕조시대에 왕자의 집도 지었다고 한다. 아주 큰 집이었고 목수의 솜씨도 훌륭했지만 재료도 훌륭한 것이 사용되어 있었다. 공습 후 부모님이 우리 집은 조상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저 대들보를 봐봐. 모두가 200년의 수령을 가진 오래된 나무를 사용했어. 쇠 같이 단단해. 기둥을 봐봐. 빛나잖아.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지만 오래되면서 안에서 겉으로 윤이 나오는 거다. 어떤 태풍을 만나도 끄떡없이 집을 지탱해 왔고, 공습에도 화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니까. 이 집은 분명 우리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거야.”
튼튼함과는 별개로 그 집은 내게는 조금은 섬뜩한 곳이기도 했다. 오키나와의 집들은 어디서나 그렇지만 창문이 없다. 그래서 집안은 항상 어두웠다. 비막이 덧문을 닫으면 더욱 캄캄해진다. 불단에는 조상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이러한 불단을 보면 언제나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어두운 곳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조상의 영혼이 집안을 헤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받도록, 또 장난을 친 벌로, 나는 불단 앞에 몇 번이나 무릎을 꿇었는지 몰랐다. 그게 너무 싫었다.
집에 들리게 된 것은 4월의 어느 날 밤이었다. 집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아버지에게 어떤 식으로 작별인사를 하면 좋을까 생각했다. 어머니와 남동생과 여동생들은 이미 본토로 소개돼 있었다. 아버지는 위궤양에 걸려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본토에 가기 전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오십 정도의 여자를 고용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집을 근거지로 삼아 몰래 암거래 돈벌이에 열중하느라 집안일을 게을리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녀의 교활함에 애를 태우고 있었다. 어머니가 본토에 간 뒤로부터, 아버지는 마음이 편치 않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위장의 상태는 전혀 좋아지지 않고, 그녀는 제멋대로 행동했고, 참을 수 없게 된 아버지는 그녀에게 짜증을 냈다. 그러자 그녀는 떠나버리고 아버지는 혼자가 되어 버렸다.
내가 집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램프를 가까이 두고 방의 나무바닥에 앉아, 커다란 절구를 무릎 사이에 끼고 있었다. 절구 안에는 현미(玄米)가 들어 있었다. 현미를 절구공이로 찧어 쌀겨를 제거하고 있는 중이었다. 위장을 위해서라도 아버지는 쌀겨가 없는 흰쌀밥을 먹어야 했다.
"아빠, 드디어 적이 다가왔어요." 나는 아버지에게 그렇게 말하고, 방바닥에 앉았다. 방바닥 판자는 서늘하고 차가웠다. 나는 아버지의 서툰 손놀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소문은 나도 들었어." 나는 아버지의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를 듣고 신기했다. 비상시인데도 어떻게 이렇게 차분하게 쌀 따위를 찧고 있을까, 하고 아버지에 대해 짜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왜 아버지는 누구나 하는 것처럼 짐을 싸서 피란갈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일까.
아버지는 원래 건강한 편이었는데 그때는 이미 여위어 있었다.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배급받은 두 홉의 쌀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나날을 보내는 사람이 돼 있었다. 쌀겨를 제거하면 두 홉의 쌀은 한 홉 반이 되지만 물을 많이 넣으면 그럭저럭 일주일 정도는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감자와 채소 등 찬거리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시골 사람들은 물건을 비싸게 팔려고 했다. 10월 10일 공습 이후 시골 사람들은 심성이 변한 것처럼, 강경해지고 거만해지기까지 했다. 예전에는 동네 사람들이 촌놈이라고 깔보았지만 이제는 입장이 반대였다.
아무것도 먹거리가 없는 도시 사람들은 시골을 돌며 먹을 것을 찾아 헤맸는데, 시골에서는 그 모습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나는 아버지가 뭘 먹고 지낼까 걱정이 되었다. 밖에서 짐차(荷車)가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다.
