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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無等山1186.3m)
<중봉에서 바라본 무등산의 모습>
도립공원 무등산은 일명 서석산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거대한 무덤처럼 멀리서보면 날카롭지 않고 무덤덤하게 보여 이 지방 사람들에게는 살아도 이 산기슭에 살다가 죽어서도 이산에 묻히므로 무덤산 이었고, 살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서석대, 입석대, 규봉암등 거대한 주상절리의 암석미로 천연 신전과 같은 제단역할을 하고 있어 소원을 빌기 위해 이곳에 찾아와 밤낮 굿판이 벌어졌던 민간신앙의 성지 무당산 이었다. 이로써 무덤산, 무당산등을 음역한 것이 무등산이다. 한편, 높이로 보나 몸집으로 보나 이산에 비길 만한 산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때문에 지리산 서쪽에는 더할 나위 없이 높이 경쟁을 할 만한, 이 보다 더 높은 산이 없어 명실 공히 호남의 이정표가 된다.
서쪽으로 광주와 북으로 담양 동남으로 화순 땅과 경계를 이루며 호남정맥의 고리역할을 하는데 정상에는 군사시설물이 있어 극히 특별한 날에 제한적으로 출입이 되므로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상을 밟아 보기가 쉽지 않다. 평소 정상 역할을 하는 서석대에 서면 서쪽으로 아래에 광주시가지가 눈 아래 내려다보이고 서해가 보이며 동으로는 지리산 노고단이 보이고 남으로는 월출산이 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남해도 보인다. 봄의 진달래와 가을의 억새 그리고 겨울에 설경은 가히 환상적이다.
광주시가지를 벗어나 무등산 품속으로 파고들면 곧장 숲이 좋아 그윽한 풍치가 펼쳐지는 충효동, 이곳에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장군의 사당인 충장사(忠壯祠)가 있고, 인근에 환벽당(環璧堂)과 취가정(醉歌亭)이 있으며, 가사문학의 산실로 무등산을 바라보고 앉은 식영정(息影亭)의 풍치를 노래한 송강가사의 “星山別曲(성산별곡)”의 무대와 인근에 조선시대 대표적인 원림(園林)으로 알려진 소쇄원(瀟灑園)등이 있으며, 이 산 자락에는 충장공 김덕령장군을 비롯하여 의병장 제봉 고경명 장군 송강 정철, 우암 송시열, 정암 조광조, 눌재 박상, 석주 권필, 그리고 방랑시인 김삿갓 난고 김병연선생이 화순 땅 동복에서 방랑생활을 마감하고 별세하기도 하는 등 수다한 인물들과 인연을 갖고 있다.
무등을 타고 무등산 정상에 오르다
<MBC송신탑 부근에서 바라본 원효사 계곡풍경>
원효사 산장버스 종점이다. 11시20분 오늘 산행기점이다. 원효사 계곡 아래쪽 충효동, 광주시가지를 벗어나 무등산 품속으로 파고들면 곧장 숲이 좋아 그윽한 풍치가 펼쳐지는 이곳에 충장공 김덕령(忠壯公 金德齡)장군의 사당인 충장사(忠壯祠)가 있고, 인근에 환벽당(環璧堂)과 취가정(醉歌亭)이 있으며, 가사문학의 산실로 무등산을 보고 앉은 식영정(息影亭)의 풍치를 노래한 송강가사의 “星山別曲(성산별곡)”의 무대와 인근에 조선시대 대표적인 원림(園林)으로 알려진 소쇄원(瀟灑園)등이 있다.
방금 충장사 앞을 지나왔다. 인근에 취가정은 공의 후손들이 1889년에 세운 정자로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의 문하생이기도한 석주 권필(石洲 權韠1569~1612)의 꿈에 약관 30세로 모함에 의해 옥사한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金德齡1567~1596)장군이 술에 취해 나타나서 억울함을 토로하는 노래 취가(醉歌)를 부르자 석주는 답시를 지어 원혼을 달랬다.
