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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기사 스크랩 스크랩 흑룡만리 제주 밭담
geolist 추천 0 조회 197 14.06.09 15: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항공에서 촬영한 제주 동부지역 밭담



길이 2만2000여 km '黑龍萬里' 세계의 보물로.

고려때 경계쌓기 기록… 제주 미학 정수로 평가
국가농업유산 첫 지정·세계농업유산 등재 신청

제주의 상징 중 하나인 밭담이 후손에 물려줄 '유산자원'으로서 보전관리는 물론 브랜드로 활용해 나가는데 분수령을 맞았다. 국가중요농업유산에 이어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주도하는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 신청서를 제출함으로써 발표와 실사, 심의를 앞두고 있다.

제주특별자치도는 보존·활용을 위한 조례 제정과 제주밭담·돌담의 전수조사, 장인 지정·육성, 시범지역 지정, 전통농법·친환경농업, 단계별 관리시스템 정비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를 기획할 종합발전계획 수립에도 나선다.

제주밭담은 제주농경문화를 대변하는 살아있는 역사이자 제주인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유산이다. 한라일보가 연중기획으로 제주밭담을 주목하는 이유다. 제주밭담의 다양한 가치와 보존활용에 방점을 찍고 다양한 기획을 시도한다.

▶규모와 형태=화산분출의 산물인 제주는 돌무더기가 산재하고 바람이 많아 농업 활동을 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이었다. 제주의 돌담은 쌓아 있는 모양에 따라 외담, 접담, 잣벡담(자갈로 성처럼 넓게 쌓은 담)으로 구분짓는다. 위치에 따라서는 축담(초가의 외벽), 올렛담(초가 골목), 밭담(밭 경계), 환해장성(외적 침입 방지용), 원담(갯담, 어로용), 포제담, 산담 등이 존재한다.

화산지대의 돌을 정리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를 만들고, 바람을 막고, 경계를 구분했으며, 우마의 침입을 막는 일석사조의 역할을 해온 것이 바로 제주 밭담이다.

밭담은 제주 전역에 분포한다. 시커먼 제주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돌담을 모두 이으면 10만리까지 간다. 제주대 고성보 교수팀이 지난 2008년 샘플조사를 통해 밝힌 제주 돌담의 총길이는 3만6000여km이고 이 중 밭담은 2만2000여km로 추정했다. 제주 돌담을 '흑룡만리(黑龍萬里)'라 부른 것은 그만큼 돌담의 길이가 매우 길다는 뜻이다. 끝없이 이어진 그 모습이 흑룡의 꿈틀거리는 모습을 닮았다 해 '흑룡만리'이기도 하다. 제주 돌담은 척박한 자연환경과 맞서 싸운 '삶' 자체이며, 제주인의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나 다름없다.

강승진 박사(제주발전연구원 연구위원)는 "제주의 대표적 경관의 하나인 밭담이 국가농업유산으로 지정됐다는 것은 밭담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밭담의 역사=밭담을 쌓았다는 문헌상 최초의 기록은 약 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탐라지에 1234년(고려 고종 21) 제주판관 김구가 돌을 이용한 경계표시를 위한 밭담 쌓기 기록이 전해진다. 하지만 제주 밭담의 역사는 제주농업의 시작과 때를 같이한다. 강 박사는 "화산섬 제주의 척박한 돌밭을 골라 경작지를 조성하면서 밭담은 자연스레 형성됐을 것"이라는 견해다.

농업활동이 척박한 환경에서 개간과 돌 골라내기를 통한 농토 확보와 사유지 경계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부분적 밭담 쌓기가 시작되고 비로소 '흑룡만리'를 형성했다. 밭담이 곡선을 이루고 바람이 많은 해안지역일수록 높게 쌓은 것은 씨앗을 하나라도 더 심기 위해, 그리고 그 씨앗이 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가치와 대표성=제주 밭담은 제주인이 척박한 자연환경과 맞서 일궈 온 삶의 여정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바람결을 따른 곡선, 현무암의 검은색 등은 제주섬의 선과 색을 대표하는 제주 미학의 정수로 평가받는다.