"아빠, 저 소리 들려요?"라고 나는 말했다. 모두들 북쪽 구니가미(国頭)로 피난 가고 있어요. 시골은 안전하니까 아빠도 피란가는 게 어때요?" 아버지는 안경을 벗고 처음으로 내 얼굴을 보았다. 잠시 손을 멈추고,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돌아온 거겠지"라고 물었다. "그래요"라고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더 걱정이 된다" "걱정하지 마세요. 적이 육군병원을 공격하지는 않을 거예요, 병원을 공격하는 것은 국제연맹의 규칙에 위배된다고 들었어요." (*国際連盟은 1945 10 24 발족한 国際連合의 전신)
아버지는 절구통 속의 쌀을 체에 걸러가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때, 저녁을 같이 먹을까?" "우리(히메유리)는 자정까지 하에바루(*南風原-나하 동쪽지역)까지 가야 해요" 라고 내가 대답하니, 아버지는 램프를 들고 나를 집밖까지 배웅하러 나왔다.
멀리서 비행기 소리가 났지만 아버지는 램프 불을 끄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 구니가미(国頭)로 피란 가시는 거죠?" 라고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하며 물어보았다. "구니가미로 가야만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고 아버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키나와는 좁아. 구니가미로 도망쳐 봤자 특별한 은신처가 있을 리도 없고...” “하지만” “잘가거라, 몸조심해" 나는 아버지와 헤어진 뒤 무심코 집 쪽을 뒤돌아 봤다. 푸른 달빛에 비친 우리 집은 마치 무덤 같아 보였다.
琉球のひめゆり(1987 与那城信子) 10
류큐의 히메유리(1987 요나조 노부코) 10
● 第八章 チルの旅立ち(思い出の記)
제8장 치루의 인생 여정 (추억의 장)
나미노우에구(波上宮)은 동중국해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 그 바로 서쪽에 "쓰지(辻)라는 유곽이 있었다. 나는 가끔 그곳을 지나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항상 어른과 함께였고, 일행 어른도 그곳을 지날 때는 잰걸음으로 걸었기 때문에 나는 쓰지의 거리를 자세히 볼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내 기억에는 쓰지가 아주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쓰지에는 작은 건물이 여러 개 늘어서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건물들은 처마가 계속 이어져 있었다. 건물은 모두 비슷하여 콘크리트를 깐 현관이 있었고, 안에는 폭이 넓은 계단이 있어 그 계단을 올라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계단 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가 큰 목욕탕에서 들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들 사이의 좁은 뒷길은 늘 습기가 있고 김이 서리고 습한 냄새가 났다. 물소리에 섞여 사람들 목소리도 들렸다. 그 사람들의 목소리는 거칠게 들렸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일하는,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목소리로 생각되었다.
나는 "유녀(女郎)"라고 불리는 여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의아했다. 어디에도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지저분하고 살풍경한 입구, 거친 목소리와 물소리, 그 이면에는 뭔가 아름답고 멋진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아름다운 광경은 눈에 띈 적이 없었다.
아이들이 유곽에 대해 무언가를 보고 듣는 것은 일종의 금기가 되어 있었지만, 그런 어른들의 생각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내에서는 유녀의 모습을 가끔 볼 수 있었다. 옅은 화장을 하고 눈썹을 곱게 그리고 부풀린 머리를 위로 감아 올려, 오키나와풍으로 묶어, 굵은 은비녀를 꽂고 있었다.
축제 때는 오키나와 특유의 화려한 색상의 의상을 입었다. 노란색 바탕에 커다란 파란색과 검은색 무늬를 넣은, 빈가타(紅型:오키나와전통염색법)기모노는 그녀들을 눈부시게 빛나게 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검은색이나 파란색 바탕에 흰색 무늬가 들어간 간소한 기모노를 입고 다녔다. 일반 여자들과 달리 오비(帯:띠)를 가슴 가까이 높게 매고 있었다.