醉歌(취가) 충장공 김덕령 (金德齡1567~1596)
醉哠歌此曲無人聞 (취호가차곡무인문) 취할 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들은 사람이 없네
我禾要醉花月 (아화요취화월) 나는 꽃과 달에 취함도 바라지 않고
我禾要樹功勳 (아화요수공훈) 나는 공훈을 세움도 바라지 않네
樹功勳也是浮雲 (수공훈야시부운) 공을 세우는 것도 뜬 구름이요
醉花月也是浮雲 (취화월야시부운) 꽃과 달에 취하는 것도 뜬구름이네
醉胦歌此曲無人知 (취앙가차곡무인지) 취할 때 부르는 노래여 이 곡조 아는 사람이 없네
我心只願長劍報明君 (아심지원장검보명군) 내 마음은 장검으로 명군께 보답만하고 지고
答詩 (답시) 석주 권필(石洲 權韠1569~1612)
忠貫日月 (충관일월) 충성은 일월을 꿰고
氣壯山河 (기장산하) 기개는 산하를 덮었도다
醉歌於地 (취가어지) 취하여 땅에서 부르는 노래
醒聞于天 (성문우천) 감동하여 하늘에 들렸도다
<중봉에서 바라본 MBC, KBC송신탑>
<중봉에서 바라본 장불재와 KBS송신탑>
잔뜩 찌푸린 날씨다. 기상예보에 번개와 천둥을 동반한 돌풍이 예상된다 했다. 그럼에도 예정대로 산행을 하는 것은 10여 차례 넘도록 무등산 산행을 했지만 한 번도 정상을 올라보지 못했던 터라 단풍절정기에 맞춰 무등산 정상개방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은 만사를 제쳐놓고 왔다. 고속버스에서 내려 시내버스를 타고 이곳 까지 오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만추의 단풍잎은 푹푹 익어 있었다.
여기서 서석대까지는 지난해 12월29일 올랐던 그 길이다. 정상 진입도로를 따라 조금 오르면 늦재 삼거리에서 바람재 방향 도로에 들어서서 좌측 능선을 타고 오르면 동화사 터~중봉~서석대다. 계곡 도로를 따라 오르면 서석대로 쉽게 갈수가 있지만 능선을 타면 관산을 하기 좋아 이 길을 택했다. 능선 동화사 터다. 곧장 비가 올 것 같은데 지금까지 없었던 바람까지 몰아친다. 동화사가 오래가지 못하고 폐사한 까닭을 알겠다.
이곳 소나무 아래에는 나무의자가 여러 개 놓여있어 쉬어가기도 좋다. 원효사에서 올라오는 사람과 증심사 토끼봉을 거쳐 오는 사람들이 만나는 갈림길이 있기도 하다. 혹시 바람이 불면 구름이 벗겨지겠지 싶어 바람을 피해 휴식을 취한다.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데 바람은 그칠 줄 모르고 점점 더 심해진다. 중봉으로 오른다. 내려오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들로 다소 혼잡하다. 방한모를 쓴 사람들이 늘어나고 미쳐 준비 안 된 사람들은 손으로 귀를 가리고 새파랗게 질려 몸 둘 바를 모른다. 문화방송(MBC),광주방송(KBC) 방송탑을 지나 중봉(中峰925m)이다.
<중봉에서 굽어 본 광주시 전경>
무등산에서 상봉 하봉은 없어도 중봉은 있다. 이곳은 무등산 서쪽 일대가 한눈에 조망되고 광주시가지가 내려다보이고 서해로 떨어지는 낙조 전망대의 역할을 해서 무등산조망의 중심에 있는 매우 중요한 봉우리다. 이곳은 1980년 5월18일 난리 통에 입은 상처를 씻으려고 그해 섣달그믐날저녁 10만이 넘는 시민이 운집하여 모닥불 피워놓고 망년회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바람은 더욱 거세져서 두꺼운 구름도 몰고 가서 햇빛이 퍼진다. 무등산 정상부도 잘 보이고 빛고을 광주시가지도 비교적 잘 보인다. 원치 않던 바람도 이처럼 때로는 유익이 될 수 있다. 산 아래는 단풍이 절정인데 바람을 많이 타는 고지대에는 잎이 보이지 않는 한겨울 산행을 하는 느낌이다. 인생살이에도 정치적 지위가 높이 올라가면 바람을 심하게 타기 마련이다.