문화관광부는 2006년 한국의 거주생활 부문에서 제주 돌담을 한옥, 온돌, 초가집과 더불어 '100대 민족문화상징'으로 선정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 두차례 제주를 찾았던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제주를 예찬하면서 "도로변의 돌담 집과 집을 구획하는 울담, 밭과 밭을 구획하는 밭담 등은 제주만의 명물"이라고 극찬했다.

▶한계와 과제=제주밭담은 그간 제주 농업을 키워온 유산이었으나 그 가치는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제주밭담의 국가농어업유산 지정에 이어 세계농업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것을 계기로 이제 비로소 그 가치를 재조명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계기로 제주 밭담을 보존하고 다양하게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해 나가야 한다.

제주자치도는 앞으로 관련 조례 제정을 통해 시범지역 지정 및 친환경농업과 연계, 농촌관광 등 3차산업과 연계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해나갈 계획이다

특별취재팀=강시영·강경민·김지은기자

[세계농업유산이란] 

FAO 주도로 2002년 도입 심사 엄격. 11개국 19개소 등재·31개소 후보에
제주밭담, 5월 말 도쿄포럼 발표 예정

세계중요농업유산은 국가 또는 지역이 사회나 환경에 적응하면서 몇 세기에 걸쳐 발달하고 형성돼 온 농업적 토지 이용, 전통적인 농업과 관련돼 육성된 문화, 경관,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세계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차세대에 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002년에 태동했다.

유네스코가 세계유산 등재를 주관하는데 비해 농업유산은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둔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주도한다.

현재 중국의 푸에 통 차 농업, 일본의 사도 따오기 공생농법 등 11국 19개 유산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돼 있으며, 미국, 이탈리아,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 19국 31개소가 후보목록에 올라 있다.

등재 기준은 식량 생계수단의 확보, 생물다양성과 생태계의 기능, 전통적 지식 농업기술의 계승, 사회제도 문화습관, 특수한 토지 수자원관리로 조성된 수려한 경관 등이다. 절차는 국가 추천을 받아 입후보지 등록신청 후 현지 답사와 서류심사,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심사를 거쳐 등재 여부가 결정된다.

통상 2년에 한번 개최하는 심사회에서 등재가 인정되며, 등재돼도 별도의 자금지원은 없다. 등재될 경우 농산물의 브랜드화, 농업관광자원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특히 후손에 대대로 물려줘야할 '유산' 자원으로 보전관리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우리 정부는 지난 1월 오랜기간 형성된 농어업 유산을 보전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청산도 구들장 논과 제주 돌담밭을 각각 국가중요농업유산 1호, 2호로 지정했다. 제주의 밭담이 국가 차원에서 후손에 대대로 물려줘야 할 '유산' 자원으로 조명받는 계기가 될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가중요농업유산 제도는 오랜기간 이루어진 전통적 농경·어로행위와 그로 인해 형성된 독특한 농어촌 경관 등 전승할만한 가치가 있는 농업자원을 국가유산으로 지정해 관리하는 제도다. 

강시영기자 sykang@ihalla.com





▲밭과 밭의 경계를 표시하는 제주밭담은 제주인들이 척박한 제주땅을 일구면서 쌓아온 지혜의 산물이다. 사진은 제주시 애월읍의 밭담. 강경민기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엔 밭과 밭의 경계라고 기록
농사 위해 밭의 돌 골라내며 생긴 산물로 추정

하늘에서 내려다 본 제주는 수많은 조각을 짜 맞춘 듯하다. 사방에 펼쳐진 검은 밭담은 섬이라는 덩어리를 잘게 쪼개며 구불구불 흐른다. 도 전역을 수놓는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경관으로 손꼽힌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밭담에는 제주인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한다. 오랜 옛날부터 지금의 농업활동을 연결하는 고리이자 척박한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아온 제주인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한마디로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밭담의 유래와 역할

제주 전역을 잇는 밭담은 무수한 시간 속에서 형성돼 왔다. 켜켜이 쌓아올려진 돌 위에 시간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그 규모가 점차 확대됐다. 고문헌을 보면 지금으로부터 수 백 년 전부터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그 역사는 제주농업의 시작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땅에 돌이 많고 건조해 본래 논은 없고 오직 보리·콩·조가 생산된다. 그 밭이 예전에는 경계 둑이 없어서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기었다. 김구가 판관이 됐을 때에 백성이 고통 되는 바를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하게 여겼다." 