그런 띠 묶는 법이 그녀들로 하여금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마른 몸매로, 젊어 보이게 했다. 이들은 흰 버선을 신고 두꺼운 샌들이나 옻칠한 나막신을 신고 있었다. 사람들은 길을 비켜 서서 그녀들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유녀들을 정말 아름다운 여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친구들과 나미노우에(波の上)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유녀를 본 적이 있다. 그녀는 나미노우에구(波上宮)에 참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밤과자를 손수레 에서 사서 비둘기에게 주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상체를 약간 비스듬히 기울이며 땅위에 쪼그려 앉은 모습은 매우 품위 있어 보였다. 회색 비둘기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과자를 쪼았다.
비둘기가 과자를 물 때마다 그녀는 하얀 이빨을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였지만 그녀가 미인이라는 것은 알았다. 여러 어른이 멈춰 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 얼굴색이 너무 하얘." 나는 얼굴색이 하얀 것을 자랑하는 하루코(晴子)에게 속삭였다. "너보다 훨씬 하얘."
유녀는 내 속삭임이 들렸는지 고개를 들어 힐끗 우리를 보았다. 그러나 곧 다시 눈을 내리깔고 비둘기 먹이를 계속 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쳐다봐서 어떤 생각이 들까 궁금했다. 왜 미소를 계속 짓는 것일까. 볼이 빨갛고 눈을 들지 않는 것은 부끄러움 때문일까.
그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입술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비둘기조차 눈치채지 못할 것 같은 공허한 눈빛이었다. 나는 "치루"라는 이름의 유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치루는 오키나와 방언으로 원래의 의미는 츠루(鶴)이다.
치루는 북쪽 구니가미(国頭)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첫째 아이었다. 아버지는 숯을 굽는 일로 고생하며 가족의 생계를 지탱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부지런히 일을 했다. 집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고구마밭으로 나가 하루 종일 일했다. 돼지가 두 마리 있었고 그 뒷바라지는 치루가 했다. 여덟 살 때 치루는 벌써 한 사람 몫의 일꾼으로 집안일을 꾸려나가고 있었다. 가족들이 아직 일어나기 전에 고구마를 삶기 위해 불을 지폈다.
그러고는 1km나 떨어져 있는 마을 우물까지 물을 길으러 갔다. 장작불 지피는 일은 아침의 차가운 몸을 따뜻하게 해주기 때문에 좋아했지만, 물을 길러 가는 일은 싫었다.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양 어깨의 지게봉에 매달고, 동상에 걸리고, 피도 흐르는 발로 걷는 것은 무척 괴로웠다. 치루가 여덟 살 때 숯가마로 일하러 가는 길에 아버지가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다리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게다가 운 나쁘게 가슴도 아파 마침내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일가족은 일손을 잃었고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다리를 다친 직후 돼지를 한 마리 팔았다. 그리고 또 나머지 한 마리를 처분할지 여부가 큰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남은 돼지를 처분할 수는 없었다. 오키나와 농가에서 돼지는 경제적으로나 사회적 지위에서 소중한 존재였다.돼지를 파는 것보다 딸을 파는 편이 나았다.
어느 여름 오후 나하에서 뚱뚱한 중년 여자가 찾아왔다. 그 여자는 보자기 꾸러미와 기름종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부모님이 그 손님과 이야기하는 동안 치루는 동생들과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곧 어머니가 치루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치루는 집으로 들어가 나하에서 온 여자 손님과 대면했다.
손님은 치루를 보고 바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일 또 올게" 라며 그 여자 손님은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치루는 학교를 쉬었다. 여자 손님이 다시 와서 이불 위에 일어나 앉아 있는 아버지와 상의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치루를 옆방으로 불러 노란색 기모노를 입히고 보라색 오비를 둘리고 두꺼운 소리(샌들)를 신겼다.
치루는 무슨 일인지 의아해했지만 평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기모노와 오비는 여자손님의 보자기에서 나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런 멋진 것을 아직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손을 대는 것도 두려운 생각이 들었지만 보라색 오비를 딸에게 감아 주면서 "치루야, 이제 하얀 쌀밥을 많이 먹을 수 있어." 라고 말했다.