조선중기 정치가로 급진적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1519년) 때 반대파의 모함으로 유배지 화순에서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한 문정공(文正公)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1482~1519)의 장례식 때 문간공(文簡公) 눌재 박상(訥齋 朴祥1474~1530)의 만시(輓詩)을 생각해본다.
輓詩 (만시)
無等山前曾把手 (무등산전증파수) 무등산 앞에서 손을 붙잡았었는데
牛車草草故鄕歸 (우차초초고향귀) 관심은, 소달구지만 바삐 고향으로 돌아가 네
他年地下相逢處 (타년지하상봉처) 훗날 우리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나거들랑
莫說人間萬是非 (막설인간만시비) 인간세상 부질없는 시비 일랑 논하지 말게 나
<서석대의 풍경>
중봉에서 억새 길을 내려와 서석대로 향한다. 정상진입도로 서석대 입구에는 군 장병들이 안내를 하고 있다. 가파른 길을 올라 서석대다. 서석대는 옛적 무등산의 별칭으로 불렸던 상서로운 바윗돌로 민간신앙의 제단이 있었던 주상절리인 입석대, 규봉암과 더불어 3대 암석 미를 자랑하는 명소다. 서석대 (瑞石臺1100m)정상이다. 바람은 고도의 높이만큼 강도를 높인다. 일기 불순한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그저 즐거운 표정이다. 몸이 바람에 떠밀려 사진 한 장 카메라에 주어 담기도 쉽질 않다. 항상 여기까지 왔다가 정상을 대신하고 내려갔는데 오늘에야 뜻을 이루게 되었으니 감개무량하다. 부대 임시 개방문을 통과하니 비로소 정상에 오르는 것에 기대에 부풀어 오른다. “부대방문을 환영 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린 또 하나의 철책 개방문을 통해 들어서니 부대안내 장병들의 인사말을 들으며 오르니 곧장 정상개방지역이다.
<서석대 정상에서 바라본 무등산 정상부>
14시 무등산 정상이다. 원효사에서 11시20분에 출발했으니 늦재 삼거리~동화사터~중봉~서석대~정상 5.9km에 2시간40분 소요됐다.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고 바람에 방해을 받고 불필요한 시간을 많이 보내 예정보다 30분 이상 늦었다. 그동안 무등산 정상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무척 궁금했었는데 궁금증을 오늘에야 풀게 됐다. 정상부는 천왕봉(天王峰1186m) 지왕봉(人王蜂1120m) 정상 북쪽에 인왕봉(地王蜂1140m) 등 3개의 봉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인왕봉으로 알고 있는 곳에 지왕봉이라는 간판을 세워 두었다.
지도마다 인왕봉과 지왕봉의 위치가 바뀌어 있기도 하다.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물어 볼 데도 없다. 지왕봉을 북봉이라하고 누에봉을 북봉이라 표기한 지도가 많다. 그동안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아 산행정보도 불확실하다. 하늘과 땅 만을 이야기 할 때는 천지이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있을 경우는 천지인 (天地人)이 아니라 천인지(天人地)라야 순서가 맞다. 그러므로 정상 천왕봉 다음으로 높은 봉이 인왕봉이 된다. 두 번째 높은 봉에 지왕봉이라 표시한 것은 전혀 모르면 믿어 버리겠는데 그렇지 못해서 혼란스럽다. 정상 천왕봉은 바위가 많지 않으나 인왕봉과 지왕봉은 암석이 볼만하다.