밭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동문감' 내용을 인용해 제주판관 김구가 밭의 경계 표시를 위해 담을 쌓도록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구가 제주에 재직한 게 1234년(고려 고종 21)부터 1239년까지였으니 밭담이 형성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 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은 "김구 판관은 농토를 뒤덮어 경작지를 침식하고 있던 돌 처리 방안을 고안해 냈다"며 "그 덕분에 땅의 경계표시가 가능해져 강폭한 무리에 의해 백성들의 농토가 잠식되는 폐단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진 관장은 제주지역의 돌문화 개척자인 김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91년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밭담의 역사는 제주 농업의 출발과 때를 같이 한 것으로 예상된다.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제주는 돌무더기가 산재하고 바람이 강해 농업활동을 하기엔 좋지 않았다. 농사를 지으려면 밭의 돌을 골라내는 과정이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진성기 제주민속박물관장이 제주돌문화 개척자인 김구 선생을 기리며 세운 공덕비. 김지은기자
박경훈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은 "사람들의 생활상이 수렵에서 농업으로 바뀌는 시기에 농토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돌을 골라내기 시작한 것을 돌담의 시초라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라며 "전부터 이뤄지던 것을 김구 판관이 본격적으로 제도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농업활동 이어온 제주인의 지혜

제주 돌담 밭에는 거친 자연환경과 맞서 싸운 제주인의 삶의 역정이 녹아있다. 땀 흘려 가꾼 터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최후의 보루'이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밭담은 소와 말, 그리고 강한 바람으로부터 농작물을 지켜주는 축조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방축' 기능은 밭담에 대한 기록을 담은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다. "산에는 짐승, 들에는 가축이 있다. 천백 마리씩 무리를 이루어 다니는 까닭에 밭을 일구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돌담을 둘러야 한다. 사람이 사는 집 또한 으레 돌을 쌓아 높다란 담장을 만들어서 이에 돌담으로 골목이 이루어진다." '남명소승'에 언급돼 있는 것처럼 제주에서는 소와 말을 목장이나 들에 풀어놓고 길렀기 때문에 밭마다 담을 쌓지 않으면 우마로 인해 농사를 망칠 위험이 높았다. 농가에서 마소를 가둬 기르던 한반도와는 다른 제주의 목축문화를 엿볼 수 있다. 

원나라에 의해 제주가 본격적인 목축지대로 변하게 된 13세기 이후에는 돌담의 방축기능이 한층 강화됐을 것으로 보인다. 박경훈 소장은 "고려시대 때는 제주 동쪽과 서쪽 지역에 목장이 운영됐지만 조선시대 때는 10개의 국영목장이 제주 섬 주변을 감싸는 형태가 됐다"며 "그 과정에서 밭담이 도 전역을 빙 두르는 규모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밭담은 척박한 환경에 굴하지 않고 농업활동을 이어온 제주인들의 지혜의 산물이다. 조, 보리 등 씨앗이 날리지 않고 뿌리내릴 수 있도록 사람들은 담을 쌓아 바람을 다스렸다. 토양이 유실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했다. '증보탐라지'에도 돌담의 방축 기능과 함께 방풍 기능이 언급돼 있다. 

#제주 밭담 역사성 지켜야 

밭담은 거친 자연환경에서 제주농업을 지켜온 버팀목이었다. 섬을 뒤덮는 거대한 그물이 돼 바람을 걸러주며 제주인과 함께 수많은 시간을 숨 쉬어 왔다.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의 삶의 방식과 지혜가 녹아있는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광범위하게 형성된 밭담은 농업유산을 넘어서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으로서 제주의 미학을 대표하고 있다. 검은 현무암은 계절에 따라 땅에서 솟아나는 생명들과 어우러지면서 한 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이다. 

박 소장은 "밭담은 제주민중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풍토의 산물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대규모 형성됐기 때문에 한 번 파괴되기 시작하면 짧은 기간 내에 복원하기 힘들 것이다. 이를 보전하기 위해서는 더 늦기 전에 보전과 활용 방안을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강시영·강경민·김지은기자

[전문가리포트]제주 농업의 인클로저 역사 

흔히 인클로저(Enclosure)라고 하면 세계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13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인클로저' 운동을 쉽게 떠올릴지도 모른다. 인클로저는 말 그대로 '울타리를 두르다'는 뜻이다. 