여자손님은 치루를 데리고 나섰다. 치루의 아버지는 병 때문에 집안에 그대로 있었지만, 어머니는 무너져 가는 울타리까지 배웅하러 나왔다. 울타리 옆에 서서, 딸이 붉은 부용이 핀 담 너머 길따라 사라지는 것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치루와 여자가 산골집에서 마을에 도착한 것은 점심 조금 전이었다. 산길의 이슬은 이미 마르고 길에는 먼지가 일고 있었다. 땅도 초목도 열기를 띠고 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학교에 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은 조용했다. 치루와 여자는 계속 걸었다. 치루는 짚신만 신다가 난생 처음 소리라는 신발을 신었기 때문에 걷기가 불편했다. 기름종이로 만든 양산 냄새가 강렬해 현기증이 났다.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의아해하며 치루는 고개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보았지만,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치루는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기차를 탔다. 치루가 난생 처음 타본 기차이자 마지막으로 타본 기차이기도 하였다. 기차는 해질녘에 나하에 도착했다.
처음 2~3년, 치루는 쓰지의 유곽에 살면서 허드레 일을 하는 한편, 유녀가 되기 전의 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이 몇 년 계속됐는지, 처음 손님을 받은 게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다.
치루는 열여섯 살 때 한 손님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치루의 운명이 정해졌다. 손님의 이름은 도나키(渡名喜)라고 했다. 웃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 쉰 살의 남자였다. 턱수염은 말끔히 깎고 있었는데, 모양 좋은 곧은 코 밑에는 작은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치루는 그 손님이 나하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 중 한 명이라는 것을 몰랐다.
치루는 또 도나키에게는 세 명의 아내가 있는지도 몰랐다. 세 번째 아내는 결핵을 앓아 이미 이 세상에 없었지만, 첫째와 둘째 아내는 아직 건재했다. 도나키는 치루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치루와 관계를 한 후 일주일 만에 결혼을 하였다. 첫째 부인은 치루를 보고는 눈꼬리를 치켜 세웠다.
정처(正妻)는 정식으로 결혼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과시하고 있었다. 세상의 이목 때문에, 유녀 출신 여자와 한 지붕 아래 사는 것은 체면에 관계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의 뜻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집의 규칙은 모두 남편 한 사람이 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처에게는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열 살 된 여자아이였다. 도나키에게는 남자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치루를 집에 들인 것은 남자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서라는 소문도 있었다. 정처는 남자처럼 어깨가 크고 근육질의 팔을 가지고 있었다.
몸집은 컸지만 목소리는 작았다. 시종일관 기침을 하고 있었고, 누런빛이 도는 피부가 이미 병에 걸렸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둘째 아내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절 근처의 도나키가 지어 세를 주고 있는 집 중 하나에 살고 있었다. 사업가적 재능의 소유자로 곳곳에 산재한 도나키 집안의 셋집을 관리하고 있었다.
치루는 이층 구조의 별채에서 살았다. 안채에는 정처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별채 살이는 치루에게는 다행이었다. 두 여자를 만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치루는 별채를 나와 안채에 갈 기회가 별로 없었다. 안채의 방 하나에 두 개의 불단이 있는데, 하나는 남자의 조상, 또 하나는 여자의 조상의 것임을 알았다.
정처는 매일 아침 그 불단 앞에 밥이 든 밥그릇을 두 개씩 올리고 향을 피우며 절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정처 이외의 사람이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는 것을 치루는 알고 있었고, 어두컴컴한 방이 징그러워서 그곳에 접근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치루는 또한 어둡고 공기가 통하지 않는 안쪽 방도 피하고 있었다.
안쪽 방 중 일부는 헛간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나프탈린이나 기름종이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 밖의 방은 비어 두고, 병실로 배정되어 있었다. 도나키 집안의 조상은 이곳에서 병의 치료를 받거나 임종하기도 했다. 치루는 그 런 사연이 있는 방이 정처 관리에 맡겨져 있는 것에 아무런 불만을 제기할 이유가 없었다.