서석대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동안 거센 바람은 또다시 구름을 몰고 왔다. 정상전망대에서 동서로 굽어보니 날씨가 잔득 흐려 잘 보이지 않으나 그래도 가슴 후련한데 강한 바람까지 불어대서 한마디로 기통(氣通)찼다. 내가 지리산 정상에 올랐을 때보다 더 높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착시 현상일까. 깎아 세운 듯 기립한 바윗돌을 보노라면 사람이 깎아 만든 돌부처보다도 더 영험하리라고 옛사람들은 믿고 세상사 문제가 있을 적마다 꾸역꾸역 무등산에 올라와 입석 아래서 치성을 드렸을 게다.
노산 이은상 (鷺山 李殷相1903~1982) 선생은 노산문선 무등산 기행 편에서 무등산정상 천왕봉에 오른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지금 비록 외로운 여행이라 내말을 듣는 이는 없을지라도 외쳐 가로되, 천만년 비바람에 깎이고 떨어지고 늙도록 젊은 양이 죽은 듯 살은 양이 찌르면 끓는 피 한줄 솟아날듯 하여라.”라고 소감을 피력하고 그는“입석을 노래하고 입석의 덕을 찬양하였다.”라고 썼다. 무등산 동쪽기슭 화순 땅 동복에서 방랑의 삶을 마감했던 방랑시인 김삿갓 난고 김병연(蘭皐 金炳淵1807~1863) 선생은 생전에 무등을 이렇게 노래했다.
無等(무등)
無等山高松下在 (무등산고송하재) 무등산이 높다더니만 소나무 가지 아래에 있고
赤壁江深沙上流 (적벽강심사상류) 적벽강이 깊다더니만 모래위에 흐르는 물이로다
<무등산 지왕봉>
무등산은 등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 몇 번째 높은 산인가? 몇 번째 큰 산인가? 선 듯 대답할 사람이 없다. 연말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1등, 2등, 3등, 하는 사람들, 나라야 흥하든 망하든 국가발전 국태민안에 대한 소신은 제시하지 않고 선심성 발언만을 쏟아낸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입만 열면 공짜요 반값이다. 결국 국민이 부담해야 되는 것, 속지 말아야 한다. 지도자적 경륜도 검증도 되지 않은 함량미달의 인물들이 불쑥 나와서, 당시 시대적 상황도 모르면서 남의 조상 적 문제를 흠잡는다. “위태하다!” 누가 말하여도 하도 정치판이 시끄러워 국민의 귀에 들리지 않는 요즘이다. “누가 더 유력한가?” 하고 줄 서기에 바쁜 정치인들 먼저 정신 좀 차려야겠다. 무등산은 군사 시설물이 있어 아무 때나 정상에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다. 그러기에 무등산은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안다면 불편하지마는 국가 안보를 위해서 참을 줄도 알아야한다. 나 같은 사람도 국가장래를 걱정하는데 국가경영을 책임지겠다는 사람들이 왜들 이 모양인가? 무등산 아래 올 곧은 선비 석주 권필(石洲 權韠1569~1612) 선생의 시를 생각해본다.
宮柳詩 (궁류시)
宮柳靑靑鶯亂飛 (궁류청청앵란비) 궁궐에 버들 푸르고 푸르니 꾀꼬리 어지러이 날아들고
滿城冠蓋媚春暉 (만성관개미춘휘) 성안에 가득한 벼슬아치들은 화사한 봄볕에 아양을 떠네
朝家共賀昇平樂 (조가공하승평락) 조정에선 모두다 태평세월을 즐겨 축하하는데
誰言危譴出布衣 (수언위견출포의) 누가 일개 선비에게서 위태롭다는 말을 하게했나?