세계적 관점으로 볼 때 제주는 섬 전체가 돌을 이용하여 인클로저화 된 보기 드문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주의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돌담 경관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경작지의 돌담 경관은 가장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제주에서는 경작지에 쌓은 돌담을 '밭담'이라고 부른다.

제주의 농업경관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밭담'이다. 오히려 제주인보다는 제주를 방문한 이들에게 '밭담'은 제주를 대표하는 문화경관으로 인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수백 년 전 제주의 밭담 모습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얼마나 존재하고 있을까? 다행히 제주에 다양한 연유로 거주한 사람들(관리, 유배인, 지리학자)은 그들의 남긴 문장 속에 제주 밭담의 독특함을 남겼다. 

우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밭담의 유래를 알 수 있다. 밭담의 유래는 김구가 제주판관으로 재직시절(1234~1239년) 경작지에 경계가 없어 피해를 입은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쌓았다고 하고 있다. 또한, 남사록(1601년)에는 밭담이 축조 과정을, 남천록(1676년)과 남사일록(1679년) 그리고 독일의 지리학자 라우텐자흐의 코리아(KOREA, 1945년)에는 밭담의 기능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문헌에서는 밭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려주고 있다. 

첫째로, 밭담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13세기에 제주의 농업환경 변화를 재조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둘째로, 밭담의 축조방식이 과거와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밭담이 농업활동에 있어 제주의 자연환경과 밀접하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밭담이 소유지 경계뿐 아니라 우마(牛馬)의 출입방지 및 토양·작물을 보호해 준다고 하고 있다. 이는 밭담이 한반도와는 다른 제주의 목축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기록상으로 볼 때 밭담의 역사는 유럽의 인클로저 운동 시기와 비슷하지만 제주의 선조들은 김구가 판관으로 부임하기 전에도 밭담을 조성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더욱이 제주 밭담이 유럽의 인클로저 운동과 달리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문화경관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농업 환경의 변화와 도시화 등으로 밭담에 대한 위협요인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주 밭담을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하고, 또 세계농업유산으로 등재 하고자 함은 그 동안 도민들이 잊고 살았던 조상들의 지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강성기 월랑초 교사·제주대 초등교육연구소 특별연구원>






▲푸름이 가득한 보리밭과 검은 돌담이 어우러진 풍경이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제주시 외도동에는 보리밭 주변으로 한 줄로 쌓아올린 외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외담은 제주 밭담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유형이다. 강경민기자



지역마다 농업형태·토양·기후 달라 밭담 유형도 저마다
돌 쌓인 형태 따라 크게 한줄 외담과 두줄 겹담으로 구분
걸어 다닐 수 있는 잣길에서 선조들 지혜와 이웃 배려도

제주 밭담은 바람을 걸러주는 '거대한 그물'이다. 도 전역을 수놓은 현무암 물결은 바람을 막아 농토를 보호하고 농작물을 길러냈다. 경작지의 경계를 표시하고 우마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제주농업의 흔적인 셈이다.

제주도 어디를 가나 농경지를 빙 두르는 돌담을 만날 수 있다. 대개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이 한 줄로 이어지는 모습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생김새의 차이가 눈에 들어온다. 지역마다 농업환경이 달리 나타나는 화산섬 제주에선 지역적인 특성이 밭담의 형태를 좌우하기도 한다. 

▶외담·겹담으로 나뉘는 밭담

밭담은 돌이 쌓인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외담과 겹담이다.

외담은 돌의 크기나 모양에 상관없이 한 줄로 쌓아올린 돌담 양식이다. 잡담이라고도 불리는 외담은 제주 밭담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돌을 쌓아 올린 모습이 엉성해 보이지만 강한 바람에도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바람의 특성을 반영해 쌓아올린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외담은 돌담을 쌓은 뒤 한 쪽에서 흔들었을 때 담 전체가 흔들려야 한다고 한다. 바람결을 따라 유연하게 흐르기 때문에 거센 바람에도 안전할 수 있는 것이다.