남편은 대개 부재중이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당시 오키나와에서는 어디나 그렇지만 점포 같은 것은 없었지만 도나키가 둘째 아내에게 뭔가 일을 시키고 있는 것은 누가 봐도 분명했다.
치루는 거의 외톨이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식사를 할 때만 별채를 나와 안채로 갔다. 식사 자리는 부엌 옆의 작은 안방이었지만 그곳에는 음식은 얼마든지 있었고 냄비나 솥에서 마음껏 그릇에 담을 수 있었다. 사용하는 밥그릇과 접시에도 초승달이 세 개 마주한 도나 키 집안의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었다.
고독한 치루에게 타인의 친절은 기뻤다.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나이 든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의 일은 찻물을 끓이는 솥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고 주인의 커다란 네모난 담뱃불용 화로에 불씨가 끄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치루는 그 허리 굽은 할머니가 짚신 끄는 소리를 내면서 토방을 들락거리는 것을 넌지시 바라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치루를 볼 때마다 하나밖에 없는 이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또 남자 하인 중에 몸집이 크고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짧게 깎은 머리를 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을 마츠(松)라고 했다. 마츠는 치루를 친근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치루는 마츠의 이러한 눈길을 별로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치루는 남자가 쳐다보는 것에 익숙해 있었고 마츠가 쳐다봐도 별로 나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츠는 일하는 틈틈이 별채에 가까운 채소밭으로 나왔다. 그때 치루는 채소밭으로 나가 마츠에게 말을 걸었다. 마츠는 도나키 집안에 대해 많은 것을 들려주었다.
"주인님은 마음씨가 착한 분입니다"라고 마츠는 자기말에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기 시작했다. "10년 전 저는 밥도 먹을 수 없는 처지였는데 주인님께서 거두어 주셨습니다. 나 같은 처지의 사람을 돌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
마츠는 머뭇거리며 자신이 아쿠히토(阿久仁) 섬 태생이라고 고백했다. 츠루는 그 사실을 이빨 빠진 노녀로부터 듣어 알고 있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쿠히토 출신의 사람들을 멀리하였다. 아쿠히토 사람들이 소나 말을 도축하는 백정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인 것 같았다.
마츠는 도나키 집안 사정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것은 폐결핵이었다. 셋째 아내는 그 병으로 죽었고, 정처 또한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폐병에 걸리는 것은 공기가 나쁜 방에서 기거하기 때문이라고 마츠는 말했다. "당신도 조심하세요. 결코 안쪽 방에는 접근하지 말아요"고 마츠는 치루에게 충고했다.
남편이 집에 머물 때면, 치루는 사연이 있는 어두운 방도, 무서운 정처의 눈길도 잠시 잊었다. 저녁 식사 후 남편은 인근 목욕탕에서 목욕을 한 뒤 통풍이 잘 되는 별채 2층으로 차를 나르게 했다. 둘이서 맥주를 즐기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다. 여름도 끝나가고 있었지만 별채 근처에 있는 나무에 핀 꽃은 지금이 한창이었다.
밤이면 달콤한 꽃 냄새가 물씬 풍겨와 콧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맑은 밤공기를 타고 이즈미자키바시(泉崎橋) 다리 건너 이시죠(石門)거리로부터 연극의 북소리가 들려왔다. 치루는 샤미센을 타거나 커다란 나팔이 달린 축음기를 틀어 남편을 즐겁게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대화는 그다지 하지 않지만 도나키는 치루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치루의 장점 중 하나였다. 치루의 수줍은 모습을 보먼 도나키는 마음이 온화해진다. 수치심 같은 소녀스러운 감정은 다른 두 아내들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바라는 것은 남자아이를 낳는 것 뿐이었다.