<부대 정문에서 바라본 인왕봉과 멀리 누에봉(송신탑)>
정상관람을 마치고 하산길이다. 정상에서 다시 서석대, 입석대, 장불재 거처 규봉암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서석대 방향은 입장만 허용되고 하산은 부대 정문을 이용해야 된다. 내게는 4km거리를 더 걸어야 되는 매우 불편한 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계로 오늘 개방규정에 따라야한다. 북쪽 정문을 통과하여 흔히 지도에 북봉(北峰)이라 표기된 지왕봉(지왕봉1120m)이다. 암석미가 빼어나서 병사들에게 물어봤더니 신선대란다. 물론 북쪽 지능선 끝자락 북봉에 신선대가 있기는 한 모양이다. 그것 말고는 무등산에서 신선대가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지나쳐 능선 끝에 보이는 통신탑이 보이는 곳이 사람들은 누에 등처럼 생긴 봉우리라 누에봉이라 한다. 오던 길로 못 가게 하는 바람에 계획에 없던 누에봉까지 갔다.
<장불재와 KBS송신탑 (좌측으로 백마능선)>
누에봉에서 2km를 걸어 장불재(長佛峙900m)까지 왔다. 15시다. 여기는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화장실과 주상절리 탐방안내소도 있다. 가까이 한국방송공사(KBS) 방송중계 탑이 있는 이 고개는 광주와 화순의 경계로 옛적 화순사람들이 광주 장보러 넘나들던 고갯길이다. 장보러갔던 가족이 돌아올 때 쯤 마중을 나와 모닥불을 피워놓고 여기서 기다렸고 바람을 타고 불티가 옮겨 붙어 산불이 자주 났다. 그래서 장불재 동쪽으로 안양산(安養山853m)을 거처 둔병재(屯兵峙)로 뻗은 백마능선은 억새밭으로 변했다. 남도 지방에 유난히 고개(재) 이름을 영(嶺)이나 현(峴)으로 표기하지 않고 치(峙)로 표기 하는 경우가 많음은 잦은 왜구들의 침입에서 유래된다. 백마능선은 의병장 김덕령장군이 무예를 연마했던 곳으로 활을 쏘아 놓고 말을 달려 표적지에 가보면 화살이 늦게 도착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입석대의 암석미>
장불재에서 입석대로 오른다. 한두 번 가본 곳도 아닌데 또 다시 힘들여 찾아 오르는 뜻을 누가 알랴!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헐래 벌떡 다급히 걸어 내려오면서 정상으로 갈려면 어디로 가야하느냐고 물어왔다. 이 길로 올라가면 된다고 하자 사람들이 내려가야 된다고 해서 내려오고 있단다. 그런데 또다시 올라가야 된다니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입석대에서 사람들에게 물으니 내려가서 저기 장불재에서 찻길을 따라 계속가면 정상이라 했단다. 맞다. 그러나 오늘 정상개방은 부대 정문이 아니고 서석대에서 입장을 하게 된다. 두 사람에게 물어도 같은 대답이었다면서 내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그는 내려가면서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더니 올라가야 된다고 하자 그제야 다시 올라왔다. 차림새로 봐서 산에 자주 다니는 사람이 아님을 한눈에도 읽을 수 있었다. 무등산아래에 살아도 무등산을 전혀 모르는 그는 무등산 정상 개방소식을 듣고 오늘 큰 맘 먹고 힘들여 올라 왔더니 길을 잘못 가르쳐 주는 바람에 더 힘들어 했을 것이다. 오늘 정상 개방은 09시부터16시 까지다. 입석대에서 서석대까지는 0.5km 거리에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30분은 걸리는데 입장종료 10분전이니 입장은 어려울 것이나 서석대에서 하산하면 될 것이다. 나는 그에게 길을 잘못 가르쳐준 그분들은 절대 고의성은 없을 것이니 너그럽게 용서하시고 원망마시라며 위로를 했다.
입석대(立石臺1017m)다. 입석대는 무등산에서 서석대와 규봉암과 함께 3대 명소로 꼽히는 중생대 백악기후반에 생성된 주상절리(柱狀節理)로 천연기념물 제465호로 지정되어져 있다. 입석대는 천연 그리스신전 같기도 한데 전국 어느 산에서도 보기 어려운 바위기둥에는 희미하지만 각자가 새겨진 것들도 보인다. 이곳은 광주 또는 화순사람들이 민간신앙으로 음식을 차려놓고 소원성취를 비는 기도처였다. 10여 년 전까지도 이곳에는 촛불을 켜놓고 치성을 드린 흔적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입석대 안으로 못 들어가게 하고 있다. 바깥 전망대에서 관람만 할 수 있다. 광주출신 의병장으로 6,0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제봉 고경명( 霽峰 高敬命1533~1584)장군은 무등산에 자주 올라 본 당시 입석대의 분위기를 이런 시로 남겼다.