겹담은 돌을 두 줄로 쌓은 모양새로 접담이라고도 한다. 안팎 두 줄을 큰 돌로 쌓고 그 사이에 잡석을 넣어 완성한 담이다. 다른 경작지에 비해 돌이 많이 나오는 곳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강정효 제주대학교 강사는 "한림읍 귀덕리의 경우 농지에 워낙 돌이 많아 대부분의 밭담이 겹담 양식을 취하고 있다"며 "이러한 사례로 짐작해 봤을 때 농경지에서 나오는 많은 돌을 지속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형성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폭이 넓은 겹담에 포함되는 '잣벡담'도 경작지에서 나오는 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돌의 양이 워낙 많다보니 먼 곳으로 치우지 못하고 옆 밭과의 경계를 구분짓는 돌담에 의지해 쌓은 것이다. 사람들이 위를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잣길'이라고도 불린다. 비가 많이 올 때 농작물을 돌보러 가는 과정에서 통행로 역할을 하기도 하고, 도로에 인접한 밭에서 맹지(진입로가 없는 밭)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선조들의 지혜와 이웃에 대한 배려가 느껴진다.

이 외에도 잡굽담이라는 형태가 있다. 담의 아랫부분부터 약 30~60cm까지 작은 돌로 쌓은 다음 그 위에 큰 돌로 쌓은 담이다. 작은 돌 위에 큰 돌을 쌓아올리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폭을 유지하며 쌓아 올린 모습을 볼 수 있다.




▲겹담의 하나인 잣벡담. 제주자치도제공




▲담의 아랫부분에는 작은 돌을, 그 위에는 큰 돌을 쌓은 잡굽담 모습. 해안지역이냐 아니냐에 따라서도 담을 이루고 있는 돌의 모양이 달라 밭담이 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올망졸망한 둥근 돌로 이뤄진 조천 해안지역 밭담.




▲각진 돌로 쌓은 선흘지역 밭담.




▶지역마다 다른 밭담 모습

작은 섬 지역이지만 제주의 농업환경은 의외로 복잡하다. 여러 시기에 걸친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토양과 기후요소의 지역적 차이로 인해 지역마다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의 지역단위로서 제주 농업을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지역에 따라 밭담의 유형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강승진 제주발전연구원 연구위원은 "제주의 토양은 크게 화산회토와 비화산회토로 나뉜다. 지역마다 땅의 특성이 달라 밭담의 모습도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밭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담을 이루고 있는 돌의 생김새가 다름을 알 수 있다. 주변 지형지질에 따라서도 돌담의 형태 변화가 나타난다.

강성기 월랑초 교사는 "검은 현무암으로 쌓인 밭담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제주지역 군데군데 특징있는 돌로 쌓인 돌담이 발견되기도 한다"며 "조면암 형질의 산방산이 있는 사계리에는 조면암으로 만들어진 돌담이, 성산일출봉이 만들어지면서 퇴적층이 형성된 신양리에는 퇴적암으로 쌓인 돌담이 보이기도 한다"고 했다. 밭담을 형성한 돌의 모양이 농경지 주변 지질에 영향을 받는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해안지역이냐 아니냐에 따라서도 돌의 모양이 달라 밭담의 주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해안지역의 경우 바닷물에 의해 둥글게 다듬어진 돌을 옮겨와 쌓은 밭담을 볼 수 있다. 모서리가 둥글고 넓적한 돌을 긴축으로 앞뒤로 해 쌓아올려 돌들 사이의 접촉 면적이 넓어 틈새가 거의 없는 게 특징이다.

중산간 저지대는 돌담을 이루는 돌들이 거의 직각형태를 보이고 있다. 돌의 부피도 해안가보다도 큰 편이다. 모서리가 각이 진 돌들로 쌓아진 돌담의 경우에는 돌과 돌 사이의 접촉 면적이 크고 긴축을 앞뒤로 해 쌓고 있다. 중산간 고지대에서는 각이 진 돌과 모서리가 둥근 돌을 함께 사용해 밭담을 쌓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지역마다 밭담의 모습이 달리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것으로 그 유형을 단정 지을 수는 없다는 의견도 제기된다.

강정효 강사는 "해안이냐 중산간 지역이냐 등에 따라 밭담의 모양에서 차이를 나타나기는 하나 해당 지역의 돌담이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지역마다의 밭담의 생김새를 하나로 단정을 짓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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