겨울이 되어 바람이 불면, 도나키는 추위를 막기 위해 장지문과 덧문을 굳게 닫았다. 도나키는 젊은 아내와, 같은 비단 솜옷을 입고 도자기 화로를 가운데 두고 마주했다. 화로에 손을 얹고 잠시 세속에서 벗어나 지내는 시간을 도나키는 즐겼다. 때때로 두 사람의 손이 닿았다.
치루는 남편의 굵고 짧은 손가락의 각진 손톱과, 자신의 예쁘게 뾰족한 길쭉한 손톱을 비교하며 재미있어했다. 유녀 시절 치루는 손금 보는 법을 손님으로부터 배운 적이 있었다. 어느 날 밤 치루는 남편의 손금을 보겠다고 말했다.
"손 좀 보여줘요"라고 치루는 남편의 손을 잡고 검지로 생명선을 따라가며 말했다. "당신은 89세까지 수를 할 손금입니다." "89세? 왜 89인가. 아흔 살이면 딱 좋잖아." 도나키는 웃으며 치루를 놀렸다.
"왜냐하면 손금에 그렇게 써 있는걸요." 치루도 웃으며 대답했다. "너의 손도 좀 내어봐"라며 그는 치루의 오른손을 잡고 분홍색으로 빛나는 손바닥을 위로 하여, 손바닥의 생명선을 조사하는 흉내를 냈다. "나는 88세까지 살 거예요" 라며. 치루는 손을 움츠리며 미소를 지었다
"88인가. 내가 일 년 더 산다는 것인가. 그건 불공평하다. 그런데 왜 너는 그렇게 겸손하니?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산다는 걸 넌 알고 있을 턴데." 치루는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나키는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했다.
"너는 아직 어리다. 나는 이제 중늙은이다. 내가 죽은 뒤 너는 몇 년이고 몇 년이고 살아야 한다. 치루는 남편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그녀도 진지해졌다. "당신이 없어지면 나는 살 수 없어요" 라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나키는 화로 위에서 손을 뻗어 치루의 얼굴을 자신의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치루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보았다. "치루, 너도 나도 행복하게 오래 살 수 있을 거야."
치루가 도나키 가문에 온 지 2년이 지났다. 정처의 병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오후가 되면 열이 높아지는 것이었다. 그녀는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에게 화풀이를 했다. 도나키에 대해서도 불평하는 일이 많아졌다. 희귀한 약초를 구하기도 하고, 점을 보기도 했다.
도나키는 그녀의 욕심을 무엇이든 들어주었지만 가능한 한 그녀를 멀리하고 있었다. 피할수록 그녀는 집요해졌고 때로는 격노했다. 도나키가 치루의 별채로 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눈에 불을 켰다.
"두고 봐. 그 유곽 출신도 도나키 집안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 여자도 분명 피를 토하고 죽을 게 틀림없어." 그날 치루는 자신이 임신했음을 남편에게 고했다. 도나키는 대를 이은 기쁨에 넘쳐 맥주가 든 컵을 들고 치루에게도 건배하자고 권했다. 하지만 치루는 응하지 않았다.
“좀 몸이 안 좋아서요”라며 거절했다. "알았어, 알았어, 임신한 몸이니까 무리하지 마"라고 감싸듯하며 치루의 건강을 걱정해 주었다. "치루, 뒷밭 쪽으로 나가 햇볕을 잘 쬐어라.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거야" 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치루는 깨끗한 공기와 태양을 찾아 뒷밭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말동무 마츠가 있었다. 마츠는 밭을 손질하면서 그곳에 심어져 있는 뽕나무에 대해 이야기했다. 치루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기도 했다. 유녀가 되기 위해 집을 나선 것이 여덟 살 때였고, 그 이후로 가족들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편지가 오지 않았다. 가족들은 치루에 대해 미안해 했던 것일까. 치루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던 것이다. 치루의 임신 사실이 알려지자 정처의 치루에 대한 반감이 눈에 띄게 심해졌다.