立石(입석)
矗矗飄香篆 (촉촉표향전) 뾰족뾰족 향불 향기 나부끼고
叢叢揷玉笄 (총총삽옥계) 뭉텅뭉텅 옥비녀를 꽂아 놓은 듯
地靈偏愛寶 (지령편애보) 땅의 신령함이 유독 보배를 아껴
雲氣晝常迷 (운기주상미) 구름기운으로 낮에도 항시 가리누나!
<규봉암>
입석대에서 내려와 다시 장불재다. 지금시각 16시, 대부분 사람들은 하산을 할 시간이다. 여기서 규봉암까지 왕복3.6km 1시간30분은 족히 걸리는 너덜 길이다. 오늘 날씨만 좋았다면 중봉에서 낙조를 감상하려 했었는데 일기불순으로 계획을 변경하여 대신 규봉암을 찾기로 했다. 규봉암을 향해 능선동쪽으로 내려간다. 구름이 없어도 지금쯤 그늘이진 상태일터인데 비를 머금은 구름까지 끼어 어둑어둑하다. 오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길로 계속가면 규봉암을 거처 꼬막재를 지나 오늘 산행기점인 원효사로 쉽게 갈수 있다. 그럼에도 장불재로 다시 올라와 중머리재를 거처 증심사로 하산할 생각이다.
지공너덜을 지나 규봉암(圭峰岩950m)이다. 화순 땅 규봉암(圭峰岩)에 규봉암(圭峰庵)이 있다. 이름 그대로 무등산에서도 홀로 감추어진 외진 곳에 있지마는 암석미가 멋지다. 2008년4월19일에 이곳에 왔을 적에 본 바위틈 사이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는 그림보다 아름다웠다. 수십 명이 한꺼번에 앉아 놀 수 있는 광석대가 있고 죽순처럼 솟은 입석들에는 작심하고 새긴 듯 몇 길 높이에까지 화순군수 등 수다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옛적 화순 땅 이서 사람들이 즐겨 찾던 명소였으리라. 이곳 화순 땅 동복에서 방랑의 생을 마감한 김립(金笠)선생도 다녀갔을 규봉이다. 그렇지만 암자 건물들이 가리워져서 규봉암(圭峰庵)으로 인하여 규봉암(圭峰岩)의 경관을 크게 망쳐놓고 있다.
<규봉암의 입석>
규봉암에서 다시 장불재로 향한다. 규봉암 근처 지공너덜에는 고인돌처럼 생긴 제천단이 5년 전까지 분명 있었는데 오늘 올 때 안보여 갈 때 확인 차 살폈으나 흔적도 없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도 변 한다” 했다. 시대가 변한다고 강산까지 변하는가? 사진자료까지 있는데 어찌된 일인가? 오늘 세 번째, 다시 장불재다. 마른 억새풀만이 바람에 흔들릴 뿐, 사통팔달(四通八達), 무등산에서 가장 번잡한 고갯길에는 아무도 없다. 오늘 중봉에서 낙조를 보려했다. 중봉의 낙조는 석양에 물든 무등산의 풍광과 빛고을 광주 시가지에 드리워진 저녁노을, 상상만 해도 멋지다. 카메라 삼각대와 헤드랜턴과 방한복까지 만반의 준비를 했건만 비구름이 두껍고 바람까지 심해 오늘 계획은 아쉽게도 여기서 중머리 재를 거처 증심사로 하산을 해야겠다. 1.5km 내려와 중머리 재다. 이곳은 증심사, 공원광리소,세인봉, 중봉등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어둑어둑 하기는 해도 길은 보인다. 증심사다. 보안등 불이 켜져 있고 비는 제법 옷을 적신다. 이제부터 찻길이니 우산을 펼쳐든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정확하게 18시다. 오늘은 원효사 산장버스종점~늦재 삼거리~동화사터~중봉~서석대~무등산정상~지왕봉(속칭;북봉)~누에봉~장불재~입석대~장불재~규봉암~장불재~중머리재~증심사~증심사 지구 주차장16.4km 6시간40분 소요됐다. 중봉 낙조를 보지 못하고 산행을 끝내 아쉽지만 다음에 또 다시 오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2012년 11월10일 토요일 구름
첫댓글 두번 갔던 무등산
님의 글을 읽으며 다시
한번 등산을 합니다
잘 쓰여진 산행기 감사드립니다
<漢詩 속으로 >들어 오셨다가 저의 산행기도 찾으셨네요. 잠시라도 座中 山行하세요.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보니 제가 무등산을 가보지 못했음을 입석대를 본 오늘에야 알겠네요.