어느 날 이빨 빠진 노파가 치루에게 주기 위해 부엌 선반에서 임산부 구미에 맞는 먹거리를 꺼내는 것을 목격하고 화가 난 정처는 옆에 있던 한 자나 되는 긴 말린 가다랑어를 손에 들더니 힘껏 노파의 허리를 후려쳤다. 치루는 별채 2층으로 도망쳐 도나키가 돌아오는 다음날까지 숨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정처가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해 태풍이 몰아친 뒤 마츠가 우물에 떨어진 독사을 건져 올리는 것을 도나키 일가가 모여 보고 있은 적이 있었다. 왜 뱀이 우물 속으로 떨어졌는지 분명치 않지만 아마 바람에 날려와 빠진 것 같았다. 마츠는 대나무로 짠 납작한 바구니를 우물에 내려놓고 독사를 건져 올렸다. 구경꾼들은 독사를 보고 겁에 질린 나머지 멀리 비켜갔다.
"이놈은 수컷입니다. 아마 근처에 암컷이 있을 거예요.” 마츠는 뱀의 머리를 긴 막대기로 누르며 말했다. 모두는 그 근처에 독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고 목을 움츠렸다. 치루는 새파랗게 질렸다. 그런데 정처는 마츠의 말을 듣고 비정상적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츠야, 암컷도 잡아서 산 채로 가져다 줘.” “하기는 해보겠지만 산 채로 잡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독사는 보통 뱀과는 다르니까요.” 정처는 독사 포획이 목숨을 건 위험한 일인 줄을 알고 았으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산 채로 잡와, 산 채로..." 라고 명령하면서 기모노에 입을 대고 강하게 기침을 했다.
그날 밤 치루는 조산을 했다. 치루는 가쁜 숨을 쉬며 신음하더니 기침이 나면서 더 힘들어졌다. 그녀는 숨쉬기 편하도록 일어켜 달라고 했다. 정처는 치루를 별채에서 안채 안쪽 방으로 옮기게 하고 산부인과 의사와 산파를 불러주었다. 마츠는 도나키를 찾으러 나갔다.
도나키는 두 번째 부인과 함께 월말 월세 수입을 계산하던 중이었다. 도나키는 서둘러 돌아와 치루가 자고 있는 옆에 잠시 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불단이 있는 방으로 아침 식사를 가져오게 하고 의사와 아침 식사를 함께 했다.
"저애는 이제 죽겠구나"라고 의사에게 물었다. 도나키는 화가 난 듯 청동제 담뱃대의 꼭지를 커다란 담배재떨이 쟁반에 두드려 재를 떨어뜨렸다. “글쎄요. 더 이상 나을 가망은 없을 것 같습니다. 난산으로 죽던지, 아니면 폐가 망가지거나 할 것이 분명합니다. 임신이 폐의 병을 가장 나쁘게 한 것 같습니다. 치루 같은 여자는 아이를 갖지 말았어야 했는데."
치루의 신음소리가 방 두 개 너머로 들려왔다. 도나키는 담뱃대에 담배를 다시 채웠다. "치루는 좋은 애다. 하지만 나는 아이도 갖고 싶다" 고 도나키는 한숨을 쉬었다. "그건 알겠지만 여자나 아이 중 하나로 정하지 않으면 둘 다 살 수 없게 돼요" "아이는 사내일 수도 있어요. 그러면 도나키가의 대를 이을 수 있다" 고 도나키는 중얼거렸다.
"빨리 둘 중 하나로 결정하세요. 엄마의 목숨인가, 아니면 아이인가. 시간이 없어요. 빨리 처치하지 않으면 둘 다 끝입니다." "조만간 산모가 폐병으로 죽는다는 것은 확실하단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 아이를 살려줘. 남자든 아니든 아이에게도 태어날 권리가 있다. 만약 남자가 태어난다면 언젠가 큰 일을 해줄지도 모른다.” 의사는 도나키의 말을 따랐다. 치루는 죽었다. 태어난 아이는 남자였다. 그가 나의 아버지였다. ᅳ7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