통제라~
巨村 선생님! 아직 무등산을 못가 보셨습니까?
무등산은 조망이 좋습니다. 걷기도 좋고요.
10월1일을 전후한 억새 필 때와 4월19일을 전후한 진달래,
그리고 설경이 좋습니다.
詩와 사진이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저의 부족한 글은 사진으로,
사진으로 부족한 부분은 글로 보충합니다.
감사합니다. 자주 찾아 주세요.
아래 간단한 내장산행기를 올린 이로서 주신 글의 답글을 대신해 댓글합니다.
익숙한 닉이군요. 반갑습니다.
무등산 바로 아랫마을에서 살고 있습니다^^
竹空 선생님!, 그러셨군요. 대나무는 속을 채우지(慾心) 않아도 곧게 자라는 나무지요?
대나무가 많은 고장이라 닉이 참 어울리십니다.
사시는 곳이 무등산 아랫 마을이라 무등산에 대햐여 너무도 잘 아시겠는데
제가 무등산에 대하여 제대로 소개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無等山 가을 景致 잘 感想했습니다.
저는 無等山의 四季節에 맞추어 다 登山했습니다.
모든 季節이 다 좋더군요.
感謝합니다.漢詩^^*
道光선생님 반갑습니다.
늘 잊지않고 찾아 주시는군요.
자주 산행을 하시니 활력이 넘치시리라 믿습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어릴때 정말 수도 없이 오르던 무등산.
사진 속의 장면들이 선합니다.
울적하거나 무슨 날이거나 갈대가 보고 싶거나 할때 항상 오르던 무등산
걸어서 올라본지 20년이 되버렸네요.
아......
아! 강산이 두번씩이나 변했군요.
고향 뒷동산이 그립겠습니다.
스치는 바람도 잡을 수 없지만
흐르는 세월은 천하장사도 잡을수 없으니
더 늦기 전에 무등산에 올라 보세요.
못가본 무등산을 이렇듯 아름답게 담아서 올려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청량산에도 입구에 입석이 있는데 여기도 입석이 있군요.
건강할때 산행가보고 싶습니다.
저도 산행 경력 25년이 넘도록 못가 본 산이 수두룩 합니다.
도립공원급 이상의 산은 10회 이상 찾아봤고요.
기회가 있으시면 두루 다니시길 바랍니다.
산은 늘 그곳에 있으니까요.
지도 광주사람인디 요로코롬 무등산을 잘 소개해주신께 허벌라게 감사드림니다
강호제현 여러분 광주 무등산에 오셔서 고경명장군 김덕령장군 의 기개와
소쇄원 물염정 식영정등의 선비의 사상을 느~껴 보세요
산행기를 올려 놓고보니 그래도 미흡 함이 보이네요.
밑에서는 잘하는데 무대에 올려놓고 보면 실수가 많이 보이는것과 같다고나 할까요.
이제 눈이 내리는 계절이 왔습니다. 무등산은 설경이 아주 좋습니다.
많이들 찾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